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9
외전 5. 경계
계기는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늘 그녀가 곁에 있었고, 저는 그녀의 실없는 소릴 듣고 있었고, 뚝심 같은 건 없어 보이는 주제에 정의감은 높아서 가장 선두에 서던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제키 마티아스가 소령이고, 그. 필립 휴거가 소위일 때.
그녀와 그가 안 되는 이유를 꼽으라면 무척이나 많았다.
그녀는 키가 크다. 183cm 정도. 그는 키가 작다. 175cm 정도. 반올림해서.
그녀는 성격이 호탕하고 사람들을 좋아해서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는 성격이 조용하고 차분하다. 사람들을 싫어하진 않지만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즐기진 않는다.
그녀는 대체로 여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는 남자다.
그에 반해, 되는 이유는 단 하나뿐.
그는 그녀를 짝사랑한다.
“어이 도련님. 이것 좀 어떻게 해 봐.”
평소 같은 나른한 오후, 필립 휴거의 집무실. 제키 마티아스는 서류 몇 장을 들고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말꼬리를 질질 늘리며 우는 소릴 하던 그녀는 그의 집무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녀의 태평한 모습을 바라보며 필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뭔데 그래.”
아마 별것 아닐 것이었다. 분명히 부대의 예산과 관련된, 귀찮지만 별거 아닌 문제일 게 뻔하지.
정말 중요한 문제였으면 그녀는 그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벌써 상부에 끌려가서 혼나고 있었을 게 뻔했으니까.
필립은 제키가 건넨 서류를 훑어봤다.
“……이건 아서한테 가 봐. 최근에 이 안건과 관련된 예산안을 통과시킨 적 있으니까 참고할 자료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이건 작년 10월쯤에 처리했던 서류 확인해 보고. 필립은 차분하게 내용을 정리했다. 옆에서 의견을 주워 먹을 뿐인 제키는 신나게 고갤 끄덕였다.
“오, 좋은 아이디어. 역시 도련님, 머리가 빠르게 잘 굴러가는구먼.”
제키가 종이를 반듯하게 접었다. 그녀가 부르는 애칭 아닌 애칭에 필립의 눈이 구겨졌다.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말라 했을 텐데.”
“입에 붙은 걸 어떡하냐.”
“그럼 떼어 내.”
그녀가 그를 부르는 ‘도련님’이라는 애칭은 그들이 사관 학교 다닐 때 생겼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형인 ‘노엘 휴거’와 사관학교 동기였다.
그녀와 그가 처음 만나게 된 건 필립 휴거가 사관 학교에 입학했을 때.
노엘의 맹렬한 광신도이자 추종자인 필립 휴거는 형과 같은 학교에 진학한 것을 스스로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겼다.
노엘 휴거는 학교 안을 안내해 주기 위해 필립을 데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리고 술에 꼴아 벤치에 누워 있던 제키 마티아스와 마주쳤다.
술에 찌들어 있던 그녀의 눈에 필립 휴거는 솜털도 안 빠진 애송이였다. 입학서를 손에 꾹 쥐고 군기가 잔뜩 들어간 채, 눈을 반짝이며 서 있던 신입생. 꼭 본인이 셰퍼드인 것처럼 구는 작은 포메라니안.
‘예쁘게 생겼네. 음, 도련님처럼.’
제키 마티아스는 머리를 북북 긁으며 생각했다.
그렇게 만나게 된 둘은 친한 듯, 악연인 듯 오랫동안 함께 붙어 있었다.
그녀에게 그는 그저 인생을 말아먹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고 있으면 귀찮게 옆에 와서 왕왕대는 작은 꼬맹이, 인생을 곧게 살기만 한 건지 농담이 안 통하는 고지식한 청년, 온실 속 화초 같은 도련님이었다.
그녀가 그를 도련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는 그녀의 관심 밖으로 수백 킬로미터는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애 취급. 그저 형의 동생인 친한 후배 취급.
그만큼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그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고 그녀의 곁에 애인이라고 불릴 만한 여자가 수십 명이 거쳐 갈 때도, 그의 옆에는 오로지 한 명뿐이었다.
