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5
외전 1. 12/31일 11:34 pm
바의 바깥으로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잔들끼리 부딪치는 소리, 따뜻한 실내 온도에 맞춰 끈적하게 녹아 버린 아이스크림. 적당히 취한 사람들이 내뱉는 싱거운 맛의 농담들.
캄캄한 하늘. 술기운이 무르익어 가는 한밤중.
하하. 호탕하게 웃는 목소리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어라? 닉시랑 벤자민 씨는 어디 갔어요?
글쎄요, 아까 뒷문으로 나가는 건 봤는데.
―끼익.
뒷문이 열렸다. 뒷문 밖으론 꾸밈없는 시골길과 양목장의 울타리가 보였다.
그것 외엔 특별할 건 없었다. 라울이 가꾸는 토마토, 양상추 화단. 다리 한쪽이 부러진 의자. 와인 잔을 넣어 두는 작은 캐비닛.
“흐음.”
길버트가 의문 섞인 숨소리를 내뱉으며 문을 닫았다.
―끼익.
비티, 아무도 없는데요?
열린 창문 너머로 작은 소음들이 들려왔다. 바 안의 모든 소리가 한곳에 뭉쳐,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요? 그럼 술 깨려고 잠시 산책이라도 간 거 아닐까요?
아무래도 제 생각에는 술값을 안 내려고 도망친 것 같은데.
어머나. 그럼 큰일인데요? 빨리 잡으러 가요!
―달그락.
동시에 구석에 있던 캐비닛이 작게 덜그럭거렸다.
“쉿.”
닉시는 손으로 벤자민의 입을 막으며 속삭였다. 벤자민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제 상체에 몸을 붙여 오는 닉시를 바라봤다.
“내가 술값을 안 내려고 도망친 거라니. 평소에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어.”
시끄러운 바. 그곳의 뒷문, 와인 잔을 보관하는 작고 좁은 캐비닛. 그곳엔 닉시와 벤자민이 구겨져 있었다.
닉시는 캐비닛의 문틈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주홍빛의 전구를 달아 놓은 라울의 바. 창문 너머에는 사람들이 각자의 연말을 축하하며 떠들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익숙한 갈색 머리가 보여 닉시는 다급히 고개를 뒤로 뺐다. 이크.
벤자민은 검지로 제 입을 틀어막고 있는 그녀의 손바닥을 밀어냈다.
‘대체 뭐야.’
잠시 바람을 쐬러 밖에 나왔는데, 이 성가신 이웃도 갑자기 뛰쳐나왔다. 그리고 평소처럼 별 시답잖은 말다툼을 했다.
그녀는 뭔가 불만인지 씩씩거렸고, 그는 늘 그랬듯 불똥이 튀기 전에 도망치려 했다.
그러다가 멱살을 붙잡혔다.
그 뒤론 지금 이 상황이었다. 버둥거리기도 힘든 좁은 캐비닛 안, 엉겨 붙은 스파게티처럼 뭉쳐 있는 상황.
벤자민은 왼손을 더듬어 벽면을 만졌다. 손끝에 걸린 유리잔들이 소릴 내며 흔들렸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라울이 열심히 닦아 놓은 와인 잔들을 모조리 깨트릴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비켜.”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붙어 있는 살결이 지나치게 뜨겁게 느껴지고. 피하자니, 아끼던 유리잔들을 잃어버리고 망연자실할 라울의 얼굴이 다시 어른거리는. 여러모로 난처한 상황이었다.
벤자민은 몸을 굳힌 채,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닉시에게 속삭였다. 이봐 안 들려? 비키라니까.
하지만 닉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뭔갈 결심한 사람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뭘.”
“너 왜 요즘 나 피해?”
피해? 벤자민이 그녀의 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대체 그게 뭔 소리지. 그런 거 아닌데. 아, 아닌가.
……설마, 눈치챘나?
닉시는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표정을 관찰했다. 가늘어졌다가, 다른 곳을 봤다가,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건지 손으로 입을 덮고선.
하아.
“그런 거 아니야.”
한숨을 내쉰다.
아니긴. 닉시는 픽 웃었다.
그는 거짓말을 못 한다. 거짓말을 하기 전에 그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눈을 피한 뒤, 입을 가린다. 지금처럼 말이다.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닉시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세계 최고의 허풍쟁이와 거짓말 내기를 해도 이길 자신 있는 엄청난 거짓말쟁이였다. 피노키오였다면 코가 태양까지 닿을 정도로 솟아 있을 사람.
닉시는 손을 들어 벤자민의 목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중간의 튀어나와 있는 목울대를 지날 때쯤엔 일부러 손끝을 세워 굴곡을 뭉근하게 훑었다.
그는 그 느린 궤적에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긴장했다.
“그럼 증명해 봐.”
이윽고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쇄골, 움푹하게 팬 둥근 부근에서 멈췄다. 팽팽한 긴장감 속, 그와 그녀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내게 키스해. 지금 당장.”
그러니까 이건 화가가 농부를 피하고, 농부가 그것을 알아차린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타인의 행동에 꽤 둔한 편에 속하는 농부가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은, 12월 30일의 아침.
술에 취해 그의 집을 찾아간 뒤, 잠에서 깨자마자 바로 쫓겨났을 때였다.
그녀는 파리에서 돌아온 뒤 아주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허무하게 보내 버린 크리스마스와 고대했던 캐롤링을 놓친 게 아쉬웠던 닉시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시 크리스마스를 보내자고 토로했고, 즐거운 행사를 마다할 리 없는 마을은 다시 한번 성탄절을 지내게 되었다.
닉시와 마을 이장을 주축으로 이뤄진 마을의 젊은이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줄 쿠키를 포장했고, 자정이 되는 늦은 밤에 때늦은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며 마을 사람들에게 쿠키를 나눠 주었다.
캐롤링이 끝난 뒤엔 라울의 바로 찾아가 뜨끈한 계피 생강차를 마시고, 이렇게 헤어지는 건 아쉽다며 코끝이 얼큰할 정도로 술을 들이부었다.
그게 바로 12월 30일의 새벽.
그녀가 술에 취한 채 그의 집 문을 두드렸던 것도 그쯤.
“뭐야.”
그는 자다가 깬 듯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긴말은 없었지만, 올라간 눈썹에서 왜 찾아온 거냐고 묻는 듯한 당혹감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 집보다 여기가 더 가까워서.”
그녀는 곧장 그를 스치고 지나가, 모닥불 앞에 벙어리 장갑을 벗었다. 여러겹 껴입었던 겉옷과 두꺼운 목도리도.
