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2_6
“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이론적으로 완벽하거든.]“50유로밖에 안 해요!”
[5유로. 많이 사면 깎아 줄게.]하수구 구멍을 통해 위에서 떨어진 말끔한 빵조각을 보고 눈치를 보는 더러운 짐승 같은 몰골.
그건 마치 시궁창에 사는 쥐 같던 그녀의 어린 시절과 닮아 있었다.
* * *
「헉, 헉. 대체 어디로 숨은 거야?」
「저쪽부터 찾아봐!」
길버트와 그레타는 골목 안쪽, 나무 박스 뒤에 몸을 숨겼다.
갈림길에서 닉시와 헤어진 뒤, 저들을 쫓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골목으로 숨었다.
골목이 많은 곳에선 이곳의 지형을 잘 아는 남자들이 유리했다.
‘따돌리는 방법은 피해야 해. 사람들 사이에 껴서 최대한 몰래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길버트가 박스 너머로 조심스레 고갤 들었다.
「잡히기만 해 봐라.」
골목 끝에서 남자가 씩씩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길버트가 재빨리 고갤 숙였다.
‘이런. 이쪽은 길이 좁아서 한 명 도망치기도 힘든데.’
―저벅저벅.
도망칠 수 있는 길은 결국 하나뿐.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어쩔 수 없지. 그레타만이라도 먼저 도망치게 하자.’
“그레타. 내가 신호하면 바로 달려가.”
“네? 달려가라고요?”
“응. 저 남자는 내가 유인할 테니까.”
잠시 생각하던 그레타는 이윽고 결심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남자와 그들의 거리가 점점 좁혀져 왔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남자가 길버트가 정한 최후의 방어선 안으로 들어왔을 때, 길버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레타 뛰어!”
“네!”
그레타는 남자를 향해 돌진했다.
“아, 아, 아, 아니 그레타! 그쪽 말고!”
길버트의 당혹스러운 외침이 골목에 메아리쳤다.
그레타는 그대로 뛰어올라 무릎으로 남자의 명치를 가격했다. 양들이 전속력으로 달려와 돌진하는 속도와 맞먹었다.
―빠악!
그대로 뭔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자는 억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저 멀리 날아갔다.
그레타가 뒤늦게 찡하게 울리는 무릎을 부여잡았다.
길버트가 허겁지겁 달려오자 고갤 든 그레타가 눈을 빛냈다.
“길버트……! 저 해치웠어요!”
“응! 자, 잘했어!”
둘은 어설프게 손바닥을 맞댔다.
다행히 인적이 드문 골목이라, 그레타의 니킥을 본 사람은 없었다.
길버트는 굴러다니는 천 조각을 주워다가 남자에게 덮어 주었다.
“좋아. 이대로 이 사람이 깨기 전에 닉시랑 합류하자.”
“네!”
그레타와 길버트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저들을 막아선 키 큰 남자와 마주쳤다.
재킷을 깊게 눌러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쓰러진 남자와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대체 언제……!’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길버트가 즉시 그레타 앞을 막아섰다.
“그레타! 물러서!”
깊게 눌러 쓴 그늘진 얼굴 옆으로 익숙한 색의 머리칼이 살랑였다. 마른 풀 같은 베이지색 머리칼이었다.
남자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벤자……민?”
길버트의 얼빠진 목소리에 벤자민이 조용히 하란 듯 검지를 입으로 가져갔다.
“쉿. 근처에 녀석들이 있어.”
“여긴 어떻게…… 그 옷은 대체 뭐예요?”
“나중에. 따라와, 일단 여길 벗어나지.”
벤자민이 다시 후드를 깊게 눌러 썼다.
그를 앞장세우고 길을 걷자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길을 터주었다.
벤자민이 향하는 방향은 동쪽 출구가 아닌 다른 방향이었다.
길버트가 조용히 벤자민의 등을 두드렸다.
“출구는 동쪽에 있는 거 아니에요?”
“동쪽엔 검문이 있을 거야. 북쪽에도 출구가 있으니 그쪽으로 조용히 빠져나가야 해.”
그레타가 주위를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저…… 경매장 사람들이 저희를 왜 미행한 건지 아세요?”
