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d to Be Lov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29)
r 128 – 128. 약속은 지켜야지 (4)
●
다우드가 처박힌 벽에서 흙먼지가 풀썩 일어나는 사이, 리루가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차려진 밥상을 이렇게 화려하게 걷어차는 것도 처음 보네요.]그런 말이 근처에서 흘러나왔지만, 리루가 눈물 맺힌 눈으로 그쪽을 쏘아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적어도.
자신이나 저 남자나 첫 경험이 이따위여서는 안 된다.
이런 방식으로는, 그냥 범죄랑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그런 무른 소리를 하시면 안 된다니까요?]영체가 그런 말을 꺼내 들었다.
방금 전까지는 무슨 말을 해도 그저 평탄한 기색으로 말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 이 목소리를 꺼낼때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냉기가 깃든 모습이었다.
[그렇게 무르니까 항상 빼앗기는 거에요, 리루.]“뭐?”
[솔직하게 말해볼까요?]영체가 그녀 앞으로 스윽 돌아왔다.
여전히, 눈꼬리가 축 늘어져 느긋해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아까까지 거기에 담겨있던 느긋한 웃음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신, 다른 여자들 앞지를 자신 있어요?]“…”
이미지가 몇 개 떠오른다.
틀림없이, 그녀보다 먼저, 더 깊이, 더 많이, 이 남자에 대해 알고 있는 여자들.
다우드 캠벨을 독차지하려고, 그녀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요구하는 인간들.
[그런 여자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서방님 근처에는 다른 사람들이 더 꼬일 거라구요?]“…”
[남자 경험도 없고, 어떻게 어울릴지도 모르고, 꾸미는 법도 모르고, 이 남자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그런 당신이 그런 쪽과 경쟁이 될 거라 생각해요?]하지만.
“그래서.”
눈을 당당하게 치켜 뜬 리루가, 확고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뭐.”
[…]당당하게 흘러나온 말에, 영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녀석들은 알 게 뭐야.”
확실히, 이 녀석의 말대로.
이 인기 많은 녀석의 옆에서 그녀가 한 자리 껴서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든다.
뒤쳐질 수도 있겠지. 처참하게 패배해서 다른 여자들이 앞서가는걸 쓰라리게 바라보기만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이 녀석은 적어도 내 뒤통수를 친 적은 없어. 배신은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니야.”
부정한 방법으로, 이 녀석의 ‘의지에 반하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하더라도, 반드시 자신의 방법대로. 정정당당하게.
‘진실된’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이런 속임수 따위가 아니라!
그 말에.
영체가 씩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으-음.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네요. 혹시라도 이번 분기에는 다르게 나아갈 수 있을까 시험해 봤는데. 당신은 나중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고집쟁이라서.]“…? 무슨 말이야 그게?”
그녀가 영체를 바라보고 그런 말을 던지니, 그쪽이 씩 웃으며 대답을 돌려주었다.
[뭐, ‘저희들’ 대다수가 그렇지만… 저는 특히 시간축이 많이 뒤틀려 있거든요. 당신이 죽을 때까지 그런 완고한 성격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요.]“미래라도 볼 수 있다는 거야?”
[그렇다기보다는, 이미 겪고 왔다…고 해야겠죠. 수많은 ‘갈래’ 중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거든요. 당신이 어느 지점까지는 결코 서방님과 교접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중 하나고.]그녀로서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을만큼 복잡한 내용을 담은 문장이었지만.
한가지만큼은 똑똑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교접한다고?”
[예.]“그거, 무슨 의미-”
[동침 한다구요, 리루. 나중엔 당신이 저 사람의 애도 낳아요. 쑴풍쑴풍.]“…”
리루가 펑 터져버릴 것 같이 얼굴을 붉히고 입을 뻐끔거렸다.
“…내, 내가, 그런 짓을, 나중에 한다고?”
[엄청 하는데요?]“…”
[서방님이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오늘 꼭 해야겠냐고 물어도, 당신이 제발 아이 하나만 더 낳자고 애원해서 강제로 침실에 끌고 오는 것도 비일비재 할거에요.]“…우, 우, 웃기지, 웃기지 마. 너, 너, 그냥 되는대로 말 꾸며내는 거지?!”
[흠. 남자 손 한 번 못 잡아본 숫처녀답게 이런 말이 나오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네요.]정곡을 찔린 리루의 몸이 딱 굳었다.
“시, 시끄러워…!”
그렇게 따지는 리루의 눈이 팽글팽글 돌기 시작했다.
부끄럽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넘어 거의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첫 번째로 합방할 때도 말이죠. 자존심 때문에 경험이 풍부하다는 식으로 허세는 잔뜩 부려놓고서는. 본방에 들어가니까 아무 저항도 못 하고 서방님 아래에 깔려서, 완전히 얼굴이 녹아버려서는.]“…이, 이이-”
[서방님한테 귀엽다는 말 한마디만 들어도 심장이 엄청 뛰시곤, 조금만 더 세게 안아달라고 끝도 없이 애원하시면서-]“다, 닥쳐! 닥쳐어어엇-!”
