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2_2
“몰라?”
“너무 중요한 걸 모르잖아…….”
“내 사랑은 사람에 구애받지 않아. 왜냐면 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호모사피엔스로 보고 있으니까.”
그러든지 말든지 이미 사랑과 고백이라는 것에 심취한 것 같은 닉시는 사랑이란 단어가 들어간 오래된 유행가를 흥얼거렸다.
“혹시 벤자민?”
“푸핫! 뭐어?”
길버트의 질문에 닉시가 코미디라도 본 사람처럼 비웃었다.
“걔가 이런 고상한 짓을 할 사람 같아? 하하.”
“뭐, 하긴. 벤자민 성격이면 차라리 대뜸 고백하겠지.”
“그럼. 그 녀석은 예술가인데도 무드라곤 모르는 녀석이니까.”
길버트는 닉시의 콧노래 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언젠가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처럼 사랑, 사랑 노랠 불렀던 때. 아마도 봄이었던가.
길버트가 닉시의 손에 들린 편지를 지그시 바라봤다.
닉시가 들고 있는 편지 봉투에는 정갈하게 쓴 필기체로 라 적혀 있었다.
닉시를 선생이라 부르는 미지의 호모사피엔스.
‘누굴까.’
얼굴도 모르는 미지의 털 덜 달린 원숭이가 길버트의 머릿속을 뛰어다녔다. 신경이 안 쓰이려야 안 쓰일 수 없었다.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 참. 그때, 봄에 어디서 만났더라. 아. 라울의 술집이었지. 내가 꽃점 적는 걸 도와달라고 했었어. 닉시가 저기 보라고 하고, 그다음에…….’
[길, 저거 말이야. 그거 아냐 그거?] [응?] [사랑.]“어?”
그의 머릿속에 뭔가 반짝 스쳐 지나갔다.
그 봄날의 기억. 거기에 편지 봉투의 필기체.
지금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글씨체였다.
“그럼 난 옷 갈아입으러 갈게. 나중에 봐.”
“어? 아. 어, 응.”
어느새 집에 도착한 닉시는 편지를 펄럭이며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길버트만이 눈을 끔뻑이며 서 있었다.
‘저거 아무리 봐도…….’
그가 울타리에 몸을 기댔다.
“그레타가 쓴 편지 같은데.”
* * *
오베르 마을의 점심시간. 바 주인인 라울이 하루 중 두 번째로 바쁜 시간이었다.
벤자민은 오래전 바 주인에게 빌린 와인오프너도 돌려줄 겸, 간단한 끼니도 때울 겸 라울의 바 안으로 들어왔다.
“왔어?”
“가장 빨리 되는 걸로 하나 줘.”
“알겠어. 겨울 시금치랑 치즈 넣은 파니니 어때.”
벤자민이 고갤 끄덕였다.
라울은 그가 카운터에 올려놓은 오프너를 보곤 ‘저게 뭐였더라?’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저게 아주 오래전에 그에게 와인 한 병과 함께 빌려줬었던 것임을 깨달았다.
“1년이 지나도 안 주길래 그게 맘에 들어서 가진 건 줄 알았네.”
“잊고 있었던 것뿐이야.”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던 게 무슨 이유로 떠올랐을까. 와인 딸 일이라도 있었나?”
라울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있다마다. 어느 성가신 누군가를 한시라도 집에 빨리 보내려고 애썼던 날이 있었지.
벤자민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바텐더는 프라이팬 위에 올리브유를 두른 뒤, 시금치를 넣었다.
곧장 입맛 돋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참, 아까 헬렌 씨가 그러던데. 닉시 양 앞으로 편지 하나가 왔다더라고.”
바텐더가 입을 열었다. 벤자민이 의아하다는 듯 고갤 갸웃했다.
“그게 뭐.”
“연서인 모양이야.”
그의 미간이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휘었다.
“정신 나갔군.”
“하하. 평가가 너무 박한 거 아냐?”
“머리에 총 맞았군.”
“그게 그거잖아.”
―치익.
적당히 숨만 죽을 정도로 볶은 시금치 위에 얇게 썬 치즈가 올라갔다.
