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2_7
닉시는 마차에 기대 창밖을 바라봤다.
고된 여정 끝에 원하는 것도 손에 넣었고, 다친 사람도 하나 없었다. 아주 최고의 성과였다.
닉시는 마차 창문에 비친 제 꾀죄죄한 몰골을 보곤 픽 웃었다. 거지가 따로 없었다.
“저, 닉시.”
“응?”
그레타의 조용한 목소리에 닉시가 고갤 돌렸다. 늘 단정했던 그녀의 몰골도 만만치 않았다.
그레타는 수줍은 얼굴로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뭐가?”
“선생님을 위해서 그 약을 구해 준 거요.”
닉시는 눈을 깜빡였다.
고맙다니.
그녀는 그레타의 선의를 듣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난 그런 말 들을 이유가 없어. 애초에 이 개고생을 하게 된 건 다 내 탓이잖아.”
정확히는 라울의 신분증을 잃어버린 화가의 탓이었지만.
사실 약을 만들기로 다짐한 것도 라울이 아니라 본인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그러니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이유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왜.
“그래도 그냥 가만히 있을 수도 있었던 일을 닉시는 굳이 해결하려고 해 줬잖아요.”
“그거야 당연히 안 그러면 오베르에서 쫓겨날 것 같았으니까.”
닉시는 머릴 긁적였다.
문득 닉시는 이전에 그레타에게 물어봤던 게 떠올랐다.
[……사랑하니까 괜찮은 거야?] [네?] [라울을 사랑해서 괜찮은거냐구.] [아…….] [네. 맞아요.]고맙다는 말 같은 거 할 필요도 없고, 들을 이유도 없는데.
오히려 이런 귀찮은 상황에 휘말리게 해서. 제 사랑하는 사람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화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고맙다고 하는 거지? 왜 안심했다는 듯 웃는 거지.
왜, 왜?
“라울은 네가 자길 사랑하는 것조차 모르잖아.”
그를 위해 그렇게 죽어라 고생해도 그는 그녀가 사랑한단 것조차 모를 텐데.
“게다가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근데도 고맙다는 말이 나와? 그레타 넌 왜 그렇게 라울을 위하는 거야?”
왜 보답받지 못할 사랑 같은 걸 하는 거야.
“그게 사랑이야?”
방금 질문은 주입식 사회화 교육을 받은 닉시의 망가진 두뇌에서도 ‘묻지 마라. 제발.’에 속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보답받지 못할 게 뻔한 무의미한 희생. 그야말로 안 해도 될 짓거리.
수지타산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하는 것. 이성과 논리를 마비시키는 눈먼 감정.
사랑. 그깟 게 대체 뭐라고.
“……알고 계셨군요. 선생님께 다른 사랑하는 분이 계시단 걸.”
“알지. 난 눈치가 빠르거든.”
닉시의 말에 그레타는 작게 소리 내며 웃었다.
“네. 그래도 전 선생님을 사랑해요.”
“……너도 진짜 이상하구나?”
“이상한가요?”
“응.”
닉시와 그레타 사이로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차가 삐걱댔다.
“제가 라울 선생님을 왜 좋아하게 됐느냐면요.”
등불의 불빛이 일렁였다.
“저한테 꽃을 선물해 줘서예요. 별거 아니죠? 그때, 선생님이 앞으로 마을에 가게를 열게 됐다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웃으면서 꽃 한 송이를 주셨어요. 그때 첫눈에 반해 버렸죠.”
“…….”
“그 뒤로 어떻게든 함께 있고 싶어서 바텐더 일을 배우고 싶다고 했었어요. 그랬더니 아직 성인도 아닌 저에겐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한사코 거절하셨죠.”
“그야 술이니까.”
“저는 뭐라도 좋으니 알려 달라고 떼를 썼어요. 그랬더니 가르쳐 주셨던 게 라틴어였어요. 자긴 배운 게 그것뿐이라고. 재미도 없고 고리타분할 텐데 괜찮겠냐고.”
