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4
Chapter 10. 오베르의 들판
열두 시 종이 치면 오베르로 돌아가야 했던 벤자민은 호박 마차 대신 제키의 지프 차를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
닉시는 그에게 곧 돌아가겠단 막연한 약속을 했고, 그는 기다리겠노라 말했다.
다음날. 닉시는 날이 밝자마자 클레망 아서 대령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클레망 아서 대령은 제 앞에 내민 종이 한 장을 바라봤다.
닉시의 열다섯 번째 사직서였다.
“이게 뭔가?”
“보시는 대로요.”
“어제는 여기 남는 걸로 결심했던 것 같은데.”
하루 만에 다시 손바닥 뒤집듯 말이 바뀌었다. 변덕이 죽 끓는 건 닉시 휴거의 특징이었으니 알 만도 했지만, 이번엔 평소보다 상황이 진지해 보였다.
“자네가 사직서를 직접 들고 온 건 처음이군.”
군대는, 정확히 클레망 아서 대령은 닉시 휴거를 순순히 전역시켜 줄 생각이 없었다.
전쟁은 끝난 시점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으며, 전쟁을 겪고도 신체 멀쩡하고, 정신이 건강했다.
살아 있는 전쟁 영웅이었니, 가만히 자리에 앉혀 두기만 해도 군 내 사기에도 영향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 수중에 진행 중인 연구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것도 발표만 했다 하면 어마어마한 돈을 끌어올 수 있는 연구.
그녀는 클레망 아서 대령에게 가장 잘 만들어진 마스코트였으며, 성공이 보장된 복권이었다.
그러니 그가 닉시 휴거의 사직서를 순순히 수리해 줄 리 없었다.
그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령. 저 아무래도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뭐?”
아서 대령은 그녀의 뜬금없는 말에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눈을 가늘게 떴다.
“정신에 문제라고?”
“네. 죽은 동료들이 찾아옵니다. 저번엔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그 녀석들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돌아다녔다네요. 그래서 요즘은 침대에 끈을 달아서 사지를 결박하고 잡니다. 하하. 이러다가 갑자기 총 들고 다 죽어라, 난리 치면 어떡하려나 모르겠네.”
마지막 말은 거의 협박조였다. 닉시는 말을 마치곤 태연하게 차를 홀짝였다.
“그래서 전역하려고 합니다, 대령.”
“역시 그게 목적이었군.”
멀쩡하지 않은 닉시 휴거는 불발탄이나 다름없었다.
클레망 아서 대령은 그녀를 회유할 만한 것들을 떠올리며 머리를 짚었다.
“자네가 제정신이 아니란 건 진작에 알고는 있었어.”
“얼마나 제정신 아닌지 보여드릴까요?”
“이미 충분히 봐왔지. 치료받고 돌아올 생각은?”
“제가 치료받아서 괜찮아질 사람이었으면, 진작 전두엽 절제술부터 했겠죠. 동료들이 네 머리 제정신 아니니, 정신 좀 차리란 말을 7년째 하고 있는데요.
고집 센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대령은 쉽지 않은 줄다리기가 될 것을 직감했다.
“전역한다는 말의 뜻이 뭔지 알곤 하는 건가?”
“제가 사직서를 열다섯 번이나 냈는데 그걸 모르겠습니까?”
“진지하게 듣게.”
닉시가 이 시점에서 이곳을 박차고 나가는 것.
그건 그동안 개고생하면서 살아남았던 과거와 그녀가 여태껏 쌓아 올린 업적, 성공이 보장된 미래를 한꺼번에 걷어차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타산이 맞지 않는, 정신 나간 짓.
동시에 그가 봐왔던 닉시 휴거에게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자네가 진행 중이던 연구는.”
“포기해야죠.”
“하아…… 그곳에 투자된 금액이 얼만데 그걸 그렇게 쉽게…….”
대령이 인상을 쓰든 말든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대령은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죠. 저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세상에서 굴러왔고, 그걸 진리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으니까.
“그래서 이건 거래예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닉시는 테이블 위에 상자 하나를 올려뒀다.
“제 자존심을 팔러 왔어요.”
“뭐라고?”
닉시 휴거의 서명과 도장이 찍혀 있는 상자.
그 안엔 그녀의 이름이 빼곡히 싸인 돼 있는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이게 뭐냐는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대령에게 닉시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동안 발표한 연구의 특허권, 제가 만든 약품의 상표권. 전부 포기할게요. 다 처분하면 투자금을 충분히 회수하고도 남을 거예요. 제가 어지간히 천재였어야 말이죠.”
상상치도 못한 폭탄 발언이었다. 그냥 은퇴도 아니고, 무려 쌓아 올린 모든 걸 내버리겠다는 말.