계기는 없었다. 전투가 끝나면 늘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그녀였다 보니, 마음이 갔을 뿐이고 그러다 보니 제 인생의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 주면 좋겠다 싶었던 것뿐.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언젠가부터 그는 그녀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좋았고, 가만히 올려다보면 높게 올려 묶은 머리가 목덜미 근처에서 찰랑이는 걸 바라보는 것도 좋았고, 입꼬리에 길게 나 있는 흉터도 좋았다.
그러다가 ‘아, 좋아하네.’라고 자각하게 된 것뿐이다.
필립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제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서류를 바라보다가 고갤 들었다. 필립은 그녀의 입가에 생긴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뭐 묻었어?”
지금도 대범하게 제 입술을 만지고 있는 남자를 본인의 얼굴에 쿠키 조각이라도 묻은 걸 닦아 주려는 걸로만 생각하는 그녀였다.
아마 그녀와 저가 옷을 벗고 한 침대에 누워 있다고 해도 그녀는 제 몸뚱이를 쿠션 삼아 발을 올리고 잘 게 뻔했다.
“아니. 그냥 옛날 생각 중이었어.”
“무슨 옛날.”
“이게 생겼던 날.”
아. 제키가 알았다는 듯 대답했다.
제키의 입가에 흉터가 생겼던 날. 그날은 그와 그녀가 부대에서 낙오돼 단둘이 조난했을 때.
산기슭에서 일어났던 전투. 폭격으로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필립이 다리 아래로 떨어졌었다. 제키는 그를 구한다고 필립을 안고 비탈을 구르다가 다리가 부러졌었고.
그나 그녀나 어디 하나 부러져 있는 상태에서 피를 무척이나 많이 흘려서 이번에야말로 죽겠구나 생각했었다.
그나마 다리는 멀쩡했던 필립은 제키를 업고 산기슭을 헤쳐 갔고 다행스럽게도 부대에 구조될 수 있었다.
부러진 다리뼈가 살을 뚫고 나오는 바람에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제키는 긴급하게 수혈이 필요했다. 같은 혈액형을 가지고 있던 건 필립뿐. 그 탓에 필립은 억지로 설탕과 빵을 씹어 먹으며 급히 수혈에 투입됐다.
이 이상하면 너도 위험하다는 말에 상관없다고. 이왕 죽을 위기인 거 애매하게 한 명만 죽을 위기보다 두 명이 살 수 있는 위기가 낫다고. 그렇게 바락바락 우겼다.
그는 제 몸에서 빠져나가 그녀를 채우는 붉은 피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로써 목숨값은 갚은 거야.
그러니까 죽지 말라고. 아직 고백도 못 했으니까.
결론적으로 제키 마티아스는 살았다. 수술을 마치고 눈을 뜬 제키는 가장 먼저 너덜너덜한 제 발을 바라봤다.
[야 필립, 너 때문에 다리가 부러졌잖아.] [잘못되면 책임질게.] [뭐 어떻게 책임진다는 건데?] [평생 업고 다닐까?]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분명 다리가 끌린다고. 제키가 비웃으며 돌아누웠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를 업고 기슭을 헤매면서 직접 실감했으니까.
그녀는 제 얼굴을 가로질러 감겨 있는 붕대를 더듬었다.
[얼굴에 흠집도 나서 어떡하냐. 그동안 얼굴만큼은 열심히 지켜왔는데.] […….] [레이디들이 무섭다고 도망가면 책임져, 도련님.]필립은 오랫동안 돌아누운 그녀의 등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갤 끄덕였다.
[내가 책임질게.]네가 다치면. 네가 만약 다리를 못 쓰게 된다면. 네가 좋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적어도 나만은 그럴 일 없을 테니까.
[내가 어떻게든 할게.]큭큭. 옛날 생각을 마친 제키가 키득거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슬펐는데 말야, 흉터 때문에 얼굴이 더 멋있어져 버릴 줄은 몰랐지. 가뜩이나 터프한 얼굴에 흉터가 더해지니, 야성적인 섹시함이라는 게 생겼다고 해야 하나…… 여러모로 레이디들을 좋아하더라고.”