“응.”
“그래서 좋다고 했어요.”
등불의 불빛 탓인지 그레타의 얼굴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레타는 마차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끔 선생님은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선생님의 선생님 이야기를요. 그분에게 라틴어를 배웠다, 그분이 술집에서 일하기보다 다른 일을 해 보는 게 낫지 않겠냐 해서 일을 그만두려 했었다, 그분이 결혼한 뒤에 오베르로 오게 됐다, 그래서 그분의 결혼식엔 못 가게 됐다.”
그레타가 처음 선생님의 선생님이라는 사람을 봤을 때, 그녀가 누구라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그저 알 수 있었다.
알다마다. 그레타는 라울을 오랫동안 짝사랑했으니까.
그가 저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알 수 있었어요. 선생님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구나. 나를 사랑해 주진 않겠구나.”
마음이 아팠던가.
마침내 고백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갑자기 나타난 선생님의 사랑하는 존재 때문에 진심을 전할 수도 없어서 억울했던가.
상황이 워낙 당황스러워서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굳이 떠올려 보자면 약간은 실망했던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그것도 곧, 라울이 곤경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희미해졌다.
제 실망감 따위보다, 그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으니.
“하지만 괜찮아요. 제가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선생님도 저와 똑같은 마음이길 바라는 건 제 욕심일 뿐이니까.”
“난 잘 모르겠어. 내가 상대방을 생각하는 만큼, 상대방도 나를 생각해 주길 바라는 건 당연한 거 아냐?”
‘와 그렇구나’를 말해야 할 타이밍에,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닉시가 물었다.
“주는 만큼 받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잖아. 너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데도 어떻게 괜찮다는 거야? 혹시 그레타 너도 선행에 희열을 느끼는 편?”
“아뇨. 딱히……. 글쎄요. 그건 그냥……. 그런 이유가 제가 선생님을 더는 좋아하지 않게 될 이유로는 부족해서?”
“방금 그 말, 여태껏 살아오면서 들었던 말 중에 어렵기로 열 손가락 안에 들 것 같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삶을 실천하는 닉시에게 ‘마음을 거저 주는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레타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닉시도 언젠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알게 될 거예요.”
“그런 소리 자주 들어. 이러다 영원히 모른 채로 죽으면 어떡하지. 난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인데.”
“음, 그럼 오래 사시겠네요.”
“……그거 욕 아니지?”
그레타가 후후 웃었다.
이윽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까만 밤하늘. 닫을 때마다 시큰하게 아파 오는 발. 그놈의 사랑.
닉시는 도로 창문에 머릴 기댔다. 마차의 잔잔한 진동 따라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보답받지 못할 마음 같은 게 뭐가 좋다고.’
“바보.”
닉시가 중얼거렸다.
* * *
“나, 난 정말 무고하다고! 미, 믿어 줘! 전부 다 그 여자가 그런 거라고! 다, 다 설명했잖아!”
취조실 안. 필립은 아까부터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맥스라는 남자.
닉시에게 듣기로는 오래전, 시궁창 생활을 같이했던 사람이라 했다.
남자는 약 기운이 떨어진 건지, 시선이 흔들리고 불안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필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를 계속 잡아둘 수도 없고.’
파리를 떠들썩하게 만든 소동.
실상은 재개발이 보류됐던 곳에 살던 노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불법 개조 약물’이 파리 시내까지 범람해 버린 것이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그 소동에 휘말린 약쟁이일 뿐이고.
이 사실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파리에선 제키와 필립 단둘뿐.
보통 필립 선에서 덮을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
곧 있을 때문이었다.
“그냥 풀어 주면 안 되나? 슬슬 시끄러운데.”
제키가 비스킷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안 돼. 곧 회담이 있잖아. 그때까지 위험한 변수는 철저히 배제해야 해.”
필립이 들고 있던 서류를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맥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런 잔챙이 같은 사건이라도 말이야.”
곧 유럽 국가 간의 정상 회담이 열린다.
