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2_4
“알고 있다고요?”
닉시는 카운터를 박차고 일어났다.
덕분에 깜짝 놀란 바텐더가 드물게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네. 이탈리아에서만 자라는 꽃이라고 했죠? 희귀한 종이고 국가 차원에서만 다룰 수 있는 식물이라고.”
“네.”
“이곳에서 200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니스’라는 도시에 있는 가게인데, 보통 사람들에겐 알려지지 않은 거래장이 열려요. 그곳에 특이하거나 돈이 되는 것들을 파니까 거기 한번 가 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바텐더의 입에서 나온 것은 상상도 못 한 이야기였다.
영화 속 마피아나 암흑 조직에서만 들을 법한 비밀 거래장에 대한 소문이라니.
게다가 ‘니스’라면 프랑스 남부의 최대 항만 도시였다.
대체로 지중해를 오가는 수많은 무역항이 정착하는 곳이자, 이탈리아 국경과 맞닿아 있는 도시 중 가장 큰 곳.
이탈리아에서만 나는 희귀한 식물들이 유통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닉시는 혹시나 잘못 들은 게 아닌지 귀를 문질렀다.
하지만 눈앞의 바텐더는 태연해 보였다.
“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그야, 제 고향이니까……요?”
라울은 오베르에 오기 전, 니스에 있는 항구 도시의 견습 바텐더였다.
그의 말을 빌려서 설명하자면, 그때 당시 20대 초반의 라울은 놈팡이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했다.
국경 근처가 그러하듯 니스라는 도시도 번화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치안이 개판에 가까웠는데, 라울은 그곳에서 외부 관광객이나, 그 지역에 물건 팔러 온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경호를 해 주는 일을 하던 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에 가드를 구한다고 찾아온 술집 사장과 만나게 됐다.
그 남자는 라울의 호감 상인 얼굴과 경호원치곤 서글서글한 성격을 보곤, 뒷골목에서만 일하는 게 아쉽지 않냐 물었고, 제 가게의 바텐더로 취직하는 건 어떤지 제안했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라울은 그대로 남자의 바에 바텐더로 취직하게 됐고 그곳이 바로 .
이름하여 비밀 경매장이 열리는 술집이었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술집이죠. 하지만 초대권을 가진 자들에겐 카운터 뒤쪽의 다른 방으로 통하는 문을 안내해 준답니다.”
라울이 말했다.
닉시는 물론, 이런 세상은 처음 듣는 길버트와 그레타까지 라울의 말을 흥미롭게 경청했다.
술집 카운터 뒤쪽의 문. 그곳엔 비밀스러운 경매장이 열리는 지하로 통하는 문이 숨어 있었다.
경매에 나오는 물품의 종류는 다양했다.
바다 건너온 유적들부터, 국가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무기, 약품까지.
전부 일반적인 방법으론 쉽게 구할 수 없어 희귀하고 값비싼 것들뿐이었다.
라울의 일은 눈앞의 손님이 경매장을 위한 손님인지, 그냥 술을 홀짝이러 온 손님인지, 그것도 아니면 수상한 냄새를 맡고 찾아온 경관인지를 구별해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라울 씨가 눈썰미가 좋으셨군요?”
“그때 배운 걸 요긴하게 쓰고 있긴 하죠.”
길버트와 라울이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라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닉시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라울의 말은, 제가 찾고 있는 게 있을 수도 있으니, ‘니스’에 있는 가게의 비밀 경매장에 가 보는 건 어떻냐는 말인 거죠?”
“그렇죠.”
닉시가 길게 앓는 소릴 내며 턱을 매만졌다.
확실히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일 것 같았다. 구할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아 보이기도 했고.
고민 끝에 닉시가 고갤 끄덕였다.
“좋아요. 언제 갈까요, 라울?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은데.”
“이 녀석은 안 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벤자민이 말했다.
“이 녀석은 지금 도시에서 수배 중이야. 함부로 움직였다간 더 일찍 잡혀가는 수가 있어.”
