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6
외전 2. Espresso martini
새해가 지나고 마을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것은 광장의 크리스마스트리에 동그란 오너먼트 대신, 새해의 안녕과 소원을 비는 종이들이 주렁주렁 달리게 된 것이고, 헬렌의 잡화점에는 산타 모자 대신 새로운 연도의 달력이, 에드가의 씨앗&모종숍에선 완두콩 모종이 새로 들어온 것이다.
그 외에도 목장의 양들은 한 해 가장 두꺼운 양털을 갖게 되었고, 마을 회관은 새해를 맞아 대청소했다. 길거리의 눈을 치우고, 들판의 잡초들을 뽑고.
해변에는 마침내 라울의 무덤이 생겼다.
그 원흉은 당연하게도 양목장의 아가씨. 그녀의 좌절로 종지부가 찍혀 버린 비극적인 짝사랑 때문이었다.
해가 바뀐다고 들떠야 하는 날에 오베르 사람들은 드디어 마을이 물에 떠내려가는 줄 알았으니.
농장의 양들이 그레타의 눈물에 떠밀려 가고, 마을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길버트가 그녀의 통곡에 도망간 양들을 주워 오느라 진땀을 뺐다.
―털썩.
길버트가 새하얀 모래사장에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그냥 받아 주지 그랬어요. 라울 씨만 빼고 오베르의 모든 사람이 그레타 편인데.”
마을 이장이 땀을 닦으며 삽을 내려놓자. 그 옆에 가지런히 파묻혀 있던 라울이 하하, 하고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모래가 부드러운 해변. 평화로운 파도 소리가 들리는 바닷가의 백사장 한가운데. 그곳에는 라울이 목만 내놓은 채 파묻혀 있었다.
라울은 작게 한숨 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이야. 난 어르신들이 그레타 눈에 눈물 나오게 하면 묻어 버리겠다고 협박하시던 게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새해가 지나고 첫 번째로 돌아오게 된 일요일 아침. 라울은 마침내 그레타에게 고백받았다.
라울은 그레타의 수줍은 입에서 ‘좋아한다’를 의미하는 단어를 들었고, 그 단어가 주는 바람 새는 소리가 생각 외로 무척. 무척이나 발음이 센소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미안해요, 그레타 양.]그걸 자각했을 때는 이미 입 밖으로는 착실하게 거절의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레타가 라울에게 오랫동안 고백의 문장을 준비했을 시간만큼, 라울 또한 오랫동안 준비했던 상냥한 거절의 문장이었다.
“라울 씨는 아직도 그…… 선생님인지를 짝사랑하고 계시는 중인 거예요?”
길버트가 비스듬히 고갤 기울여 라울을 바라보았다. 라울은 길버트가 제 스승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마을 이장의 소식통을 무시하시면 섭섭하죠.”
“닉시 양이 말해 줬나 보네.”
“오, 제가 바텐더의 눈치를 무시했군요.”
“하하. 섭섭해, 길버트.”
‘하기야 내가 닉시 양에게 스승님을 짝사랑했다는 사실을 말한 적 있었지. 직접 본 적도 있었고.’
라울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스승님을 사랑한 건 사실이다. 그 사랑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음 깊게 남은 사랑인 것도 맞고, 쉬이 잊히지 않을 것도 맞았다.
그러나 그게 누군가의 고백을 거절할 만큼 큰 이유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아물고 남은 과거의 상처 자리가 통증을 유발하지 않듯, 그에게 스승님은 딱 그 정도였다. 때 지난 흉터.
그가 그레타의 고백을 거절한 이유. 가장 큰 이유는…….
“나이 차가 있잖아. 내가 그레타 양을 처음 봤을 때가 15살인데.”
자신을 좋아한다는 티가 팍팍 나는 수줍은 소녀. 그녀의 첫인상은 그게 전부였다.
누군가 자신을 순수하게 좋아해 주는 건 좋은 일이지. 때마침 스승님을 짝사랑했던 어릴 적 자기 모습도 떠올랐고, 자기 행동 하나하나에 표정이 밝아졌다가 안절부절못했다가 붉어지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귀여운 동생 같으니까.
“풋사랑인 거야. 어린 날에는 자기보다 큰 어른이 멋있어 보이기 마련이잖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히겠지.”
“음, 6년이 지났는데요? 아, 이제 해가 바뀌었으니 7년인가.”
“그건 나도 의외였어…….”
소녀가 마을에서 손꼽는 미인으로 자라난 뒤에도 그녀는 여전히 라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소녀가 “이제는 칵테일 만드는 법을 배울 수 있나요?”라며 물어 왔던 여느 아침에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멍청하게 대답하기도 했다. “아, 아직 안 된답니다. 생일이 지나야 해요.”
여러모로 곤란하면서도 미안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귀여운 목장 아가씨.
라울은 잠시 그레타의 수줍은 뺨을 떠올렸다. 붉어진 귀여운 뺨. 사랑받고 자란 이 특유의 사랑스러운 분위기. 뺨의 솜털. 아 역시 안 되겠다. 내면의 죄책감을 닮은 무언가가 그의 생각을 막아섰다.
“역시 그래도 안 돼.”
“하아. 나이 차가 대수인지. 국경을 초월한 사랑도 있잖아요.”
길버트가 픽 웃으며 언덕 위로 턱짓했다. 그곳엔 때마침 해변에 바텐더가 묻혀 있다는 소식에 구경나온 화가가 있었다.