원래라면 파리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그 소동이 일어난 뒤에 장소가 아르고뉴로 변경되었다.
그것 때문에 상부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때문에 그저 약쟁이의 실수로 일어난 방화 사건도 나치 잔당이 저지른 일일지 모른다며 과하게 대처하고 있던 것이었다.
정확한 일의 진상을 알고 있는 필립만 진실을 말하지도 못한 채 골치 아플 뿐이었다.
“그, 그 여자가 그랬다니까? 내가 이, 이름이랑 출신도 다, 다 설명했잖아!”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줄 아는 건가.
‘아는데 누나가 파리에 왔었다는 것을 덮어 주려고 이 지경이 난 것 아냐.’
필립이 지끈거리는 머릴 짚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맥스는 제 억울함을 토로하기 위해 외쳤다.
“라, 라텐 지구 출신! 나중에 군인 나리에게 입양된 여자! 니, 닉시!”
―덜컥.
맥스가 닉시의 이름을 외침과 동시에 취조실의 문이 열렸다.
“닉시?”
열린 문 사이로 흰 제복을 입은 거구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를 본 필립과 제키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아서 대령님.”
필립이 경례했다. 비스킷을 잘못 삼킨 제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등줄기로 작은 식은땀이 흘렀다.
“인사치레는 됐다. 그보다 재밌는 이야길 들은 것 같은데.”
아서 대령은 취조실 테이블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나 몸의 방향은 스파이로 의심받고 있는 맥스 쪽이 아니라 필립 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볼일이 있는 것처럼.
“필립 휴거. 무슨 일인지 설명할 수 있나?”
필립이 뒷짐을 진 손에 힘을 주었다.
“왜 스파이 혐의로 구금된 약쟁이의 입에서 ‘닉시 휴거’ 소령의 이름이 나온 거지?”
* * *
“다 됐다!”
닉시는 가루약을 넣은 캡슐을 바라보며 외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정말 대단해.”
그녀는 막 자신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있었다.
약의 재료들을 구하고 치료제 연구를 시작한 게 불과 사흘 전. 무려 사흘 만에 약을 완성한 것이다.
“이건 어지간한 천재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암암, 나니까 가능한 일이지. 마음만 먹으면 ‘세계에서 노벨상을 가장 많이 딴 사람’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수도 있다구.”
닉시는 흥얼거리며 약의 화학식을 적은 종이들을 정리하고, 캡슐들을 약통에 옮겨 담았다.
이제 이것을 필립에게 전해 주면 끝이었다. 약물 소동으로 난리 난 파리도 잠잠해질 것이고. 괜한 누명을 쓴 라울의 스파이 혐의도 잠잠해지겠지.
다시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전에 끝나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산타 선물이 아니라 재입대 통지서를 받을 뻔했잖아!”
덕분에 연말다운 분위기도 누리지 못한 닉시였다. 무려 크리스마스가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도 말이다.
“당장 필립에게 연락해야지. 크리스마스 끝나기 전에 이 지긋지긋한 약에서 벗어나고야 만다.”
닉시는 투덜거리며 집을 나섰다.
그녀의 문 앞에는 배달부의 자전거가 놓여 있었다. 닉시가 자전거를 빌려주지 않으면 세계의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며 배달부 대니얼에게 반강제로 빌린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한 세 시간쯤 페달을 부지런히 밟다 보면 우체국에 도착할 것이다.
거기 가서 필립이 알려 준 비밀 회신으로 약을 다 만들었단 소식을 전하면 큰 미션은 해결.
남은 건 필립에게 화학식과 샘플 약을 전해 주는 것뿐이었다.
“내 전 재산을 터는 한이 있더라도 가장 빠른 우편으로 부쳐야지.”
닉시가 자전거를 이끌고 울퉁불퉁한 오솔길을 걸었다.
폐 속 깊숙이 차가운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저 멀리 마을 광장이 보였다. 그곳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가스등과 낮은 나무 화단에 빨간 공들을 걸고 있었다.