진초록빛의 열기에 녹아 치즈가 흐물거릴 무렵 파니니 그릴에 겉만 구워진 빵이 포개졌다.
“짠. 점심 완성입니다. 손님.”
라울이 귀여운 막대 장식을 파니니 위에 콕 찔러 벤자민의 앞에 내려놓았다.
“예쁘잖아, 닉시 양.”
벤자민이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성격도 밝고. 사고는…… 음, 꽤 치는 편이지만.”
“…….”
“옆에 있으면 재밌을 것 같은 사람이니,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법도 하지.”
벤자민은 묵묵히 파니니 하날 해치웠다. 마지막 남은 빵 조각을 마저 입에 넣은 벤자민이 접시 위에 나무 막대를 내려놨다.
“혹시 총 맞았나?”
“하하, 아니.”
“상태는 비슷해 보이는데.”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돈은 여기 두고 가지.”
벤자민은 지폐를 카운터에 올려 둔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접시를 닦던 라울이 고갤 내밀었다.
“그래. 이따가 저녁에 올 거야?”
그의 질문에 벤자민이 고갤 끄덕였다.
―달칵.
문이 닫히고 바텐더의 시야에 밀크티색 머리칼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상하네. 분명 궁금할 것 같았는데.”
라울은 그가 먹은 빈 접시를 치우며 중얼거렸다.
가을 무렵. 정확히는 닉시와 벤자민이 파리에 갔다 왔을 때.
라울은 그날을 기점으로 벤자민의 기류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것은 팽팽하게 조여져 있던 실이 느슨하게 풀린 것 같은 변화였다.
스치기만 해도 베일 듯 매사에 날이 서 있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진 것 같이 보였을뿐더러, 끊어지기 직전의 피아노 줄처럼 부딪히면 날카로운 소릴 내던 것이, 요즘은 저가 농담을 가장해서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어도 덤덤하게 넘어가는 둥 물렁물렁해졌다.
라울은 그게 닉시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벤자민 치고 가장 오래 붙어 있었고, 또 그녀를 볼 때 그의 눈빛이 이전과 달리 묘하게 부드러워졌음을 봤으니까. 그는 아직 자각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래서 분명 닉시에게 연서가 왔다 했을 때 즉각 반응할 줄 알았다. 이리 싱거운 반응일진 몰랐지만.
“……잘못 짚었나.”
벤자민은 하얗게 흩어지는 입김을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인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은 그것이었다. 그 뒤를 이어서 막연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마을 사람이면 누구. 최고의 친구라는 허울 좋은 타이틀로 애정을 우정으로 꾸미고 있는 마을 이장? 아니면 서로 즐길 거 다 즐기고 여든 살쯤에 결혼 한번 해 보자던 목수? 마을 사람이 아니라면 또 그 지긋지긋한 고향 친구들인가.
‘아니. 그렇다 해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지.’
남의 연애 놀음엔 관심 없었다. 연서니, 사랑이니.
벤자민이 괜히 앞머리를 헝클였다.
이런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봐야 좋을 거 하나 없었다. 기분만 켕길 뿐이지.
[근데 넌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아무것도 안 해?]‘그야. 그건 ‘내’ 마음일 뿐이니까.’
벤자민은 그날 저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궁금한 듯했던 호기심 어린 눈을 떠올렸다.
사랑한다고 하면 이런 거 저런 거 해 보고 싶지 않냐며 얄궂게 묻던 얼굴.
마음 한구석 어딘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가 말한 ‘이런 거 저런 거’를 하고 싶단 욕망 따위가 고갤 디밀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제 마음을 강요하고 싶진 않았다.
사랑한다는 걸 방패이자 무기 삼아서, 상대를 무겁게 하고 짓누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그는 그 정신 사나운 농부에게 연서를 보냈다는 미친놈의 낯짝 따윈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절대로.
“저…….”
그때, 벤자민의 어깨에 가늘고 흰 손가락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퍼뜩 생각에서 벗어난 벤자민이 반사적으로 그 손을 움켜잡았다.
어머! 깜짝 놀란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가 쓰고 있던 모자가 느리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벤자민은 제 눈앞에 있는 우아한 검보라색 코트 입은 여자를 바라봤다.
