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8
외전 4. Happy Unbirthday
전쟁 전에도 전쟁 후에도 화가는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 적이 별로 없었다.
전쟁 전에는 먹고살기 바빴고, 전쟁 후에는 그냥 살기 바빴다.
그런 그에게 평화로운 시간이라 하면, 너른 들판, 햇볕의 빛이 한풀 꺾인 오후 4시, 멀리 보이는 강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풀밭에 누워 낮잠을 자는 그런 시간을 의미했다.
한겨울이 지나고 슬슬 햇볕이 따뜻해지는 날이 되자 벤자민에게는 불면증 외에 귀찮은 증세가 하나 더 붙어 버렸다. 기면증이었다.
증세가 심각한 것은 아니라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자진 않았다. 다만 불면증 환자라는 병명이 무색하게도 시시때때로 잠들어 있었다. 마치 그동안 자지 못했던 시간을 육체가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자주 곯아떨어지는 곳은 침대. 오후 4시에 창문으로 넘어온 햇볕이 머무는 거실 구석. 간혹 닉시의 집 소파. 그의 집 뒤편의 소담한 언덕 위. 바다와 그의 집이 한눈에 보이는 버드나무 아래.
그렇게 한번 잠들면 30분에서 한 시간 동안은 누가 옆에서 뭐라 해도 깨어나지 않았다.
처음엔 벤자민의 생명력이 다했다며 그를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었던 닉시도, 이제 그가 거실 바닥에 웅크려 있든, 붓을 쥔 채 버드나무 아래에서 주저앉아 있든 상관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무릎을 베개 삼아 함께 낮잠을 잤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했다. 그런 그들에게 낮잠은 가장 사치스러운 평화였다.
잠이 부쩍 늘자, 꿈도 종종 꾸게 되었다. 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손님은 그의 동생이었다.
흔한 하루, 특별할 거 없는 평범한 시간. 동생과 함께 강가에서 캐치볼을 하는 꿈.
강변 따라 잔디가 흔들리고, 강줄기가 느릿하게 흘러갔다. 볕에 반짝이는 물가의 윤슬과 더불어 동생의 남보랏빛 눈동자가 저를 보며 빛났다. 그리고 저를 향해 입을 벙끗한다. 일어나, 형.
벤자민은 눈물이 맺힌 채 잠에서 깨어났다. 멍한 정신을 차가운 아침 공기가 깨웠다. 창가로 게으르게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그는 시린 눈을 문질렀다.
이미 꿈 내용의 대부분은 잊어버렸지만 그는 그 남은 조각의 기억이라도 기억하고자 수면 아래 희미해진 풍경을 더듬었다.
추억 중에서는 목소리가 가장 먼저 잊혔다. 그다음으론 형태.
그리도 그리워하건만 기억은 추억조차 과거로 남겨 두겠다는 듯 자꾸만 희미해졌다. 자꾸만 물감을 덧대서 희미해진 스케치 자국처럼.
그랬기에 간혹 마주하는 동생의 꿈이 기꺼웠다. 비록 꿈일 뿐이라 기억 속이 오래 머물진 못한다 할지라도.
그리운 사람.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고향엔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고, 그 때문에 어디에 묻혔는지도, 혹은 재가 되어 어디론가 흘러가고 날아갔는지도 모르는 사람.
오랜만에 떠올리게 된 동생의 웃는 얼굴과 목소리를 그리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림을 새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뭘 그린다고 말하고 다니는 편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캔버스를 보며 닉시는 무슨 그림을 그리냐 물었다. 새것에 가까운 흰 백지 위, 약간의 사선을 그리고 있는 의미 불명의 수평선들.
아, 들판인가? 아니라고? 그럼…… 우리 집 언덕? 그것도 아니야? 설마…… 바다야? 아니라고?
그럼 대체 뭔데?
벤자민은 그림 앞에 앉아 수평보다는 약간 비스듬히 그어 놓은 스케치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렸던 수많은 그림 중 완성된 것은 많지 않았다. 최근엔 농부의 의뢰로 그렸던 그림, 농부에게 줄 선물로 그렸던 그림. 고작 두 개뿐.
보여 줄 사람이 없다는 게 실감 나서. 의미 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단 게 실감 나서 그는 늘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땐 그랬다.
그렇게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있을 무렵,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집을 방문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문으로 걸어가며 노크 소리의 주인이 누구일지 생각했다.
“안녕, 화가.”
그곳엔 닉시가 서 있었다. 쫄딱 젖은 채로 머리에 미역까지 붙이고. 누가 봐도 바다에 빠진 생쥐 같은 꼴.
