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2_1
Chapter 8. 겨울. 암시장, 눈의 여왕, 포인세티아 (2)
벤자민은 닉시가 벗어둔 눅눅한 겉옷을 벽난로 옆에 걸어두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으로 보내버릴 걸 그랬나.’
눈싸움이다, 눈사람 만들기다, 눈밭에서 뒹군 닉시는 쫄딱 젖은 펭귄 꼴이었다.
가만히 놔두면 저의 집을 물바다로 만들 것 같아서 일단 욕조에 밀어 넣었는데.
―찰박.
그게 문제가 될지 몰랐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릴 때마다 벤자민은 벽에 머리를 쿵 박았다.
대체 왜 저렇게 태평한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밖도 아니고 안이다. 그것도 춥다고 사방을 꽁꽁 싸맨 좁은 집 안.
긴장 같은 건 안 되는 건가? 아니, 본인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 건가?
벤자민이 고개를 벽에 쿵 기댔다.
제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욕실 안에선 이제 노랫소리까지 흘러나왔다.
‘남의 속도 모르고 왜 태연한 거야.’
겨울은 다른 계절보다 더 일찍 해가 졌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지만 밖은 캄캄하기 짝에 없었다. 게다가 눈도 오고.
이러다가 그녀가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다!’ 우기면 그땐 어떻게 될지 몰랐다.
벤자민은 혹여나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 비척거리며 요리를 준비했다.
빨리 밥 먹이고 집에 보내는 게 오늘 밤을 조용히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가 요리를 끝냈을 때쯤, 닉시가 욕실에서 나왔다.
“잘 씻었어, 화가!”
닉시가 긴 금색 머리칼을 수건으로 털어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테이블 위엔 오늘 저녁으로 예정돼 있던 물고기 와인찜이 놓여 있었다.
“이건 또 언제 만들었대? 같이 만들려고 했는데.”
닉시는 반갑게 물으며 냉큼 의자에 앉았다.
벤자민은 피곤한 기색으로 뜨겁게 데운 와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맞은 편에 앉을 것이라 생각했던 화가는 곧장 마른 수건을 들고 욕실 쪽으로 향했다.
“어라? 같이 안 먹어?”
“그래. 씻을 거야.”
그는 한시라도 빨리 눈앞의 농부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안 그래도 노동으로 인해 노곤해진 피곤한 육신에, 원치 않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하도 안달했더니 정신도 피곤했다.
그런 걸 알 리 없는 닉시가 포크로 음식을 휘적이며 외쳤다.
“그래? 그럼 이거 내가 다 먹어 치워도 몰라?”
닉시가 포크로 하얀 생선 살을 크게 집어 들었다.
“그러든지.”
벤자민이 휙 고갤 돌렸다.
그런 피곤한 상태에서 제 옷을 입고 있는 헐렁하고 무방비한 여자를 볼 재주 같은 건 없었다.
벤자민이 씻고 나왔을 땐, 닉시의 식사는 끝나 있었다.
벽난로 앞에 걸어 뒀던 그녀의 옷도 제법 많이 말라 있었다.
배도 불렀겠다, 옷도 말랐겠다.
“이제 돌아가.”
벤자민은 벽난로 앞에서 녹아 가고 있는 닉시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닉시가 졸린 눈을 하고 그를 올려다봤다. 그리곤 장난기가 솟는 듯 샐쭉 웃었다.
“우리 사이에 뭐 그렇게 급해? 뭐 숨겨 둔 거라도 있어?”
그 눈웃음이 여간 나른한 게 아니었다.
우리 사이는 또 뭐야. 그는 얼굴을 팍 구기고 머리를 털던 수건으로 닉시의 얼굴을 가렸다.
졸지에 수건을 맞은 닉시가 허우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가, 갑자기 뭐야?”
“옷도 다 말랐군. 시간이 더 늦으면 집으로 가다가 눈사람이 될 테니까, 빨리 돌아가.”