그녀의 발언은 앞으로의 빛나는 미래를 걷어차는 것도 모자라, 과거의 영광까지마저 가치 없게 처분해 버리는 짓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다가오게 될 미래임에도 굳이 가장 손해 보는 길을 선택하는 것.
“대체 왜…… 난 자네의 선택이 이해되지 않아. 자네가 원했던 삶 아닌가. 자네의 목숨을 바치면서 평생에 걸쳐 이룩한 길을 이제 와 포기한다고?”
그녀였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
“하아, 대체 왜 이런 멍청한 짓을……. 그 선택에 후회 안 할 자신 있나?”
“하하. 자신 없어요. 아마 이틀 뒤에는 땅을 치고 후회할걸요.”
닉시가 찻잔을 내려놨다.
그녀는 언젠가 캄캄한 시궁창에 앉아 천장의 틈 사이로 하늘을 봤던 시간을 떠올렸다.
빛 한줄기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던 어린 시절. 가장 가진 것 없고 무력했던 때.
문득 자존심밖에 없던 과거가 속삭였다.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걸 포기한다고 네 속의 시궁창이 평화로운 낙원이 될 것 같아? 잘 들어. 너를 여태껏 지켜주고 있었던 것은 과거야.
겁이 없고, 도덕성이 결여됐으며, 타인의 감정에 둔감한 것. 비정상적이었기 때문에 가장 정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과거의 자신.
그걸 포기해도 괜찮겠어?
“괜찮지 않을 거예요. 쌓아 올린 걸 포기한다고 하루아침에 잊거나, 편해지지도 않을 걸 알고요. 어쩌면 죽도록 괴로워 질지도……”
[후회할 거야. 네가 뭔 짓을 한 건지 알게 되면 죽도록 괴로워질 거라고.]“아니, 죽도록 괴로워지겠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짓을 하고, 몰라도 될 걸 알겠다고 해버렸으니까.”
네가 여태껏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포기하면 너에겐 뭐가 남아 있을 것 같아?
뭐가 널 지켜줄 것 같아?
그녀는 가만히 마음속 깊이 묻어둔 상자를 끄집어냈다.
마음 한구석을 흐리게 했던 모든 것들을 쉽게 잊어버리려고 만들어 둔 그녀만의 잊어버리기 상자.
이 상자를 열어두면 아마도 매일 밤 지나간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고, 영문 모를 그리움에 밤을 지새우게 되고, 함께 했던 과거를 수없이 되새기면서, 손 아래 스러진 것들을 자책하다가,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잊을 수 없게 될 터였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무의미한 희생. 그야말로 안 해도 될 짓거리.
수지타산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하는 것. 이성과 논리를 마비시키는 눈먼 감정.
하지만.
[후회할 선택을 하는 거야.]결국 그조차 사랑하게 되겠지.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셨다.
이윽고 그녀는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처럼 아주 해맑게 웃었다.
“미친 짓을 하는 건, 제 특기니까요.”
그 말을 들은 아서 대령조차 저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멍하니 있었다.
그녀는 문득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는 듯, 제법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실은 제가 사랑이란 걸 시작해 보려고 하거든요.”
“사랑?”
“근데 이곳이 계속 걸리적거려서요. 여길 없애긴 힘드니, 제가 사라지는 게 빠르겠더라구요.”
“허어…….”
“누구는 사랑 때문에 나라도 팔고, 목숨도 버리는데. 그동안 모아놨던 재산을 팔아서 사랑을 얻는 거면 싸게 먹히는 거죠.”
“고작 그런 것 때문이라고?”
한참을 가만히 있던 대령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나갔다는 게 사실이었군. 닉시 휴거 소령.”
그것도 아주 단단히 나갔어. 대령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닉시의 시선엔 조금의 거짓도 담겨 있지 않았다. 방금 한 말도 그저 여길 박차고 나가기 위해 둘러댄 말이 아니었고, 정신이 나갔다는 말도, 모든 걸 포기하겠다는 말도 진심이었다.
대령은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잡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돈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걸 저렇게 포기해 버리면 더는 잡을 만한 여지가 없었다.
“닉시 휴거 소령.”
“네.”
“난 미술품을 좋아해.”
“아주 잘 알고 있죠. 그것 때문에 제가 고생 좀 했거든요.”
“그 이유를 아나?”
알리가? 닉시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갤 저었다. 대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술품엔 만드는 사람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담고 있거든.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또 그만큼 이상에 가깝게 만들어진 거지.”
불필요한 것은 지우고. 필요한 것들만 갖추고 있는, 가장 완벽한 형태.
반면에 현실의 것들은 시시하고 평범했다.
주변 환경에 늘 변하는 것들.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인간성을 가지고 무너지는.
“사랑 같은 걸 하겠다고 성공이 보장된 인생을 걷어차는 누구처럼.”
대령은 사직서를 손에 들곤 뒤돌았다.
