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d to Be Lov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01)
r 200 – 200. 마지막 시련 (4)
●
대신전 안에 있는 성황국 중진들의 회의실 안쪽으로는 긴장된 목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 했습니다.”
연식 그득한 중년에서 노인들, 그것도 다들 한 가락씩 한다고 자부할 만큼 권력을 가진 인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침통한 표정을 짓는 건 꽤 이상한 광경이었지만.
상황을 생각하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대주교 중 한 명이 그런 말을 꺼내드는 것만 봐도 그랬다.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낸 후보가 성검에게 거절당하다니요. 이래서야 행사를 연 의미가…”
“일단 성검을 잡고도 큰일은 없었으니, 그저 시간이 조금 필요한 것 아닌가?”
“아니요. 자격을 증명하지 못한 자가 성검과 접촉하면 그대로 사망하는 건 맞지만, 역대 용사들이 성검과 접촉했을 때 생기던 ‘광휘’가 없었어요.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 했다는 소리입니다.”
그래. 모든 문제의 근원이 그거다.
시련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 준 인간이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받지 못했다.
세 패권국의 수뇌부가 모두 모여 주최한 행사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는 건 단순히 사고 수준이 아니다.
“다른 후보들에게 기회를 넘기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랬다가는 누구에게 기회룰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날 테고, 진흙탕 이권 다툼으로 이어지겠죠.”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않나. 잘못하면 대륙 전체에 대혼돈이 일어날 걸세!”
최악의 경우는, ‘이번 세대의 용사는 없다’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
애초에 대륙 곳곳에서 발견되는 악마들의 징조 때문에 일어날 혼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기획된 행사다. 그런 식의 결말이 날 경우 일어날 후폭풍은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다.
하지만, 애초에 용사 선발을 억지로라도 진행하자고 말을 꺼낸 것은 성황국이다.
“성검은.”
회의실 안으로 그런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소란스럽던 회의실에 일순간 침묵이 가득 깔렸다.
물론 그들도 이런 곳에 앉아 스스로의 목소리를 높여 낼 수 있는 중진들이다. 하지만 방금 입을 연 자의 권위는 이 자리에서도 제일이니.
“기록을 살핀다면, ‘용사를 제외한 모든 접촉한 이들을 해한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일단 그걸 잡고 목숨을 부지한 시점에서, 엘리야 크리사낙스 후보는 이번 세대의 용사가 맞다는 소리죠. 다른 후보에게 그 기회를 양보하는 건 그쪽을 죽이는 일밖에 안 될 겁니다.”
“…”
객관적으로 제국에 비해 그 세가 모자라고, 부족 연합에 비해 특출난 기술력도 없는 상황에서, 그 국가들의 ‘균형추’를 맞추는 역할을 하는 단 한 명의 인간.
성황국의 절대자이자 독재자.
역대 최강의 사제. 법황.
“…”
“…”
그 권위에 걸맞게, 방 안에 있는 인간들이 전원 침묵하고 있었다.
마치 이 사람이 내뱉는 말이 진리라는 것처럼.
법황이 성황국 내부에서 발휘하고 있는 권위가 어느 수준인지 단번에 보여지는 장면이었다.
사분오열난 제국의 상황과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장악력이겠지.
“하지만 그 주인의 증거인 ‘광휘’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니… 내릴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입니다.”
법황이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용사 본인에게 ‘결함’이 있는 경우. 상식적으로 이쪽이 가장 가능성이 높겠죠. 이런 경우가 역사적으로도 처음이라 그게 뭔지 추론해내기는 어렵습니다만…”
아마 모두가 점치고 있을 가능성이다. 햇수로만 세어도 네자릿수에 가까이 멀쩡하게 내려온 성물에 뭔가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하긴 어려우니.
하지만, 법황이 ‘두 개’라고 표현한 걸 놓칠만큼 방 안에 있는 이들이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런 상식적인 가능성 외에 다른 길이 열려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는-”
법황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누군가가 일으킨 ‘나비 효과’에, 그 자격을 도둑맞았거나.”
“…예? 나비 효과…?”
