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93
그러니 성녀의 성력에 반응하는 이 벽도 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읏!”
급하게 몸을 돌리다 다시 느껴지는 다리의 통증에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차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주머니에 밀어 넣었던 보석들이 바닥 위에 어지러이 굴렀다. 나는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방 한구석에 있는 거울에 내 모습이 보였다. 엉망인 꼴을 한 채로, 도둑처럼 보석들을 집어 든 채 도망가려고 하는 여자가 그곳에 있었다.
가짜 성녀.
지금 내게 그 단어만큼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제 거짓이 들통나자 도망치려고 하는 꼴사나운 모습이라니.
책에서 보았던 이벨리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어떻게….”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어떻게… 이런 걸 버틸 수 있었어?”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확히는 아직 이 안에 있을 이벨리나에게.
그녀는 성력을 잃었어도 끝까지 대신전에 남았다. 신관들이 억지로 끌어내는 순간에도 고고한 태도를 잃지 않으며 자신이 성녀라 외쳤다. 책을 읽을 때는 어쩌면 이렇게 뻔뻔하게 버틸 수 있을까 욕하며 그저 그 모습이 밉살스럽다 생각했는데.
이벨리나는 어릴 때부터 살아온 이 대신전이 자신을 죽이려 드는 두려움을 끝까지 버티면서 이곳에 남은 것이었다.
“흐윽….”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죽기 싫었다. 그렇다고 이런 두려움 속에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무서워.
많은 노력을 해 보았지만 결국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나마 시간이라도 남은 줄 알았는데, 멀게만 느껴졌던 미래는 도망가려는 나를 향해 비웃듯이 성큼 다가오고야 말았다.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처럼.
나는 팔에 얼굴을 묻은 채 계속해서 울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지친 몸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는지 천천히 눈이 감겼다. 이젠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내가 도망갈 수 있는 곳은 꿈속뿐인 것을 알았으니까. 그렇게 천천히 잠들어 갈 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다독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굴까. 분명 이 방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정한 손길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를 받은 나는 조용히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
카를은 지하 감옥의 벽을 만져 보았다. 축축한 습기가 그의 손이 지나간 곳에 물방울을 만들었다. 벽을 따라 아래로 물방울이 떨어지자 이끼 위에 앉아 있던 벌레가 놀라 재빨리 구석으로 기어들어 갔다.
카를은 비틀린 발을 들어 구석으로 기어들어 간 벌레를 짓밟았다. 몇 번의 헛발질 끝에 그는 겨우 벌레를 밟아 죽일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의 간수를 맡고 있는 신관들의 걸음 소리였다. 그들은 곧 카를의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물론 카를은 처음부터 이러고 있었다는 듯,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카를 신관님.”
그들이 부르자 카를은 그제야 눈을 떴다. 그리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미안합니다. 제가 기도에 너무 집중하고 있었나 봅니다.”
온화한 카를의 목소리에 신관들의 얼굴에는 안쓰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아, 다름이 아니라… 사실 이곳에 얼마 전부터 수감된 시델이라는 신전 기사가 있습니다. 성녀님을 해하려 했기에 라트반 단장님의 즉결 처분으로 곧바로 이곳으로 보내졌지요.”
“…시델?”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다. 같은 훈련 기사였던 시절부터 라트반을 우러러보며 제 우상으로 삼았던 어린 기사의 이름이 분명 시델이었다. 그런데 성녀를 해하려 해서 이곳으로 들어왔다니?
카를이 어렴풋이 기억난다는 표정을 짓자 신관들이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이곳으로 들어오고 나서 그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습니다. 처음에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거니 했는데 점점 더 헛소리가 심해지면서 이제는 환청까지 들리는 모양입니다.”
“저런. 그런데 왜 갑자기 그의 이야기를….”
“사실, 저희들이 카를 신관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그가 들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반가운 이름이 들렸던 탓일까요. 그가 오랜만에 제정신으로 혹시 신관님을 만날 수 있느냐, 이야기할 수 있느냐 물어 오길래….”
그 말에 카를은 필사적으로 떠오르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죄를 인정한다고 했을 때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혼자 고립되어 있으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 능력은 다른 자를 만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여태껏 계속 그 방에 혼자 갇혀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럴 순 없지.’
제 예상대로라면 지금 이벨리나의 성력은 무척이나 약해졌거나 거의 사라졌을 것이다.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그 방에 갇혀 있기보다는 차라리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지하 감옥이 나았다.
이곳으로 온 카를은 그 누구보다 신실한 신관의 흉내를 내었다. 원래부터 하던 것이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거기에 아무 말도 없이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라며 마치 고난과 시련을 짊어진 성인과 같은 소리를 했다.
