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d to Be Lov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60)
r 59 – 59. 소년왕 (5)
●
“먹혔다!”
엘리야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그렇게 말했다.
누가 보아도 외통수로 보이는 일격이 들어갔기 때문이겠지만.
“…”
거기에 호응해주는 대신 묵묵히 ‘다음’을 준비한다.
-!
근처로 금술의 진들이 꿈틀거린다.
발카서스의 몸도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서 있다.
“…!”
그리고 이어서.
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전과 비교해도 전혀 그 기세가 죽지 않은 요사스러운 빛을 본 유리아가 눈을 크게 뜨며 뒤로 물러났다.
엘리야도, 루시엔도, 어안이 벙벙하다는 기색으로 그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직…”
나직한 목소리가 엉망이 된 시계탑의 최상층에 울려퍼졌다.
“…멀었네. 이것 가지고는, 안 돼.”
동의한다.
당신에게 걸린 굴레는, 고작 심장에 검 좀 찔러넣었다고 벗겨질만한 것이 아니지.
애초에 저 인간에게 걸린 제약부터가 ‘1:1 상황에서 전투로 죽을 것’이다.
세 명이서 한 명을 두들겨 패 봐야 죽을 것도 안 죽는단 소리지.
그리고, 아마.
죽을 수 있다 해도, 본인이 거부할 것이다.
제약을 만족시키기 전에 본인의 생명이 먼저 꺼진다면, 금술은 저 육신에 영원히 속박된다.
“나 혼자, 가서는, 안 되네. 내 왕국은… 아직…!”
그러니까, 심장을 관통당한 치명상에도.
필사적으로 버티는거다.
주변에 둘러쳐진 진들이 폭발하듯이 빛을 내뿜는다. 유리아의 몸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튕겨져 나온다.
“…이래도 안 죽어요? 저거 진짜 대체 뭐하는…!”
“야.”
뭐라고 말을 뱉어내려던 엘리야의 문장을 한숨과 함께 자른다.
“시계탑 내려가. 성녀님 데리고. 지금부터 안 내려가면 휩쓸린다.”
“…예?”
“지금부터는 나 혼자 한다.”
엘리야는 물론이고 루시엔까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척 봐도 아까 전보다도 발카서스의 상태는 아까보다 심각하다. 폭주하고 있다 봐도 되겠지.
그걸 혼자 상대하겠다고 들으면, 나라도 이런 반응이 나오겠지.
“제발 미친 소리 좀 작작…! 선생님 혼자서 저걸 어떻게 하시겠다고…!”
“안 미쳤어.”
하지만.
너희들은 할 수 있는만큼 다 해줬다.
애초에 저 사람을 저기까지 몰아붙여서, ‘심장’에 타격을 입힌 것 자체가 정말 많이 해준 거다.
나 혼자서는 절대 못 했을 일이지.
“…”
그럼에도.
여기서부터는 내가 혼자 해야한다.
[ ‘스킬: 악의 지배’를 발동합니다. ] [ 대상 ‘엘리야’와 ‘루시엔’에게 명령권을 발휘합니다! ] [ 대상은 당신의 말에 절대 복종합니다! ]“가. 나 혼자 하는 게 더 나아. 성녀님. 유리아도 데려가세요.”
“…”
“…”
아마 이런 거라도 안 쓰면 둘 다 말을 죽어도 안 들을 기색이겠지.
루시엔은 확실히 그게 좀 잘 들었는지, 조금 고민하다가도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엘리야는.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눈망울이 흔들린다. 어지간히 충격 받은 것처럼.
[System Message> [ 대상 ‘엘리야’가 당신의 발언에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 [ 자신감이 급격하게 하락합니다! ] [ 부정적인 영향이 각인됩니다! ] [ 부정각인 3중첩! ] [ 성격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 [ 행동 양식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 [ 대상에 대한 지배력이 높아집니다! ] [ 수령 가능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 [ 스킬: 악의 지배가 발동됩니다. 대상에게 사용 가능한 명령권 1회를 얻습니다! ]“…”
얘는 대체 왜 항상 명령권을 쓸 때마다 리필되는 지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떠올라 있는 메시지가 좀 심상치 않다.
자신감이 급격하게 하락한다고?
지배력이 높아져?
“선생님.”
“가.”
