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d to Be Lov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87)
r 86 – 86. 친선 대련 (2)
●
대련 시작 후 10분.
바델은 진심으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너는 무기 안 들어?”
“그런 걸 쓰면 너무 빨리 끝나버리지.”
처음 대련에 들어갈 때 나눴던 그런 문답이 생각났다.
실제로도 바델은 이전에 진행됐던 대전에서도 한 번도 무기를 쓴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맨주먹으로 상대방을 두들겨 팼지.
진득하게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며 즐기는 게 그의 취향이었으니까.
“진짜? 맨주먹으로 패준다고?”
“…”
“아싸.”
생각해보면.
그런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확 밝아질 때부터 경계했어야 했다.
“…미치기라도 한 거냐, 네놈.”
그렇지 않았던 덕분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그의 입에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런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기량 차이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애초에 그래 보여서 천천히 느긋하게 괴롭히기 위해 이 남자를 고른 거니까.
하지만.
-!
묵직하게 휘둘러진 주먹이 그대로 다우드의 턱에 틀어박혔다. 손에 분명히 전달되어 온다. 숙련된 전투 감각이 확실하게 고한다.
이건 인간인 이상 쓰러질 수밖에 없는 일격이다. 턱에 들어간 주먹이 그대로 뇌를 뒤흔들어 놓을 테니까.
그러나.
이 남자는 쓰러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그랬던 것처럼.
한 두 발자국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목만 뚜둑 꺾으면서 이쪽으로 다시 터벅터벅 걸어온다.
“아, 괜찮네.”
진짜로 기분이 좋다는 것처럼 목소리에 바델의 팔에 소름이 주욱 타고 올라왔다.
“…대련은 그만하지. 네놈은 의무실에 가서 치료나-”
“왜 그만해?”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투에, 이번엔 바델이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본능적으로 흘러나온 움직임이었다.
‘…내가, 제국 놈을 상대로, 싸움에서 물러섰다고?’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의 인상이 있는 힘껏 찌푸려졌다.
더욱 가학적인 폭력이 다우드에게 쏟아진다. 한 명에게 쏟아진다고 하기엔 불쌍할 정도의 위력을 가진 일격이었다.
다우드의 몸이 이리저리 휩쓸린다. 살점이 튀어나가고 피도 분수처럼 흘러나온다.
하지만.
“…상대 잘 골랐어. 좋아.”
이번에도.
반쯤 시체 꼴이나 다름없는 상태로도, 오히려 히죽히죽 웃고 있다.
“…”
바델의 얼굴이 슬슬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약한 놈이 오기를 부리는 거라면 오히려 반겼을 것이다. 그런 놈을 철저하게 짓밟는 건 그 나름의 맛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놈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는 이 상황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
마치 자신에게 무슨 어마어마한 이득이라도 있는 것처럼!
“다시.”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에, 그만 바델의 눈동자에 공포가 깃들고 말았다.
대체 자신이 뭘 하고 있는 걸까.
이건 애초에 대련이 맞기는 한 걸까.
이놈, 같은 인간이 맞기는 한가?
“…가까이 오지, 마라.”
“왜? 방금 그거 좋았는데. 한 번 더-”
“가까이 오지 말라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바델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스테이지 한 곳에 비치된 빨간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이걸 누르면 아마 항복으로 처리 되겠지.
원래대로는 절대 누르지 않았을 물건이겠지만, 이 뭔지도 모를 흉물 같은 남자를 계속 마주하는 것보단 잠깐 치욕스러운 게 더 낫겠단 생각이 계속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턱 붙잡는 인간이 있었다.
“아니야.”
다우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동자에는 그것 이상 가는 간절함이 매달려있다.
“아니, 그러지 마. 너 아직 더 할 수 있잖아? 시간 끝까지 채워서 때려주겠다며?”