벤자민의 말에 라울도 동감하는지 고갤 끄덕였다.
“슬프지만 그렇죠. 게다가 제 신분증에 적힌 거주지도 니스에서 살 때의 거주지고요.”
“국가에서 선생님을 그렇게 찾고 있다면…… 그쪽에도 사람을 풀었을지도 몰라요.”
라울의 말이나, 그레타의 말이나 비통하게도 맞는 말뿐이었다.
역시 일이 쉽게 풀리는 법이 없음을 실감한 닉시가 심통하게 고개를 테이블에 처박았다.
“그럼 역시 이번에도 나랑 화가가 출동해야 하는 건가.”
“끔찍하군.”
벤자민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 일이 일어난 책임 중 8할은 그 때문이었으니, 거부권을 행사할 순 없었다.
“거기 들어갈 초대권은 지금이라도 당장 드릴 수 있으니 문제 될 건 없는데…….”
“없는……데요?”
말꼬리를 늘리는 바텐더의 불안한 기색에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바텐더에게 쏠렸다.
“다만 그곳에는 출신지나 신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그들만의 비밀언어로만 대화하는데, 그게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언어라…… 그게 조금 난관이네요.”
“라틴어요?”
염두에 두지도 못했던 언어의 장벽이었다.
영어면 몰라도 요즘 라틴어는 구닥다리 옛날 말 취급이라 능숙한 사람을 구하기 어려운 편이었다. 근데 그것을 기반으로 한 비밀언어라니.
확실히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닉시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라울! 스승님께 의뢰해 보는 건요?”
“오, 괜찮은 의견인데 닉시?”
“선생님께서도 거기 사셔서 제 주변 인물로 수색될 가능성이 커요. 그때 저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준 게 선생님이셨으니까요.”
좋은 생각이라 여겼던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자 분위기는 다시 원점이 되었다.
“그럼, 거기 가기 전에 라틴어 통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구해야 한다는 건데…….”
그때,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만 있던 그레타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 저, 제가 할게요.”
한순간의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레타는 그 시선들에 안절부절못하다가 이내 결심했는지 손을 좀 더 높게 들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뭐? 농담이지? 우리 어학 연수하러 가는 거 아냐.”
“안 돼요, 그레타 양. 위험해요.”
“그레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레타의 위로 열렬한 반대 의견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그레타는 그런 것쯤은 각오했다는 듯, 한층 더 차분해진 눈으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하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이잖아요. 그렇죠, 닉시?”
“그건 그렇지.”
“당장 도시로 나가서 라틴어 회화가 가능한 사람을 구하라면 찾을 수 있긴 할 거예요. 하지만 시간은 오래 걸리겠죠. 게다가 구한 다음엔요? 언제 그 비밀언어들의 구조를 배우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
“저라면 할 수 있어요. 전 라틴어도 할 줄 알고, 라틴어도 라울 선생님에게 배운 거니까 비밀언어도 구조만 알려 주시면 금방 익힐 수 있을 거예요. 하루면 충분해요.”
그레타가 마른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위험하다고 그레타의 의견을 무시하기엔 그레타의 논리는 지금 필요에 있어서 가장 최선에 가까웠다.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바이올렛 아주머니랑 양들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잘못하면 라울을 위해 마련한 무덤 자리에 그녀가 먼저 들어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자 그런 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그레타가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났다.
“전 제 한 몸 지킬 힘은 갖고 있어요.”
“어, 엉? 그……그래?”
“응. 그레타는 오베르 주민 중에 완력이 제일 세거든.”
“뭐, 뭐? 그래?”
길버트의 귀띔에 닉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저 한 떨기 바이올렛 꽃 같은 아가씨라고만 생각했는데.
닉시가 제법 긴 고민 끝에 고갤 끄덕였다.
“……알겠어.”
즉각 그레타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 절 데려가 주시는 건가요?”
“상황이 어쩔 수 없잖아? 오베르의 하나밖에 없는 술집이 폐업 위기에 처했는데, 한시가 급하지.”