뻔뻔하게 방을 점거하는 것도 모자라, 귀찮은 허물을 생성하는 그녀 앞에서 벤자민은 귀찮다는 듯 머리를 헝클었다.
그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그녀의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기분 좋게 들뜬 목소리와 찬 바람을 몰고 온 그녀의 체취가 그의 잠을 깨웠다.
술 냄새가 났다. 달큰하게 정신을 어지럽혀 오는 그런 냄새.
“가깝다는 핑계를 댈 거면, 적어도 술은 먹고 오지 말았어야지.”
“왜?”
“라울의 바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우리 집이 아니라 양목장이니까.”
벤자민은 모닥불 근처의 가장 따뜻한 장소에 새로 잠자리를 깔아 주었다. 오늘같이 귀찮은 손님 때문에 마련해 놓은 푹신한 이불에서는 햇볕에 널어놓은 마른풀 냄새가 났다.
그녀는 그 이불 위에 코를 비비며 낮게 웃었다.
“맞아, 핑계야. 그냥 네가 보고 싶었어.”
닉시는 엎어져서 잠깐의 술기운을 만끽했다.
벤자민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봤다.
겨우 그런 말 하나 들었다고 남의 단잠을 깨운 걸 용서할 줄 알았다면, 크나큰 정답이었다.
제기랄. 벤자민은 어이없게 무너진 제 귀찮음의 벽에 혀를 찼다.
그가 물끄러미 그녀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닉시는 이불에 엎드린 채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갓난아이나 술 취한 사람의 경우, 저렇게 고개를 처박고 자게 놔두면 질식해 죽을 수도 있었다. 벤자민은 그녀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그녀의 몸을 뒤집어 주었다.
‘스웨터는 잘 때 입기엔 답답하지 않나.’
그는 그녀의 진파랑 스웨터를 바라보았다. 추위가 파고들지 않게 목 주위를 죄는 디자인의 스웨터.
‘갈아입혀야 하나.’
갈고리처럼 굽인 검지손가락이 그녀의 목덜미 주변을 파고들었다.
고른 숨소리. 손가락에 걸린 옷 틈은 그녀의 가슴이 오르내릴 때 함께 위아래로 움직였다.
“…….”
벤자민은 그제야 퍼뜩 정신 차렸다. 생각에 미쳐 본능적으로 손이 움직였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녀의 옷에 걸린 손가락은 그물에 걸린 낚싯바늘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멈췄던 숨을 탄식처럼 내뱉었다. 그러곤 손을 거둬들였다.
모닥불에 불씨가 줄어든 깊은 새벽. 그녀는 으슬으슬 떨면서 잠에서 깨어나, 그의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벤자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앓는 소릴 내면서도 몸을 움직여 그녀가 누워 있을 수 있을 만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닉시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빈 공간에 제 몸을 끼워 넣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그녀가 편한 자세를 찾아 몸을 돌리자,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이마를 댔다. 아직까지 그녀의 체향에선 은은한 포도주 냄새가 났다.
벤자민은 잠에 젖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기분이 좋아서.”
“……다음엔 이렇게 찾아오지 마.”
그가 주먹 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말했다. 닉시는 아랫배를 스치는 그의 팔뚝에 간지럼을 느끼며 킬킬 웃었다.
“싫어.”
닉시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그는 뭔갈 말하려는 듯 입을 벙끗하다가 다물었다. 그러곤 그녀의 등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허리에 손을 감고 잠을 청했다.
“제발 말 좀 들어…….”
닉시는 눈동자를 굴려 제 어깨에 고갤 파묻고 잠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쭉 혼자 살았던 주제에 누군가를 끌어안고 자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온기를 찾아 품는 모습 같기도 했고, 자신의 품속에 들어온 뭔가를 지키려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면 내가 몽유병 때문에 돌아다니니까 그걸 막으려는 걸 수도 있고.’
닉시는 어깨를 간질이는 그의 숨소리를 느끼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술에 어질어질한 정신을 잠 속에 밀어 넣고, 허리를 단단하게 감고 있는 그의 체온 높은 팔에 미묘한 안정감을 느끼며 그녀는 그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잤다.
그날 그는 악몽을 꾸는 듯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늦은 새벽. 닉시는 등 뒤에서 흐느끼는 소릴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고, 감긴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워낙 작고 억눌린 신호들이었기에 그가 그녀를 껴안고 있지 않았으면 아마 눈치채지 못했을 법도 했었다.
“……무슨 꿈 꿔?”
닉시는 그의 감긴 눈꼬리를 길게 쓸어내렸다. 눈물 자국이 손가락 위에 흔적을 만들어 왔다.
“많이 슬픈 꿈이야?”
여전히 꿈속인지,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화가가 종종 악몽을 꾸는 줄 알았으면, 집에 자주 찾아왔을 텐데.’
나쁜 꿈에서 깨어났는데, 옆에 아무도 없으면 기분이 좋지 않다. 익히 겪어 봐서 아는 사실이었다.
반면에 나쁜 꿈에서 깨어났는데, 누가 옆에 있어 주면 제법 위로가 됐다.
그랬기에 그녀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부드러운 밀크티 색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눈물이 셔츠를 적시는 걸 묵인했다. 위로의 말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잠기운을 나눠 주었다.
서로에게 익숙한 새벽이 지나고, 동틀 무렵 벤자민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그녀의 셔츠 앞섶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얼굴에 손을 댔다.
‘애 같은 짓을 했군.’
자다가 우는 건 먼 옛날에 끝난 줄 알았는데, 낯 뜨거운 일이었다. 그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멍한 정신을 차가운 아침 공기가 깨웠다. 창가로 게으르게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며 그는 시린 눈을 문질렀다.
벤자민은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그녀의 맨발을 다시 이불 속으로 꼼꼼히 넣어준 뒤, 부엌으로 향했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익숙해진 맛의 캐모마일을 꺼낸다. 잔을 두잔 꺼내 놓고 테이블에 기대앉았다.
그는 진하게 탄 캐모마일 티를 한 모금 마셨다. 서늘했던 몸이 미지근해져 왔다.
그는 뜨거운 물에 캐모마일과 설탕을 듬뿍 탄 차를 들고 침대로 다가왔다.
“닉시.”
침대 앞에 쭈그려 앉은 그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잠을 방해받은 닉시가 칭얼거리며 이불을 끌어안았다.
“……조금 더 잘래. 누구 때문에 새벽에 깼었단 말이야…….”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긴 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안 돼, 일어나.”
