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1
Chapter 8. 겨울. 암시장, 눈의 여왕, 포인세티아 (1)
시궁창에 사는 버러지 인생들 사이에선 ‘쥐에게 물리지 말라’는 오래된 충고가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쥐라는 생물은 시궁창에서도 가장 좁고 어두운 곳에 살았으며, 온갖 병균을 옮기고 다니는 역병 같은 존재였으니까.
요컨대 좁쌀 같은 이빨을 가졌다 해서 무시할 만한 짐승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무서워서 피한다기보단,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그런 것.
그런 시궁창에서 쥐새끼라 불리던 꼬마가 있었다.
시궁창의 가장 구석진 곳. 쓰러져 있는 사람들 사이로 덥수룩한 꼬마가 고갤 들었다. 그 꼬마 손에는 손톱만 한 뭔가가 들려 있었다.
금니를 씌운 이빨이었다.
꼬마는 그것을 보고 씩 미소 지었다.
“운이 좋네.”
치아에 붙어 있는 금의 양이 적긴 하지만 이 정도면 내일까지 밥값은 벌 수 있었다.
꼬마는 피범벅이 된 손가락을 누워 있는 남자에게 대충 닦아 냈다.
바닥에 있는 남자는 본인의 이빨이 생으로 뽑혔는지도 모른 채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남자의 옆엔 쓰고 남은 주사기와 약봉지가 굴러다녔다.
꼬마는 이빨을 손에 꼭 쥔 채 골목을 벗어났다.
뼛조각에 붙어 있는 금속을 긁어낸 뒤에, 그것을 잡동사니를 취급하는 시궁창의 전당포에 판다. 꼬마의 계획은 그러했다.
꼬마가 시궁창에서 가장 시끄러운 장소인 광장을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어이, 쥐새끼.”
“야, 야 진짜 하게?”
꼬마는 자신을 지칭하는 명칭에 가던 길을 멈췄다.
꼬마를 부른 것은 남자 셋. 그들은 고장 나 깜빡이는 가로등 밑에 앉아 포커를 치고 있었다.
“이리 와 봐.”
뭐가 즐거운지 서로 몇 마디를 주고받던 남자 중, 손에 지저분한 문신이 있는 남자가 꼬마를 불렀다.
귀찮게 뭐야. 꼬마는 시큰둥해하며 남자에게 걸어갔다.
“네가 이 시궁창에서 이걸로 그렇게 유명하다며?”
꼬마가 남자 셋 앞에 서자, 꼬마를 불렀던 남자가 바닥에 뭔가를 툭 떨어트렸다. 꼬마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뭔가로 향했다.
“자. 먹어.”
쥐였다. 덫에 걸려서 뼈라도 부러졌는지, 숨을 껄떡이는 더러운 쥐.
“이걸 먹으면 내가 돈을 줄게, 시궁창의 쥐새끼야.”
남자는 지폐 몇 장을 팔랑였다. 동시에 옆에 있던 남자 둘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꼬마는 바닥에서 벌벌 떨고 있는 잿빛 물체를 그저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남자 중 하나가 끔찍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윽. 진짜 먹으려나 본데?”
“우엑. 미친놈.”
꼬마는 쭈그려 앉아 쥐를 바라봤다.
불규칙적으로 떨던 생명체는 점점 움직임이 잦아들더니 이윽고 움직이지 않았다.
꼬마가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향해 입을 가져다 댔다. 동시에 남자들이 숨죽인 채 꼬마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남자의 상체가 꼬마에게 기울었을 때, 꼬마는 고갤 쳐들고 남자의 문신한 손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악!”
꼬마가 남자의 손목을 깨물었다.
그 짧은 순간에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바닥에 핏방울이 투툭 떨어졌다.
남자가 반사적으로 손을 뿌리쳤다. 그 틈에 꼬마는 남자의 손에서 지폐를 빼낸 뒤 달아났다.
“저, 저 쥐새끼가!”
뒤에서 손을 물린 남자가 고함치는 게 들렸지만 꼬마는 멈추지 않았다.