하지만 이 녀석은 바다를 싫어할 텐데. 벤자민이 팔짱 낀 채 문에 기댔다.
“꼴이 말이 아니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무슨 일인데.”
벤자민은 닉시의 머리카락에서 미역을 떼어 냈다. 그게 붙어 있는지도 몰랐던 그녀가 끈적한 미역을 보며 질겁했다.
“새해를 맞아 심신의 나약함을 무찌르기 위해서 바다에 뛰어들었지.”
“바다에 뛰어든 건 누가 봐도 알겠어. 나약함을 무찌르는 데 실패했다는 것도 알겠고.”
“어떻게 알았지? 역시 화가는 관찰력이 뛰어나군.”
닉시는 물에 젖은 옷자락을 비틀어 짜냈다. 추위가 한풀 가셨다지만 아직 겨울이 지난 것은 아니라, 물에 젖은 몸이 빠르게 식어 갔다.
그는 새파래진 그녀의 입술을 보며 혀를 찼다. 그는 귀찮음이 담긴 손길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적이며 쓰다듬었다.
“들어오려면 들어오던지.”
그러나 그녀는 노크했을 때 모습 그대로 옴짝달싹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가 의문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있잖아, 크흠.” 그녀는 헛기침하며 뜸을 들였다. 그가 귀찮아지는 일이 일어나는 소리였다.
“내가 바다 공포증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줄래?”
“갑자기……?”
그러니까 대체 왜. 벤자민이 눈썹을 좁혔다.
“공포증이란 게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알지. 차분하게 단계를 밟을 준비도 마쳤어. 그러니까 오늘은 바다에 머리까지 들어가는 걸 목표로 할 거야!”
“……그런 건 ‘단계’가 아니라 ‘극단적’이라고 하는 거야.”
벤자민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담요를 닉시에게 덮어 주었다.
이런 추운 날에 바다에 머리까지 들어가겠다니. 차라리 남극의 펭귄을 만나겠다고 하는 게 더 나을 지경이었다.
“그런 건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아니. 지금이 적기야.”
“하, 얼어 죽기 좋은 적기?”
“들어 봐. 이건 과학적인 논리를 담고 있다고. 너 찬물이 차가운 건 알지?”
누굴 바보로 아나. 벤자민이 고갤 끄덕였다.
“찬물에 들어가면 뇌 신경에 노르아드레날린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을 생성하거든. 그게 사람을 각성 상태로 만들고 우울 증상을 완화하는데, 다른 환경 조건으로 심장이 뛰기 때문에 바다에 공포증 느낄 겨를이 없을 거란 말이야. 이 시기의 바다가 딱 심장 마비까진 걸리지 않을 정도의 수온이고 또…….”
또 시작이군. 닉시가 옆에 조잘거리든 말든, 벤자민은 비척거리며 겉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농부가 ‘하자!’라고 말을 꺼낸 이상, 그가 그 제안을 거부할 권리는 없었다.
“쉽게 요약해 봐.”
“물이 차가울 때 바다에 들어가는 게 공포증 극복에 좋다는 말씀.”
그는 여전히 그녀의 논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벤자민은 외출 준비를 마쳤다.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자 닉시는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들은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적당히 햇볕이 따사로운 오후. 저 멀리 짙푸른 색으로 흔들리는 바다가 보였다.
굳이 공포증을 극복할 필요가 있나. 벤자민이 짠 내음을 맡으며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해변이 가까워질수록 닉시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들판의 모래밭과 흰 백사장이 만나는 경계에 도착하자,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무서운 걸 굳이 이겨 낼 필요는 없잖아.”
그러자 닉시는 한껏 진지함을 꾸며낸 얼굴로 고갤 저었다.
“아니. 극복해야 돼.”
“왜?”
“너희 집에서 자면 파도 소리가 들리거든.”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그가 눈을 깜빡였다.
닉시는 오른팔과 오른 다리를 함께 움직이며 첫걸음마를 뗀 사슴처럼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대책 없긴. 멍하니 있던 벤자민이 다급하게 닉시의 팔뚝을 잡았다.
“잠깐 기다려.”
그는 닉시를 앉혀 두고 근처의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았다.
나뭇가지들이 어느 정도 소담하게 모이자, 그는 그 위에 불을 지펴 모닥불을 만들었다.
농부 성격에 바다에 뛰어드는 걸 한 번만 시도하고 끝내지 않을 텐데, 그럼 공포증보다 저체온증을 더 걱정해야 할 터였다.
“갑자기 웬 모닥불?”
“얼어 죽을 것 같으면, 여기서 불을 쬐고 다시 도전하라고.”