“……진짜 너무해.”
몇 번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이던 닉시가 눈을 떴다. 그녀의 찡그린 미간이 ‘나 지금 숙취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그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한밤중에 뜬금없이 찾아온 건 너무하지 않고?”
벤자민은 닉시를 어르고 달래서 겨우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마셔.”
그는 따뜻한 차를 내밀었다. 닉시는 눈도 다 못 뜬 채, 그것을 받아먹었다. 옆으로 비죽 흘러나온 것들은 그가 옷 소매로 문질러 닦아주었다.
닉시는 축축해진 그의 옷소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 자다가 울던데, 악몽이라도 꿨어?”
그녀가 물었다. 알고 있었나. 그는 작게 앓는 소릴 냈다.
“악몽……은 아냐.”
“펑펑 울어 놓고 악몽이 아니라고?”
“그냥 동생 꿈.”
“아하.”
슬펐겠네. 닉시가 말했다. 벤자민은 창문 너머 비어 버린 들판의 쓸쓸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마시자, 빈속에 울렁거렸던 몸속이 따뜻해져 왔다. 향 좋은 차와 그녀의 취향 따라 적당히 달콤한 맛.
닉시는 아침햇살에 녹아내리는 눈사람처럼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나긋해 보이는 분위기와 평화로운 오전 시간의 기분 좋은 새소리.
벤자민은 흐트러진 닉시의 옷차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셔츠 차림. 진파랑 스웨터는 이불 아래 아무렇게나 깔아뭉개져 있었다.
스웨터가 왜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건진 그로서 알 도리가 없었다. 답답함을 느낀 닉시가 간밤에 진파랑 스웨터를 벗어 던졌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제 손이 무의식중에 기어코 스웨터를 벗겨낸 것일 수도.
“…….”
그는 한참을 서서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갑자기 저기압이 된 그를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벤자민?”
“다 마셨어?”
“응.”
그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벤자민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 먹었으면 나가.”
“확실해. 화가는 나를 피하고 있어.”
닉시가 말했다. 그 진지한 목소리가 조용한 마을 회관 안에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옆에서 삶은 감자와 소시지 따위를 올린 따뜻한 점심밥을 먹고 있던 길버트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진지한 선전 포고는 여러모로 평화로운 점심시간을 위협했다.
‘이상할 것 없지 않나?’ 길버트가 밥을 꼭꼭 씹어 삼켰다.
“벤자민은 늘 널 피했잖아.”
“미묘하게 달라. 좀 더…… 좀 더.”
닉시는 그 미묘한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그래. 좀 더 노골적이야!”
그녀가 말했다.
물론 닉시는 누가 본인을 피한다고 해서 가만히 놔둘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눈치챈 순간부터 그를 일부러 진득하게 쫓아다녔다. 대놓고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고, 바에서 만나면 옆자리에 앉고, 저녁거리를 사러 나가면 주인 냄새를 맡은 개처럼 몇백 미터 밖에서도 달려왔다.
뭔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은데, 싫어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면 싫어하는 이유를 알게끔 만들어 주는 게 그녀의 습성이었으니.
급기야 치와와 해피를 고용해 마을 어딘가에 꽁꽁 숨어 있는 그의 꽁무니를 쫓았다.
[잡았다, 화가! 이제 도망 못 치겠지?]그러다가 마침내 그를 잡아서 그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렸을 때.
벤자민은 그녀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그녀를 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내려놓곤.
‘넌 대체 나를 뭐로 아는 거야.’라며 엄청 혼냈다.
그러니 닉시에게는 엄청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었다.
혹시 목디스크가 있었나. 갑자기 껴안아서 목이 삐끗한 거지. 그게 아니라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그의 이름을 쩌렁쩌렁하게 불러서? 아니면 한밤중에 그의 침대로 기어들어 가서?
“그러다가 벤자민이 너에게 완전히 질려 버리면 어떡하려고.”
길버트가 길게 늘어지는 치즈를 포크로 돌돌 감았다.
질려 버려? 닉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결말에 경악했다.
“대체 왜!”
사랑한다고 말한 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분명 파리에서 돌아온 당일까지는 좋았는데!
파리에서 돌아왔던 날 저녁. 닉시는 마중 나온 그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갔다.
오랫동안 비워놨던 집이 쌀쌀해서 함께 담요를 두르고 있다가, 허리를 감아오는 그의 손길이 간지러워서 웃기도 했고, 그러다가 눈이 마주친 뒤에 제법 깊은 키스를 나누기도 했다.
그 모든 순간에 질림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는데.
“분명히 좋았는데, 대체 왜?”
“요즘 닉시 양이 노골적으로 널 쫓아다니던데.”
닉시와 길버트가 마을 회관에서 점심을 먹을 때와 비슷한 시간, 라울의 바. 라울이 컵을 닦으며 말했다.
벤자민은 카운터에 이마를 댄 채 모든 체력을 소진한 사람처럼 축 쳐져 있었다.
“무슨 일이야, 벤자민?”
그는 고갤 들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이었다.
요즘 들어 닉시가 벤자민을 쫓아다녔다. 겨울이라 농부가 할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감안해도, 그녀의 시선은 꽤 대담하고 노골적이었다.
가깝기만 할까. 그녀는 달콤한 줄기에 눌어붙는 진딧물처럼 그에게 눌어붙었다. 거리감이 묘하게 가까웠다는 말이었다. 바텐더가 눈치챌 정도로.
바에만 있던 그가 알게 될 정도니, 당사자는 오죽할까. 벤자민은 부쩍 가까워진 그녀의 거리감에 곤란해 죽을 것만 같았다.
벤자민이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건…… 들은 이야기인데.”
본인 이야기로군. 바텐더가 고갤 끄덕였다.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마음이 있다고…… 여지를 줬어…….”
헉. 바텐더는 벤자민의 말에 속으로 놀람을 삼켰다. 그는 닦고 있는 컵의 모서리를 광나다 못해 닳을 때까지 벅벅 닦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 후로 딱히 뭔가 없었어……. 근데 그전까진 옆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생각…… 남자가 생각했는데, 그 후로 이상하게 자제가…… 제길.”
벤자민이 독일어를 중얼거렸다. 전 세계 어딜 가도 욕설은 비슷한 발음이었기에 바텐더는 그것이 욕설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허어. 라울은 귀 끝까지 붉어진 벤자민의 얼굴을 보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벤자민 네가……”
“어떤 남자가.”
“그러니까 어떤 독일인이……”
“그냥 평범한 남자가.”
