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_3
부푼 주머니가 뭔지, 보지 않아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먹을래? 방금 쪄 온 거야.”
“…….”
“이거 되게 맛있어. 하루에 세 번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니까? 이전엔 내가 감자를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여기 감자는 정말 맛있어서 좋아.”
감자는 화가의 턱 끝까지 들이닥쳤다.
입을 계속 다물고 싶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가만히 있다간 점점 제 입으로 우악스럽게 다가오는 손길로 인해 강제로 입이 벌어지게 생겼으니.
“감자 싫어해.”
그는 그렇게 말하곤 무너진 제 다짐에 미약한 자괴감 따위를 느꼈다.
“너 싫어하는 거 정말 많다. 그럼 좋아하는 건 뭐야?”
“…….”
“좋아. 이거 내가 맞춰야 하는 거지?”
“…….”
“오믈렛은 어때?”
“…….”
“먹는 거 말고라면, 강아지!”
“…….”
“그럼 고양이?”
그는 끝까지 침묵했다.
닉시는 탄식했다. 맙소사. 고양이도 강아지도 안 좋아한다고? 어떻게 그렇게 냉혈한일 수가.
그 뒤로 젯소가 두 번 더 칠해지고 마를 때까지 그녀의 스무고개는 이어졌다.
그 무엇에도 대답하지 않은 그는 마지막 라는 반칙패에 긴 침묵을 깼다.
“안 좋아해.”
“어라? 좋아해서 보여 달라 한 거 아냐, 그 그림?”
“아니.”
“그럼 왜? 이거 영 이상한 사람이네.”
닉시가 흥미로운 사물 관찰하듯 중얼거렸다. 벤자민은 미간을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이지.”
“응? 그냥 난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안 친한 것보단 친한 게 낫잖아.”
“여기 오래 있을 생각이면 나한테 말 안 거는 게 좋을 거야.”
닉시는 눈을 깜빡였다.
“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젯소 특유의 휘발성 냄새를 너무 오래 맡아 머리가 아픈 탓이었다.
벤자민은 고개를 들어 밀밭 너머를 응시하다 저 멀리 갈색 머리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을의 인심 좋은 몇몇 중 하나인 길버트였다.
길버트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 매미 잡는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웃었다.
그래, 어차피 제가 말하지 않아도 조만간 알게 되겠지.
그러니 벤자민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럼 다른 사람들 없을 땐 말 걸어도 돼?”
“아니. 다른 사람들 없어도 말 걸지 마.”
물론 정답을 알 리가 없는 닉시는 이유를 종잡을 수 없어 머리만 긁적였다.
뭐지. 쑥스러움 많은 화가인가.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뭐……. 네가 정 원한다면 알겠어. 그럴게.”
그 뒤로 벤자민은 그 시간, 그 들판에서 닉시를 볼 수 없었다.
* * *
봄의 부슬비는 늘 예고 없이 찾아왔다.
잡화점의 헬렌은 부슬비로 인해 밖에 널어놨던 아카시아꽃들을 부랴부랴 거둬들였다.
때마침 잡화점에서 후추를 사 가려던 길버트도 얼떨결에 꽃을 수거하는 것을 도와주게 됐다.
“그러고 보니 새로 온 해바라기 이웃 말이야.”
“네.”
닉시 말인가.
길버트가 손가락에 묻은 마른 아카시아꽃을 입에 넣으며 고갤 들었다.
“이렇게 구석진 동네는 뭐 하러 온 걸까?”
헬렌은 순수하게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길버트는 콧잔등을 긁적였다.
처음 만났을 때 본인도 비슷한 질문을 했던 것 같다. 그녀는 제비꽃 설탕 절임을 먹고 싶어서 왔다고 했었지.
오베르에서 유명한 제비꽃밭은 이미 전쟁통에 날아갔다는 말을 듣고 절망했던 표정도 기억난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오베르의 밀밭이 좋아서 그런 걸 수도 있고.”
“하긴 여기 밀밭은 정말 아름답지. 여름엔 푸르게 아름답고 가을엔 황금빛으로 아름답고.”
“네. 닉시도 거기 자주 구경하러 가요. 오베르에서 제일 좋다고 하더라고요.”
“닉시 말이야.”
헬렌이 짓궂게 씩 웃었다.
길버트는 꽃잎을 씹었다.