꼬마는 한참을 내달렸다. 이윽고 꼬마는 자신의 아지트와 같은 곳에 도착했다.
퉤. 꼬마가 피 묻은 침을 바닥에 뱉었다.
“어떤 멍청이가 그런 내기에 응한다고. 먹으라고 줄 거면 털이라도 깎고 주든가.”
그래도 오늘 하루 수확은 제법 쏠쏠했다.
약쟁이에게서 뽑아온 금니와 머저리에게 뜯어낸 지폐 몇 장. 아껴 쓰면 일주일은 도둑질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는 정도.
아지트에서 낡은 잡지를 읽고 있던 꼬마의 친구가 고갤 들었다.
“와, 왔어?”
“엉.”
“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닉시. 오줌싸개 맥스가 말했다.
“응. 머저리 새끼들한테서 짭짤하게 뜯었거든.”
닉시는 오늘의 전리품들을 흔들며 환히 웃었다.
그녀가 시궁창에 역병을 가져올 무렵. 그녀의 나이는 열한 살이었다.
* * *
“나는 머저리야.”
―쿵.
닉시가 테이블 위로 머릴 박았다.
테이블 위에 있던 물잔이 흔들렸다.
“진정해, 닉시.”
이대로 있다간 테이블과 닉시의 두개골 둘 중 하나는 박살이 날 것 같았다. 길버트가 슬쩍 닉시와 테이블 사이에 손을 끼웠다.
술집 안의 모두가 평화로운 점심시간. 닉시 혼자만이 처절과 가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엔 산에 먹을 게 안 나잖아. 겨울은 365일 중에 무려 90일쯤이라고. 그럼 나는 90일 동안 흙이나 캐 먹고 살아야 한단 말이야. 지렁이도 그렇게는 못 살아.”
닉시는 이 순간 여름 내내 놀다가 겨울에 얼어 죽은 베짱이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하다 하다 농사를 망친 것 때문에 겨울에 먹고살 게 없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밤이나 무화과라도 주워 먹을 수 있었던 가을이야 어떻게든 입에 풀칠했지만, 지금은 겨울. 논과 밭은 흙무더기들밖에 없고 나무들엔 나뭇잎 하나 없는 계절이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가죽 장화뿐이야……. 잠깐만. 그걸 잘 씻고 건조하고, 그 위에 와인을 바르면 어때.”
“와인 쏟은 장화가 되겠지. 더러우니까 그걸 먹을 생각은 하지 말아 줘.”
길버트는 맨발로 마을을 돌아다니는 닉시를 상상했다.
“가죽 장화가 안 된다면, 나무껍질이라도…… 하지만 나는 채소보단 고기가 더 좋은데.”
“어머, 둘이 여기서 뭐 해?”
닉시와 길버트가 있는 테이블에 빈 바구니를 들고 있는 헬렌이 다가왔다.
헬레엔. 닉시가 우는 소릴 내며 헬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가올 겨울을 어떻게 나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응? 그야 잘 나면 되지. 왜, 혹시 집 보수를 덜 했니? 아니면 땔감이 필요해?”
“눈앞의 농부님은 보수도 덜 했고, 땔감도 필요한데,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네요.”
길버트가 닉시를 향해 턱짓했다.
“어머……. 대체 뭘 한 거니?”
헬렌의 순수한 질문에 닉시가 아프다는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하는지 고민이에요.”
막 길버트가 시킨 미트 파이가 나왔다. 닉시는 파이의 노릇한 색과 기름진 냄새를 맡으며 군침을 삼켰다.
“흐음, 뭘 먹고 살아야 한다라……. 하긴 겨울엔 마땅히 키울 만한 농작물도 없으니 고민되겠네.”
길버트는 파이를 예쁘게 잘랐다. 그의 포크 따라 닉시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것을 눈치챈 길버트가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파이를 콕 집었다. 그리고 행복한 얼굴로 제 입에 쏙 넣었다.
닉시가 인간 말종을 눈앞에 둔 표정으로 삿대질했다.
마침 좋은 생각이 난 건지 헬렌이 손가락을 튕겼다.
“닉시, 혹시 저 위에 저수지 가 봤어?”