그가 그녀에게 은근한 여지를 받은 이후로 절제가 안 된다는 말. 꼭 사춘기의 소년이 할 법한 투박한 고민.
라울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다가 입을 열었다.
“정상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만 어릴 적에 진작 졸업해야 했던 현상을 아직까지 앓고 있는 게 문제였지.
라울이 컵을 내려놓으며 말하자 벤자민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래서 닉시 양을 피해 다닌 거야?”
“그 녀석이 아니라…….”
벤자민은 한참 동안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다가 결국 탄식을 내뱉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래.”
그는 닉시가 파리에서 오베르로 돌아왔던 저녁을 떠올렸다.
모든 고뇌의 시발점이었던 그날 저녁. 그와 그녀는, 그녀의 집으로 갔다.
오래 자릴 비웠던 집은 쉽게 따뜻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벤자민은 벽난로에 장작을 집어넣으며 차라리 그녀를 제집에 데려갈까 생각했다. 거기까지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냥 추운 곳보다는 따뜻한 곳이 나으니까 떠올렸던 생각일 뿐.
하지만 문제는 닉시가 담요 한 장을 들고 오면서부터 시작됐다.
[크리스마스가 아쉽게 끝난 게 너무 아쉽지 않아?]그녀는 그의 몸에 담요를 둘러준 뒤, 그를 벽난로 앞에 앉혔다. 푹신한 카펫 아래로 은근히 밀려오는 냉기를 느끼며 그는 그녀를 올려다봤다.
모닥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주황색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는 흔들리는 그림자를 홀린 듯이 바라봤다.
[내일 길버트한테 부탁해서 크리스마스를 하루만 연장해 달라고 하는 건 어때? 아니다. 오늘이 28일이니까 정확히는 음…… 나흘이나 연장된 셈이지만.]―풀썩.
닉시는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며 벤자민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던 그는 갑자기 제 품을 파고든 그녀에 놀라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닉시는 그가 어깨에 두르고 있던 담요를 끌어와 그와 자신의 몸을 덮었다.
벤자민은 제 가슴에 기대오는 그녀의 무게감을 느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사람들과 깊은 인연을 맺는 법이 없었던 그는 이렇게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면역이 없었다.
[캐롤링도 돌자고 하자! 어때? 재밌겠지? 너도 크리스마스를 감옥 안에서 보냈잖아.]이렇게 끝내기 아쉽지 않아?
그녀가 속삭였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야살스러웠다. 굽혀진 다리 사이에 쏙 들어와 앉은 그녀의 작은 몸도, 눈길을 쓸고 와서 축축이 젖어 있던 바지 소매가 그의 발목에 눅진하게 눌어붙는 감각도 아주 생경하게 느껴져 왔다.
[벤자민? 듣고 있어?]솔직히 말하면 그는 그녀가 뭐라 하는지 전혀 듣지 못했다. 신경이 온통 타인과 맞닿아 있는 살결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그녀. 일정한 선을 지키고 있던 그만의 성이 갑자기 그녀에게 침범당한 기분과 더불어, 바람들 일 없던 그의 마음속엔 심란한 바람이 불어댔다.
[……아니.] [하하, 뭐야 그게. 역시 내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보고 싶었지. 당연히. 그러나 괜스레 목소리가 떨려서 그의 생각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는 본인의 마음이 술렁이는 것을 깨닫긴 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벤자민은 착잡한 심정으로 애꿎은 모닥불만 노려봤다.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웃어야 하나.
‘아니면…….’
그녀가 조잘거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쌀쌀했던 방 안의 온도가 착실히 데워질수록, 담요 안에 어정쩡하게 굳어 있던 그의 팔이 이 당황스러운 거리감에 적응할수록. 그의 속에는 어떤 욕심이 착실하게 쌓여갔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나?’
그러니까 그는 그 모닥불 앞에서, 제 품에 파고든 무방비한, 저가 사랑을 운운한 여자를 보면서.
“머리카락을…… 땋고 싶었어.”
벤자민이 포크를 들고 있는 제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바텐더는 그의 중얼거림을 듣고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머리카락이 왜? 별거 아니잖아.”
“별거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 밤. 그는 제 목덜미를 간질이던 금빛 머리카락을 보고 그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어 보고 싶었다.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 사이로 조심스럽게 파고들어, 손가락 사이사이로 부드럽게 감아오는 촉감을 느껴 보고 싶다고.
“그 녀석은 늘 머리카락이 나부끼도록 뛰어다니니까 분명 머리카락이 엉켜 있을 게 분명한데…….”
손가락을 넣고 살살 긁어내리다가 엉켜서 막힌 곳이 있으면 아프지 않게 다듬어 주고 싶었다.
그렇게 긴 머리카락을 한 가닥, 한 가닥씩 나눠서 실타래처럼 감아 놓고……. 아. 이 녀석은 간지러움을 많이 타니까 느리게 감아 오면 간지럽다고 칭얼거릴 게 뻔해.
그러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 참으라고 말한 뒤에, 적당한 속도로 하나하나 착실하게 덧대고. 덧대고, 덮고, 덮고.
그렇게 긴 머리카락을 빗는 게 질릴 때까지 머리를 땋고, 푸는 것이다.
그게 질린 다음에는. 다음에는?
머리를 땋으면서 계속 드러났다가 사라지던 흰 목덜미에 입을 맞춰 보게 되려나.
[벤자민.]멍하니 닉시의 목덜미를 바라보던 벤자민이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는 뒤늦게 대답했다.
[응.] [또 내 말 안 듣고 있었지.] [……응.] [왜.]벤자민이 그녀의 근처에서 굳어 있던 손을 꼼지락거렸다.
왜냐고?
왜긴 왜야.
……그걸 어떻게 말해.
[그냥…… 역시 많이 보고 싶었어서.]그러다가 그는 그냥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시선은 어디 둘까 하다가 그냥 그녀의 뒤통수에 기대 묻었다.
그의 고뇌를 모르는 닉시는 그저 킬킬 웃었다.
[너도 그런 말을 할 줄 알았구나.]차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릴 용기는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모닥불 앞에 얼굴이 주홍빛으로 물든 채 조그만 앞니를 보이며 미소 짓는 그녀는 사랑스러워서.
[키스해도 돼?]그는 조용히 물었었다.
그래, 그날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부쩍 그녀와 거리감이 가까워진 것도, 그녀를 예전처럼 밀어내진 못하면서 그렇다고 더 깊이 껴안을 용기는 없는 혼돈과 혼란의 시작.
“하아아아…….”