닉시는 모닥불 앞에서 쪼그려 앉아 불을 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후끈한 온도가 그녀의 기분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벤자민은 닉시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녀의 뺨에 눌어붙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겨 주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바다를 이겨 먹고 싶은 이유가 제집에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때문이라고…….
“우리 집에서 마음 편하게 자고 싶다는 거군. 파도 소리가 들리면 잠을 잘 못 자니까.”
정답. 닉시가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그는 정답을 맞히고도 미묘한 자괴감이 들었다. 이 사실에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무식한 결정이라고 혀를 차야 하는 건지.
결국 벤자민은 ‘나쁘지 않은 것’으로 결론 내렸다. 그는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뒤적였다.
“알겠으니까 갔다 와.”
“응? 같이 안 가?”
“난 바다 공포증 같은 거 없는데, 왜.”
“벤자민. 우리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자. 내가 널 왜 데려왔겠어.”
그가 질색하며 닉시를 올려다봤다.
“싫어.”
“벤자민! 네 사랑이 지금 공포를 무찌르러 사지로 들어간다고!”
“사랑의 힘으로 이겨 내.”
“사랑이 심장마비를 무찔러 주지 않아.”
닉시가 그를 바라보며 설탕이 녹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그 미소가 악마가 죄인의 엉덩이를 걷어차 지옥의 구렁텅이로 처넣을 때 짓는 미소와 같아 보였다.
그는 앓는 소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호! 백전백승의 그녀가 환호했다.
벤자민은 닉시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함께 지옥 물로 갈 동지가 생겨 기쁜 그녀가 신난 걸음으로 그의 앞에 섰다.
그는 그녀가 입고 있는 셔츠 단추를 하나둘 풀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뭐해?”
“옷까지 다 적시면 나왔을 때 춥잖아. 세탁하기도 힘들고.”
“그럼 벗고 들어가게? 여기 누드 비치 아닌데. 지나가던 할머니들이 보면 기겁할지도 몰라.”
“누가 다 벗고 들어간대?”
그는 그녀의 셔츠를 받아 모닥불 근처, 말리기 좋은 곳에 접어 두었다. 그녀의 얇은 속옷을 바라보던 그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군인이었다고 속옷까지 군인 같을 필요는 없잖아.”
“왜 이래, 이게 제일 편하다고.”
그는 결국 입 밖으로 나지막한 웃음 소릴 내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닉시는 막 바지를 벗던 중이었다.
“이봐, 잠깐만. 너는 옷 안 벗어?”
“응.”
“이거 사기꾼 아냐? 너 이래 놓고 내 옷 가지고 도망갈 거지. 내가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되는 걸 보고 즐기려고!”
“내가 넌 줄 알아?”
벤자민은 끝까지 본인은 옷을 벗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그 쇠고집에 닉시가 투덜거리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찬 바람이 불자 맨살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왔다. 몸이 떨리는 게 추위 때문인지, 바다 때문인지 모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귓가로 들리는 파도 소리와 짠 내음을 맡으며 발아래 부서지는 모래알의 촉감을 느꼈다.
젖은 땅에 다다르자 닉시는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여, 역시 무서운 걸 굳이 이겨 낼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발 한쪽을 바다에 담그고 있던 그가 고갤 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무슨 헛소리야.”
“그러니까 내 말은, 다음 이 시간에…… 으왓!”
―첨벙.
발이 물에 닿자마자, 그녀는 강에 빠진 고양이처럼 펄쩍 뛰어 그의 목에 매달렸다.
벤자민은 익숙하게 그녀의 몸을 안아 들고 바다로 들어갔다. 흰 거품이 그의 발아래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야, 야! 정도라는 게 있지, 나 공포증 환자거든? 왜 이렇게 빨리 들어가냐고!”
“귀에 대고 소리치지 마.”
금방 물이 그의 배꼽까지 차올랐다. 그에게 매달려 있는 닉시는 엉덩이 근처에 넘실대는 차가운 파도를 느끼며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었다.
찬물에 몸을 집어넣는 게 우울증에 도움이 된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우울할 틈도 없이 심장이 날뛰니까.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때문에 공포고 뭐고, 다 잊어버릴 판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무게가 추가되어 그의 걸음을 억눌렀다.
벤자민은 차가운 온도 속 가장 따뜻한 그녀의 몸을 깊게 끌어안았다.
“닉시.”
“으, 응.”
“더 깊이 들어갈 건데.”
괜찮지? 그는 상냥하게 그녀의 의사를 물었지만, 대답은 듣지 않고 행동했다. 그야 당연히 안 괜찮을 테니까.