“닉시 그 녀석이 여기 손님을 사칭한 게 들켰어. 그건 그렇고.”
골목의 끝, 출구임이 분명한 문에 도착했다.
벤자민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열쇠를 꺼냈다.
―짤랑.
사람이 없어 조용한 공간에 열쇠 절그럭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 녀석은?”
벤자민이 말했다.
길버트는 주위를 살피곤 조용히 말을 꺼냈다.
“닉시랑은 갈림길에서 미행을 따돌린다고 헤어졌어요.”
―철컥.
쇠문이 열렸다.
문을 열자, 곧장 항구 뒤편의 폐수를 버리는 선착장이 눈에 들어왔다.
몰래 빠져나가기 적합한 곳이었다.
“귀찮게 됐군.”
정체를 들켰을 때 가장 손해가 많은 녀석이 아직 경매장 안에 남아 있었다.
“어떡하죠 벤자민?”
“……찾아야지. 너희는 이 길로 아무한테도 들키지 말고 숙소로 돌아가.”
“벤자민 씨는요.”
“그 녀석을 데리고 와야지.”
벤자민은 길버트와 그레타를 밖으로 내보냈다. 떠밀린 길버트가 다급하게 벤자민의 옷을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저희만 도망치라고요? 저희가 도와 드릴 건 없어요?”
“됐어. 너희는 있으면 방해만 돼.”
벤자민이 냉정하게 말했다.
객관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길버트가 아무리 발이 빠르다 해도 여긴 오베르가 아니었고, 그레타가 아무리 힘이 세다지만 여기 관계자들이 얌전히 맞아 줄 늑대도 아니었으니.
한순간에 길버트와 그레타의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문을 닫으려 했던 벤자민이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여기 관계자들은 경관을 경계하고 있는 것 같더군.”
“네?”
“아무래도 비밀 경매장이니, 단속이 있을까 봐 그렇겠지.”
“아…….”
길버트가 수긍했다.
경매장을 대충 훑어봤을 때도 모피나 약재 등, 판매하는 게 금지된 것들이 많았다.
그런 곳에 경관이 나타난다면 난리가 날 테니, 확실히 경관을 경계할 만했다.
“그런데 그걸 왜…….”
“정 그렇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양치기 소년처럼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나 쳐보라고.”
벤자민의 말에 길버트가 곰곰이 생각했다.
“경관한테 알리라는 말이에요?”
‘확실히 소동이 일어난다면 몰래 빠져나오기는 쉬워질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경관에게 여길 신고했다간, 자칫 우리까지 체포될 수도 있어. 그건 곤란한데…….’
―끼익
“아, 벤자민! 잠깐만요!”
문을 닫기 직전, 길버트가 문을 잡았다.
그는 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벤자민의 손에 쥐여 줬다. 리볼버였다.
“쓸 일이 없길 바라지만 받아요.”
그의 말대로 쓰지 않는 편이 좋긴 했지만, 호신용으로 갖고 있기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리볼버는 재킷 주머니에 넣기엔 컸다.
이걸 그냥 들고 다닐 순 없으니…….
벤자민은 재킷의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길버트와 그레타는 불시에 그의 맨살과 눈이 마주쳤다.
꽁꽁 싸맨 재킷 안. 벤자민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화들짝 놀란 길버트가 손을 허둥거리며 그레타의 눈을 가려줬다.
“베, 벤자민 씨! 오, 옷은 어디에 두고 왔어요!”
“……뺏겼어.”
“네에?”
벤자민이 얼굴을 구겼다. 그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봐, 벗어.]남자는 수상한 물건을 가지진 않았는지 확인해 봐야겠다며 벤자민에게 옷을 벗으라 지시했다. 벤자민이 혹시라도 못 알아들을까 친절하게 불어로 설명까지 하면서.
벤자민은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코트를 벗어 던졌다.
‘그래. 일이 커져 봐야 좋은 것 없으니까. 여기선 저자가 하란 대로 따르는 게…….’
그러자 남자는 의아한 얼굴로 턱짓했다.
“다른 옷도.”
속으로 냉정하게 쌓아 올린 인내심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벤자민이 싸늘한 눈빛으로 남자를 응시하자 그는 킬킬 웃었다.