지금 오베르는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위해 한창 꽃단장을 하는 중이었다.
그 증거로 마을 광장엔 큰 구상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 어지간한 집보다 큰 크기였다.
나무에 알록달록한 오너먼트를 걸던 목수 비티가 닉시를 보고 아는 체했다.
“닉시!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그동안 감기라도 앓았던 거예요?”
“앓긴 앓았지. 골머리. 근데 난 천재라 빨리 나았어. 그보다 뭐 하는 거야?”
“트리 꾸미기요! 닉시도 할래요?”
비티가 닉시의 손에 리본 달린 솔방울을 쥐여 주었다. 꾸미는 건 영 젬병인데. 어떡할까 고민하던 닉시는 솔방울을 잘 안 보일 법한 위치에 은밀하게 걸었다.
“나도 크리스마스 시즌엔 집 앞에 커다란 양말을 걸어뒀어. 집에 굴뚝이 없어서 혹시나 산타에게 선물을 못 받으면 어쩌나 싶어서.”
“산타아?”
트리 뒤에서 누군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닉시, 너 혹시 아직까지 산타 믿는 거 아니지?”
길버트였다. 그는 식탁보와 목장의 양털로 만든 저렴한 산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럴 리가. 산타가 없다는 건 영구치가 나기도 전에 알았다.
닉시의 산타들은 그녀가 4살 때 파산했으니까.
길바닥에 나앉은 꼬마에겐 산타 같은 건 오지 않는다. 났을 때 빼곤 운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기분이라도 내는 거지 뭐.”
“난 또. 아직까지 산타를 믿고 있는 건가 했지.”
“믿고 있으면 어떻게 했는데?”
“산타 분장하고 너네 집 굴뚝 타려고 했어.”
그때, 트리를 장식하던 꼬맹이 엘리가 울면서 집으로 뛰어갔다. “아, 아니야, 엘리! 산타할아버지는 살아계셔!” 길버트가 황급히 엘리의 뒤를 쫓아갔다.
“저런.”
닉시가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눈에 화단 앞, 잔뜩 쌓여 있는 꽃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빨간색의 포엽이 마치 꽃같이 보이는 식물. 포인세티아였다.
“저건 뭐야 비티? 저것도 마을 장식용이야?”
“아뇨. 저건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선물이에요.”
“어…… 이번 해 산타는 꽃집이라도 차렸대?”
닉시가 포인세티아 무더기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선물이라더니 하나씩 예쁘게 포장해 놓은 모습들이었다.
“아뇨. 아, 닉시는 모를 수도 있겠군요? 남부 지역에선 크리스마스이브에 문 앞에 꽃을 놔두는 풍습이 있어요. 이브에서 크리스마스로 넘어가는 자정에 죽은 자들이 찾아온다는 풍설이 있거든요. ‘예쁜 꽃을 선물로 드릴 테니 나쁜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 하는 거죠.”
“그렇구나. 남부 지방 유령들은 상냥하네. 꽃을 받았다고 돌아가다니.”
“닉시도 하나 가져갈래요?”
“아냐, 됐어. 나는 유령 같은 거 안 믿거든!”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사수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 말이다.
닉시가 자전거에 올라탔다.
“헉, 헉……. 저…… 전화 좀 쓸게요.”
“네, 네! 저쪽에 있어요!”
닉시는 후들거리며 전화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언제 달려와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거리였다. 라울이 스파이 혐의를 두 번 더 받았다간 허벅지만 단련한 보디빌더처럼 될 듯했다.
익숙하게 필립의 번호를 눌렀다.
“이 녀석들, 내가 이렇게 빨리 만들 줄은 몰랐겠지?”
규칙적인 신호음을 들으며 그녀는 콧노래를 불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리고 전화를 받는 달칵 소리가 들렸다.
“어, 필립? 약 다 만들었어! 어디로 보내면 돼?”
―닉시?