라울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벤자민을 보곤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하기야 그렇지.”
“오셨어요, 벤자민?”
길버트가 가장 먼저 아는 체했다. 벤자민은 모래찜질 중인 라울의 몰골을 보곤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선탠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 있군.”
“그러게.”
벤자민도 라울 옆에 자릴 잡고 앉았다. 길버트는 벤자민의 평소 같은 덤덤한 옆얼굴을 바라봤다.
늘 물안개 낀 바다 같은 고요하고 적막한 표정. 그런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는 건 늘 누군가 그의 옆에 있을 때뿐이었다.
길버트는 과장된 몸짓으로 벤자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한탄했다.
“아무튼 라울 씨. 저는 그레타 편이에요. 전 누구 때문에 고백도 못 하는 사람이라 라울 씨의 편은 절대 못 들어 줄 것 같거든요.”
“호오, 그래? 그건 몰랐던 사실이네.”
“……떨어져.”
“왜요, 제가 싫어요?”
길버트가 말꼬리를 질질 늘리며 벤자민에게 눌어붙었다.
누구 때문이라는 이장의 가벼운 말이 그의 양심을 콕콕 찔러 왔다. 그 때문에 마을 이장의 심술 맞은 행동에도 화가는 차마 매정하게 그를 뿌리칠 수 없었다.
벤자민은 그 어느 옛날 동생에게 하듯 그의 머리카락을 꾹 눌렀다. 길버트는 장난스러운 웃음소릴 내며 떨어졌다.
“참, 벤자민.”
마을 이장의 부름에 화가가 고갤 들었다.
“요즘 닉시가 마을 사람한테 새해 소원을 묻고 다니던데, 무슨 일 있나요?”
“그 녀석 변덕을 내가 어떻게 알아.”
“알아야죠, 이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제가 먼저 알아 버리면 괜히 심통 낼 거면서.”
능글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화가는 길버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퉤퉤. 길버트가 입에 들어간 모래를 뱉어 냈다.
“닉시 양이 또 뭘 하나 봐?”
“네. 마을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소원 나무로 바꿔 놨어요. 소원이 이뤄지는 나무라고 자랑하고 다니길래 저도 거창한 소원 하나 적어 놓고 오던 참이에요.”
“하하, 뭘 빌었는데?”
“마음의 안정과 심신의 평화요.”
“그 녀석이 당분간 조용하겠군.”
마을 이장의 안정과 평화는 마을의 평화에서 오는 법이니까. 늘 마을의 안정을 위협하는 농부가 양심이 있다면 자숙할 터였다.
벤자민이 중얼거리자 길버트가 허릴 굽히며 크게 웃었다.
슬슬 답답해진 라울이 한쪽 팔을 구덩이에서 꺼냈다. 모래알이 우수수 쏟아졌다. 길버트는 너무 웃어서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어라, 라울 그렇다면 긴장해야겠는데요?”
길버트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라울이 이유를 묻듯 고갤 들었다.
“지금 마을의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게 누군지 모르겠어요?”
“음…….”
라울이 눈을 굴려 바다와 저 멀리 들판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언덕 위의 오두막과 모래사장을 따라 흘러가다가 구덩이의 묻힌 자신에게 도달했다.
“설마 난가?”
“너지.”
“라울 씨죠.”
새해 첫 오베르 마을의 위기. 그레타의 고백 실패.
여러모로 마을을 사랑한다 외치고 다니는 닉시나, 마을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자가 아닐 수 없었다.
라울은 괜히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매만졌다.
“설마, 그레타 양이 또 고백할 리가 없잖아.”
마지막에 그렇게 울렸는데. 라울은 그레타의 시큰하게 붉어졌던 콧잔등을 떠올리며 말을 흐렸다.
“에이, 그레타 마음을 너무 모르네요. 그렇게 간단하게 포기할 거였으면 7년 동안 전전긍긍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런가…….”
그렇다면 그는 이 전의 거절보다 더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을 수 있는 거절 멘트를 생각해야만 했다.
“……어떡하면 울리지 않을 수 있을까.”
라울이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떡하면 마음 여린 아가씨의 순정을 가장 평화롭고 건전한 방법으로 지켜줄 수 있으려나. 라울은 앓는 소릴 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자빠트려요.”
비티의 발언에 닉시가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양목장 구석의 작은 티타임 장소. 그곳에는 목수와 양목장 아가씨, 농부가 불건전한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레타는 울어서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되물었다.
“자빠트리라고요?”
“네. 그러니까 라울 씨가 그레타 양을 거절한 이유가 뭐라고요?”
그레타는 지난 일을 회고했다.
새해가 밝고 그레타는 이번에야말로 고백하겠다 결심했다.
그렇게 그의 집 앞에서 발길을 돌리길 일주일, 서성이길 295번, 닫힌 바의 문 앞에 대고 고백을 연습한 지 16번.
17번째 연습을 마치고 뒤 돌았을 때, 그레타는 바를 열려고 그레타 뒤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라울과 마주쳤다.
일순간 머리가 새하얘진 그레타는 7년간 준비하고 외웠던 것들이 무색하게도 한참을 횡설수설했다.
무척이나 엉망진창인 고백이었다.
[미안해요.]그런 고백을 해 버렸으니, 거절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녀는 그의 미소 대신 그의 난처한 표정과 바라고 바랐던 대답 대신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다.
거절을 의미하는 직접적인 표현은 담기지 않았지만 그 어떤 거절보다 명백한 거절 의사였다.
