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92
“헉… 헉….”
건물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 나자 차가운 밤공기에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바닥에서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성력을 살폈다. 분명 이것은 이 건물 아래의 땅속에서 올라오는 것이 분명했다.
‘이 밑에 뭐가 있길래?’
건물은 얼핏 보면 마치 중앙 신전의 창고처럼 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그 건물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다행히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작은 나무 문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똑똑.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안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문을 다시 바라보자 어둠 속에서도 뽀얗게 쌓여 있는 먼지가 보였다. 나는 다시 주변을 살피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다음 몸으로 문을 밀었다. 단단히 닫혀 있을 것 같았던 문은 몇 번 덜컹거린 다음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갑자기 열렸다.
“읏….”
그 탓에 안쪽으로 나뒹군 나는 고개를 들어 안을 살펴보았다. 창문 하나 없는 공간에는 그저 암흑뿐이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바깥의 희미한 빛이 아니었다면 위아래조차 구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던 나는 다시 몸을 숙였다.
“이건….”
밖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 정신이 없었던 탓에 제대로 보지 않았던 바닥의 돌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벨리나가 보았던 그곳의….”
이벨리나의 기억에서 그녀는 성력이 타오르는 공간에 서 있었다. 이 돌은 분명 그 기억에서 보았던 공간의 벽과 똑같은 것이었다. 마감이 거친 여러 가지 색의 대리석. 그것을 알아차리자 곧바로 짐작이 갔다. 이곳 어딘가에 이벨리나가 보았던 그 성력의 불길이 있는 것이다.
‘땅 밑에서 성력이 올라오고 있었지.’
그리고 이벨리나가 서 있던 곳은 계단을 한참이나 걸어 내려가야 다다를 깊숙한 곳이었다. 분명 이 아래에 성력의 불길이 있는 것이다.
혹시나 누가 다가올까 걱정이 되었기에 나는 재빨리 문을 닫았다. 이제는 정말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암흑으로 가득 찼지만 자세히 살펴보자 바닥의 돌 틈 사이로 올라오는 성력의 빛이 보였다. 나는 기어가듯 바닥에 엎드려 성력의 흔적을 살폈다. 얼굴에 달라붙는 거미줄을 뜯어내며 바닥을 기어 다니다, 곧 커다랗고 네모난 돌의 주변으로 성력이 올라오는 것을 찾았다.
“여기구나.”
돌 위를 더듬어 보자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차가운 쇠로 만들어진 고리가 잡혔다.
나는 주변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을 조심스럽게 밀어낸 다음 일어나 고리를 잡아당겼다.
“흣!”
조금 들썩거리기는 했지만 돌은 쉽게 들리지 않았다. 다시 온 힘을 다해 잡아당기자 그제야 드르륵 끌리는 소리와 함께 돌판이 들렸다.
“허억… 헉….”
간신히 내 몸이 지나갈 정도로 돌을 밀어내고 나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 아래로는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계단이 보였다. 너무나 아득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지하의 어둠 속에서 성력이 아지랑이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내려가 봐야 하는데….’
두려움이 몰려왔다. 저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내려가면 나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애초에 이곳으로 뛰어왔던 것은 지금도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성력 때문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성력을 잡아 보았다. 그것은 잠시 내 손끝에 감기더니 스며들듯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신을 집중하고 성력을 모아 보았다.
“……!”
다시 손끝에 아주 짧게나마 성력이 돌다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만약 이 밑에 성력의 불이 남아 있다면 조금이라도 흡수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계단 앞에 선 다음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 멀리 밑에서 일렁이던 푸른빛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는 분명 이벨리나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곳이 맞다. 하지만 그 기억과 너무도 다른 것이 있었다….
“이게… 전부…?”
기억 속에서 성력의 불길은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들 정도로 거대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벨리나가 보는 도중에 그 크기가 줄어들기는 했어도 여전히 이 공간을 채우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불길은 작은 모닥불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내 성력이 사라졌기에 이 정도라도 남아 있음을 감사해야 하건만, 원래의 모습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일렁이는 불길의 끝부분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아마도 저것이 내가 서재에서 보았던 성력일 것이다.
‘이대로라면 곧 완전히 사라질 거야.’
이벨리나가 이곳에 왔다 간 후로 성력의 불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완전히 그 힘을 잃었겠지. 여기 남아 있는 성력은 이리스가 전부 가져가고 남은 찌꺼기에 불과하다.
그것을 깨닫자 나는 남아 있는 성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미처 이리스 쪽으로 다 넘어가지 못한 이 찌꺼기가 나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 것이었다. 그렇게 성력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화르르르륵!
갑자기 거센 소리를 내며 손끝에 닿았던 성력이 폭발이라도 하듯 거세게 타올랐다.
“읏!”
열기는 없다 하더라도 불어오는 거센 바람과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빛에 나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왜 이러는 거야?’