“사내놈한텐 관심 없으니 안심하시지.”
남자가 웃자 그의 허리춤에 달린 열쇠가 짤랑거렸다.
벤자민이 그것을 바라봤다.
동시에 울컥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동쪽은 아까 그 남자들이 가서 기다리고 있고. 북쪽은 막혀 있다고 했으니까.’
사람이 없는 쪽은 아마 북쪽. 그곳으로 나가려면 무조건 저 열쇠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벤자민이 웃옷을 벗었다. 곧바로 찬 기운이 살갗에 달라붙어 왔다.
그는 스웨터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가 그것을 받아 들기 위해 벤자민에게 다가갔다.
“의외로 몸에 흉터가 많군.”
남자는 벤자민의 상체를 훑어봤다.
그저 그런 도련님들처럼 매끈할 것 같았던 손님의 몸엔 크고 작은 흉터들이 많았다.
복부엔 치명상이었을 게 분명한 큰 상처도 있었다.
“너도 이 바닥에서 일하는 사람인가?”
남자가 꽤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 걸어왔다.
“나도 옆구리에 딱 너만 한 상처가 있지. 엄청 옛날에 여기서 클레우 페트라의 목걸이 경매가 있었을 땐데.”
벤자민이 눈으로 남자의 걸음을 셌다.
한 걸음. 두 걸음.
“어떤 간 큰 놈이 경매 중이던 장소에 난입해서 그 목걸이를 훔……”
셋.
벤자민이 손바닥으로 남자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땅바닥으로 처박았다.
―콰앙!
방심하고 있던 남자는 짤막한 신음을 낸 뒤 기절했다.
벤자민은 남자의 벨트에 고정해 놨던 열쇠를 빼냈다. 인내심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가 도로 옷을 입으려 할 때였다.
‘아까 다른 관계자들이 내 얼굴을 봤었지. 의심받지 않고 돌아다니려면 원래 입고 있었던 옷보단…….’
남자가 입고 있는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경매장 관계자들이 입는 것 같은 옷. 옷에 후드도 달려 있어 얼굴을 대충 가리기에도 좋았다.
벤자민이 기절한 남자에게서 재킷을 벗겨냈다.
“바로 누가 오는 소리가 들려서 스웨터 입을 시간이 없었어. ……네 옷은 나중에 똑같은 걸로 사주지.”
“그, 그건 괜찮은데…….”
보기에 영 당황스러운 패션이었다. 저대로 다닌다면 다른 의미의 소란이 일어날 법했다.
‘아, 아냐. 벤자민이 공공장소에서 벗고 다닐 사람도 아니고.’ 길버트는 괜한 생각이라며 고갤 저었다.
그 사이 벤자민은 재킷 안주머니에 리볼버를 끼워 넣었다.
“아무튼 그 녀석을 데리고 나올 테니까 먼저 숙소로 들어가.”
“……조심해요, 벤자민.”
철문이 쇳소리를 내며 닫혔다.
길버트는 제 머리칼을 마구 헝클였다.
닉시와 벤자민을 구하자고 경관을 부를 순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역시 둘이 걱정됐다.
“어쩐다. 뭐 좋은 방법 없을까?”
길버트가 옆에서 머릴 쥐어짜고 있을 때, 그레타는 아까 벤자민이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정 그렇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양치기 소년처럼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나 쳐보라고.]“양치기 소년처럼 늑대가 나타났다고…….”
그레타가 중얼거렸다.
양치기 소년. 늑대. 소리.
“아!”
그레타가 고갤 번쩍 들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아주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 * *
닉시는 꼬마의 손바닥에 올려져 있는 녹색의 사탕을 가만히 바라봤다.
옛날 제 모습이랑 비슷한 꼬마.
잠시 옛 기억이 떠오르긴 했다.
그녀가 살던 곳의 퀴퀴한 냄새. 눅진했던 공기. 그때 약을 어떻게 만들었던지. 번 돈으로 처음 사서 먹었던 크림 발린 빵의 맛.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꼬마야. 그거 혹시 용돈벌이니?”
닉시는 사탕을 받는 대신 꼬마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네, 네?”
꼬마는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네 용돈벌이냐고.”