“진짜 좋은 거라도 숨겨 놨나.”
“그런 거 없어.”
닉시가 투덜거리며 그가 건넨 옷을 받아들었다.
꾸물꾸물 웃옷을 벗으려는 닉시 때문에 벤자민이 황급히 뒤돌았다.
옷을 다 갈아입은 닉시는 그의 스웨터를 벤자민에게 건넸다.
그는 테이블에 앉아서 뭔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새로운 번역 의뢰인 듯 보였다.
닉시가 원고지에 적힌 알파벳을 바라보다 툭 말을 내뱉었다.
“참. 아까 그레타네 양 목장에 갔었는데. 거기에서 길버트랑 그레타랑 공부하고 있더라구. 동화책을 읽고 쓰는 건가 봐.”
닉시는 신고 있던 양말을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곤 새 양말을 꺼냈다.
양털로 짜낸 두툼한 양말. 심해에 사는 초롱아귀가 그려진 멋들어지는 것이었다. 못생겼군. 벤자민이 그것을 보고 생각했다.
“나도 예전에 그렇게 공부했을 때가 있었는데.”
“보통 어린애들은 그렇게 글자를 익히니까.”
벤자민은 사과 벌레 이야기로 ‘A’에 대해 깨우쳤던 어릴 적을 떠올렸다.
―드르륵.
닉시는 의자를 끌어다가 벤자민의 맞은편에 앉았다.
“화가. 너 혹시 알아?”
그녀의 뜬금없는 질문에 벤자민이 고갤 들었다.
모르진 않았다. 독일 동화는 아니었지만 유명하지 않은가. .
악마가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거울을 깨트렸는데, 그 파편이 심장과 눈에 박혀 감정을 못 느끼게 된 소년. 그런 소년을 자신의 왕국으로 데려간 눈의 여왕과 소년을 찾으러 여행을 떠나는 소녀 이야기.
“알아.”
“내가 처음 읽었던 동화책이 그거였어. 길버트가 공부하던 동화책 중에 그게 있길래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더라고.”
벤자민이 번역하던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그녀를 바로 집으로 내쫓는 건 글러 먹을 성싶었다.
“그게 언젠데.”
“엄마 아빠가 죽고 난 뒤에, 잠깐 보육원에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였을 거야.”
처음 듣는 닉시의 옛날이야기였다. 벤자민은 심드렁하게 듣고 있던 자세를 그녀 몰래 고쳐 잡았다.
닉시는 그날을 떠올렸다. 보육원의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시간.
그때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여러분의 부모님은 눈의 여왕이 와서 데려간 거예요.’라고 말했다.
“뭔 개소린가 했지. 내가 우리 엄마 아빠 죽는 걸 봤는데.”
닉시는 턱을 괸 채 옛날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거짓말.]열 살의 닉시는 보육원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제 엄마 아빠는 목매달아 죽었다고 공표했다.
부모님이 죽거나, 자신을 버리고 간 게 아니고 나쁜 무언가에 붙잡혀 가 버려서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란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해 있던 아이들은 닉시의 말에 하나둘 울음을 터뜨렸다.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들이 주인공 소녀처럼 포기하지 않고 씩씩하게 자라길 바란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던 선생님도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부터 닉시는 요주의 인물로 찍히게 됐다.
그 이후론 곧잘 감당 안 되는 말썽을 일으키는 바람에 보육원을 이곳저곳 옮기다 결국 시궁창까지 도달하게 되었고.
“난 사실 거기 나오는 소녀가 참 바보 같다고 생각했어.”
떠나버린 소년을 잊지 못하고 찾아 헤매는 소녀.
본인이 싫어서 떠난 것도 아니고 좋아서 따라간 건데, 굳이 왜 그 소년을 찾아 헤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행길이 신나고 즐거운 모험도 아니고 진흙탕에 다이빙하듯 험난했다. 죽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멍청하고 미련하기도 했다.