그녀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께까지 차오른 물은 은근한 압박감을 주었다. 큰 움직임이 없어도 절로 숨이 찼다.
괜찮아?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물때문 인지, 추위 때문인지 그녀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는 닉시를 깊이 끌어안고 진정될 때까지 토닥였다. 색색이며 가쁜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춥다고만 여겨지던 몸에 희미한 열기가 피어나는 듯했다.
“끝까지 가는 건 힘들 것 같은데.”
“…….”
“여기까지만 할까?”
물론 그는 그녀가 원한다면 친절히 머리까지 담가 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닉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 드문 얌전한 모습에 벤자민의 마음 한구석에 괜히 얄궂게 행동하고 싶단 생각이 고갤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머리끝까지 담가 주는 대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다시 그의 집에 돌아온 그들은 가장 먼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마셨다.
거실에서부터 부엌까지 물웅덩이가 길게 이어졌다. 그들이 제법 오래 머문 곳의 바닥은 흥건하게 젖어 있었지만 그들은 굳이 상관하지 않았다.
벤자민은 한 명이 들어갈 법한 크기의 나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가 젖은 셔츠를 걷어 올리고 물 온도를 체크하고 있을 때, 닉시는 냉큼 욕조로 다이빙했다. 그는 표정을 구기며 얼굴로 튀어 오른 물을 쓸어내렸다.
“흐아……. 따뜻하다.”
닉시는 욕조 밖으로 팔다리를 내놓고 몸을 물 깊숙이 파묻었다. 그 모습이 꼭 프라이팬 위에 녹아내리는 버터 같았다.
“너도 들어올래?”
“아니.”
“왜에.”
“욕조 부서져.”
“핑계는.”
닉시가 입을 삐죽였다. 벤자민이 거실에서 등받이 없는 의자 하나를 가지고 욕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욕조 옆에 앉아 욕조 밖으로 길게 늘어뜨린 닉시의 머리카락에 물을 부었다.
소금기에 절여져 있던 뻣뻣한 머리카락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는 손으로 만들어 낸 비누 거품을 머리카락 위에 바르고, 조심스럽게 비볐다.
제 머리카락을 일종의 털처럼 다루는 그녀와 달리,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망가지기 쉬운 옷감인 것처럼 다루고 있었다.
닉시는 그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넌 무슨 소원을 빌 건지 생각해 봤어?”
닉시가 비누 거품으로 비눗방울을 만들며 말했다. 그게 뭐였던지 가만히 고민하던 벤자민이 고갤 저었다. 아. 마을을 시끄럽게 만든 소원 나무인지 뭔지를 말하는 건가.
“산타라도 되고 싶은 거야?”
“모두에게 깜짝 이벤트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지, 루돌프.”
선물 같은 거 안 줘도 맨날 깜짝 놀랄만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인데. 그는 그 생각 대신 “루돌프라고 부르지 마.”라며 핀잔을 주었다.
벤자민은 제 손에 머리를 맡긴 채, 남의 소원 따위를 고민하는 그녀를 바라봤다. 매번 참신하게 골치 아픈 일을 만드는 데 도가 튼 사람.
그는 그녀의 코 아래에 비누 거품을 묻혔다. 쌉쌀한 겨울나무 향이 나는 콧수염이 만들어졌다.
닉시가 간지러운 인중을 씰룩이며 말했다.
“뭐 해?”
“산타가 되고 싶다며.”
그녀가 이건 세 살배기 꼬마나 하는 짓이라며 그의 행동에 반론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그녀의 얼굴에 산타 수염을 그려 넣었다.
“산타가 되고 싶은 건 세 살배기 꼬마가 할 생각이 아니고?”
닉시는 입술 가로 삐져나온 비누 거품을 성의 없이 핥았다. 그러곤 퉤퉤 내뱉었다. 웩, 쓰고 미끌거려.
“물론 아니지.”
“왜?”
반문하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놀려 먹을 구석을 찾았단 표정이었다.
닉시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틀어서 그의 입에 입 맞췄다.
대충 뭉쳐 있던 비누 거품이 마찰하는 살결 아래 문질러지며 흘러내렸다.
그는 결국 그녀가 맛봤던 비누 맛을 맛보게 됐다. 쓰네. 그가 생각했다.
“꼬마가 이런 짓 하는 거 봤어?”
속을 살살 긁는 속삭임. 불만 지피고 도망가려 했던 그녀가 킥킥 웃으며 고개를 뒤로 빼려 했다. 그러나 그의 고개가 따라붙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턱 아래쪽을 끌어와 당겼다. 그리고 여린 살점을 베어 먹듯 그녀의 뺨에 이를 세웠다.