“선생님…… 아니 라울 씨는 제가 소중한 제자래요.”
닉시가 숨을 들이켰다.
“한 번도 저를 제자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으시다고…….”
닉시가 숨을 매우 크게 들이켰다.
“제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다고…… 미안하다 하셨어요.”
닉시가 숨을 매우 매우 크게 들이키기 전에 비티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비티는 라울이 안쓰럽다며 혀를 찼다.
“라울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무척이나 고지식하네요. 이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레타 양이 제자로밖에 안 보인다니. 하지만 그럼 오히려 간단한 일 아니겠어요?”
“네?”
“그레타 양의 사랑을 거절한 게, ‘사실 숨겨둔 부인이 있다.’, ‘신체 부위 일부가 서지 않는다.’ 아, 물론 무릎을 말한 거예요, 알죠? 아니면 ‘남자를 좋아한다.’ 같은 이유가 아니잖아요.”
“셋 다 큰일 날 소리지.”
닉시가 크게 공감한다며 고갤 끄덕였다.
“그럼 제자 이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주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비티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미소 지었다.
“자빠트려요.”
그때까지만 해도 슬픔에 젖어 있던 양목장 소녀의 표정이 조금씩 결연해졌다.
제자로 느껴진다면, 제자 이상으로 느껴지게 만들면 된다.
그 간단하고도 쉬운 논리 앞에 그레타는 다짐이라도 하듯 굳건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네!”
다음 날 아침. 라울은 또다시 해변에 묻혀 머나먼 곳의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벤자민은 담요를 두른 채 라울의 옆에 앉았다.
서늘한 아침의 바닷바람. 아침에 약한 화가와 아침부터 혼이 빠질 일이 있었던 라울이 함께 먼 수평선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레타 양이 마음의 상처가 컸나 봐.”
“왜.”
“……미안하지만 말 못 해.”
그럼 뭐하러 말을 꺼낸 거야.
벤자민은 라울을 내려다봤다. 늘 온화함과 편안함에 맞춰져 있던 그의 웃는 낯엔 당황함이 그득하게 묻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유독 분에 차서 라울을 파묻더라니 무슨 일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라울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아침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아침. 라울이 가게 문을 열기 위해 바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가게 앞에는 희고 폭신한 숄을 걸치고 있는 그레타가 있었다.
‘이런, 정말로 아직 포기하지 못한 건가.’
라울은 그녀의 둥근 뒤통수를 바라보며 난처하게 미소 지었다. 그레타가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섰고, 라울은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거절 멘트 중, 가장 소녀가 상처받지 않을 말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선생님.”
“저 그레타 양…….”
그리고 그가 차마 말을 다 이어 가기 전에 그레타가 라울의 멱살을 잡고 바닥으로 엎어치기 했다.
‘어라.’
라울의 잘 정돈된 포마드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리고, 라울은 난생처음 무중력 상태를 느꼈다.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바닥으로 착지.
―푹신.
라울의 살짝 벌어진 입에서 희미한 의문이 새어 나왔다.
공중에서 한 바퀴 돈 것치고 등 뒤로 맞닿는 바닥의 느낌은 푹신했다.
언제 깔았던 건지, 목장 아가씨가 입고 있던 도톰한 양털 숄을 땅바닥에 내던졌었기 때문이었다.
라울이 갑자기 일어난 레슬링 사태에 정신을 못 차리고 눈을 깜빡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새파란 하늘. 그리고 해를 등지고 있는 목장 아가씨의 검보랏빛 실루엣.
“선생님.”
떨림을 가다듬기 위해 속삭이는 여린 목소리와, 그에 반면 옷깃을 단단하게 부여잡고 있던 손.
라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레타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레타의 옷차림을 보고 속으로 작게 탄식했다.
“그레타 양…… 그렇게 입고 있으면 감기 걸려요.”
“네, 네?”
목장 아가씨가 그의 손을 붙잡고 있지만 않았다면 그는 얼굴을 쓸어내렸을 터였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 맨살이 더 많이 보이는 옷차림이라니.
늘 조용해서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 외에 속마음을 가늠하기 어려운 아가씨였다.
누가 이 순진한 아가씨에게 무슨 바람을 불어 넣었는진 몰라도…….
“젊다고 추위를 우습게 봤다간 독감에 걸린답니다.”
라울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그레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지금 보니 치마는 허벅지까지 뜯어져 있는 디자인이었다.
‘대체 시골에서 누가 이런 옷을…… 빅토리아 양? 아니면 헬렌인가.’
라울은 재빨리 웃는 낯을 하며 시선을 거뒀다. 본 것을 못 본 척하고, 들은 것을 못 들은 척하는 건 그의 오래된 습관이지 직업병이었으니.
“잠깐 들어올래요? 코코아 만들어 줄게요.”
“아, 저…….”
그는 그녀에게 둘러 준 재킷 단추를 꼼꼼히 잠가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코아가 아니면 토스트를 만들어 드릴까요? 그레타 양이 좋아하는 크림치즈를 듬뿍 올려 드릴게요.”
그가 말했다. 말수가 적은 아가씨를 배려해, 꾸준히 질문해서 적막이 찾아오지 않게 한다. 그레타 양은 낯을 많이 가리는 만큼 누가 본인을 어색해하는 게 느껴지면 당황하니까 평소같이 행동한다.
‘고백하러 온 거겠지?’
