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0
Chapter 7. 개기월식. 벤자민 리히터
형, 형!
그는 누군가 제 몸을 흔드는 것을 느꼈다.
코끝에 살랑이는 풀냄새와 옅은 산들바람. 낮잠 자기 좋은 햇볕.
형, 형 일어나라니까? 저를 깨우려는 익숙한 목소리.
벤자민은 눈을 떴다. 잠시 눈이 부셔서 얼굴을 찡그렸다.
빛이 익숙해졌을 무렵, 그는 저를 깨운 사람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와 닮은, 하지만 좀 더 금빛에 가까운 베이지색 머리칼. 그보단 짙은 남보랏빛 눈을 가진 소년.
“아무리 그래도 밖에서 잠들면 어떡해. 형, 또 늦게까지 일했지?”
“……테오.”
“빨리 일어나. 콜록. 모리츠 아저씨가 맡긴 일, 오늘 저녁까지 마쳐야 한다며.”
그가 스무 살, 그의 동생이 열여섯 살.
그들이 드레스덴 남서쪽의 조용한 도시에서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무렵이었다.
“그랬지.”
벤자민이 나른하게 하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엔 화방에서 버리려고 내놓은 종이 무더기가 들려 있었다.
시간이 남아서 잠깐 그림 그린다고 나왔던 게 그만 졸았던 모양이었다.
“넌 뭐 하러 밖까지 나왔어, 아저씨는 뭐 하고.”
“아저씨가 나보고 대신 전해 달라던데. ‘기껏 그림 공부하라고 학교 보내놨더니, 회화과가 아니고 영문학과에 들어갔던 거냐!’고. 열받아서 형 얼굴은 당분간은 꼴도 보기 싫다더라.”
“마음대로 할 땐 언제고 깐깐하게 굴긴…….”
부모님에게 버려진 뒤, 그들은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빈집에 몰래 숨어 살았다.
벤자민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무슨 일이든 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심부름 소년, 도둑질.
그러던 어느 날, 분명 빈집인데 온기가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에 집을 찾아온 집주인은 방바닥에서 미처 숨기지 못한 종잇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약을 싸놨던 종이. 그 위에는 벤자민이 다리 위에서 바라본 드레스덴의 밤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날, 벤자민과 테오는 집주인에게 빈집에서 몰래 살고 있던 걸 들켰다.
당장 몰매를 맞고 쫓겨날 걸 생각하고 있었는데, 집주인은 그저 지저분한 거지 꼬마들을 위아래로 훑어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가 종이를 들어 보였다.
[이거, 네놈들이 그린 거냐?]집주인은 도시에서 제법 큰 화방을 운영하는 남자였다.
모리츠 칼튼.
돈 냄새를 잘 맡는 사업 수완가이자, 소년들에게 화방의 창고를 내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회화과 들어가라니까, 형. 모리츠 아저씨가 그랬잖아. 형의 그림엔 황혼기에 접어든 늙은이의 애환이 담겨 있다고.”
“그 영감, 그게 본인 인생 절반도 안산 놈한테 할 말이야?”
벤자민이 인상을 썼다.
남자의 눈엔 검댕이와 겨자 소스로 그린 그림이 퍽 좋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화방의 쪽방에서 생활하게 해 준 거겠지.
게다가 그 남자는 벤자민에게 ‘밥값은 스스로 하라’며 짐 나르기, 청소하기 등 화방의 자잘한 일을 맡겼다. 덕분에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보수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대가는 있었다.
요컨대 그들의 불행을 파는 대신, 빵조각을 얻어먹는 것.
사람들의 동정을 사고, 보는 사람이 ‘내 돈으로 네가 배를 곯지 않으니 잘됐구나!’ 하는 흐뭇할 정도의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
그게 남자의 조건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당장 먹고살기 바쁜데 본인들을 보고 저들의 뿌듯함을 채우든 뭐든, 먹고 살면 그만이지.
어떤 미친놈은 전시장에 굶어 죽는 개도 전시하는 마당에, 밥은 먹여 주면서 저들을 전시한다고 하면 싸게 먹히는 장사였다.
덕분에 불우함에 가까운 인생의 시작이었음에도 그럭저럭 살아지긴 했다.
“그 영감이 뭘 모르나 본데, 내 기구한 인생을 팔아서 그림을 팔 거라고 떵떵거렸으면 대학 같은 곳은 보냈으면 안 됐어.”
“야간 대학인데도?”
“그게 그거지. 빌어먹게 비참하게 살았는데, 배우지 못해 먹은 녀석이어야 사람들이 더 동정할 거 아냐. 테오, 넌 예나 지금이나 불쌍한 녀석 그림을 사 줄래? 아니면 옛날엔 불쌍했는데 지금은 학교도 다니는 덜 불쌍한 녀석 그림을 사 줄래?”
“……듣고 보니 그러네. 아무튼 돌아가자, 형. 오늘 컨디션이 좋아서 내가 저녁 해 놨어.”
테오의 말에 벤자민은 씩 웃었다.
“또 오믈렛이지? 지겹지도 않냐.” 그는 동생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테오는 부스스해진 머리를 하고 헤헤 미소를 지었다.
“어떡하겠어. 모리츠 아저씨가 괘씸하다고 형은 당분간 용돈 안 준댔단 말이야. 식비 줄여야지. 콜록, 콜록.”
“걱정 마. 그 영감, 그래 놓고 밥은 먹일 테니까.”
남자가 거지 소년들에게 정을 붙였다는 것 빼면, 벤자민은 불행한 거지 화가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남자는 백날 천날을 밥 먹여 주는데도 주인을 못 알아보고 짖어대는 성격의 벤자민에게 먹인 정을 들여 버렸다.
그래서 아픈 테오에겐 약값을 좀 쥐여 주었고, 벤자민에겐 학교에 다니라 등을 떠밀었다.
그에게 양자 제안을 했던 것도 그쯤이었다. 벤자민은 동생과 떨어질 순 없다고 딱 잘라 버렸지만.
그런데 더는 팔 불행이 없어서일까. 그들의 우연한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화방 주인이자 사업 수완가 모리츠 칼튼은 모든 걸 갖고 있었다.
좋은 집, 가게, 명성, 돈, 악성 종양.
남자가 종양이 있단 걸 안지, 반년도 안 돼 남자는 죽었다. 벤자민이 성인이 된 지 반년만이었다.
양자라도 됐다면 한 푼이라도 떨어졌을 텐데, 벤자민과 테오는 양자도 아니었고 그냥 남남이었다.
집에서 기르는 파충류 애완동물에게도 사료가 주어졌지만 벤자민과 테오에게는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도로 아무것도 없는 채로 다시 적당히 가난한 삶을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벤자민은 돈을 적당히 모아 두었다. 한 명만 살 정도의 돈이었다는 게 걸렸으나, 그가 성인이 됐으니 돈을 벌 선택지는 많았다.
어릴 때보단 훨씬 나은 시작이었다.
벤자민은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번역일이 벌이가 꽤 쏠쏠했다. 아픈 동생을 돌보기도 괜찮았고.
테오는 종종 물었다.
“그림은 안 그려? 형,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잖아.”
“딱히 좋아하는 건 아냐. 그땐 밥 주는 조건이니까 그린 거지.”
“거짓말. 재밌다고 했으면서.”
“재밌는 것도 한 달 내내 하면 질리잖아.”
