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d to Be Lov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89)
r 88 – 88. 처음은 드라마틱하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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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다우드와 다른 여자가 껴안고 있는 걸 보고 머리가 끊어지도록 분노한 기억.
지금은, 그저 모든 것이 뿌옇다.
생각하려는 행동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의식 전체에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하다.
근처로 뭔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소리야 인식이 되긴 하지만, 저 멀리에서 들리는 것 같이 희미하다.
“…”
그녀의 시선이, 휘적휘적 공중을 잠시 거닐자.
빛바랜 사진처럼 색깔이 전부 빠져버린 회색 풍경 안에서, 흐릿하게나마 자신을 내려다 보는 사람의 윤곽이 보인다.
중력을 거슬러서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신비한 분위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괴상한 모습이라도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
다만.
그 흐릿한 윤곽만으로도, 그 ‘형체’만큼은 똑바로 알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몇 년을 더 나이를 먹고 성장하게 된다면 이런 모습이 될까.
‘…어머니?’
멍한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 스쳐 지나갔다.
꿈에서도 몇 번이고 보던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이 제일 그리워하던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느껴진다.
이건, 그 형태는 똑같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어머니와 똑같은 존재는 아니다.
그 ‘본질’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
어머니의 모습을 띈 ‘뭔가’가 애타게 자신에게 뭔가 말을 걸고 있다.
뭔가를, 그만두라고. 제발 그만하라고. 애써 말리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 목소리는 전달이 되지 않는다.
마치 ‘지금 상태’에서는, 저 존재의 목소리가 자신에게는 닿지 않는단 것처럼.
“…”
그리고, 그 모습마저 이내 휙 사라져버린다.
엘노어가 멍한 표정으로 모습이 스러지는 그걸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뭘-’
하지만,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머리로 그런 생각을 간신히 떠올리고 있는 상태로도.
뱀이 쉭쉭거리는 것 같은 요사스러운 목소리는 똑바로 들려오고 있었다.
-해버리지 그래?
하라니, 뭘?
-저 남자, 영원히 네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
-더 이상 아프기는 싫잖아?
하지만, 그래도.
다우드는 다우드다.
-죽이기 싫으면, 꼭두각시로 만드는 방법도 있는데?
이건… 기억하고 있다.
이전에 다우드에게 처음으로 반지를 주려고 했을 때 들었던 그 목소리다.
다만, 그때보다 훨씬 더.
그녀가 ‘저항하기’ 힘든 느낌.
마치 이전에 비해 뭔가가 그녀의 일부분을 훨씬 더 많이 잠식하고 있는 것처럼.
‘…싫어.’
그런 생각을 간신히 떠올리며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상대방이 자신을 화나게 한다고 해도. 아무리 자신을 상처 입혀도.
다우드는 다우드다.
죽이라느니. 꼭두각시로 만들라느니.
지금 이 목소리가 자신에게 이르는 것처럼, 저 남자에게 해를 입히고 싶지 않다.
-해버리라고.
-빨리.
하지만, 멍한 의식 사이로 그런 목소리가 파고 든다.
점점 그 크기가 더 커진다. 귓가에 이명이 울릴 정도로 먹먹하게.
하지만, 그렇게 그 목소리가 계속 커지고, 커지고, 커지다가.
도저히 버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딱 들 때 즈음에.
느닷없이 목소리가 전부 사라져 버린다.
“…”
영문을 모르겠다.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멍하니 눈을 끔뻑거린다.
실낱같이나마 돌아온 이성으로 주변을 살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조금이라도 더 파악하기 위해 멍한 눈에 힘을 준다.
그리고, 의식이 ‘시야’에 집중된 덕분에.
엘노어는 코앞에 다가와 있는 다우드의 얼굴을 포착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입술 위에 포개져 있는 그의 입술의 감촉도.
“…”
베아트릭스가 첫 키스는 체리 맛이 난다고 열 띈 주장을 하는 건 많이 들어봤지만, 엘노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감상은 그냥 텁텁한 먼지와 꺼끌꺼끌한 감각이 교환된다는 것뿐이었다.
지금 이 주변으로 보이는 난장판 속에서 체리니 뭐니 하는 감상을 떠올리는 것도 웃길 것이다. 이 남자도 딱히 뭔가 준비를 하고 자신에게 입을 맞춘 건 아닐 게 분명하니까.
“…”
입을 맞춘다라.
그래.
그러니까, 그거.
그거지.
키스.
“…”
그제야 주변이 확실하게 인식된다.
회색으로 모든 것이 물들어서, 빛바랜 사진처럼 멈춰있는 세상 안에서.
오직 다우드와 그녀만이 똑바로 움직이고 있다. 모든 것이 정지된 세상에서 그녀와 그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것도, 입을 맞춘 상태로.
그녀의 눈이 아까보다 더욱 휘둥그레졌다.
키스?
키스라고?
이 남자가, 자신한테?
진짜로?