굳이 묻혀 놓고 굳이 닦아 주는 심보가 고약했다. 불친절하고 노골적이기까지.
닉시는 그의 코끝에 묻어 버린 비누 거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간지러워.
벤자민은 여전히 입 안에 남아 있는 텁텁한 맛을 느끼며 입가를 핥았다.
“쓰고 미끈거리네.”
“그렇지? 그러니까 너도 내가 쓰는 비누로 바꿔. 그건 쓰긴 한데 달콤한 향이 난단 말이야.”
“레몬 향? 싫어.”
그녀는 다시 욕조에 길게 누웠고, 그녀가 편안한 자세를 찾아 머리를 뒤척거리자 그가 손을 들어 기대기에 좋은 자세를 맞춰 주었다.
“마을에서 너만 유일하게 소원 종이도 안 적었다고. 네 소원만 목이 빠지라 기다리고 있는데, 안 할 거야? 참고로 길버트는 마을의 안녕과 심신의 평화래. 길버트를 위해서 오베르에 천국이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야.”
긴 머리카락 위로 비누 거품이 솜사탕처럼 몽글거렸다. 벤자민이 닉시의 머리칼을 헹구기 위해 작은 대야에 물을 담았다.
“벤자민, 무슨 소원을 빌지 모르겠다면 내가 정해 줄까?”
닉시는 욕조에 팔을 기댄 채, 고갤 숙인 그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만들어 낸 그늘이 그의 얼굴을 살포시 덮어 오자 그는 고갤 들었다.
“……알겠으니까 그렇게 보지 마.”
“‘그렇게’가 뭔데.”
“사고 치기 전에 주인 눈치 보는 개 같은 표정.”
“오. 요컨대 개 같다?”
“다를 바 없지.”
닉시는 그의 코를 꼬집어서 빨갛게 만들었다. 그러자 그는 닉시의 머리 위로 물을 부었다. 불시에 비누 거품이 코에 들어간 닉시가 시큰한 코를 부여잡고 캑캑거렸다.
억울해진 그녀가 벤자민의 얼굴로 물을 뿌렸다. 장난 이상의 물벼락이었기 때문에 그는 셔츠까지 흠뻑 젖어 버렸다.
그가 표정을 구기며 손등으로 얼굴을 닦아 내자 닉시는 샐샐 웃으며 그의 흉터 많은 손에 깍지를 끼웠다. 일찌감치 반격을 저지하는 움직임이었다.
덜 닦인 비누 거품이 그의 손에서 그녀의 손으로 옮겨 갔다.
“흉터 크림 어때?”
닉시는 그의 오른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찢겼다 붙은 흔적이 가득한 손바닥. 벤자민은 제 손바닥을 간질이는 그녀의 작은 손을 바라봤다.
보기 흉한가 싶어서 그는 입을 열었다.
“왜.”
“볼 때마다 아파 보여서.”
“딱히 그렇진 않아.”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손등에 짧게 입 맞췄다.
흉터가 사라진다고 하루아침에 환상통이 사라질 건 아니다만, 그는 그녀가 ‘흉터가 징그럽다’든지 ‘흉터가 못생겼다’, ‘꼴 보기 싫다’라고 말한다면 제 소원을 그것에 빌 의향이 있었다.
“내가 안 그래도 오래전부터 ‘사람의 신체 조직 재생’이라는 연구를 하고 있었단 말이야?”
“……내 신체 부위를 어떻게 할 셈이야.”
“그런 거 아니거든. 네 손이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해 줄게.”
그게 그 말이잖아. 그녀의 손을 지분거리던 벤자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도전 의식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였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를 무척이나 성가시게 만드는 것이 틀림없었다.
“미리 경고하지만, 내 손을 자르거나 다른 놈들의 손을 붙인다거나 하는 연구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그거 아쉽네.”
그녀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그는 그녀의 손가락 사이 여린 살을 깨물었다. 악, 아프다고. 아프라고 깨문 거야. 그녀가 투덜대자, 그는 알았으니 그만 툴툴거리라며 옅은 이빨 자국 위를 혀로 핥았다.
그의 입꼬리엔 아닌 척하는 흡족함이 걸려 있었다. 마치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 위에 제 이름의 스탬프를 찍어 놓은 꼬맹이처럼.
그녀는 그것을 눈치채곤, 개를 훈육하는 주인처럼 엄한 눈을 했다.
닉시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그를 내려다보자 그는 가소롭다는 듯한 코웃음 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위협하는 건가?”
“아니.”
“그러면?”