“닉시 양? 저는 걱정 안 해 주시는 건가요…….”
“그럼 작전일은 이틀 뒤야!”
이틀 뒤. 닉시가 성격 급한 걸 감안해도 너무 이른 것 같은 시간이었다.
“그날까지 그레타, 너는 라울 씨에게 어학 특훈을 받고! 길버트! 너는 그날까지 라울 씨에게 그곳의 지리, 지형 특훈을 받아.”
“어라, 나도 가는 거였어?”
“응! 바이올렛 아주머니에게 허락받으려면 마을 이장님이 계셔야 할 것 같으니까!”
눈 잘 뜨고 있었는데 코가 꿰였다.
그러나 맞는 말이기에 길버트가 사기당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벤자민! 너랑 나는 그날까지 라울 씨에게 지하 경매장의 구조에 대한 특훈을 받자!”
작전 회의 끝! 해산!
능숙하게 상황을 정리한 닉시가 박수를 두 번 쳤다.
그레타는 필기구를 가져온다며 바로 가게를 나섰고, 벤자민은 한숨 자야겠다며 비척비척 걸어 나갔다.
의자에 앉아 폭풍 같은 상황이 마무리되는 것을 보던 길버트가 머쓱하게 웃으며 라울을 바라봤다.
“라울 씨가 넷이어도 모자라겠네요.”
“그러게요.”
▶ 오늘의 수확
양귀비 5포기, 광대버섯, 석산 8포기, 엉겅퀴 7포기.
▶ 총평
약품명: 양귀비 추출액과 말린 엉겅퀴를 배합한 강력한 정강이
효과: 무릎이 단단해진다! 매튜 할아버지 보증!
부작용: 발 냄새
* * *
이틀 뒤. 동도 트지 않은 새벽녘.
마을 입구에는 닉시와 벤자민, 그레타가 서 있었다.
일명 라는 특명으로 국경 근처 도시로 향할 결사대 모임이었다.
그레타는 긴장한 듯 잔뜩 굳은 얼굴로 가방을 꾹 쥐었다.
때마침 저 멀리 마차 소리가 들렸다.
“닉시, 그레타, 벤자민 씨.”
마차를 몰고 있는 사람은 갈색 머리칼의 마을 이장. 길버트였다.
“준비는 다 됐어요?”
길버트의 말에 사람들이 고갤 끄덕였다.
오베르 근교에는 니스까지 가는 기차가 없었다. 그 때문에 꽤 먼 거리를 하루 꼬박 마차를 타고 가야만 했다.
마을 이장은 마구간 지기 파스칼의 말들을 타고 가는 것을 제안했다.
외부에서 마차를 빌리면 시간도 걸릴뿐더러, 자칫 스파이 수색 수사망이 오베르 근처까지 오게 되면 수상하게 여겨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과적으론 좋은 의견이었다.
파스칼의 말들은 ‘제비꽃밭 사건’ 이후, 마을에서 공공 사유로 관리하고 있어서 공짜기도 했고, 말들이 길버트에게 종종 당근을 얻어먹고 자랐던 터라, 길버트의 손길에 아주 순하게 굴었으니.
“그럼 출발할게요.”
“네! 잘 부탁합니다.”
“안전하게 모시죠, 레이디들.”
과 벤자민 씨. 길버트는 제 옆에 앉은 벤자민에게 찡긋 윙크했다.
―다각, 다각
고요한 새벽 숲. 눈은 다 녹아버렸지만, 날은 아직 쌀쌀했다.
반쯤 열어 놓은 창문 밖으로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닉시는 아직까지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대각선 방향으로 맞은편에 앉은 그레타를 흘긋 바라보았다.
[제가 할 수 있어요.]닉시는 문득 그때 손을 들었던 소녀를 떠올렸다.
그때의 굳센 표정은 어디 가고, 약간 불안한,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으려는 표정이었다.
‘……긴장을 하는 거 보면, 이 일이 소풍 가는 일은 아니라는 걸 알긴 한다는 건데. 정말 모르겠네.’