신을 부정하고 저주하는 목소리가 가득한 지하 감옥에서 카를은 들어오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유일한 신관이었다. 자연히 그런 그에게 간수들의 대접이 달라졌다.
“그래서 그가 제 옆방으로 오게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래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곧 이곳을 나가거든요.”
“나간다니, 어떻게 말입니까?”
“몸도 몸이지만 병을 얻었습니다. 살날이 그리 오래 남은 것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기에 하늘을 보고 죽을 수 있는 마지막 자비를 얻었지요. 며칠 후면 이곳에서 나가 대신전 구석의 죽음의 집에서 최후를 기다릴 겁니다.”
“…그렇게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겁니까?”
“몸은 괜찮지만 식사를 스스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며칠 내로 목숨을 잃겠지요.”
이제 필요한 정보는 어느 정도 얻었다. 카를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있지 않아 간수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축 늘어진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수염을 가진 남자를 붙잡고 있었다.
“시델?”
“카를 신관님!”
죽은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시델이 얼굴을 들었다. 카를은 그런 그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녀를 시해하려 해서 이곳에 들어왔다고.’
그리고 며칠 후면 이곳을 나갈 자. 죽음을 기다리는 자. 성녀를 싫어하는 자.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신뢰하는 자.
시델은 카를이 원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
결국 나는 도망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도망칠 용기조차 없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침에 그 방에서 눈을 뜬 다음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보석들을 다시 주워 담았다. 그리고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곤 방을 정리했다. 언제 어느 때가 됐든 내가 사라지고 나서도 더 이상 치울 일이 없도록.
신기하게도 그날 밤 이후로 나는 차분해졌다. 두려움도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 어느 순간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도망칠 용기 대신에 체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조용히 찾아올 자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내 각오가 무색하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전은 다시 조금씩 평온을 찾아가고 있었다.
다만 변한 것은 있었다. 라트반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나를 경호하겠다고 찾아온 것은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라트반 경은….”
“최근의 일들로 더욱 면밀히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조사할 것이라….’
내가 왜 성력을 잃게 되었는지 조사한다는 것일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한 다음 잡으러 오겠다는 걸까? 그사이에 내가 어디로 도망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걸까?
머릿속을 채우는 수많은 물음에 잠겨 있을 때 부기사단장이 말을 걸었다.
“들어오기 전, 상급 신관들이 혹시 성녀님께서 괜찮으시다면 대신전 내의 일정을 진행해도 될지 물어봐 달라고 했습니다.”
“…지금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최근에 여러모로 분위기가 흉흉한 데다가 좋지 못한 소문까지 퍼지고 있어서….”
“좋지 못한 소문이라면 또 다른 성녀에 대한 것이겠군요.”
돌려 말하지 않고 곧바로 이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부기사단장은 마치 자신이 그 소문을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그래, 내가 무슨 일을 하기를 원하고 있던가요?”
내가 되묻자 부기사단장이 대답했다.
“이제 곧 세상을 떠날 자들의 기도를 위해 죽음의 집에 들러 주시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집.
이름은 공포스러웠지만 그곳은 그저 더 이상 성력으로도 버틸 수 없는 자들이 조용히 안식을 기다리는 곳이었다. 신관들은 내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날 자들에게 마지막 기도를 해 주기를 바랐다.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일정으로는 이것이 제일 제격이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나를 맞이하려 서 있던 신관들이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죽음의 집을 둘러보았다. 새하얗게 칠해진 건물은 깔끔함 그 자체였다. 게다가 곳곳에는 작은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잘 관리된 정원의 나무 사이로 새들이 재잘거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정원 가운데서는 작은 분수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면서 솟아올랐다. 그런 정원에 햇살이 내리자 그곳은 마치 작은 낙원처럼 보였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는 상쾌한 허브의 향이 섞여 있었다.
“좋은 곳이군요.”
“모두가 마지막 순간까지 평안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신관의 얼굴을 보니 이 세상을 떠나 신의 곁으로 가는 자들의 두려움을 덜어 주는 일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정원을 바라보다 나는 신관들에게 말했다.
“환자들에게는 혼자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들 역시 이렇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 같군요.”
“하지만….”
“대부분 일어날 기력도 없는 자들이라 들었습니다. 혹시 다른 위험할 일이 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래도….”
나는 손을 내저었다. 더 이상 얘기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을 알아들었는지 신관은 알겠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그들에게 물러서 있을 것을 명령하고 정원을 지나 환자들의 공간으로 갔다. 훤히 트인 곳도 있었으며 작은 방으로 나누어진 곳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