벤자민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테오는 뭐가 웃긴지 큭큭 웃다가 잔기침을 조금 했다.
“난 형이 그림 그리는 게 좋아. 즐거워 보이거든.”
테오는 말했다.
사실 그도 그림을 좋아했다.
먹고살 만해졌을 땐, 감히 ‘늙으면 그림이나 그리고 살아 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다만, 지금은 현실 때문에 포기했을 뿐이었다.
“약이나 먹어.”
“큭큭, 콜록. 알겠어, 상냥한 형.”
지금 살기도 힘들어 죽겠구만, 그런 희희낙락한 미래는 생각할 시간 없다.
이번 달 집세는 제때 낼 수 있을 것 같고. 집에 남은 약이 얼마나 있던가, 먹을 건 또 얼마나 있던가. 남은 돈은 얼마나 있더라. 벤자민은 늘 그런 걸 떠올렸다.
“…….”
한 명만 겨우 먹고살 정도의 돈은 늘 턱 끝까지 차오른 물 같이 굴었다.
인생을 발끝으로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집집마다 입영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의 집은 예외였다. 그들은 고아였고, 오래전부터 통지서 따위가 날아올 집이라 할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옆집에 살던 게으름뱅이 기타리스트는 입영 통지서를 받은 뒤, 야반도주했다.
벤자민은 기타리스트가 떠난 빈집에 돈 될 만한 것이라도 있나 싶어, 그의 집 문을 따고 들어갔다.
돈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부산하게 널브러진 잡동사니들과 쓰레기처럼 구겨진 입영 통지서 하나뿐.
그는 문 딸 때 썼던 작은 나이프를 빙빙 돌리며 그 종잇조각을 집어 들었다.
무엇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꽤 긴 시간을 그 종이를 바라봤다.
입영 통지서 아래쪽엔 쥐꼬리만 한 금액이 적혀 있었다.
나라에서 네 목숨을 담보로 주겠다는 돈.
그 옛날, 그의 그림을 사 주던 고상하신 분들이 적선하던, 딱 그만큼의 금액.
* * *
그의 생일날. 벤자민의 생일 선물을 몰래 숨겨 놓으려던 테오는 책상 서랍에서 그의 입영 통지서를 발견했다.
“형. 정말이야? 자원입대한다는 거.”
테오가 준비한 선물은 작은 크로키 수첩과 고급스러운 만년필이었다.
“나…… 나 때문이야?”
테오는 울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벤자민은 일부러 환히 웃으며 테오가 준 생일 선물을 받아들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선물 고마워, 테오.”
“그럼 왜…….”
그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뿐이라며, 제 조국과 가족을 지키려는 것이라 말했다.
말하지 않은 것 중에선 한 명의 입을 덜 수 있다는 것과 동생의 약값이 있었다.
몸이 약한 동생은 결국 그의 의사를 꺾지도, 함께하지도 못하곤 드레스덴에 남았다.
벤자민은 조촐한 짐과 동생의 선물을 들고 집을 떠났다.
* * *
그 뒤론 지옥이었다.
처음 총을 잡고, 사방에서 폭탄이 터지고.
흙먼지가 자욱한 전쟁터에서 제 손으로 누굴 죽였다는 걸 자각한 날. 그는 종일 웅크려 헛구역질했다.
금이 간 갈비뼈보다 갈비뼈 안쪽, 통각이 있을 리 없는 폐가 아팠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과호흡이 왔다.
부대에 배치되고 근 한 달간, 그는 식사도, 물을 마시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훈련받은 대로만 움직였을 뿐이었다.
“뭐 하는 거야! 빨리빨리 움직여!”
그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처럼 살았다.
분명 처음엔 그에게도 테오에게 말했던 것처럼 조국이나 가족을 지키려는 고귀한 신념 같은 게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몇 번. 크고 작은 전투를 겪다 보니 무뎌져 갔을 뿐.
언젠가부터 그는 죽지 않으려고 싸웠다.
밤엔 죽은 자와 죄책감이 발목을 붙잡았고, 낮엔 테오와 생존 욕구가 등을 떠밀었다.
그쯤, 테오에게서 편지가 왔다.
벤자민은 동생이 선물했던 만년필로 편지에 대한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그는 수면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제 전투로 동기를 잃었다.
그는 꼬박 사흘 동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는 괜찮지 않았다.
“다들 일어나!”
그 외침에 찰나의 휴식이 끝나고 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통각은 둔해졌고, 감각이 비정상이 되어 가는 것에 비해 정신은 또렷해졌다. 잠을 깊게 자지 못하는 시간도 길었지만, 낮의 각성한 시간도 길어졌다.
죽고 싶은 만큼 살고 싶었고, 딱 그만큼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전투가 끝난 뒤, 피를 덜 닦은 손으로 허겁지겁 밥을 먹는 저 자신을 보며 그는 ‘제정신이 아니구나.’를 실감했다.
어느 날 받게 된 테오의 편지에는 테오의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환히 웃는 동생의 사진. 편지엔 교회에서 찍어 준 거라는 짧은 설명이 적혀 있었다.
벤자민은 답장으로 꽃을 크로키 한 것을 동봉해서 보냈다. 동생이 평소에 좋아했던 튤립.
동생의 사진은 수첩 안에 고이 넣은 뒤 제 안주머니 깊숙이 보관했다.
‘지금의 모든 것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그 마법 같은 한마디는 그의 죄책감을 덜어 주었다.
밤에 잠도 잘 수 있게 했다.
배를 고프게 했고, 살아서 돌아가야겠단 의지를 심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던 날.
그가 를 처음 봤던 날이었다.
* * *
“여기, 프랑스어와 영어를 할 줄 아는 자 있나?”
그는 손을 들었다.
불어는 화방에서 일할 때 불어를 쓰는 고객들이 많아서 응대하다 보니 절로 익혔고, 영어는 동생에게 성서를 번역해 준다고 능숙했다. 몇 안 되는 그의 자랑거리였다.
“따라 나와.”
소령은 그에게 군복 대신 평상복을 입게 했다.
오랜만에 입어 보는 평범한 옷이 어색해서 옷매무새를 더듬고 있자니, 그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평상복을 입은 소령이 다가왔다.
“이 근방에 프랑스 연합군이 매복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우리는 피난민으로 위장하고 이 주위를 정찰한다. 알겠나?”
그에게 임무가 주어졌다. 프랑스인인 척, 주변을 정찰하고 수상한 구석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
그와 소령은 곧장 프랑스 남서쪽으로 향했다.
12월의 산길은 무척이나 추웠다.
눈이 오려는 건지 하늘은 뿌연 색깔이었고, 나뭇잎들이 다 떨어진 숲은 앙상했다.
벤자민은 목에 두른 목도리를 턱 끝까지 치켜올렸다. 뿌연 입김이 긴장감으로 가늘게 흔들렸다.
“국군이 입수한 정보로는 이 근방에 민간인으로 위장한 프랑스 연합군의 정보처가 있다고 했다.”
“네.”
“그러니까 민간인이라도 수상한 자가 있으면 쏴 버려.”
“네. 알겠습니다.”
기계적인 대답이었다.
산길을 얼마나 헤치고 지나갔을까.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는 길을 발견했다. 본능적으로 이 근처에 뭔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길이 난 곳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인적이 드문 숲속, 갈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성당이었다.