풀 씹는 것과 비슷하게 맛은 딱히 없었지만 바싹하게 마른 아카시아꽃에선 달큰한 향기가 났다. 햇볕에 바싹 구운 쿠키 같은 냄새.
“너랑 잘 어울리던데.”
“네? 갑자기 무슨…… 콜록!”
꽃잎은 제대로 삼켜지지 않고 목구멍에 끈적하게 붙었다.
그 때문에 길버트는 사레가 들려 콜록콜록 거친 기침을 내뱉었다.
헬렌은 놀라지도 않았으면서 어머, 하고 웃으며 물컵을 내밀었다.
기침으로 인해 귀까지 붉어진 길버트는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헬렌.”
“아니, 그냥 보니까 근래에 붙어 있는 걸 자주 봐서. 꽤 잘 맞아 보이기도 하고. 나이도 또래 아냐?”
“뭐…….”
요즘 자주 붙어 있긴 했다.
닉시는 혼자 있는 걸 못 견디는 성격인 건지 아니면 자신과 조잘거림을 나눌 누군가 필요한 건지 항상 누군갈 찾아다녔고, 공교롭게도 항상 그게 길버트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의 집 말고는 아직 다른 집을 못 가 봤으니 갑자기 들이닥칠 집이 그의 집뿐이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그런 거 아니에요. 닉시는…….”
‘닉시는……’
길버트는 그녀의 샛노란 머리칼과 즐겁게 뛰어다니던 모양새를 떠올렸다.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제 어릴 적이 생각났다.
풀밭에서 뛰놀던 여동생과 코코라는 이름을 가진 크림색 코카 스파니엘.
“동생 같아요. 그냥.”
길버트는 그 익살스러웠던 옛날을 떠올리며 씩 웃었다.
헬렌은 그 말에 더 이상 그를 놀릴 수 없었다.
그의 동생은 5년 전에 죽었으니까.
길버트가 헬렌에게 답례로 받은 말린 아카시아 꽃잎과 동백을 들고 집에 도착한 건 열두 시쯤이었다.
우산이 없었기에 젖은 머리칼을 털며 현관에 들어온 그는 제 현관 앞에 엎어져 있는 노란 머리 이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닉시? 여기서 뭐 해?”
“……길.”
끼긱끼긱. 기름칠 덜 된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고갤 돌린 닉시가 다시 얼굴을 푹 떨궜다.
그녀도 우산이 없었던 건지 머리칼이 눅눅해져 있었다.
더 이상 그녀를 가만히 놔두면 현관에 곰팡이가 필 것 같다 판단한 길버트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닉시는 눅눅해진 빵처럼 흐물흐물 소파에 누웠다.
“비가 와서 그래.”
길버트가 끓여 준 홍차를 홀짝이며 닉시가 말했다.
“비?”
“응. 비가 오면 삭신이 쑤시거든.”
“……농부 앞에서 잘도 그런 말을 하네.”
점심으론 헬렌에게 받은 아카시아꽃을 튀겨 만든 꽃 튀김을 해야겠다. 비가 오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길버트가 맞은편 소파에 앉아 홍차를 홀짝였다.
비가 오면 사람이 쳐지긴 한다.
자신은 무슨 원리인지 몰랐으나 자신의 동생도 유독 비가 오는 날이면 불어 터진 밀가루 반죽마냥 축 처져 있었다.
마을에서 제일가는 엘리트인 그레타의 말에 따르면 비가 오면 햇빛을 보지 못해서 사람이 축 처지는 것이라고 말해줬다.
햇빛에는 비타민D가 있어서 사람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드는데, 비가 오면 해를 보지 못하게 되니 쳐지는 것이라고.
저는 학교를 안 다녀서 그게 무슨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닉시.”
“응?”
“오베르로 온 이유 말이야. 제비꽃 설탕 절임을 먹고 싶어서 온 거라 했지?”
닉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갤 갸웃했다. 그랬던가, 하는 표정이었다.
“제비꽃은 별로 안 남았지만 아카시아는 있는데. 꽃 튀김 해 줄까?”
“좋아!”
그녀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생도 저가 당근 케이크를 구워 줄까 물어보면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밝히고 좋아했다.
코코 또한 동생 옆에 처져 있다 동생이 조잘거리기 시작하면 괜히 신나서 제 꼬리를 잡는다고 빙빙 돌았다.
지금 제 옆을 빙빙 도는 닉시처럼 말이다.