‘역시 얼굴에는 흉터 생기지 않게 조심했어야 했는데.’
제키가 소파에 다리를 길게 뻗으며 으스댔고, 필립은 제키의 얼굴을 잘생기게 만든 그녀의 흉터를 신경질적으로 바라봤다.
괴물 같은 체력의 제키 마티아스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끈질기게 살아 있었고, 결국 다리 재활에도 성공했다. 지금까지, 쭉.
필립은 걸터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따 연회, 올 거야?”
“가야지. 안나도 온댔거든.”
안나라면 요즘 제키 마티아스가 꼬시기 위해 공들이고 있는 귀여운 분위기의 아가씨였다. 주홍빛 머리카락에 앙증맞은 입술이 사랑스러운 여자.
“오랜만에 위 좀 적셔 보겠구먼. 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서 다행이야, 그 돈에 깐깐한 대령이 연회도 다 열어 주고!”
필립은 제키의 태평한 표정을 바라보며 고갤 돌렸다.
“남의 애정행각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연회에선 자제해.”
“네이, 대장.”
* * *
“으…….”
머리를 조여 매는 듯한 아련한 숙취. 묘하게 나른한 몸. 제 침실에서 나는 향기가 아닌 낯선 곳에서 나는 향.
제키 마티아스는 머리를 짚으며 눈을 떴다. 어쩐지 침구가 낯설더라니 연회장의 빈방인가.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걸친 거 하나 없는 매끈한 상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녀의 옆자리는 작은 이불 언덕이 있었다. 소담한 체구를 가진 사람의 소담한 언덕. 아마도 안나일 거였다. 어제 진한 키스를 나눴으니까.
“안나아. 배고픈데 우리 뭐 먹을래?”
제키가 손을 뻗어 옆자리 사람의 이불을 젖혔다.
그리고 재빨리 덮었다.
“…….”
다시 젖혔다.
“…….”
다시 덮었다.
“아……?”
그녀의 머릿속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등 뒤로 식은땀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하다 하다 갈 때까지 갔구나. 제키 마티아스.’
그녀의 내면이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미쳤다, 미쳤어. 그놈의 술 좀 작작 처마셨어야지. 대체 어쩌자고, 어쩌자고 이런……!’
제키 마티아스 옆에 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자고 있는 사람.
‘건드릴 게 없어서 친구의 동생을 건드려?’
그건 분명, 그녀의 친구의 동생. 필립 휴거였다.
제키는 급히 목욕가운을 걸친 채 의자에 앉아 고뇌했다.
계기가 있었나?
정신을 차려보니까 친구의 동생…… 그러니까 오랜 친구이자, 상사인 필립이 옆에 누워 자고 있었다. 알몸으로.
“젠장.”
어제 저가 평소보다 술을 마셨고, 실없는 소릴 했던 건 기억난다. 그럼 필립은?
그래, 이 녀석은 곱상하게 생겨 가지고 상사가 주는 술은 넙죽넙죽 잘 받아마셔서 괜히 신경 쓰고 있었지. 취하면 아무 데서나 자는 녀석이니까.
분명 저도 적당히 기분 좋을 만큼 취했었고, 이 녀석도 평소보다 술을 많이 들이켰던 것까지는 알겠다.
하지만 어떻게 필립 휴거와 제키 마티아스가? 전쟁터에서 서로 목숨을 빚진 전우, 오랜 친구, 친한 동생, 아무튼 ‘이런 짓’을 할 일이 ‘절대’ 없는 사이.
‘이 사실을 닉시 휴거나, 노엘 휴거가 알면 날 죽이려 들텐데…….’
안그래도 부대에서 소문난 놈팡이로 소문난 저가, 감히 그들의 동생을 홀랑 벗겨 먹었다? 분명 곱게 죽진 못할 것이었다. 휴거들이나, 부대의 상사, 부하 모두가 그녀를 재판에 부치라고 항의하겠지.
“진짜 망할…….”
저와 그가 안 되는 이유를 꼽으라면 무척이나 많았다.
그는 자신이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동생이다. 피는 나누지 않았지만 제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아 제기랄 피를 나눈 적 있지 참.