옛날 일이 떠오른다 해도 그뿐. 눈앞의 꼬마가 제 어린 시절을 닮았대도 그뿐.
갑자기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울컥한다든지, 어린애가 약을 팔고 다니는 사회에 대해 부조리함을 느낀다든지, 꼬맹이에게 인생 똑바로 살라고 훈계하고 싶은 맘이 든다든지.
일반적인 사람이면 으레 들 법한 일말의 감정 따위, 그녀는 전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일 찾아봐. 법이 옛날보다 까다로워져서 너 같은 꼬맹이라도 요즘은 잘 안 봐주거든. 아직 어리니까 하루라도 일찍 손 털라구.”
“그, 그게…….”
“그리고…….”
그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자신뿐.
“……남 인생 망가뜨리는 걸로 돈 벌면 나중에 허무함밖에 안 남기도하고.”
닉시는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그때, 뒤쪽에서 욕지거리가 들렸다.
「이, 이 개자식이!」
닉시가 꾸물거리고 있던 사이, 잠시 기절했던 남자가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남자는 벽에 길게 세워져 있는 석판을 밀어 넘어뜨렸다. 그것은 닉시를 향해 곧장 무너져 내렸다.
닉시는 그것을 피하고자 몸을 움직였다.
순간 그녀의 시야에 꼬마의 놀란 얼굴이 들어왔다.
녹빛 사탕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닉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꼬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 * *
―쿠당탕!
벤자민이 멀리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갤 들었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닉시가 저곳에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늘 시끄러운 소동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니.
벤자민이 무너지는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렸다.
먼지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아야야……”
닉시는 아프게 울리는 꼬리뼈를 매만졌다. 그녀의 품 안에 안긴 꼬마가 잔뜩 겁에 질려 웅크렸다.
석판이 무너지기 전, 닉시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꼬마를 안고 바닥을 굴렸다.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석판을 맞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잘못 디딘 발목이 시큰거리며 아팠다.
‘……제대로 삔 것 같은데.’
갑작스러운 소동에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피어오른 먼지들 사이로 남자가 씩씩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잘도 내 얼굴을 뭉갰겠다.」
닉시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겨 있던 꼬마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달아났다.
꼬마를 안고 굴러서 생긴 생채기들이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네년은 여기서 곱게 나가지 못하게 해 주지.」
“하하, 뭐라는 거야. 알아먹게 말해! 난 지금 고맙다는 말도 못 들어서 아주 억울한 상황이거든?”
삐끗한 발을 잠시 땅에 디뎠을 뿐이었는데 고통이 일었다.
고통을 무시하고 달릴 순 있었다. 그러나 분명 얼마 못 가 붙잡힐 게 뻔했다.
게다가 사방은 구경하는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상태.
‘도망치지 말고 차라리.’
닉시는 바닥에 떨어진 날카로운 석면 조각을 바라봤다.
그때. 불쑥 누군가 닉시 앞을 막아섰다.
「넌 뭐야?」
닉시가 고갤 들었다.
자신을 미행한 남자와 같은 유니폼.
닉시는 곧장 거리를 벌리려 했다. 그러나 남자의 손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흉터가 가득한 익숙한 손이었다. 그것을 본 닉시가 멈칫했다.
「더 이상 시끄럽게 굴지 마. 그나마 있는 손님들을 다 내쫓을 셈이야?」
익숙한 목소리. 독일어.
화가였다.
벤자민의 말에 그제야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온 건지 남자가 몰려든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
「이 여자는 북쪽에서 검문하라 하더군. 넌 가서 상처나 치료하고 와.」
「제길, 알겠다고.」
남자가 얼굴에 흐르는 코피를 닦아 냈다.
상황이 마무리되는 분위기자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웅성거리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벤자민은 돌아가려는 기색의 남자를 보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남자는 뭔가 생각난 듯이 몸을 돌렸다.
「잠깐만. 우리끼리 있을 때야 독일어를 썼지, 영업장 안에선 영업장만의 언어를 쓰는 규칙이 있었을 텐데.」
벤자민은 작게 혀를 찼다.
「……후드 걷어 봐.」
남자가 의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이대로 얼굴을 드러내면 끝이었다.
벤자민이 눈앞의 사람들을 세었다.