굳이 안 해도 되는 생고생인데. 죽을 위기에 처하면서까지 왜 소년을 찾아야 한다는 건지.
그렇게까지 그 소년이 중요한 건지.
그런데 더 알 수 없는 건, 사람들이 그 이상한 기행을 쉽게 이해한다는 부분이었다.
단지, 소녀가 소년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사랑.’
“벤자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가 고갤 들었다.
닉시는 벤자민의 조용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툭, 입을 열었다.
“근데 넌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아무것도 안 해?”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궁금증으로 반들거렸다. 그는 문득 그 색이 불꽃 같다 생각했다.
그는 슬쩍 고갤 돌렸다.
“그게 왜.”
“보통 손을 잡는다든가, 입을 맞춘다든가, 같이 있고 싶다든가 하잖아.”
그런데 눈앞의 화가는 그런 보편적인 행위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녀를 떫은 감 보듯이 보고, 씻고 나왔을 때는 걸어 다니는 물고기를 본 것처럼 바로 얼굴을 구겼다.
함께 있을 여지를 줘도 바로 집으로 가라고 보내려 들지 않나. 지금도 일부러 대놓고 찔러 보고 있는데 별 반응 없이 시큰둥하기만 하고.
짐승도 구애의 춤을 추는 마당에, 이 남자는 늘 자기를 구마해야 하는 마귀 새끼처럼 여기고 앉았으니.
“넌 왜 아무것도 안 해?”
“…….”
“보통 사랑한다고 하면 뭐라도 하지 않나?”
평소랑 다르게 굴든지, 상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든지.
벤자민은 테이블 옆에 쌓아 둔 장작을 들어 벽난로 안에 집어넣었다.
식어 가던 불꽃이 한껏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러길 원해?”
“그냥 궁금하다 이거지.”
난 사랑이 뭔지 모르니까. 닉시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감정이라는 것은 실체를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을 판별할 수 있는 건, 그저 그것을 가진 자의 표정, 행동, 말투, 몸짓, 눈빛을 읽어 내는 것뿐이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겔다가 카이를 사랑해서 그를 구하려 했던 것처럼.
그러니, 닉시에게 화가는 모순과 의문 덩어리일 수밖에 없었다.
본인에게 ‘사랑한다’ 말했으면서, 행동은 전과 다를 바 없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남자.
개는 꼬리를 흔들고 고양이는 이마를 부딪친다. 사랑이 그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간단한 거였으면 얼마나 쉬웠을까.
“난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안 믿는 편인걸.”
하지만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으니.
상대방에게 무슨 감정을 가졌는지 숨길 수 있고, 반대로 없는 감정을 꾸며내 진실인 것처럼 속이기도 한다.
사람은 감정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감정이란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실체도 없을뿐더러, 변하기도 하고, 거짓으로 꾸며낼 수 있는 그런 것을 어떻게 이해한다고 하는 걸까.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확실히 안 하던 짓을 하게 되긴 하지.”
“응?”
벤자민은 테이블을 짚고 일어났다.
그는 그대로 고갤 숙여 닉시의 아랫입술을 짧게 핥았다.
아주 잠깐의 접촉이었다. 장작에 작은 불꽃이 튀는 것보다 짧았던, 아주 찰나의 스침.
벤자민이 제 혓바닥에 붙어 온 스웨터 실밥을 뱉어 냈다.
아까 닉시가 옷을 갈아입었을 때부터 그녀의 입가에 달라붙어서 계속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던 얇은 실이었다.
“……말로 해. 놀랐잖아.”
“네가 왜 아무것도 안 하냐 물어봤잖아.”
“흐음…….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었구만.”
“알았으면 이제 진짜 돌아가.”
“네이.”
닉시가 투덜거리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따끔거리게 남아 있던 뭔가가 괜찮아진 기분이었다.
그게 뭔진 정확히 모르겠으나.