수화기 너머에선 필립치고 날티 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닉시가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후볐다.
“필립? 그 나이에 변성기 온 거야? 목소리가 꼭……”
―나 같단 말이지? 알고 있어, 달링.
그래, 빌어먹을 제키를 닮았다 했지. 닉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근데 왜 네가 전화 받는 거야? 필립은?”
수화기 너머에선 길게 머뭇거리는 소리가 났다. 왜, 뭔데? 닉시가 세 번을 독촉하고 나서야 제키가 입을 열었다.
―지금쯤 대령에게 두들겨 맞고 있을걸.
“필립이? 왜. 사상을 바꾸고 싶다 했어?”
그는 반듯, 단정의 대명사이자 부대에서 최고의 엘리트였다.
그런 그가 두들겨 맞고 있다니. 그것도 필립을 총애하다 못해 예술품 다루듯 하는 대령에게.
말도 안 됐다. 프랑스가 두 쪽 났거나, 그가 대령의 얼굴에 침을 뱉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하, 상황이 좀 곤란하게 됐어.
“친구가 두들겨 맞고 있는 상황은 웬만하면 곤란한 상황에 속하긴 하지.”
―클레망 아서 대령이 다 알아 버렸어.
닉시는 수화기 너머 제키의 말에 인중 가려운 표정을 했다. 아직 현실을 자각하지 않은 사람 특유의 어벙한 표정이었다.
“뭘?”
말을 내뱉고 나서야 뒤늦게 상황이 파악됐다.
닉시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가 새하얘졌다.
“설마…….”
―설마가 맞아. 대령이 네가 파리에 왔었다는 걸 알아 버렸다고. 네 시궁창 친구…… 그러니까 맥스라는 남자가 대령 앞에서 네 이름을 꺼냈거든.
“그럼 대령이 듣기 전에 그놈 머리를 후려쳐서라도 기절시켰어야지!”
―그럴 새도 없었어. 언질도 없이 납셨거든. 대령이 그런 잔챙이들 격리해 두는 취조실에 납실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럼 대령 머리를 후려쳐서라도 기절시켰어야지!”
―그런 미친 짓을 하는 건 너밖에 없어, 달링.
하아. 수화기 너머로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그 남자는 나치의 끄나풀 혐의 때문에 갇혀 있던 건데, 그런 놈 입에서 탈영한 군인 이름이 나오면 어떻게 보이겠냐?
닉시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사상 바꾼 사람 같아 보이겠지, 젠장!”
―그래서 결국 대령이 너랑 필립이 파리에서 만난 적 있다는 걸 알게 됐어. 그 꽉 막힌 자식이 대령에게 나는 빼고 이야기해서 지금 내가 살아서 네 전화를 받을 수 있었던 거고. 아니었으면 나도 진작 관짝 안에 들어가 있었을 거다.
제키는 필립이 여름휴가 때 오베르로 찾아왔었단 이야기는 죽어도 함구하고 있다고 했다.
또 대령에게 알려진 사실 중 하나는 라텐 지구에서 일어났던 방화 사건의 진실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라텐 지구에 갔다가 약쟁이와 주정뱅이들에게 소매치기를 당해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불이 났었다고 했단 거지?”
틀린 건 없었지만 중간마다 뭔가가 많이 빠져 있었다. 꼬투리 잡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만큼 빈약한 주장이었다.
“대령이 그 말을 믿어? 그 능구렁이가?”
―안 믿으니까 필립 녀석이 끌려간 거겠지. 그 시커먼 속을 누가 알겠어.
제키가 한숨을 푹 쉬곤 말을 이었다.
―하여간 필립이 파리의 약물 문제를 해결하려고 네게 치료제를 만들어 달라 의뢰했단 것도 알아 버렸고, 대령 명령으로 네 친구는 풀려났어.
“응.”
―마지막으로 대령이 네게 전하래. ‘아르고뉴’에서 만나자고.
