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d to Be Lov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7)
r 26 – 26. 만월제 (3)
●
“일어서라.”
엘노어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
그녀를 에워싼 인간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따라와라. 가야할 곳이 있다.”
“가야할 곳이라.”
“그래.”
적어도 다음 코스 요리를 대접하겠으니 자리를 옮기자는 기색은 아니겠지.
일단 그렇게 말하며 자신들이 잡고있는 병장기를 일부러 위협적으로 보여주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
하지만 엘노어는 거기에 당장 뭐라고 반응하는 대신 눈썹만 살짝 찌푸렸다.
“세상에 언젠가,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인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가진 모든 걸 받아 들여주는 인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그런 희망을 마지막으로 품은 게 언제였던가.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군.”
고저없는 목소리가 그렇게 흘러나오자, 주변에 있는 인원들의 표정이 일제히 찌푸려졌다.
척 봐도 보통 기량을 가진 인간들이 자신 주변을 둘러싸고 있음에도 뚱딴지 같은 소리나 하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희망은 위험한 것이라네, 그대들. 인간을 맹목적으로 만들거든. 나도 그동안 많이 속았지.”
“어이. 지금 무슨…”
엘노어가 근처에 있는 와인병을 들어 통째로 벌컥벌컥 마셨다.
도저히 공녀라는 위치에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행동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위화감이 없다.
예전부터 오랫동안 뭔가를 억눌러왔다는 기색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것들이 배신하지 않는 일들도 있나 보지.”
“…일어서라고 말했다.”
먼저 말을 꺼낸 남자 한 명이 살짝 짜증이 담긴 기색으로 엘노어에게 성큼 다가갔다.
억지로 그녀를 일으켜세우려는 의도가 분명한 행동이었다.
척 봐도 오랫동안 무예를 수련한 것이 분명한 거한에 비하면 엘노어는 수 배 이상 체급이 차이나는 모습이겠지만.
다음 순간.
엘노어가 거한의 팔을 낚아챘다.
“…!”
잡힌 부위에서 피가 터져나온다. 근육이 파열되고 뼈가 부러진다.
그저 접촉을 허용한 것만으로도 중상을 입은 거한의 눈이 크게 떠지는 사이, 엘노어가 그쪽의 머리를 잡고 테이블에 처박았다.
그 위로 방금 그녀가 마시던 와인병이 내려꽂힌다.
피가 튀고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무슨!”
주변에 있던 인원들이 기겁해서 검을 뽑아드는 사이, 엘노어가 피식 웃으면서 완전히 의식을 잃은 남자를 적당히 내던졌다.
그렇게 거대한 남자가 그런 동작만으로 종잇장처럼 쉽게 날아가는 광경은 거의 현실감마저 없을 정도였다.
“최근에는, 조금 많이 참고 있었거든.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아서 말일세.”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이라기보다 거의 맹수에 가까운 기세였다.
“진짜로, 힘들었다네.”
“죽여서는 안 된다. 계획의 최우선 대상이야. 어느 정도의 부상은 용인할테니, 생포해서…”
무기를 뽑아든 인원 중 한 명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1초 뒤에는, 엘노어가 날린 주먹질에 벽에 날아가 처박히고 있었지만.
“생포라. 그거 흥미롭군.”
대체 그녀가 언제 움직였는 지 확인조차 못 한 인간들이 뒷걸음질 쳤다.
상상을 초월하는 완력과 민첩성이다.
“난 그대들에게 그런 걸 베풀 생각이 없는데 말이지.”
엘노어가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맞아 날아간 남자가 바닥에 흘린 검을 주워들었다.
귀로는 아까 전에 다우드에게 들은 문장 몇 개가 되새김질 되고 있었다.
‘이 놈들, 악마 숭배자에요.’
‘최근에 좀 힘드셨죠?’
‘나중에는 몰라도, 지금은 그렇게 참는 게 오히려 더 안 좋아요.’
그녀가 피식 웃었다.
사실 악마 숭배자라는 말을 증거도 없이 신뢰하는 건 위험하다. 제국의 그 악명 높은 이단 심문소가 아닌 이상 악마와 마주치자마자 그 냄새를 맡는 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자신에게 그걸 말해준 건 다우드 캠벨이다. 그 남자의 말을 믿지 않으면 뭘 믿는단 말인가.
‘거기에.’
쌓인 걸 쏟아내라니.
도저히 싫어할 수가 없는 남자다.
광증을 가끔씩 이렇게 ‘쏟아내는’ 건 트리스탄 공작가에 유서 깊게 내려오는 해결법 중 하나다.
그 남자가 이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모른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하지만.
최근 들어 점점 광증을 억누르는 게 임계점에 왔다는 건 그녀도 동의하는 바였다.
즉.
“제국법에 따르면 악마 숭배자는 즉결 처형 후 보고해도 별 문제가 없다지. 안 그런가.”