* * *
이튿날, 마른 풀의 얼룩덜룩했던 마을은 온통 새하얀 눈밭이 되었다.
농부들은 농사가 없는 시기에도 농부라, 새벽부터 일어나 집 앞의 눈들을 쓸고 있었다.
닉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새벽녘 즈음 벤자민의 집에서 쫓겨나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강철 해바라기 기둥만큼 쌓인 눈밭을 발견했다.
그냥 놔뒀다간 꽁꽁 얼어 붙어버릴 테고 그렇게 되면 닉시는 산타클로스처럼 굴뚝으로 제집을 드나들어야 했다.
결국 늦잠을 포기하고 닭 우는 소리에 맞춰 일어나 삽질을 시작했다. 겨우겨우 끝냈을 땐 이른 점심 무렵이었다.
닉시는 굶주림에 배를 움켜쥐고 라울의 바로 걸어갔다.
눈과 씨름한 다른 마을 사람들도 그녀와 비슷한 몰골로 라울의 바로 향하고 있었다.
“닉시, 여기야 여기!”
“헬렌!”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풍기는 냄새는 오래 끓인 호박의 달큰한 냄새였다.
헬렌이 엄청나게 큰 솥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아, 손 큰 헬렌이 호박죽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무료 나눔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오늘 아침에 만들었는데, 호박이 너무 커서 우유를 계속 넣다 보니 너무 많아졌지 뭐야! 닉시 너도 한 그릇 할래?”
“물론이죠!”
헬렌은 닉시에게 따끈한 호박죽을 건넸다. 위에 귀여운 주근깨처럼 올라간 파슬리가 입맛을 돋우었다.
닉시가 헬렌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아 호박죽을 퍼먹기 시작했다.
배고파서 라울의 바에 온 다른 사람들도 슬금슬금 헬렌의 무료 급식소에 찾아왔고, 손님을 뺏긴 라울은 카운터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냄비를 비운 헬렌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후련한 듯 미소를 지었다.
“후, 전부 처리했네. 그 많은 호박을 언제 다 먹나 했었는데. 콜록.”
콜록, 콜록. 말하다가 먼지라도 들이켠 건지, 헬렌이 작게 잔기침했다. 호박죽을 세 그릇째 먹던 닉시가 고갤 들었다.
“헬렌, 감기 걸렸어요?”
“아니. 아침에 마당에 눈 좀 치웠더니, 목이 차가워져서 그런가. 오늘따라 조금 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하네.”
그게 감기일 텐데. 닉시가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놨다.
하기야 눈도 오고, 쌀쌀한 바람이 부는 이런 날씨엔 감기가 유행하기 마련이었다.
닉시가 군대에 있을 무렵도, 늘 이맘때쯤이면 콜록거리며 앓아눕는 인간 바이러스들이 출몰하곤 했다. 가만히 놔두면 부대 하나를 초토화하는 겨울 감기 말이다.
‘감기약이라도 만들까.’
오베르에는 약국이랄 게 마땅치 않았다.
이런 눈 내리는 겨울날, 독감이라도 유행한다면 여간 고생일 게 아니었다.
‘좋아.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 볼까. 밥값은 해야 하니까.’
“어? 닉시 가려구?”
“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떠올라서요.”
“응?”
닉시가 벗어났던 장갑을 주워들었다.
애매하게 남겼던 호박죽을 전부 들이켠 닉시가 캬, 하는 감탄과 함께 그릇을 내려놨다.
그러자 늦게 뭔가 떠오른 듯 헬렌이 닉시를 불러세웠다.
“아참, 닉시! 대니스가 널 찾던데.”
닉시는 어리고 비실비실했던 우편배달부를 떠올렸다.
“대니스가요? 왜지? 편지 올 만한 곳은 없는데.”
“글쎄, 네 앞으로 아주 중요한 편지가 하나 와 있다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시기에 중요한 편지가 왔다고?