필터 하나 거치지 않고 쏟아져 내리는 정신 공격에 리루가 거의 비명처럼 그런 소리를 내질렀다.
그 모습에, 영체가 쿡쿡거리면서 다시 그녀의 주변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하지만, 그래도 이게 당신을 위한 일이라는 건 진심이에요. 되도록 당신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거든요.]“…”
리루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대체 이런 식으로 구는 게 어떤 면에서 자신에게 도움이 된단 말인가?
무슨 후회할 일이 생기길래?
[…생겨요.]하지만.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아까 전의 리루와 비슷한 정도의 확신이 깃든 기색이었다.
[후회해요, 리루. 그때 가면 정말 말도 못 하게 후회할거에요. 서방님과 더 깊은 추억을 만들지 못했다는 걸.]회한.
깎아서 파내는듯한, 간신히 아문 상처가 찢어져 그 위에 소금이 뿌려지는 것 같은 통증이 버무려진.
그런 목소리.
“…”
거기에 담긴 감정의 깊이에, 리루가 저도 모르게 침묵하고 있자니.
[…그래도, 기회는 한 번 더 있으니까 말이죠.]다시 배시시 웃는 표정이 영체의 얼굴에 걸렸다.
그렇게 말한 영체가 두둥실 떠올라 리루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실체화된 형체는 없지만, 그녀의 코를 장난스럽게 톡톡 두드린다.
[3개월 뒤에요, 리루. 그때 당신이 빛날 기회가 올거에요.]“…빛난다고?”
[예. 서방님의 마음에 쿡, 하고 박힐만큼 아주 반짝반짝하게 찬란히 빛날 기회가 온다구요.]“그걸 더 자세히 말해주면 되는 것 아니야?”
[그러면 규율 위반이라서요. 무서운 놈들이 절 잡으러 와서 안 돼요.]“…?”
[저도 어지간한 녀석들은 그냥 쫒아낼 수 있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건 있으니까요.]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짓던 영체가, 다시 쿡쿡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조언 하나 정도는 드릴 수 있겠네요.]“…뭔데.”
[엘리야 크리사낙스라는 인간, 알고 계신가요?]“…”
알기야… 알지.
지나가면서 몇 번 마주친 적도 있다. 용사 후보라고 했던가.
그런데 그 놈 이름이 갑자기 왜 나온단 말인가?
[같이 어울리세요. 되도록 많이 친해지시구요.]“…뭐? 왜?”
[그래야 나중에 서로 상부상조 할 수 있으니까요. 하얀 놈이 대놓고 사고 치는 타이밍에 다 같이 덜 아프려면 그것밖에 없어요.]“…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주면 안 되냐?”
[일단은 여기까지. 저도 이 이상 모습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서요. 일주일 할당치 정도는 다 끌어다 쓴 것 같은데?]확실히, 그렇게 말하는 영체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이 이상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 자체가 부담이라는 듯.
[조만간, 다시 확인하러 나올게요. 그전까지는 제가 말한 것 지키려고 해보시기.]“…칫. 네가 뭐하는 녀석인지도 모르는 데 다 믿는 것도 웃긴데.”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말한 건 성실하게 해주실 거잖아요? 당신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아까부터 계속 놀려먹기만 하고 있으면서.”
그렇게 말한 리루가 입술을 삐죽이고 있자니.
영체가 다시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거긴 부정할 생각이 없나 보지.
[아무튼, 세달 뒤에요. 일이 터져요. 모두에게 큰 위기고, 당신에게는 곧 기회일 수도 있는 그런 일이. 그것만큼은 꼭 기억하기.]그래도, 그런 말을 할 때만큼은.
[그때는, 꼭 실패하시면 안 돼요?]마치 친언니처럼 따뜻한 목소리였다.
●
턱이 뒤지게 아프다.
뒤통수도 비슷하게 아프다.
“…”
옆쪽을 흘끔흘끔 보며 입을 연다.
“…저기요, 리루.”
“뭐.”
“어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신경질적으로 내 옆을 걷고 있던 리루가 얼굴 전체를 붉히며 나를 홱 노려보았다.
“…물어보지 말라니까.”
“아니, 그래도 왜 갑자기 제가 정신을 잃었고, 정신 차려보니 턱이 반쯤 쪼개져 있었던지는 물어봐도 되는-”
“닥쳐.”
“…”
예.
기색을 보니 더 물어봤다가는 턱이 지금보다도 훨씬 더 아파질 느낌이라 입을 다문다.
“…아무튼, 정리하고 오십쇼.”
한숨을 내쉬며 리루에게 그런 말을 던진다.
이래저래 개판이었던 일도 많지만, 아무튼 이제 투쟁의 용광로에 넘어왔던 교환 학생 프로그램은 오늘로 종료다. 기간이 딱 오늘까지니까.
“다음 번에는, 밀입국이 아니라 당당하게 엘판테로 넘어오시는 겁니다.”
대족장으로 다시 카사가 등극하는건 이래저래 대단한 후폭풍과 행정 소요를 불러일으키는 사태다.
이 사람은 그 곁에 남아서 그 정리를 도와줘야 한다고 들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전까지는 작별이다.