“저수지요?”
헬렌의 말에 닉시가 고갤 들었다.
“응. 왜 봄에 수선화를 따러 갔던 곳 기억나?”
“아.”
닉시는 따뜻했던 무렵, 비누에 넣을 꽃을 따기 위해 갔던 장소를 떠올렸다.
약간 높은 언덕에 있었던 수선화밭. 동백도 드문드문 있었고, 그 옆엔 제법 큰 물가가 있었다.
“네 기억해요. 거긴 왜요?”
“지금 마을 사람들이 거기에서 얼음낚시를 하고 있을 텐데. 정 먹을 게 없으면 거기서 낚시라도 해 보는 건 어떠냐구.”
―쾅!
닉시는 헬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굶어 죽지 않을 방법을 찾아냈다. 닉시는 품 안에서 폭탄을 꺼내 들었다.
“당장 할게요.”
이건 대체 또 어디서 난 거야. 길버트는 저수지 물고기들의 멸종을 막기 위해 닉시의 폭탄을 회수해 갔다.
닉시는 두 손을 호오 불어 녹였다.
성큼 추워진 계절로 인해 꽁꽁 언 저수지.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빙판 위에 자릴 잡고 앉아 있었다.
닉시는 냉큼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야호, 재밌겠다! 길버트! 우리 이왕이면 가장 깊은 곳에서 낚시하자. 혹시 모르잖아. 10미터짜리 거대 빙어를 잡을 수 있을지.”
“여기 수심 3미터야, 닉시!”
타이밍 좋게 적당한 곳에 누군가 파고 내버려 둔 얼음 구덩이가 보였다.
좋아, 주인은 없고. 위치도 적당하고. 닉시가 그 동그란 구덩이 앞에 쭈그려 앉아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이미 오늘부터 다음 주까지의 요리 메뉴를 선정해 놓은 닉시였다.
전부 물고기들로만 가득 찬 메뉴였지만 처절과 가난의 시간을 앞둔 농부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 이거 받아.”
길버트가 헬렌에게서 빌린 낚싯대를 닉시에게 건네주었다. 닉시는 최후의 승선을 앞둔 노인 같은 비장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떡밥을 끼운 낚싯줄이 퐁, 소릴 내며 물 아래로 내려졌다.
제발 물고기들이 이 낚싯바늘을 물어 주길. 닉시가 중얼거렸다.
길버트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수지를 폭파하거나, 빙판 아래로 빠져 버릴까 봐 쫓아오긴 했지만.’
마을 이장은 농부의 처절한 모습이 조금 의아했다.
닉시는 꼭 당장이라도 굶어 죽을 사람처럼 굴었다.
그런 걱정은 선사시대 무렵 ‘호모’로 시작하는 원시인들이나 하는 거 아닌가. 지금은 그 이후로 몇천 년이나 지난 시대고.
전쟁이고 자시고도 끝나서 사람들이 여유가 없는 시기도 아니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까지 처절하지 않아도 될 텐데, 대체 왜지?
길버트가 닉시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왜 그렇게 심각한 거야? 나나 마을 사람이나, 네가 굶어 죽게 놔둘 사람들도 아닌데.”
당장 마을 광장에서 배고프다고 외치기만 해도 곳곳에서 마을 어르신들이 뛰쳐나올 것이다. 그들은 길버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만 나도, 입이 심심하다고 혼잣말만 해도 난리였으니까.
그런 마을 사람들이 굶어 죽겠다고 비실거리는 신참 농부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그런데 닉시는 그걸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닉시는 맹한 얼굴로 코를 훌쩍였다.
“……엥? 나 굶어 죽게 안 놔둬?”
“엥.”
닉시의 생뚱맞은 말에 당황한 건 오히려 길버트 쪽이었다.
“도시 사람들은 누가 굶어 죽도록 놔둬……?”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대부분……? 놔둔다기보단 관심이 없는 쪽에 가깝긴 하지만.”