“안 그래도 엊그제 만든 버터가 무척 고소하더라구요.”
라울은 바의 문을 열었다.
‘갑자기 엎치는 바람에 당황스러워서 상황을 얼버무리긴 했는데…… 괜히 분위기 잡으면 그레타가 당황할 테고.’
“버터로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 볼까 하는데, 그레타 양이 시식 한번 해 주시겠어요?”
선생님.
창문을 열어 탁해진 공기를 환기하고, 어정쩡하게 문가에 서 있는 아가씨를 지나 카운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선생님.
‘그냥 이대로 없던 것처럼 행동하면 되려나. 그러면…….’
“그레타 양이 처음으로 먹어 주면 무척 영광일 것 같은데.”
“선생님!”
그레타가 소리 높여 외쳤다. 습관적으로 닦을 컵을 찾던 라울이 움직임을 멈췄다. 라울과 그레타 사이. 넘기에는 높이가 있는 카운터가 있었다.
라울은 목까지 붉어진 그레타를 바라보았다. 어린 얼굴. 풋풋하고 순수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어리디어린 때만의 특권.
그도 저런 얼굴일 때가 있었다. 그가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선생님을 짝사랑하게 됐을 때.
본인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 사람의 앞에만 가면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저, 저 아직 말 안 끝났어요.”
‘그냥 이대로 없던 것처럼 행동하면 안 되나. 그러면……’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던 그런.
“그러니까…….”
‘그러면 언젠가 짝사랑도.’
어린 때.
“아직 안 끝났어요.”
“끝날……텐데.”
라울과 그레타는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먼저 정신 차린 것은 라울 쪽이었다. 그는 손으로 입을 덮었다.
뒤늦게 입을 틀어막는다고 해서 쏟아진 말을 주워 담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라울은 어색하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뭐든 좋으니 얼버무릴 수 있는 평소 같은 말들을 긁어모았다. 그러나 그것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레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보자, 말문이 턱 하니 막혀 버려서.
“이젠 정말 끝났겠지?”
라울이 말했다. 벤자민은 모래사장에 목만 내놓고 있는 라울을 내려다보았다.
“뭐가.”
“아무래도 내가 그레타 양의 고백을 듣지도 않고 거절한 것 같아서. ……울리기까지 하고.”
“…….”
쓰레기. 벤자민이 중얼거렸다.
“다 들려, 벤자민.”
라울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레타 양……. 쉽게 상처받는 사람인데. 이번엔 정말 끝났을 거야.”
어쩌면 앞으로 가게에 오는 일도 없을지 몰랐다. 그레타 양을 잃어버리면 그레타 양을 비롯한 바이올렛가 사람들과 그레타를 예뻐라 하던 마을 사람들까지 그의 바에 발길을 끊을지도 몰랐고.
“오히려 잘됐잖아.”
퍽 쓸쓸해 보이는 바텐더를 바라보며 벤자민은 툭 말을 내던졌다.
“받아줄 생각 없었잖아. 그러면 차라리 그렇게 딱 잘라서 거절하는 게 낫지. 괜히 여지를 주는 것 보다.”
“……웬일로 맞는 말을 하네.”
라울의 말에 기분 나빠진 벤자민이 얼굴을 구겼다.
“하하. 하긴 애매하게 굴어서 헷갈리게 만드는 건 상대방에게도 몹쓸 짓이니까.”
그러니까 된 거겠지. 라울은 다시금 평화로운 해변과 수평선을 바라봤다.
‘그건 동경하는 마음이니까. 그저 어린 마음에 동경을 사랑으로 착각한 거니까.’
라울은 그레타를 보면 마음 한구석에 괜스레 옛날 일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그러니까 정말 끝났겠지.’
“아무래도 선생님은 저를 더 이상 사람으로도 생각하지 않으시는 모양이에요.”
길버트의 집. 거실 테이블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은 그레타는 퉁퉁 부은 눈을 하고 그렇게 말했다.
쿠키를 먹던 길버트의 손이 우뚝 멈췄다. 닉시와 비티는 입에 물고 있던 쿠키 덩어리를 마시듯 삼켰다.
“……말도 섞기 싫으신 모양이었어요.”
“어머나…….”
“정말……? 왜지? 우리의 작전은 완벽했는데.”
닉시와 비티는 비장해진 표정으로 상체를 숙였다.
“작전?”
그녀들의 작전을 모르는 길버트도 비티와 닉시를 따라 상체를 숙였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봐.”
“네……. 우선 헬렌에게 옷을 빌리고, 여러분이 조언해 준 대로 선생님을 자빠뜨렸는데.”
“자빠…… 자, 잠깐. 여러분, 그레타에게 대체 뭘 가르쳐 준 거예요.”
“조용히 해, 길.”
“넵.”
“선생님이 ‘끝났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말도 하기 싫으신지 입을 틀어막으셨죠.”
그레타가 봤던 그 모습 그건 평소의 나긋한 표정이 아니었다. 웃음기가 말끔하게 사라진 얼굴과 찡그리고 있던 눈. 적잖이 당황했던 건지 허리에 팔을 올리고 있던, 약간 삐뚜름한 자세까지.
“이젠 제가 보기도 싫어지신 건 아니겠죠?”
그레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제집이 눈물바다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던 길버트가 손수건을 꺼내 그레타의 얼굴에 붙여주었다.
“라울 씨가 그렇게나 싫어할 줄이야…….”