사실 닉시는 그때 ‘제정신인가?’ 싶었다.
마을의 울타리 밖을 많이 나다니지도 않았을 목장 아가씨가 겁도 없이 국경까지 가겠다 나선다니.
며칠이 걸릴 줄 알고. 또, 무슨 위험한 일이 있을 줄 알고 나서는 거지.
거기다 아직까지도 닉시는 그레타와 한 번에 다섯 마디 이상 대화를 이어 본 적 없었다. 벤자민은 심지어 두 마디 이상 해 본 적 없으니, 마을 이장을 제외하고 여기 있는 일행 반 이상과 그런 숨이 막히는 그런 사이인 것이다.
그런 소심한 아가씨가 왜 굳이 나서서 이런 번거로운 일을?
닉시는 그레타의 행동 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이게 바로 사랑의 힘이라는 건가?’
이해는 안 가지만 백번 양보해서, 좋아하는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게 생겼으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라 치자.
납득도 대충 할 수 있었다. 용사가 공주를 구하겠다고 마왕성에 가는 것과 같은 이치일 터.
하지만 현실은 그런 연약한 감정 하나만 들고 헤쳐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사랑도 사지 멀쩡하고,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결국 내가 지켜 줘야 하는 사람이 는 건데…….’
닉시가 다시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귀찮네.’
귀찮은 것. 닉시가 봤을 때 그레타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 * *
동이 틀 무렵, 말들의 휴식을 위해 마차가 멈춰 섰다.
인적이 드문 한적한 숲속이었다. 닉시는 말에게 물을 먹일 겸, 개울가에서 얼굴을 씻었다.
피부가 찢어질 듯 시렸다. 얼굴에 고통을 주고 싶으면 한번 도전해 봐도 좋을 법한 온도였다.
“길, 얼마나 왔어?”
“오늘 하루는 꼬박 마차를 타고 가야 해.”
“으엑.”
길버트는 가방 안에서 말린 육포와 찐 감자를 꺼내 사람들에게 건넸다. 조촐한 아침 식사였다.
“이대로 계속 달리다 보면 내일 새벽쯤에 기차역에 도착할 거야. 역 근처에 마구간이 있으니, 거기에 말을 맡기고 가면 돼.”
군복만 안 입었을 뿐이지, 지루하고 긴 강행군이었다.
지루함은 달래지 못하니 허기라도 달래보고자 닉시가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그때 길버트의 가방 안, 비죽 튀어나온 무언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총도 챙겼어?”
“혹시 몰라서.”
길버트는 소형 리볼버를 꺼냈다.
약간 낡은 감이 있는 게, 호신용으로 집에 하나씩 두는 용도의 것으로 보였다.
닉시의 눈빛이 오래된 장난감을 찾은 듯 반짝였다. 그것을 눈치챈 길버트가 닉시에게 총을 건넸다.
“휴대용으로 들고 있을래?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줄게.”
“엉? 아냐. 알고 있어.”
닉시는 총을 건네받자마자 그것을 능숙하게 훑어보았다. 총에 대해 전혀 모르는 그레타의 눈으로 봐도 숙련된 사람의 솜씨였다.
“오랜만에 보니까 귀엽네. 이거 내가 어릴 적에 자주 가지고 놀던 거였거든.”
“어릴 적?”
길버트가 반문했다. 감상을 마친 닉시가 리볼버를 순순히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응. 내 후견인이 총 좀 만지는 직업이었거든, 그래서 집안에 이런 구형 무기들로 만든 장식품들이 많았어. 어라, 내가 말한 적 없던가?”
“없었지. 그러고 보니까 네가 집안 이야기하는 건 처음인 것 같네.”
길버트가 대꾸했다.
“그런가.”
닉시는 손에 들고 있던 육포를 마저 씹었다.
“아, 저도 준비한 거 있어요.”
그레타가 자신의 가방을 뒤적였다.
“이건 호루라기 같고, 이건…….”
그녀의 손에서 나온 건 새끼손가락만 한 호루라기와 사람 팔뚝만 한 나무 몽둥이였다.