“표정이 볼만하네, 벤자민.”
벤자민은 다시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는 포크 끝으로 눈앞에 놓인 허여멀건 스튜를 엉망으로 휘저었다.
가까이 있으니까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다 보면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싶을 거고, 이를 세워서 깨물어 보고 싶을 것이고 자꾸 뺨에 걸리는 셔츠를 옆으로 살짝 젖히고 싶겠지. 그러면?
“자제가 안 돼.”
그러니까 그는 착실하게 그녀를 만지고 싶었다.
그녀가 고주망태가 되어 그의 집 문을 두드렸던 지난밤만 해도 어땠던가.
취한 사람한테 지분거리는 취미는 없던 터라 방바닥에 친절하게 이불을 깔아 줬는데, 그녀는 그가 백번을 다짐해서 세운 성벽을 너무나도 쉽게 짓밟는다. 그것도 너무나 태연하고 순진하고 아무렇지 않게.
그때도 어디에 놓아야 가장 자연스러운지, 안절부절못하던 손을 겨우 들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잠들까 말까 했던 시간이 길어져서 꿈까지 꾸게 됐고, 오랜만에 꾼 그리웠던 동생의 얼굴에 기분이 울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먼저 그의 신경을 깔짝거렸던 건 그녀의 흐트러진 옷차림. 언제 벗어 던진 건지 모를 스웨터와 느슨하게 풀린 셔츠의 첫 단추.
동생의 “형, 캐치볼 하러 갈래?” 했던 그리운 목소리 때문에 젖어 버린 얼굴이 무색하게도, 적셔 버린 그녀의 셔츠 앞섶이 더 신경 쓰였다.
젖어서 눌어붙은 살점이 유난히도 희어 보여서 이상하게 목이 말라 왔다고.
아. 그쯤 되니 정말 큰일이다 싶었던 거고.
[다 먹었으면 나가.]벤자민은 다시 카운터 테이블에 이마를 댔다.
“내가 내 속도를 이기지 못해서 겁먹게 만들어 버릴까 봐.”
혹시나. 아주 만약에라도 제가 하고 싶은 짓 때문에 그녀가 질겁을 한다든지, 싫다는 표정을 짓는다면 그는 그것만큼 끔찍한 게 없었다.
본인의 욕구가 맞는지도 틀린 건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녀마저 저가 싫다고 말해 버린다면…….
“뭐라고?”
라울이 반문했다. 차가울 정도로 시원한 온도가 그의 화끈하게 달아오른 이마를 미지근하게 식혀 주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가 죽어 가듯 중얼거렸다. 라울은 피식 웃으며 그의 옆에 얼음 띄운 민트 티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오늘 연말 파티는 참석할 거야, 벤자민?”
마을의 정기 행사 중 하나. 연말에 마을 광장 혹은 라울의 바에 모여 다가오는 새해를 축하하는 연말 파티.
마을 이장이 올해는 화가도 참여하게 할 거라며 당당하게 선언했기에 바텐더는 확인차 벤자민에게 물었다.
“나도 몰라.”
바텐더는 화가의 우울해 보이는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때 늦은 열병. 원래 뒤늦게 걸려 오는 감기나 사랑이 더 독한 법이었다.
바텐더는 웃음을 삼키며 접시를 닦았다.
마을 이장은 닉시의 메모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봐? 벤자민 씨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아하……. 아는 사람 이야기라고? 흐음. 그런 것까지 함께 고민해 줄 친구라면 정말 친한 친군가 보네. 하하.”
길버트는 턱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근데 연인에 가까운 사이……는 뭐야? 연인이면 연인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알겠어, 알겠어. 딴소리 그만할게. 뭐, 좋아. 연인이라고 가정하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글쎄……. 화난 연인을 달래 주는 법이라. 일단 왜 화가 났는지부터 생각해야지. 모르면 어떡하냐고? 뭘 어떡해, 닉시. 잘못했다고 빌어야지. 하지만 닉시 너는 요령이 없는 편이니까 무작정 매달렸을 거야. 내 말이 틀려?”
길버트는 한참을 웃었다. 너무 웃어서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대충 닦아 냈다. 그러곤 씩씩거리는 닉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연인에 가까운 사이’라고 했잖아. 그럼 지금 네 모습을 보면 금방 화가 풀릴 거 같은데.”
길버트는 가볍게 윙크했다.
“왜긴 왜겠어. 귀엽잖아.”
다음으론 목수. 빅토리아는 갑작스레 들이밀어진 닉시의 메모지를 읽었다.
“벤자민 씨랑 무슨 일 있었어요? 아, 벤자민 씨 이야기가 아니라고요? 그렇군요! 전 또 닉시가 아는 사람 이야기인 척 제게 고민 상담이라도 하러 온 줄 알았네요. 어머, 표정이 왜 그래요 닉시?”
비티는 닉시의 손을 붙잡고 집 안의 가장 따뜻한 곳으로 갔다. 그녀의 작업실이자 톱밥을 태우는 공간이었다.
“저는 불확실한 걸 싫어하는 타입이거든요. 그러니까 우선은 이 ‘연인의 가까운 사이.’라는 사족부터 마음에 안 든답니다.
하지만 그런 사족이 붙어야 성립하는 관계라고 하면 최대한 이해해 보려 노력할게요.”
비티가 들고 있던 톱을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연인은 아니지만 연인 같은 사람이 화가 났다면……. 미안해요, 닉시. 아무리 생각해도 닉시가 잘못해서 벤…… 아니, 그분이 화가 난 거라고밖에 생각이 안 되는데.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다고요? 어머, 닉시는 그게 매력이죠.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 말아요. 그럼 이런 방법은 어때요? 우선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에 함께 달콤한 핫초코를 마시는 거예요. 따뜻하고 달콤하니 화도 금방 녹아내릴 거예요. 뭘 잘못 했는지 모르겠는데 사과는 왜 하냐고요?”
호호.
비티는 닉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도 꼭 사과해요, 닉시.”
“아하. 화난 사람을 달래 주는 법이요.”
닉시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사람은 마을의 바텐더, 라울이었다. 길버트와 빅토리아까지 찾아갔지만 좋은 방법 같은 건 찾지 못했다. 닉시는 크나큰 절망을 느끼며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라울은 닉시의 고민 상담을 듣고 그저 반듯한 미소였다. 꼭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의 여유로운 미소였다.
“닉시 양은 그 사람이 왜 화났다고 생각하는데요?”
닉시는 고갤 쳐들었다. 닉시의 얼굴엔 억울함이 잔뜩 담겨 있었다.