길버트는 눈앞의 농부가 대체 어떤 도시 생활을 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말만 들어 보면 도시에 살았다기보단 하루하루 살아남는 데 열심이어야 하는 전쟁터에서 살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데 필사적이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머릿속엔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라는 선택지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죽게는 안 놔두지. 난 너한테 빚진 것도 있는데.”
“너희 아버지를 감방에 보낸 거 말이야?”
길버트가 긍정하듯 고갤 끄덕였다.
그녀가 뭐라 대답하려는 찰나, 낚싯줄이 흔들렸다.
물고기가 미끼를 문 것이다.
“물었다!”
힘껏 낚싯대를 잡아당겼다. 줄이 팽팽해져 왔다. 줄에서 느껴지는 힘에서 물고기가 제법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랑이 끝에 닉시는 물고기를 건져낼 수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물고기를.
“이게 뭐람. 힘은 상어급이었는데.”
솥에 넣고 삶으면 국물만 겨우 낼 정도의 아담한 크기였다.
닉시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다음 미끼를 낚싯바늘에 끼웠다.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구. 오베르는 네게 친절하니까.”
“하하. 그러다가 내가 게으름뱅이가 돼서 살아 있는 혹이 되거나, 호의를 이용해서 모두를 등쳐먹으면 어떡하려고.”
길버트는 닉시의 말에 제법 진지하게 고민했다.
―퐁.
이번엔 제 팔뚝만 한 물고기가 잡히길. 닉시가 속으로 기도했다.
“음…… 그러면 뭐 어떡해. 이웃 농사도 망하고, 사기까지 당한 오베르 사람들이 되는 거지.”
“말은 잘해.”
“하하,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 거지.”
길버트가 핫 초콜릿을 만들겠다며 뜨겁게 데운 우유에 초콜릿 가루를 넣었다.
도로 잔잔해진 물웅덩이에 그의 초콜릿색 머리카락이 비쳤다.
닉시가 그 달콤한 색을 바라보다 툭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긍정적인 평가라니. 오늘이 혹시 내 생일인가? 뭔가 낯간지러운데.”
그녀의 씩씩한 대답에 길버트가 픽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닉시의 뺨에 따뜻한 머그잔을 가져다 댔다.
“근데 닉시, 그렇게 소리치면 물고기 다 도망간다?”
아차. 닉시가 뒤늦게 탄식했다.
손안에 따뜻한 머그잔이 들어왔다. 먹지 않고 가만히 쥐고 있어도 속이 따뜻해져 오는 기분이었다.
‘굶어 죽도록 놔두지 않는다라……. 그런 건 이상적인 사회주의 체제에서만 나오는 논리인데.’
닉시는 따끈하고 달짝지근한 음료를 홀짝였다.
누구 하나 죽지 않고 잘 살아가는 이상 세계. 흔히 말하는 유토피아.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 같은 것도 없고, 늘 행복하고, 서로서로 사랑 넘치는 곳.
세상은 넓으니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닉시는 그런 곳을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었다.
그녀가 살았던 곳은 늘 죽음이 코앞에 있었고, 살기 위해 남을 등쳐먹어야 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호의에는 악의로.
그런 그녀에게 오베르의 호의는 약간 이상했다.
고작 몇 달 함께 살았다고 죽게 놔두진 않을 거라니.
그런 건 꼭 가족 같지 않은가. 피도 한 방울 안 섞였으면서.
‘……가족?’
닉시가 잔에서 입을 떼어냈다.
“……길버트.”
“응?”
“혹시 내가 돈을 빌려 달라 하거나, 집에서 하루만 재워 달라고 하거나, 오늘만 밥 좀 사 달라고 거지처럼 굴어도 도와주면 안 돼. 알겠지?”
“사람을 되게…… 쓰레기처럼 굴라고 하네.”
“아니. 이웃을 강하게 키우는 오베르 사람이 되라는 거지.”
길버트가 희한한 다짐의 뜻을 모르겠다는 듯 머릴 긁적였다.
“뭐, 네가 원한다면야.”
때마침 낚싯줄이 움직였다.
* * *
“라텐구 사건의 범인으로 보이는 자의 물품이 발견됐다더군.”
동료의 말에 필립이 보고 있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고갤 들었다.