피보다 새빨간 안광이 점멸한다. 이어서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은 살기가 공간 전체에 내려앉는다.
곧이어 그 자리에 있는 전원이 직감했다.
“…!”
소문이야 그들도 알고 있었다.
대륙 최고의 검술 명가. 그 중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특출난 재능으로 유명했던 공녀.
처음부터 상대하는 게 쉬울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상대하지 못할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전원은 그럴 확신을 가져도 되는 무인들이다.
다들 하나같이 실전이란 용광로에서 단련된 강철같은 인재들이지. 리버백 후작이 모든 역량을 다해 키워낸 정예 중의 정예들.
하지만.
지금 그들 앞에 있는 건.
고작 그런 ‘검술 뛰어난 인간’ 따위가 아니다.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인간 같은 감각이 모조리 지워지고, 그 기저에 자리한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흉폭함과 적의다.
이건. 이 트리스탄 공녀의 형태를 띄고 있는 ‘뭔가’는.
같은 인간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칠흑같이 검은 것이다!
“그러니. 죽일 각오로 덤비게.”
뭐, 아무튼.
그 남자에게 받은 선물이다.
얼굴은 여전히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지만, 아마 다우드가 봤다면 엘노어가 지금 ‘진심으로 웃고 있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치.
뒷감당 없이 누군가를 해하는 게 진심으로 즐거운 일이란 것처럼.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을 테니.”
이어서.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
결론부터 말하면, 3분 30초 걸렸다.
엘노어가 나 있는 곳까지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이 그랬다는 소리다.
“…말도, 안 돼…”
넋이 나간 기색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리버백 후작을 보고 있으면, 아마 평소의 나라면 같이 실소를 흘렸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조금 심하지 않나.
“…괜찮아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엘노어가 입술을 삐죽이며 피투성이가 된 인간 두 명을 내던졌다.
마치 전리품처럼 이걸 질질 끌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소름이 돋을 수준이다.
“뭐, 상쾌해지긴 했네. 당분간은 거뜬하겠군.”
“…”
아마 엘노어가 있던 곳은 식당의 입구인 1층이고, 나와 리버백 후작이 있는 곳은 최상층인 특실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그 간격을 그득그득 메우고 있던 최소 수십에서 백에 달하는 인원을 단신으로 죄다 썰어버리고 올라온 거다.
리버백 후작이 ‘기사단에 맞먹는다’라고 자부할 수준의 정예 병력을, 원피스 하나 입고서.
고작 몇 분 만에.
‘이게 진짜 괴물 아니야…?’
장담하는데, 이건 절체절명이 EX급으로 터진 나라도 못하는 미친 짓이다.
능력치 추가폭이 EX급이면 워낙 미친 수준이니까, 그래도 한 다섯 명에서 열 명 정도는 어떻게 커버하겠지. 그런데 정예 수준으로 훈련 받은 병력을 수십에서 백?
몇 초라도 버티면 다행이다.
옆에서 아까 전까지 그래도 자신감을 어느 정도 되찾던 리버백 후작이 순식간에 멘탈이 나간 것도 참작이 가능하단 소리지.
자신이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놓은 탑이 고작 이 사람 한 명에 의해 몇 분 만에 산산조각 났으니.
할 말을 잃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니, 엘노어가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는 듯 눈썹이 휘었다.
“아, 그렇지.”
털썩, 하고 피투성이 인간 두 명을 내던진 그녀가 내쪽으로 다가와 담담하게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별로 괜찮지 않네.”
“…예?”
“힘들었네. 다칠 뻔도 했고.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을 시킬 수 있단 말인가.”
“…”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나?”
입술에 침도 안 바른 거짓말이 분명하다.
생채기 하나 안 나고 멀쩡해 보이는데.
엄청 즐기면서 스트레스 다 풀고 온 것 아닌가…?
“물론 나야 좋았지만, 이래서야 이건 전혀 데이ㅌ, 아니, 그, 하여튼 그런 게 아니지 않나.”
“…”
“다음에 한 번 더 나랑 같이 외출하도록 하지. 알겠나?”
“…그럴, 까요?”
도저히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다.
“음. 그래야지. 나중엔 다른 것도 책임져야 겠지만.”
다른 게 뭔데.
뭘 책임져.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에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눈앞으로 느닷없이 창이 떠올랐다.
[System Message> [ 대상 ‘엘노어’의 현재 조건을 확인합니다. ] [ 현재 호감도 ‘친애’ 이상. 고유 디버프 ‘광증’이 당신의 영향을 받아 호전되었습니다. ] [ 전용 퀘스트의 발현 조건을 충족시킵니다. ] [ 전용 퀘스트 발현! > [ ‘엘노어 에리나리제 라 트리스탄’의 전용 퀘스트가 기프트 탭에 추가됩니다. ] [ 클리어 시 ‘친애’ 이상의 호감도가 해금됩니다. ] [ 클리어 시 메인 시나리오에 막대한 혜택이 주어집니다. ] [ 클리어 시 엔딩에 영향을 미칩니다. ] [ 대상 ‘기드온 게일스터드 라 트리스탄’이 당신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
잠깐만.