“그러게 말이야. 그레타 같은 아가씨가 덤벼들면 벼락 맞을 정도의 행운 아닌가? 이봐, 길.”
“응?”
“그레타 같은 미인이 ‘좋아한다’고 말하면 어때.”
“음, 너무 좋지.”
“그럼 그레타 같은 미인이 적극적으로 유혹한다면?”
“와…… 너무 좋지.”
“근데 왜 자빠뜨렸는데 싫어하냐고.”
“그러니까 여러분, 그레타에게 대체 뭘 가르친…….”
“아! 라울 씨가 적극적인 여자를 싫어하는 거 아닐까요?”
비티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본능적인걸 왜 싫어하지? 닉시는 이해가 될 듯 말듯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적극적인 행동에 늘 질겁하던 남자 한 명을 떠올렸다.
‘그렇지. 그 녀석은 벌거벗고 덤벼들어도 유혹에 넘어가긴커녕 전속력으로 도망칠 거야.’ 비슷한 사람들끼리 친구를 한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닉시는 이해를 마친 뒤 고갤 끄덕였다.
“그러면 방향을 바꿔서 넘어오게 만드는 건 어때?”
“어떻게요?”
닉시는 본인의 짧은 연애사들을 떠올렸다. 대부분의 연애 기간이 토끼의 사정시간만큼이나 짧았기에, 도움 될 만한 것들은 별로 없었으나 그녀에게 접근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하게 말했던 것이 있었다.
조용하고 지적인 분위기가 제 이상형이다. 활발하고 웃는 얼굴이 제 이상형이다. 괴팍하고 천재적인 부분이 제 이상형이다. 이상형.
“바텐더의 이상형을 물어보는 거야.”
* * *
“그 녀석이 네 이상형을 알아 오라던데.”
“아하…….”
벤자민은 점심 식사로 간단한 샌드위치와 뜨거운 커피를 시켰다.
“아직 끝난 게 아닌가 보네…….”
“이 마을 사람들의 고집은 질경이 풀보다 질기니까. 이것도 돌려주라더군.”
바텐더가 카운터 위에 뭔갈 올려놨다. 그레타의 어깨에 둘러줬었던 바텐더의 재킷이었다.
라울은 간단히 고맙단 말을 전하며 재킷을 집어 들었다. 재킷 안쪽엔 작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엄청난 악필인 걸 보아, 닉시가 쓴 쪽지였다.
“아무래도 닉시 양이 가세한 모양이야.”
“큰일이군.”
벤자민은 라울의 앞날에 유감을 표했다.
라울은 묘한 꽃향기가 나는 자켓을 의자 옆에 대충 걸쳐두며 생각했다. 이상형. 보통 이상형이라는 건 좋아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딱히 정해지지 않고 그냥 좋으면 좋은 대로 변하는 그런 거.
“이상형이라…….”
* * *
“자신보다 키가 큰 사람이 좋대.”
닉시가 끔찍한 사실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을 함께 듣고 있던 길버트와 비티, 그레타가 마른침을 삼켰다.
“길, 바텐더 키가 얼마더라…….”
“이, 일단 180cm는 넘을 거야. 나보다 조금 더 크니까. 그레타, 넌 키가 얼마야?”
“162cm……이에요.”
“그, 그렇다면 제가 30cm 통굽 구두를 만들어 드릴게요!”
“바텐더의 무릎을 꺾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그날 저녁, 그레타는 비티가 만든 특제 통굽 구두를 신고 라울의 바로 향했고, 본인의 높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돌진했다가 문에 이마를 박아 쓰러졌다.
그날, 마을에는 그레타가 서커스에 데뷔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인상이 날카로워 보이는 사람이 좋다던데.”
닉시와 비티는 헬렌에게 화장품을 왕창 빌렸다. 그중 검정색, 남색 등의 어두운색만 골라 그레타의 눈꼬리를 수직으로 그려 주었다.
“짠, 어때 길!”
“으악……!”
길버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 점심, 그레타는 닉시와 비티가 그려 준 화장을 하고 바로 향했다. 길을 가던 중, 그레타의 얼굴을 본 주정뱅이 매튜 할아버지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날, 마을에는 그레타가 서커스 데뷔를 위해 열을 올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누구와도 잘 친해지고, 활기찬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좋대.”
벤자민은 자다가 라울의 바로 끌려왔다. 그의 앞에는 바짝 긴장한 채, 굳어 있는 그레타가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나, 날씨가 좋죠?”
목소리 끝의 음이 삐걱대는 소릴 냈다.
“그렇군…….”
숨 막히게 어색한 분위기 속. 그레타는 필사적으로 웃어서 떨리는 입꼬리를 한 채 벤자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위해 내민 손이 위아래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
“저, 전 아, 앞으로 벤자민 씨와 친해지고 싶어요!”
“그래…….”
“우선 함께 화, 활기차게 악수할까요?”
“……아니.”
그날, 마을에는 그레타가 벤자민에게 서커스에 함께 입단할 것을 제안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연상이 좋다……던데.”
길버트의 집. 거실에 앉은 네 명 가운데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이젠 적잖이 눈치챌 수 있었다. 라울이 일부러 그레타와 반대되는 이상형을 읊고 있다는 것을.
바텐더가 정말 그러한 이상형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질문에, 여지 하나 주지 않는 답변이라니.
“그렇군요…….”