닉시는 주름이 많이 잡힌 롱스커트 위에 짙은 버건디색 스웨터를 입은 뒤, 두툼한 숄을 걸쳤다.
스커트 안에 헬렌이 질색했던 발토시를 껴입었지만, 어차피 가려서 보이지 않을 테니 괜찮았다.
보온과 유행을 함께 챙긴 복장. 제 복장이 제법 맘에 든 닉시는 거울 앞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완벽해.”
닉시가 주머니에서 소리 없는 회중시계를 꺼냈다.
정확히 15분 전.
오솔길까지 전속력으로 달린 다음에, 삼백 미터가량을 남겨두고 매무새를 다듬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어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좋아. 누가 나올지 아주 기대되는걸!”
하는 모습이 제법 귀여우면 저녁이라도 먹여 주겠어. 데이트는 호수에서 빙어낚시밖에 못 하겠지만!
닉시가 목적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랑, 사랑.
천성이 호기심을 가만 놔두지 못하는 타입의 닉시였다. 궁금한 게 있으면 알아야 했고 모르는 게 있으면 두뇌가 박살이 나도 이해해야 했다.
다행스럽게 닉시의 머리는 그녀의 호기심을 전부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비상했다.
그뿐이랴. 어떤 난제가 있더라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났다.
그 집요한 천성과 뛰어난 두뇌 덕에 천재라고 불렸다.
관심 없는 것을 제외하고, 그녀가 모르는 것은 하늘 아래 없었다.
단 하나. 사랑만 빼면.
‘누가 나오려나. 이왕이면 다벤치의 황금 비율에 맞는 외형을 가졌으면 좋겠는데. 황금 비율이란 게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딱 안정된 비율이란 건 보는 사람의 마음도 편안하게 해 주니까.’
닉시는 머릿속으로 러브 레터의 주인을 그렸다.
알 듯 말 듯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닮았는지, 편지의 주인도 그려질 듯 말 듯했다.
‘아니지. 오히려 뒤틀린 외향이어야 하나? 사랑은 아드레날린을 유발하는 감정이잖아. 마음이 편한 것보다 오히려 뛰어야지. 그게 보편적인 사랑이니까. 그럼 주먹이 부들거릴 정도로 뒤틀린 외향의 사람이길 바라야 하나.’
곧 있으면 양 목장을 지나 아몬드 나무가 있는 곳이었다. 너무 들뜨는 바람에 예상보다 10분이나 일찍 와버린 셈이었다.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사랑이란 게 뭔지 알 수 있다면.’
“어?”
약속 시간보다 이른 시각의 아몬드 나무 밑.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그곳엔 이미 누가 자릴 지키고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의, 양털같이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가진 남자.
“길버트?”
길버트였다.
그녀가 이름을 부르자 그가 닉시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갤 돌렸다.
그는 곧장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검지를 들어 입가에 가져간 뒤, 닉시에게 손짓했다.
꼭 조용히 따라오라는 모양새에 닉시가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길버트와 닉시는 양목장 뒤편의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휴.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 도착하자마자 길버트가 안심했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영문을 모르는 닉시와 양들만이 그런 마을 이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길버트.”
“왜?”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너였어?”
하하하……. 길버트가 그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이 영혼 없는 웃음소릴 냈다.
“그게 말이지. 너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이 정말 많았는데…….”
이걸 참 뭐라 말해야 할지. 난처함에 그가 목 언저리를 긁적였다.
“그 편지, 잘못 보낸 것 같아.”
닉시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자 길버트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편지, 그레타가 쓴 거라고.”
“그럼 그레타가 나를?”
“아니, 아니.”
오베르 마을의 유명한 연대기. 살아 있는 역사인 그레타의 짝사랑.
“그레타가 드디어 라울 씨에게 고백하려는 건지, 라울 씨에게 편지를 쓴 것 같은데 그게 너한테 잘못 전달된 것 같다는 말이야.”
닉시는 눈을 깜빡였다. 잘못 전달된 편지라고?
그러고 보니, 배달부를 통해서 전달된 게 아니고 약 제조 의뢰서 사이에 껴 있었던 거였다.
닉시가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의 수신인을 바라봤다.
“아.”
그제야 길버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곤란할 뻔했네.”
