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3_5
듣고 싶지 않았다.
지하 수감실의 긴 복도를 빠른 속도로 벗어났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누군가와 몸이 부딪혀도 멈추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본부를 벗어나 밖으로 뛰쳐나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얗게 흩어지는 숨. 밖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닉시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새하얀 눈밭을 가로질렀다.
눅눅하게 젖은 군화가 습기를 머금고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닉시는 익숙한 곳에 도착했다.
틀에 박힌 똑같은 모양의 지붕, 똑같은 크기의 집들이 나란히 일렬로 줄지어져 있는 곳.
평범하게 똑같은 모양의 집 중, 애매한 곳에 위치한 익숙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시시하고 지루한 버려진 집.
그녀가 이곳에 있을 때 사용했던 그녀의 집이었다.
닉시는 그 빈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쌓인 먼지들 사이로 서늘하기만 한 공기가 감돌았다.
“하아……. 하아…….”
차가운 벽에 기댔다.
한계까지 몰아붙인 숨이 떨려왔다.
닉시는 벽에 기대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대화였다. 하지만 차마 그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그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말일까 봐.
감당하지 못해서 제 안의 세상이 무너질까 봐.
온전히 받아내지 못할까 봐.
그가 그 말을 쏟아 내게 된 걸 후회하게 될까 봐.
그래서 도망쳤다.
그녀가 다시 지겹도록 머물러야 하는, 원래 있어야 했던 자리로.
닉시는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로 얼굴을 묻었다.
* * *
“내가 널 가족으로 인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닉시가 베른 휴거의 손에 이끌려 그의 양녀가 되기로 결정 난 뒤, 그의 집에서 처음 만나게 된 노엘 휴거는 그렇게 말했다.
“근데? 나도 가족 취급해 달라고 말한 적 없는데? 징그럽게.”
닉시는 코웃음치며 노엘을 노려봤다.
겨울 눈처럼 하얀 은발과 시린 푸른 눈을 가진 소년.
나이는 닉시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정도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래 어린애들에게서 느껴지는 산만함이나 활달함 따위가 없었다.
찬바람 쌩 부는 무표정에 딱딱하고 무뚝뚝한, 재미없는 소년. 닉시의 첫인상은 그랬다.
“네가 라텐 거리에서 약을 팔고 다녔단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이제 이 집에 들어온 이상, 넌 휴거라는 성에 걸맞은 행실을 하고 다녀야 해.”
“내가 여기 들어오고 싶다고 빌었나. 날 멋대로 데려온 건 그 아저씨라고. 약을 사고 싶으면 줄이나 설 것이지.”
닉시가 품속에서 약통을 들고 도발하듯 흔들자, 노엘은 닉시의 약통을 빼앗았다.
닉시는 즉각 노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뒷골목에서 도망치는 법만 배웠던 닉시가 군인 집안에서 어릴 적부터 호신술을 배웠던 노엘을 몸싸움으로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닉시는 그에게 제압돼, 바닥을 굴렀다.
“말했을 텐데. 네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진 몰라도 앞으론 아버지 이름에 먹칠할 짓 하지 말라고.”
노엘은 바닥에 넘어져 씩씩대는 닉시를 보며 약통을 제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니 이걸 네게 넘겨 주는 일도 없을 거야.”
닉시에게 그 약은 먹고 살 수단이자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먹이사슬 가장 낮은 곳에서 빌빌대던 걸 겨우 숨 쉬고 살 수 있을 만큼 끌어올려 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하하. 좆 까. 누구 맘대로? 내놔!”
눈이 뒤집힌 닉시가 다시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노엘은 털끝 하나 잡혀주지 않고 닉시를 유유히 피했다.
체력이 다한 닉시가 바닥에 엎어져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내놓으라고!”
“못 줘.”
“그럼 널 죽이고 뺏으면 되겠네. 내기할래? 내가 그걸 뺏어가나, 못 뺏어가나?”
“내기?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못 할 줄 알아?”
닉시는 노엘의 태연한 얼굴에 미친 듯이 화가 났다.
닉시가 다시 씩씩거리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노엘은 가뿐히 피하며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바닥에 엎어진 닉시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저와 별만 다를 것 없는 또래에게 당했다는 것과 자존심과 다름없는 약을 빼앗겼다는 것. 자신과는 다른 사람인 양 고고하게 구는 소년에게서 오는 기묘한 굴욕감.
“너…… 넌 내가 꼭 죽일 거야!”
닉시는 이를 갈며 외쳤다. 노엘은 태연하게 약을 위로 던졌다 받았다.