“이건 뭐야? 꼭 마을 어르신 지팡이를 반 부러뜨린 것 같은데, 하하.”
“이건 샬롯 할머니가 제게 물려주신 지팡이예요.”
“다시 보니까 정말 크고 멋지다…….”
“양들을 다루기 위한 지팡인데, 이것만큼 제 손에 맞는 게 없어서 호신용으로 들고 왔어요.”
양치기의 지팡이? 닉시의 머릿속에서 그레타와 샬롯 할머니가 지팡이를 휘두르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걸 눈치라도 챈 듯 길버트가 고갤 저었다.
“닉시. 양이라는 동물은 의외로 얌전하지 않거든. 툭하면 들이박으려고 머릴 들이대는 아주 무서운 동물이란 말이야.”
“그래? 농장에서 봤던 애들은 다 착했는데.”
물론 가끔 닉시에게 머리를 들이대는 친구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젊은 양들의 패기 같은 거였지, 대부분 순하고 얌전했다.
“당연하지. 예의 없는 친구들은 여기 그레타가 이 몽둥이 하나로 전부 평정했으니까.”
“정말?”
“네. 아, 무, 물론 때려서 길들인 건 아니에요!”
그레타가 재빨리 손사래 치자 닉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닉시의 머릿속엔 그동안 그레타에게 귀찮게 치대던 제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던 참이었다.
“이 몽둥이는 양들이 갑자기 들이박을 때 막기 위해서 들고 있는 거예요. 양이 다 크면 웬만한 사람들보다 덩치도 크고 빨라서 잘못 부딪히면 뼈가 부러질 수도 있거든요.”
“호오, 꽤 무서운 애들이네!”
“게다가 저희 목장은 산 근처에 있어서, 양을 데리고 다니다 보면 늑대가 나타날지도 모르고요. 그런 상황이 있다면 늑대를 잡아야 하니까…….”
“그, 꽤 무서운 애…… 아무것도 아냐.”
닉시의 머릿속으로 다시 주마등 따위가 스쳐 지나갔다.
그레타는 피리와 몽둥이를 다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이게 큰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저도 제 한 몸 지킬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닉시는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여전히 낯을 가리는 수줍은 얼굴의 아가씨.
저 단아하고 조용한 사람이 마을 이장이 보증한 ‘마을 완력 1위’라니.
‘마을 최강의 양치기 소녀라.’
지나가던 늑대가 와도 믿지 못할 이야기 같았다.
“자, 자 그럼 다시 출발하자구! 이번엔 내가 앞에 탈래.”
닉시는 오뚜기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마부석 옆자리에서 쉬고 있던 벤자민을 끌어내렸다.
그 뒤로 마차는 반나절 이상을 더 달렸다.
해가 산 너머로 들어가 버려서 길이 보이지 않을 즘이 되자, 길버트는 다시 마차를 멈춰 세웠다.
평평하고 젖지 않은 땅을 찾아 그들은 모닥불을 피웠다.
한겨울에 노숙. 오베르의 어르신들이 들으면 기가 찰 일정이었다.
닉시는 모닥불에 낙엽을 우수수 쏟아 넣으며 말했다.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는 거야. 길버트 빼고.”
“그래 준다면 나야 좋지.”
“그럼, 그럼. 네가 졸음 운전했다간 우리는 그대로 황천길이잖아? 그러니까 마부님은 빨리 들어가서 푹 쉬세요!”
두 마리 말을 모느라 쉬지 못한 길버트는 강제로 취침행이 정해졌다.
닉시는 길버트를 마차에 뉜 뒤 담요까지 꼼꼼하게 덮어 주었다.
정말 괜찮아? 괜히 혼자만 편히 자게 된 게 미안해진 길버트가 되물었지만, 그것도 잠시. 곤했는지 금세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나랑 그레타랑 먼저 설게. 괜찮지 그레타?”
“네, 네!”
첫 번째 불침번은 닉시와 그레타였다.