그레타가 조용히 대답했다. 나머지 셋은 괜스레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씁쓸함만 남은 침묵 속, 그레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이는 어쩔 수 없죠, 괜찮아요. 함께 고민해 주시고,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아, 아냐! 우린 도움이 된 것도 없는데.”
그레타가 고갤 숙이자 미안해진 닉시와 비티가 손사래를 쳤다. 고갤 든 그레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다시 한번 선생님께 제대로 말하고 올게요.”
그동안 사건에 떠밀려서,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서 진짜 제대로 된 고백 한마디 못 해 본 그녀였다.
제대로 말했어도 결과는 같을지도 모르지만, 그레타는 진지하게 말하지 못했다는 것을 핑계 삼기로 했다.
“마지막으로요.”
이번이 마지막. 진정 마지막.
* * *
라울은 마지막 남은 컵을 찬장에 내려놓았다.
“휴.”
그가 가게 문을 닫는 늦은 밤.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어서 평소보다 조금 일찍 가게 문을 닫았다.
텅 빈 가게를 정리하고, 식기들을 닦고, 의자들을 정리하자 비로소 하루가 끝났다는 피로가 몰려왔다.
라울은 적막한 가게 안을 바라보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요 근래 신경 쓸 게 많다 보니 정신없이 살았다. 현재에 충실하다 보면 과거는 희미해지고 묵혀 둔 걱정거리들이 뒷전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렇게 쌓아 놓은 것들은 보통 이렇게 조용하고 쓸쓸한 밤에 찾아온다.
라울은 구석에 밀어 두었던 걱정거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근래 양목장 아가씨의 기행들에 관한 것이었다.
어린 제자의 짝사랑. 좋아한다고 말하던 풋내나는 고백.
그도 익히 해 봤던 짓이었다.
‘나는 선생님을 얼마나 좋아했더라…….’
라울이 바텐더가 되었던 오래전. 딱 지금의 그레타 또래인 아주 어린 애송이였던 때.
그는 자신의 라틴어 선생님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어리디어린 사랑이 그렇듯, 처음 불이 붙은 석탄처럼 활활 타올랐다. 처음 맛보는 애달픈 감정에 눈이 멀어 가슴 졸이고, 전전긍긍하고, 착한 제자라는 말에 가슴 쓰려 보기도 하고.
‘선생님이 약혼한 걸 알게 돼서 고백도 못 해 봤었는데.’
선생님의 약지에 반지가 생기고, 결혼식이 정해진 날에는 하루 종일 넋 나간 사람처럼 있었다.
그러다 결혼식은 차마 못 보겠어서 도망치듯 떠났다가 오베르에 정착하게 됐고.
시간이 지나면 잊히겠지. 언젠간 끝나겠지. 다 철없을 때 일 아닌가. 그런 식으로 흘려보냈던 게 벌써 9년이다. 애매하게 덮은 사랑 위로 시간이 두껍게 쌓여 버려서, 정작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말 한번 못하고 묻어 두게 되었다.
안될 사랑을 잊지 못해서 그레타의 사랑을 받아 주지 못하는 건 아니다.
이제 와서 제 선생님과 잘되는 걸 바라지도 않고, 이미 지난 사랑을 굳이 입 밖으로 낼 생각도 없다.
그는 그저 그레타의 고백에 가슴이 뛰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모습이 제 어린 시절 애송이였던 제 모습과 너무 닮았다고 여겨질 뿐. 젊음을 태우는 어린 제자가 부럽고 귀엽다고만 생각될 뿐. 그냥 저 같은 사람은 빨리 잊고 다른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길 바랄 뿐.
안 되는 이유는 열 손가락이 넘는데, 되는 이유는 ‘사랑’ 그 하나일 뿐.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상처받겠지…….”
라울은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게 문을 잠그고 가게 안쪽에 있는 제 침실로 돌아갈 때였다.
그때, 라울은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것이 누군지 직감할 수 있었다.
이번엔 어쩐다.
그는 걱정거리가 범람하는 것을 느끼며 문으로 걸어갔다.
“그래서 그렇게 입고 온 거라고?”
벤자민은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말했다.
“응!”
그의 앞엔 한겨울엔 어울리지 않는 얇은 원피스를 입은 닉시가 있었다. 그녀는 영화 속 교양 있는 중세 시대 여성처럼 치맛자락을 살짝 집어 들었다.
벤자민은 닉시의 맨다리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 있는 것을 보며 헛웃음 쳤다.
“예쁘지. 그레타에게 옷을 골라 주다가 안 입는 옷을 받아 온 거야.”
“그렇다고 이렇게 늦은 밤에…….”
벤자민은 문밖의 어두컴컴한 하늘과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일단 들어와.”
그녀를 가만히 세워둘 순 없어서 그는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닉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신나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벤자민은 닉시를 침대에 앉힌 뒤, 벽난로에 장작 몇 개를 집어넣고 미지근한 물에 적신 수건을 챙겨 왔다.
“이렇게 입고 다니면 동상 걸려.”
그는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의 종아리는 빨갛게 얼어 있었다.
“누가 그걸 몰라?”
벤자민이 그녀의 신발을 벗겼다. 양말을 내리자 작은 발이 보였다. 끝이 붉게 얼어 있는 작은 발.
그는 미지근하게 젖은 수건으로 얼어붙은 발을 감쌌다.
“아는 사람이 왜 이런 짓을 해.”
얼어 있던 발이 녹자 닉시는 간지러운 듯 킥킥거리며 발을 굴렀다. 벤자민은 그녀의 움직임이 잦아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닉시가 얌전히 멈추면 다시 발을 닦아 주었다.
