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d to Be Lov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0)
r 29 – 29. 정화자 (3)
●
“이게 되네?”
“…”
“…”
엘리야가 내뱉은 말에 주변으로 침묵이 쭉 깔렸다.
아마 모두 똑같은 감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주변에는 바닥에 쓰러져서 꿈틀거리고 있는 맨이터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처음에는 다들 반대하더니.’
엘리야가 검을 어깨에 들쳐메며 피식 웃었다.
탈리온이 맨처음 모두에게 ‘계획’을 얘기했을 때는 다들 미친 놈인 줄 알았지.
이 자리에 급하게 호출당한 엘리야조차, 아마 다우드 캠벨이란 인간이 이 계획을 짠 게 아니라고 했다면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다.
이런 시가지 내부에 마수가 출몰하는 비상사태에서 가장 정석적인 해결 방법이라면, 기사단을 호출하고 출동까지 버티면서 민간인들을 대피시키는 것이다.
누가 뭐라해도 제국 최강의 전력은 기사단이고, 엘판테 내부와 그 근처에는 항상 거주중인 기사단이 있으니까.
하지만, 탈리온이 알려준 다우드의 계획은 어떤가.
‘…학생 십수 명, 기사 몇 명, 그리고 아카데미 교수진 몇 명으로 이 숫자를 다 때려눕히자니.’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계획의 내용을 떠올린 엘리야가 헛웃음을 흘렸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면 그냥 ‘우연히’ 이 근처에 있는 인원들을 얼기설기 그러모아서 마수들을 상대하자는 거다.
단적으로 말해서, 자살 희망이지.
악마의 힘이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낸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마수는 인류의 주적으로 분류되는 놈들이다.
아무리 지능이 퇴화했다지만 이능을 다루는 초인조차 버거워하는 단순무식한 전투력이 있으니까.
그래서 마수를 상대하는 건 기본적으로 ‘더 많은 인간’이 ‘더 적은 마수’를 상대하는 걸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20명도 안 되는 인간이, 몇백에 가까운 마수를 상대로 일방적으로 제압해버린 지금 상황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란 뜻이다.
그 계획을 짠 동기는 더더욱 어이 없다.
‘…사상자가 많이 나온다나.’
정규 기사단이 출동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민간인을 대피시켰다가는 필연적으로 그 과정에서 사상자가 생긴다.
하지만, 그 전에 이 마수들을 모두 제압한다면 그런 위험 요소조차 모조리 제거할 수 있지.
진짜 한결같은 사람이다.
무슨 상황이 어떻게 벌어지건 일단 사람부터 구하고 보자는 신념을 보면 용사 후보인 자신보다 더 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그런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그러게. 그게 되네.”
기사학부 학장 콘라드 발타도르가 그녀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총장 아탈란테와 함께 전투에 참여한 인원들 중 그녀와 같이 이 계획에 찬성한 인원이었지.
이쪽의 발언권이 워낙 강해서 반대 기류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계획이 실행되었지.
“학장님과 총장님이 이 자리에 있어서 다행이에요. 한 분이라도 안 계셨다면 이런 성과는 불가능했을지도요.”
정말로 그랬다.
아니, 정확히는 여기 있는 인간 중 한 명이라도 비었다면 이런 성과는 절대 불가능했으리라.
“…하나라도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라.”
콘라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그거 말인데. 나하고 총장님이 왜 이 근처에 있었는지 아냐?”
“예?”
“그 녀석이 추천해주더라고. 이 근처에서 저녁이나 한 끼 하고 있으라고.”
“…”
엘리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가요?”
“티켓까지 구해놓고 그런 말을 하길래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그랬지. 그런데 마침 우연히 그런 일이 터지지 뭐냐.”
“…”
문득, 어떤 가설이 엘리야의 머릿속에서 불현 듯 떠올랐다.
콘라드의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구체화되는 가설이었다.
“그리고, 저기 있는 저 숫기 없는 녀석. 마수 연구학부 학생.”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마수학부 2학년인 에반 크레이머가 있었다.
엘리야로서도 기억에 남아있는 얼굴이었다.
이전에 다우드와 같이 오리엔테이션에서 모의전에 참여할 때 진행을 맡고 있었던 학생이니까.