성당 앞의 남자 몇과 여자들은 벤자민과 소령을 보고 즉각 경계했다.
그러자 소령은 자신의 아직 낫지 않은 상처를 감싸 쥐며 앓는 시늉을 했다.
“산기슭에서 먹을 걸 찾아다니다 그만 절벽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잠시라도 좋으니 쉬어갈 순 없을까요?”
소령이 비틀거리자 벤자민이 그의 상체를 붙잡았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소령과 벤자민의 군더더기 없는 유창한 언어와 짐짓 불쌍해 보이는 몰골이 사람들의 양심을 건드렸다.
실제로 벤자민과 소령의 얼굴엔 멍과 생채기들이 가득했고, 오랜 시간 산을 헤매서인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그곳의 가장 윗사람으로 보이는 노인이 그와 소령을 성당 안으로 들였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레옹 남쪽에서 왔습니다. 여긴 어디쯤입니까?”
“베엔느에서 좀 떨어진 곳입니다. 저런, 레옹 남쪽이면 여기서도 거리가 좀 있는데…….”
“이런, 방향을 잘못 잡았군요. 나침반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노인이 소령을 부축해 성당 안쪽에 마련한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벤자민은 목도리를 끌어 내리며 성당 안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온기가 감돌았다. 내부는 나무로 지어진 건지 쌉쌀한 나무 냄새가 났다.
전체적으로 모래알 같은 갈색의 건물. 벤자민은 예쁘게 조각된 벽면을 따라 멍하니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엔 그림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림을 보는 게 몇 년 만이지. 늘 보는 거라곤 다 그렇고 그런 풍경들뿐이었는데.
벤자민은 못이 박힌 듯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가 정신을 차린 건, 누군가 그에게 부딪혔을 때였다.
―툭.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
형제로 보이는 두 소년이었다. 열 살 쯔음 됐을까 싶은 어린 얼굴들이었다.
그와 부딪힌 쪽은 동생 쪽이었다. 동생이 이마를 문지르자 형이 냉큼 달려와 동생의 얼굴을 살폈다.
동생은 헤실헤실 웃으며 고갤 들었다.
“미안. 다친 곳은?”
벤자민은 동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지금 보니 동생의 눈은 초점이 맞지 않았다. 시력에 문제가 있는 듯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그는 내밀었던 손을 머쓱하게 거두었다.
“근데, 형은 누구예요?”
형제 중, 형 쪽으로 보이는 소년의 질문에 벤자민은 뭐라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냥 길을 잃어버린 사람.”
“왜 잃어버렸어요?”
“산에서 발을 헛디뎌서 굴렀거든.”
“네? 아뇨, 그거 말고 왜 길을 잃어버렸냐구요.”
소년은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면 길을 찾을 수 있잖아요. 형도 돌아갈 곳 없어요?”
그 별거 아닌 질문에 그의 말문이 턱 막혀 왔다.
쭉 길을 잃어버린 기분으로 살았다. 소년의 말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일 수도 있다.
저는 중심 없이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과도 같았다.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마음으로 정신을 다잡아야 하는지. 길은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절망이 익숙해져서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집이 없어요. 폭탄 때문에 집이 사라졌거든요.”
“……그랬니? 부모님은.”
“엄마가 아빠를 찾으러 갔다 온다 했어요. 내일이면 오실 거예요. ……아마도요.”
“…….”
그렇구나. 벤자민이 뒤늦게 대답했다.
소년들은 벤자민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손을 끌어다가 성당의 장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주로 전쟁 이전의 삶에 대한 것들이었다.
집에 엄청나게 큰 소가 있었다고. 소를 본 적 있냐고. 벤자민이 없다고 하자 소년들은 신나서 자신들의 친구였던 송아지들에 대해 말해 주었다.
벤자민은 고갤 끄덕이면서도 차마 아이들의 얼굴은 마주 볼 수가 없어, 정면에 놓인 그림만 바라보고 있었다.
“형, 그림 좋아해요?”
“어?”
일순간 소년의 앳된 목소리에서 테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벤자민이 화들짝 놀라 고갤 돌렸다.
“아…… 응. 좋아했어.”
“저도요! 동생이 눈을 다치지 않았을 땐 같이 벽에 낙서하고 그래서 엄마한테 혼났어요.”
“그래?”
소년의 동생은 벤자민의 무릎을 베개 삼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벤자민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생 눈은 어쩌다 그런 거야?”
“유리 조각이 들어갔대요. 지금도 가끔 아파요. 그래서 제가 잘 돌봐줘야 해요.”
소년이 씩씩하게 말했다. 동생과 그렇게 나이 차이도 많이 나지 않아 보이면서, 그래도 형이랍시고.
벤자민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
네가 살아 있어야 동생도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네? 잘 안 들려요, 형.”
괜한 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를 담아 고갤 저었다.
그러자 소년이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다 고갤 돌렸다.
“제 눈을 하나 빼서 동생에게 주고 싶어요. 어차피 눈은 두 개잖아요. 그럼, 동생도 다시 볼 수 있게 돼서 좋고, 저도 좋을 텐데. 매일 하느님한테 기도해 보는데도 하느님은 들어주지 않더라구요.”
“잘 안 들어주시긴 하지.”
“형도 기도한 적 있어요?”
“어릴 때 조금. 날 안 좋아하시는지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지만.”
소년이 실망한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벤자민은 그런 소년을 보며 제 동생을 떠올렸다.
테오라면 들어주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저와 달리 신을 신실하게 믿었고 성직자가 될 거라며 열심히 공부까지 하는 애니까.
‘그럼 테오는 뭘 빌었을까.’
그림 속 그리스도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표정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세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가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음에도 감격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뭘 바라고 기도했을까.’
자신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아니면 역시 돈? 걱정이 많은 동생이니 저의 안녕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이유는 모르겠지만 문득 동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형이 있어서 내가 살 수 있었어. 원래는 죽을 운명이었는데. 모두 형 덕분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세상에 죽을 운명이 어디 있어.]어쩌면 죽을 운명을 바꿔 달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테오가 바랐던 건 과연 이뤄졌을까.’
한참을 멍하니 있었을 때, 몸에 묵직한 무게가 느껴져 고갤 들었다.
소년들이 그의 몸에 기대, 자고 있었다.
벤자민은 두 소년을 안아 들었다.
바라는 게 뭐든,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동생은 여태껏 누리지 못한 게 많았으니까. 이왕이면 행복해지길 원했다. 저는 동생이 있어서 제법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니.
그리고 그는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벤자민이 아이를 안아 들고 소령과 노인이 들어갔던 쪽방으로 향했다.
―달칵.
“왔나.”
문을 열자마자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벤자민은 본능적으로 홱 고갤 쳐들었다.
그곳엔 노인이 묶여 있었다. 소령은 그 앞에 서서 줄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심하게 맞은 건지 노인은 정신을 잃은 상황이었다.
“이 노인네 말을 들어보니 연합군은 이미 여길 지나간 거 같더군. 여기서 더 얻을 건 없겠어. 부대로 돌아간다.”
담배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소령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처리하고 와. 저 노인네나, 네가 들고 있는 애새끼들이나. 난 바깥을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네?”
그가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즉각 주먹이 날아왔다.
―퍽.
“대답은 ‘알겠습니다.’ 하나뿐이다. 잊었나?”
그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반사적으로 아이들을 확 끌어안았기에 잠에서 깬 아이들이 몸을 뒤척였다.