살짝 물기가 감도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녀석에게 일단 그렇게만 말한다.
일단 이건 나중에 신경 쓰자. 당장은 발카서스다.
루시엔, 유리아, 그리고 계속해서 머뭇거리던 엘리야까지도 시계탑 아래쪽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럼.”
심장에서 어둠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고 있는 발카서스를 바라본다.
품 안에서 꺼내든 악의 정수를, 그대로 소울 링커에 가져다 댄다.
이미 안쪽에 있는, 나름 성기사 중 최고봉의 증명인 가디언을 역임한 칼리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식겁을 할만한 느낌이겠지만.
아뮬렛 안쪽에서는 그렇게 코웃음을 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또 뭘 꾸미고 있냐, 너는?]“뭘 이전에도 봤다는 것처럼 말씀하십니까. 평소에는 맨날 잠만 주무시면서.”
[항상 자는 것처럼 보여도 볼 건 다 보고 있어, 임마. 네 행동에는 뭐든 다 이유가 있다는 것도.]그래. 그럼 정확하게 보셨네.
[ 아이템 ‘소울 링커’에 ‘악의 정수’를 결합하시겠습니까? ] [ Y/N ]Y를 곧바로 터치.
[ 소울 링커 ] [ 전용 장비 ] [ 인챈트: 에픽 ] [ ‘영웅의 파편’ 융합 ] [ ‘악의 정수’ 융합 ]#1
[ 혼령: 칼리반 – 가디언, 새벽의 기사 ] [ 현재 충전된 마력율: 0% ] [ 현재 동기화율: 12% ] [ 추가 기능 > [ ■ 스킬: 심상 세계 ]그런 메시지가 쭉 떠오르고, 이어서.
[ System Message > [ ‘악의 정수’를 결합시킴으로서 새로운 기능이 추가됩니다! ] [ 악령惡靈 전용 슬롯이 소울 링커에 개방됩니다! ] [ 악惡 성향의 영혼만을 슬롯에 추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창까지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이게 발카서스를 ‘전투’로 거꾸러트릴 유일한 방법이다.
“이웃 하나 받을 준비 하시죠, 칼리반.”
[…진짜 미친 놈이네, 이거.]칼리반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너, ‘저거’의 영혼을 속박시키겠다는 거냐?]가디언조차 끔찍하기 짝이 없다는 느낌으로 내뱉은 문장은, 당연히 눈앞의 발카서스를 가리키는 것이다.
흉물스러운 기운이 구멍 난 가슴팍에서 줄기줄기 쏟아지고 있었다.
수백만 개의 금술은 전신에 박혀있지만, 그걸 통제하는 건 결국 금술의 대표적 매개인 심장이다.
유리아가 해준 것은 저기까지 내가 통할 수 있는 길을 뚫어준 거고.
“…아뇨.”
속박시키는 게 아니다.
“구하려구요.”
그게 아니었으면, 일을 이렇게까지 벌리지도 않았다.
시계를 확인한다.
남은 시간 2분.
“칼리반.”
[음?]“그래도 당신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인력이었으니까, 왠지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묻습니다.”
[뭘?]“아픈 건 어떻게 참습니까?”
실소와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근성.]“…다시는 당신한테 조언 안 받을거야.”
그런 말과 동시에.
[ ‘스킬: 신앙의 증명’을 발동합니다. ] [ 모든 스텟 추가분이 ‘내구’와 ‘신성력’으로 전환됩니다. ] [ ‘스킬: 성흔’을 발동합니다. ]발카서스를 향해 몸을 날린다.
-!
-!!!!
그 수도 셀 수 없을만큼 악독한 술법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한테 쏟아진다.
이전에는 그래도 네명이서 분담해서 맡았던 거지만, 지금은 나 혼자서 이걸 전부 뒤집어 쓰는거다.
EX급으로 강화된 절체절명을 스킬을 통해 전부 내구와 신성력으로 돌리고, 거기에 영향을 받는 방어막까지 있음에도.
전신이 썩어서 짓무른다. 피부가 괴사하고, 혈관이 파열하고, 근섬유가 녹아서 찢어진다.
“…개, 씹…!”
시야 앞으로 스파크가 튀는 것 같은 고통이 전신을 타고 흐른다. 그럼에도 무시하고 전진하다.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2분이다. 지체할 시간은 없다.