닉시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녀의 데굴데굴 굴러가는 붉은 눈을 보며 그는 그녀의 무릎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마치 생각할 시간을 카운트하듯.
“도발하는 거야. 음. 아마도.”
흐음? 그가 의문 섞인 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녀는 좀 더 뻔뻔한 얼굴로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내 머릿속에 있는 데이터를 종합해 봤을 때, 지금 너는 아무래도 나를 제법 귀여워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그 기대에 부응해 주기 위해서 꽤 도발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거지.”
“……이상하네. 내가 손해 보는 게 하나도 없는데.”
대체 무슨 생각이야, 닉시? 그는 나지막이 말하며 욕조 아래로 손을 떨궜다. 첨벙. 데워져 있는 물이 그의 손 따라 작은 물결을 만들었다.
“일종의 깜짝 선물인 셈이지. 예상치 못할 때 받는 선물이 제일 짜릿하잖아.”
“틀린 말은 아니네.”
그녀가 욕조에 몸을 기댄 채 킬킬댔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이마를 간질이듯 입 맞췄다.
“나 손에만 흉터 있는 게 아냐.”
“응?”
“다른 곳에도 있다고.”
“아.”
“많이 있어.”
그러니까 많이 준비하라는 거야? 그녀가 되묻자, 그는 애매하다는 듯 길게 고민하는 소릴 냈다.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그녀의 등이 욕조 끝에 닿았고 그는 닉시의 궁금증 가득한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도발한다는 사람치고 맹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는 그녀를 제법 귀여워하고 있었다.
그가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게 독일어라는 것만 알고 뜻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나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야,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으니까.
“뭐라고 한 거야?”
저렇게 웃겨 죽겠다는 눈빛으로 요상한 말을 했을 리 없으니까.
“음, ‘멍청이’라 했어.”
“뭐?”
그녀가 눈썹을 구겼다.
그는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고갤 숙였다. 그리고 그녀의 귀부터 시작해서 목덜미까지 차근차근 씹어 놓았다. 마지막 귓바퀴를 깨문 그가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도발하는 거잖아, 나도.”
내 몸 어디에, 어떤 흉터가 있는지, 찾아보라고.
물소리가 들렸다. 간지럼 섞인 탁한 한숨.
닉시는 그의 셔츠 옷깃을 잡아당겼다. 톡, 톡. 이윽고 그녀는 그의 셔츠 가장 윗단추부터 차근차근 풀어 나갔다.
“넌 제대로 보여 주지도 않을 거면서 도발은.”
“……불 끄고 싶은데.”
“거봐.”
가느다란 그녀의 손이 살결을 파고들듯이 쓸어내리며 그의 셔츠 한쪽을 뭉근하게 쓰다듬었다.
“할 거 다 하고 볼 거 다 본 사이에 매번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
그녀의 손끝에 매끈한 상체 아래로 불규칙하게 남겨진 상처들의 양각이 걸렸다. 닉시의 손이 그의 가슴 아래쪽의 갈빗대를 스치자 그가 한숨을 내뱉었다.
“보기 좋은 상처들은 아니니까.”
“그건 보는 사람이 정할 일이고, 보는 사람 입장에서 말해 주자면……”
그녀는 그의 쇄골 아래. 한 뼘쯤 나 있는 긴 자상에 살포시 입술을 내리눌렀다.
아팠을 시간이 새겨져 있는 흉터들. 평온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보면 놀라거나 동정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을 지나온 그들에겐 필사적으로 덧댄 과거의 기억들이자, 지금의 살아 있는 증거이자, 앞으로 더듬어 갈 잊히지 않을 상징이었다.
“예뻐.”
그는 아름다움을 말하는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바라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낯간지러운 단어였다.
그는 욕조에 기대 있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옆으로 비켜 봐.”
“들어오게?”
“응.”
그는 성의 없이 옷을 벗었다. 눅눅히 젖은 옷이 바닥에 소리 없이 떨어졌다.
한 명의 몸을 더 받아 낸 욕조에선 그의 무게만큼 물을 쏟아 냈고, 닉시는 한순간에 비좁아진 욕조가 웃겨서 낄낄댔다.
이쪽으로 기대 봐. 닉시가 그를 욕조 가장 모서리에 기대게 만든 뒤, 그의 상체에 등을 기대 왔다. 이게 가장 효율적이지? 욕조를 부숴 먹지도 않을 거고.
욕조 밖으로 그의 무릎과 그녀의 다리가 비죽 튀어나왔다. 그녀는 작은 솥에 치킨 수프를 끓이는 것 같다며 한참을 웃었다.