“꺼져 버려. 내가 필요한 건, 전쟁을 겪고도 미치지 않은 또라이지, 시시해진 자네에겐 볼일 없어.”
허가가 떨어졌다.
닉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경례 대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령은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닉시는 상관없었다.
문밖으로 나가는 닉시의 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경쾌했다.
* * *
닉시는 조촐한 가방 하나만 들고 기차역에 도착했다.
“좀 더 있다 가지.”
“됐어. 집을 오래 비웠다간 쓸쓸해 죽을 사람들이 있거든.”
그녀를 마중하러 온 필립과 제키는 발랄하게 뛰어가는 닉시를 바라보며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닉시가 정말 전역에 성공한 뒤, 닉시는 본인 사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그것을 전부 부대에 기증했다.
그녀의 전역 소식에 이미 놀랐던 부대는, 그녀의 모든 재산과 특허권들의 소거 소식을 듣고 두 번 놀라게 됐다.
돈에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녀가 암흑가에서 빚을 졌다가 우리 부대를 헐값으로 팔아넘기려는 것이다, 등. 한참 동안 그녀의 전역과 기부금에 대해 떠들었다.
결과적으로 파리에 남겨 둔 모든 흔적을 처리한 닉시는 팔려고 했던 노엘의 연구 자료 하나와 어디서 사 온 건지 모를 해바라기 그림 하나만 덜렁 가지고 오베르로 돌아가기로 했다.
“너희도 나중에 놀러 와. 미리 얘기하면 내가 마을을 축제 분위기로 꾸며 놔줄게. 그러니까 저번처럼 갑자기 등장하지 말고.”
“우리도 바쁜 몸이거든. 누가 거하게 사고 치는 바람에 사방에서 난리야.”
제키가 앓는 소릴 했다. 닉시는 씩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필립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닉시의 짐가방을 돌려주었다.
“일이 마무리되면 놀러 갈게, 닉.”
“그래.”
“달링. 나도 은퇴하고 네 옆집에나 살아볼까?”
“귀농 만만하게 보면 큰코다친다?”
기다리고 있던 기차에서 큰 기적소리가 울렸다. 이크, 닉시가 짐가방을 주워 들고 냉큼 기차 위에 올라탔다.
닉시는 문에 매달린 채, 필립과 제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심해서 가.”
“너희도!”
다음에 또 만나자는 인사를 건넸다.
그러겠다는 인사가 되돌아왔다.
그렇게 기차가 출발했다.
닉시는 기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저를 바라보는 둘을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 * *
파리에서 먼저 돌아온 벤자민은 집에서 깊은 잠을 자고 나온 뒤, 라울의 바에서 점심을 먹고, 이장과 소소한 잡담을 나눴다.
마을 사람들에게 늦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연말은 함께 즐겁게 보내자는 약속을 하고, 평범한 오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들판으로 나왔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닉시는 해가 질 무렵 오베르에 도착할 것이다.
마중 같은 건 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나와 있고 싶었다.
꼭 돌아가겠다고. 돌아가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 게 있다면서 제 머리를 쓰다듬었던 밤을 떠올렸다.
거짓말과 허풍이 일상인 그녀였다.
그러나 그땐 그도 저도 모르게 고갤 끄덕였었다.
기다리는 건 싫지만. 기어이 그러겠노라고.
그래서 약속한 대로 그녀를 기다리기로 했다.
―솨아아.
들판은 추운 겨울 날씨 속에서도 옅은 갈색이었다.
사방에 눈이 쌓이고, 낙엽이 져서, 빈 나뭇가지들이 황량해도 이 들판만큼은 늘 변함이 없었다.
그 옛날. 언젠가 이렇게 들판 한가운데 서서 죽을 날을 기다렸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여전했고, 이 들판도, 오베르도 여전했다.
다만 조금씩 무뎌져 갔다.
그때의 공기. 흐린 시야로 눈에 담았던 풍경.
이곳이 생애 마지막이 되길 바라며, 하염없이 시간을 죽이던 그때의 기억이. 감정이. 손의 환상통이.
영원할 것만 같았던 것들이 무뎌져 갔다.
시야를 찬란하고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에 벤자민이 고갤 들었다.
붉게 타오르는 석양에 맞춰, 갈색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갔다.
그 끝에, 그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서 있었다.
“벤자민!”
찬란한 황금빛. 붉게 타오르는 그의 태양.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벤자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오베르의 저녁놀이 저물어 갔다.
오베르의 들판.
“닉시.”
그의 마지막이 될 곳이었다.
完
오베르의 들판 5권
총은 로맨스판타지 소설
전자책 발행 : 2023년 7월 18일
지은이 : 총은
발행인 : 고영토
발행처 : 콘텐츠랩블루-세레니티
투 고 : [email protected]
정 가 : 3,000원
ISBN : 979-11-6968-641-9 05810
Ⓒ 총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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