전신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계속해서 몸을 움직인다.
온 몸이 불에 지져지는 것 같은 통증이 덮쳐온다. 내부의 장기까지 불타는 것 같다.
그래도, 한 걸음.
마치 숨을 내쉬던 도중에 멈추어 폐를 쥐어짜 내는 듯하다. 입을 벌렸지만 호흡이 공허하다. 공기를 들이마실 수가 없다.
그래도, 한 걸음.
가슴에 무서운 압박이 느껴진다. 팔다리의 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도, 한 걸음.
“…”
의식이 몇 번이고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넘어.
마침내.
내 손이 이 사람의 가슴에 닿는다.
영혼을 ‘담을 수 있는’ 소울 링커가.
이 사람의 혼을 이루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 심장에 접촉한다.
유리아를 통해 미리 찔러두지 않았다면 내 손을 쑤셔넣지도 못했겠지.
“…”
이 시점에서, 이미 보스전은 끝난 것이나 다름 없다.
악의 정수로 소울 링커에 이 사람을 강제로 ‘속박’시키기만 해도 내 승리니까.
에픽 아이템이잖아. 아무리 보스라도 영혼의 핵까지 접촉한 시점에서 그게 가능하다. 의식을 강제로 부숴서 아이템에 가두는 것.
하지만, 그렇게 하기 싫다.
적어도 내가 그래도 싸다 생각이 들지 않는 사람에게만큼은,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다.
칼리반에게 굳이 ‘구한다’고 표현한 것도 그래서다.
“…”
그러니.
이어질 행동을 준비한다.
온갖 제약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이 사람의 ‘죽음’ 조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발카서스는 애초에 전투해서 깨라고 만들어 놓은 보스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치룬 전투도 따지자면 이 사람의 ‘전력’에는 전혀 미치지 못 하니까.
그럼에도 최초로 이 사람과의 전투 루트를 뚫어낸 나만이 알고 있는 꼼수 하나.
이 사람에게 걸린 ‘저주’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이 게임에서 최강의 ‘언령술사’가 내린 저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령이란 능력의 특성 상 한계는 있다.
예를 들어.
‘구색’만 맞추면, 어떻게든 상황에 문장을 끼워맞출 수 있다는 거지.
공정한 상황에서, 전력을 다한 1:1 결투로만 죽을 수 있다는 저주라는 조건이면.
“공정한 상황에서 1:1 결투입니다, 소년왕.”
이런 식으로도 충족이 가능하단 거다.
내가 생각해낸, 게임에서는 절대 불가능했던, 유일한 이 사람의 ‘구원’ 방법.
“나도, 당신만큼 다쳤어. 당신이 느끼는 고통은 나도 그대로 느끼고 있어. 조건은 공평해.”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사람과 나의 ‘부상’을 맞춤으로서, 조건을 대등하게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언령의 첫 번째 금제를 돌파한다.
“지금 상황에서.”
그리고, 두 번째 금제.
“내가 당신의 혼을 나에게 ‘종속’시키면, 내 승리야. 패배는 그러지 못 하는 것. 대가로 내 목숨을 건다.”
전력을 다한 일대일 결투.
다만.
그 ‘방법’과 ‘장소’는, 내가 정한다.
발카서스의 심장이 검은 빛을 내뿜었다.
이 안에 깃든 언령술사의 금제가 내 말을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결투란 거, 사실 개념적으로 별 거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승패’를 지정하기만 하면 그만이지.
발카서스의 윤곽조차 녹아서 흘러내리게 만들던 금술들이, 그 심장에 닿은 내 손을 거쳐서 일제히 내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결투다.”
시야가 암전되었다.
●
어둠 속의 공간을 걷는다.
익숙한 느낌이다. 이전에 덜렁이 역천사와 함께 어떤 공간에 진입했을 때 겪었던 감각이다.
여긴, 발카서스의 정신 안쪽이다.
내가 지금부터 보는 것도 나의 기억이 아니고.
“…”
첫 전투의 첫 살인이 가장 기억에 깊게 남아있는 모양이다. 가장 선명했으니까.
그 근방에서 가장 강하다고 소문이 퍼져있던 싸움꾼이었다. 눈에 마주치는 놈이라면 모두 없는 이유를 만들어 내서라도 두들겨 패던 인간 쓰레기이기도 했다.