이 편지가 그레타가 쓴 게 맞다면, 편지가 잘못 전달됐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닉시와 길버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목장 뒤편에서 걸어 나왔다.
“내가 착각하고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레타를 보고 헛소리했다간 그레타가 두 번 다시 날 사람 취급 안 했을 거 아냐.”
“아마도 그랬겠지?”
그건 정말 끔찍하고 서글픈 일이었다. 어렵게 ‘아는 사람’으로 등극한 미인에게 경멸받는 삶이라니.
닉시가 우스개 소리하자 길버트가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기대 많이 하지 않았어? 실망은 안 하네?”
“이래 봬도 실망이 아주 커.”
“진짜?”
“그럼. 근데 오히려 그레타의 사랑이라니. 살아생전 이날을 볼 수 있게 될 줄은 몰랐어. 흥미진진하네.”
“그래. 마을 어르신들이 라울을 파묻는 것도 볼 수 있겠지.”
마침 편지에 적혀 있는 시간에 맞춰 아몬드 나무 아래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레타가 벌써 나온 건가.’
닉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 밑의 누군가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레타치곤 머리 하나가 더 컸고, 머리색이 밝았다.
닉시가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길버트가 갑자기 멈춘 닉시를 보지 못하고 걸어가다 그녀의 등에 부딪혔다.
“뭐야, 닉시? 왜 잘 가다가 멈춘…….”
길버트는 그녀의 뒤통수에 박은 얼얼한 가슴께를 매만지며 그녀의 어깨너머를 바라봤다.
아몬드 나무 아래엔 길버트도 잘 아는 남자가 서 있었다.
벤자민 리히터.
그리고 그 앞에는 어떤 여인이 서 있었다. 마을에서 처음 보는 낯선 여인이.
벤자민은 자신을 불러 세운 낯선 여자를 바라봤다.
여인은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벤자민의 얼굴을 본 여인이 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봤다.
“저, 우리 어디선가 본 적 있지 않나요?”
그 말에 벤자민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가 아는 한, 오베르에서 도시 사람들이 입을 법한 차림새를 하고 돌아다니는 여인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게다가 그는 제집 아니면 라울의 바. 그것도 아니면 도시의 서점밖에 돌아다니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제게 아는 척하는 사람이라면, 1할은 사람을 잘못 본 것. 나머지 9할은 프랑스 사복 경관일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보이고.’
벤자민은 여인의 손목이 무기 한번 잡지 않아본 손목임을 알아챘다.
그는 붙잡힌 옷자락을 떼어 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그, 그런가요…….”
여인이 여전히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본 적 없냐 물어서인지, 여인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오는 찜찜함이지. 벤자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여인을 바라봤다.
“그럼 혹시 여기에 칼리엘의 집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칼리엘.
쓸 일이 거의 없어서 낯설지만 벤자민이 알고 있는 성이었다.
바텐더, 라울의 성.
“아.”
여인의 입에서 라울의 성이 나오자 벤자민은 드디어 기시감의 이유를 알아냈다.
‘이 사람.’
[……망한 것 같아, 화가. 아무리 봐도 라울이 만나고 있는 저 사람, 여성분이잖아. 그것도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도시의 우아한 여성.]벤자민은 오래전, 농부가 저지른 일을 수습한다고 라울의 뒤를 쫓아 도시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극장에서 라울과 함께 있었던 중년의 여인.
눈앞에 있는 사람은 라울이 제 라틴어 스승이라고 소개했던 여인이었다.
“어. 움직인다.”
길버트가 나무 아래 벤자민과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은 나무 아래에서 한참을 뭐라 이야기하다 이동하기 시작했다.
멀리 있었기에 소리까진 들리지 않았지만, 대화를 나누며 나란히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아예 안면이 없는 사이는 아닌 듯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화가가 아는 사람이라.
그들은 나무 아래를 지나 그대로 라울의 바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어떡할까. 따라갈 거야, 닉시?”
길버트는 여물통 안에 숨은 닉시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닉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몬드 나무 아래 두 남녀를 목격한 뒤, 갑자기 숨더니 지금까지 요지부동이었다.
‘왜지? 평소 같았으면 벌써 아는 체하면서 뛰어가고도 남았는데.’