빚을 독촉할 만한 놈은 없고, 재입대를 독촉할 놈들은 타일러서 파리로 보내 버렸다.
그럼 대체 누가 편지를 보냈다는 거지.
“근데 눈이 이렇게 와서 편지가 배달될는지는 모르겠네.”
“하긴. 대니스는 순록 썰매 배달부가 아니라 평범한 자전거 우편배달부니까요.”
그럼 저 갈게요! 닉시가 손을 휘저으며 바 밖으로 나섰다.
얼어붙은 개울 옆엔 버드나무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닉시는 버드나무 겉껍질을 벗겨낸 뒤, 속 껍질을 얇게 발라냈다.
“이걸 면포에 넣어서 즙을 짜내고……. 아, 돌아가는 길에 길한테 식초나 빌려야겠다.”
닉시는 약을 만들 대략적인 재료들을 확보했다.
살리실산을 추출할 수 있는 버드나무 껍질과 살균과 살리실산의 부작용을 잡아 줄 아세트산.
둘만 놓고 보면 그냥 평범한 아스피린이 완성될 테지만, 저가 누구인가.
천재 중의 천재. 제2의 마리 퀴리. 마음만 먹으면 노벨상 열여섯 개는 그냥 탈 수 있는 미친 두뇌의 화학자. 닉시 아니던가.
“아직 파리에서 가져온 유기물들이 남아 있으니까…….”
약에 사용되는 몇 가지 샘플들이 남아 있었다.
‘그걸 결합하면…….’
닉시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화학 공식이 정리됐다. 성분은 최대로 올리고, 약의 부작용은 상쇄한다. 그 심플하면서도 화려한 분자 구조를 정의하는 데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 우리 어르신들 관절도 안 좋으니까, 관절 치료 성분도 넣을까?”
닉시는 스스로의 능력에 감탄했다. 이야, 열일곱 번째 노벨상감이다, 중얼거리며.
* * *
닉시가 신약을 다 개발했을 무렵, 마을에는 콧물 재채기를 동반한 감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감기의 시초는 닉시의 직감대로 손이 큰 헬렌.
그녀가 나눠 준 호박죽은 본의 아니게 달콤한 호박맛의 감기 바이러스 매개체가 되어 버렸다.
졸지에 바이러스 왕국이 돼 버린 라울의 바는 당분간 문을 닫게 되었다.
물론 이런 병, 저런 병 다 취급해 본 바이러스의 여왕 닉시는 그런 시시한 겨울 감기 같은 건 걸리지 않았다.
“여기요, 헬렌. 따뜻한 물이랑 함께 아침저녁으로 챙겨 먹어요.”
“엣취! 고, 고마워 닉시.”
닉시는 예쁜 눈깔사탕처럼 생긴 것들을 감기약이라며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다녔다.
천재 화학자답게 약의 효능은 아주 즉각적이었다.
“이걸 먹으니까 무릎 아픈 것도 낫더라니까?”
“그럼요! 제가 관절에 좋은 성분도 좀 넣었거든요. 서비스로요.”
“염증이 있었는데, 그것도 사라진 것 같어.”
“당연하죠! 약에 항생제가 첨가됐으니까요!”
“머리카락도 자란 것 같은데.”
“우와! 착각이에요!”
닉시가 만든 감기약에 대한 소문은 반나절 만에 마을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다 나중에는 닉시가 만병통치약을 팔고 있다는 식으로 와전되었다.
먹자마자 열이 내렸다느니, 약을 먹으니까 송아지들로 벤치프레스가 가능해졌다느니, 공중 부양이 가능해졌다느니.
마지막 공중 부양에 성공했다는 매튜 할아버지에겐 ‘약을 술과 먹지 말 것!’이라는 엄중 경고가 내려졌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콧물약을 받아 간 꼬마가 닉시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닉시는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깜빡이다가 손을 아주 크게 흔들어 주었다.