다우드가 탈리온에게 콕 집어서 이 학생도 찾아내라고 했다던가.
“아마 쟤 없었어도 이런 성과는 못 냈을걸?”
확실히, 그랬다.
마수는 그 무식한 전투력만큼이나 갖가지 온갖 해괴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아무리 그쪽과의 전투가 주 업종인 기사라고 해도 그걸 전부 다 외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런 것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괴짜들이 아닌 이상에야.
저 에반이라는 학생이 적절한 약점 공략법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모두가 이렇게 수월하게 전투를 끝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쟤도 그 녀석이 꼬셔서 축제 오라고 했다던데. 이왕이면 이 근처로. 은인의 요청이라 못 거절했고.”
“은인이요?”
“마수 연구학과는 기사학부 중에서도 가장 인기 없는 곳이야. 올해 안으로 폐쇄까지 고려 중이었거든.”
“…”
“그런데 내가 ‘우연히’ 모의전 스테이지 확인해보니까 제법 능력 있는 놈들이더라고. 그래서 그 안은 물렀어.”
엘리야의 동공이 살짝 떨렸다.
그래, 여기서 이 인간이 말하는 우연히라는 건.
마침 콘라드가 눈여겨보고 있는 ‘어떤 인간’ 때문에 방문이 이뤄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란 거다.
그리고 그렇게 온존된 마수 연구학과의 학생이, 마침 이 근처에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좋은 타이밍에.
누군가의 요청을 받아서.
“…”
가설이 가시화된다.
이번 전투에 참여한, ‘정화의 집’ 재단 관련된 학생들 역시 다우드가 뭔가 손을 써놔서 괴물로 변이하지 않았다고 했던가.
이 자리에 출동한 기사들 역시, 그 다우드란 인간이 미리 총장에게 부탁해서 불러놓은 인간들이고.
“…하.”
떨어트려 놓고 보면 전혀 관계없는 우연의 연속이지만, 그 모든 우연을 이어주는 단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
“저, 학장님.”
“어.”
“그 인간, 한참 전부터 이걸 대비하고 있었던 건가요?”
콘라드가 대답하는 대신 실소를 흘렸다.
지금까지 했던 행동, 그것을 통해 다우드가 만난 인간들, 그로 인해 이어진 결과.
전부가 그런 정황을 가리키고 있다.
다우드 캠벨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위협에 맞서 처음부터 대응을 설계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인원 전부.
처음부터 이런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상정’하고, 철저히 계산해서 모아둔 거다.
‘한 명이라도 없으면 성사가 불가능 할만하네.’
처음부터 끝까지 죄 다 빈틈없이 짜놓은 구도니까 그렇지!
엘리야가 허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짜 뭐하는 사람인데요, 그 사람?”
“몰라. 애초에 진짜로 전부 우연의 연속일 수도 있고.”
콘라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정말로 그랬으면 하나 더 시켰을 것 같진 않다만.”
“예?”
“너, 전투에서 탈리온 못 봤지?”
그렇긴 했지.
그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좋은 전력이 되었을 텐데, 모습이 안 보여서 의아하긴 했다.
“걔 지금 뭐 하고 있을 것 같냐?”
“…”
엘리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인간, 설마 여기서 뭔가 더 꾸미고 있나요?”
대답 대신 웃음이 돌아왔다.
무슨 의미인지 되물을 필요도 없는 호탕함이 깃들어 있었다.
“정말이지.”
뭐 이딴 인간이 다 있단 말인가.
엘리야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쭉 꺾었다. 전투의 피로를 털어내기 위한 행동이었다.
“응?”
시야 전부를 뒤덮은 ‘회색’을 발견한 것은, 그 덕분이었다.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온 연무처럼, 끝도 없이 빠르게 확장한다. 하늘을 덮고, 공간을 덮고, 모든 것에 침식하듯이 확장한다.
이어서.
모든 것이 멈추었다.
●
시간이 굳었다.
아니, 뭔가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 문장 그대로.
“…”
의식은 멀쩡하다. 가슴팍이 뚫린 상태에서 이렇게 또렷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세상은 제대로 인식된다.
하지만.
내 의식을 제외한 모든 것이 그대로 정지해있다.
눈앞에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리버백 후작도. 뚫린 내 가슴팍에서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지던 혈액도. 심지어는 바람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공기의 흐름조차 멈춘 것이다.