뭘 도와줄까 하며 눈빛을 반짝이는 닉시에게 길버트는 얌전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 말했다.
닉시는 눈을 반짝이는 그대로 식탁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꽃 튀김을 위해 밀가루와 소금을 집어 들었다.
닉시가 뒤에서 빤히 보고 있다 소금통을 몰래 설탕통으로 바꿔치기했다.
모른 척하기엔 너무 대놓고 덜그럭거렸다. 그 마당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던 길버트가 닉시에게 물었다.
“그거론 단맛 안 나. 튀김 달게 해 줘?”
“응.”
길버트는 밀가루 대신 초코 쿠키를 곱게 간 가루를 꺼냈다.
“이 정도는 돼야지.”
“와아!” 닉시가 환호성을 질렀다.
타닥타닥,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와 자작하게 꽃을 튀기는 소리가 비슷해질 무렵 닉시가 말했다.
“오베르로 온 이유는 말이야. 실은 여기가 비가 많이 안 오는 곳이라서 온 거야.”
엥. 그 말에 길버트는 얼빠진 감탄사를 내뱉었다.
“무슨 소리야 닉시. 오베르는 여름 되면 내내 비가 내리기로 유명한데.”
닉시는 입꼬리만 당겨 씩 웃었다. 길버트는 그 표정에서 ‘망했네.’라는 생각을 읽어냈다.
때마침 바싹하게 구워 낸 쿠키 꽃 튀김이 완성됐다.
눅눅해지기 전 해치우자는 말에 닉시와 길버트는 완성된 튀김을 식탁까지 가져가는 길에 몽땅 먹어 치워 버렸다.
“참. 길. 자스민이 그림 그려 준다 했어.”
“자스민?”
“왜, 화가 있잖아. 친구한테 뭘 보낼까 했을 때 네가 그림을 그려서 보내는 거 어떻겠냐 했던 거 기억 안 나?”
빈 접시와 식은 홍차를 테이블에 올려 둔 채 둘은 저녁 내기 포커를 시작했다.
“아. 벤자민 리히터 씨 말이구나.”
식물을 닮은 이름이라고 아무 풀이나 갖다 붙이는 건가.
길버트의 말에 닉시가 고갤 끄덕였다.
길버트가 생각하는 벤자민 리히터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며 타인과 어울리기 꺼리고 조용한. 뭔가 모르게 위태로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눈앞의 깨발랄한 아가씨와는 다르게.
까칠한 화가가 마을에 온 지 벌써 2년째였지만 아직까지 그와 친한 사람은 없었다.
아니. 친하지 않다고 간단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관계였다. 그와, 오베르는.
제일 이야기를 많이 했다 자부하는 자신도 그의 이름과 그가 뭐 하는 사람인지만 아는 얄팍한 정도.
그래서 닉시가 경계 많은 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하러 간다고 했을 때, 그는 당연히 닉시가 거절당할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용케 허락했네, 그 화가.”
“용케라니. 내가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설득?”
그때 누군가 집 문을 두드렸다.
헬렌이었다.
“길버트? 이거 사러 가게까지 와 놓고 그냥 갔길래.”
헬렌은 그가 아침에 샀던 후추를 들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내리기 시작한 부슬비 때문에 허겁지겁 헬렌을 돕다가,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닉시가 불쑥 튀어나왔다.
“돈을 준다 해도 싫고, 안 준다 해도 싫다 해서 내가 로부스 미술…… 헬렌!”
“닉시도 있었구나?”
“네!”
조잘거리며 나오던 닉시가 헬렌을 보자 방긋 웃었다.
헬렌은 길버트와 닉시를 번갈아 보며 미소 지었다.
아차. 헬렌은 저와 닉시 사이가 묘하다고 착각하고 있었지.
길버트는 괜한 오해를 사게 된 상황에 이마를 짚었다.
“이 아카시아꽃 헬렌이 말린 거라면서요? 너무 맛있었어요.”
닉시의 웃음에 헬렌이 눈을 깜빡였다. 헬렌이 말린 아카시아는 식용 아카시아가 아니었다. 비누에 향과 색깔을 넣을 때 쓰는 꽃인……데.
그러나 헬렌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때론 모르는 게 좋을 때도 있으니까.
“그러니?”
“네! 헬렌도 놀다 갈래요? 안 그래도 한참 재밌는 이야기 하고 있었거든요.”
“그럴까?”
