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3_7
“넌…… 내가 하는 짓이…… 전부 이해가 안 간다고 했지.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 노엘에게 닉시는 인정하기 싫은 자였다.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는 아이라며 데려온 동생.
그는 알고 있었다. 닉시가 실은 뒷골목에서 약이나 팔고 다녔던 영악한 소녀라는 걸.
소년의 올곧은 눈에 닉시는 약해 보이지도, 지켜야 하는 존재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본인이 누군가를 위한 숭고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해도, 그 아이를 위해서만큼은 목숨을 내걸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지켜야 하는 가족이라는 제 울타리에서, 그녀의 자리는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존경했고, 아버지의 말을 늘 제 신념처럼 여기며 살았다.
군인이 아닌 제 삶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아버지가 버릇처럼 말하는 ‘너희의 목숨은 너희만의 것이 아니다. 나라와 조국. 지켜야 하는 시민들의 것이다.’라는 말.
그는 그것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그 말에 약간의 의문을 갖게 되었다.
내 목숨은 언젠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거라면, 희생을 위해 존재하는 목숨이라면.
대체 내 삶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그 희생엔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닉시, 넌 희생을 뭐라고 생각해.] [개죽음.]그 신념은 닉시의 태연한 대답 앞에 부정당했다.
그동안 쌓아 왔던 의문에 작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그래. 희생이란 건, 개죽음이 맞을지도 모른다. 죽는 것에 아무리 의미를 부여해도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
희생에 아무리 거창하고 그럴싸한 훈장을 달아 준다 해도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진 않는다.
그랬기에 그는 더 이상 희생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다만, 살기 위해 싸웠다.
하지만.
지키고 싶지 않은. 약하지도 않은. 심지어 인간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도무지 정들지 않는 제 동생의 머리 위로 콘크리트가 떨어지는 걸 본 순간.
그는 개죽음이 뻔한 길을 택했다.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닉시.”
“……노엘. 눈 좀 떠 봐요. 제발.”
제 삶에 의미 같은 건 없어도 된다.
제 희생에 숭고함 같은 건 없어도 됐다.
왜냐하면, 닉시는 이미 그가 지켜야 하는 소중한 사람. 가족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로 인해 네가 살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이었다. 이 희생에 한치의 후회도 없었다.
노엘은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절대 인정할 수 없었던 말.
절대 돌려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
“그 안에 흰색 알약이 있을 거야……. 내가 먹으려고 아껴 뒀던 건데, 특별히 너 준다……. 먹어.”
마지막이 돼서야 그 굳건했던 생각이 무너져 내렸다.
“닉시. 네가 이겼어.”
사랑한다, 닉시.
폭음 때문에 귀가 먹먹한 와중에도 노엘의 목소리만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닉시는 제 손에 쥐어지는 약통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의 선명한 미소 속의 ‘사랑한다’는 이해 못 할 말을 가슴에 담았다.
가.
먹고 뛰어.
그렇게 닉시는 그를 등지고 도망쳤다.
여전히 사람의 마음 같은 건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해 못 할 그 말. 그의 마음이 담긴 사랑한단 말 한마디가 제 가슴을 짓눌러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도망치면서 그녀는 하하하 웃으며 울었다.
엉망진창인 머릿속, 그의 마지막 말들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노엘. 네 목숨의 가치가 나와 같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시궁창에 살던 나와 고귀한 신념을 가진 네가.
너는 나보다 무거워. 네가 내게 사랑한다 한 네 마음이 네 존재를 한없이 무겁게 해.
그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닉시는 그가 어떤 마음으로 절 사랑한다 한 건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다.
그래서.
‘왜 사랑, 사랑. 노래를 부르냐고? 왜 사랑에 대해서 알고 싶고 궁금하냐고?’
그야. 그날의 의미를 알고 싶었으니까.
그날, 마지막 말이 왜 하필 저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랑한단 말이었는지.
그걸 이해하면, 그때 자신을 대신해 죽은 그의 마음이 어땠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 해서.
당신은 나를 살리고 죽어도 괜찮았을까.
당신은 보답받지 못할 사랑에 후회하지 않았을까.
사랑을 알면 알 수 있을까.
사람이 되면 알 수 있을까.
닉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상황에서 언제 침대까지 기어들어 와 잠을 잤던 거지.