‘처리하라고?’
소령은 문을 닫고 나갔다. 입 안이 터졌는지 피 맛이 났다.
‘처리하라고? 누가? 누굴?’
벤자민이 제게 내려진 명령에 얼이 빠져 있을 때, 품 안에 있던 소년들이 그의 품을 벗어나 상황을 살폈다.
소년은 동생의 손을 꽉 붙잡고 의자에 묶여 있는 노인의 몸을 흔들었다.
“하, 할아버지? 피가…… 할아버지, 할아버지!”
“으, 으윽…… 저, 저 녀석들은 악마야……. 고야, 동생을 데리고…… 도망……쳐…….”
노인의 목에선 끓는 듯한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이윽고 들리지 않게 되었다.
패닉이 온 소년이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형의 두려움에 전염된 동생도 벌벌 떨기 시작했다.
“혀, 형아…….”
동생이 소년의 옷자락을 쥐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죽이라고? 내가?’
벤자민은 소년들의 눈과 마주쳤다. 아이들의 눈에 제가 비쳤다. 아이들 눈빛에 어울리지 않는 두려움과 절망의 빛. 그리고 그 가운데 서 있는 제 모습이.
숨이 막혔다.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그는 즉각 몸을 돌려 소령에게 달려갔다.
“이, 이건 아닙니다. 안 됩니다, 소령님.”
소령은 별다른 표정 없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벤자민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저는 여태 지키려고 싸웠던 거지, 죽이려고 싸웠던 게 아니었다. 그 자기 합리화 하나로 여태껏 무너지지 않고 간신히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마땅한 이유도 없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기 싫었다.
“저, 저흰 나라와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겁니다. 아무리 적군의 시민이라고 해도 무고한 민간인을 죽일 순 없습니다.”
아직도 밤만 되면 망령들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시시때때로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고통이 익숙해진 것이지, 행위에 익숙해진 건 전혀 아니었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동생을 위해서라 스스로 세뇌하며 움직이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지금 소령의 명령은, 목적 없는 살인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누가 그러지? 우리가 나라와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네?”
소령은 벤자민의 손을 툭 쳐냈다.
“우린 나라의 개일 뿐이야. 나라님의 땅따먹기 싸움에 동원된 장기말들이라고. 넌 누굴 지키겠다고 남을 죽이나? 위선적인 핑계가 따로 없군. 뭘 지킨다는 핑계로 나설 거면, 지키고자 하는 것 옆에 붙어 있어야지. 이런 전쟁터 한복판이 아니라.”
소령은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냈다.
“잘 들어. 우린 그냥 살인자야.”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무리 누굴 위해서라는 둥, 구구절절 이유를 붙인대도 네 총탄에 맞아 죽은 놈들 입장에서는 그냥…….”
―찰칵, 절그럭.
“살인자일 뿐이지.”
모두가 잠들고 조용한 밤. 총알을 장전하는 소리만이 소름 끼치게 울렸다.
그때, 벤자민의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령과 벤자민이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그림자 속, 작은 인영들이 놀란 듯 꿈틀거렸다.
“형……?”
그를 뒤따라온 소년들이었다.
“그러니 그런 어쭙잖은 양심은 집어치우라고. 그런 걸 끌어안고 있는 녀석은 오래 사는 꼴을 못 봐.”
―철컥.
동시에 소령이 총을 들어 소년들을 겨눴다.
벤자민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형?”
[형.]안 돼! 벤자민은 반사적으로 품속의 나이프를 꺼냈다.
―타앙!
단말마의 총성이 울렸다.
“…….”
“……윽.”
―울컥.
소령의 입에서 붉은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그의 가슴엔 예리한 나이프가 박혀 있었다. 벤자민은 떨리는 손으로 나이프에서 손을 떼어 냈다.
총탄은 나무 바닥에 박혔다.
“너…… 이 개자식…….”
비틀거리던 소령의 몸은 곧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싸늘해진 남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붉게 적셨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년들이 미약한 비명을 질렀다.
갑작스럽게 들린 총소리에 성당 안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헉…… 허억…….”
싸늘하게 식어 가는 사람이었던 것 앞에서, 벤자민이 불규칙한 호흡을 내뱉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메마른 입술을 짓씹었다.
벤자민은 바닥에 떨어진 남자의 심장에서 나이프를 뽑아 들고, 남자의 시체를 업었다.
소년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벤자민은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곳을 등지고 얼마나 달아났을까.
아무 소음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숲속. 벤자민은 맨손으로 얼어붙은 땅을 파냈다.
손끝이 갈라지고 찢기는 와중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아픔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심장에서 퍼 올린 피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일 뿐이고, 머릿속은 검은 펜으로 마구 그어버린 도화지처럼 새카맣게 엉망일 뿐이었다.
[형. 정말이야? 자원입대한다는 거. 나…… 나 때문이야?]“……그래 맞아. 다 널 위해서야. 그래야 너와 내가 살 수 있으니까.”
[넌 누굴 지키겠다고, 남을 죽이나? 위선적인 핑계가 따로 없군.]“아냐, 아니라고! 그게 최선이었어. 나는, 난 옳은 일을 한 거야.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형은 지금 어디쯤이야? 나는 여전히 그곳에 있어.]“시끄러워 테오! 그래서 너에게 갔잖아. 자꾸 네가 불러서. 네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서 그 눈길을 뚫고 널 데리러 갔잖아!”
[잘 들어. 우린 그냥 살인자야.]“아냐! 난 살인자가 아니야. 난, 난 지키려고 했던 거야. 조국을, 가족을…… 나, 난 살고 싶었을 뿐이야! 틀리지 않았어. 나는 옳은 일을. 옳은 선택을 한 거라고!”
* * *
그는 혼자 소대로 복귀했다.
그의 몸은 피범벅이었고, 걸어오다 넘어지고 실성하고 구른 탓에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소령님은 근처에 위장하고 매복하고 있던 프랑스군에게 당해 전사하셨습니다. 저는, 도망쳤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입은 착실히 거짓말을 내뱉었다.
처음부터 그 근방에 적군의 본거지가 있음을 의심했던 부대는 그의 거짓말을 믿었다.
그대로 적군을 타진할 소대가 꾸려졌고, 벤자민은 잠시 쉬었다가 지원군에 합류하기로 정해졌다.
벤자민은 구석에 앉아 제 이름이 불릴 때를 기다렸다.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물속에 잠겨있는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소음이 아득히 멀리 떨어진 것처럼 들렸고, 뭐가 제 몸을 끌어 내리는 것처럼 무거웠다. 멍했다. 이대로 그냥 잠들어도 아무 일 없을 것 같았다.
“움직여!”
누군가의 목소리에 쫓겨 다시 군복으로 갈아입고, 총을 멨다.
길을 걸었다. 넋을 놓고 있어서 몇 번 바닥을 굴렀지만, 발은 절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 성당 앞에 도착했다.
찢어지는 비명과 고함. 밤하늘 높이 솟아오른 불기둥. 밤인데도 붉은 하늘과 척척히 젖은 붉은 대지.
방금까지만 해도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얼굴이 열기로 화끈거렸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벤자민이 불타는 성당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새카만 연기와 재가 하늘을 뒤덮었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툭.
그의 발치에 뭔가 걸렸다. 작은 아이였다.