“우선 저를 피해요.”
“네.”
“그리고 제가 옆에 있으면 자리를 떠나고요.”
“네에.”
“마지막으로는 제가 멀리서 보인다 싶으면 도망쳐요.”
“그렇군요.”
“이게 화난 게 아니면 뭐겠어요.”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사람들이네. 라울이 웃으면서 생각했다.
라울은 항의하는 닉시를 바라봤다.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는 불과 몇 시간 전에 화가가 축 처져 있었던 자리였다.
‘벤자민의 고민은 아마……. 그녀가 앞에 있으면 자제가 힘들다 했지.’
그는 다 닦아 놓은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가만히 놔두면 서로 오래간 삽질이나 하고 있을 게 눈에 선했다. 그랬다간 마을은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의 불편한 싸움터에 껴서 눈치를 볼 터고.
그건 바 주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가게에서 이혼한 부부가 맞닥뜨린 것 같은 수준의 골치였다. 그는 본인의 바가 사랑과 전쟁터가 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닉시 양.”
바텐더는 카운터를 짚었다.
그는 평소와 같은 온화한 얼굴이었지만 닉시는 괜스레 긴장하며 의자에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벤자민은 아마 혼란스러운 걸 거예요.”
라울이 본 벤자민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소년이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어떤 상황에 어떤 행동이 올바른 건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그런 상태.
그러니 그 혼란스러움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혼란의 대명사인 닉시는 그에게 적당한 시간을 줘야 했고.
응당 첫사랑이란 그런 거지 않던가. 서툴고 어색하고.
특히나 사람에 대한 면역이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혼란스러울 터였다.
“그러니 벤자민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세요. 그거면 돼요.”
그러면 알아서 고민을 끝내고 돌아올 테니까.
‘이 정도만 말해도 알겠지? 닉시 양은 연애를 해 본 경험이 있었다고 했으니까.’
“아시겠죠?” 라울은 닉시를 향해 빙긋 웃었다.
라울의 결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테니 내버려 두세요.
정상적이고, 연애라는 것에 경험이 풍부하다면 라울의 말을 듣고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비정상. 연애를 해도 애인이 전부 도망가 버린 사람.
[벤자민은 아마 혼란스러운 걸 거예요.]‘뭐가? 설마 분위기에 취해서 나한테 사랑…… 어쩌고 그런 말을 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아니라서 혼란스럽다는 건가.’
[그러니 벤자민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세요.]‘정리? 뭘. 우리 사이를?’
[아시겠죠?]‘전혀 모르겠는데!’
닉시는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난관에 부딪힌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그 공허해진 얼굴에 오히려 당황스러워진 라울이 벤자민을 옹호하기 위해 서둘러 변명했다.
“닉시 양? 음…… 벤자민도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을 거예요.”
‘헤어질 고민?’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봐요.”
‘헤어질 이유?’
아, 잠깐만. 그러던 그녀는 문득 새삼스러운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헤어진다’라고 정의될 사이도 아니지 않나?’
왜냐하면 그래서 그 후로 반지를 교환한 것도 아니고, 증명서에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니다. 사람들에게 우리가 앞으로 연인 같은 걸 해 보기로 했습니다! 말한 적도 없고, 하다못해 몸을 섞은 것도 아니다.
닉시의 결론. 그와 그녀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닉시는 결연한 얼굴로 일어났다. 흡사 전투에 나가는 노장의 비장함이 담긴 얼굴이었다.
“알겠어요. 이제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겠네요.”
“정말이죠?”
바텐더가 닉시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애써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꽉 쥔 오른손에 핏줄이 흉흉히 돋보였다.
“정말 이해하신 거 맞죠……?”
그렇게 연말을 축하하기 위해 라울의 바에서 연말 축하 파티가 열렸다.
마지막에 가까워지는 시간. 들뜬 분위기와 시끄러운 바 안.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연말을 즐기고 있었다.
그중 가장 시끄러운 테이블은 당연히 마을의 젊은이들이 뭉쳐 있는 테이블.
닉시는 사람들과 술잔을 부딪치면서도 구석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화가를 흘겨봤다.
여전히 제 주위 3m 이내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라울의 바가 고작 해 봐야 10m인데도 말이다.
혹시나 해서 바텐더와 마을 이장을 미끼로 데려와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흐응…….”
닉시는 때를 노리는 맹수처럼 벤자민을 노려봤다.
우리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고? 그럼 그렇게 만들면 되지. 진짜 사랑에 질렸는지 안 질렸는지는 그때 가서 확인해 봐도 된다.
연인이 흔히 하는 것. 인사 대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손을 잡고 눈을 마주 보는 것, 쪽쪽대는 것.
그중 가장 간결하고 쉽게 끝나는 건.
화가가 밤바람을 쐬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냥감이 움직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 다시 이 상황인 것이다.
바깥으론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들리고. 캄캄한 하늘. 술기운이 무르익어 가는 한밤중. 오로지 둘만 존재하는 좁은 캐비닛 안.
닉시는 그의 턱 끝까지 들이닥친 뒤,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증명해 보라고.”
내게 키스해. 지금 당장.
호기롭게 선언한 건 좋았다. 그러나 닉시는 그렇게 말하고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사랑에 질려서 이제 사랑 같은 건 그만하겠다 하면? 만약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 그녀의 뻔뻔한 협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평소처럼 눈을 찌푸리며 “비켜.”라고 말한다든가, 말없이 그녀를 옆으로 밀어낼지 모른다.
그런 경우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그녀는 캐비닛 문을 막아선 몸에 힘을 줬다. 그가 질색하며 있는 힘껏 밀어내도 10초는 버틸 수 있게끔.
벤자민은 단단히 힘이 들어간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여러모로 난처했다. 아주 여러모로.
사람이 기껏 차분해지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직접 횃불을 들고 들쑤시는 꼴 아닌가.
“갑자기 왜.”
벤자민은 그녀와 맞닿아 있는 팔뚝을 슬금슬금 뒤로 내뺐다.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그녀가 바짝 붙어 왔다.
“못하겠어?”
“그게 아니라…….”
“이젠 내가 질렸어?”
“뭐?”
안일하게 붙어 오는 살갗이 뜨거웠다. 뒤로 물러나던 등이 벽에 닿았고, 더 이상 피할 곳은 없었다.
벤자민은 마음의 안정을 위해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닉시를 바라봤다. 닉시는 저돌적으로 따라붙은 사람치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진짜, 정말, 진심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빌어먹게 귀여웠다.