그 소문을 듣고.
‘결투’에서 죽기 위해, 발카서스는 일부러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호기롭게 덤벼들던 그 남자는 금술 세 개를 체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다만, 소문에 포함되지 않은 건.
그가 세 살배기 딸과 젖먹이 아들을 홀몸으로 키우고 있던 사내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제 아비의 죽음을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발카서스는 그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역질을 했다.
첫 살인을 통해, 자신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직감했기 때문에.
“…”
기억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언령술사에 의해, 그가 불러일으킨 재앙으로 인해 금술로서 몸에 쑤셔박힌 백성들을 해방 시키기 위한 여정이 이어진다.
더 많은 강자를 찾아나선다. 더 많은 전장을 거치고, 더 많은 시체를 쌓아올린다.
수없이 많은 살인의 기억이 공간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졌다.
마모된다. 인간성이 깎여나간다.
“…”
그럼에도, 소년은 걷는다.
많은 시간을 지나친다. 수도 없이 희망했지만 수도 없이 잃는다.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은 바스러진 잿덩이뿐이라도 다시 한 번 일어선다.
무욕하고 무정한 시간 속에 전부 다 빛이 바래던 그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존재조차 잃어버릴 아득한 여정 속에서. 꺼져버린 불꽃에서 불씨를 찾는 것처럼, 시들어버릴 대로 시들어버린 스스로의 정신을 돌아보면, 자신이 존재하는 지에 대한 확신조차 희미해지는 법이라.
부서진 몸뚱이 사이에 싹피는 상실감은 어떠한 철의 의지라도 무너트릴 수 있음이라.
수 천 년을 통해 축적된 그 모든 감정을, 피부에 와닿는 모든 상념을, 전부 느끼며 전진한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기억들을 넘어.
마침내.
어두운 공간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소년과 마주한다.
“발카서스.”
“…”
“발카서스.”
“진짜로 제정신이 아니로군.”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상대방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정신 공간은 이능으로 접촉 가능한 모든 공간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위험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곳이네. 그런 곳에 자발적으로 들어오다니. 차라리 물질계에서 생사결을 하는 편이 더 나았겠지.”
“그렇습니까.”
“잘못하면 내 기억 속에 휩쓸려 영원히 여길 표류하게 될 수도 있었어. 알고 들어온 건가?”
그런 설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냥, 얼마 전에 될 것 같아서 떠올려봤을 뿐입니다.”
이건 이전에 역천사님과 함께 정신 공간에 들어가면서, 대략적인 ‘느낌’을 파악한 이후 만들어낸 계획이다.
안쪽에서 별로 한 건 없다지만, 내 정신 공간을 한 번 들여다봄으로서 그게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안에 절대 휩쓸리지 않을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
“당신을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시나리오에서 이 사람을 처음 봤을 때부터 떠올린 생각이다.
이 사람, 나랑 꽤 닮았다.
“…뭐?”
“아무리 중요한 사람들을 위해서라지만, 좆같은 일을 강제로 떠맡은 점이 그래요. 나도 그거 무슨 느낌인지 알거든?”
“…”
“물론 기간을 따지면 나보다는 당신이 훨씬 더 오래 했지만.”
발카서스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도 뭐라 설명하는 대신 쓴웃음만 흘린다.
그냥, 나도 꽤 험난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로웠잖아. 당신.”
혼자 남는다는거.
소중한 이가 모두 떠나버려, 고통만이 가득한 세상에 방치 된다는거.
무슨 느낌인지 안다. 적어도 나만큼은.
내가 눈물을 흘려줄 사람도, 날 위해 눈물을 흘려줄 사람조차 없어서.
멍하니, 텅 빈 집의 벽지조차 다 뜯어진 벽만 쳐다보아야 했던 저녁들을 기억한다.
현실에서 벗어나, 날아가고 싶은 목적지를 찾기 위해 몇 시간이고 하늘만 올려다보았던 날들을 기억한다.
이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항상 석양을 구경하는 것처럼.
유일하게 소중한 이들에게 둘러 쌓여있던 마지막 시간을 추억하는 것처럼.
“그러니, 당신에게만큼은 해주고 싶은 일이 있었어요.”
대리 만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 이 사람에게라도 선물해주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복수를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과거의 나는 포기했던 것.