왜? 도대체 왜?
방금 전까지 다른 여자랑 그렇게 놀아나고 있었으면서?
“…자, 잠…”
표정이 깨진다. 심장이 쑥 가라앉는다. 몸 전체를 치달리는 열기에 전신에서 힘이 확 빠진다.
그 사이에, 입술이 떨어진다.
다우드의 얼굴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마주본 것도 그때였다.
“정신 차리셨어요?”
그런 목소리를 들은 엘노어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아까 그 입맞춤의 영향인지, 평소보다 수십 배는 멋있어 보인다.
물론 평소에도 이 남자 말고는 아무 것도 안 보이긴 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도, 훨씬 더.
호흡이 가빠진다. 저도 모르게 이런저런 생각을 순차적으로 떠올린다.
오늘, 자신이 뭘 먹었더라.
양치는 제대로 했던가.
지금 이 남자가 혹시라도 불쾌하진 않을까.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랬다가는, 다음에 또 안 해줄 수도-
“…”
잠깐만.
다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이거 한 방에 헤롱거려서 그런 것부터 떠올릴 때가 아니다.
정신 차려라, 엘노어. 따질 건 따져야지.
지금 이 남자의 지조 없는 행동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그럼, 다시 할게요.”
“…뭐? 아니, 무슨-”
다우드의 말을 들은 그녀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리려고 몸을 뒤로 뺐지만, 그걸 눈치라도 챈 모양인지 이 남자의 팔이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휘감았다.
양자 간의 능력 차이를 생각한다면 아마 손쉽게 뿌리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다.
이 남자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감각이 느껴지자마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얼굴 전체를 더욱 붉히고 뻣뻣하게 굳는 것뿐이었다.
그러고 있는 사이.
두 번째 충격이 왔다.
다시, 그녀의 입술 위에 다우드의 입술이 다시 포개진다.
한 술 더 떠서, 이번엔 그 혀까지 입 안쪽으로 들어온다.
“아, 우, 다, 다우드, 아, 아… 자, 잠깐…”
뭐라고 어떻게든 문장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
입안을 정신없이 희롱당한다. 안쪽으로 들어온 다우드의 혀와 자신의 혀가 곧바로 얽힌다.
질척거리고, 잡아당기고, 후끈거리고, 끈적하고, 농후했다.
살짝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첫 키스인데. 이 남자는 뭔데 이렇게 능숙한가.
“…”
타액이 얽히는 사이, 엘노어의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으로 여태까지 쌓아 올린 생각이 전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따지고, 뭐고, 어쩌고 하기 이전에.
‘…좋아.’
이 감각이.
이 충실함이.
자신을 이 남자가 채워주고 있다는 포근함이.
아까까지 자신을 좀먹고 있던 우중충한 감정을 전부 다 몰아내고 있었다.
몸 전체가, 따뜻한 것들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
“…”
결국, 엘노어는.
뭔가를 하기 이전에.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로 다우드의 허리에 스스로의 팔을 휘감고 말았다.
틀림없이, 뭔가를 따지겠다는 의사 표명은 아니겠지만.
‘…그런 건, 당장은, 아무래도 상관없네.’
참으로 그러했다.
●
“…하아-”
입을 떼자, 타액의 실 한 줄기가 길게 늘어졌다.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던가.
처음 해보는 거라 잘하는지 어쩌는지도 모르겠다…!
[잘하던데. 너 제비로도 좀 뛰어 본 것 아니냐?]“…”
해봤겠냐?
[그럼 아주 후리는 재능은 타고 났네, 타고 났어. 처음 해보는 일도 그쪽 관련된 일이면 그냥 잘하네. 역시 프로 쓰레기는 다른 건가?]“…”
당신은 닥쳐봐, 좀.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눈앞으로 메시지 여러 개가 줄줄이 늘어졌다.
[ System Message > [ 대상 ‘엘노어’의 타락 수치가 단기간에 250% 이상 급락합니다! ] [ ‘폭주’ 상태가 해제됩니다! ] [ 무시무시한 업적! 당신에게 새 칭호가 부여됩니다! ] [ System Message > [ ‘칭호’ 시스템이 추가됩니다! ] [ 칭호 장착에 따라 전투 외적인 행동에 추가적인 숙련도를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 [ 현재 당신에게 부여된 칭호는 ‘난봉꾼’입니다! ] [ 당신이 여성에게 꼬리를 칠 때 이전보다 더 능숙하고 다재다능하며 능수능란한 테크닉들이 가능해집니다! ]“…”
얘 지금 나한테 시비거는 건가?
칭호는 난봉꾼에, 뭐, 효과가 왜 다 이따위야?
아니, 일단 이건 나중에 신경 쓰고.
“엘노어, 괜찮…”
“…아, 하아, 하아아-”
“…”
척 봐도 안 괜찮아 보이는 상태에 입을 다문다.
목덜미와 귀 끝까지 붉어진 상태로 거칠게 숨을 내뱉고 있다.