그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두워서 얼굴이 붉어진 게 보이지 않는단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내가……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근데 왜 자꾸 날 피해?”
“그건…….”
그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닉시는 입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예전부터 그게 쭉 고민이었어. 넌 날 사랑한다고 하면서 티가 안 나. 얼간이처럼 맨날 꽃을 바쳐 오지도 않고.”
‘이 녀석에게 꽃을 바치면 얼간이 소릴 듣겠군.’
그가 생각했다.
“내가 앞에 있어도 평소 모습 그대로고. 원래 보통 사랑에 빠졌다면 바보처럼 행동하지 않아?”
‘내가 그동안 이 녀석한테 충분히 바보 같아 보이지 않았던 건가.’
그는 그녀의 투덜대는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그러곤 작게 헛웃음 쳤다. 엄청나게 얼간이 같고, 바보 같고, 멍청이같이 행동했던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벤자민은 잠시 그녀가 생각하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기준은 뭘지 고민하게 됐다. 사랑을 잘 모르겠다는 5살짜리 사고뭉치. 그녀가 정의하는 사랑의 기준.
딱 어린애들 소꿉장난다웠다. 꽃 같은 걸 주고, 풋내기처럼 행동하고.
‘그럼 얼간이 같다고 비웃어도 꽃을 선물해 줘야 하나…….’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평생 해 본 적 없는 일이라 여러모로 난처했으나, 그렇게 행동하는 게 그녀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다면 눈 딱 감고 한 번쯤은 해 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니 제 가슴에 태연하게 붙어 있는 손 좀 떼줬으면 좋겠는데.
벤자민은 제 가슴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닉시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알겠어. 그러니까 이것 좀…….”
“하다못해 나랑 몸을 섞으려 하는 것도 아니고.”
그는 그녀의 손목을 쥔 채 굳었다.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태연하게 꼼지락댔다.
“뭐라고?”
벤자민이 고갤 들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러나 굳이 되물었다. 이상하게 그녀의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목소리와 그녀가 사랑의 증거로 재는 기준이 그의 속을 긁어댔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줘?”
“…….”
“넌 나랑 붙어먹으려 하지도 않으니까 네 속을 잘 모르겠다고.”
닉시가 말했다.
벤자민은 잠시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말의 의미를 가늠하듯 깊숙하게 응시했다.
뒤늦게야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아주 길게.
그는 쥐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끌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엄지와 검지 사이의 여린 살을 잘게 깨물었다.
아릿한 통각에 닉시의 눈꼬리가 움찔했다.
“네 사랑의 기준이 그거야? 몸을 섞는 거.”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긁어내리듯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그가 그녀의 대답을 재촉하듯 손끝을 깨물었다.
“흔히 사랑을 육체적 관계로 정의하면 그렇잖아. 가장 쉽고 알기 쉬우니까.”
“그래서?”
벤자민은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래서라니.”
그녀는 손바닥에 내려앉는 촉감에 손가락을 설핏 굳혔다.
“그러니까 너는 나랑…….”
“…….”
“몸을, 읏…… 그만 깨물어!”
닉시는 지분거림을 받고 있던 손으로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는 굳이 피하지 않은 채 그녀의 손가락 틈 사이로 그녀를 지긋하게 응시했다.
그는 약간 심통이 나 있는 상황이었다.
누군 5살배기 얼간이처럼 꽃이나 바치려 했는데. 이 녀석은 남의 속도 모르고 태연하게 몸 같은 걸 운운하며 도발하고 있지 않은가.
누군 지금 그런 걸 안 하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그중 가장 그를 열받게 한 점은 그녀가 말한 ‘몸을 섞는다’는 선택지가 꽃, 머저리 같은 행동과 동일한 선상에 있다는 부분이었다.
저 말을 들었을 수많은 머저리가 그녀를 어떻게 볼지, 어떻게 느꼈을지 아주 뻔했다. 뻔하고 뻔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땠겠어, 어떻게든 붙어먹어 보려고 일부러 머저리처럼 행동했겠지. 제기랄.’
눈앞의 사랑 바보한테 ‘난 널 사랑해. 그러니까 우리 사랑을 나눌까?’ 같은 쓰레기 같은 말을 했었을 것이란 말이다.
그게 그를 가장 열받게 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라고 말하지 마.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왜?”
“사람은 사랑 같은 거 없어도 몸을 섞을 수 있으니까.”
그녀가 눈썹을 치켜들며 ‘왜?’라고 말하기 위해 입술을 오물거렸다. 벤자민은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닉시.”
“…….”
“닉시, 제발 내 말 좀 들어.”
“…….”
“내가 네 옷 안으로 손을 넣지 않는다고, 내가 너를 원하지 않는다는 게 아냐. 알겠어?”
그에게 결핍은 익숙했고 참는 건 당연했다. 먹는 거든, 자는 거든 모든 대부분의 욕구를 그렇게 처리하며 살아왔기에 그에게 무언가를 원하고 갈망한다는 선은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이번에도 비슷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 또 억누르고.
하다못해 나 잡아 봐라 떵떵대며 도발하는 누구 앞에서도 멍청이처럼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려 그를 바라봤다. 평소의 나직하던 목소리가 거칠었다. 왠지 조바심이 느껴지는 그의 얼굴 아래로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그는 닉시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오히려 반대라고. 너무 원해서 자제하지 못할까 봐 네 손끝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는 거야. 그니까 사람이…… 사람이 얼간이처럼 굴 때 제발 좀…….”
후우. 그는 씨근덕대던 것을 멈추곤 긴 숨을 토해 냈다.
“제발 내 말 좀 들어.”
그녀는 알겠다는 듯이 고갤 끄덕였다. 그제야 그가 손을 풀었다.
좁은 캐비닛 안이 묘한 긴장감과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고, 그도 성급히 그녀의 어깨를 밀어내지 않았다.
닉시는 그에게 붙잡혀 있었던 손목을 가볍게 돌렸다.
손끝에는 그가 새긴 희미한 이빨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잘못 깎아서 유난히 모서리가 튀어나와 보이는 모난 손톱도 보였다.
“……이제 총도 안 잡고, 겨울이라 농사도 안 지으니까 손톱이 어떤 모양인진 생각도 못 했네.”
그녀가 손끝을 보며 뜬금없이 중얼거렸다.
닉시는 제 손을 그의 입술에 가져갔다. 그는 뭐 하는 짓이냐는 듯 눈썹을 좁혔다.
“이쪽 손톱 있지, 깨물어서 잘라 줘.”