이 사람도, 몸에 속박된 왕국의 백성들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까마득한 후일로 미뤄뒀던 것.
게임 바깥에 플레이어로서 존재할 때는 생각만 했던 거지만.
이제 내게 이곳은 현실이다. 실존하는 인물이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복수를 돌려준다고.”
“부당하게 빼앗기신 것이 있으실 겁니다.”
어머니. 아버지. 가족. 형제. 지인. 친우. 백성.
왕국 전체.
이 사람이 반드시 지키겠다 맹세한 소중한 것, 전부를.
“아직 살아있습니다. 당신의 왕국을 당신의 몸에다가 쑤셔박은 언령술사.”
“…”
빼앗긴 아픔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럼 적어도, 정당한 권리만큼은 이 사람에게 돌려줘도 될 것이다.
멋대로 빼앗아간 놈들을 벌할 수 있는 기회를.
발카서스에게 저주를 내린 언령술사는 시나리오 후반부에 보스로 등장한다.
그 때.
나는, 이 사람과 함께 그 새끼의 머리통을 박살낸다.
“당신에게 그 놈에게 복수할 권리를 드리겠습니다. 맹세하죠.”
“그 대가로, 내 혼이 그대에게 종속되게 해달라?”
“공정한 거래 아닙니까. 처음에 부하가 되겠다는 약속도 했었고.”
발카서스가 씩 웃었다.
“…공정한 거래 수준이 아니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심장이 위치한 곳에 손을 올려두고, 무릎을 꿇는다.
예법에 무지한 나로서도 알겠다.
“내가 이걸 수락하는 것만으로도, 내 몸에 속박된 금술들은 곧바로 해방되어 윤회의 고리로 돌아가겠지. 그대가 모든 언령의 금제를 돌파했으니.”
“…”
“다우드 캠벨. 아르마다의 피에 걸고 맹세하겠네.”
이건, 이 소년왕이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다.
“내 심장, 내 긍지, 내 혼은 모두 그대의 것일세.”
“…”
담백하게 나온 선언에 겸연쩍게 볼만 긁적인다.
“…저는 남작가 무지렁이라서 이럴 때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그럴 필요까지 있겠나. 이제 그대는 나를 손짓으로 부려도 되는 위치인데.”
“…”
이 사람도 칼리반 과인가.
자기가 남의 하급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 쉽게 적응한다.
“…그보다,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나.”
“뭘요?”
발카서스가 말 없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정말로 많은 것을 알고 있나보군. 모르는 게 없다고 느껴질 정도야.”
“예?”
“허면 묻겠네. 그것과 대적하는 것에 어떤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면서, 나를 그 자에게 데려놓겠다 하는 건가.”
“…”
그 언령술사는 어차피 마주칠 녀석이라 그냥 보험을 세우는 것뿐이다.
발카서스는 대단히 유용한 동료가 될 테니까.
소울 링커에 그 혼을 종속시키면 온갖 종류의 유틸리티가 덕지덕지 붙어 나오겠지.
다시 말하지만, 이 사람은 이 게임 전체 보스들 중에서도 최강의 일각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 혼만 나에게 종속시켜도 클리어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게 분명하지.
“…뭐, 기회주의자에 소시민에 이기주의자답게 전부 제게 이득이 된다는 계산 하에 나온 결정입니다.”
“아니.”
발카서스가 피식 웃었다.
“무시하고 지나친다는 선택지는 언제나 열려 있네.”
그런 목소리가 의미심장하게 이어졌다.
“그렇게나 많은 걸 알고 있다면, 남이 어떻게 되든 전부 무시하고 혼자 살아남을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었어. 그걸 포기하고 힘든 길로 뛰어든 것은 그대의 선택이지. 굳이 나에게 베푼 것만 봐도 그렇네.”
“…”
“다우드 캠벨. 그대는 그저 눈앞의 사람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것 뿐이네. 기회주의자도, 소시민도, 이기주의자도 아니야.”
그저, 보통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선한 것뿐이지.
그런 말이 어두운 공간으로 자박자박 울려퍼졌다.
“…칭찬해도 뭐 안 나옵니다. 이제 당신하고 저하고 상하 관계라고 아부하시는 거에요?”
“어, 들켰나?”
“…”
다시 느끼지만.
이 사람은 칼리반 과다.
적응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