“할 수 있으면 해 보시든가.”
* * *
그 뒤로 닉시는 노엘을 마주칠 때마다 툭하면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노엘은 닉시의 일방적인 원수이자 굴복시키고 싶은 상대였다.
그러나 노엘은 늘 닉시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닉시가 모욕을 해도, 그가 아끼던 장식품을 부숴도 늘 딱딱하고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닉시를 더 열받게 했다.
그날도 닉시는 노엘을 골탕 먹이기 위해 그의 방문에 접착제를 발라 두었다.
하지만 걸리라는 노엘은 안 걸리고 지나가던 필립이 대신 걸렸다.
필립은 제 손에 끈적하게 묻은 접착제를 손수건으로 벅벅 닦으며 짜증을 냈다.
노엘과의 사이가 좋지 않으니, 당연히 그의 동생과도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너 진짜, 이딴 것 좀 하지 말라고!”
“너는 이렇게 짜증 내는데 노엘 휴거 그 녀석은 왜 안 내는 거지?”
그러자 필립이 인상을 팍 구겼다.
“당연한 걸 묻냐. 형은 너 같은 건 신경도 안 쓴다니까?”
“야 필립. 너네 형 정신이 좀 이상한 거 같다니까? 너는 이렇게 바로 반응이 오는데 쟤는 대체 왜 저래? 혹시 화낼 줄 몰라?”
“이상한 건 너야.”
“너가 뭐야? 휴거 아저씨가 누나라고 부르랬잖아.”
“미쳤냐? 아버지가 그러라 했어도, 난 절대 너 따윈 인정 못 해.”
누가 인정하라고 했던가.
닉시는 한 번도 그들에게 가족이라 인정하라고 한 적 없다. 먼저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던 건 저들이면서.
멋대로 단언하고, 멋대로 무시하고.
처음엔 노엘에게서 약을 빼앗기 위해 덤벼들었던 닉시였다.
그러나 뭘 해도 무감각한 소년의 대응에 시간이 지날수록 닉시의 목표는 점점 ‘그의 짜증스러운 표정을 보기’로 변해 갔다.
처음으로 그의 무뚝뚝한 표정에 금이 간 건, 그가 자주 물을 주던 마당의 백합 목을 모조리 꺾어 버린 날이었다.
이미 죽고 없는 소년의 어머니가 심어 놓은 꽃이라 했다.
노엘은 목이 잘린 백합꽃을 묵묵히 주워다가 화병에 꽂았다.
심상찮은 노엘의 분위기에 필립은 그의 눈치를 봤고, 닉시는 의기양양하게 노엘의 반응을 기다렸다.
어떠냐. 짜증 나지? 날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 나지?
닉시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노엘을 보았지만, 노엘은 그런 닉시를 바라보다가 꺾인 백합 한 송이를 닉시에게 건넸다.
“이렇게 하면 너는 내가 화낼 거라 생각했겠지.”
닉시는 한순간에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제발 나 좀 보라고 이렇게까지 해대는데, 내가 너한테 반응하지 않으니까 심통이 났을 거야. 그렇지?”
그는 그런 얼빠진 닉시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넌 네가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아니, 넌 떼쓰는 어린아이에 불과해.”
머리털 나고 난생처음 겪는 어린애 취급.
순간 닉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난 너한테 화가 나지 않아.”
노엘은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그동안 겪었던 수모와 모멸과는 또 다른 결의 수치심을 들게 했다.
제 행동과 생각이 한순간에 바보 같아지는 것.
악의와 폭력 없이 모든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법.
눈앞의 소년이 더 이상 골탕 먹여야 하는 대상이 아닌, 이겨 먹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
그렇게 닉시는 노엘 괴롭히기를 포기했다.
대신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애 취급을 한, 그를 이겨 먹기 위해 부단히 그의 꽁무니를 쫓았다.
그렇게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닉시는 노엘과 함께 리쎄(*고등학교) 과정에 진학하게 되었다.
화학, 공학 분야에서 보인 천재적인 재능 덕분이었다.
“형! 형은 짜증 나지도 않아? 말이 안 되잖아! 글도 제대로 못 쓰는데 형이랑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라니!”
필립이 인정 못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던 건 덤이었다.
입학서를 받은 닉시는 제일 먼저 노엘을 찾아가 그것을 자랑했다.
“어때. 두 살이나 어린 동생이랑 고등학교 생활을 하게 된 기분은!”
책상에 앉아 공부하던 노엘이 입을 열었다.
“추우니까 문 닫아.”
―쾅!