또 그는 자신을 연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저와 그의 관계는 따지면 말 안 듣는 개와 개의 목줄을 쥔 주인과 같았다. 무척이나 귀찮아하고 성가셔하는 태도. 음, 보편적인 이성으로조차 보지 않는 것 같았지.
그리고 성격도 안 맞고, 음식 취향도 다르다. 사소하게 일을 처리하는 스타일도 다르고.
마지막으로 그는 남자다.
“나는 미인이 좋다고…….”
물론 필립 이 녀석이 제법 아담하고, 예쁘장하고, 도도하니 그녀의 스트라이크 존에 부합하는 미인 축에 속하긴 하지만…….
제키는 다시 머리를 짚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녀석은 안 된단 말이야!’
필립은 늦잠 잤을 때 특유의 나른하고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정신이 상쾌한 것에 비해 몸이 뻐근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게 정수리를 보이며 고갤 숙이고 있는 제키 마티아스를 발견했다.
필립은 날아다니는 쇠똥구리를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뭐야.”
“미안하다.”
“뭐?”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갤 들었다.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래도 너를, 그, 어떻게 한 것 같단 말이야?”
필립은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의 목선은 그의 머리칼만큼이나 희게 보였다. 그리고 목덜미엔 어젯밤의 흔적이 역력한 뜬금없는 붉은 자국이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제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사실은 무덤까지 가져갈게. 네 형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남의 형을 왜 네가…….”
“그러니까 우리 없던 일로 할…….”
“…….”
“수는 없겠지! 하하, 하.”
하하. 필립의 찬 바람 부는 표정을 본 제키가 말꼬리를 흐렸다.
방 안엔 한차례 침묵이 맴돌았고, 제키는 머리만 벅벅 긁었다.
이윽고, 필립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키는 불시에 일어난 그의 다리와 그 사이, 다리 아닌 것과 눈이 마주쳤다. 오. 그녀는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끔뻑였다.
“기억이 아무것도 안 난다고?”
“어, 으, 응…….”
필립은 의자에 걸쳐두었던 셔츠를 걸쳤다. 키는 작지만 균형 잡힌 탄탄한 팔. 낭창한 허리. 근육이 잘 짜인 허벅지. 군복 때문에 꽁꽁 싸매고 있어서 몰랐지만 제법 보기 좋은 몸이었다. 특히 여자에겐 없는 신체적 특징이 두드러지는 곳. 어깨너비라던지, 옆통이라든지.
“그럼 오히려 잘됐네. 네 말대로 하자.”
“어, 어?”
저도 모르게 그의 신체 부위를 뜯어보고 있던 제키가 멍청하게 반문했다.
“기억이 없으니 없던 일로 하자고.”
“그…… 정말?”
그녀는 눈을 끔뻑였다. 그 사이 바지를 입고, 셔츠 단추를 꼼꼼하게 잠근 그가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
필립은 허릴 숙여 의자에 앉아 있는 제키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는 평소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래.”
* * *
“정말 이걸로 끝인가?”
제키가 팔짱 낀 채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날 이후, 필립은 평소와 같았다. 정말 없던 일로 하자고 했어도 그녀는 그의 눈치를 슬슬 봤지만 그는 평소와 다를 거 하나 없었다.
유난 떠는 저와 달리 가장 노발대발 댈 그가 그렇게 태연하니, 제키는 안도하면서도 혼란스러웠고, 그러면서도 뭔가 찜찜했다.
도화선이 없는 폭탄 같은 놈인 필립 휴거.
그게 없던 일로 하자고 정말 없던 일이 될 수 있나? 겉으론 태연해 보여도 그의 마음속에서 저는 능지처참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조만간 실수 한 번만 더 하면 그 자리에서 죽는 거 아닌가? 갑자기 총 맞는 거 아냐?
터져도 진작 터져야 할 폭탄이 침묵하니 그건 그거대로 죽을 맛이었다.
태풍의 눈 속에 있는 느낌. 죽기 전에 놀랍도록 싸늘한 평화를 느끼는 것 같은 기분.