“그게 무슨…?”
주변에서 멍하니 흘러나오는 그런 질문에.
법황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디.
“…아마 용사에게 원래대로 부여될 ‘고난’을 훔쳐 간 인간이 한 명 있을 거란 소리입니다.”
오직 한 명만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성검이 ‘기능 고장’을 일으킬 만큼 말이지.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와중에, 법황이 조용히 턱을 괴며 눈을 감았다.
‘…곧인가.’
선각자에게 전달받은, ‘붉은 밤’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계획을 세워서 대처하는 인간에게, 모든 계획이 비틀릴 초대형 변수가 날아들었다.
‘이번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다우드 캠벨?’
틀림없이.
선각자가 말한 대로, ‘즐거운 구경’을 할 수 있을 게 분명한 상황이겠지.
●
“…하아아아아…”
[…그렇게 불어서 땅이 꺼지겠냐?]칼리반이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진짜로 어쩔 수가 없다.
오죽 정신이 없으면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혼이 나간 상태로 바깥에서 몇십 분을 서성이다 들어왔을까.
당장 해결책을 짜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낭비할 시간 따윈 없는 데도.
“이거 진짜 안 좋은데…”
페이놀이 폭주하는 건 당장 내일이다. 성검을 잡은 엘리야가 없으면 그걸 대처 못 하는 건 확정이고.
“…”
그리고, 단순히 그것만으로 끝나는 문제도 아니다.
엘리야 크리사낙스 = 주인공 = 용사라는 건 게임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축이나 다름 없는 요소다.
어찌저찌 이번 챕터를 넘어간다 하더라도 그 뒷 내용이 싹 다 비틀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
문제는,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그 원인조차 모르겠다는 것.
[…그래?]“…뭔데요.”
묘한 기색이 담겨 있는 칼리반의 대답에 한숨을 내쉬며 답하자, 칼리반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 같은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모르는 것 확실해?]“…”
[어쩐지 아예 외통수를 얻어맞은 것 느낌 치고는 좀 침착해 보이는데?]“…몰라요.”
말을 흐리며 내 방문의 문을 연다.
아무튼, 상황이 어찌되었건 그냥 손 놓고 죽을 수는 없다.
이전 챕터들도 내 생각대로 굴러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지 않았나. 이번에도 남은 카드를 전부 꺼내쓰든 뭘 해서든 살아남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난 그대로 얼어붙었다.
“…”
“…”
침대 위에 앉아있는 녀석이 다리를 살랑거린다.
이불을 뭉쳐서 등 뒤에 받쳐서 몸을 세워놓고, 내 배게까지 품 안에 끌어안은 모습이 흡사 남자친구 집에 놀라온 애인이 ‘이제 왔어?’ 하고 맞아주는 모습이다.
물론.
상대방이 그런 몽글몽글한 감상이 통하는 녀석이 아니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안다.
“너.”
말을 꺼낸 건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문장을 지어내는 데 꽤 시간이 오래 걸린 탓이다.
“여기서 뭐 하냐.”
“음.”
낮게 갈라진 내 목소리와 정반대로, 상대방에게 쾌활한 대답이 돌아왔다.
“안부 인사?”
가면을 쓴 여자.
선각자가.
내 침대 위에 걸터앉아 낄낄거렸다.
●
“여긴 어떻게-”
“-들어왔고, 어떻게 아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고,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냐. 그런 고루한 질문은 됐다구요. 당신과 제 사이잖아요?”
“…”
“무시? 재미없네. 엘리야 크리사낙스가 용사가 되지 못해서 마음이 급해서 그러신가?”
눈을 감고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네가 꾸민 짓이냐?”
“다우드 캠벨.”
순간.
녀석의 기색이 일변한다.
가면 아래에 있는 얼굴이라 기색은 하나도 살필 수 없지만, 이전에 이 녀석을 만났을 때 느꼈던 그 ‘독기’가 확 올라온다.
“알고 있잖아요? 내가 한 일이 아니라는 거. 난 그런 버러지한테는 관심도 없어.”
요사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든다.