“왜긴 왜겠어.”
“왜.”
그의 손에서 비롯된 은근한 온도가 그녀의 발끝, 발목, 종아리. 무릎 위를 타고 올라갔다.
닉시는 고갤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한테 예쁘단 소릴 듣고 싶어서지.”
벤자민은 고갤 들었다. 그의 손이 추위 때문에 분홍빛이 된 그녀의 무릎에서 멈췄다.
그는 왼손을 들어 그녀의 아킬레스건부터 시작해 종아리 아랫부분까지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이윽고 무릎 뒤쪽에 멈춘 그의 손이 그녀의 다리 한쪽을 옆으로 밀어내 파고들 틈을 만들었다.
벤자민은 닉시의 무릎을 둥글게 쓰다듬었다. 여전히 차가웠으나 그는 그 둥근 언덕을 착실하게 데웠다.
“예뻐.”
“나도 알아.”
“근데 너무 예뻐도 곤란해.”
“곤란하라고 입는 거야, 바보야.”
그는 큭큭 웃으며 닉시의 무릎 안쪽에 입을 맞췄다.
닉시가 이제 발은 됐다는 듯 두 팔을 벌렸다. 그 동작에 기꺼이 넘어가 준 벤자민이 닉시를 끌어안고 침대 위에 누웠다.
그녀는 차가운 발을 들어 장난스럽게 그의 허벅지를 문질렀다. 그는 섬찟한 온도에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그녀의 다리를 제 다리 사이에 단단히 끼웠다.
“그럼 이제 포기한 건가?”
“뭘?”
“목장의 그 아가씨가 라울에게 고백하는 거.”
“으음.”
닉시는 눈을 굴렸다. 창밖엔 눈도 비도 아닌 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밤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아닐걸. 아까 라울한테 고백하러 간다고 했으니까.”
“그레타 양.”
라울은 문 앞에 우산을 들고 서 있는 그레타를 바라보았다.
늦은 저녁. 살짝 얼어붙은 비가 내리는 추운 날씨. 그레타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예쁜 옷을 입고 라울의 바 앞에 서 있었다.
“선생님.”
라울은 그레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도 얇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아이.
그 마음을 몇 번이고 모른 척해도 꿋꿋하게 부딪혀 오는 풋사랑. 어린 치기. 어리디어린 소녀.
“저는…….”
“그레타 양.”
“제가…….”
결국 고백하지 못하고 도망쳐 버린 과거를 떠올리게 해서. 그때의 자신과 비교돼서 묘한 패배감을 들게 하는 기묘한 소녀.
“그레타 양, 저는……”
“미안해요.”
그레타가 말했다. 라울은 예상치 못했던 그녀의 사과에 눈을 크게 떴다.
“네?”
“좋아해서 미안해요.”
“…….”
“미안해요, 하지만 선생님.”
“……네.”
“정말 좋아해요. 진심이에요.”
라울은 소매를 끌어 그레타의 젖은 얼굴을 닦아 주었다. 추위로 불그스름하게 얼었던 소녀의 얼굴은 제 손길 한번에 금방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애틋하기도, 기특하기도, 애석하기도 했다.
좋아해서 미안하다는 말이 어디 있을까. 좋아함에 미안한게 왜 따라붙을까.
라울은 기어코 울어 버리는 그레타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울리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울지 말라는 말은 너무나 이기적인 상냥함일 것 같고,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니, 적막을 가득 메운 훌쩍거리는 소리가 소녀를 부끄럽게 만들 것 같기도 해서.
“저는 도망쳤어요.”
라울은 그다지 꺼내고 싶지 않았던 옛날이야기를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결혼한다고 해서, 그 모습을 보기 싫어서…… 축하해 주기 싫고, 행복한 모습을 보기 싫어서 도망쳤어요. 하하……. 용기도 없었고, 어리석었고, 어렸죠.”
“…….”
“그레타 양을 보면 제 옛날 모습이 떠올라요. 그렇게 순수한 감정으로 온 마음을 다해 부딪혀 볼 수 있다는 게 부럽고, 신기하고, 후회되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아직 도망치지 않았어요.”
“알아요, 그래서 멋있어요. 대견하고요.”
라울은 다시금 머릿속에 담아 둔 여러 낱말 중, 가장 소녀의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을 것을 고르기 시작했다.
고르고, 고르고, 고르다 문득 이 어리석은 배려가 진짜 그녀를 위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있는 힘껏 좋아한다고 말해 준 아가씨. 그런 아가씨에게 여전히 귀여운 제자인 것처럼 상냥하게 취급해 주는 것은 정말 그녀를 위한 걸까.
[라울, 넌 정말 내 소중한 제자야.]어쩌면 모르고 싶어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레타 양. 저는 그레타 양이 여자로 보이지 않아요.”
라울은 입 밖으로 말을 꺼내고도 아차 싶었던건지 마른세수했다. 그러나 그렇게 저질러 버린 주워 담지 못할 말속, 마음 구석에 밀어 두었던 진심이 고갤 쳐들었다.