길버트가 닉시의 노란 정수리를 보며 생각했다.
“두 분,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그때, 뒤쪽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말소리에 길버트가 화들짝 놀라 고갤 돌렸다.
그곳엔 단정한 검정 드레스에 포근해 보이는 흰 목도리를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레타였다.
“길버트? 무슨 일 있나요? 오늘은 수업하는 날이 아닌데…….”
“아, 그, 그게 그레타, 지나가다가 볼 일이 생겨서. 그러니까, 레리한테!”
길버트가 발치에서 졸고 있던 양을 안아 들었다. 그레타가 의아하게 고갤 갸웃했다.
“그럼 너는 그레타? 어디 나가려고?”
길버트의 말에 그레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수줍은 얼굴이 괜히 길버트의 양심을 찔러왔다.
“그, 약속이 있어서요.”
“약속?”
“네. 선생님과 약……”
“아!”
닉시가 단말마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레타와 길버트가 대화하다 말고 여물통을 바라봤다.
“정답은 선생님이었어!”
닉시는 여물통을 박차고 나왔다. 그녀는 뭐 하나 해치우고 나온 듯 후련한 얼굴이었다.
“이제야 기억났네. 저 사람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서 엄청 신경 쓰였거든! 덕분에 생각났어. 고마워 그레타!”
“네, 네?”
그동안 잠잠했던 것이 소란을 겨우 참고 있었던 건지, 닉시는 여물통을 나오자마자 말을 우다다 쏟아 냈다. 종국에는 그레타의 손까지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소란에 면역이 없는 그레타만이 식은땀을 흘릴 뿐이었다.
“후련하다. 기억 못 했으면 밤도 샜을 거야.”
“뭐야. 아까 계속 고민하던 게 그거였어?”
벤자민 쪽을 신경 쓰고 있던 게 아니라 여인 쪽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건가. 길버트가 머릴 긁적였다.
“근데 저 사람이 여긴 왜 온 거지? 분명 라울이 오베르 사람이 아니라 도시 사람이라 했던 것 같은데.”
“라울 선생님이요?”
닉시의 입에서 라울의 이름이 나오자 그레타의 얼굴이 다시 수줍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닉시가 본인이 받은 잘못된 편지의 발신인이 그녀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참, 그레타 그게 말야.”
닉시가 주춤거리며 안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편지가 나한테 잘못 전달된 것 같더라고. 모르고 내가 봐 버렸어. 미안!”
그레타는 닉시의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상황을 뒤늦게 이해했는지 긴 침묵 끝에 말을 이었다.
“아,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닉시에게서 도로 편지를 받은 그녀가 소중하다는 듯 편지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렇다면 오늘 선생님은 여기 오지 않으시겠군요.”
“라울이 봉인된 편지를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지지 않는 이상, 아마도…….”
“그렇구나…….”
그레타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실망한 듯한 여린 목소리가 닉시의 전두엽을 찌르고 들어왔다.
없는 양심이라는 것이 꿈틀대는 기분이 들었고, 눈앞의 슬픈 표정의 미인을 위해 지금 당장 광대라도 돼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레타의 실망으로 인해 양심이 후벼진 건 닉시만이 아니었다. 함께 있던 길버트가 그레타를 위로했다.
“너,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말고. 그래. 일단 함께 가게로 가보는 건 어때? 어차피 슬슬 점심시간이기도 하고.”
“……네.”
그들은 그대로 라울의 바로 향했다.
길버트가 다운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소소한 잡담을 나눌 때, 닉시는 아까 이 길을 나란히 걸어갔던 여인과 벤자민을 떠올렸다.
‘아까 그 사람은 라울의 오래된 스승님이자 짝사랑 상대였지? 근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런 오베르 같은 시골에 온 거지.’
짐이 없고 옷차림이 가벼웠던 것 보면 귀농을 택해서 온 것 같진 않았었다.
‘그렇다면 왜일까? 일단 라울을 만나러 온 거겠지? 그럼 직접 오지 않곤 안 되는 일이 있어서? 혹은 라울한테 직접 전해야 하는 중요한 게 있어서?’
이성적으로 궁금함을 차곡차곡 정리하던 닉시의 시선에 얼굴을 붉힌 채 고갤 떨군 그레타가 들어왔다.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이었다.