헛숨을 들이켰다. 느릿하게 무릎 꿇었다. 떨리는 손을 들어 아이의 어깨에 올렸다.
소름 끼칠 만큼 차가웠다.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잡아!”
그와 동시에 고함이 들렸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아이의 몸을 뒤집었다.
툭,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
“여기 있는 녀석들은 연합군 놈들의 소식통일지도 모른다.”
“아…… 아으…… 윽…….”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에선 울음소리가 끓어 나왔다.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이 우그러들었다.
“반항하는 놈들은 쏴 죽이고 나머지는 저 안에 집어넣어!”
“아, 아…… 아악!”
벤자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즉각 대장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 그러고도 사람이야? 이 짓거리를 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 말해, 말하라고!”
그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대장은 곧장 그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퍽!
바닥에 웅크린 벤자민의 머리 위로 짧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대장은 옆에 있던 다른 상사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상사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쓰러져 있는 그를 세게 걷어찼다.
―퍽!
그의 입에서 새된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저 멀리서 들리는 총성과 비명 때문에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 새끼 누구야? 왜 이래?”
“오늘 새벽에 이곳을 정찰하고 살아 돌아온 놈입니다.”
벤자민이 고갤 들었다. 갈비뼈에 금이 간 듯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바닥을 기었다.
“아. 카이든 소령이 죽었다고 보고한 녀석 말인가?”
“네.”
그는 대장의 발을 붙잡았다.
“그만해…… 당장 멈추라고…….”
대장은 저 멀리 불타는 성당을 바라보며 제 앞에 눌어붙은 그를 걷어찼다.
―퍽, 팍!
“윽!”
“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그가 다시 그의 발끝을 붙잡았다. 대장은 그 손을 군홧발로 짓뭉갰다.
아아악. 잠긴 비명이 피에 젖은 땅으로 스몄다.
“으……흐…….”
“그럼 이놈이 여기에 프랑스 놈들의 본거지가 있다고 알린 놈이라는 거 아닌가?”
“네.”
“제정신이 아니잖아.”
벌레 짓이기듯 눌러 밟던 발이 치워졌다. 벤자민이 분노로 일그러진 눈을 하고 고갤 들었다.
대장은 벤자민의 옷깃을 잡고 제 쪽으로 그를 들어 올렸다. 불시에 그의 상체가 확 쳐들렸다.
대장의 고동빛 눈동자가 불길에 번져 붉게 타올랐다.
남자는 말하는 짐승이라도 본 듯한 불쾌한 얼굴로 벤자민의 엉망이 된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열렸다.
“본인이 자초한 일이면서, 이제 와서 왜 이래?”
“…….”
‘내가 자초한 일?’
내가?
벤자민의 분노로 곱아들었던 손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대장은 홱 그를 내팽개쳤다. 털썩. 그가 볼품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내가 자초해?’
그는 검붉게 젖은 흙바닥을 바라봤다.
뒤이어 죽어 있는 장님 아이도.
먼 곳에서 불타고 있는 성당과 그곳에서 들리는 비명들.
재로 뒤덮인 하늘과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 달.
‘내가, 그런 선택을, 해서?’
저가 소령을 죽여서? 거짓 보고를 올려서? 모호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 적군은 거침없이 쏴 죽이는 주제에, 무고한 민간인은 못 죽이겠다 위선 떨어서?
내가?
내가.
내가 죽인 것이다.
“한 놈도 남김없이 잡아!”
“네!”
벤자민 앞에 서 있는 어느 남자의 말에, 뒤에 서 있던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콰르릉!
불타던 성당에서 크게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벤자민은 짓뭉개진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제 눈앞의 군화를 부둥켜 잡았다.
“제, 제발……. 제발, 제발 잘못했습니다. 저, 저 사람들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내가 죽인 것이다. 그동안 애써 아니라고 세뇌해 왔던 사실들이 비수가 되어 꽂혔다.
제 선택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은 제가 죽인 것이다. 제 위선적인 선택 때문에 죽은 것이다.
“잘못은 제가 했어요.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제가, 제가 자, 잘못했습니다. 전부 다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망령들이 숨통을 조여왔다. 죄책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더는 숨을 들이켤 수도, 내뱉을 수도 없었다. 제 손으로 져버린 삶들이 고통스러워 살 수가 없었다.
그는 빌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빌고 빌었다. 나중엔 제가 누구를 살려 달라는 건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조아렸다.
“완전히 맛이 갔군.”, “어떡할까요.” 그의 머리 위에서 다시 한번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퍽.
둔탁한 타격음. 머리가 깨지는 고통과 함께 시야가 암전됐다.
* * *
그는 감옥에서 열흘간의 근신 처분을 받았다.
정신병 걸린 군인들은 대부분 그렇게 혼자 독방에 갇혀 있는 것으로 해결되긴 했다. 더 미치거나, 다시 괜찮아지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
성당에서 죽은 자 중에 본인이 소령을 죽였다 자백한 자가 있었다고 했다. 모진 고문의 결과였다.
그 덕에 벤자민이 저가 소령을 죽였다고 말한 것은 그냥 죄책감에 미쳐 버린 부하의 호소로 여겨졌다.
벤자민은 사흘 내내 넋이 나간 것처럼 쓰러져 있었다.
나흘째 되는 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다음 날은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댔고. 그다음 날은 밥을 조금 먹었다.
와중에도 배는 고팠고, 잠은 왔고, 통각은 무뎌졌다. 구역질이 났다.
“벤자민 리히터. 편지다.”
그쯤 테오에게서 편지가 왔다.
벤자민은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황급히 편지를 받았다.
늘 ‘잘 지내고 있지?’로 시작하는 상냥한 편지.
어디쯤에 있어? 물음표 끝에 동생의 웃는 얼굴이 서려 있었다.
벤자민은 편지의 마지막까지 읽어 내려가곤 그 종이에 얼굴을 묻었다.
‘테오. 있잖아, 테오. 나 사실 사람을 죽였어.’
너는 나를 질책할까? 끔찍해할까? 나라는 쓰레기가 벌어온 돈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 죽고 싶어 할까.
차라리 죽기를 선택할까?
“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숨이 터져 나왔다. 벤자민은 고개를 들었다.
와중에도 그는 살고 싶었다. 구역질이 났다.
벤자민은 답장을 쓰기 위해 펜을 들었다.
* * *
테오는 편지의 뒤 페이지를 넘겼다. “콜록, 콜록.” 그 작은 팔랑 바람에도 그는 작게 기침했다.
상냥한 형.
그는 늘 제 불쌍한 동생을 버리지 못하고 동생이 있는 곳으로 왔다.
저가 있는 곳으로 와 봐야 뭐가 좋다고. 늘 그의 족쇄였을 뿐인데.
친절한 형.
‘형은 죽어도 나를 놓지 못하겠지.’
아마도, 영원히.
편지의 마지막 장. 테오는 편지의 가장 아래 적힌 형의 이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는 편지를 다시 반듯하게 접었다. 그리고 그것을 상자 안에 넣었다.
상자 안엔 벤자민에게 온 편지가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콜록, 콜록.”
테오는 상자를 침대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테오. 너는 어디쯤에 있니.]그는 의자 위에 발을 내디뎠다. 열어놓은 창가에서 시린 겨울바람이 불었다.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니?]테오는 단단히 고정한 줄에 제 목을 걸었다.
‘미안해, 형.’