“오늘은 파도 소리를 지겹도록 들었으니까, 아마 이상한 꿈을 꾸지 않겠지?”
“자고 가게?”
“그럼 그냥 보내려고 했어?”
“누가 워낙 변덕스러워서 말이지.”
내가 원한다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법이 없잖아. 그가 말했다. 그녀는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목욕하겠다는 처음의 목표와는 달리 그들은 한참을 시시하게 투닥거렸다.
그녀가 쭈글쭈글해진 손가락을 보며 실없이 웃었고 벤자민은 그 별거 아닌 천진난만함에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럼 네 소원은 뭔데?”
“내 소원?”
“응.”
글쎄. 닉시가 가만히 고민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바로바로 쟁취하는 성격이라 금방 생각나는 건 없었다.
“흐음…… 그나마 쟁취하지 못해서 한으로 남았던 거라고 한다면, 제비꽃설탕절임 정도인가.”
“흐응.”
벤자민은 닉시가 말하는 꽃을 떠올렸다. 보랏빛 꽃.
이제 물은 미지근해져 있었다. 물의 온도보다 비좁게 붙어 있는 살결의 온도가 더 뜨거웠다. 마치 그 파도 속에 몸을 접붙이고 있던 그 시간과 비슷한. 서로의 체온으로 데일 것 같은 온도.
보라색은 그에겐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는 색이었다. 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사실…… 원하는 게 있긴 해.”
“뭔데?”
“동생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 거.”
“내가 아무리 능력이 좋다곤 하지만…… 죽은 사람은 못 살려. 알지?”
“알아.”
닉시는 불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그러곤 욕조에 걸치고 있던 그의 팔을 가져와 제 목에 둘렀다. 그가 반사적으로 닉시의 어깨를 끌어안아 왔다.
“더 이상 있어야 할 곳이 없어서, 돌아갈 곳이 있었으면 했어. 옛날이야기야.”
그는 닉시의 머리에 이마를 묻었다.
그가 동생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건, 삶에 발붙이고 살 이유가 필요해서였다. 살기에 급급했던 삶. 의미를 찾아야지만 겨우 빌어먹던 살.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자꾸만 붕 떠 버릴 때마다, 제 존재의 발목을 붙잡아 줄 그런 곳. 종착지, 안식처.
원하는 게 있다면. 저가 감히 미래를 바란다면.
“누군가의 옆에서, 그 사람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그땐.”
“…….”
“물론 지금도 그래.”
닉시는 손을 들어 제게 기댄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서로의 고개가 비스듬하게 스치고, 닉시는 그의 뺨에 콧잔등을 문질렀다. 그녀만의 애정 표현이었다.
“있지, 벤자민.”
“응.”
“나 내년에 농사를 아주 크게 지을 생각이야. 한번 망해 보니까 감이 오더라고.”
밭의 절반은 스트로베리, 블루베리, 크랜베리. 뒷산의 안 쓰는 빈터를 뒤엎어서 감자를 잔뜩 심고, 이번에야말로 고구마 성공을 위해 고구마도 잔뜩 심는다.
양파와 고추는 한 해 먹을 만큼만. 이번엔 포도 농사에 도전한다는 포부, 옥수수밭도 두 배로 늘린다는 떵떵거림.
“마지막으로 들판 끄트머리부터 우리 집 마당 앞까지 해바라기를 심는 거야.”
닉시는 그의 손바닥 위에 깍지를 끼웠다.
“어디에서 봐도 우리 집이 어딨는지 알 수 있게.”
“그래.”
그는 슬쩍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녀의 말을 가만히 따라 듣다 보니, 그 여름의 샛노란 해바라기밭이 떠올랐기 때문에.
“아마 오베르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될걸? 그래서 그런데.”
“응.”
닉시는 고갤 살짝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설핏 내리 까고 있는 보랏빛 눈동자가 설탕 바른 사탕처럼 반짝였다.
“내가 너 하나쯤은 먹여 살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랑 같이 살래?”
“……아?”
턱을 괴고 있던 그의 고개가 삐끗했다. 그는 약간은 얼빠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우리 사이에 ‘결혼하자’는 말은 우습고, ‘연애할래’라는 말은 너무 어려 보이잖아.”
“…….”
그녀는 귀 끝까지 빨개진 얼굴로 우다다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난 그냥…… 네 인생에 간섭하고 싶어졌다고 말하고 있는…… 건데…….”
쿡.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그의 잇새로 가벼운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한참을 큭큭대며 웃었다. 종국엔 옅게 눈물까지 맺힌 채였다.
“이봐…… 뭐가 그렇게 웃기는데…….”