취침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기에 벤자민은 순순히 나무 둥치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타닥, 타닥.
잔 불씨들이 까만 하늘 위로 날아들었다.
닉시는 하늘 위로 올라가 사그라드는 불씨들을 바라보았다.
[닉시. 넌 날 영원히 못 이길걸. 닉시, 난 네가 부럽지 않아. 넌 천재일지 몰라도 진짜 사람은 못 될 테니까.]사랑에 대해서 궁금하게 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당시 닉시는 건방진 노엘 휴거의 코를 꺾어 주겠다고 길길이 날뛰어서 사랑이고 자시고는 안중에 없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그럼 진짜 사람은 뭔데?’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사람이란 생각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줄 아는 사회적 동물이란 사전적 정의를 되새겼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20여 년 만에 자신이 전혀 사회적이지 못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제멋대로인 인생을 사는 동안 가장 새삼스러운 유레카였다.
자신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건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 때문에 사람이 못 된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니.
‘그럼 간단하잖아. 사회성이란 걸 기르면 노엘 휴거 놈의 콧대를 꺾을 수 있는 거야.’
닉시는 그때,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 뒤로는 싸운 적도 없으면서 패배한 기분으로, 그 사실 하나 반박해 보겠다고 노엘 휴거를 부단히도 쫓아다녔던 기억.
결국 아직도 사랑을 찾아 헤매는 패배자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
닉시가 긴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불씨와 섞여 들었다.
모닥불 타는 소리만 들리던 닉시와 그레타 사이. 먼저 침묵을 깬 건 닉시 쪽이었다.
“후회되진 않아?”
그레타는 닉시의 주어 없는 질문이 이해되지 않았는지 고갤 들었다.
“여기 오기로 한 거, 후회되지는 않냐고. 지금쯤 원래 살던 곳에 있었으면 이런 길바닥이 아니라 따뜻한 침대에서 좋은 꿈 꾸면서 자고 있었을 텐데.”
“아…….”
그레타는 뭔가 생각하는지 나뭇가지로 불을 툭툭 찔렀다.
“아뇨. 제가 선택한 길인걸요.”
“정말?”
“네.”
닉시는 그레타의 옆모습을 지그시 바라봤다.
피곤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어깨. 딱 하루 집 밖을 나왔다고 푸석푸석해진 머리카락. 졸음이 드리워진 얼굴.
‘그런데도 괜찮다니. 이해가 안 가. 그럴 리 없잖아.’
사실 닉시는 라울의 행보가 어떻게 되든 관심 없었다.
라울이 스파이로 지명 수배되면 언젠가 그를 잡으러 프랑스의 군대가 마을로 들이닥치게 될 테니까. 그럼 제 평화로운 생활이 망가지니까. 저가 곤란해지니까.
그러니 지금 저가 움직이는 이유는 전부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나 그레타는 아니었다. 이 선하고 약한 온실 속 아가씨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 길을 자처했다.
‘역시 사랑 때문에?’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그녀가 사람이 될 수 없는 이유.
가장 사람답다는 감정.
“……사랑하니까 괜찮은 거야?”
“네?”
“라울을 사랑해서 괜찮은 거냐고.”
“아…….”
“…….”
―타닥, 타닥.
“네. 맞아요.”
그레타의 빛나는 눈을 보며, 닉시는 아주 약간. 이유도 알 수 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닉시. 넌 날 영원히 못 이길걸.]* * *
이튿날, 부지런히 달린 마차는 드디어 기차역에 도착했고 그들은 기차에 몸을 실었다.
4명 모두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비몽사몽 깨어났을 땐 목적지인 ‘니스’에 도착한 뒤였다.
항구 도시 니스는 굉장히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오렌지 껍질 같은 지붕들과 새파란 지중해 바다가 시원하게 어우러진 곳.
국경 근처라 그런지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나면서도 관광지 특유의 활기 넘치는 도시였다.
비밀스러운 경매장이 열리는 곳이라 해서 슬럼가의 시커먼 골목을 생각했는데 뜻밖의 풍경이었다.