그는 나직하게 미소 지었다.
눈을 감았다.
벤자민은 창살 너머 시린 겨울 하늘을 바라봤다.
‘너는 착하게 살았으니, 천국에 가겠지.’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듯 시리다 싶더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그 새하얀 눈송이를 바라보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눈이 부셨다.
‘천국이 없어도 상관없어, 테오. 네가 있는 곳이 천국일 테니까.’
그 이후로 테오에게선 답장이 없었다.
* * *
그날 이후 벤자민은 종종 하늘을 봤다. 목적 없이 그냥 바라보는 시간이 늘었다.
가끔 복용하던 약은 일상이 되었다.
그것 말고는 달라진 건 없었다. 밥을 먹었고, 총을 닦았고, 잠을 잤다.
어느 밤에는 죽을 듯이 울부짖다가도, 또 어느 밤에는 그럭저럭 살 만했다.
이제는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는 건 그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몇 달 뒤, 벤자민에게 편지 한 장과 봉투가 날아왔다.
테오 리히터가 죽었다는 편지와 테오 리히터가 생전 모은 돈, 팔아 버린 장기 값이었다.
* * *
“형이 있어서 내가 살 수 있었어. 원래는 죽을 운명이었는데. 모두 형 덕분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세상에 죽을 운명이 어디 있어.”
“미안해 형. 하지만 난 형이 없었으면 죽었을 거야.”
[그래서 그날부터 나는 형을 위해 죽겠다고 다짐했어.]이따금 그는 ‘모든 게 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모든 게.
불타는 성당을 본 것. 눈 내리는 날 동생을 데려온 것. 아이들을 살리고 제 상사를 흙에 파묻은 것. 동생이 미안하다고 했던 것. 동생에게 형을 위해 죽겠다는 말을 들었던 것. 엠마오의 그리스도를 본 것. 동생이 죽었다는 편지를 받은 것.
정신을 놓고 사니 기억이 흐릿해져만 갔다.
약에 취해 몽롱해진 상태가 ‘정상’이라고 생각될 때쯤, 동생이 죽었단 편지를 받았을 때쯤. 벤자민은 저가 뭘 위해 움직이는 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여태껏 왜 버티고 있었던 건지. 뭘 하는 건지. 무엇을 지키려 했던 건지. 누굴 위해서였는지.
핑계 댈 건 전부 잃었다. 그의 손으로 저버렸다.
웃기게도, ‘누굴 위해’라는 핑곗거리가 사라지고 나니, 남는 건 단 하나였다.
저라는 살인자 하나.
“게르강으로 간다.”
자신을 이끄는 상사의 말을 들으며, 벤자민은 죽을 곳을 찾기로 했다.
* * *
게르강 폭격에서 살아남은 뒤, 그는 넝마가 된 몸을 이끌고 마지막이 될 곳을 찾았다. 생을 마무리할 무덤을.
그렇게 발견한 곳이 오베르였다.
프랑스 남쪽의 작은 시골 마을. 구석에서 누가 죽는다고 해도 아무도 모를 그런 외딴곳.
동시에 저 같은 사람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상관없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맞아 죽든지, 치욕스럽게 죽든지. 처음부터 제게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자격 같은 건 없다.
늘 괴롭게 죄책감에 빠져 살면서, 미래 따위는 감히 바랄 생각도 하지 말고, 행복한 시간을 버거워하며, 차마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괴로움을 느끼면서, 최대한 비참하게, 쓸쓸하게 죽어 가야만 했다.
그러니 누구 하나 저가 죽었다는 걸 알지도 못하게 허무하게 죽길. 그날, 저로 인해 죽었던 사람들과 제가 생을 거둬간 자들의 마지막 모습처럼.
그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그는 늘 죽음에 실패했다.
나약한 정신은 상처를 움켜쥐게 했고, 굶주림은 땅바닥의 흙이라도 입에 넣게 했다.
타의로 죽지 못해, 자의로 죽으려 하면 늘 동생이 나타났다.
방아쇠를 입에 물었을 때, 나이프를 손목에 댔을 때, 절벽 아래를 바라볼 때.
“형.” 그렇게 서글픈 목소리로 저를 부르며, 제 등 뒤에 동생의 가냘픈 무게가 기대어 왔다.
그러면 그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죽으면 다신 동생을 만날 수 없었다.
그의 죽고 싶은 죄악감은 늘, 동생을 다시 만나고 싶은 그리움을 이기지 못했다.
저주였다. 죽음을 바라면서, 스스로 죽지도 못하게 하는, 세상에 남겨진 저주.
그렇게 죽고 싶은 그와 차마 외면까진 못하던 오베르 마을 사람들 사이. 어영부영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시끄럽고 이상한 여자가 등장했다.
* * *
“그거. 아는 사람이 그 그림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가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일순간 테오의 부고장을 받았을 때처럼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듣고도 이해할 수 없어 고갤 쳐들었다. 일순간 현실 감각이 아득해졌다.
“그 그림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과도 같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굳이 한 번 더 되묻는 그런 중얼거림.
“어. 지금은 아니지만.”
“그럼 지금은 어딨는데.”
“어? 그, 내가 전에 살던 곳. 그러니까…… 로부스 박물관에!”
그럴 리가 없었다. 그게 멀쩡히 남아 있을 리가. 불길에 휩싸여서 잿더미가 되던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는데.
그런데 그게 로부스 박물관에 있다고? 분명 전쟁 중에 소실됐을 텐데 어떻게.
그러다 문득 있을 수도 없는 일을 상상했다.
어쩌면. 혹시. 설마. 모든 게 꿈이고 환상은 아니었을까.
그날 있었던 일은 전부 제 죄책감이 불러온 환상이었고, 그림은 그 성당에 고요히 있다가 박물관에 전시된 것이다.
거기에 피난하고 있던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거고.
저는 그곳에 갔다가 그저 조용히 떠났고.
그림은 소실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에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모든 게 다 제 망상이었다면.
“……죽기 전에 보고 싶었던 그림이니까.”
숨이 끊어지기 전에야 다시 볼 수 있을까 했던 죄악이 전부 환상이라면.
제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다 없었던 것이라면.
어쩌면.
살아도 되지 않을까.
* * *
“그렇게 생각했지.”
벤자민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그림을 볼 때까지만 살자. 그 그림이 있는 것만 확인하자. 지금 이 지옥이 현실인지. 아니면 모든 게 정말 내가 미쳐서 불러들인 환상인지. 그 그림을 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 그 그림만 멀쩡히 있다면, 만약에 그날 밤 있었던 모든 일이 다 내 꿈이라면, 내 죄책감이 불러온 악몽이라면.”
그는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어.”
처음엔 부정했다.
있을 리 없다. 이름만 같은 다른 그림일 거다.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아무리 저가 미치고 정신이 나갔어도 그날 일을 잊었을 리 없다. 잊을 수 있을 리 없다. 잊지 않으려 수백, 수천 번을 되새기고 있는데. 설마.
그러니까 그 그림이 진짜 자신이 그때 봤던 그 그림인지 보자.
보고, 확인하고, 죽자.
그다음으론 의심했다.
만약에 진짜 그 그림이 맞다면? 그때의 내가 진짜 제정신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지금도 늘 악몽을 꾸고, 약을 먹고, 술에 취해 하루하루를 연명해가고 있는데.
그때 그 일이 정말 현실이 맞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 여자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과연 이 여자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있는 걸까?
