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3_3
문이 덜컹거리며 크게 흔들렸다.
“대체 네가 왜 간다는 건데? 가지 마. 폭탄이 어디서 터질 줄 알고 간다는 거야? 가면 죽을 수도 있어. 모르겠어?”
“알아!”
“아는 데 왜 그러는데!”
“나 하나 살자고 다른 사람들을 모른 척할 순 없어.”
“하. 성인군자 납셨네, 상황을 냉정하게 좀 봐!”
“넌 그게 될지 몰라도, 난 아냐.”
“벤자민!”
닉시가 벤자민의 팔을 크게 잡아끌었다.
복도에선 사람들이 급히 뛰는 발걸음으로, 창문 너머로는 새카만 연기와 사람들이 비명들로 가득했다.
다시 한번 건물이 흔들렸다. 닉시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그의 팔목을 다시 한번 붙잡았다.
“가지 마! 내 말 모르겠어?”
―쾅!
“난 모르는 사람 천 명이 다치는 거 보다 너 하나가 다치는 게 더 싫다고!”
그녀답지 않게 당혹스러움이 크게 배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그가 움직임을 멈췄다.
주변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나 그녀. 둘 중 누구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날 사랑해?]아이러니하게 벤자민은 이 순간 닉시가 자신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벤자민은 제 옷자락을 쥐고 있는 닉시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가 그렇게 물었던 이유.
“……너. 나한테 ‘아직도 날 사랑하냐’ 물었지.”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걸 알고도. 너와 내가 다른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네가 날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벤자민이 닉시를 향해 고갤 돌렸다.
아니. 그는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네 이런 모습이 아주 짜증 나.”
처음 보는 그의 얼굴에 닉시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끼이이이익.
그때, 쇠가 비틀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닉시와 벤자민은 동시에 소리 난 천장을 바라봤다.
건물이 흔들릴 때 함께 휘청이던 커다란 샹들리에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고 있었다.
닉시가 서 있는 곳으로.
소음이 가득한 곳에서 닉시는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곤 툭.
제 몸이 밀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난장판이 된 바닥을 굴렀다.
유리 조각에 긁힌 팔꿈치가 화끈거리며 아파 왔다.
구를 때 가구에 머리를 부딪친 건지 닉시는 몸의 움직임이 멎었음에도 한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이명이 들렸다.
어질어질한 시야 사이로 화려한 샹들리에에서 반사된 빛이 눈을 부시게 했다.
닉시는 겨우겨우 고갤 들어 제 눈앞의 상황을 바라봤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대리석 바닥에 깔아 놓은 잿빛 카펫. 그 위로 물감처럼 번지는 붉은 피.
닉시는 샹들리에 밑에 깔린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이 볼품없이 떨려왔다.
“……벤자민.”
[……노엘.]“왜, 왜 네가.”
[눈 좀 떠 봐요. 제발.]그녀의 손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축 처져 있는 그의 흉터 가득한 손에 닿았다. 차가웠다.
닉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뒤집어엎었다.
약통 하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통을 헤집었다.
그 안엔 치료제뿐 아니라 약의 성분을 증명하기 위해 만든 마약도 함께 존재했다.
그녀는 그것을 손에 쥐고 벤자민 앞으로 뛰어갔다.
“벤자민! 벤자민, 정신 차려 봐. 어서 이거 먹어. 이거 먹으면…….”
괜찮아질까?
문득 닉시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자 약을 억지로 쥐여 주던 그의 손도 도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닉시. 네가 이겼어.]‘뭐가 괜찮아지는 거지. 지금 상황이? 이런다고 벤자민이 정신을 차릴 수 있나? 정신 차린 벤자민이 이 커다란 샹들리에를 치우고 살아서 걸어 나올 수 있나? 이깟 게 뭐라고? 이걸 먹으면, 대체 뭐가 나아지는데? 이딴 건, 이딴 건.’
[먹고 달려.]이딴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 * *
대령님. 잠복해 있는 테러리스트들은 모두 진압했습니다. 호텔 근처의 병원에서 연쇄적인 폭발이 있었고 민간인 사상자와 부상자를 조사하는 중입니다. 나머지 폭발물들도 전부 수거했습니다.
호텔엔 폭발물이 설치되지 않아서 다행이군. 자네가 미리 보고하지 않았으면 거기 함께 있던 사람들하고 병원에서 정상 회담할 뻔했잖아.
잠금장치가 열리는 쇳소리.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닉시는 벤자민의 손을 꼭 쥔 채 멍하니 있었다.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닉, 닉. 누나, 정신 차려 봐.”
필립이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닉시를 흔들었다.
그의 구둣발에 밟힌 약들이 피와 섞여 더럽게 엉겨 붙었다.