닉시는 문을 닫고 다시 그의 눈앞에 입학서류를 들이밀었다.
“어떠냐고! 열 받지? 초조하지? 분해 죽겠지?”
“아버지 서재 카펫에 누가 등불 기름을 쏟았던데.”
“으악! 아저씨가 알았어? 어? 들켰냐고!”
닉시는 노엘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노엘은 태연하게 “아니.”하고 대답했다. 닉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하지 노엘. 아저씨한테 들키면 끝장이야. 들키면 설교 두 시간은 기본이라고.”
“오랜만에 듣는다 생각하고 듣고 와.”
“나 이틀 전에도 들었거든?”
“그 정도면 오랜만 맞네.”
닉시의 시비가 사라지니 자연스레 부딪히는 일이 줄었고, 부딪히는 일이 줄어드니, 서로 대화는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 한집에 살면서 간섭은 하지 않는.
닉시가 굳이 먼저 건들러 오지 않으면 서로 전혀 엮일 일 없는 애매한 관계.
서로가 당연하게 남남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이 쌓이지 않는 사이.
그렇게 3년 뒤, 노엘과 닉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명문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베른 휴거는 둘에게 입학 축하 선물들을 건넸다. 고급스러운 만년필이었다.
“너희의 목숨은 너희만의 것이 아니다. 나라와 조국. 지켜야 하는 시민들의 것이다.”
베른 휴거가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닉시는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어떡하면 만년필을 비싸게 주고 팔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선물을 받고 나란히 방으로 돌아가던 복도에서 닉시는 베른 휴거의 말을 떠올리다 픽 웃었다.
“내가 무슨 사고를 쳐도 아저씨의 설교의 끝은 늘 저 말이더라? 학교에서 다른 멍청이들을 울렸다고 소환됐을 때도, 화약 실험 때문에 아저씨 수염을 태워 먹어도.”
사람은 신념을 가져야 한다. 너의 삶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너의 신념과 삶을 좀 더 좋은 곳에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다가 그렇게 소중히 여긴 삶을 남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라는 결론.
“늘 저 말로 끝나는 게 참 신기하다니까. 저번엔 ‘칠면조는 털 색이 더 까만게 맛있다’고 이야기하다가도 저 이야기가 나왔어.”
“아버지는 군인이시니까.”
“그게 뭔 상관이야?”
“군인은 조국과 시민을 위해서 제 목숨을 걸고 있으니까. 아버지는 평생 그런 신념으로 사셨으니, 우리도 그러길 바라는 거지.”
“뭔 소리야. 내 목숨은 내 거지.”
이윽고 각자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노엘은 퉁명스럽게 내뱉은 닉시의 말에 흘긋 닉시를 바라봤다.
“사관학교에 다니게 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아버지는 네가 군인이 될 거라 생각하시던 모양인데.”
“내가 넌 줄 알아? 돈 준다 해서 간 거야. 군인이 될 맘은 죽어도 없어.”
나 하나 살기도 바쁜데, 누굴 위해서 희생한다? 그건 닉시의 인생에 있어서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일이었다.
방에 들어가기 전, 노엘이 닉시를 불러 세웠다.
“닉시, 넌 희생을 뭐라고 생각해.”
“개죽음.”
닉시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럼 네 눈엔 아버지가 개죽음 희망자로 보이겠네.”
“그런 셈이지. 좀 덜 희망하셨으면 좋겠어. 이왕 입양됐는데 또 고아 되긴 싫으니까.”
노엘은 닉시의 대답을 곱씹듯 몇 번 중얼거리다 피식 웃었다.
“그럼 나도 똑같겠네. 군인이 될 테니.”
“다를 바 없지.”
감정의 고저가 거의 없는 편에 속하는 노엘이 웃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닉시는 그의 미소에 문득 의문이 생겼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웃음이 나왔던 걸까. 애초에 저건 웃겨서 나온 웃음이 맞을까.
“그래. 개죽음이라.”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 말처럼, 늘 무표정했다가 드물게 보게 된 그의 웃는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이 묻어나왔다.
닉시는 그런 노엘의 낯선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왠지 그의 맨 얼굴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닉시.”
“왜.”
“잘 자.”
노엘은 그렇게 말하고 방문을 닫았다.
그렇게 둘은 같은 대학에서 다른 분야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약학과 화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닉시는 화학을, 어릴 적부터 군인이 되려 했던 노엘은 군사학을.
주변의 기대대로 닉시는 입학하자마자 그 해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을 휩쓸었다.
노벨상 후보의 등장, 한 세기에 날까 말까 한 천재. 마리 퀴리의 재림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도 달고 다녔다.
