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d to Be Lov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10)
r 209 – 209. 속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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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놀의 의식은, 깊은 곳으로 침전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내면의 세계로 점점 가라앉고 있는 건 본인도 잘 느끼고 있는 바였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평소에는 ‘덮어두고 살았던’ 것들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굳어진 내면. 뒤틀린 감정들. 곱씹고 반추할 때마다 마음을 난도질하는 그런 기억들.
“…”
페이놀 라이펙에게 세상은 언제나 고통과 비탄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살아있던 시절의’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순간은 그런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좋았으니까.
처음 태어났던 시골의 고향도. 두 번째로 적을 두었던 마탑도.
그녀의 주변에 있는 인간들은, 모두 안 좋은 꼴을 당했으니까.
“그러니 내가 도와주는 거잖아.”
더 깊은 곳으로 서서히 내려앉는 페이놀의 머릿속으로 그런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흐린 시야를 정비하며 앞을 바라본다.
턱을 괴고, 코앞에서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여자가 있다.
자신을 ‘붉은색’이라는 이미지로 치환하면 이런 모습이 될 것 같은 여자다.
물론,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고.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다.
아마 자신을 몇 년 정도 성장시키면 딱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편이 나아. 너도 마음 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을 텐데.”
“…”
“세상을 살아가는 건 고통이야.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지 않아.”
슬픔. 회한.
어쩌면, 연민까지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
‘악마’라고 불리는 대상이 내뿜기로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면-”
희미한 의식 너머로, 간신히 문장을 자아낸다.
“…왜… 나를 살렸어…?”
처음 적야 사태 때, 처음으로 죽었을 때.
그녀의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저주받은 대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을 살린 건, 눈앞에 있는 붉은 악마다.
자신의 과거가 그런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점철 되어 있는 걸 알고 있었다면.
그냥.
편하게, 쉬도록.
놓아주었으면 되었을 텐데.
왜.
이 녀석은, 자신에게 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단 말인가.
그녀의 감정과 감각까지 모두 앗아가서까지 그녀의 숨을 붙여놓은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
대답은, 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쉬고 있어, 페이놀.”
멍한 머릿속에, 연이어 그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에 눈을 뜨면, 다시는 상처받지 않는 세계가 완성되어 있을 테니까.”
그런 말을 마지막으로.
페이놀의 의식이 완전히 어둠 속에 잠겨들었다.
●
무섭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를 정리하라면,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엘리야 크리사낙스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성검을 움켜쥐었다.
눈앞에 있는 건, 어릴 적에도 한 번 보았던 이미지다.
거대한 불기둥 안에 존재하는 ‘악마’의 모습.
머리 위로 나있는 두 뿔. 쭉 찢어진 동공.
페이놀 라이펙은, 마치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로 가만히 불기둥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빛을 잃은 눈동자로,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다.
뭔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시간을 끌면 안 된다고 했어.’
여기 오기 전에 다우드에게 들었던 조언을 상기한다.
붉은 악마가 모습을 더 오래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점점 테라포밍되어 변해간다고 했다.
그렇게 되어 만약 공허 지대에 저 그릇이 접촉하게 된다면.
그대로,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다던가.
“…”
그렇다면, 자신이 여기서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뭐가 어찌되었건, 상대가 누구건
엘리야가 심호흡을 하며 성검을 틀어쥐었다.
솔직히 말해서.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든다.
원래 이런 건 항상 다우드가 해내던 일이 아닌가. 자신은 그걸 보조하는 쪽에 가까웠고.
그쪽의 아무런 서포트도 받지 못하는 입장에서, 이걸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래도, 가만히 서서 세계가 멸망하는 걸 지켜보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낫다!
“흡!”
들숨과 함께 땅을 박차고 달려든다.
아무튼, 용사 후보라는 호칭을 날로 먹은 인간은 아니다.
권성에게 특훈받은 전투 기술과 진리의 눈까지 함께 한다면, 아무리 그래도 아예 상대가 안 되지는 않을 것이다.
‘…첫째로는 화염을 자르고, 뒤로는 마력으로 발판을 만들어 본체에 접근, 세 번째로는 근접전에서의 수 싸움…’
악마와 손을 섞어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거기까지 끌고가지 않고선 싸움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다음 순간.
엘리야의 몸이, 격렬하게 튕겨져 나왔다.
불기둥을 이루고 있는 화염에 접근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
엘리야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는덴, 꽤 시간이 걸렸다.
‘…나, 방금…’
그저, 저쪽에서 뿜어내는 ‘압력’에 의해.
어떠한 적대 의사를 가지지도 못한, 그저 순전히 불기둥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마기의 잔향에 의해.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불기둥 안에 있는 페이놀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은 상태다. 딱히 자신을 의식하고 밀어내려는 액션조차 취하지 않은 상태란 거다.
말하자면.
상대방의 ‘숨결’에,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상태겠지.
“…!”
눈에 핏발이 올라온다.
굴욕도 이만한 굴욕이 없지.
이어서, 그녀가 이를 악물고 그쪽으로 달려들었다.
차라리.
차라리, 상대방의 일격에 자신이 힘이 부쳐 짓뭉개지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지금 이건.
아예 상대할 가치조차 못 느낀다는 느낌조차 들 정도로.
“…”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대처조차 하지 못하고. 공략법조차 찾지 못하고.
진리의 눈으로 상대방을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상대방에 대한 어떤 정보조차 얻어낼 수 없다.