영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의 웃음에 닉시는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덮으며 꿍얼댔다.
“웃기지.”
그가 그녀를 바라봤다. 뭘 말하고 싶어서 그렇게 거창하게 운을 떼는가 했더니.
벤자민은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살 떼어 냈다. 그 사이로 설익은 딸기같이 붉어진 얼굴과 뚱한 표정의 그녀가 보였다.
“그런 건 원래 내 쪽에서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네가 안 할 거 같으니까 내가 먼저 말한 거 아냐.”
“잘 아네.”
“그래서 대답은?”
“아니.”
“……너 정말 예상을 벗어나는구나?”
닉시는 신박한 욕설을 들은 것처럼 감탄했다. 그녀의 동공이 풀린 것을 본 벤자민이 말을 덧붙였다.
“……진정해. 지금은 아니란 말이야.”
“일 초만 늦게 말했어도, 이 욕조의 목숨은 보장하지 못했을 거야.”
“다행이군.”
흥. 닉시가 콧방귀를 뀌며 그의 앞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그럼 언제.”
“음…… 허락받아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지금 그림 그리는 것만 끝나고. 그리고…….”
물이 거의 다 식었을 즘,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역시 그런 건 내 쪽에서 말하게 해 줘.”
“참나. 누가 먼저 제안하든 별로 상관없잖아.”
향 좋은 비누로 몸을 닦고,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몸을 닦아 주다가 비누 거품으로 만든 란제리쇼 무대에 서게 되고. 그 낯 뜨거움에 부끄러워진 벤자민이 제발 그만 좀 해 달라고 핀잔을 주자 그녀는 기어이 그의 머리카락에 거품으로 만든 오리를 올려 두었다.
“상관있어.”
“어떻게.”
미지근한 물로 모든 거품을 헹궈 냈다.
미끌미끌거리는 바닥에 까치발을 들고 서 있자니, 그가 그녀를 안아 들어 욕실 앞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그는 커다란 수건을 펼쳐 그녀의 몸에 둘러 주었다.
“지금보단 더 예쁜 모양새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욕실에서 동거 제안을 듣는 것보단 나을걸.”
“오. 예쁜 거? 알몸 페스티벌이라도 하게?”
“아니.”
그가 수건을 하체에 두르며 정색했다. 닉시가 소리 높여 웃었다.
“그러면.”
“뭐……”
벤자민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냈다.
“얼간이처럼 꽃이라도 선물하면서 말할까 하고.”
누가 꽃을 바쳐 오는 걸 좋아했던 거 같으니까. 그가 생각했다.
“꽃?”
닉시는 할로윈의 유령 분장을 한 꼬맹이처럼 흰 수건으로 몸을 동여맨 채 방 안을 활보했다.
흐으음. 꽃. 어딘가 향긋함이 전해 오는 말.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실 한가운데에 섰다. 그가 뭘 그리고 있는지 모를 캔버스 앞. 의미 불명의 수평선.
‘아.’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닉시가 입을 벙긋거렸다.
“어쩐지 좋은 생각이 난 것 같아.”
“무슨 생각.”
침대에 걸터앉은 벤자민이 수건을 손에 쥔 채 닉시에게 손짓했다.
머리를 말려 주기 위해 손짓했던 그였기에 그는 그녀가 당연히 바닥에 앉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닉시는 냉큼 달려와 그의 무릎에 앉았다. 때문에 적잖이 당황한 그가 손을 어물거렸다. 그녀는 태연하게 그의 목덜미에 기댔다.
“비밀이야.”
닉시는 짓궂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재미에 시동이 걸렸을 때 특유의 샐쭉한 미소.
안달 난 건 본인뿐인가. 그는 그녀의 태연한 표정을 바라보다 그녀의 어깨를 밀었다. 부드러운 이불보가 그녀를 감싸왔다. 닉시는 제 위로 그림자를 만들어 낸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머리카락 덜 말랐는데.”
“알고 있어.”
“이불이 젖을 거야.”
“그렇겠지.”
그가 팔을 천천히 굽혔다. 둘의 사이가 착실하게 좁혀 져왔다.
“눅눅한 침대는 기분 나쁜데.”
“이제 와서? 한두 번도 아니잖아, 닉시.”
그녀는 제 몸을 덮은 그의 착실한 무게감을 느끼며 그의 날개뼈에 손을 얹었다.
“후후, 다시 씻게 생겼네.”
“자꾸 그렇게 속 편한 소리 하지 말고…….”
지금은 집중해. 그가 그것을 신호 삼아 둘러싸 매고 있는 수건 사이, 오목한 곡선을 엄지손으로 느릿하게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