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d to Be Lov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71)
r 170 – 170. 고양이 싸움 (2)
●
단검과 권갑이 충돌했다.
창백한 달빛이 내리쬐는 옥상 위로 격렬한 불똥이 튀었다.
이번에도 호각으로 교환된 공수다. 몇 번째로 이 정도 합을 겨루고 있는지 이미 서로도 잊은 지 오래다.
양자가 아마 동시에 느끼고 있을 것이다. 상대방이 그다지 호락호락한 인간이 아니란 걸.
“…”
세라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얼굴 근처에 생긴 상처를 손으로 훑어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피가 주욱 묻어나왔다.
‘…공수 교환이 가능하다고.’
물론 그녀의 특기는 은밀한 암살이지 이런 전면 전투가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가 그랜드 어쌔신이란 칭호를 카드 쳐서 따낸 건 아니다.
대륙에서 손 꼽히는 강자가 아니면 이런 교환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는 리스트 중에 이 리루 가르다라는 인간은 결코 그 이름을 올리지 못 할 수준이고.
하지만, 상대방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하다.
‘…어쩐지 미리 알고 움직이는 것 같은데?’
마치 몇 초 뒤의 미래를 ‘알고’ 움직이는 것처럼, 그녀의 공격 경로에 앞서 대처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신체 능력과 전투 기술은 그녀가 압도하지만, 상대방의 이런 기괴한 움직임 때문에 계속해서 상황이 백중세를 이루고 있다.
-!
다시, 병장기가 격렬하게 부딪혔다. 서로의 호흡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세라스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네.”
“아, 그거 우연이네. 나도 알겠는데.”
리루와 세라스가 양쪽으로 떨어지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너, 성황국 출신이냐?”
“그쪽은 부족 연합 출신이고.”
한쪽은 신성력 기반의 기적과 가호. 한쪽은 법술 기반의 권투술.
적어도, 양쪽이 다루고 있는 기술의 근원은 제국에서 다루는 마력 기반의 강체술과는 분명히 다르다.
“…”
리루의 시선이 건물 아래쪽으로 흘끔 돌아갔다.
아마 그쪽에는 여기 올라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그들을 뜯어말리려고 애쓰던 다우드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미 상대방에게 스팀이 잔뜩 올라와 있는 두 명 입장에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지만.
“…미친 종교쟁이 놈들이 이쪽한테 무슨 볼일이야. ”
세라스의 표정이 살짝 비틀렸다.
‘…이쪽이라고?’
마치 다우드를 본인이 맡아두기라도 했다는 말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문장 자체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쎄. 과학 기술 말곤 아무것도 없는 야만인들은 신경 안 써도 되지 않을까?”
서로의 눈가에 더욱 더 강한 적의가 깃들었다.
손을 섞으면서 서로가 확신한 건, 이 정도 기량은 어렸을 때부터 비전으로 전수되는 수준 높은 훈련을 거쳐야만 성취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각국 최상위층에서만 암암리에 공유된다는 걸 생각하면, 결국 한 가지 결론으로 수렴한다.
둘 다 성황국과 부족 연합에서 ‘수뇌부’에 가까운 인원들이라는 것.
그리고, 동시에 한 남자에게 공통적으로 관심을 가진 상태라는 건, 대단히 많은 사실을 시사한다.
“…신경을 안 쓰고 싶어도 말이야.”
리루가 씹어뱉듯이 문장을 꺼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음흉한 인간이 다스리는 쓰레기 나라잖아, 성황국. 안 그래?”
“…”
그 말을 듣자마자, 세라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졌다.
“…네가 우리 국가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여, 야만인.”
“제국도 그렇게 기분 좋은 동네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쪽보다는 나을걸?”
“…”
“별로 정치에 관심 없는 나라도 그쪽에 뒤 구린 소문이 넘쳐난다는 것 정도는 알아. 다우드한테 그런 것 묻히지 말고 썩 꺼졌으면 좋겠-”
문장을 끝마치기도 전에, 리루가 급격하게 몸을 뒤로 젖혔다.