이미 필립과 닉시 사이에 접촉이 있었단 걸 들켰을 때부터 닉시가 대령과의 만남은 피할 방법은 없었다.
“결국 대령을 만나야 한단 말이네…….”
이미 제키를 통해 필립에게 제재가 가해진 것도 알아버린 마당이었다.
이번에도 닉시가 튀어버리거나 잠적해 버리면 필립이란 남자는 지구에서 사라질지도 몰랐다.
제키면 몰라도 필립은 아무리 닉시라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알겠어. 일시랑 장소는?”
닉시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정보들을 머릿속에 담았다.
지금으로부터 이틀 뒤의 아르고뉴.
그 도시에서 가장 크고 호화롭다는 발타자르 호텔.
―정말 괜찮겠어? 대령은 널 다시 군으로 데려오려 하실 텐데.
“당연히 안 괜찮지. 하지만 어떡해, 대령이 그렇게 큰소리쳤는데. 필립이나, 네 목이 붙어 있으려면 내가 가야지 않겠어? 그리고 이 치료제도 줘야 했고.”
―그건 그렇지만…….
“그럼 그때 만나!”
―달칵.
닉시는 제키가 더 우는소리 하기 전에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올 게 왔다.
머릿속으로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폭음이 울려오는 듯했다.
이미 저 멀리서 미사일을 날렸노라 선전포고했다.
그것도 ‘클레망 아서 대령’이라는 핵폭탄급의 미사일을.
닉시 같은 개미 인생은 그저 날렸군, 망했군, 죽었군. 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살고 싶으면 하라는 대로 하는 방법뿐.
“으으, 이럴 줄 알고 사직서를 두고 튄 건데.”
기가 막힌 도주의 결말이 제 발로 기어들어 가는 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닉시가 머리를 북북 긁으며 우체국을 나섰다.
“하여간, 날 놔줄 생각이 없다니까. 그 돈 밝히는 너구리 영감.”
클레망 아서 대령.
부내 나는 취미를 자랑하고 다니며, 양심도 없고 염치도 없는 닉시의 오랜 상사.
그는 자신에게 물질적으로나 권위적으로나 이득이 되는 것은 기가 막히게 알고, 제 편으로 두는 사람이었다.
거기서 가장 좋았던 패는 닉시였다.
명령 하나로 즉각 세상에 나온 적 없던 유전자 공학, 화학 물질, 심지어 살상 무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패.
그중 가장 그의 마음에 가장 든 점은, 닉시가 어지간한 일로는 망가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 * *
닉시가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베르로 돌아왔을 땐 이미 밤이 깊었을 무렵이었다.
그 흔한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오솔길.
손으로 끌게 된 자전거의 끼릭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닉시가 피로와 숨 막히는 결투를 벌이며 겨우겨우 들판 옆 흙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들판 한가운데 화가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까, 깜짝이야 너 거기서 뭐해? 허수아비야?”
닉시가 빽 비명을 내지르자 벤자민이 고갤 들었다.
그는 손에 파스텔과 캔버스를 들고 있었다.
“약을 끊었더니 불면증이 도져서.”
벤자민이 닉시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러면 넌. 이 밤중에 도둑처럼 뭐 하는 거지?”
“도둑이라니. 나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한테.”
‘평화?’ 그녀 때문에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그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치료제 다 만들었다고 필립한테 전하고 왔어.”
“……파리까지?”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당연히 전화를 쓸 수 있는 옆 마을 우체국까지지.”
닉시가 경악하며 말했다.
벤자민은 자전거를 세운 울타리 옆에 몸을 기대고 섰다.
“그래서.”
“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길래, 아르고뉴에서 만나기로 했어.”
“언제?”
“이틀 뒤.”
이틀. 빈말로도 여유롭다고 할 수 없었다.
“그곳이 ‘나’라는 사람의 역사상 가장 마지막 줄에 적힐 최후의 전투가 될 거야. 죽거나, 죽이 되거나 둘 중 하나거든.”