닉시는 으슬으슬한 팔뚝을 몇 번 쓸어내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침대 옆에 노엘이 앉아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 이거, 꿈이로구나.
서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닉시는 그의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을 바라봤다. 찬찬히. 눈에 담아내듯.
“…….”
“…….”
“……그동안 한 번도 나와 준 적 없으면서.”
닉시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잠긴 목소리가 눅눅했다.
“왜 이제 와.”
그녀의 꿈엔 늘 죽은 동료들이 나왔다.
그들은 안부 인사를 전하듯 지겹도록 그녀를 찾아왔다.
반면,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들은 꿈에 나오지 않았다.
노엘 휴거는 그녀의 꿈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왜 왔어……. 대체 왜.”
그래서 마음 한구석에선 혹시나 그가 살아 있지 않을까 했다. 그가 죽었을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어딘가 멀리 가버려서 당장 볼 수 없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를 두고 도망치던 그날처럼 가슴이 짓눌려 터져 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었다.
“이제 그만 불러 닉시.”
그러니까 이건 꿈이다. 지금 그가 말을 하는 것도 전부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온 환상이다.
“너도 알고 있잖아. 난 죽고 없다는 거.”
“왜, 왜 그런 말을 해. 듣기 싫어.”
노엘이 아니다.
그는 그날, 진짜 죽은 것이다.
노엘은 희미하게 웃으며 닉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얼굴이 오래전 제가 아끼던 꽃밭을 뭉개 버린 꼬맹이한테 꽃 한 송이를 건넬 때의 얼굴과 같았다.
제 머릿속의 그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녀도, 그때와 같이 달라진 것 하나 없었다.
“노엘.”
여전히 저는 당신을 이길 수 없다.
“넌 틀렸어. 난 결국 사람이 되지 못했어. 넌, 넌. 결국 보답 받지 못할 사랑을 준 거야.”
닉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넌 괜찮은 거야?”
보답 받지 못할 사랑 같은 걸 해도? 네 목숨을 나 같은 사람에게 함부로 바쳤는데도?
닉시는 말했다.
눈앞의 환상이 자신이 만들어 낸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꿈이 만들어 낸 그가 결코 대답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넌 나한테 사랑한다 말한 걸 후회하지 않겠어?”
조용히 직선을 긋고 있던 노엘의 입이 살풋 벌어졌다.
“닉시.”
“왜.”
“잘 자.”
그렇게 닉시는 눈을 떴다.
그녀는 어김없이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몽유병에서 깨어나면 늘 서 있던 장소. 오지 않을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녀만의 작은 공간.
닉시는 손등으로 뺨을 훑어내렸다.
“그게 뭐야. 뭐냐구…….”
그는 끝까지 제게 정답을 말해 주지 않았다.
꿈에서라도 그럴싸한 대답을 듣고 마음 편해지고 싶었는데, 그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노엘은 죽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제 동생을 살리고 죽었다.
그때, 닉시는 처음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 깊은 후회. 지워지지 않는 슬픔. 저에게 지옥을 알려 주고 혼자 가 버린 그녀의 소중했던 사람.
그는 닉시에게 인간성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그녀를 지옥에 처박았다.
알고 싶지도 않았던 감정을 알아 버려서, 평생을 원인 모를 통증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문득 닉시는 창밖에 누군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을 비볐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꿈이 아니었다.
“설마…….”
그녀는 다급히 문을 열었다.
그곳엔 새하얀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벤자민이 있었다.
“너…….”
그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새빨갛게 얼어붙은 맨발로.
“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벤자민은 그녀의 집 앞에 걸어둔 등불을 가리켰다.
“네가 밝은 등불을 걸어둔다 했잖아. 멀리서 봐도 내가 알 수 있게.”
까마득한 어둠 속. 그녀의 집 마당만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어두운 밤에 누가 누구 집인 줄 어떻게 알고.] [글쎄?] [그럼 우리 집은 엄청나게 밝은 등불을 걸어둘게. 멀리서 봐도 네가 알 수 있을 만큼.]“혼자만 이렇게 밝은데, 모를 수가 없지.”
그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머리칼을 털었다.
닉시가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빨갛게 얼어붙은 손을 들어 닉시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왜 아직 깨 있어.”
“자다 깬 거야.”
“몽유병은 그만뒀다며.”
