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91
그렇기에 레온의 행동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는 황태자 위에 대신전의 규율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이 대신전에서 좀 더 그가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성녀를 좀 더 편하게 도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레온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제가 대신전에, 정확히는 성녀의 일에 영향력을 가질 방법이 있긴 했었다. 문제라면 그 방법은 성녀의 동의를 받아야만 실행할 수 있고 그녀가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게 분명한 것이다. 아니, 영원히 하지 않을지도.
“결혼이라….”
레온이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방으로 다가오는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전하!”
노크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온은 잠시 눈을 감은 채 얼굴을 찌푸렸다. 행복한 상상 좀 하려 했더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들어와. 무슨 일인… 젠장.”
들어온 부관의 손에 들린 검을 보는 순간 레온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부관의 손에는 장식이 달린 아름다운 검 하나가 천에 싸여 들려 있었다. 대신전으로 올 때, 그가 황궁에 놔두고 온 검이었으며 제국 기사단의 단장들에게만 주어지는 검이기도 했다.
이것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제국에서 그에게 기사단장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레온은 곧바로 황궁이 있는 쪽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다음 몸을 돌려 부관이 내미는 검을 받아 들었다.
“몇 기사단이 이곳으로 온 거지? 무슨 일이고?”
“폐하께서 3기사단을 보내셨습니다. 현재 대신전 근처의 람즈렌이라는 마을 근처에 주둔 중입니다. 정확히는 그곳에서 페르벤의 기사단과 대치 중에 있습니다.”
“페르벤이라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레온은 그제야 어찌 된 일인지를 알아차렸다. 페르벤은 1년 전, 그가 정복한 왕국의 이름이었다. 페르벤의 국왕은 레온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굴욕적인 조약에 서명을 했다. 하지만 페르벤 국왕은 물론 그 뒤에서 눈물을 흘리는 기사들의 눈빛에는 시퍼런 날이 서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신전으로 온 다음 그가 정체를 밝힌 그날 밤, 페르벤의 기사들이 야심한 시각에 그의 방을 습격했다. 날카로운 단검과 스치기만 해도 몇 분 내로 목숨을 잃는 독을 들고.
다음 날 아침,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의 페르벤 기사들을 대신전에 넘기면서 레온은 아무래도 귀찮은 일이 더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것이 지금 터진 것이다.
“페르벤의 병력은?”
“팔백입니다.”
“3기사단의 두 배군.”
수십만의 병사들이 충돌하는 전쟁을 생각하면 팔백은 별 것 아닌 숫자라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일반 병사가 아니다. 훈련된 기사 한 명은 수십 명의 일반 병사보다 더욱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 기사 팔백 명이라.
“신전 기사단 때문에 대신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신도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들어오면 골치 아픈 일이지.”
그렇기에 제국에서는 3기사단을 보냈을 것이다. 대신전 안에서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기 전에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으로 말이다.
“기왕 보내실 것, 좀 더 많은 수였으면 좋았을 텐데.”
페르벤은 팔백. 제국 기사단은 사백.
숫자를 헤아리고 람즈렌의 지형을 떠올리던 레온은 검을 허리에 찼다.
“이틀 정도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페르벤의 기사들이 들었으면 당장 노성을 질렀을 말이었다. 두 배에 달하는 기사단을 상대하는 일이 마치 귀찮은 파리 떼를 쫓는 것과 다름없다는 듯한 말투였으니까.
“아.”
방을 나서려던 레온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러더니 골치 아프다는 듯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전하?”
“먼저 준비해. 곧 나갈 테니.”
그렇게 말한 다음 레온은 책상으로 달려가 펜을 집었다. 조금 망설이는 듯했던 그의 손이 곧 빠르게 움직였다. 종이 위에 짧은 문장이 쓰여졌다.
잠시 대신전을 떠납니다. 길어도 나흘 안에 돌아올 겁니다.
무슨 일로 떠나는지 적을까 하다가 레온은 손을 멈췄다. 이미 카를의 일로 정신이 없는 데다가 또 다른 성녀의 일로 심란할 이벨리나였다. 거기에 괜히 제 일을 더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성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든 이곳에는 라트반이 남아 있다. 그리고 카를은 당분간 제 방을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서 빨리 제 문제를 처리하고 돌아오는 것이 지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전하!”
밖에서 그를 부르는 부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밖에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이미 모든 출발 준비를 마쳤음이 분명했다. 레온은 재빨리 짧은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밖으로 나오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부관이 왜 이렇게 미적거리냐는 듯한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런 시선을 무시한 채, 레온은 편지 봉투를 부관에게 넘겼다.
“지금 당장 성녀의 처소로 가져가. 그리고 성녀께서 직접 받으시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이곳을 출발하도록 해.”
“네? 하지만….”