“…”
거의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팔을 붙잡는 다우드를 본 바델의 얼굴이 더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원래대로는 보고 무서워 할 얼굴은 아니겠지만, 도저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단 점에서 그의 정신을 반쯤 나가게 만드는 데 굉장히 효율적이었다.
“할 수 있잖아. 너 아직 쌩쌩하잖아. 처맞은 건 난데 니가 왜 항복하냐고. 장난해?”
“히익…!”
“약속 지키라고. 제발. 내가 부탁한다.”
“저리 가…!”
결국.
바델은 새된 비명을 지르면서 항복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
“으음…”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내 대련 상대가 후다닥 도망가는 사이, 아쉬운 표정이 내 얼굴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진짜로 아깝다.
[ System Log > [ 우수한 격투술을 펼치는 상대방과 공방을 나눴습니다! ] [ ‘특성: 격투술 – 입식立式’에 새로운 움직임 세트가 추가됩니다! ] [ 우수한 격투술을 펼치는 상대방과 공방을 나눴습니다! ] [ ‘특성: 격투술 – 입식立式’에 새로운 움직임 세트가 추가됩니다! ] [ 우수한 격투술을 펼치는 상대방과 공방을 나눴습니다! ] [ ‘특성: 격투술 – 입식立式’에 새로운 움직임 세트가 추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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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stem Log > [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전투를 속행했습니다! ] [ ‘특성: 철인’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 [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전투를 속행했습니다! ] [ ‘특성: 철인’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 [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전투를 속행했습니다! ] [ ‘특성: 철인’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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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 나름 치는 놈이었던 것 같은데.
그냥 가만히 서서 얻어맞는 것만으로도 특성 숙련도를 2개나 쌓아주고 있었던 걸 보면 그렇다. 이거 어지간히 강적이랑 전투 해야지만 가능한 거거든?
아마 계속 맞았으면 더 쌓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왜인진 모르겠지만 갑자기 도망가버려서 아쉽게 됐다.
[ System Message > [ 대상 ‘엘노어’가 대상 ‘바델’이 감히 당신을 때렸다는 사실에 대단히 분노합니다. ] [ 대상에게 강렬한 증오를 품습니다! ]“…”
덕분에, 지금도 날 보고 있는 이 사람한테 시달릴 확률이 높아졌거든.
날 관찰하고 있던 게 아니었으면 이런 창이 떠오를 리가 없으니까.
바델, 왜 도망갔냐고…!
시간 끝날 때까지 상대해주겠다며…!
“그 바델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갔어…!”
“제국에도 저런 개 미친 또라이 새끼가 있었다니…!”
“감탄스러울 정도의 광인이군…!”
“…”
주변에서 날 보며 수군거리는 부족 연합 학생들의 말이 가슴에 쿡쿡 쑤셔박힌다.
니네들 말을 왜 그렇게 해?
‘…아무튼, 확인할 것부터.’
어차피 엘노어는 내가 찾아보려고 해도 나오지도 않는다. 그럴바엔 차라리 얻은 거나 보자.
[ Mastery Info > [ 특성: 철인鐵人 ] [ 등급: 기초 ] [ 현재 숙련도: 88% ] [ 부족 연합의 전사들은 항상 극한 상황에 자신을 내몰아 대처 능력을 기르는 훈련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위험하지만, 효과는 확실합니다. ] [ ■ 각종 부상과 고통에 대한 내성이 높아집니다. 통증의 정도를 줄여주고, 심한 부상을 당한 상황에서도 보다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 [ ■ 효과는 내구 스텟에 비례합니다. ]일단 개같이 처맞으면서 숙련도를 쌓은 특성 하나.
지금도 그냥 간단한 응급처치 키트로 부상에 약 바르고 붕대만 감아줬는데 상처가 호전되는게 눈에 띌 정도다.
약이 어지간히 좋은 게 아니면 이 정도로 맞았을 때 보통 포인트 상점에서 남은 거 다 탈탈 털어서 비싼 포션 하나 샀어야 했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별로 안 아프던데?’