모든 것이, 회색으로 물들어.
마치 사진으로 찍은 풍경처럼 굳어있다.
“…”
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시야 끄트머리에서 뭔가가 ‘내려온다’.
중력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위쪽에서 부드럽게 내려오는 것이 세계의 물리법칙조차 적용되지 않는듯한 이질적인 모습이다.
발목 끝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머리카락. 핏빛보다 새빨간 진홍색 눈동자.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
익숙하다면 익숙한 모습이다.
엘노어를 몇 년 정도 성장시키면 아마 저거랑 똑 닮은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건 엘노어가 아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알겠다.
엘노어라면. 아니, 그냥 인간이라면 누구든.
이 정도의 ‘악의’를 뿜어낼 수가 없다.
‘회색 악마.’
게임 안에서는 단 한번도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냥 종막에서 엘노어의 몸에 강림하여 보스전을 치루는 형태로만 등장하니까.
그러니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형체는 그 ‘편린’이다.
리버백 후작이 자기 몸에 처넣은 악마의 정수는 그저 악마의 잔재가 조금 담긴 물건이지만, 악마의 조각은 전부 다 모이면 진짜 악마를 강림시킬 수 있는 것들이지.
시나리오 안에 흩뿌려진 회색 악마의 조각은 여러가지가 있고, 게임 안에서는 여러 사건을 걸쳐 전부 엘노어에게 모인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필연이지.
즉, 지금 이 사람이 품고 있는 건 그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단 소리다.
가지고 있는 ‘권능’의 위력은 회색 악마 본체의 1할도 채 되지 않을 거고, 실체화 할 수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겠지. 기껏해야 몇 십초.
그런데도.
[ 위기 상황이 감지됩니다. ] [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수준으로 판단합니다. ] [ 스킬: 절체절명을 EX등급으로 적용합니다. ]그냥 이 녀석을 앞에 두는 것만으로도.
비활성화 되었던 절체절명이 다시 켜진다.
“…”
어이가 없네, 시발.
그냥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세계 전체가 멈춰서고, 나는 그냥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즉.
난 지금 그냥 저거랑 눈싸움을 오래 하기만 해도 죽는다.
그 정도로 격차가 난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엘노어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악마의 조각’이 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 ¡̛̰̖̲͉̜̿͑̈̍̕̚͟͝Ą̷̦̘͉̹͓̝́̾͂͂̂͂̅͡͝ø̵̧̡̜̲̗̳̟̀̒̽̊͆̃͒̎̚͟͟ͅ Ç̳͈̟̯̻̾̿̔͆̃̋́͌͘̕Ḁ̷͉̞͎̯̥̫̳̻́͆͊̉̀̾͘͞·̴̢̥̱̝̘̟͎͊͐͌̿̎̋̕͜͟͝͞Î̶̻̙͓͓͎̫͛́͌̀̆͊͒͆̚±̦͖̺̗͎͍̰͊̏͒̉̍̉̚͟͠×̵̢̯̥̟͖̞̔̈́̃̚͘͞·̶̛͈̪͚̹̺͖͉̪̇̎̃̏̃̎̚͡ͅ¡̴̹͉̤̭̥̒̇̎̅͘͝ͅ¹̖̯̰̰̦̝͐͆̿̌̃͂͟͠Ö̵̩̭͇̹̭̤͌͆̔̀̆̚ 