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d to Be Lov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29)
Chapter 228 – 228. 수확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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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 공작령의 저녁은 꽤 쌀쌀하다. 북부의 통로인 켄드리드 변경백령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까.
보거트 후작이 코트를 여미며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공작저를 뒤편으로 하고 안뜰로 걸어나오는 와중에 내뱉는 숨결에는 하얀 입김이 서려나오고 있었다.
보고 싶은 건 전부 다 봤기 때문에 걸어 나오는 몸짓에는 망설임이 없는 기색이었다.
“…진짜로 악마 상대로 지배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니까요.”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당신 생각도 그렇죠?”
아무도 없는 허공에 지껄이는 것 같은 모습이지만, 정말로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당장 얕은 음영에서 무표정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인간이 있었으니까.
보거트 후작이 어이가 없다는 코웃음을 흘렸다. 얕아도 이만큼 얕을 수가 없는 그림자 안에 전신의 기척을 다 지우고 숨어있다니.
빛이 안 닿는 공간이 한 뼘만 있어도 어디든 잠입할 수 있다는 위명은 거짓이 아닌 게 분명하다.
“…대륙에 두 명밖에 없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다운 기술이네요.”
보거트 후작이 상대의 머리 위로 쫑긋 거리는 두 개의 동물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바이페드, 제국 안에서 극심한 차별을 받는 종족.
그런 종족이 제국의 가장 대표적인 귀족 영지 안에 있는 건 자살 행위겠지만, 이쪽에겐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랜드 어쌔신. 서면 상이 아니라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
“…”
“생각해보면, 다른 그랜드 어쌔신 한 명도 당신의 가족이었던가요? 혈족 전부가 아주 비상한-”
“용건은.”
씨알도 안 먹히는군.
그랜드 어쌔신이란 작자를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서면상으로 느껴지던 그 딱딱함은 실제 얼굴을 봐서도 그리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방금 그게 타겟입니다.”
보거트 후작이 공작저 안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도 멀리서나마 확인하셨죠? ‘악마의 그릇’을 상대로 무슨 짓을 하는지요.”
“…저 남자에 대한 암살 의뢰는 안 받아.”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저쪽은 이미 성황국 쪽에서도 암살자를 붙여놨어. 동종 업계 인원이랑 안 좋게 얽히는 건 사양이야.”
“아뇨. 죽이는 게 아닙니다.”
“…뭐?”
그럼 암살자를 왜 고용한단 말인가. 그런 의문이 담긴 대답이었지만, 보거트 후작이 싱긋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방금 전에 저 남자가 한 건 시작에 불과해요. 아마 이제부터 저 남자 주변으로 악마들의 활동이 본격화되겠죠. 그리고 그걸, 들키지 않고 맨정신으로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는 ‘인간’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
“고용한 이유를 아시겠죠?”
“…”
얼굴 전체를 후드로 꽁꽁 싸매고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표정을 찌푸리고 있을 상대에게 보거트 후작이 다시 싱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에 잠입하세요. 되도록 저 남자에게 가까워질수록 좋습니다. 눈에 띄는 활동이 있다면 모조리 제게 보고해주세요.”
잠시 뜸을 들인 보거트 후작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말을 덧붙였다.
“…잘하면, 당신 가족과도 마주칠 수 있겠네요.”
“…”
잠시 입을 다물던 상대가 실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쪽은 신경 안 써.”
“그런가요?”
“그래.”
다시, 그림자 안쪽으로 사라지기 직전에.
상대방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를 배신했으니까.”
“…”
그런 문장과 함께 사라지는 상대를, 보거트 후작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배신이라.’
그에게 있어서도 익숙한 단어다.
앞으로는 더 그래질 예정이고.
“-!”
문득, 그렇게 생각하는 그가 격렬하게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배에서부터 터져나오는 격렬한 기침, 입안에 핏물이 고일 정도로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는.
“…”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가를 메만졌다.
입 바깥으로 새어나오는 하얀 입김에, 비릿한 혈향이 섞여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줬으면 좋겠는데.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보거트.”
그렇게 중얼거린 보거트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이런 현상이 그에게 찾아올 때마다 항상 그가 버릇처럼 행하던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 있어야 할 로켓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와, 아스트리드, 아르민이 함께 찍힌 사진이 들어있는 로켓.
“…”
역시.
아르민에게 주고 나오길 잘했다.