닉시는 단 1년 만에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학습한 뒤, 재미없다고 전공을 전향했다.
군의학이었다.
그녀가 군의학을 전공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론 그녀가 다니는 학교의 군의학 과정과 군사학에 과정이 연계돼 있었기에, 닉시의 라이벌 노엘 휴거가 배우는 학문을 익힐 수 있었고, 두 번째론 노엘 휴거의 방 안에서 에 대한 연구 논문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닉시는 곧장 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식물 세포를 조작하는 것과 인간 세포를 조작하는 것. 둘 중 뭐가 더 어려운지는 뻔하지.”
이거면 노엘 휴거를 이겼다고 할 수 있겠지.
이번에야말로 노엘 휴거의 코를 눌러주리라.
노엘은 닉시가 저와 같은 학과를 선택했음을 달갑지 않아 하면서도, 그래도 같은 성씨를 가졌다고 닉시를 챙겼다.
그 모습이 ‘가족으로 인정하는 일 없을 거라’ 선언한 사람치고, 제법 오라비다워서 닉시는 매번 닭살이 돋았다.
그의 곁엔 사람이 많았다.
저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뭐가 좋다고 사람들이 들러붙는진 알 수 없었다.
미개한 사람들은 천재의 두뇌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곁에 사람을 두지 않았던 닉시에겐 제법 신기한 광경이었다.
노엘은 그들에게 제 후배라며 닉시를 소개했다.
남인 척하기에 닉시도 적당히 성을 숨기고 선배 대접해 주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았던 그 덕분에 닉시도 사람들과 부대끼게 되었다.
물론 사회성이 0에 수렴하는 닉시가 한순간에 사람들 사이에 끼게 되었다고 사회성이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
닉시는 하루가 멀다고 사고를 치고 싸워댔고, 뒷수습은 노엘의 몫이었다.
그날도 동기와 사소한 말다툼이 있던 날이었다.
“아서 말로는 네가 갑자기 시비를 걸었다고 하던데.”
“전 싸우려고 그런 게 아니라고요. 그 자식 말을 들어보니까 이론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릴 지껄이잖아요. 난 있는 사실을 말했던 것뿐인데, 그 새끼가 ‘말 같잖은 소리 하지 마. 그럴 거면 차라리 입 다물고 있어’라더라고요? 그게 더 도움 될 거라면서.”
닉시는 노엘의 동기인 아서의 말을 흉내 내듯 입술을 삐죽였다.
작열하는 여름 태양 아래, 말다툼으로 괜히 열을 낸 닉시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기 시작했다.
“이래서 멍청한 놈들이랑 이야기하기 싫단 거야. 논리적으로 말을 못 하면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지? 그래선 바나나 뺏긴 원숭이랑 다를 게 뭐야. 본인들이 이해 못 하는 걸 왜 나한테 시비인지. 천재를 향한 열등한 시기. 뭐 이런 건가요, 선배?”
무기물을 다뤘던 화학과, 유기물을 다루는 의학은 뿌리는 비슷할지 몰라도 결국 ‘사람’이 엮인 학문이라는 데 큰 차이가 있었다.
닉시와 주변이 삐걱거리는 것엔 그 이유가 컸다. 그녀가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것.
그녀에게 있어서 ‘타인의 생각’은 그 어느 수식과 공식들보다 어려웠다.
사람의 생각은 정해진 답이 없었으며, 늘 감정과 사정, 상황에 따라 쉽게 흔들리고 변했다.
“들어 봐요, 선배. 성대를 적출하지 않으면 죽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성대를 적출해야지. 그 사람이 성악 하는 사람이라는 이유가 왜 성대를 적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되는 거죠? 죽는 것보다 그게 더 중요한가?”
“그 사람한텐 목소리가 목숨보다 더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잖아.”
“죽어 버리면 목소리가 무슨 소용인데요. 성대가 남아서 오페라라도 해 준다나?”
닉시가 여전히 씩씩대자 노엘은 닉시에게 손짓했다. 그는 해바라기꽃들 아래 서 있었다.
닉시는 그가 손짓한 곳에 들어가 섰다. 멀리 있을 땐 몰랐는데 그곳엔 작은 그늘이 있었다.
작은 그늘도 그늘이라고, 머리가 조금씩 식었다.
닉시의 화가 조금 가라앉은 것 같자, 노엘이 입을 열었다.
“넌 나를 이기고 싶어서 전공을 전향한 거라 했잖아.”
“그랬죠.”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닉시. 넌 날 영원히 못 이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