여기 적혀 있는 ‘통증의 정도’를 줄여준다는 효과.
생각보다 훨씬 쓸만하다.
잘만 갈고 닦으면 이번 챕터의 핵심 능력 중 하나로 굴릴 수 있을 정도로.
실제로 방금 얻어맞으면서 느낀 고통도 그렇게 심하진 않았거든?
[…보통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정도까지 얻어맞을 생각은 안 하지?]“버틸만 하던데요?”
[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아픈 거 어떻게 참냐고 물어보던 놈 맞냐?]사람은 원래 성장하는거야.
[너는 성장하는 게 아니라 점점 미쳐간다고 하는 게 맞겠지?]“…”
시끄러워.
칼리반을 무시하며 다른 특성을 확인한다.
[ Mastery Info > [ 특성: 격투술 – 입식立式 ] [ 천재적인 감각을 가진 권투사가 일생을 거쳐 깎아낸 효율적인 움직임들입니다. 아직 전부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 [ ■ 비무장 상태에서의 전투에서 근력 보정을 받습니다. ] [ ■ 비무장 상태에서의 회피 동작에 대한 민첩 보정을 받습니다. ] [ ■ 연습을 통해 해당 격투술에 포함된 다양한 동작들을 해금시킬 수 있습니다. ] [ 새 동작이 해금되었습니다! ] [ 완성까지 진행도: 10% ]앞선 철인 특성보다 이게 더 중요하다.
마지막 문장의 ‘완성’까지 진행도라는 거 말이야.
특성 설명에 괜히 아직 전부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는 게 아니다. 이건 카사도 전부 완성시키지 못 한 유파니까.
“…”
그리고, 이걸 전부 완성시켜야지만, 3챕터의 결말을 내가 원하는 쪽으로 이끌 수 있다.
3챕터의 마지막 ‘적’은, 절대 무기를 들고서는 쓰러트릴 수 없는 상대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해야겠지.
[ 현황을 최신화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스타디움 안쪽의 전광판으로 그런 문장이 떠올랐다.
현재 이 친선 대련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은 쪽을 띄워올리는 모양이지.
채점은 온갖 복합적인 요소를 통틀어 ‘더 좋은 전투’를 선보인 쪽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형식이다.
약한 놈이라도 훨씬 더 강한 놈을 상대로 잘 버텼으면 상대보다 더 높게 평가 받는 식이지.
일단 그렇게 책정된 아래에서부터 확인한다.
3위권 안에만 들면 되는데…
[ 1위 – 리루 가르다 ] [ 2위 – 엘리야 크리사낙스 ] [ 3위 – 다우드 캠벨 ]턱걸이지만 성공했다.
저 녀석과 절체절명이 꺼진 나의 전투력 차이를 생각한다면, 항복을 받아낸 것만으로도 대단히 높게 채점이 될 수밖에 없다.
‘…리루도 들어왔고.’
그 전투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 사람도 무조건 순위권 안에 들어와야 한다. 그래야 ‘메인 퀘스트’가 진행되지.
그리고 그 밖에도 주르륵 내려오는 순위를 본다.
다른 건 다 아무래도 좋은데.
[ 4위 – 페이놀 라이펙 ]내 바로 아래에 붙어 있는 이름을 보니 눈이 절로 찌푸려진다.
그러고 보니, 쟤도 스토리 진행상 교환 학생에 낑겨서 오긴 한다. 별로 마주치고 싶은 놈은 아니지만.
4챕터의 핵심 인물이자, 내가 그렇게 피하려고 기를 쓰고 있는 이단 심문소의 ‘중핵’이기도 한 놈이라.
문제는.