닉시가 다시 떠오른 결전의 날에 유감을 표하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옆에선 ‘그렇군.’ 혹은 ‘그래.’ 하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닉시가 벤자민을 향해 고갤 돌렸다.
그리고 진작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그의 눈과 마주쳤다.
“너…….”
“응?”
그가 제 입꼬리 쪽을 툭툭 두드렸다. 뭐가 묻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닉시가 황급히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약간의 짠 듯한 쇠 맛이 느껴졌다.
추운 날씨에 헉헉이며 자전거를 몰았더니 입술이 찢어진 모양이었다.
“어라? 찢어졌네?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누구랑 싸우고 맞아서 난 거 아냐.”
“알아. 너라면 때리는 쪽이었을 테니까.”
“맞는 말인데 기분이 이상하네.”
닉시가 상처가 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그가 슬쩍 손을 떼어 놓았다.
“만지지 마.”
“…….”
“핥지도 말고.”
“그게 마음대로 되니.”
몰랐으면 차라리 피가 흐르든 말든 가만 놔뒀을 것을.
“괜히 알아 버려서 신경 쓰이잖아.”
그녀의 투덜거림을 가만히 듣고 있던 벤자민이 제 윗옷 주머니에서 손가락만 한 크기의 빨간 파스텔을 꺼냈다. 방금까지 그림을 그리던 것이었다.
그가 그녀의 턱을 제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붉은 파스텔이 상처가 있는 입꼬리에 내려앉았다.
“이렇게 하면 알아 버려도 다른 게 신경 쓰여서 안 핥겠지.”
벌꿀 냄새가 나는 파스텔은 희미한 진홍빛 흔적을 남기며 윗입술부터, 상처가 닿지 않을 만큼의 아슬아슬한 위치의 아랫입술까지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닉시는 제 입술에 내려앉는 조심스러운 무게감을 느꼈다.
다친 곳을 피해 조심스레 움직이는 손.
그 손길은 꼭 소중한 것을 다루는 듯 섬세했다.
닉시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건 장난 같은 친절일까, 아니면 그가 말한 ‘안 하던 짓’일까.
“벤자민.”
“응.”
“아직도 날 사랑해?”
“유감스럽게도, 그래.”
입술에 텁텁하게 발린 진홍빛이 신경 쓰였다.
온 신경이 다 그쪽으로 쏠려 버려서, 막상 그녀는 입 밖으로 어떤 말이 튀어나오는지도 자각하지 못했다.
“보답받지 못할 사랑 같은 걸 해도?”
“…….”
“네 목숨을 나 같은 사람에게 함부로 바친다 해도?”
“…….”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한 걸, 후회하지 않겠어?”
다됐다는 듯 그가 손을 떼어 냈다.
닉시는 그가 발라 준 파스텔 맛이 어떤 맛인지 느끼기 싫어서라도 상처를 핥을 수 없게 되었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데.”
벤자민이 그녀의 입가에 작게 삐져나온 진홍색을 엄지로 닦아 내며 말했다.
“그래도 괜찮다는 형식적인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닐 거잖아. 내가 뭐라고 말하길 원하는데.”
닉시는 여전히 입술의 분홍빛이 신경 쓰였다.
아니, 그보다 그 색 위에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던 손의 감촉이 더 신경 쓰였다.
사랑해서 유감이라는 사람치곤 참으로 평온하기 짝에 없는 그의 태도가 신경 쓰였다.
그녀는 그가 신경 쓰였다.
“나랑 같이 위험할 게 뻔한 곳으로 가 주겠다고 말해 줬으면 해.”
“그게 어딘데.”
“아르고뉴.”
길고 차가운 입김이 바람결에 날아올랐다.
침묵치고 제법 긴 시간 동안 시선이 오고 갔다.
늦은 시각의 겨울 들판. 달빛에 비치는 서로의 눈동자 색은 어떤지 알아버리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벤자민은 닉시의 얼굴엔 진홍색이 어울리지 않는단 사실을 깨닫곤 픽 웃으며 말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