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d to Be Lov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0)
r 39 – 39. 영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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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신성력은 선택받은 자들이 타고나는 이능인 마력이나 법력과 달리, 신의 피조물인 인간 모두의 몸 안에 기초적으로 존재하는 기운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실전에 사용 가능할 정도로 수련하는 건 상당한 난이도가 있으며..”
그리버 란펠트 교수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그렇게 말을 이었다.
수업 분위기는 아무리 좋게 말해줘도 개판이었다.
애초에 인원수조차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그나마도 그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는 놈들이 태반이다.
원래대로는 조금이라도 그의 눈에 띄어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애 썼을 놈들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무시하고 있다.
‘…그 빌어먹을 녀석이 악마 숭배자만 아니었어도.’
그가 속으로 리버백 후작을 떠올리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젊고 잘 나가는 사업가이길래 어디 단물이라도 빨아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속 빈 강정일 줄은 몰랐다.
그래. 속 빈 강정.
그리버에게 악마 숭배자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이득을 안겨줄 수 있는 대상인지 아닌지만 중요할 뿐.
그런 의미에서.
“저기, 질문이 있습니다.”
태연자약하게 손을 들고 질문하는 이 녀석은, 그리버 입장에서는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을 녀석이었다.
다우드 캠벨.
이전에 마수 소동 때 그의 비상용 제구를 챙겨가 결계를 펼쳤던 녀석이다.
“그럼 신성력의 총량과 가호의 숙련도를 빨리 올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성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실제로 사용함으로서 숙련도를 올리는 방법이겠지.”
그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그렇게 답했다.
“당연한 사실을 묻지 마라. 엘판테의 학생치고는 너무 수준 떨어지는 질문이군.”
“예. 죄송합니다.”
“수련에 정진하도록. 듣는 내가 다 부끄럽다.”
일부러 그렇게 난폭한 언어를 써서 상대방을 깎아내렸지만, 정작 그걸 들은 녀석은 화난 기색 하나 없이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
등골을 타고 소름이 쭉 돋는 것을 느낀 그리버가 애써 그쪽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쪽에서 분명히 전달되는 이질적인 느낌이 있었으니까.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마치지.”
그러니 굳이 저 녀석하고 오래 마주치고 싶지도 않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각에 수업을 끝낸 것도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복도를 따라 쭉 걸어내려가며, 그리버는 방금 보았던 다우드란 녀석에 대해 떠올렸다.
‘…그놈하고 닮았단 말이지.’
리버백 후작을 통해서 한 번 말을 나눠본 적이 있는 인간.
스스로를 선각자라고 칭하던 이상한 녀석.
얼굴도 뭣도 본 적이 없지만, 그쪽에서 느껴졌던 소름 끼치는 인상은 똑똑히 기억한다.
지금 저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과 똑같다고 해도 될 정도로 불길한 감각이었다.
둘이 동일인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뭐, 어느 쪽이건 앞으로는 마주칠 일 없겠지만.’
자신의 집무실에, 그가 피식 웃으면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책상 아래 칸에서 꺼내든 서한에는 그가 ‘팔아넘길’ 정보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전부 그가 아카데미에서 교수직을 이어가며 입수한 고급 정보들과 기밀이다.
‘제국은 항상 적이 많으니까.’
최대한 빠르게 이것만 팔아넘기고 그대로 잠적해버리면 그만이다.
이걸로 인해 누군가 죽을 수도 있고, 막대한 피해를 볼 수도 있겠지만.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예, 뭐. 행복한 미래를 그리시는 와중에 미안한데.”
갑자기, 지척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뒤통수로 강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쁜 짓만 골라 하시면서 스스로만 무사하길 바라는 건 너무 양심이 없지 않습니까?”
익숙한 목소리다.
방금 전까지 그와 마주보고 있었던 인간이니까.
다우드 캠벨. 그리고 무너진 그의 몸을 짓밟고 있는 건 트리스탄 공녀였다.
“…너희들, 이게 무슨 짓이지! 어디 개버러지 같은 남작가 새끼 주제에에엑-!”
문장이 괴상하게 끝난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엘노어의 발길질 한 방에 팔이 곧바로 탈골되었으니.
“…저기, 엘노어. 시작부터 너무 과격한데요.”
다우드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엘노어는 어깨만 으쓱였다.
“살짝 어루만져주었을 뿐이네.”
“…”
살짝?
이게?
그런 시선이 엘노어에게 날아가 꽂혔지만, 그녀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대를 욕하지 않았나.”
“…”
“많이 참은 것이네.”
“…뭐, 아무튼.”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우드가 이내 품 안에서 성서를 꺼내들었다.