“잠시만요. 부축해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그쪽에 다가가려고 했지만.
“…가까이, 다가오지 말아주겠나.”
엘노어가 헐떡거리면서 나를 제지했다.
“지금, 그대가 다가오면, 여러 모로 위험하네.”
“…”
그 말에 내 표정이 다시 굳는다.
위험하다고 한다면, 해석할 수 있는 방향은 여러 가지다.
지금 당장 기분이야 풀렸다지만, 한 번 폭주한 뒤다. 다른 후유증이 있을 가능성이야 얼마든지 있단 거지.
실제로 당장 회색 악마의 기운은 아직 다 꺼지지 않은 상태다. 세상이 아직 멈춰 있으니까.
거기에, 아직 엘노어의 ‘의심’ 상태는 유지중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부터 해야 할 황동도 명확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엘노어에게 다시 입을 연다.
지금부터 이 사람의 기분을 더욱 풀어줄만한 뭔가를 떠올려야 했으니까.
[ ‘칭호: 난봉꾼’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당신의 행동에 보정이 붙습니다! ]“엘노어.”
“…뭔가.”
“최근에는 당신 목소리만 들어도 목 아래가 간질간질해요. 몇 시간 안 보고 있으면 그새 다시 보고 싶고. 이런 약혼녀를 점지해준 신에게 매일 자기 전에 감사 기도를 하고 자고 싶을 정도에요.”
“…”
엘노어의 입이 떡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말을 꺼내놓은 나도 경악한다.
아니.
난 이렇게까지 말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마치, 입이 내 통제를 떠나서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느낌.
아니, 지랄 마.
진짜 지랄 마…!
이거 틀림없이 그 칭호인가 뭔가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당장 해제해야-
[ System Message > [ 칭호: 난봉꾼의 해제를 요청하셨습니다. ] [ 유일한 칭호입니다. 해제가 불가능 합니다 ! ]씨발놈아!!!!!!!!!!!!!!
“…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내가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사이, 엘노어가 시선을 피하며 몸을 꼼지락거렸다.
적어도 아까처럼 나한테 엄청 화가 나 있다거나 그런 모습은 아닌 게 다행이지만.
‘칭호’의 영향으로 이어진 내 행동은 전혀 다행이 아니었다.
“엘노어.”
“…또 뭔가.”
아직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상태의 엘노어에게 뚜벅뚜벅 다가가, 고개를 숙인다.
내 가슴팍 안쪽으로 그녀를 안아 밀어넣으며, 그 이마에 입을 맞춘다.
“사랑해요.”
“…”
잘 보이진 않지만, 지금 엘노어가 딱딱하게 굳어서 입만 뻐끔거리고 있을 건 분명했다.
하도 어이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만해.
칭호인지 뭔지, 제발 그만해.
나 이러다 부끄러워서 죽어…!
하지만, 그런 비명도 부질 없이.
이미 통제를 벗어난 내 몸이, 다시 엘노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귓가에 속삭인다.
“사랑해요.”
으, 이극, 어쩌고 하는 갸냘픈 신음소리가 가슴팍 안쪽에서 올라왔다. 엘노어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똑똑히 전해져왔다.
얼굴이 몸에 묻혀있어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 옆으로 드러난 귀 끝까지 새빨개져 있는 것을 보니 어떤 상태인지는 안 봐도 알만했다.
[와, 와학! 아하하하하학! 아하하하하하하-! 나, 숨이, 숨이, 헉, 나, 나 죽어! 제발 그만해!]이미 한 번 죽은 인간이 뭐라는 거야.
아니, 그보다 나도 진짜 그만하고 싶다고.
이내 다시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는 나를, 엘노어가 팔을 뻗어 저지했다.
“하, 하지 말게…”
“싫어요.”
입으로는 하지 말라고 하지만,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팔을 부드럽게 잡아 내린다. 엘노어가 맘만 먹으면 나 정도는 쉽게 뿌리칠 수 있을 텐데도.
다시 입을 맞추고, 속삭인다.
“그, 만, 다우드, 주변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네, 보고 있다고…”
시간이 다 멈춰있어서 아무도 안 볼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게 부끄러운 모양인지 엘노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보라 그래요.”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는 엘노어에게 내 빌어먹을 입이 그렇서 답해주고, 고개를 숙인다.
다시 입을 맞추고, 속삭인다.
“사랑해요.”
“아, 이, 그…”
다시 입을…
“그, 만, 그만!”
“이제 화 안 났어요?”
“안 났네! 안 났다고!”
“…”
거의 눈물 맺힌 기세로 엘노어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눈앞으로 창이 하나 떠올랐다.
[ System Message > [ 대상 엘노어의 ‘의심’ 상태가 해제됩니다! ] [ 타락 수치의 증감폭이 정상적으로 수정됩니다! ]“…”
그래.
해내긴 했구나.
내 존엄성은 죽은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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