상황이 ¡̛̰̖̲͉̜̿͑̈̍̕̚͟͝Ą̷̦̘͉̹͓̝́̾͂͂̂͂̅͡͝ø̵̧̡̜̲̗̳̟̀̒̽̊͆̃͒̎̚͟͟ͅ Ç̳͈̟̯̻̾̿̔͆̃̋́͌͘̕Ḁ̷͉̞͎̯̥̫̳̻́͆͊̉̀̾͘͞·̴̢̥̱̝̘̟͎͊͐͌̿̎̋̕͜͟͝͞Î̶̻̙͓͓͎̫͛́͌̀̆͊͒͆̚±̦͖̺̗͎͍̰͊̏͒̉̍̉̚͟͠×̵̢̯̥̟͖̞̔̈́̃̚͘͞·̶̛͈̪͚̹̺͖͉̪̇̎̃̏̃̎̚͡ͅ¡̴̹͉̤̭̥̒̇̎̅͘͝ͅ¹̖̯̰̰̦̝͐͆̿̌̃͂͟͠Ö̵̩̭͇̹̭̤͌͆̔̀̆̚ ] [ ¾̶͕̻́̊̇î̸̙̪͎̥͎͍̲͔̔̈́̀̃͗́̚̚͠͠͝͠ ̷̨̨̣̭̭͓̱̼͚̮̼̭̟̱̾̄͑̈́̋͝¼̸̢̛̞̟͓̗̙͗͊̆̓̈͘͜͠Ǫ̵̛̠̟̲͔̟̀̔̍͛̈́°̶̨̙̠͆͋̔͛̒̀̾̆̉̏̕³̶̟̝̙͔̥̖̯̠̒̈̋̃̇̾̃̽̆̅͊͆̋̋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¾̶͕̻́̊̇î̸̙̪͎̥͎͍̲͔̔̈́̀̃͗́̚̚͠͠͝͠ ̷̨̨̣̭̭͓̱̼͚̮̼̭̟̱̾̄͑̈́̋͝¼̸̢̛̞̟͓̗̙͗͊̆̓̈͘͜͠Ǫ̵̛̠̟̲͔̟̀̔̍͛̈́°̶̨̙̠͆͋̔͛̒̀̾̆̉̏̕³̶̟̝̙͔̥̖̯̠̒̈̋̃̇̾̃̽̆̅͊͆̋̋판단합니다. ] [ ¾̶͕̻́̊̇î̸̙̪͎̥͎͍̲͔̔̈́̀̃͗́̚̚͠͠͝͠ ̷̨̨̣̭̭͓̱̼͚̮̼̭̟̱̾̄͑̈́̋͝¼̸̢̛̞̟͓̗̙͗͊̆̓̈͘͜͠Ǫ̵̛̠̟̲͔̟̀̔̍͛̈́°̶̨̙̠͆͋̔͛̒̀̾̆̉̏̕³̶̟̝̙͔̥̖̯̠̒̈̋̃̇̾̃̽̆̅͊͆̋̋을 EX등급으로 적용합니다. ]눈앞의 창이 파손되면서.
능력의 일부가 ‘뜯겨나간다’.
“…!”
물론 정화자도 절체절명을 다운그레이드 시키긴 했지만, 이건 그런 능력과는 궤가 다르다.
그냥, 이 녀석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시스템’ 전체가 무력화 되는 느낌.
“…”
그래, 원래도 회색 악마는 세계관에 그런 능력으로 묘사되기는 한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세계의 기본적인 법칙마저 기형적으로 비틀어버리는 초월적 존재.
다시 한 걸음, 악마의 조각이 내게 다가온다.
내 지척까지 다가온 녀석이 곧바로 내 볼을 붙잡는다.
표정에 떠올라 있는 것은 열기에 녹은 것 같은 뇌쇄적인 웃음이다. 언제나 무표정인 엘노어의 얼굴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더욱 이질적이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 밑바닥에 끈적끈적하게 녹아 들러붙어 있는 건 끝이 없는 욕망이다.
자신의 전부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마치 내 귀에 고함을 치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한동안 그렇게 날 내려다보며 서 있던 녀석이, 내 귓가에 머리를 내렸다.
이내 그 입이 열린다.
“사¾ú´ÂÁö´랑Á¦ ÇÏ¿¡해”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뇌수가 튀겨지는 것 같다. 그 정도의 압력이다.
피부가 짓무르는 느낌. 혈관 전체에 누가 타르라도 부어넣은 것처럼 역겨운 감각이 온 신경계를 타고 찌릿거리면서 흐른다.
아마 지금 내가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면 그대로 주저앉아서 하염없이 구역질만 하고 있지 않을까.
몸 전체를 저미는 것 같은 끔찍한 감각에 시달리고 있자니, 녀석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내게 떨어졌다.
그리고 내 가슴쪽으로 손을 뻗어, 마치 그쪽에 있는 다이얼이라도 돌리는 것처럼 손을 슬쩍 비틀었다.
그러자.
시간이 ‘되감겼다’.