그러니까 그 그림이 존재하는지 확인하자.
보고, 확인하고, 다시 그 일이 현실임을 깨닫고, 죽자.
다음으론 화가 났다.
그 그림은 왜 남겨진 걸까. 왜 남아 있어서, 그때 일이 혹시라도 없었던 일이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드는 걸까.
어째서. 어째서 그 그림만.
그래. 그림만 그려 주면 된다 했으니까. 그 여자의 집을 그려 주기만 하면 다 알게 될 거다.
그러면 그 그림을 볼 수 있을 거고. 더는 그 여자도 제게 알짱거리지 않을 거다. 제 속을 뒤집어 놓는 일도 없어지겠지.
그러니까 그림을 그려 주면 된다. 그럼 모든 게 끝날 것이다.
다음엔 기대했다.
하루하루 제 일상을 뒤흔드는 여자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자꾸 저를 들쑤시고 빛 아래로 끌고 나온다. 덕분에 하루하루가 골치 아픔의 연속이었다.
무채색의 삶이 온갖 자기주장 강한 원색의 색들로 쨍하게 칠해진다. 싫은 음식을 억지로 입에 욱여넣는 것도. 생전 인사 한번 해 보지 않은 사람과 말을 섞게 만드는 것도. 내일은 또 어떤 이상한 일에 휘말릴까 골머리를 썩이는 것도 전부 그 여자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 그림이 정말 존재한다면. 정말 모든 게 없었던 일이라면 앞으로는 어떡해야 하지.
그날 이후 평생을 죽어야 한다는 죄책감에 빠져 살았는데, 이유가 사라진다면. 나는 앞으로 어떡해야 하지.
혹시.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만약에라도 모든 게, 그러니까 정말 모든 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면.
그땐 살아도 되는 걸까.
“다음엔 그 상태가 익숙해졌어. 익숙해지다 보니 평범해졌지. 평범해지다 보니 평온해졌고, 평온해지니 무서워졌어. 그 그림이 없는 게 맞고, 그날 일이 여전히 현실이라는 사실을 확인받는 게.”
어느 순간, 그는 닉시가 의뢰한 그림을 완성하기 무서웠다.
그림을 완성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죄와 마주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이기적이게도 평범하게 지내는 생활이 익숙해지다 보니, 현실을 마주하기 겁났다.
어떤 결론이든 간에 지금의 하루가 깨지는 게 겁났다.
“그러다가 우습게도 그 사실을 알게 됐지.”
마침내 그 그림을 완성한 날.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완성된 그림을 가지고 그녀가 있는 해바라기밭으로 가던 날.
자신을 보며 손을 흔들어 주던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날.
벤자민은 닉시의 뺨에 떨리는 손을 얹었다.
“사랑해, 닉시.”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도 안 되는 감정이었다. 사랑이라니. 그래서 그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마음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
부정하고, 의심하고, 화를 내고.
“그래서 미안해.”
기대했다.
그게 저를 미치게 했다.
죽어 마땅한 존재. 남의 목숨을 짓밟고 살아온 주제에 본인은 살고 싶어졌다니. 그것도 모자라 누굴 사랑하게 됐다니.
쭉 그 마음을 부정하고 외면했다.
그렇게 욱여넣고 구겨 넣던 감정이 차오르다 못해 ‘좋아한다’는 말로 입밖에 튀어나온 순간.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었다.
살고 싶었다.
“만약에 내가 여기 죽으러 왔다고 하면 넌 믿을까.”
살고 싶었다. 염치없게도.
벤자민이 닉시에게 한 발짝 걸어갔다. 바닥에 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파리에 가는 게 확정된 이후, 그의 마음 한구석에 도망치고 싶단 마음이 피어났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 그는 쭉 악몽을 꿨다. 저가 죽인 사람들을 등지고, 살고 싶단 마음을 품은 것에 죄책감이 차올랐다.
“난 그림을 핑계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고 있었던 거야. 그럴 자격 따윈 없는데 말이지. 하지만 이젠 진짜 확실히 할 수 있겠어. 그림은 그날 소실된 거고, 그날 일은 현실이 맞았으니까.”
“…….”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끝이었다. 이제는 도망칠 구석 같은 건 없었다. 그림을 봤고, 그날 일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죽을 시간이었다.
벤자민은 닉시의 손을 끌어다 제 목에 갖다 댔다. 그리고 단단하게 겹쳐 쥐었다.
마치 제 목을 틀어쥐라는 듯한 모양새였다.
닉시의 손가락 끝에서 벤자민의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닉시의 입꼬리가 삐뚤게 비틀려 올라갔다.
“그러니까. 뭐.”
그녀는 손을 뿌리치는 대신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의 상체가 흔들렸다.
“그래서 왜. 나보고 죽여 달라고 부탁하게?”
“…….”
그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물기 어린 보랏빛 눈동자는 그녀의 말을 긍정하고 있었다.
하. 그녀가 짧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 책이나 영화에서 보면 사랑 고백 같은 거 할 땐 꽃이 날리고 세상이 행복해지고 별 지랄을 다 떨던데. 왜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놈들은 다 이 모양인지 모르겠어. 왜 다들 죽겠다고 난리인 거지?”
닉시가 다른 손으로 벤자민의 가슴을 퍽 때렸다. 그의 몸이 주춤거리며 밀려났다.
―퍽.
“그렇게 인사하고 뒤져 버리면 남아 있는 사람 마음은 편할 것 같아? 본인은 다 털어놓고 ‘이제 됐다, 죽어도 좋다’ 고해성사하면 끝이냐고, 응?”
“…….”
―퍽!
멋대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멋대로 죽여 달라 애원하다니. 누가 그 말을 들어줄 줄 알고.
닉시는 태생이 남 좋은 일은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의 목을 조르는 대신 그의 가슴을 퍽퍽 때렸다.
“이봐, 벤자민. 네가 저 타고 남은 잿더미에 사연이 있다는 건 잘 알겠어. 정말 네로 소년처럼 그림을 보고 죽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예상 못 해서 놀랍긴 하네.”
그녀의 주먹질에 밀려난 그의 등이 이윽고 불탄 건물 파편에 닿았다.
“근데 말야. 나 네 소원은 못 들어주겠어.”
“…….”
“누가 그렇게 죽어도 좋대? 그렇게 죽으래? 그렇게 죽으면 모든 게 없던 일이 된대? 다 네 생각일 뿐이잖아.”
“…….”
“짊어진 게 무거워? 죄책감 때문에 힘들어? 죽고 싶어? 그게 네 속죄야? 네가 죽인 자들이 네가 그렇게 죽길 원한대? 응? 뭐라고 말 좀 해 봐.”
“…….”
“누군, 안 죽고 싶어서 살아 있는 줄 알아?”
닉시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빨간 눈동자가 드물게 분노로 타올랐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 주위에 멀쩡하게 남아 있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가장 멀쩡한 건 뇌가 비정상인 닉시, 자신뿐이었다.
“잘 들어. 네가 목숨을 바칠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어. 네 나라나, 동료나, 가족이나 이미 다 죽었다고. 네가 죽는다고 이미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오기라도 해? 지금 넌 그냥 너 편해지자고 죽겠다는 거잖아.”
세상이 평화로워진 후에도 종종 친구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곤 했다.
전쟁 당시 입은 상처나 병이 악화돼서도 있었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케이스였다.