‘……어, 아니지. 이해는 안 가지만 간단하게 ‘얼굴이 보고 싶어서’ 같은 이유일 수도 있잖아?’
어라. 그렇다는 말은, 저 여인이 온 이유는 혹시.
‘고백?’
닉시의 머릿속으로 아주 커다란 불빛이 번쩍였다.
“저 결심했어요.”
그레타가 결심했다는 듯 고갤 들었다. 앙다문 입술이 제법 굳세 보였다.
“저, 선생님께 직접 제 마음을 전하겠어요.”
한차례 선전포고가 이뤄졌다.
방금까지 시시한 잡담으로 그레타의 주위를 돌리려 했던 길버트의 소리 없는 경악도 이어졌다.
그레타는 그렇게 말하곤 씩씩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이 향하는 곳은 라울의 술집이 있는 곳이었다.
‘큰일이네. 라울의 무덤 자리를 아직 마련하지 못했는데.’
길버트가 머리를 짚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알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길버트가 곧 있을 비극적인 엔딩을 짐작하며 그레타의 뒤를 따랐다.
그때, 닉시가 길버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길, 큰일이야.”
닉시가 귓속말했다. 지금보다 큰일이 있나? 길버트가 허릴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아까 그 여자 기억나? 벤자민이랑 함께 있던 사람.”
“응. 기억나.”
“그 사람…… 라울의 첫사랑이야.”
“뭐?”
예상치 못한 대재앙 소식에 길버트가 펄쩍 뛰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목표가 정해진 그레타는 앞날에 어떤 폭풍이 있을지 예상하지 못한 채,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닉시와 길버트가 허겁지겁 그레타의 뒤를 쫓았다.
“처, 첫사랑?”
“응. 라울이 오래 짝사랑했던 사람이랬어. 라울이 저번에 고백까지 하려다가 못하고 돌아왔다니까.”
“근데 그런 사람이 왜 오베르에 온 거야?”
“그건 나야 모르지!”
저 멀리 라울의 가게가 보였다. 폭풍의 눈과 같은 곳. 사랑이란 이름의 전쟁이 이뤄질 무서운 무대였다.
닉시가 마른침을 삼켰다.
“근데 이런 촌구석까지 와서야 전할 중요한 볼일이라면, 아주 중요한 일일 거란 말이야?”
닉시는 제 친구들이 자신을 군으로 잡아가기 위해 오베르로 쳐들어왔던 것을 떠올렸다.
“중요한 일이라면?”
남녀 간의 중요한 말이란 건 여러 가지가 있다.
절연한단 선언이거나, 보증. 하지만 보편적으로 이성, 그것도 제법 끈끈한 사이일 때 성립할 수 있는 ‘중요한 말’이라면 하나뿐이지 않은가.
“남녀관계에 중요한 말이라면 뻔하잖아! 당연히!”
“채무일까요?”
“당연히 사랑…… 으아악, 라울?”
진지한 얼굴의 길버트 옆에 언제 다가온 건지 라울이 고갤 내밀고 있었다.
닉시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좋은 점심이에요, 닉시 양, 길버트. 뭐 재밌는 이야기 하고 있었나요?”
라울은 때마침 점심 장을 보고 돌아온 듯했다.
“아뇨! 전혀요!”
길버트와 닉시가 애써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갤 저었다.
“참, 닉시 양.”
라울이 윗주머니에서 종이 편지 하나를 꺼냈다.
“닉시 양에게 가야 하는 편지가 제게 와 있더라고요.”
“저, 저한테요?”
닉시는 라울에게 편지를 받았다. 대니스가 말했던 중요한 편지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편지는 이제 둘째치고, 갑자기 튀어나온 폭풍의 중심. 곧 있을 전쟁의 원흉 라울로 인해 닉시와 길버트의 속마음은 비상사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라울의 목소리를 들은 그레타가 이쪽을 바라보고 뛰다시피 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라, 라울 선생님!”
“그레타 양. 좋은 점심이에요.”
인사만 건네받았을 뿐인데 그레타의 얼굴이 곧장 새빨개졌다.
“네. 좋은…… 좋은 점심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