미래를 보고 어쩌니 하기 전에,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 특유의 생존 본능 덕분에 행한 일이었다.
그녀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가슴팍에 그어진 상처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속도를 못 따라잡았다. 아예 보지도 못했다.
치명상을 면한 건 순전히 운이겠지.
“…”
상대방의 분위기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다.
리루가 눈을 살짝 찡그리며 쌍수 단검을 역수로 쥐는 세라스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서 빛이 지워진 상태다. 그리고 온몸에서 ‘보라색 기운’이 뭉게뭉게 퍼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
그런 태세 전환의 영향인지, 그 머리 위로 솟아나 있는 동물귀를 본 리루가 실소를 흘렸다.
왜 이 녀석이 방금 그 말에 그 정도로 격노했는지 알 것 같다.
“바이패드Biped?”
이족 보행하는 짐승. 다르게 말하면 수인족.
인간과 다른 종족 간의 혼혈인 아인亞人종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부류다.
“깡도 좋네, 너. 아인종이면서 제국 안에 발을 딛어?”
아인종 차별 정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는 제국이라면, 수인족의 경우 발견 즉시 포획 혹은 사살을 명해도 이상하지 않은 동네다.
아인종들이 제국을 죽어라 싫어하는 이유가 있지.
하물며 모든 인종에 대한 차별 없는 평등 정책을 표방하고 있는 성황국 출신이라면, 리루가 방금 한 말에 화가 날 이유가 한두 개가 아닐 것이다.
“…원래대로는 이걸 본 녀석은 전부 죽여야겠지만.”
세라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죽이지는 않아.”
법황도 그렇고, 루미놀 대주교에게 얼마 전에 지시 받은 것도 그렇고.
그쪽도 다우드의 신변에 각별히 주의하라고 몇 차례 지시한 바 있다. 굳이 그 근처 인간을 건드려서 일을 꼬이게 만들 필요는 없지.
“…그래도 대가는 치러야겠지.”
그렇지만, 적어도.
자기가 그 남자를 맡아놓기라도 한 것마냥 구는 이 건방진 여자를 손 봐주는 것 정도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아까부터 그런 태도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임무 외적으로도, 개인적인 감정이 그렇다.
그와 동시에.
[…리루.]리루의 등 뒤에 붙어있는 푸른 녀석이 경각심이 깃든 목소리로 입을 여는 게 들려왔다.
[웬만해서는 제가 다 도와드릴 수 있는데요. 상대방도 저와 ‘동격’이라면 좀 힘들거든요?]‘…뭐?’
[저쪽도 저희와 비슷한 부류라는 거에요.]리루가 말없이 세라스쪽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까부터 몸에서 이상한 색깔의 기운을 피워올린다 싶더니, 그런 거였나보다.
“…뭐야.”
곧바로, 그녀의 얼굴에 사나운 미소가 깃들었다.
“너도 그런 거 붙어있었냐?”
리루의 몸에서도 푸른색 기운이 뭉게뭉게 퍼져나왔다.
그에 이어. 몸에 권능이 깃든다.
투쟁의 용광로에서 몇 번 써먹어 본 적이 있는 기술이다.
분쇄. 그 몸에 닿는 것은 모조리 다 박살 난다.
저쪽도 비슷한 걸 꺼내든 이상, 이쪽도 물러설 이유가 없지.
다시, 두 명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만 아까 전과는 그 기세가 확연하게 다르다.
이전에는 그래도 인간 두 명이 치고받는 느낌이 났다면, 지금은 거의 자연재해 두 명이 충돌하는 것 같은 여파가 사방으로 번져나간다.
공기가 비명을 지르고, 땅이 진동하며, 그들이 딛고 있는 건물 전체가 요동친다.
“…뭐야? 무슨 일이야?!”
“기숙사 건물이…!”
사방에서 난리가 난다. 기숙사 아래에서 곤히 자고 있던 학생들까지 일어나 소란스러움을 더했다.
하지만, 이미 전투에 접어든 두 명의 그릇은 거기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주변에서 뭐가 일어나건 눈앞에 있는 녀석을 때려눕히겠다는 의사뿐이겠지.
-!