“라텐구 사건의 범인?”
필립의 동료는 본인이 들고 있던 서류를 필립의 책상 위에 내려놨다.
서류에는 국가기밀이라는 도장과 함께 파리 남부의 지도가 꼼꼼하게 프린팅되어 있었다.
“그래. 나치 잔당의 동선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더군. 그곳에서 발견한 미확인 약물, 기억하지? 상부에선 그날 일어났던 방화를, ‘나치 잔당이 그 약물을 은폐하기 위해 벌인 사건’으로 보고 있어. 나치 놈들이 수도의 치안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이런 약물을 푼 게 아닌가 싶어.”
‘골치 아프게 됐군.’
필립은 지도 위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장소를 바라봤다. 언젠가 닉시가 소매치기 때문에 시궁창을 뒤집었다고 읊어 줬던 그 장소였다.
상부에서는 닉시가 사고 친 걸 나치 잔당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군에서 주시하고 있던 곳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방화.
우연히 그 방화 창고에 남아 있던 미확인 약물.
나치가 프랑스의 치안을 위협하기 위해 그 약물을 풀었다는 결론.
헛다리를 짚어도 아주 당당히 잘못 짚은 셈이었다.
‘범인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닉이 이 사건에 휩쓸릴 일은 없겠다만……. 그 쓸데없는 정보 때문에 당분간 고생 좀 하겠군.’
어디선가 수명이 깎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래서 범인으로 보이는 자의 물품이란 건 뭔데?”
“그거 말인가.”
동료가 책상 위에 올려놨던 서류를 몇 페이지 뒤로 넘겼다. 그곳엔 손바닥만 한 뭔가를 하나 복사해 놓은 게 있었다.
“신분증이야.”
필립이 그것을 바라봤다.
그리고 소리 없이 경악했다.
필립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진 것을 눈치채지 못한 동료는 서류 위, 신분증에 표기된 정보를 손으로 짚었다.
“얼굴은 희미해서 누구라고 특정 지을 수 없지만, 이름과 태어난 지역은 적혀 있더군.”
그곳엔 버터 빵을 기가 막히게 만드는 바텐더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 *
닉시는 사흘 내내 저수지에 출석했다.
그녀가 저수지에 서식하는 모든 물고기의 종류를 한 번씩 다 낚아 봤을 무렵, 오베르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족이라.’
왜 그녀는 새삼 옛날에 들었던 말이 떠오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제 마을 이장님에게 유토피아 같은 말을 들어서 그런가.’
닉시는 빨갛게 언 손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애초에 닉시에겐 처음부터 가족이랄 게 없었다.
피로 엮인 가족은 오래전 대공황 때 죽었으며, 가족이라고 불릴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이들도 대부분 죽었다.
그러니 그 단어에 대해 묘하게 껄끄러운 감정이 드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괜히 오래전에 들었던 헛소리가 다시 떠오르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닉시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발이 시렸다.
슬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발가락이 얼어붙는 날씨가 된 것이다.
“안 되겠어. 두꺼운 양말을 사든가 해야지.”
이맘때쯤 그레타네 양 농장에서는 양털로 만든 스웨터와 양말을 판다.
원래는 물고기 판 돈으로 스웨터 양말 세트를 살 생각이었으나 세트 살 돈을 만들기도 전에 발가락이 떨어질 것 같았다.
발가락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양말을 사야겠다. 닉시는 그렇게 다짐하곤 그레타네 양 농장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닉시.”
“오. 왔어?”
그레타의 양 농장 안에는 여전히 예쁜 단발머리의 그레타와 여전히 마을 이장인 길버트가 있었다.
양들이 추운 바람을 피해 쉬는 울타리 옆엔 나무 테이블과 난로가 놓여 있었다. 가끔 점심을 먹거나 차를 마실 수 있게 만든 작은 공간이었다. 그레타와 길버트는 그곳에 앉아 있었다.
“안녕, 그레타? 양말 사러 왔어!”
“드디어 사기로 결심하셨구만.”
길버트가 말했다.