적어도 넷. 구경하러 기웃거리는 사람들까지 하면 족히 열은 넘었다.
닉시를 먼저 보낸다 해도 따돌리기엔 적합한 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발목이라도 접질렸는지 한쪽 다리를 절뚝이고 있었고.
“어떡할래?”
닉시가 조용히 속삭였다.
일순간 벤자민은 안주머니에 넣어뒀던 금속을 떠올렸다. 길버트가 준 리볼버.
「후드 안 걷어?」
남자의 말투가 점점 험악해졌다.
“도망가다 잡히는 것보단 차라리.”
닉시는 말을 잇지 않고 침묵했다. 하지만 벤자민은 닉시의 침묵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도 똑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차라리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리볼버를 꺼내려던 순간.
―삐이이익!
갑자기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관이다! 경관이 나타났다!”
저 멀리서 누군가 외쳤다.
높고 날카로운 외침. 경관이 나타났단 고함에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방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뭐? 겨, 경관이라고?」
「젠장 단속이야! 숨어!」
당황한 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경관이다! 경관이 나타났다!” 고함과 호루라기 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던 남자는 이윽고 달아났다.
“닉시!”
벤자민이 닉시의 손을 붙잡고 뛰기 시작했다.
“잠깐 벤자민! 그쪽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는 곳인데? 이대로 가다간 경관하고 마주칠 거라고!”
“아니, 이쪽이 맞아.”
“뭐어? 왜?”
닉시와 벤자민은 그대로 도망치는 인파를 역행하며 뛰었다.
북쪽 출구가 있는 쪽이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경관이다!”
저 멀리 경관이 나타났다며 고함을 지르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 남자는 벤자민과 닉시를 보자 손을 마구 흔들었다.
“벤자민! 이쪽이에요!”
길버트였다.
그 옆에는 얼굴이 터져라 호루라기를 부는 그레타가 있었다.
“길버트, 그레타?”
닉시가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길버트는 주윌 두리번거리며 골목 안쪽으로 손짓했다.
닉시가 자꾸 절뚝이자, 벤자민이 닉시를 안아 올렸다.
그레타가 뒤쫓아오는 사람은 없는지 뒤쪽을 바라보며 호루라기를 불어댔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경관은?”
“어, 없어요!”
“뭐라고?”
“경관이 나타났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양치기 소년 작전이라구요!”
그레타가 호루라기를 부느라 새빨개진 얼굴로 외쳤다.
그들은 곧장 북쪽 출구에 도착했다. 길버트가 철문을 열었다. 훅하고 바닷바람이 불었다.
밖이었다.
그들은 곧장 소란스러운 지하 경매장을 벗어나 뛰었다.
이제야 상황을 이해한 닉시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양치기 소년 작전? 아하하! 그게 뭐야! 어쩐지 경관 나타난 걸 왜 외치고 다니나 싶었네.”
“그래도 사람들이 다 속아 넘어갔잖아. 그렇게 크게 외친 건 처음이었다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그들은 그 길로 항구를 크게 돌았다. 도망친 지하 경매장에선 여전히 아우성들이 들려오는 듯했다.
* * *
그 뒤로 뭘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곧장 짐을 쌌다.
닉시는 이곳에 온 이유였던 꽃을 꺼내 가방 안에 넣었고, 벤자민은 드디어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그 길로 곧장 기차역으로 이동했다.
가장 빠른 열차를 타고 난 후에야 그들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 * *
기차에서 내린 뒤, 마차 보관소에 도착했을 땐 아주 캄캄한 밤이었다.
“여기 맡기셨던 말들입니다.”
길버트가 마차 보관소에서 헥토와 토르를 데려왔다.
“드디어 오베르로 돌아갈 수 있게 됐구나!”
고된 여정이었어! 닉시는 말들의 갈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길버트가 말의 고삐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고생했어. 이대로 반나절은 달려야 하니까, 피곤하면 자.”
길버트와 벤자민은 익숙하게 마부석에 탔다.
발목이 퉁퉁 부은 닉시와, 손과 무릎이 약간 까진 그레타는 환자 취급을 받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까만 하늘. 말발굽 소리와 마차에 달린 등불에서 나는 은은한 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