이건 또 뭐야.
전용 퀘스트는 게임 본편에도 없던 물건이다. 나도 처음 보는 시스템인데?
뭔가 눈이 돌아갈만한 보상들이 이것저것 주르륵 늘어져 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기드온?’
기드온이라고 하면, 그 놈이다.
현 트리스탄 대공. 황제 다음가는 권력자라 불리는 제국 핵심 인사이며, 일인군단이라 불리는 최강의 기사. 엘노어의 아버지.
그리고 엘노어가 최종 보스로 타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는 악역.
“…”
적어도 1챕터 진행 중에 이쪽이 나한테 관심을 가진다고 메시지가 떠오를 인물은 아니다.
대체 뭔데?
‘…아, 모르겠고.’
고개를 내저으며 창을 닫는다.
이건 나중에 살펴도 될 내용이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거지.
[System Message> [ 메인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 [ 퀘스트 완료 시간이 5분 이내입니다! 기록적인 위업! ] [ 최고 등급의 보상이 지급됩니다! ]“내가… 내가 그동안, 이룬 것들이…”
완전히 멘탈이 으스러진 리버백 후작의 모습과 함께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
뭐, 몇 년동안 완벽하게 쌓았다고 자부하던 공든 탑이 5분 안에 작살났으면 그럴 만 하다.
“포기하시죠, 리버백 후작님.”
엘노어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악마 숭배자와 연관이 있다는 게 들통나면 그쪽도 끝장입니다. 그네들이 가지는 사회적 시선을 생각하면 즉결 처형 말고는 대안조차 없으니까요. 차라리 지금이라도 자수하고 자비로운 최후를 맞이하시죠.”
“…”
목소리야 담담하지만 거기 담긴 내용은 살벌하다.
살려준다는 선택지야 애초에 안중에도 없나보지.
‘이렇게까지 포섭 이벤트를 작살냈으면 분기가…’
아마 여기서 원래 이어지는 분기는 포섭 거절 이후 ‘도주’나 이쪽에서 ‘전투’다.
그런데 지금 적이란 적은 엘노어가 다 작살냈으니 어느 쪽도 할 필요가 없지.
“…하.”
리버백 후작이 허탈하게 웃었다.
“설마, 이것까지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멘탈이 나간 상태로 주섬주섬 품에서 뭔가를 꺼내드는 리버백 후작을 바라본다.
아마 저기서 꺼내드는 건 저주가 담긴 장치일 것이다. 아주 잠깐이나마 사람이 타락한 힘을 빌려 쓸 수 있게 해주는.
‘이 뒤로 이어지는 건…’
그걸 일깨운 리버백 후작이 정화자로 각성, 그 뒤로는 곧바로 보스전에 돌입이다.
아마 이렇게 쉽게 끝냈으니 보스전도 어렵지 않게 끝낼만한 분기가 추가될 확률이 높…
[ 새로운 분기로 돌입합니다. ] [ 분기: 정수 출현 ] [ 난이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 보상에 엔딩 관련 아이템 ‘악마의 정수’가 추가적으로 지급됩니다. ] [ 대상 ‘???’가 당신에게 더욱 관심을 가집니다! ]“…”
뭐라고 시발?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 당황하고 있자니, 리버백 후작이 마침내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원래대로는 악마 숭배자들이 지급 받는 저주 받은 장치겠지만.
지금 녀석이 꺼내든 건, 마치 생물의 심장처럼 꿈틀거리는 ‘뭔가’다.
다만.
그 중심부에, 그 끝을 알 수 없이 찐득거리는 암흑이 담긴듯한.
그걸 보자마자 등골을 타고 냉기가 주욱 미끄러진다.
상황이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전신을 타고 찌릿거리며 올라온다.
‘악마의 정수..,!’
지랄 마.
아니, 진짜 지랄 마라.
저건 절대로 1챕터에서 튀어나와도 되는 물건이 아니다.
단순히 인간이 타락한 힘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과, 저걸 처먹고 ‘마인魔人’이 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엘노어, 팔 잘라요! 저거 못 먹게!”
“…?”
아마 처음 보는 게 분명한 내 격렬한 반응에 엘노어가 당황하면서도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검이 곧바로 리버백 후작을 향해 뛰쳐나갔지만.
“신의 은총을, 영접할지어니.”
리버백 후작은 이미 그 정수를 자신의 입 안에 밀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
-!!!!
-!!!!!!!!!!!!!
황혼의 눈동자 건물 전체가.
밀려나온 어둠에 으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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