약해지려고 할 때마다, 그쪽에 의존하는 안 좋은 습관을 떨어낸 느낌이니까.
대신.
그가 이를 악물고 그 로켓에 새겨져 있던 문구를 되새겼다.
“친구.”
앞으로도, 영원히.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도, 계속.
“조금만 더, 친구들.”
얼마 안 남았다.
이제, 정말로 코앞이다.
그가 그들에게 약속한 바를 이루기까지.
“…조금만 더, 아스트리드.”
그렇게 중얼거린 보거트가,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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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수습은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았다.
하얀 악마의 마기는 틀림없이 사람의 정신에 악영향을 미치지만, 다행히 지금은 그냥 조각 한 개짜리다. 심각한 후유증까진 없단 이야기지.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연회장이 조용한지, 자신들은 왜 방금 전까지 멍하니 서 있었나 궁금해하긴 할 테지만.
‘…그나마도 저기 덕분에 스무스하게 넘겼고.’
그렇게 생각하며, 연회장을 여기저기 순회하고 다니며 귀족들에게 인사하고 다니는 황제 폐하를 바라본다.
아무리 정신이 없고 뭐고 해도, 제국의 지배자의 앞이면 다들 그쪽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겠지. 이상함을 느끼더라도 강제로 평범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단 소리다.
덕분에, 연회장은 아까만큼은 아니지만 다시 평소의 분위기를 되찾는 모습이었다.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하지 않나?”
하지만, 그런 모습은 방금 연회장에 들어온 엘노어에겐 퍽 이상해 보이는 모습이었나보다.
그런 말과 함께 엘노어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분 탓 아닐까요?”
애써 지어낸 미소와 함께 그런 말을 뽑아낸다.
다행히 이 사람이 어디에서 뭘 준비하고 오느라 늦게 등장해서 다행이다.
정신을 잃은 유리아를 루시엔 편에 딸려서 곧바로 숙소에 보내버려서 증거를 인멸하지 않았다면, 자기 집에서 뭐하는 짓이냐며 길길이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이니까.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렇게 대답한 엘노어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내쪽으로 또각또각 걸어왔다.
새하얀 드레스, 귀걸이, 머리 위에 올린 장식에 반짝거리는 구두까지.
“…”
솔직히 말해서.
숨이 막히게 아름다운 모습이다.
오랫동안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그저 몸치장을 위해서 그랬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러면.”
그런 모습으로, 엘노어가 나에게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실까, 다우드.”
“…예?”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입꼬리를 살짝 비튼 엘노어에게 손을 잡혀 끌려간다.
데려가는 곳은 무대 중앙. 악단이 연주하는 스테이지 바로 앞이다. 마음에 맞는 남녀가 서로를 파트너 삼아 춤을 추는 곳.
“…엘노어?”
얼굴 근육을 경련시키며 말한다.
주변에서는 이미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내가 눈에 띌 정도로 과격하게 끌려온 것도 있지만, 대상이 다름 아닌 트리스탄 공녀니까.
파티의 주인 되시는 분이 파트너를 끌고 나왔으니 시선이 안 쏠릴 리가 없나.
“…”
그리고, 그걸 바꿔말하면.
이건 목소리 높여 선언하는 거다.
이 남자가 내 파트너다.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문제는.
“엘노어.”
낮춘 목소리로 재빠르게 속삭인다.
“저, 춤은 처음…!”
“알고 있네.”
“…예?”
“그대가 처음이라고 확신했으니 데리고 온 것이네.”
살풋 웃으며 그렇게 말한 엘노어가, 유쾌하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리드하겠네. 따라오기만 하시게나.”
그런 말과 함께.
엘노어가 자연스럽게 내 동작을 리드하기 시작했다.
춤은 어렸을 적 귀족의 소양이라며 아버지에게 간단하게 배운 게 다지만, 덕분엔 나도 주변에 크게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이게 내 복수네.”
문득, 그런 목소리가 다시 날아들었다.
“예?”
“엘판테에 돌아가면, 그대는 아마 높은 확률로 3학군으로 올라가겠지. 눈에 띄게 세운 공이 많으니 말일세.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나?”
엘노어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깃들었다.
“그대는 곧 ‘고학군’이란 말일세. 현장의 일선 전력과 똑같이 취급되는. 이제 학원 안에서 그대가 겪을 사건은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국면에 접어들 거란 말이지.”