자꾸만 떠오르는 극단적인 생각에 제키는 필립의 머리칼만 봐도 입 안이 바싹 말라 왔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집무실을 두드렸다. 제 발 저려서.
“저기 필립.”
“미안하지만 회의에 가야 해서.”
그리고 무시당했다.
“필립, 오늘 점심 같이……”
“이미 먹었어.”
그다음 날도.
“필립, 이 기안서 말인데……”
“내 서랍 7번째 항목 25번째 파일.”
“와우…….”
그 다다음 날도.
“필립.”
“안 돼.”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 인마…….”
찝찝함이 풀리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마치 죽음의 유예 시간이 길어지는 기분이었다.
제키는 소화 불량인 사람처럼 불편한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잘 생각해 보자, 제키 마티아스. 넌 할 수 있어. 도련님이 그렇게 화내는 이유…… 이유…….”
아무래도 그거 같지……?
제키 마티아스는 무슨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의 음영진 눈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필립.”
제키 마티아스는 그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그녀는 집을 나갔다 돌아온 탕자처럼 깨달음 같은 걸 얻은 표정이었다.
필립은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제키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역시 만족스럽지 못했던 밤이었던 거지? 하지만 아무리 모든 곳에 뛰어난 엘리트라도 못 하는 게 있는 건 당연한 거야! 원래 처음은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지! 총 다루는 능력이랑 네 하반신에 달린 총을 다루는 능력이 같을 수 없잖……”
―쾅!
문이 닫혔다.
제키는 어마어마한 소릴 내며 닫히는 그의 집무실 문을 바라보았다.
텅 빈 복도에 처량하게 남겨진 제키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도련님의 완벽주의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필립.”
제키 마티아스는 식사하는 그의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이번에야말로 깨달음을 얻은 표정이었다.
조용히 빵을 찢어먹던 필립이 제키를 바라보았다.
제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그를 향해 몸을 숙였다. 꼭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필립,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넌 내가 본 남자 놈들 물건 중에 두 번째로 크거든.”
필립은 머리를 짚었다. 그는 먹던 빵을 내려놓았다.
“나라면 부대 안에 자랑하고 다닐 거야. 목욕도 공용 목욕탕만 사용할걸. 모두가 너를 키는 작지만, 세상을 다 가진 빅 가이라고 우러러볼 거라고.”
“…….”
“참고로 첫 번째 큰놈은 네 형이야.”
“아니 그걸 또…….”
그건 또 어떻게 본 거야. 필립은 울컥하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제 형이랑 눈앞의 생물적으로 여자인 제키 마티아스랑 그렇고 그런 일이 있을 걸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엄청나게 신경 쓰이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키 마티아스는 그런 건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듯 태평한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러니까 자부심을 가져!”
제키 마티아스는 빵을 우물거렸다. 필립 휴거는 그녀의 나불대는 주둥이에 바게트를 밀어 넣고 가 버렸다.
입천장이 다 까진 건 둘째 치고 풀리지 못한 애매함이 제키의 콧잔등을 살살 긁어 왔다.
‘아무리 뭔가 걸리는 게 있다고 해도 그렇지.’
제키는 반쯤 씹던 빵을 바닥에 뱉어 냈다. 자꾸 입 안이 쓰리다 하더니, 상처가 생긴 건지 침에 희미한 피가 섞여 있었다. 따끔거렸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이유가 뭐냐고. 없던 일로 하자 했으면서 뭐가 심통인지, 그녀는 전혀 감도 오지 않았다.
“나라고 상처 안 받는 건 아닌데.”
* * *
필립은 자신의 숙소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요 며칠 제키 마티아스를 신경 써서 피해 다녔다. 눈치가 없는 편인 그녀였지만 부대 안의 모두가 알 정도로 노골적으로 피해 다니니, 그녀조차 그의 눈치를 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없던 일로 하자고?’
대체 뭘.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잔뜩 취해서 쉬어가자고 빈방에 들어온 거? 알몸으로 같은 침대에 누워 있었던 거? 아니면 팔베개해 준다고 우겨대서 그녀의 팔을 베개 삼아 베고 잤던 거?