닉시와 그레타가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마침 길버트가 여관에서 방 열쇠를 들고나왔다.
“숙박은 하루만 잡았어요. 괜찮죠?”
“그래. 관광 온 건 아니니까.”
벤자민이 고갤 끄덕였다.
길버트가 방으로 올라가자 손짓했다. 그들은 쪼르르 길버트의 뒤를 따라갔다.
창문 너머로 바닷가와 항구가 보이는 풍경 좋은 숙소였다. 라울이 알려 준 비밀 경매장과 가까운 곳이었다.
그들은 한 명 겨우 들어가 잘 만한 작은 방에서 작전 회의를 열었다.
침대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은 닉시가 라울이 그려준 약도를 펼쳤다.
경매장 안의 구조와 경매장으로 들어가는 술집에 대해 적힌 간략한 지도였다.
“지금부터 작전 회의를 시작할게. 잘 들어.”
크흠. 닉시가 헛기침했다.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아무에게도 의심 받지 않고 경매장에 들어가는 일이야. 그러기 위해선 그레타. 네 역할이 제일 중요한 거 알고 있지?”
“네!”
그레타가 굳은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그레타의 임무는 통역. 암흑가 비밀 경매장 같은 건 발바닥 닳도록 들락날락한 베테랑처럼 보여야 하는 아주 중요한 임무였다.
여전히 달달 떠는 소동물 같은 모습이었지만 여기까지 와선 어쩔 수 없었다. 경매장의 가드들이 그레타의 고고하고 처연한 분위기에 홀려주는 수밖에.
“두 번째 목표는 라울이 스파이 혐의를 벗는 데 필요한 약의 재료를 찾는 거야. 온갖 특이한 것들을 파는 경매장이라고 하니, 독 있는 풀떼기를 파는 곳도 하나쯤은 있겠지. 여기에선 내 역할이 가장 중요해. 다들 알고 있지?”
닉시가 호응을 유도하듯 자신감 있게 본인을 가리켰다. 길버트가 영혼 없는 감탄을 내뱉으며 손뼉을 쳤다.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목표.”
닉시가 펼쳐놨던 약도를 돌돌 말았다.
“다치지 않기. 알겠지?”
닉시는 언젠가 그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상관의 말투를 흉내를 내며 미소 지었다.
* * *
그 가게에는 미궁과 거미가 그려진 마크가 달려 있었다. 오래된 듯한 나무 간판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암갈색의 술집 문이 열렸다.
테이블을 적당히 채운 인파. 가게 안엔 제법 사람이 많았다. 라울이 바가 비어 보이지 않게 안은 늘 일반인들로 채워놓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테이블을 차지한 사람들을 제각기 술을 마시며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오늘 이탈리아에서 거물이 온다더군. 혹시 들은 게 있나?”
“거물이 온다고? 근래에 단속이 심해져서 안 올 줄 알았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검정 타란툴라라고 했었나.”
소란스러운 사람들 사이로 두 쌍의 남녀가 인파 사이를 유유히 지나갔다.
―또각, 또각.
시끄러운 바 안에 높은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 사이를 당당히 헤치고 카운터에 도달한 굽 소리의 주인들은 스쳐 지나가기만 했을 뿐인데도 눈에 확 띄었다.
제각기 떠들던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잠시 말을 멈췄다.
“네가 말한 곳이 여기야, 레타?”
그중 가장 화려한 인상의 여자가 높게 올려 묶은 금발의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생각보다 시시해 보이는걸?”
전체적으로 까만 벨벳 소재의 딱 붙는 원피스. 끝을 길게 늘이는 입술엔 여자의 눈동자만큼이나 강렬한 붉은 립스틱이 칠해져 있었다. 닉시였다.
닉시는 준비한 대사를 마치곤 인조털로 만든 숄을 어깨 뒤로 넘겼다. 급하게 헬렌에게서 빌린 것치고, 제법 졸부처럼 보이게 했다.
닉시가 높은 목소리로 조잘거리자 바텐더가 그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