“…”
그렇단 의미는.
“앞으로 그대에겐 새로운 사건, 기회, 그리고 수많은 경험들이 닥쳐올 거야. 그리고.”
급격한 턴.
서로에게 밀착하듯이 춤의 동작이 바뀌고, 그때에 맞춰 엘노어가 내 귀에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때마다, 그 ‘처음’을 내가 가져가겠네. 지금 이렇게, 그대의 ‘첫 춤’을 내가 앗아간 것처럼,”
“…”
“그대가 내 마음을 뺏어간 복수라고 생각하시게나.”
그것 참.
뭐라고 해야 할까.
“…무시무시한 복수네요.”
지극히 이 사람다운 복수다.
그렇게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그래. 근데 이거 들으니까 더 들키면 안 되겠네.]‘예?’
[이 사람이 유일하게 못 가져간 ‘처음’이 하나 있잖아?]‘…’
[네 동정이 누구한테 털렸는지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아니, 뭐.
그거에 대해선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답이 없기는 한데.
‘…그건 나중에 생각합시다, 칼리반.’
그렇게 답하며, 당장은 엘노어와 함께 무대 위에서 춤추는 일에 집중한다.
이러기 위해서 엄청나게 몸을 꾸미고 나온 게 분명하다. 실망시킬 수는 없지.
다행히, 내 조악한 춤솜씨로도 이 사람의 리드 덕분에 어떻게든 부드럽게 동작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도, 큰 탈 없이 넘어가는 건가.’
그리고, 그 춤사위처럼.
아마 당장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 같은 분위기다.
솔직히 트리스탄 공작령에 초대받을 때까지만 해도 진짜 무슨 큰 일이 터질까봐 조마조마 했는데, 그 정도까진 아니여서 다행인 느낌이지.
“…”
글쎄.
당장 유일하게 불안한 점이라면.
무대 위에서 춤추고 있는 나와 엘노어를, 황제가 수상할 정도로 관심 있게 쳐다보고 있다는 점일까.
마치.
부럽다는 것처럼. 뭔가 선망의 기색을 담아.
“…”
세실리아 11세는.
파티가 끝날 때까지, 그런 기색을 거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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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는 어떠셨습니까, 폐하?”
지팡이를 짚고 말없이 걷는 황제에게, 문득 그런 문장이 날아들었다.
마차 근처로 오자마자, 마부석에 앉아 채찍을 쥐고 있던 검성이 그렇게 질문한 것이지만.
황제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아무 말 없이 그를 계속 바라보기만 한다.
“…폐하?”
라드가 눈썹을 조금 찌푸리며 다시 질문했다.
“라드.”
“예, 폐하. 듣고 있습니다.”
“그대는 학교에 다녀본 적이 있나?”
이상한 질문이다.
하지만 대답하기 어려울 건 없지.
“아니요. 저는 기사단에서 나고 자란지라, 그런 곳을 접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렇군.”
황제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없어서 말이네.”
“…”
잠시 이어진 침묵 이후, 검성이 간신히 추가 질문을 꺼내들었다.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하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행복해 보이더군. 엘노어 말일세.”
“…그렇습니까?”
검성이 뭔가 불안함을 감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옆에서 항상 그녀를 보필하고 있기 때문에 더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거지만.
세실리아 11세는, 가끔 주변인들을 경악시키는 기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인간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뿜고 있는 분위기는 그런 짓을 저지르기 직전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고.
“라드.”
“예, 폐하.”
“나도. 학교에 가면, 누군가와 그런 멋진 인연을 맺을 수 있을까.”
“…예?”
라드가 소름이 끼친다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설마.
황제가, 제국의 지배자 본인이.
이제 와서 제국 산하의 교육 기관에 들어가겠단 소리인가?
군대에서 통수권자가 말단 병사로 입대하는 것보다 더 한 총체적 난국…!
“그냥 해 본 소리네.”
“…”
“황제가 학교에 간다고 하면 그것만한 촌극이 없지 않겠나. 엘판테에서 기절초풍 할 걸세.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많을 거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역시.”
그가 애써 미소지으며 대답을 꺼내들었다.
그래. 역시 황제도 그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아서 다행-
“그럼 황제가 아닌 상태로 가는 거라면…”
“…”
“…흐음.”
“…”
“음. 음. 어쩌면…”
라드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로서는, 틀림없이 불가항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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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