[ System Message > [ 대상 ‘페이놀 라이펙’은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련 이벤트가 곧 생성됩니다! ] [ 대상과 접촉할 경우 ‘보스: 소년왕’의 클리어 특전으로 받은 ‘이단심문소 – 특별 상호 작용’이 곧바로 해금됩니다! ] [ 대상에게는 ‘스킬: 치명적인 매력’의 적용이 불가능합니다! ]저 이름을 보자마자 이런 창이 떠올랐단 거지.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페이놀은 내 기억이 맞으면 분명히 악역이다. 그것도 높은 확률로 악마와 관련된 악인이고.
그런데 여태 그쪽 계통은 과정이고 개연성이고 전부 건너뛰어서 후려버리던 치명적인 매력이 아예 적용이 불가능하다니?
“…”
그렇게 된다면, 여기에 적혀 있는 ‘관련 이벤트’라는 것의 중요도가 폭증하게 된다.
놈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 스킬은 최소한의 보험이었거든. 이게 적용이 불가능하다면 놈을 만나자마자 내가 일종의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굉장히 높단 소리니까.
‘…그건 나중에 신경 쓰자.’
언제는 내가 그런 것 신경 썼냐.
어차피 대처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도 없다. 시스템도 이벤트가 언제 열리는 지 알려주지도 않고.
생각해봤자 대책이 안 나오는 건 닥쳐온 다음에 생각하는 게 최선이다.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 친선 대련 행사를 종료합니다. ] [ 3위권 안에 입선한 학생들은 모두 명예의 전당으로 집결해주시길 바랍니다. 표창 수여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런 안내 방송이 이어서 흘러나왔으니까.
리루가 루카에게서 받아온 증표를 활용할 타이밍이다. 나도 그걸 통해 허구한 날 다치고 터지는 내 몸을 보완해줄 내구 스텟을 챙길 때고.
말하자면 보상 타임이지.
[ System Message > [ 대상 ‘엘노어’의 타락 수치가 10% 증가합니다. ] [ 대상이 ‘의심’ 상태입니다. 타락 수치가 3배로 적용됩니다! ] [ 현재 대상의 타락 수치가 100% 근처입니다! 조각의 ‘폭주’ 가능성이 생깁니다! ]“…”
이거는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겠지만.
여기 적혀있는 조각의 ‘폭주’라는 건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이벤트가 아니다. 100%를 넘어야지 기껏해야 그릇을 매개로 ‘현현’하는 수준이지, ‘폭주’까진 절대로 못 간다.
아마 수치로 따지면 200%는 넘어야 겨우 가능성이라도 보이는 레벨일걸?
‘대신.’
한 번 터졌을 경우 파괴력은 비교도 안 되긴 한다.
조각의 폭주는, 그냥… 궤가 다르다.
왜 잘못하면 악마의 그릇이 단신으로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레벨이라고 해야겠지.
물론, 앞서 말했지만 그만큼 보기 힘든 이벤트기도 하다. 메인 시나리오의 중요 이벤트에서나 구경할 있는 수준이거든.
‘…뭐 그럴 일이야 있겠냐.’
내가 저기서 일부러 엘노어 신경 긁을 일을 할 것도 아닌데.
안 그래?
●
명예를 기린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돔 형태 구조물인 투쟁의 용광로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에 만들어진 장소다.
덕분에 평소에는 보기 힘든 아카데미 근처를 둘러싼 바다를 확실하게 볼 수 있지.
그리고 그 위에서는 사제장 타티아나가 평소대로 실눈을 걸고 학생 세 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리루 가르다. 엘리야 크리사낙스. 그리고 나.
주변에서 이걸 참관하고 있는 이들은 전부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원래대로는 제국의 인사들은 몇 년을 이어도 결코 올라오지 못하는 곳이란 인식이 팽배했으니까.
“…”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다.
대련 행사에서도 얼핏 보였지만, 전반적으로 투쟁의 용광로는 엘판테를 속으로 얕보고 무시하는 곳이다. 그런 기조가 팽배하지.
‘…덕분에 가능한 것도 있지만.’
내가 여기서 뭘 요구할 지를 되새기며 전방을 바라본다.