“본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 가지고 모르는 척 하는 건 좀 추한데.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 그러기야?”
“…”
“당신 때문에 그렇게 된 거잖아.”
“…”
독기가.
공기에 눅진눅진하게 스며든다.
“당신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원래’는 없어야 하는 변수야. 지금 이 세계 전체가 뒤틀리는 모든 원인이 당신이 일으킨 나비 효과라고. 안 그래?”
“…”
“원래대로라면 엘리야 크리사낙스가 겪어야 했을 모든 시련들을… ‘당신’이 다 가져가 바렸으니까. 그 ‘기질’은 틀림없이 용사지만, 그 영혼의 ‘격’은 성검을 잡기에는 한참 모자라. 원래 부여된 운명을 소화하기엔 한참 모자란 인간이 되어버린 거지.”
“…”
“아, 물론 당신을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그쪽도 살아남기 위해 최선이었잖아? 지금처럼 괜히 죄책감 느껴서 애써 부정할 필요 없다니까?”
내 머릿속을 정확하게 뒤집어 까놓는 것 같은 말들이다.
현재 상황에 대해 내가 추론해놓은 것들.
항상 생각하는 건데.
이 녀석,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지나칠 정도로, 많이 알고 있다.
“…”
그러니까 반박하지 않고 녀석을 가만히 바라본다.
내가 생각하는 이 녀석의 정체가 맞다면.
이 녀석은,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현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리겠지.
“그래서. 현재 상황을 타파할 방법은 있나요? 붉은 악마의 각성이 곧인데?”
“…”
“이번엔 진짜 외통수잖아요. 엘리야 크리사낙스에게 성검을 쥐여주겠다는 일념 하에 지금까지 달려오신 것 아닌가?”
솔직히 말해서.
당장 생각나는 건 없다.
다른 악마의 그릇들도 지척에 와 있는 상황이지만, 폭주한 조각 세 개짜리 그릇을 억누르려면 그쪽도 같이 폭주해야 억지력이 생긴다. 불을 꺼트리기 위해 폭탄을 터트리는 수준의 주객전도지.
“…그래서. 놀리려고 찾아왔어?”
“아니요.”
녀식이 씩 웃으며 답했다.
“거래를 제안하러 왔어요.”
“…거래하자고? 너랑?”
지금까지 내 목숨을 수도 없이 경각에 처한 녀석이 뭐라는 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을 노려보니, 녀석이 내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 아- 너무하네- 나 지금껏 성심성의껏 호의를 내비쳤는데.”
“…”
“시련 도중에 그래서 토커도 보내드렸잖아요? 그쪽 지키려고.”
“…”
“그리고 원래대로면 ‘오늘’ 폭주할 붉은 악마의 각성을 하루 미뤄드린 거, 누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
입을 다물고 천천히 녀석을 바라본다.
그 사이, 녀석이 내 침대에서 기지개를 쭉 켜머 말을 이어갔다.
“약속드릴게요. 절대 당신한테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지껄여 봐. 안 들어줄 거지만.”
내 말에, 녀석이 배시시 웃었다.
가면 아래로도 웃음 짓고 있다는 게 훤히 보이는 기색이다.
“그러면.”
녀석이 평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랑 떡 한 번 치죠?”
“…”
한참을 침묵하다가.
한참을 침묵하다가.
간신히 입을 연다.
“…뭐?”
“아니, 설마 당신 이게 무슨 말인지도 몰라요? 생식이요, 생식. 아이 만들자고-”
“잠깐. 닥쳐 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심호흡을 한다.
과호흡으로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뭔 개소리야.”
“음, 진짜로 이런 거에 약하네. 여자 그렇게 후리고 다니는 난봉꾼치고는 너무 음담패설에 약한 것 아니에요?”
“…”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진 말고. 그냥 농담이니까. 농담농담.”
“…”
아닌 것 같았는데.
내가 수락하면 진짜로 받아들일 만큼 진지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선각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다우드 씨.”
아까 미친 소리를 할 때와 똑같이 가벼운 목소리였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우리 같이, 회색 악마 죽일래요?”
그런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 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