그의 눈이 의문스러운 색을 띠었다. 벤자민은 잠시 그녀의 생각을 가늠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갛고 둥근 눈동자엔 평소같이 태연한 기색만 묻어났을 뿐, 그 의도를 읽어 낼 순 없었다.
결국 가늠하기를 포기한 그가 그녀의 검지를 입에 넣었다.
“뭔 짓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이번만이야.”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고갤 끄덕였다.
손톱을 이빨로 바로 잘라 내기는 힘들었다. 그는 공연한 시간을 들여 그녀의 검지 손끝을 여러 번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의 이빨이 손톱 밑 여린 살을 건드리자 그녀가 작게 몸을 떨었다. 아파?, 아니.
―따각.
검지 손톱을 끊어 낸 그가 혀끝에 떨어진 손톱을 뱉어 냈다.
닉시는 손가락을 바꿔서 중지를 그의 입술에 들이밀었다. 여기도 기니까 잘라줘. 그렇게 속삭이면서.
진짜 악취미네. 벤자민이 생각하며 다시 그녀의 손끝을 깨물었다.
튀어나온 모서리 같던 손톱이 뭉툭해져 갔다.
그사이, 방황하던 벤자민의 손은 닉시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매끄럽게 파고들어 갔고 그가 중지 손톱의 모서리를 끊어 낼 때쯤에는 깍지를 끼고 있었다.
닉시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흉터가 가득한 손. 그러나 손톱 하나만큼은 그의 성격을 대변하듯 늘 정갈하고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다듬어 주려 했는데 그럴 필욘 없겠네.’
“벤자민.”
―따각.
“왜.”
그는 마침내 그녀의 손톱을 뱉어 내며 말했다.
이로써 그녀의 잘못 자른 모서리 모양의 손톱은 전부 뭉툭하게 끊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동그랗게 잘린 손톱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뭐. 이 정도면 그의 등을 긁어도 자국은 남지 않으려나.’
“내가 아무한테나 내 옷 안에 손 한번 넣어 보라고 했을 것 같아?”
바보야. 그녀는 그의 손을 살살 이끌어 자신의 옆구리에 머물게 했다. 그의 손이 작게 떨려 왔다.
“……그러면?”
그가 말했다.
“너뿐이야.”
그녀의 말에 그의 입이 살포시 벌어졌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그의 얼굴이 맥없이 풀어지자, 닉시는 킥킥 웃으며 그의 손등을 간질였다.
“그러니까 자제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건데…….”
“…….”
“우리집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
닉시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가 붉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아주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 그거 때문에 손톱 잘라 달라고 했던 거야?”
“응.”
그가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숨소리의 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그의 손이 닉시의 허리춤에 있는 둥근 골반을 느릿하게 훑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안 해.”
“나중에 우는소리 하지 마.”
“……음, 그건 장담 못 해.”
그녀는 킥킥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벤자민은 닉시의 셔츠 자락 안쪽으로 쓸어내리듯 손을 훑었다.
얼마 뒤, 마을 이장과 목수가 기어코 벤자민과 닉시를 찾아 떠났을 무렵, 벤자민이 바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입가는 무언가에 부딪힌 것 같이 작게 찢어져 있었다. 그 상처를 유심히 살피던 바텐더가 입꼬리를 올렸다.
“즐거운 시간 보냈나 봐.”
바텐더는 화가에게 작은 연고와 붉은 포도주를 건넸다. 그의 떠보는 듯한 놀림 섞인 말에 벤자민이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 녀석이 왜 안 하던 짓을 하는가 했더만, 너였나?”
“뭐가? 난 그냥 닉시 양이 고민하길래 함께 고민해 준 것뿐인데.”
그러니까 그게 헛바람을 불어넣었다는 거지. 벤자민이 포도주를 홀짝였다.
“계산.”
벤자민은 빈 테이블 몫의 지폐를 내밀었다.
“벌써 가게? 길버트가 서운해할 텐데.”
“얼굴은 비췄잖아.”
깨물린 입가에서 아릿한 감각이 일었다. 그는 입술 안쪽의 옅게 찢어진 상처를 혀로 문질렀다.
“닉시 양은?”
굳이 따끔한 상처를 헤집었다.
벤자민은 입술 끝에 닿았던 그녀의 이를 떠올렸다.
[……우는 소리 안 한다며.] [야, 잠깐만. 내가 흐…… 노력해 본다고 했잖아.]그녀는 몰아세우는 듯한 그의 키스에 작게 숨을 헐떡였다.
옷 사이로 파고든 건 손뿐이었음에도 생경한 감각에 그녀는 발끝을 오므렸다. 좀 천천히 해. 그녀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볼멘소리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좀 힘들어.
그리고 다시 깊게 입을 맞췄다.
밀폐된 캐비닛. 착실하게 데워지는 온도. 그러다 숨이 부족한 닉시가 좁게 맞붙어 있는 입술 틈으로 작게 숨을 내쉬었다.
[닉시.]지금은 키스만이라며, 그럼 혀를 써야지, 이 세우지 말고. 맞물린 입술 사이, 그가 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닉시가 꿍얼거렸다.
벽 끝까지 몰려 있던 그의 위치가 순식간에 반전됐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를 들어 올려 좁은 선반 위에 걸쳐 앉게 했다. 좁은 캐비닛이 덜컹거렸고 와인 잔들이 일제히 달그락 이는 소릴 냈다.
[자, 잠깐만.]발끝이 땅에 닿지 않아 당황한 닉시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당황했다.
그 사실은 그를 은근하게 자극했다. 그의 가슴 언저리를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 것. 그게 자신으로 인함이란 것. 묘한 성취감. 소유욕. 사랑스러움.
‘……귀여워.’
그는 고개를 틀어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살 깨물었다. 먼저 입을 열라고 말하는 듯, 깨물고 핥고 벌리고.
[야, 야 잠깐만! 잔 떨어질 것 같아.] […….] [응, 내 말, 흣…… 안 들려?] […….] [벤자민!]그러다가 깨물렸다.
벤자민은 입꼬리 안쪽의 상처를 핥았다. 약간 피 맛이 나는 비린 맛. 꽤 오래갈 것 같은 상처. 내일이면 이걸 보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절절맬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픽 웃었다.
“글쎄. 밤바람이 필요해 보이던데.”
창문 아래 쭈그리고 앉아 있는 닉시는 뚱해진 얼굴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 있었다.
“바보.”
그녀는 양손으로 붉어진 뺨을 덮었다.
뿌옇게 흩어지는 입김.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무척이나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