-!!!
그리고, 서로 간의 무기가 만나 폭발하기 직전에.
-…
-…!
그 사이로 끼어드는 인간이 있었다.
부드럽게.
하지만 단단하게.
휘둘러진 일검이 그들 두 명을 동시에 떼어놓는다.
일격에 나가떨어진 리루와 세라스가 동시에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능’이, 아예 느껴지지 않은 동작이었다.
어떤 기운도 발하지 않고, 그저 맨몸으로 당연하다는 것처럼 개입했지.
마치.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처럼.
지금 이 정도 신기를 발휘한 그들과도 위상이 다른 곳에 있는 존재라는 것처럼.
“…그대들.”
그리고, 거기엔.
“지금 대체 뭣들 하는 건가.”
무표정하지만.
누가 봐도 열받은 기색을 주변으로 풀풀 뿌리는 엘노어가.
방금 휘두른 검을 달빛을 반사 시키며 고고히 서 있었다.
●
“정신 좀 차리게. 둘이 무슨 이유로 치고받건 나야 크게 관심 없네만. 적어도 상태가 안 좋은 다우드 앞에서 사고를 치는 건 삼가야 하지 않겠나.”
“…”
“…”
“대답.”
“넵…”
“넵…”
엘노어가 붉은빛 안광을 강렬하게 쏘아내며 힘 없이 대답이 흘러나오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한 팔로 물구나무를 30분째 서 있는 리루와 세라스가 있었다.
“…그런데 왜 물구나무죠?”
다우드가 문득 꺼낸 질문에, 엘노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
흠.
보통 벌 세울 때는 무릎 꿇고 양손 들게 하는 보편적인 방식이 있지 않나.
왜 저런 가혹한 자세로 그런 걸…?
“…벌을 설 때는 누구나 다 저렇게 하는 것 아닌가?”
“…”
“트리스탄 공작가에서는 저게 평균이었네만…”
“…”
다우드가 말 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이 공녀님의 괴물 같은 신체 능력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 건지 그 실마리를 살짝 찾은 느낌이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배상해야 할까요.”
다우드가 너덜너덜해진 기숙사 건물을 울적하게 바라보며 꺼낸 말에, 엘노어가 그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배상하다니. 그대가 뭘 물어낼 필요가 있단 말인가.”
“…이거,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며 박살난 건물을 바라보는 다우드의 표정에 씁쓸함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아니, 이번 건은 그대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힘들겠군.”
엘노어가 강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이번 일은 순전히 저치들의 욕심이 문제 아니겠나.”
“…아뇨, 하지만…”
다시 우울한 표정으로 뭐라 말하려던 다우드의 모습에, 엘노어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뚜벅뚜벅 다가가, 다우드를 폭 끌어안는다.
눈이 동그래진 다우드에게, 그녀가 귓가에 따뜻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네, 응. 괜찮다네. 그대는 쓰레기가 아니네. 저 여자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그대를 꼬드기려 한 것 뿐이네. 그대는 잘못 없어.”
“…엘노어 씨…”
“설사 그대가 그런 잘못을 저질렀을 지라도, 그대가 전 세계에게 지탄받을 지라도, 나만큼은 그대를 받아들여 줄 수 있다네. 마음껏 응석 부리게나.”
“…”
다우드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며 그렇게 말하는 엘노어를 보고 있는 리루와 세라스의 표정이 동시에 묘해졌다.
“…”
“…”
어라.
이거.
왠지.
아니.
그러니까,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그들이 분명 잘못한 게 맞기는 하지만.
[…죽 쒀서 남한테 준 꼴 되어버렸는데요?]“…”
[당신하고 저 사람, 뭐하러 그렇게 치고 박은 거에요?]푸른 악마의 말에 리루가 마음 속으로 조용히 동의했다.
“그 표정들은 뭔가.”
“…”
“불만이라도 있나, 그대들?”
“…면목이 없습니다…”
“…넵…”
하지만, 그렇다고 대들기에는 상대방이 방금 보여준 무력이 너무 파멸적이다.
눈을 부라리는 엘노어에게 리루와 세라스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