“나도 몰라. 그냥 그런 꿈을 꾸는 걸 어떡해. 근데 너 여긴 대체 왜…….”
그는 약간 곤란하단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가만히 보니 벤자민은 등 뒤에 작은 종이 가방 같은 것을 감추고 있었다.
닉시가 그건 뭐냐 묻는 듯 얼굴을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그것을 닉시에게 내밀었다.
“……넌 미신 같은 건 안 믿는다고 했지만, 넌 여러모로 유령들이 잘 찾아올 것 같으니까. 근데 이미 늦었나…….”
그래서 그녀의 집 앞에 몰래 두고 가려고 했던 것.
지금이 마지막 만남이 된다면, 그녀에게 전해 주고 싶었던 것.
벤자민은 종이봉투 안에서 뭔가를 꺼내 닉시에게 건네주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해바라기 그림이었다.
아직 물감도 채 마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 캄캄한 지하에 있으면서 그렸던 게 틀림없었다.
닉시는 어이없게도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이 풋 튀어나왔다.
“바보야. 겨우 내가 악몽 꾸는 게 싫어서 이 눈밭을 헤치고 온 거야?”
“……그런 셈이지.”
동시에 눈물이 났다.
“해바라기도 싫어하면서.”
“싫긴 한데, 이젠 좀 익숙해졌어.”
“보기만 해도 짜증 난다면서.”
“이젠 아냐.”
겨우 그거 하나. 고작 그거 하나.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에, 고작 찾아와서 하는 말이 원망도 불평도 아니고 고작 악몽이나 꾸지 말라는 투박한 인사라니.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캔버스 속에 담긴 별거 아닌 해바라기 한 송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제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이 작은 그림 속에 담긴 그의 마음이 얼마나 클지, 그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해. 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어째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걸까.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넌 정말 괜찮은 거야? 보답받지 못할 사랑 같은 걸 해도?”
그런 비효율적이고 복잡한 걸 이해해야 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라면.
“네 목숨을 나 같은 사람에게 함부로 바쳤는데도?”
고작 악몽이나 꾸지 말라고 꽃 한 송이를 품에 안은 채 맨발로 눈을 헤치고 온 바보 같은 마음이 사랑이라면.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한 걸, 후회하지 않겠어?”
닉시는 막연했던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 뭉근한 감정과 닮은 여러 가지 것들이 함께 떠올랐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을 조여 오는 것.
죄책감, 슬픔, 공허함.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성이라는 이름.
문 앞에 걸어 둔 등불이 은은하게 빛났다.
소리 없이 쌓여 가는 눈을 등지고, 벤자민은 닉시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데운 숨이 오가고, 그의 입술이 차가워진 그녀의 뺨에 짧게 내려앉았다.
“……후회야 하겠지.”
“…….”
“아마 네 맘이 나와 같은 무게가 아니란 것에 답답하기도 하겠지.”
벤자민은 닉시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눈물범벅인 얼굴과 빨개진 콧잔등. 우는 소리 내지 않으려고 꾹 다문 입술. 산타에게 선물을 뺏긴 어린아이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래서 너는 사랑스러워. 나는 그런 너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야.”
그가 결국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보곤 미소 지었다.
벤자민은 소매를 끌어당겨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닉시는 사랑을 말하면서 평소와 다름없는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필연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이 남자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되겠구나.
이걸 알기 위해 몰라도 될 고통도 함께 배우게 되겠구나.
그럼 만약에 지금, 이 순간이 그와의 마지막이라면.
이후에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날을 떠올렸다.
자신을 버리고 가라는 선택을 주게 된 그는.
자신이 죽을 걸 알고 있었던 그는.
슬픈 말이나 어쭙잖은 위로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이라고 처절하게 울부짖고 싶지도, 과거에 있었던 일을 끄집어내며 마지막이니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앞으로도 행복하기를. 좋은 꿈을 꾸기를. 따뜻하고 평화로운 하루가 되기를. 늘 그런 안식이 네게 있기를.
그리고 그 길고 긴 이야기를 사랑이라는 단어로 함축할 수 있다면.
“벤자민.”
“응.”
“아직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사랑이란 걸 조금이라도, 아주 약간이라도 알게 될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내가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닉시는 이제야 노엘의 마지막 인사가 사랑한다는 말이었던 걸,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첫사랑은 너였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