꼬마가 사라지자 닉시가 헤실헤실 웃으며 헬렌을 팔꿈치로 툭툭 쳤다.
“들었어요. 헬렌? 나보고 선생님이래요.”
“그래? 선생님 맞지 뭐. 의사 선생님.”
“살다 살다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봐요. 흐음. 선생님……. 제법 나쁘지 않은데.”
“원랜 뭐라고 불렸는데?”
닉시가 흐으음. 길게 고민했다.
가장 처음 생각나는 건 간단하게 약팔이 닉시. 쓰레기장의 악마. 정신 나간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이 별명들을 순순히 말하면 그녀를 친절한 이웃으로 아는 오베르 사람들이 놀랄 수도 있었다.
닉시는 최대한 머릴 굴려 멀쩡한 별명을 선정했다.
“양심 없는 무뢰배? 아, 시궁창의 쥐새끼라 했던가.”
“어머머. 걔들 말 되게 나쁘게 한다. 데려와, 혼내줄게.”
헬렌은 새삼 도시엔 인간 말종들만 모아 둔 걸까 궁금했다.
“근데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거야? 원래 의사였어?”
헬렌이 손수건에 콧물을 풀며 물었다.
“뭐, 비슷했어요.”
군의학을 공부하긴 했었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화학의 범주 안에 약학이 속해 있기도 하고.
“졸업장은 못 땄지만요. 그래도 이 분야 경력으로만 따지면 16년쯤은 돼요!”
“허풍은.”
헬렌이 픽 웃으면서 닉시의 어깨를 툭 쳤다.
닉시는 감기약을 넣어 놨던 바구니에서 종이쪽지들을 펼쳐봤다. 어깨너머에서 그것을 본 헬렌이 그게 뭐냐는 듯 고갤 갸웃했다.
“근데 아까부터 그건 뭐야? 메모?”
“이거요? 의뢰서예요. 혹시 약이 몸에 안 맞는 체질일 수도 있고, 감기 말고 다른 증세가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분들은 맞춤으로 약을 제작해 드리려고요.”
약을 제조하는 건 정말 오랜만에 해 보는 터라 제법 신나있던 닉시였다.
사람마다 맞춤으로 약을 제작한다는 건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겨울은 농사지을 것도 없으니 시간 죽이기에 좋았다.
거기다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다 보니, 그들이 약값이라며 먹을 것을 챙겨 주었다.
그러니 이건 자원봉사가 아니라 일종의 협력관계인 셈이었다.
게다가.
‘선생님이라.’
“들어 볼 수 없는 호칭으로도 불려 봤으니, 서비스라고 해 두는 거죠!”
“후후. 선생님이란 말이 꽤 좋았나 보네?”
“네! 티가 났어요?”
“엄청.”
늘 산 인간을 죽이는 데에만 썼던 제 능력이, 사람이 건강해지는 곳에 쓰인다는 것은 제법 뿌듯한 부분이었다.
“아깐 바이올렛 아주머니가 보답으로 근사한 훈제 양고기를 준다 했어요. 일주일 꼬박 생선만 먹으니 조만간 아가미가 돋을 뻔했는데 잘됐죠.”
“그렇구나! 잘됐네.”
헬렌은 닉시가 의뢰서 위에 끄적인 화학 공식을 바라보며 말꼬리를 늘렸다.
“약을 그냥 팔 생각은 없고? 나였으면 우리 가게 진열대에 전시해 놓고 3유로에 팔 텐데. 딱 제철 상품이잖아?”
헬렌의 말에 닉시가 고갤 들었다.
닉시가 당장 “좋은 생각이네요!” 외칠 거라고 생각했던 헬렌의 예상과는 다르게 닉시는 꽤 오랫동안 눈만 깜빡였다.
“아뇨. 이제 약은 안 팔기로 했어요!”
꽤 단호한 대답이었다.