닉시는 그간 그레타네 가판대에서 상품을 열정적으로 노려보기만 하곤, 물품을 사지 않는 진상 손님이었다.
드디어 손님이 결심을 끝냈다는 소식에 그레타가 찬장을 열어 예쁘게 포장된 양말들을 꺼내 놓았다.
큰 고민 끝에 닉시는 초롱아귀 패턴의 양말을 선택했다. 구경하던 길버트가 “진짜 별로다…….”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근데 길은 여기 무슨 무슨 일이야?”
“오늘 그레타한테 수업 듣는 날이거든.”
“수업?”
“응. 글자 수업.”
아하. 닉시가 고갤 끄덕였다.
길버트가 닉시에게 스펠링 읽는 법을 배운 이후, 끈기없는 닉시를 대신해 그레타가 가끔 길버트의 글자 쓰기를 봐줄 때가 있었다. 오늘이 그 수업 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부 실력은 어때? 길버트 학생?”
“유감이지만 형편없더라고.”
길버트는 머쓱하게 웃으며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테이블 위엔 동화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쓰는 게 약해서 편지 따위를 쓸 때 매번 의도치 않게 말을 건방지게 하는 길버트를 위한 눈높이 교육이었다.
“길버트. 저번엔 샬롯 할머니께 이라 했죠?”
“그게, 내 말은…… 일을 열심히 하셔서 무릎이 아프시지 않냐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덕분에 그레타의 수업은 제법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네. 오늘은 이 동화책을 따라 써 보도록 해요.”
그레타의 매몰찬 말에 길버트는 축 처진 얼굴로 동화책에 나오는 내용을 종이에 끼적이기 시작했다.
보기 드문 광경에 닉시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수업을 참관했다.
그런 닉시의 시선에 동화책 하나가 걸렸다.
오늘같이 눈이 펑펑 오는 날에 어울릴 법한 동화. 차가운 얼음 마녀와 마음이 얼어붙은 소년. 소년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소녀에 관한 이야기.
그녀가 처음으로 읽었던 동화.
* * *
날이 흐려서 비가 올 줄 알았는데,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벤자민이 저릿한 손을 꾹꾹 누르며 창밖을 바라봤다.
‘이대로 놔두면 내일 마당이 얼어붙겠군.’
그는 벽난로에 장작을 몇 개 더 집어넣었다.
불이 화악 타오르자 그 위에 목욕할 물을 담은 양동이 하나와 유리 주전자를 올려 두었다.
눈을 쓸고 난 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정이었다.
‘저녁으로는 팔팔 끓인 콘 수프가 좋겠군.’
벤자민이 입고 있는 겉옷을 꼼꼼히 여민 채 밖으로 나갔다.
―퍽!
문을 열자마자 난데없이 얼굴에 눈덩이가 날아왔다.
“아핫핫하!”
벤자민의 얼굴에 눈을 투척한 닉시는 고요한 마당이 떠나가라 웃었다.
그는 삽시간에 싸늘해진 표정으로 얼굴을 닦아 냈다. 방금까지만 해도 보송했던 머리카락이 눅눅하게 눌어붙었다.
벤자민은 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보면 몰라?”
―퍽!
닉시가 던진 눈송이가 벤자민의 어깨를 맞췄다.
“눈싸움이잖아!”
그걸 누가 몰라서 묻는 건가. 벤자민이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털어냈다.
“놀아 줄 사람이 필요하면 마을 이장한테나…….”
―퍽!
“……가서 놀자고 하지, 왜 여기까지 와서……”
―퍽!
닉시가 던진 눈은 그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고 떨어졌다. 그 몰골이 꼭 크림 터진 슈 같아서 닉시가 깔깔 웃어댔다.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도 잠시. 인내심에 한계점을 돌파한 벤자민이 성큼성큼 다가와 닉시의 목덜미를 잡았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야, 야 잠깐!”
그는 한 손으로 눈을 퍼 올려 그대로 닉시의 얼굴에 처발랐다. 덕분에 그의 손엔 닉시의 경악하는 표정이 찍혀 나왔다.
닉시는 입에 들어간 눈을 퉤퉤 뱉어냈다.