“이게 대체…… 여기 부상자가 있다! 파엘, 카뮈! 지렛대로 쓸 만한 걸 들고 와!”
“네!”
병사 두세 명이 큰 쇠 파이프를 들고 와 샹들리에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제야 제 앞에 사람이 있다는 걸 자각한 닉시가 고갤 들었다.
그녀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클레망 아서 대령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향해 아주 잠깐 시선을 주었다. 돌멩이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모르는 사람이군. 닉시 소위. 여긴 군 관계자 외 출입이 금해져 있을 텐데.”
아주 익숙한. 전쟁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무감정한 시선.
“닉시 휴거 소위. 이번에 진압된 테러리스트 중 자네의 옛친구가 있었어. 자네는 파리에서 그자와 접선한 적이 있고 말이야.”
“…….”
“아,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그자와 한패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게다가 그 방화 사건은 내가 내 손으로 이미 종결시켜 버렸는데, 이제 와 번복하기엔 꼴이 우습지. 그 사건을 엮을 맘은 없네.”
“…….”
“굳이 그 사건을 엮지 않아도 자네는 감옥행일 거거든. 자네와 그 남자의 출신지가 같은 것과 여기에 등장한 시기가 같은 것. 회담이 이뤄지는 장소를 알고 있다는 것. 이미 연관성은 차고 넘치지.”
무거운 철근으로 이뤄진 샹들리에가 날카로운 소릴 내며 다른 곳으로 밀어졌다.
닉시는 황급히 벤자민의 몸을 껴안았다. 점점 꺼져 가는 맥박이 느껴졌다.
“하지만 난 자네가 감옥에 가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런 곳에 있기엔 자네의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대령이 한쪽 무릎을 꿇어 닉시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는 피가 튄 흰 장갑 낀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다행히 각국의 정상들과 우리 부대 중 누구도 죽지 않았어. 민간인의 피해가 조금 있긴 했지만, 피해 갈 여지는 충분해.”
순간 그녀의 입가에서 비소가 터져 나왔다. 닉시는 경멸스럽다는 듯한 눈으로 대령을 바라봤다.
“당신……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모르겠나? 자네는 아직 쓸 만해. 나는 여전히 자네의 가능성과 미래를 높게 사고 있단 말이야.”
“……누나.”
필립이 닉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대로 있다간 과다출혈로 죽을 거야.”
“죽어? 누가.”
닉시는 제 품에 안긴 남자를 바라보았다.
죽는다고?
벤자민이?
필립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갤 돌렸다.
“그러니까.”
동시에 대령은 내밀고 있는 손바닥을 뒤집어 그녀가 끌어안고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그 남자를 넘기게 닉시 소위.”
그녀는 머리가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가슴은 샹들리에 아래 깔린 벤자민을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세차게 뛰었다.
“자네가 이 사건을 빠져나가려면 자네를 대체할 다른 허수아비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끌어안고 있는 몸이 남은 시간을 재듯 점점 식어갔다.
* * *
그녀는 결국 벤자민을 필립의 손에 넘겨 주었다.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천천히 죽었을 테니까.
그 뒤로 닉시는 정신을 빼놓은 것처럼 멍하니 있었다.
그 모습이 오래전, 제 형이 죽고 난 이후의 모습과 비슷했기에 필립은 웬만하면 닉시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나라의 이미지가 걸린 중요한 문제였기에 사태는 금방 수습됐고, 시가지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였음에도 기사 하나 제대로 나지 않았다.
* * *
파리로 이송된 닉시 휴거에겐 독방에서 근신하라는 처분이 돌아왔다.
필립은 닉시를 독방으로 안내한 뒤, 테이블 옆에 종이 가방 하나를 내려놓았다.
“벤자민 씨 부상은 다행히 그렇게 크지 않았어. 머리를 몇 바늘 꿰맸고, 다른 곳은 괜찮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긴 하지만 뇌에는 이상 없다 했어.”
전부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닉시는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앉아 그저 멀뚱히 있었다.
필립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지금 아마 지하에 있는 독방에 갇혀 있을 거야.”
말이 지하에 있는 독방이지, 그곳은 범죄자를 처넣는 감옥에 가까웠다. 수술이 막 끝난 환자를 넣어 두기엔 열악한 곳.
그 말에 닉시가 고갤 들어 필립을 바라보았다.
“건드리는 일은 없을 거야. 아직은. 깨어나면 조사하란 지시가 떨어졌으니까, 아직은 괜찮아.”
“…….”
“하지만 닉시. 그 남자는 독일인이야. 그것도 테러 사실을 알았던 독일인.”