헬렌이 아쉬움을 담아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어쩔 수 없고.”
그때, 의뢰서치고 굉장히 예쁜 편지 봉투가 헬렌의 눈에 들어왔다.
“어라? 닉시.”
“네?”
“이것도 제조 의뢰서야?”
헬렌은 제조서 쪽지 틈 사이, 편지 봉투 하나를 가리켰다. 닉시가 제 바구니 안을 들여다봤다.
금박의 테두리. 향료를 뿌린 건지 묘하게 꽃향기가 나는 것 같은 편지 봉투. 봉투는 꼼꼼하게 풀을 발라 완벽히 밀봉된 상황이었다.
닉시가 예쁜 편지를 뒤집어 누가 쓴 편지인지를 확인했다.
“뭐지?”
아무리 봐도 그냥 약 의뢰서 같은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이런 편지 같은 걸 보낼 사람은 없는데.
“음, 영국에서 572번째로 보낸다는 그런 편지는 아니겠지?”
“아! 혹시 그거 아냐 닉시?”
헬렌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아는 척했다.
“왜. 대니스가 널 급하게 찾았다고 했잖아. 중요한 편지가 와 있었다고. 그게 이거 아냐?”
그러고 보니 그랬다.
아직도 쌓여 있는 눈 때문에 편지 배달이 중단된 건가 싶어서 잊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요. 눈이 다 녹을 때까지 배달 안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뭔 내용이려나. 닉시가 눈을 반짝이며 편지를 뜯었다.
붓꽃 같은 우아한 향이 물씬 풍겨왔다.
“어라?”
“어라.”
편지 내용을 본 헬렌과 닉시 둘 다 기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내용이 제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이건. 분명.
“러브 레터?”
닉시는 그길로 헐레벌떡 집에 달려갔다. 몰골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곧장 약속 장소로 향하려 했다. 편지에 적힌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기도 했으니.
그러나 그런 그녀를 헬렌이 극구 뜯어말렸다.
[이 몰골을 하고 나갔다간 있던 사랑도 도망갈 거야.]닉시는 제 몰골을 훑어봤다.
추위 때문에 얼어붙은 딸기코. 장점이라곤 보온성 하나뿐인 솜 들어간 골지 바지. 연파랑 스웨터.
[평범하잖아요?] [거지 같아, 닉시.]헬렌은 특히 스웨터 팔꿈치의 천을 덧댄 부분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가 만약 고백했는데 짝사랑 상대가 옷을 그렇게 입고 온다? 천년의 사랑도 식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발 깔창에 못을 박아 자체 제작한 눈신은 벗고 오라고. 그 야만적인 신발을 신을 바엔 차라리 미끄러져서 오는 게 낫다 했다. 차라리 그쪽이 더 와일드하다고.
닉시는 헬렌의 등쌀에 못 이겨 집으로 달려갔다.
약속 시간까진 이제 30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오솔길을 달음박질하던 닉시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길버트와 마주쳤다.
“어라, 무슨 급한 일 있어?”
“엉. 누굴 만나야 하거든!”
“누굴?”
길버트의 말에 닉시가 히죽 웃었다.
그녀는 검지와 중지를 사용해 제 주머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그녀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짜잔! 이게 뭐게?”
“편지?”
“아니. 러브 레터.”
“호오.”
“빨리 박수 쳐 줘.”
―짝짝짝.
길버트의 호응에 으쓱해진 닉시는 괜히 코를 문질렀다.
“나한테 사랑을 고백한다는 사람이 있다 이거야! 지금 그 사람을 만나러 가!”
오후 한 시. 양 목장 옆 아몬드 나무 아래.
만남의 장소도 오베르에서 몇 안 되는 멋진 장소였다. 편지를 보낸 사람도 낭만을 아는군 싶었다.
닉시가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고 러브 레터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긴 길버트가 그녀 옆을 종종걸음으로 따라 걸었다.
“누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