저가 그녀를 보고 사랑스러움에 못 견뎌 키스했던 거?
그날 그와 그녀는 ‘없던 일’이라고 명칭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다.
그날 필립과 제키는 술에 꼴아서 서로 어깨동무 한 채 헛소리를 나불대다가 빈방에서 잠시 쉬었다.
피곤하다는 그녀의 말대로 그들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이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걸 보다가 제키는 덥다고 겉옷을 벗어 던졌다. 필립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제키.] [왜.] [넌 나랑 알몸으로 있어도 아무렇지 않을 거지?] [그걸 몰라서 묻냐?]그럼 당연하지!
필립은 그녀의 목청 큰 목소리를 들으며 픽 웃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 [왜 없는데. 너랑 내가 있잖아.]그녀의 태평한 말을 시작으로 그들은 서로 내기를 주고받듯, 옷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
필립은 어디까지 할까 보자 하며 옷을 벗었다. 뭐,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던 제키 마티아스는 익숙했으니 적당히 그 정도 선에서 멈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둘은 그의 생각보다 술에 많이 취해 있었고, 제키 마티아스는 그의 생각보다 더 그를 인식하지 않았다.
마지막 천을 내던진 그녀가 그것을 투쟁의 여신이 흔들고 있는 깃발인 것처럼 흔들었다.
[이제 네 차례야 도련님.]그럼 필립은 착실하게 반응하는 본능과 비참해진 이성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왜, 아무렇지도 않을 거냐고. 제키 마티아스. 난 같은 방에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고.
“후.”
그렇게 충동적으로 키스한 뒤, 곧장 잠이나 자라며 돌아누워 버려서 이후는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다음 날 아침이면 제키 마티아스가 무척이나 날뛰며 벌에게 쫓기는 곰처럼 행동할 걸 알았지만 당시 그는 차마 이불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기에 그냥 억지로 잠을 청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없던 걸로 하자’니.
필립은 속이 화로 부글부글 끓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했다. 그래 전부 없던 걸로 하자고.
너랑 나는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사이도 아니다 이거야. 그러니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일도. 그런 일 따윈.
“필립.”
머리 위에서 제키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혼자 상념 하느라 그녀가 온 줄도 몰랐던 필립이 드물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제키?”
“엉, 나다.”
그녀는 침대 옆 협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눈치 보는 거랑은 다른 시선이었다.
“머리 아파?”
“뭐가.”
“꼭 두통 있을 때 표정이길래.”
필립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머리가 아프긴 했다, 누구 때문에.
“그래서 여긴 왜 왔어. 비번도 아니잖아.”
“아. 잠깐 교대해 달라고 했어. 이렇게가 아니면 바쁘신 도련님이 말단 조무래기 따위는 만나 주지도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제키 마티아스.”
“필립 휴거.”
평소 진지함이라곤 없는 목소리에 삐딱함이 실려 있었다. 필립은 그녀의 비꼬는 말에도 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깊은 물처럼 잠잠히 응시했을 뿐이었다.
평소 같으면 이쯤에서 제키 마티아스는 꼬릴 말고 ‘장난이었다고, 왜 이리 진지하냐’면서 허허 웃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필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만이 있으면 말해. 괜히 꽁해 있지 말고.”
그녀가 말했다. 그가 고갤 돌렸다.
불만 같은 거 없다. 꽁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아. 네가 날 피하는 건 알겠어. 이유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원인은 그거겠지.”
“…….”
“안 그래도 나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란 말이야. 사람이 잊어보려고 애쓰고 있구먼.”
“……의식하고 있어?”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제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그럼 그걸 어떻게 잊냐? 내가 동생 같은 놈의 알몸…… 시발…… 맨살을 봤는데.”
“……내가 남자인 한, 내 알몸 같은 건 네 머릿속에서 금방 잊혀질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이 미친놈아, 그걸…… 하.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잊냐고…….”
제법 탄탄했던 팔뚝. 의외로 굵었던 손목이나 허벅지.
평소 자주 보던 말랑한 여체에서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직선으로 떨어지는 몸. 전혀 인식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순식간에 아 쟤도 남자긴 했구나. 하고 변해 버린 순간.