“기다리고 있어.”
리루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선물이라도 하나 가져갈 테니까.”
“오. 기대해도 되요?”
“…”
그 말에, 리루가 입 다물고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얼굴이 다시 슬쩍 붉어져있다.
“…리루?”
무슨 선물인데 그래.
불안하게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말한 리루가 몸을 휙 돌려 투쟁의 용광로쪽으로 타다닥 뛰어갔다.
마치 이 이상 말을 했다가는 뭔가 감당이 안 될 것 같다는 기색이다.
“…?”
왜 저런담.
의심은 가지만, 일단 뭐라고 물어도 답이 나올 기색은 아니니 포기하고 열차 안으로 들어선다.
왁자지껄하다. 다들 바로 며칠 전까지 무시무시한 마수들의 습격을 받은 아카데미에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기색이다.
[뿌듯해 해도 좋아, 임마. 네가 고생해서 쟤들이 저만큼 평화로운 거니까.]뭔 이제와서 공치사야.
칼리반의 말에 피식 웃으며 내게 배정받은 객실로 들어선다.
아무도 없는 평화로운 열차 객실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본다.
“…흠.”
이렇게 혼자 가만히 앉아있는 게 얼마 만이지.
[ System Log > [ 대상 ‘유리아’가 극심한 절망에 빠져있습니다! ] [ 대상 ‘루시엔’이 극심한 죄책감에 빠져있습니다! ] [ 대상 ‘엘노어’가 극심한 무력감에 빠져있습니다! ] [ 대상 ‘페이놀’이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 기색입니다! ] [ 이들을 달랠 방법을 찾으세요! ]아마 내가 혼자 있으면 득달같이 달려들만한 인간들이 전부 이런 상태니까 그런 것이겠지만.
“…”
그래도, 전부 다 달래줘야겠지.
최근에 몇 번 찾아가서 말이라도 붙여보려고 했는데, 눈만 마주쳐도 다들 후다닥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워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더라고.
아마 평소라면 뺀질나게 달라붙던 인간들이 일부러 나를 피해다니는 느낌마저 들 정도면, 진짜 어지간히도 의기소침해져 있다는 뜻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머리를 긁적인다.
‘…그래도 한 명씩, 천천히 이야기 해봐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쉰다.
아무튼 말이 안 통할 사람들은 아니니까. 시기만 잘 맞춰서 의사소통을 시도하면 될 것이다.
“아, 여기 계셨네요.”
“…”
그러니까, 이 놈 빼고.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객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놈에게 가늘게 뜬 시선을 맞춘다.
“…안녕하십니까. 페이놀.”
페이놀 라이펙.
타오르는 것 같이 붉은 머리를 가진 이단 심문소의 마법사.
“안녕하세요, 다우드 캠벨.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런 용건이 섞인 간단한 인사와 함께, 녀석이 싱글싱글 웃었다.
“예전에 드렸던 말씀, 기억하시죠? 저 좀 꼬셔달라고 했었던 거요.”
“…기억은 합니다만.”
“예. 그거 관련된 겁니다.”
이어서.
다짜고짜 폭탄이 떨어졌다.
“그, 사실 말씀은 안 드렸는데. 그거 시간 제한이 있거든요.”
“…예?”
“지금부터 한 달 안에 저를 좀 꼬셔 주셔야겠는데요.”
[ System Message > [ ‘챕터 4 – 적야’ 관련 새로운 퀘스트가 갱신됩니다! ] [ 한 달 안에 대상 ‘페이놀’의 호감도를 ‘친애 1단계’까지 올려놓아야 합니다! ] [ 실패하면 게임 오버입니다! ]…한 달?
너무 갑작스러운 시간 제한에 눈을 끔뻑인다.
아니, 잠깐만.
얘, 분명히…
[ System Log > [ 대상 ‘페이놀’에게는 ‘스킬: 치명적인 매력’의 적용이 불가능합니다! ]…이런 거 있지 않았냐?
나한테, 그러니까.
진짜로, 한 달 안에 이 여자를. 스킬의 도움도 없이.
엘노어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나한테 해롱대는 수준으로 꼬시라고 하는 소리다.
“제가 당신만 보면 어쩔 도리가 없을 만큼 가슴이 뛰게 만들어주셔야 해요. 아니면…”
“…아니면?”
페이놀이 다시 미소지으며 답했다.
“글쎄요.”
이어지는 말은 그런 표정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었지만.
“끔찍한 일이 생길 걸요?”
라고.
붉은 악마의 조각 3개를 전부 보유하고 계신 그릇께서 말씀하셨다.
악마 융합률 100%, 폭주하면 진짜 붉은 악마의 ‘본체’를 바깥에 꺼내는 게 가능한 인간께서.
정확하게 그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감당 가능한 수준의 끔찍한 일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저랑 약속하셨잖아요.”
“…”
“그러면 지키셔야죠?”
그래.
약속은 지켜야지.
“…”
두통이 몰려오는 머리를 감싸쥔다.
내가 그러면 그렇지.
지금까지 내 행보는, 전부 산 넘어 산이었다.
내 주제에, 겨우 사건 하나 끝났다고 평화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