신성학부 신입생들에게 공통적으로 지급되는 기초적인 가호를 모아둔 교재다.
“…잠시만요, 그러니까…”
그리고 찡그린 눈으로 그걸 한참이나 읽던 다우드가, 마침내 떠듬떠듬 뭔가를 바깥으로 꺼내놓았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기도문이었다.
“-그리하여 온기가 당신에게 깃들 것입니다. 치유Heal.”
이어서 대충 얼기설기 엮인 흰색의 신성력이 그에 팔에 비척비척 내려앉았다.
“…음, 이런 거군. 감은 잡았다.”
“…”
그리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뿌듯하게 말하는 다우드를 바라보았다.
이건 신입생 기준으로도 형편 없는 수준의 가호인데, 대체 뭘 뿌듯해 하고 있단 말인가.
물론, 그런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자마자 다시 그의 다른 쪽 팔이 엘노어의 발길질에 아작났다.
“어어어어어억-!”
“…저기, 엘노어. 좀 천천히 가야 한다고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는데요.”
“이 정도면 천천히 아닌가?”
“…”
“흠. 이상하군. 내가 공작가에서 교육 받기로는 적을 심문할 때는 분명히 피부를 벗기는 것부터 시작-”
“너, 너희들! 원하는 게, 원하는 게 뭐야아악-!”
그리버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그렇게 말하자, 다우드가 다시 헛기침을 하면서 답했다.
“저, 이미 알고 온 거니까 서로 쉽게쉽게 갑시다. 이거, 아카데미 안에 있는 누구한테 팔아넘기려고 했어요?”
“…”
찾아드는 격통 속에서도, 그리버가 잠시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그도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지금 아카데미 안쪽에 숨어들어 있는, 선각자가 심어둔 끄나풀의 존재.
이걸 밝혔다가는 그 역시 절대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무슨 소리 하는지 몰라아아아아악-!”
이번엔 문장을 끝마치지도 못 하고 왼쪽 다리가 작살났다.
다우드도 이제는 포기한 기색인지, 그저 머리를 감싸쥐고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말할게! 말 할테니까 제발-!”
결국, 그가 눈물과 침을 질질 흘리면서 관련자들의 이름을 줄줄이 토해내었다.
옆에서는 다우드가 흠, 흠, 하면서 그걸 모조리 다 받아적고 있었고.
“이게 전부인가요?”
“전부, 그게 전부야…! 제발, 의사를 불러줘…!”
그리버가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로 그렇게 애걸복걸했다.
‘그래도 이 괴물보단 이쪽이 좀 더…!’
그가 그나마 옆에서 뭐만 하면 그의 팔다리를 수수깡처럼 분지르는 공녀보다는 적어도 그쪽을 말리는 이 남자에게 매달려보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에 다우드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무슨 의사까지 갑니까. 제가 치료해드릴게요.”
“…”
“저 나름 신성학부 지망생이니까. 가호 좀 쓸 줄 알아야죠.”
엘판테에 어울리지 않는 수준 낮은 학생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죠?
씩 웃으며 그렇게 첨언한 다우드가 다시 떠듬떠듬 기도문을 외웠다.
처참한 신성력 운용과 가호 수준 덕분에, 부러진 팔다리가 전부 회복된 건 한참이 지난뒤였다.
“허억… 허억…”
그리버가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간신히 일어났다.
온 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지만, 그래도 마침내 사지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리버가 간신히 일어서며 속으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새끼들, 죽여주마…!’
하지만,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 자리에서 일단 벗어난 다음, 어떻게든 방비를 마련해 이 두 년놈을 죽이는 게 맞겠지.
“…그, 그럼 지금은. 이 정도로 된 건가.”
그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다우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단은요.”
그렇지.
그리버가 속으로 씩 웃으며 비틀비틀 물러섰다.
여기서 그를 살려보낸 걸 꼭 후회하게…
-!
“어어어어억-!”
방을 벗어나려던 그리버가 다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뒤에서 트리스탄 공녀가 다시 그의 오른 다리를 부러트렸기 때문이겠지.
그리버가 바닥을 기어다니면서 비명을 질렀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다 말했잖아!”
“아뇨, 그건 그건데.”
그리버가 그렇게 기어다니는 동안 다우드가 다시 그에게 다가와 가호를 시전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숙련도가 붙은 것 같은 치유의 가호였다.
그런 짓을 하는 사이, 그리버의 시선이 다우드의 눈동자와 마주쳤고.
“…”
덕분에.
그리버는 그가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이 남자가, 적어도 트리스탄 공녀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 말이지.