“못 잊지…… 꿈에도 나올 정도인데.”
아 이건 실수, 잊어 줘. 제키가 제 입을 때리며 중얼거렸다.
“하…… 제기랄, 내가 이걸 왜 너한테 해명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네가 왜 화난 건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만약 너희 집안이 사이비 종교 같은 곳이라, 남에게 알몸을 보이면 안 되는 집안 풍조를 가지고 있다든지. 아니면 알몸이 수치스러워서 앞으로 누구에게도 맨살을 허락하지 않을 다짐 같은 걸 한 거라면, 하…… 내가 미안하다고.”
“아마도 앞으로 다른 누구에게도 맨살을 보여 줄 것 같지 않은데.”
“오, 갓. 제발 필립……. 팍팍하게 살지 말자. 네가 18세기 공주님이야? 정조 아껴서 누구 줄 건데. 수녀원이라도 가게? 아 잠깐만. 너 설마, 정말 그…… 정조 같은 걸 지키고 있었던 건 아니지?”
“어쩌다 보니.”
“오, 시발.”
제키는 머리를 짚었다.
수많은 여자를 만나봤지만, 눈앞의 이런 남자 같은 사람은 없었다. 정조? 첫 경험? 미친? 뭐 이리 지고지순한 미친놈이 다 있단 말인가. 설마 하고 그, 그걸 아직까지 지키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그 전에, 지금 세대에 그걸 지키는 놈이 어디 있어.
제키 마티아스가 생각했다. 엿 됐네.
“난 노엘한테 맞아 죽겠지.”
“그런가. 형은 별 생각 없을 텐데.”
“아냐. 넌 그놈이 얼마나 냉정한 놈인지 몰라서 그래.”
“……그래서 넌 형 알몸을 왜 봤는데?”
“문 열었는데 마침 바지 벗고 있었어. 일부러 본 거 아냐.”
제키 마티아스는 심각하게 고뇌하기 시작했다. 그럼 자신은 친구의 동생이자 친한 친구를 홀라당 잡아먹은 것도 모자라, 그의 순정과 순결, 순수를 짓밟은 셈이 아닌가. 제기랄. 그렇다면 자신은 놈팡이를 벗어나 천하의 쓰레기, 최악의 인간 말종이 되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책임질게.”
제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필립은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 어떻게 책임진다는 건데?”
“몰라, 젠장.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내가 달링한테 기억을 지워 주는 약 같은 걸 만들어 달라고 할까? 그럼 몸은 몰라도 마음만큼은 순결할거 아냐.”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
“하, 그럼 어떡하냐.”
제키가 앓는 소릴 하며 머릴 짚었다.
“내가 책임질게.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필립은 제키의 착잡해 보이는 얼굴을 바라봤다. 눈치는 더럽게 없는 주제에 쓸데없이 책임감만 강한 무식한 녀석.
없었던 일로 하자 했으면, 무시해도 될 일을.
화는 이 정도만 내면 되려나. 필립은 무심하게 고갤 돌렸다.
“아무 일도 없었어. 너랑 나.”
“엉?”
제키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반문했다.
“우리 그날 그냥 잠만 같이 잔 거라고. 섹스 안 했어.”
“어, 어. ……어? 그, 그럼 그건 뭐야.”
―투둑.
제키가 필립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목덜미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거!”
“이거 셔츠 상표에 쓸려서 긁었던 건데.”
“그럼 몸은 왜 뻐근했지……?”
“너 오는 길에 계단에서 자빠졌잖아. 기억 안 나?”
그녀는 여전히 상황 파악 못 한 것처럼 이상한 감탄사만 늘어놓았다.
필립은 흐트러진 셔츠 매무새를 다듬었다. 무식하게 힘이 센 제키 마티아스 때문에 셔츠의 가장 윗단추는 뜯어져 떨어져 나가 있었다.
제키는 떨어져 나간 필립의 셔츠 자락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럼 너랑 내가 키스 한 건 뭐야?”
“…….”
꿈이야. 필립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꿈이라고? 그게……?”