타티아나의 시선이 나와 양 옆의 여자 두 명을 순차적으로 훑었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여러분들. 투쟁의 용광로에서는 직접 피와 피를 교환하는 전투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이에겐 늘 포상이 뒤따르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부족 연합의 전통이다. 특히나 ‘싸움’으로 우수한 성과를 거둔 이에게는 반드시 포상 하나를 지급하는 것만큼은.
“우선 1위부터 무엇을 원하는지 들어볼까요?”
그 시선이 리루에게 머물자, 주변에 있는 관중들의 표정이 싹 굳는다.
온갖 험담과 경멸적인 언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드문드문 들려온다.
“…탕아가 돌아왔군. 대족장의 씨족에게 먼저 싸움을 걸었다가 역으로 멸족당했다지?”
“대체 이 땅에 왜 돌아왔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교훈 하나 정도는 얻고 가겠지. 우리는 저런 쓰레기를 환영하지 않아.”
부족 연합에서 리루에게 내리고 있는 평가는 ‘겁쟁이’ 내지는 ‘천하의 인간 쓰레기’이다.
첫째로 카사 가르다와 알란 바-토르가 겨룬 이유는 리루가 그쪽에 ‘제 분을 못 참고 시비를 걸었다’는 이유 때문이고.
둘째로 대외적으로 가르다 씨족이 멸족당한 이유는 리루가 족장 간의 결투 진행 중에 ‘부정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
물론 내막을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선, 그때 당시의 상황을 그렇게 요약하라고 하면 구역질이 나오는 수준이다.
다 눈앞에 있는 실눈 여자가 계획한 일이었지.
“…내게, 씨족의 ‘구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줘.”
리루가, 타티아나에게 씹어뱉듯이 말했다.
이대로 타티아나에게 달려들어서 싸움을 걸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이전에 내가 말린 것으로 그게 현명하지 못하다는 건 알아차린 모양이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 말에 주변에서 곧바로 격한 반응들이 터져나왔다.
“저 연합의 수치가!”
“죽은 전사들의 영혼이 네년을 저주할 것이다! 네년 때문에 죽은 이들의 공간에 그 발을 디디려 하다니!”
아까 전까진 그래도 얌전히 뒷담화만 중얼거리던 인간들이 눈에 핏대를 세우고 목 울대가 울리도록 고함을 친다.
지금 리루가 한 말은, 그네들 입장에서 보면 제 잘못으로 가족을 죽인 후레자식이 고향 땅을 한 번만 밟게 해달라는 소리니까.
“하이룰 산맥의 루카 한-차이가 내 권리를 보장한다. 족장의 권한이야.”
주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은 리루가, 손에 내가 묶어준 루카의 드림 캐쳐를 들어올렸다. 주변에서도 그게 뭔지 알아본 모양인지, 터져나오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족장의 권한은 부족 연합에서는 거의 제국 황족에 준하는 권위를 가진다. 불만을 가지고 있더라도 함부로 토해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단 소리다.
“그러시죠.”
“…?”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타티아나가 이렇게 순순히 허락할 건 본인도 예상하지 못 한 일인지, 리루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아마 본인의 씨족을 멸족시킨 장본인이 본인이니, 지금도 온갖 더럽고 치졸한 방해가 들어올 걸 예상하고 있었겠지.
“…”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눈을 가늘게 뜨고 타티아나를 노려본다.
이놈이라면 리루가 씨족의 공간에 들어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리지 못 했을 리가 없다.
본인이 모시고 있는 ‘고대의 존재’를 죽일 가장 큰 힌트가 거기에 있으니까.
그래서 온갖 훼방을 놓을 줄 알았는데.
“그럼, 2위께서는 뭘 원하시는지?”
“…음.”
엘리야가 멋쩍은 기색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험악한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된다는 기색이다.
“…저는 조금 고민하고 나중에 말씀드려도 될까요? 뭘 받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좋을대로 하시죠.”