필립은 벤자민이 제가 있는 사단의 감시 조치가 들어갔을 때부터 그를 빼 올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수가 그에게 악조건으로 들어갔다. 출신지부터 군인이었던 과거,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것부터, 하필 엮인 사람이 닉시였다는 것.
“아무리 변론한다 해도, 빠져나가기 힘들 거야.”
“…….”
“……그러니까 그자를 무사히 내보내려면 조사가 시작되기 전에 그자를 석방해야 해.”
그렇게 방법을 하나하나 지워가다 보니, 남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어떻게?”
쭉 미동도 없던 닉시가 필립의 말을 듣곤 입을 열었다.
필립은 문 옆에 내려놓았던 종이 가방을 가져왔다.
그는 그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미안해, 누나.”
닉시의 군복이었다.
필립이 나간 뒤로도 닉시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문득 그녀는 자기가 왜 군인이 되었던지를 떠올렸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이 기억에서 쉽게 휘발되듯, 잘 떠오르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시기에 군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제각기 이유가 있었다.
나라와 시민들을 지킨다는 사명감, 이 한 몸 바쳐 평화를 일구겠다는 열의. 하다못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맞아. 날 절대 이길 수 없을 거라 해서였었지.”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 군인이 되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게 됐으면서 늘 그녀를 떠돌이 개처럼 봤던, 그녀를 절대 가족으로 인정하는 날은 없을 거라 했던, 늘 고지식하고 고고하게 굴어서 그녀에게 이상한 굴욕감을 주던 그녀의 영원한 라이벌.
노엘 휴거가 군인이어서 그녀는 군인이 되었다.
노엘 휴거.
그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군인보단 의사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 시기의 군인과 의사의 차이는 칼이 안쪽으로 향하냐 바깥으로 향하냐였다.
노엘 휴거는 명백하게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 했고, 조건 없이 이타적이며, 헌신적이었다. 성서에 나오는 선량한 사마리아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타인을 지키겠다’라는 신념 따라 의사 대신 군인을 선택한 남자기도 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그런 그의 꿈은 ‘굶어 죽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닉시는 그의 말을 듣곤 영웅 납셨다면서 비아냥거렸다.
그는 그 어느 순간에도 올곧았고, 반듯했으며, 양심적이었고, 단단했다.
닉시가 그만 보면 늘 이죽거리고 비꼬는 소릴 해도 그는 변하지 않았다.
변치 않는 것을 앞에 두고 있자니 변하게 되는 건 오히려 닉시 쪽이었다.
문득 그가 허무맹랑한 이상론에 가깝던 꿈을 아직도 꾸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걸 어떻게 실현할 건지. 실현할 방법은 있긴 한 건지 묻기도 했다.
‘대형 작물’이라는 제법 그럴싸한 연구 주제를 갖고 온 것을 보고 놀랍기도 했다.
닉시는 종이 가방 안에서 군복을 꺼내 입었다.
옷을 갈아입은 뒤, 닉시는 클레망 아서 대령이 있는 사령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함께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녀가 네 개의 특허를 따냈을 때도 그의 연구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어떻게 보면 6년 동안 한 연구 주제에 몰두하고 있는 셈인 건데, 그토록 오래 하나만 붙잡고 있을 수 있는 정신머리가 신기했다.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애써 보다가, 언젠가 정말 그의 꿈이 이뤄지게 된다면.
그땐 어쩌면 저 대쪽 같은 남자가 대단해 보일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그의 꿈을 팔기로 했다.
닉시는 사령실의 문을 열었다.
그곳엔 클레망 아서 대령이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마치 그녀가 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놀라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어서 오게. 여기서 보니 반갑군. 그래. 내게 할 말이라도 있나?”
“식량 자원으로 쓸 수 있는 식물을 급성장시키는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대뜸 알 수 없는 말을 꺼냈음에도 대령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대령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턱을 까닥였을 뿐.
“재배 기간은 최대 일주일. 모종 하나로 하루 50명의 식사를 해결할 만큼의 강낭콩을 생산해낼 수 있었습니다. 약물이나 방사선이 아니라 유전자 조작으로만 이뤄진 거라 인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자신이 일군 ‘연구’를 사과 한 알을 팔 듯 무감각하게 말하는 닉시의 말투는 아주 익숙해 보였다. 그걸 듣는 대령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가판대에 상품을 올리고 판돈을 주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모습.
그들이 서로의 이득만을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거래했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기간 대비 엄청난 효율이로군. 게다가 인체에 해가 없는 게 증명됐다는 건 즉시 식품으로 판매할 수 있다는 것이고…….”
“네.”
지금 닉시의 보고로 판단하자면 그녀가 성공했다고 하는 실험은 발표하는 즉시 노벨상 수상은 물론, 금방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어마어마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