“응. 그러니까 잊어.”
필립이 단추를 매만지다가 셔츠를 벗었다.
그는 협탁 구석의 작은 반짇고리를 찾았다.
작은 바늘과 실을 꺼내든 그가 투박한 손길로 실을 바늘구멍에 끼워 넣었다. 의외로 큰 그의 손에 비하면 바늘은 얇아도 너무 얇아서 실눈을 뜨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필립은 몸을 숙여 그 작은 것에 집중했다. 그러자 그의 맨살, 날개뼈 아래의 근육이 도드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 일련의 과정을 멍하니 바라보던 제키의 머릿속에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넌 나랑 알몸으로 있어도 아무렇지 않을 거지?] [당연하지!]‘도련님이랑 알몸으로 있어도?’
생물학적 남자의 몸엔 관심이 없다. 그건 군대에 있으면서 지겹고 토 나올 정도로 질리게 봤다. 부드러움이라곤 없는 직선의 몸. 그녀를 자극하는 건 오로지 유려한 곡선. 부드러운 피부. 향기 나는 하얀 몸뿐.
필립은 가느다란 실을 바늘구멍에 꿰어 내어 길게 뽑았다.
고갤 숙이고 있어서 눈을 가리고 있던 부드러운 앞머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필립 특유의 시린 겨울바람 같은 냄새가 났다. 그 아래 그가 자주 피우는 박하 향 시가 냄새도.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 [왜 없는데?]셔츠의 단추를 꿰매기 위해 숙이고 있어서 둥글게 말린 척추. 사내놈 주제에 곱상해서 도련님이라고 놀릴 수밖에 없었던 남자의 옆얼굴. 까끌까끌한 상표가 닿았다고 금방 붉어지는 피부. 질리도록 맡아서 익숙해진 향기.
그땐 술을 먹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만약에 맨정신이었다면.
만약에 맨정신에 그와 알몸으로 있다면. 아무렇지 않으려나? 정말?
“있잖아, 도련님.”
“왜.”
“너 가슴이 되게 예쁘네.”
―푹.
헛손질한 바늘이 필립의 엄지손가락을 찔렀다. 그는 엄지를 지혈할 생각조차 못 한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제키 마티아스…… 상사 모욕죄로 영창 가고 싶어?”
“자, 잠깐 기다려 봐. 지금 내가 무척 못 할 말 한 건 아는데, 이건 그러니까 본능이거든. 예쁜 걸 보면 주둥이가 나불대는 본능. 알잖아.”
알지, 아주 잘 알지. 예쁜 미인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제키 마티아스의 살아 숨 쉬는 주둥이.
필립이 그녀의 주둥이를 위아래로 꼬집었다. 구멍이 뚫려 버린 엄지손가락의 피가 그녀의 입가 흉터를 붉게 물들였다.
“그딴 소리 하려고 찾아온 거면 가서 기안서나 검토해.”
“알겠다고, 도련님.”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네, 네 필립 대장.”
그제야 필립이 손을 떼어 냈다. 제키는 입술 근처에 희미하게 남은 피를 핥으며 상체를 벽에 기댔다.
피의 맛이 대부분 그러하듯 비리고 묘하게 짭짤했다.
친구의 동생. 친한 친구. 상사. 피를 나눈 전우. 생전 인식하지 않았던 사람.
필립 휴거. 곱상하게 생긴 도련님.
그래도 남자라고 저보다 큰 손을 갖고 있고, 허벅지의 근육이 제법 섹시하고, 아주 큰, 정말 큰 포부를 숨기고 있고, 부드럽고, 향기 나고, 미인.
알몸으로 필립 휴거랑 있기.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해 보지 않아서 그건 잘 모르겠지만, 지난날 꿈에서 저의 입술을 열고 치열을 훑었던 그때의 감각에 의하면 아마도.
“정말 당연한 건 없는 건가…….”
제키 마티아스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불경한 생각이라니. 도련님은 날 이성으로 보고 있지도 않은데.
뭐 이성으로 본다고 하면 조금쯤은 생각해 볼 여지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제키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 그때야말로 휴거 놈들에게 죽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