아마 뭘 요구하건 간에 욕을 먹을 것 같다는 느낌에 소심한 선택을 한 것이겠지만, 이번에도 타티아나는 시원스럽게 수긍했다.
딱히 못 들어줄 제안도 아니니까.
“그럼, 당신은?”
“…나도 조금 더 생각해봐도 되나?”
원래대로는 나도 당장 요구할 게 몇 개 있다. 게임 안에서 한 번은 꼭 들러야 하는 투쟁의 용광로 ‘공방’에 대한 접근 권한이라거나. 당장 내구 스텟을 위해 리루의 땅에 같이 들어갈만한 권한이라거나.
하지만, 어쩐지 이 녀석의 기색이 심상치 않다.
방금 리루의 제안을 군말없이 수락한 것부터가 그렇다.
“그러시죠.”
“…”
그렇게 턱 수락하는 모습을 본 내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무슨 꿍꿍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타티아나가 단상에서 뚜벅뚜벅 내려와 내 앞에 섰다.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지금 이 사람이 뭐 하냐는 눈길로 그쪽을 쳐다보고 있다.
“특히, 당신이 하는 부탁이라면 뭐든 상관 없습니다, 다우드 캠벨.”
그런 시선을 한 몸에 받는 타티아나가, 여전히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귓속말로 뭔가를 속삭이려는 것처럼.
“어차피 당신은 이 자리에서 죽을 테니까요.”
그와 동시에.
녀석이 차고 있는 목걸이에서, 녹색 빛이 점멸하기 시작한다.
무슨 의미인지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굳이 말로 설명할 것도 없이.
돔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 투쟁의 용광로 근처에 있는 ‘바다’ 중 넓은 공간이 요동치기 시작하는 게 눈에 들어 온다.
이 녀석의 목걸이가 점멸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그쪽도 같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인다.
대단히.
‘불길한’ 움직임이었다.
타티아나의 실눈이 슬쩍 벌어진다.
“당신은 뭐든 계획하고 미리 준비하는 게 특성이라고 들었습니다, 다우드 캠벨.”
“그게 당신의 약점이에요.”
귓가에 독기가 스며든다.
녀석이 더 가까이 다가와 나를 살포시 안았다. 주변에서는 이 돌발 행동에 살짝 놀란 기색이지만, 이 녀석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걸 소환하면,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이 죽게 되겠죠. 저도 높은 확률로 포함되겠고.”
조금 벌어진 실눈에서 흘러나오는 건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의 광기다.
중얼중얼 흘러나오는 말투에 녹은 광인 특유의 혼돈이 더욱 그런 느낌에 박차를 가한다.
“그렇지만 이번에 당신을 당신이 아카데미 ‘구조물’ 바깥으로 나오기만 기다렸습니다.”
“아마 당신은 제가 이렇게까지 무모하게 행동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셨겠지만.”
“선각자께서 전력을 다해 당신을 죽이라고 명했으니, 저는 모든 것을 불태워 당신을 이 자리에서-”
그렇게 말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야. 닥쳐 봐.”
“…”
다급하게 타티아나의 말을 끊는다.
녀석의 표정이 순간 멍해진다.
하지만 나는 그딴 거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나 죽이고 싶고, 그래서 뭔가 회심의 한 수 준비 해왔고, 다 알겠는데!”
이 녀석은 뭔가 자기 세계에 심취해서 어마어마한 계획을 짜온 느낌이긴 한데.
내가 지금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하는 건 그게 아니다.
“좀 떨어져, 제발!”
몸을 비틀면서 날 꽉 ‘끌어안고 있는’ 타티이나의 몸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
슬프게도 안 된다.
아무리 전투직이 아니라지만 타티아나도 한 챕터의 최종 보스다.
신체 능력이 나보단 훨씬 더 우월한가보지.
이런 몸부림은 진짜 벌레가 기어다니는 수준 밖에 안 된다는 기색이다.
“…선생님, 뭐하세요?”