이상하지. 전쟁은 끝났고, 세상은 평화로워졌는데, 그들은 이제부터 지옥의 시작이라니.
뭐가 그들을 그렇게 괴롭게 만들었는지,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저는 천재니까.
하지만 남들처럼 울어 주진 못했다. 저는 그런 사람이니까.
“죽겠다고? 편해지고 싶어? 그렇겐 안 돼……. 안 되지, 벤자민. 도망치지 마. 버텨. 똑바로 봐. 기억해 내.”
그러나 이따금 가슴이 휑했다.
죽은 친구들은 가슴께의 이 공허한 구멍이 점점 커지다가 견디지 못해 사라진 걸까. 그렇게 어림잡아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녀의 마음에 난 구멍은 다른 것으로 채워졌고, 공허했던 허탈감도 점점 희미해졌다. 그녀는, 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게 못내 분했다. 저가 다른 사람들처럼 영원히 그들을 위해 울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러니까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 도망치지 말고, 평생 미안해하면서, 괴로워하면서, 용서를 구하면서 살라고. 그게 네가 해야 하는 일이야.”
죽을 만큼 삶이 힘들다는 걸, 저는 아마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소중한 사람들이 없는 삶에 남겨져 살아가겠지.
“그게 우리가 삶을 대가로 평생 짊어져야 하는 무게야. 너는.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죽은 사람을 짊어지고, 제 손으로 죽인 사람들을 잊지 않고 용서를 구하며 평생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것.
닉시는 그를 끌어안았다.
그는 아주 약간의 저항도 없이 그녀의 어깨에 고갤 묻었다.
평소 화가의 비비 꼬인 정신머리라면 무슨 말이라도 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다만 어깨가 소리 없이 젖어 왔다.
닉시는 낯간지럽고 어색한 손길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럴싸한 위로 같은 건 못 해도, 우는 어른 달래는 이론은 조금 알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 음…… 그러면 일단 밥부터 먹자.”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숨 쉬고 있는 걸 후회할지도 몰라.”
“그건 좀 곤란하겠네. 좋아, 못 버티겠을 땐 내가 이렇게 껴안아 줄게. 사랑은 잘 모르겠지만, 이게 사랑에 빠지게 만든 사람의 의무라는 건 아니까.”
“테오가…… 보고 싶어.”
그의 목소리가 약해져 갔다. 흐느낌이 깊어졌다.
이런.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는데.
그녀는 머리를 굴려 가장 그에게 적합할 법한 위로의 말을 찾았다. 하지만 영 시원찮은 대답만 툭툭 떠올랐다.
‘역시 이런 건 내 전공에 안 맞는다니까.’
닉시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벤자민은 고개를 들었다.
닉시는 그의 얼굴을 보곤 미소 지었다.
“오베르로 돌아가자.”
* * *
오베르로 가는 기차는 사흘 뒤에나 출발했다.
사흘 동안 벤자민은 호텔 침실 의자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았다.
가끔은 닉시의 손에 이끌려 파리의 밤거리를 걷기도 했다.
원래도 없던 말수가 더 줄어든 것 빼곤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약을 끊었다.
생에 남기로 한 이후로, 약을 먹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진짜 안 먹어도 괜찮겠어?”
닉시가 물었다. 벤자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밤에 환상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깨어나도 벤자민은 약을 먹지 않았다.
닉시는 그 무식한 결심에 독한 놈이라며 혀를 찼다.
물론 살겠다 결심했다고 통각과 악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했고, 덜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견디기로 했다. 그녀가 말했듯, 도망치지 않기로 한 것뿐이었다.
오베르로 돌아가는 날. 닉시는 부쩍 바빠진 제키와 필립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 호텔을 떠났다.
마무리로 쭈글쭈글한 스마일 그림까지.
지루한 기차를 타고, 마차로 갈아타고.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 덕에 아침 해가 밝기 전에 오베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긴 새벽녘의 공기가 차가웠다.
닉시와 벤자민은 고요한 오솔길을 걸었다. 닉시가 사 온 기념품 가방이 달그락거렸다.
닉시는 벤자민을 흘긋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화가.”
“왜.”
“우리 집 갈래? 소파 아직도 있어.”
“아니.”
“……저기. 네가 뭘 모르나 본데, 나 지금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제안을 한 거라고? 무려 자고 가란 말을 한 거잖아! 눈치 없어?”
“있으니까 싫다 한 거야.”
닉시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혼자 아무것도 없는 집에 들어가면, 우울병 걸린 화가가 죽겠다고 난리 칠까 봐 배려했던 거구만.
‘대체 뭔 생각인지 원.’
“그냥 내 집에서 편하게 쉬고 싶은 것뿐이야.”
“어, 어떻게 알았어?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표정에 다 쓰여 있는데, 설마 모르는 건가. 벤자민은 닉시의 허둥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근데 왜 우리 집 쪽으로 가는데?”
“데려다주러.”
“네가 그런 배려도 알았어?”
그는 깐족거리는 닉시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익숙한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그는 상점 하나를 통째로 뜯어 온 듯, 두 손 가득한 닉시의 짐을 방 안에 넣어 주었다.
“잘 자! 내일 봐!”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길을 걸었다.
아직 캄캄한 마을을 바라보며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폐 깊숙이 찬 공기가 정신을 깨웠다.
들판을 걸어 파도 소리가 들려올 무렵, 그는 집에 도착했다.
‘아. 열쇠.’
그제야 열쇠를 라울에게 줬었다는 게 떠올랐다.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기에 그에게 준 것이었다. 눈치 빠른 라울은 그걸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그에게 괜한 인사말을 덧붙였지만.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머쓱할 텐데. 벤자민은 문고리를 돌렸다.
―끼익.
그러자 문이 열렸다. 분명 문을 잠갔는데.
그가 의아함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갔다.
―터벅터벅.
캄캄한 방 안, 분명 싸늘해야 할 방 안이 묘하게 따뜻했다. 게다가 이상하게 텅 빈집 특유의 메아리가 들리지 않았다.
―달칵.
벤자민이 전등을 켰다.
이윽고 나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방 풍경이 펼쳐졌다.
바닥에 깔린 카펫. 하나뿐이었던 테이블 위엔 근육질 다람쥐가 그려진 식탁보가 덮여 있었고, 창문 하나만 나 있던 곳엔 침대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놔뒀던 그림들도 구석구석 걸려 있었다.
집을 잘못 찾아온 건가. 벤자민이 두리번거리며 침대로 걸어갔다.
분명 제가 살던 곳이 맞는데…….
벤자민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베개 위에 있던 종이 하나가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적은 듯한 글씨체. 길버트의 쪽지였다.
어쩐지 따뜻하다 했더니, 불을 피워 뒀던 건지 벽난로엔 불씨가 조금 남아 있었다.
겉옷을 벗지도 않은 채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편지 하나 읽었을 뿐인데 마음이 시끄러운 기분이었다.
집주인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소란스러운 인테리어. 자고 일어나서 멀쩡한 정신으로 보면 얼마나 지저분하고 엉망일지.
‘집주인…… 집주인이라.’
침대 머리맡에 붙어 있는 창문 너머로 별들이 쏟아지게 많은 하늘이 보였다.
비로소 집에 도착했다는 안락함이 밀려왔다.
벤자민은 동트기 직전의 새파란 하늘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