“아까도 본인이 말씀하셨잖아요. 신성력과 가호를 숙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전에서 계속 쓰는 거라고.”
그 이질감이 다시 느껴진다.
선각자에게서 느껴지던 끔찍하게 소름끼치는 감각.
“당신처럼 아무리 괴롭혀도 죄책감이 안 느껴질 것 같은 인간이 있는데. 그런 좋은 수련법을 놓칠 순 없잖아요. 안 그래?”
상대방을 같은 ‘인간’이 아닌, 오로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자에게서 느껴지는 공포.
“초급 가호는 보통 상대방을 지키고 치료하는 것에 집중되어있죠. 그러니까.”
이 남자는, 지금.
“계속 다쳐주실래요?”
그를 아예 지금 같은 인간으로 보고 있지도 않다!
“그래야 내가 연습하지.”
새파랗게 질린 그리버의 얼굴 위로, 다우드가 웃는 표정으로 내뱉은 문장이 떨어졌다.
곧이어서. 다시.
집무실 안으로 누군가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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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정신을 잃은 그리버는 내부 기사단에 인계했다. 아마 거기서 적당한 처분을 받겠지.
그리고 나오는 길에, 눈앞에 주르륵 늘어진 메세제들을 훑는다.
[System Message> [ ‘초급 가호’의 급격한 숙달을 확인합니다. ] [ ‘특성: 신성력 운용’을 개방합니다! ] [System Message> [ 당신의 신성력에 반응하여 에픽 아이템 ‘소울 링커’가 영향을 받습니다! ] [System Message> [ 대상 ‘엘노어’의 현재 조건을 확인합니다. ] [ 고유 디버프 ‘광증’이 당신의 영향을 받아 호전되었습니다. ]아마 일석삼조라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 있는 게 아닐까.
상종도 못할 인간 쓰레기를 패고 치료하면서 얻어낸 게 이 정도다. 충분히 남는 장사지.
일단 가장 중요한 신성력 운용 특성을 얻어낸 게 고무적인 성과다.
이제 이걸로 나 역시 마력이나 법력처럼 자체적으로 운용가능한 이능 중 하나를 얻게 된 거다.
물론 지금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0과 1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수준이다.
‘…당장 이게 그렇지.’
손목에 착용되어 있는 아뮬렛을 바라본다.
지금까지는 자체적인 성장이 불가능했지만, 이제 신성력 운용 특성을 보유하게 된 이상 나 혼자서도 이 안쪽의 혼을 각성시킬 수 있다.
“…스트레스는 좀 풀리셨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사람.
엘노어의 멘탈 관리는 언제나 중요하다.
곧 있을 중간 고사에서도 이쪽의 도움이 무조건 필요하니까.
“음.”
엘노어가 어쩐지 평소보다 훨씬 상쾌해보이는 무표정으로 그렇게 답했다.
나도 슬슬 이 사람이랑 자주 다니다 보니까 무표정인데도 분위기가 읽힌다. 신기하단 말이야.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도 건낼 수 있는 거지만.
상쾌해보이지만 어쩐지 그늘이 져 보이기도 한다. 근심이 있는 것처럼.
“…”
실제로, 그 말을 들은 엘노어가 부정하는 대신 잠시 말을 삼켰다.
참으로 꺼내기 힘들다는 것처럼.
“…다우드.”
“예.”
“트리스탄 대공을 만났다고 들었네.”
아버지가 아니라 트리스탄 대공이라.
부녀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호칭이겠지.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엘노어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몹쓸 짓을, 당하진 않았나.”
“몹쓸 짓이요?”
“그 인간이라면, 틀림없이 내가 누군가와 교류하는 걸 고깝게 생각할 테니까.”
아, 그렇긴 하지.
설정상으로도 기드온은 그걸 옛날부터 배격했을거다.
덕분에 엘노어의 인간 관계는 생각보다 극단적으로 좁다. 10년 지기인 베아트릭스 정도가 아니면.
‘…그거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거긴 한데.’
그걸 내가 이 자리에서 설명해줄 순 없지.
그거, 나중에 메인 시나리오랑 맞물려서 돌아가는 얘기니까.
“그런 짓을 딱히 당하진 않았어요.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어. 사기치는 것 실패했으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었을수도 있었거든.
안 무서웠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뭐. 어떻게든 좋게 풀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볼 것 같은데요.”
“…계속 볼 사이라고 했나?”
엘노어가 그렇게 질문하자, 어깨를 으쓱하며 답한다.
“예, 뭐. 저한테도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중요, 해? 그대에게? 그 인간이? 대체 왜?”