그 부분만 마치 도려내어 동영상을 뒤로 감은 것처럼, 리버백 후작이 내뿜은 마기에 관통된 내 가슴이 복구된다.
“…”
통증이 사라진다. 몸 전체에 활력이 돈다.
그와 동시에.
뚫린 가슴팍으로 문신이 하나 새겨진다.
[ ‘타천의 인장’을 얻습니다. ] [ 타천의 인장은 Ç̳͈̟̯̻̾̿̔͆̃̋́͌͘̕Ḁ̷͉̞͎̯̥̫̳̻́͆͊̉̀̾͘͞·̴̢̥̱̝̘̟͎͊͐͌̿̎̋̕͜͟͝͞Î̶̻̙͓͓͎̫͛́͌̀̆͊͒͆̚±̦͖̺̗͎͍̰͊̏͒̉̍̉̚͟͠×̵̢̯̥̟͖̞̔̈́̃̚͘͞·̶̛͈̪͚̹̺͖͉̪̇̎̃̏̃̎̚͡ͅ¡̴̹͉̤̭̥̒̇̎̅͘͝ͅ하는 효과를 Ç̳͈̟̯̻̾̿̔͆̃̋́͌͘̕Ḁ̷͉̞͎̯̥̫̳̻́͆͊̉̀̾͘͞·̴̢̥̱̝̘̟͎͊͐͌̿̎̋̕͜͟͝͞Î̶̻̙͓͓͎̫͛́͌̀̆͊͒͆̚±̦͖̺̗͎͍̰͊̏͒̉̍̉̚͟͠×̵̢̯̥̟͖̞̔̈́̃̚͘͞·̶̛͈̪͚̹̺͖͉̪̇̎̃̏̃̎̚͡ͅ¡̴̹͉̤̭̥̒̇̎̅͘͝ͅ합니다. ]“…”
그래도 이건 좀 알아 볼 수 있게 해주면 안 되냐.
어이가 없어서 그걸 쳐다보고 있자니, 악마의 조각이 입을 가리고 쿡쿡거렸다.
이내 녀석이 웃는 얼굴로 내 앞에 턱을 괴고 쪼그려 앉았다. 빙글빙글 거리는 모습이 ‘더 부탁할 것 없어?’라는 느낌이다.
“…”
그 본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지만 세계관 최강자급 되는 녀석이 나한테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건 그것 자체로 뭔가 기묘한 느낌이다.
대충 이런 느낌일거라곤 생각했지만.
[ 스킬: 치명적인 매력 ] [ 등급: ??? ] [ 악惡 성향을 가진 인물들에게 호감을 사기 쉬워집니다. 성향이 극단적일수록 효과가 강화됩니다. ]성향이 극단적일수록 효과가 강화된다는 건, 그냥 존재 자체가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한 기폭제인 회색 악마는 날 보자마자 극단적인 애정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문제는.
이게 미래에 어떤 방식으로 작용될지는 나도 모르겠단거다.
엘노어와 엘리야랑 만나서 관계가 진전된 것만으로도 1챕터부터 시나리오가 이 정도로 비틀렸다.
그런데 이 녀석하고도 친분이 맺어지면, 그건 대체 어떻게 되는건데?
‘…언제는 내가 그런 거 신경 썼나.’
피식 웃으며 창을 돌린다.
어차피 당장은 이 녀석의 도움이 없으면 위기를 넘길 수도 없다. 필요한 건 다 받아가야지.
[System Message> [ ‘스킬 복사권’을 사용합니다! ] [ 대상 ‘엘노어’에게서 스킬 1개를 복사해올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녀석은 엘노어의 몸을 매개로 강림한 상태다.
즉, 게임적 사고로 접근해보면.
지금 이 복사권을 사용하면 엘노어와 시스템적으로 동일한 취급받는 이 녀석의 스킬을 하나 복사해 올 수 있단 소리지.
“…”
말도 안 되긴 하네.
뭐, 안 되면 엘노어의 스킬을 하나 가져오면 그만이지. 그것만 해도 손해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창을 조작하자, 복사해올 수 있는 스킬들의 목록이 주르륵 떠올랐다.
‘불굴, 정점의 재능, 심안, 전투의 주인…’
내가 기억하고 있는 엘노어의 사기 스킬들 목록이 주르륵 스쳐지나가고, 그 끄트머리까지 스크롤이 내려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위치해 있는 건.