“제게 그레타 양은 착하고 기특하고 소중한 제자일 뿐이에요. 사실 그레타 양이 제게 마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모르는 척했어요, 어린 마음에 찰나의 불꽃 같은 마음일 테니까. 어린 나이에는 어른이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가 오베르로 온 지 7년. 양목장의 작은 꼬마 아가씨를 본 게 7년 전. 그녀가 15살, 그가 25살. 그동안 양들이 자라고, 소녀가 어른이 돼도 그의 마음속 그레타는 그 시절 낯을 많이 가리는 꼬마 아가씨였다. 그의 짝사랑이 하나도 자라지 않은 것처럼, 그의 안에 아가씨도 한 뼘만큼도 자라지 않았다.
“하다못해 그레타 양은 늘 제가 하는 모든 게 신기하다고 했으니, 동경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어요.”
“…….”
“지금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예요. 그레타 양과 제가 안 되는 이유는 열 손가락을 넘지만 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라고요. 그러니까……. 후. 미안해요. 저는 도저히 그레타 양을 연애 대상으로 볼 수 없어요.”
“……저와 선생님이 안 되는 이유와 되는 이유를 생각하셨었어요?”
“그거야……!”
그레타의 순박한 질문에 라울이 욱하는 심정으로 고갤 들었다. 눈물에 젖은 그레타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거야 당연하죠.”
사람이 할 말 못 할 말 걸러내지도 않고 모질게 굴고 있는데 왜 이렇게 눈을 빛내고 있는 건지. 라울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못하는 이유 열 가지는 뭔데요?”
빗소리가 들렸다. 열어 놓은 문으로 고백하러 찾아온 소녀를 내쫓지도, 그렇다고 안으로 들이지도 못한 채였다. 라울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큰 이유는 제가 당신이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네.”
“두 번째로는 집안이요. 당신의 가정은 화목한 집안이지만, 저희 집은 그렇지 못해요. 전 부모님이 어디 계시는지도, 살아 계시는지도 몰라요.”
“네.”
“세 번째로는 마을 사람들이요. 마을 사람들이 당신을 너무 아껴서 제가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간 산 채로 파묻힐 것 같아요.”
“네.”
“네 번째로는 나이요. 설명은 안 해도 되죠?”
“네. ……의외네요. 저는 나이가 첫 번째일 줄 알았어요.”
“하아, 왜 그렇게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라울은 그치고는 꽤 까칠한 말투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아까부터 희미하게 웃고 있는 그레타는 이제는 제법 눈에 띄게 생기를 띠고 있었다.
“그게, 선생님이 아까부터 저를 그레타 양이 아니라 당신이라고 불러 주고 있어서……. 기분이 좋아요.”
허. 그 태평하고도 순진한 말에 라울이 탄식했다.
아무리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기분이 좋을 나이라지만. 뭐가 그렇게 즐거워. 뭐가 그렇게 좋은데. 뭐가 그렇게 순진해.
“아무튼 이제 됐죠? 저랑 그레타 양이 안 되는 이유.”
“그럼 저와 선생님이 되는 이유 한 가지는 뭐예요?”
뭐가 그렇게 귀여운 건데.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는 거요.”
머리를 북북 문지르던 그의 손이 우뚝 멈췄다. 동시에 더 이상 빨개질 것이 없을 것 같았던 그레타의 얼굴도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다. 그 뜨거워 보이는 얼굴을 계속 바라보자 라울은 제 귓가도 괜스레 뜨거워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서, 선생님 말로는 그러니까, 제가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만 있어도 된다는 거예요?”
“그…… 그 말이 아니잖아요.”
라울이 다급히 손사래 쳤다. 그러나 그레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을 뿐이었다.
“다행이다. 드디어 선생님께 제대로 전했어…….”
진짜,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뭐가, 뭐가 그렇게 좋은데, 너무 순진한 이유 아니야? 당신 방금 차였잖아. 그런데 왜 웃는 건데. 대체…… 도대체가…….
“대체 어쩌려고 그래요, 이 아가씨야…….”
이러다가 진짜 저가 좋다고 말해 버리면 어떡하려고. 라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그러나 그의 심란함을 눈치채지 못한 그레타는 여전히 방긋 미소 지으며 서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다리가 춥지도 않은 건지, 하늘하늘 날리는 원피스를 입고, 사랑이 여력한 얼굴로 서 있는 목장 아가씨.
“아직 제가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느껴질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죠?”
“네, 네……?”
“선생님이 여기에 25살에 오셨으니까, 앞으로 3년이 지나면 그때 선생님과 같은 나이가 되네요.”
“그레타 양?”
“선생님은 제가 동경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착각한 거라고 말했지만, 혹시 만약에라도 제가 3년이 지나도, 그때 선생님과 같은 나이가 돼도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소녀의 눈이 반짝였다. 목장 아가씨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앞에 섰다. 그레타는 잠시 긴장을 풀기 위해 떨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저랑, 저랑 결혼해 주실래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대뜸 어려운 질문을 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도대체가 뜬금없이 칵테일을 알려 달라고 나타났을 때부터 은근히 골 때리는 아가씨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사귀는 것도 아니고 결혼이라니.
라울은 어이없는 결론에 탄식하며 웃었다.
“그레타 양.”
“네?”
“생일 지났죠?”
“네.”
“칵테일…… 알려 드릴까요?”
라울은 문에서 비켜섰다. 그녀가 들어오고 남을 자리를 열어 주자 그레타는 조심스럽게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추우니까 몸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것부터 알려 드릴게요.”
“네!”
“미리 말하는 거지만,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음료만 먹고 돌아가는 거예요. 데려다줄 테니까.”
그레타가 고갤 끄덕이며 가볍게 웃었다. 라울은 그 웃는 낯을 바라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가벼운 종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