혹시나 성력이 돌아오는 것일까. 작은 기대가 마음 한구석에 피어올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성력만 다시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두려움 속에 떨지는 않을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이 타오르던 성력의 불길 속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놀란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자 그쪽도 나를 알아본 듯이 덩달아 놀란 얼굴이 되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무척이나 피곤한 듯 초췌한 낯이었고 오랜 시간 굶은 것 같은 비쩍 마른 몸이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서는 놀람과 두려움을 넘어선 호기심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리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녀였다.
이 세계의 주인공. 곧 모든 것을 손에 넣게 될 사람.
내가 이름을 부르자 이리스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 역시 이리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서로의 손이 닿기 직전.
팟!
높이 타올랐던 성력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내 앞에는 조금 전의 모닥불보다도 못한 불씨들만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안 돼! 성력이!”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 남아 있는 불씨들을 필사적으로 잡았다. 그때였다.
“이건….”
“……!”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라트반이 서 있었다.
“…라트반.”
성력에 정신이 얼마나 팔려 있었으면 그가 나를 뒤따라 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까. 성력의 흔적을 붙잡으려 허공을 휘젓던 팔이 툭 떨어졌다. 그가 이 모든 것을 보았다. 불타올랐다 사라져 버린 성력도, 그 성력 너머에서 나타났던 이리스도.
“라, 라트반 이건….”
“설마 성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까?”
“……!”
내가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들켰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끝이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몸 전체가 미친 듯이 떨리며 턱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를 내었다.
들켰다. 내게 더 이상 성력이 없다는 것을 라트반이 알아 버린 것이다. 불길 너머에서 나타났던 이리스의 모습이 생각났다. 라트반도 이리스를 보았을까? 그렇다면 이제 그녀가 자신이 새로이 섬겨야 할 사람임을 알아차렸을까?
“그럴 리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라트반은 당황하는 나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라트반이 나를 직접 끌고 가 사람들 앞에 내던질까? 다시 이벨리나의 최후가 떠올랐다. 안 된다. 여기서 그렇게 죽기는 싫었다.
아니, 정확히는 라트반의 손에 그렇게 죽기는 싫었다.
그 순간 나는 계단을 향해 뛰었다. 나를 잡으려는 듯 라트반이 손을 뻗었지만 나는 곧바로 그 손을 쳐 냈다. 한참이나 걸어 내려왔던 계단은 그사이 더 길어지기라도 한 듯 아무리 오르고 또 올라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 계단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대로 암흑 속에 갇혀 버리는 것일까.
몇 번이고 달리다 넘어졌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영원할 것 같았던 계단의 끝이 보였다. 계단을 모두 올라온 나는 몸을 돌려 아래를 보았다. 내려갔을 때보다 더한 어둠이 아래에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은 어둠이.
저 아래에서 나를 따라오는 듯한 라트반의 걸음 소리가 들리자 나는 다시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밖으로 내달렸다.
방에 도착하자 조금 전 자리를 비웠던 신관들이 놀라 나를 맞이했다.
“성녀님! 언제 밖으로 나가셨…!”
“비켜요!”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소리친 다음 나는 안으로 들어가 곧바로 문을 걸어 잠갔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성녀님!”
“들어오지 마!”
계속해서 문을 두드려 대는 신관들을 피해 나는 다시 방의 안쪽에 있는 문을 걸어 잠갔다. 그렇게 몇 개의 문을 단단히 잠근 다음에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헐떡이는 숨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그대로 폐가 찢어지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의 고통이 밀려왔다.
아픈 곳은 가슴뿐만이 아니었다.
“아… 윽….”
바닥에 엎드린 채 다리를 바라보았다. 계단을 뛰어 올라오면서 다쳤던 것일까. 치마 사이로 드러난 흰 다리에는 여기저기 긁힌 자국과 함께 피가 흘러내렸다. 일어나 보려고 했지만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다리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도망가야 해.’
나는 절뚝이며 걸음을 옮겼다. 떨리는 손은 거칠게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는 오래전에 이벨리나가 넣어 둔 여러 가지 보석들이 있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주머니에 그것들을 집어넣었다.
주머니가 찢어질 정도로 보석을 밀어 넣은 나는 허겁지겁 비밀 통로가 있는 방으로 갔다.
이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지?
‘일단은 멀리 도망가야 해.’
대신전의 입구로 연결되었던 통로가 생각났다. 최대한 빨리 그곳을 이용하여 대신전을 벗어난 다음, 마을에서 마차를 구해 멀리 떠나야 했다. 돈은 보석들로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급한 대로 저번에 내가 갔던 그 뒷골목에서라도 팔아 치울 수 있겠지.
하지만 곧 걱정이 몰려왔다. 그곳의 규칙도 모르는 내가 과연 안전하게 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 그곳을 나서기도 전에 어딘가로 끌려가지는 않을까? 혹시 무사히 나온다 하더라도 대신전의 눈을 피해 잘 도망칠 수 있을까?
그러는 사이 나는 통로가 열리는 벽에 손을 올렸다.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벽을 바라보며 소리치다 깨달았다. 맞다, 이제 나는 성력이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