“근데, 화가. 이런 날에 웬일로 밖에 나왔어? 겨울잠을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닉시의 질문에 벤자민은 대답 대신 삽으로 묵묵히 마당을 쓸어냈다.
“아하. 마당 쓸기? 하긴, 이런 함박눈은 제때 안 쓸면 봄까지 안 녹아서 골칫덩이가 되니까.”
닉시는 벤자민이 쓸어낸 눈들을 한데 뭉쳐 커다란 덩어리를 만들었다. 봄까지 안 녹는 골칫덩이 눈사람을 만들 계획이었다.
“넌 갑자기 왜 온 건데.”
“아까 말했잖아 눈…….”
“눈싸움 말고.”
벤자민의 경험상, 그녀가 저를 찾는 데는 열이면 열,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가 어물쩡 넘어갈 기색이 아니자 닉시는 입술을 삐죽였다.
“하여간 까다롭긴.”
닉시는 짊어지고 있던 바구니를 탈탈 털어냈다. 거기에서 꽁꽁 얼어버린 물고기들 몇 마리가 튀어나왔다.
“너랑 같이 생선찜 해 먹으려고. 그래서 말인데, 너 혹시 적포도주 있니?”
그것 때문이었군.
벤자민이 떨떠름하게 고갤 끄덕였다.
닉시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어딜 봐도 포도주를 강탈하기 위한 도적의 눈빛이었다.
“좋았어! 내가 감자랑 양파는 기부해 줄게!”
“됐으니까, 마당 쓰는 거나 좀 도와.”
“그럼, 그럼.”
그의 말에 닉시는 물고기들을 다시 주워 담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돕겠다 나선 닉시는 맨손으로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마당을 쓸겠다니 무식하기 짝에 없었다.
그 몰골을 본 벤자민이 허, 하는 탄식을 내뱉곤 삽을 건네주었다.
닉시는 기어이 그의 집 앞에 개집 크기의 이글루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벤자민이 삽을 정리할 동안, 그의 집 출입 허가를 받은 닉시가 냉큼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우와. 길이 네 집을 꾸며 줬다 자랑하더니 뭔가 많이 생기긴 했네!”
닉시가 눈에 젖어 축축해진 겉옷을 의자에 걸어놓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화가의 집은 이제 제법 사람 사는 집처럼 변해 있었다.
침대도 생겼고, 작은 탁자도, 램프도. 따뜻해 보이는 이불을 발견했을 땐, 그녀는 제 몸이 홀딱 젖은 것도 잊은 채 다이빙할 뻔했다.
한참을 욕실에서 뭔가 부스럭대던 벤자민이 닉시를 향해 손짓했다.
“뭔데?”
호기심이 인 닉시가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그녀를 곧장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뜨거운 수증기 한가운데 서서 어리벙벙해진 닉시 위로, 보송한 수건과 옷가지가 날아왔다.
“씻고 나와.”
그는 그렇게 말하곤 문을 탁 닫았다.
“……뭐야 내가 냄새나나.”
닉시가 볼멘소리를 하며 투덜거렸다.
킁킁. 눅눅해진 옷에 냄새를 맡아봤으나, 겨울 숲 같은 차가운 냄새 말곤 딱히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주 약간이지만 물고기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굳이 이유를 찾아낸 그녀가 벤자민이 준 수건과 갈아입을 옷들을 물이 닿지 않는 곳에 잘 걸어두곤 물을 받아놓은 곳으로 걸어갔다.
따끈하게 데워놓은 물.
미리 씻을 준비라도 해 놨던 건지 물에선 은은한 풀 향이 났고, 옆에 씻을 도구들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후아.”
닉시가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곤 그 커다란 나무 대야 안에 몸을 담갔다.
오베르의 들판 4권
총은 로맨스판타지 소설
전자책 발행 : 2023년 7월 18일
지은이 : 총은
발행인 : 고영토
발행처 : 콘텐츠랩블루-세레니티
투 고 : [email protected]
정 가 : 3,000원
ISBN : 979-11-6968-640-2 05810
Ⓒ 총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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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의 들판
5권
총은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