“시끄러워. 불만은 나중에 들을 테니 어서 출발하도록,”
단호한 레온의 말에 부관은 고개를 숙이고는 곧 복도를 달려갔다. 그런 부관의 뒷모습을 보다 레온 역시 몸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성녀에게 직접 말을 하고 떠나고 싶었지만 이것은 촌각을 다투는 문제였다. 제가 도착하기 전 두 기사단이 충돌하게 된다면 제국 기사단의 피해가 훨씬 커질 것이며 더욱 시간을 잡아먹게 될 것이다.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말 위에 빠르게 올라탔다. 옆구리를 지름과 동시에 고삐를 잡아당기자 거센 말 울음소리와 함께 몸이 흔들렸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각에 익숙해질 때쯤, 레온은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성녀의 처소가 보였다. 달리는 말 위에서 레온은 태어나 처음으로 진심을 담은 성호를 그었다.
당신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성호를 그은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리고 마음에 들진 않지만 라트반이 당신을 무사히 지켜 주기를.’
***
아슬란이 떠난 다음 날 아침, 나는 레온의 편지를 받았다. 급하게 쓴 듯한 글씨로 곧 돌아오겠다고 적힌 짧은 편지에는 무슨 일로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라트반 경에게도 전해 달라는 추신이 적혀 있었다.
레온뿐만이 아니라 그의 부관들까지 전부 다 사라진 탓에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편지를 전하고 돌아간 부관을 붙잡았을 것을.
아슬란이 떠났고 이번에는 레온이 떠났다.
‘혹시 레온도 이리스에게 간 것일까?’
그 역시 이리스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처음 레온이 대신전에 왔던 목적이 생각났다. 그는 성녀를 찾아왔다. 그렇다면 또 다른 성녀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가 이리스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까지 빨리 움직이지는 않을 거라 애써 위로했지만 자꾸 마음은 좋지 못한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라트반은 오늘 아침에도 짧은 인사만 했을 뿐, 여전히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카를 신관이 죄를 인정했다구요?”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대신전의 지하 감옥으로 보내질 것입니다. 규율에 따르면 적어도 10년 정도는 그곳에서 보내게 될 것입니다만 정확한 형량은 과거 처벌의 기록을 좀 더 살핀 다음 정해질 것 같습니다.”
소식을 전한 상급 신관은 그 외에도 많은 말을 했지만 결국 내용은 하나였다.
카를이 죄를 인정했다.
‘그럴 리가.’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왜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한 듯이 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단 그를 지하 감옥의 가장 깊은 곳에 홀로 가두라 명령했다. 머릿속에서 카를과 이리스에 대한 수많은 의문과 걱정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불쑥 그 사이에 라트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슬란도 레온도, 이곳을 떠났다. 그들은 라트반을 믿고 떠났지만 지금은….
‘…내가 그를 믿지 못하겠어.’
***
아슬란과 레온이 떠난지 나흘이 지났다. 아슬란이야 얼마 걸릴지 모를 것 같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레온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러자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왜 아슬란은 돌아오지 않는 거지? 레온은 왜 연락이 없는 걸까?
그 사이에도 대신전은 시끄러웠다. 임시로 신전 기사단을 트리온에 보냈지만 역시 라트반이 가야 한다는 말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다행일까, 라트반은 그 말에는 단호하게 아직 자신은 근신 중이며 지금 같은 때일수록 더욱 나를 경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건너들은 그 말에 안심이 되면서도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여전히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마음이 불안한 탓일까.
“허억…!”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나는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왜….”
이마와 등에는 식은땀이 흥건했고 손은 무엇을 쥘 수 없을 정도로 덜덜 떨렸다. 꿈에는 계속해서 책의 내용이 나왔다. 나는 살아남으려 발악해 보지만 결국 정신을 차리면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 서 있는 꿈이었다. 그렇게 꿈속에서 나는 이벨리나로 죽고 또 죽었다.
한참 숨을 고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서재로 갔다. 어차피 더 잘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꿈을 다시 꾸느니 차라리 계속 깨어 있는 편이 나았다.
무언가 읽을 것이라도 찾아볼까, 하던 나는 서재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
내 방에서 보이는 것과 조금 다른 밤의 풍경을 보던 내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내 방에서 보이지 않았던 중앙 신전의 뒤쪽에 있는 작은 건물의 바닥 쪽에 푸른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분명 그것은 성력이었다.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도 않았다. 내 방의 문을 열었을 때 방 앞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대신 신관들이 앉아 기다리는 의자 옆에는 그녀들이 밖을 나설 때 입는 옷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홀린 듯이 그것을 움켜쥔 뒤 나는 곧바로 건물 끝의 계단으로 달렸다.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했다.
다행히 내가 방을 나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복도 주변으로 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인적이 없는 건물 끝의 계단을 조심스레 걸어 내려왔다. 이미 늦은 시각이었던 데다가 최근 대신전의 뒤숭숭한 분위기 탓에 밤에 밖을 돌아다니는 신관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조금 더 한적해지기를 기다리던 나는 손에 닿는 대로 집어 들고 왔던 신관복을 걸치고 후드로 얼굴을 가렸다.
내 처소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님에도 걸어가는 길이 끔찍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혹시나 누구를 만나지 않을까, 그러다 상대가 나를 알아보지 않을까 하는 긴장감에 거칠게 뛰는 심장 소리만이 귓가를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