“…”
이를 악문 엘리야가 다시 상대방을 향해 달려들었다.
안 된다면, 될 때까지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에 무작정 달려든 것이었지만.
한 번.
두 번.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
계속해서, 내동댕이쳐진다.
접근조차 똑바로 하지 못하고.
자존심, 자존감, 그녀가 해온 노력이 전부 다 부정하는 것 같은, 그런 격차.
“…웃기지, 마…!”
아마 처음에는 그런 감정이 몸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몇 번을.
몇 번을 그렇게 달려들었을까.
온몸에 감각이 희미할 지경이다.
상대방은 애초에 자신에게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럴 수준의 위해조차 자신이 가하고 있지 못하단 소리다.
“…”
수십. 백. 백 오십.
몇 분만에 몇 번이나 내동댕이쳐졌는지 모르겠다.
온몸이 부르튼다. 아무리 잔향이라지만 마기와 계속 접촉하느라 몸에 생채기가 늘어난다. 잔부상도, 고통도 점점 누적된다.
전신이 먼지투성이에, 피투성이에, 멍투성이다.
이백. 삼백. 삼백 오십.
1시간은 채 되었을까.
“…”
아파.
아프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다.
이렇게나 달려들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은 상대방과의 ‘거리’조차 똑바로 좁힐 수 없다.
말도 안 되게 강한 적수. 상대하는 자신이 벌레처럼 느껴질 정도로 격차가 하늘땅으로 난다.
자신이 이쪽에 대항하는 것조차 의미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
하지만, 그래도.
엘리야가 심호흡을 하며 성검을 바로잡았다.
엘리야 크리사낙스라는 인간을 지탱하는 심리적 기제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격차라도.’
누군가는.
‘…아무리 아파도.’
항상 이런 격차의 적수가 상대라도, 겁먹지 않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전신이 짓이겨지는 것 같은 그런 고통을 감수하며, 그저 해야하는 일이 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그런 인간한테.
얼마 전에, 그런 말을 들었었다.
-넌 할 수 있어.
“…알고 있어요.”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선다.
“…알고 있어요, 선생님.”
그 남자가 자길 인정해줬다.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언했다.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해서야, 자신은 그 옆에 설 자격조차 없다.
그런 생각이 들자, 다시 몸에 활력이 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다시 일으킨다.
“…”
심호흡을 하고, 성검을 쥔다.
양팔이 거의 젤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기력이 빠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시 똑바로 자세를 잡는다.
“…으럅!”
그런 기합성과 함께.
엘리야가 거침없이 앞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
처음으로, 페이놀의 근처에 있는 불꽃의 일부가 ‘베여나갔다’.
“…어?”
엘리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약하기 짝이 없지만.
틀림없이, 처음으로 상대방에게 입힌 타격이다.
당장 페이놀이 움찔하며 이쪽을 바라보는 것만 해도 그렇지.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그녀를 놀라게 한 건.
“…”
그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성검을 노려보았다.
이거 방금, 빛나지 않았던가?
아니.
그쪽 생각하면서 힘 좀 냈더니, 바로 각성하는 거 뭐냐.
아무리 그녀가 그쪽에 홀딱 반했다지만 정도가 좀 있어야…!
“우, 우왓?!”
엘리야가 식겁하면서 성검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미친 게 아니라면.
방금, 검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거.
방금 말하지 않았나?
분명 말했지?!
그렇게 생각하며 성검을 바라보고 있자니.
“…너 누구랑 대화하냐?”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두들겼다.
깜짝 놀란 엘리야가 등 뒤를 돌아보니.
다우드가 어이 없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용사님…이라고 해야하나. 설마 혼자서 여기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선생님?”
엘리야가 살짝 목이 메인 것 같은 기색으로 그렇게 말했다.
왜 그런 기색이 됐는진 자신도 모르겠다.
이 남자가 여기에 왜 있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따라붙었는지도 모르겠고.
그 헬가드란 놈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설명받아야 할 건 널렸지만.
“…”
하지만, 어쩐지.
이전에 다우드를 봤을 때 느꼈던 ‘불안감’이, 싹 씻겨나가는 모습이었으니 그럴 테다.
“그래, 선생님이다. 도와주러 왔어.”
이어지는 말만 들어도 그렇겠지.
“마지막 마무리를 네가 해야 하는 건 변함 없는데.”
다우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엘리야의 눈이 순간 휘둥그래질만한 표정이었다.
‘…이거.’
그녀가 알고 있는 다우드의 모습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반드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모습대로 상황이 굴러갈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
“얼굴이 좋아지셨네요, 선생님.”
엘리야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만신창이인 몸으로도, 이 남자의 상태가 좋아진 걸 확인하자마자 이런 반응이라니.
자기 상태도 꽤 중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계획은요?”
“아, 그거야 있지.”
다우드가 여전히 씩 웃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이어서, 손가락을 들어 페이놀을 가리킨다.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목소리가 이어서 흘러나온다.
“내가 쟬 먹을 거야.”
“…예?”
“내가 저길, 그, 뭐냐. 먹는다고. 맛있게.”
“…”
엘리야가 말없이 불기둥 안에 있는 페이놀과 다우드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흠.
그래.
먹는다고.
맛있게.
“…진짜 미친 변태 새끼야, 당신?”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그녀가 간과한 점이라면.
이 상태의 다우드는, 대다수의 경우 항상 미친 소리를 꺼내놓는단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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