오죽하면 옆에서 엘리야가 어이가 없단 목소리로 그런 말을 던졌지만.
난 진지하다.
“너 저거 부르면 높은 확률로 너도 죽는다 그랬지! 살 수는 있단 소리잖아!”
진지한 걸 넘어서, 진짜 눈앞이 팽팽 돈다. 미칠 것 같이 다급하다.
표정이 멍해진 타티아나에게 말을 다다다 쏘아붙인다.
“당장 이 팔 안 풀면 그 낮은 생존 확률도 아예 없-!”
하지만.
그런 문장을 완성하기도 전에.
[ System Message > [ 대상 ‘엘노어’가 또 새로운 여자와 당신이 부비적 거리는 모습에 이성이 끊어지는 수준으로 격분합니다! ] [ 대상이 ‘의심’ 상태입니다! ] [ 대상의 타락 수치가 3배폭으로 증가합니다! ] [ 대상 ‘엘노어’의 타락 수치가 300%를 초과합니다. ] [ 대상이 ‘폭주’ 상태에 들어갑니다! ] [ 피해 예상 범위는 ‘투쟁의 용광로’ 전체입니다! ] [ 살아남을 확률은 0%입니다! ]“…씨발.”
내 욕지기와 함께, 그런 메시지가 튀어나오며.
-…
주변 모든 것이.
고장나기 시작했다.
“…어. 어?”
“뭐, 뭐야?”
주변에서 그런 중얼거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인간들도 지금 본능적으로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으니까.
첫 1초.
회색 기운이 사방으로 치솟아오른다. 모든 것이 점점 느려진다. 이전에 회색 악마가 현현할 때면 늘 그러했듯이.
“…”
하지만.
악마의 ‘폭주’는, 고작 그 따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어진 2초.
세계가, 갈라진다.
“뭐, 무슨?!”
“미친-!”
비명이 사방으로 터져 나온다.
마치 누군가가 이 돔 형태의 구체를 거대한 칼로 반으로 자른 것처럼, 공간이 기괴하게 굴절되고 늘어나며 건물 전체를 갈라놓는다.
수천, 수만의 인간이 오랜 세월을 걸쳐 쌓아올린 이 거대한 건물이.
세계관 제일 수준의 기술력이 접합된 대륙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가, 너무나도 허무하게.
어떤 방어 시설도, 역장도, 심지어는 치천사의 결계마저 소용없이.
고작 1초 만에.
반으로 갈라져서.
무너져 내린다.
—-!!!!!!!!
-!!!!!!!!!!!!!!!!!!!!
건물이 붕괴되는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하다. 사람들이 목이 찢어지도록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돔 전체가 갈라지는 소리에 묻혀버린다.
너무나도 거대한 파괴의 현장에 넋이 나간 사람은 기본이고, 꼴사납게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고, 아예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이, 미친…!”
그런 지옥도 속에서, 황급하게 고개를 돌려 이런 이런 사태를 일으킨 원흉을 찾는다.
찾으려던 건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인파 속에 섞여있던 엘노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가장 소름끼치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모든 사태는, 엘노어가 딱히 ‘마음 먹고’ 저지른 일이 아니란 거다.
그냥 말 그대로 이걸 일으킨 대상은 가만히 숨만 쉬고 있을 뿐인데, 세계가 그 존재를 감당하지 못해서 무너져 내리는 것뿐이지.
이 모든 행동에는, 적의가 배제되어 있다.
그걸 어떻게 아냐면.
“…”
피보다 새빨갛게 물든 엘노어의 눈동자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한 번은 참았네. 리루 가르다의 경우는 백번 물러서서 내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지금, 이 자리에서.
〚하지만, 두 번은. 도저히.〛
엘노어가 진심으로 ‘해를 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저런 힘을 그냥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낼 수 있는 사람이, 이제부터 전력을 쏟아부을 인간은.
〚그 여자는 또 누군가, 다우드?〛
오직, 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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