[ 스킬 : 판데모니엄의 왕 ] [ 등급: A ] [ -위대한 군주를 경배하라!- ] [ 지옥의 지배자가 가진 위엄을 만천에 드러냅니다. 스킬 사용 시 5분 동안 악마 타입에 대한 상성 우위를 갖습니다. ]그래. 역시 게임 시스템 위에 지어진 세상 아니랄까봐 가설이 정확하게 적중한 모양이다.
설명만 봐도 절대 엘노어가 들고 있을 스킬은 아니거든. 이거 게임 안에 등장하는 모든 ‘악마’ 보스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다.
‘…탐나는 건 많지만.’
다른 것도 아닌 그 회색 악마의 조각이 가진 스킬셋이다. 강력한거라면 셀 수도 없이 많겠지.
일단 이걸 제외하곤 전부 다 스킬 설명이 하나같이 깨져서 알아볼 수가 없는 것이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사용시 내 생명력을 대폭 깎는다거나, 주변에 친한 인물 누군가를 죽여서 발동시킨다거나, 그런 흉흉한 효과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애초에 지금 얻을 것도…’
어느 구간에서, 반드시 사용될 스킬이다.
이걸 가지고 있어야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거든. 당장 상황에도 도움이 되고.
그런 생각과 함께 스킬을 복사해온다.
[ ‘스킬: 판데모니엄의 왕’을 복사해옵니다. ]그런 창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악마의 조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마 자세한 건 모르지만, 방금 찰나의 순간만에 내 상태가 일부 변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자신과 나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는 모습이 아마 자신의 능력 중 일부를 가져갔다는 것도 알아차린 모양이고.
“!”
녀석이 활짝 웃는 얼굴로 박수를 짝짝 쳤다. 축하한다는 기색이다.
조금 더 성숙한 엘노어의 모습으로 유아기 소녀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위화감이 장난 아니다.
하지만, 이 조각의 본체가 뭔지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녀석은.
이렇게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세계 전체를 멸망시킬 수 있는 녀석이니까.
“…”
그리고, 시간이 마침내 다 한 모양이다.
현현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이 소진되어, 발끝부터 조각조각 나 주변으로 흩날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악마의 조각이 피식 웃었다.
녀석이 다시 시선을 들어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미소 짓는 얼굴로, 악마의 조각이 입을 열었다.
“사¾ú´ÂÁö´랑Á¦ ÇÏ¿¡해”
주파수를 마구 올려서 노이즈가 잔뜩 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가, 다시 고막을 두드린다.
“그러C¾ð¾î°¡ UC¾ð¾î°¡ U니까,̨̝̻̂̂̈́̾̀̃̐̒̀̕”
하지만.
“나중에C¾ð¾î°¡ UC¾ð¾î°¡ U또C¾ð¾î°¡ U 봐.”
형체가 완전히 스러지는 바람에 끝마치지 못 한 마지막 문장은.
“그때는 꼭. 너를-”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또렷한 목소리였다.
●
회색이 세계에서 물러나며,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다시 아카데미 외벽의 출입구 근처다. 눈앞에 있는 건 리버백 후작이고, 벽에는 엘노어가 쳐박혀 있다.
〚…대체, 방금…?〛
리버백 후작이 얼떨떨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언가가 등장했다가 사라졌다는 건 알겠지만, 그게 뭔지는 도통 모르겠다는 기색이다.
겉보기에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딱 하나만 빼고.
일어서면서, 리버백 후작의 턱에 강렬한 어퍼컷을 때려넣는다.
〚…!〛
거의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리버백 후작의 몸이 공중으로 수m를 치솟았다.
음, 그래.
이 서늘하고 묵직한 감각. 오랜만이다.
“야.”
피식 웃으면서 황급히 공중에서 균형을 회복하는 리버백 후작을 바라본다.
몸에 활력이 넘친다. 거의 새로 태어난 기분마저 들 정도다.
“라운드 2다. 덤벼.”
이제 등 뒤를 보이던 수치스러운 나날은 끝났다.
용사 후보를 한 방에 쳐날리던 다우드 캠벨로 돌아가서.
이 녀석에게 예절을 주입할 시간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