엘노어가 답지 않게 어이 없다는 목소리로 말을 흘렸다.
어. 당연한 것 아닌가?
계도 스킬로 그쪽에서 빨아먹을 것도 넘쳐나고, 메인 시나리오에서도 비중이 높은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이랑 관계 있으니까요. 가족이잖아요.”
결국 이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
엔딩까지 어떻게 어떻게 잘 가기 위해서는, 결국 최종 보스인 이 사람을 어떻게 컨트롤 하냐가 제일 중요하지 않겠나.
그리고, 내 말을 들은 엘노어가.
얼굴이 붉어졌다.
“…”
잠깐 눈을 비빈다.
‘…얼굴이 붉어져?’
이 사람이?
이 목석이랑 무표정 싸움을 해도 이길 것 같은 사람이?
“그대, 그 말은, 그러니까…”
엘노어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내 가족이고, 앞으로 계속 볼 것 같으니까,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말은, 그…”
그러더니 그대로 입을 다문다.
차마 그 뒤에 이어질 말은 자기 입으로 못 꺼내겠다는 기색이다.
“…이런 건 조금, 분위기를 잡고 말해주지 않겠나. 갑자기 그런 식으로 말하면, 반응하기 조금 힘드네.”
“…”
뭔진 모르겠는데.
[ 대상 ‘엘노어 에리나리제 라 트리스탄’의 호감도 단계가 변화합니다! ] [ 호감도 단계가 ‘친애 2단계’로 격상합니다! ] [ 수령 가능한 보상이 추가됩니다! ]내가 뭔가 말실수 했다는 건 알겠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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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또 사고 치셨습니까?”
“…예?”
숙소로 돌아오니, 헤르만이 뭔가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또 왜 이래?
“도련님을 오래 모셔온 경험으로서 말하는 건데, 또 어딘가에서 아무런 자각도 없이 어떤 분의 마음에 불을 질러놓고 온 느낌이 나서 말입니다.”
“…”
“예전부터 그런 식이셨죠. 지금도 캠벨 남작령에 도련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치는 여식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날 무슨 천생 바람둥이처럼 말하고 있다.
사람 억울하게.
“…글쎄요. 그렇게나 영민한 도련님이 진짜로 몰라서 그러시는 건진, 이 노구로선 잘…”
등 뒤에서 헤르만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건 무시하고 일단 재빠르게 내 방으로 들어온다.
확인해야 할 게 있거든.
[ 소울 링커 ] [ 전용 장비 ] [ 인챈트: 에픽 ] [ ‘영웅의 파편’ 융합 ] [ 위대한 혼령이 깃든 장비입니다. 동기화율을 높여 혼령의 의식을 깨울 수 있습니다. ] [ 위대한 혼의 영향으로 항상 마력을 머금고 있습니다. ] [ 현재 동기화율: 10% ] [ 혼의 1단계 의식을 개방시킬 수 있습니다! ] [ 개방을 진행하시겠습니까? ] [Y/N]“…후.”
유저들에게 그레고리 관의 유령이 특히 빨리 먹어야 하는 아이템으로 인식되는 이유라면, 이렇게 다른 아이템에 인챈트 시켰을 때 튀어나오는 영혼이 대부분 플레이어를 엄청난 강화폭으로 성장시켜 줄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괜히 등급이 에픽이 아니지.
문제는.
‘…그게 랜덤이란건데.’
이면 세계에 사념체로 남을만한 위인은 틀림없겠지만, 그 대상이 누구일지는 매 회차마다 랜덤으로 배정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나한테 최적의 인물이 나오길 바래야지.
‘안개숲의 살인귀’나 ‘거인 먹는 자’ 같은 미친 놈들도 생각보다 많아서.
‘…위인 중에서도 보통 놈이 아닌 건 확실하지.’
이걸 조금 깨우자마자 엘리야와 이단 심문소 관련된 이벤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렸으니까.
그 중에서도 특출난 케이스인건 확실하다.
‘제발 좋은 놈, 제발 좋은 놈…!’
그렇게 생각하며 상태창의 Y버튼을 누른다.
이어서, 막대한 기운이 아뮬렛에 맺힌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영기 사이로, ‘이미지’ 하나가 떠오른다.
새벽의 전장. 그 사이로 깃드는 여명. 헤진 깃발과 그걸 짊어진 기사.
갑옷은 부서지고, 온몸은 만신창이로 다쳤지만, 끝까지 그걸 메고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
불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다.
“…!”
나도 아는 모습이다.
‘…이거.’
어쩌면.
내 생각보다 대박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 앞으로, 영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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