무슨 이야기기에? 헬렌이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아하 그게 말이죠! 제가 언덕 위에 사는 화…….”
닉시는 자신이 들판 위 화가에게 그림을 따내기까지 얼마나 고생했던가. 닉시가 흐뭇하게 입을 열려던 차였다.
길버트가 덥석 닉시의 입을 틀어막았다.
“흡!”
“아, 그, 헬렌! 잡화점 두고 이렇게 다른 곳에 와도 괜찮은 거예요?”
“응? 캐런 씨에게 잠깐 봐달라고 해서 괜찮…….”
“와아. 비가 정말 많이 내리네요. 비가 쉽게 그칠 거 같지 않은데 빨리 돌아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으웁웁!”
닉시가 숨쉬기 괴로운지 길버트의 등을 팍팍 때려댔다.
머쓱하게 웃다 옆구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길버트가 가늘게 윽 소리 냈다.
‘어머, 역시 맞네. 아닌 척하더니 부끄러워한 거구나. 길버트도 참.’
길버트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제가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의미라는 걸 알아차린 헬렌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그래. 내가 너무 눈치 없었다. 동생 같다더니, 길버트 너도 참.”
“아뇨! 헬렌 씨 눈치 없지 않아요. 그리고 닉시는 지금도 동생 같다 생각하고 있고요.”
“읍웁?”
“나는 돌아갈게! 좋은 시간 보내고?”
“좋은 시간 안 보낸다니까요! 하…… 그, 죄송해요, 헬렌!”
“으으붑?”
길버트는 닉시를 둘러맨 채 우당탕 집 안으로 들어갔다. 헬렌은 문은 저가 닫아 주겠다며 손 흔들었다.
길버트의 방까지 끌려가고 나서야 닉시는 길버트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영문 모른 채 질질 끌려간 닉시가 푸하 숨을 크게 내뱉었다.
쌉쌀한 풀냄새 나는 방이었다.
닉시는 그의 머리카락을 닮아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초콜릿 색 나무 방을 쭉 둘러보며 침대에 앉았다.
“우리 이제부터 좋은 시간 보내야 돼?”
“아니!”
이번 건 누가 봐도 수상했다. 오해하겠지? 오해하겠지. 길버트는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정말 급한 상황이었다.
“동생 같다는 건 뭐야.”
“그거…….”
길버트는 의자를 끌고 와 닉시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좀 전에 헬렌과 잡화점에서 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헬렌이 길버트와 닉시 사이가 꽤 좋아 보인다 놀렸던 것.
헬렌은 장난기가 심해서 괜히 틈을 주면 그걸로 두고두고 놀려먹을 게 뻔했기에 딱 잘라서 동생 같다 했다는 것.
“그럼 지금 이건 뭐야? 더 수상한데. 누가 봐도 ‘좋은 시간’을 방해받지 않게 눈치 줘서 쫓아낸 것 같잖아.”
“……그렇게 무례한 사람처럼 보였어?”
“응.”
길버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갑자기 닉시의 입을 틀어막은 이유는 닉시가 ‘화가’의 이야기를 꺼내서였다.
“……헬렌 앞에선 화가…… 그러니까 벤자민 씨 이야기를 안 하는 게 좋아.”
“왜? 둘이 사귀다 헤어진 사이야?”
“아니…….”
헬렌과 벤자민의 사이는 다소 복잡했다. 서로 말 한마디 섞어 본 적 없는 사이지만 참 미묘한 관계였다.
“리히터 씨가 게르강 전투에 소집된 사람이란 건 알고 있지?”
닉시는 처음 벤자민을 만났던 날, 길버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년 전에 마을에 온 사람인데 음…… 꽤 예민한 사람이지? 이해해 줘. 리히터 씨는 게르강 전투에 소집됐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거든.] [아, 게르강 전투.] [알아?] [당연히 알지.]“응. 저번에 네가 말해 줬지.”
“사실 리히터 씨는 독일군이야. 프랑스인이 아니라.”
아. 닉시가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쩐지 말투가 딱딱하더라니.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과 서먹한 게 이해됐다.
반년 전만 해도 서로 죽어라 싸우던 사인데, 사이가 좋은 게 더 이상하지.
오히려 화가가 여태 총알 안 맞고 살아 있는 게 용했다.
그런데 독일군이 어쩌다 프랑스 끝자락 시골 마을까지 흘러들어 오게 된 걸까.
닉시는 머릴 긁적였다.
‘그래서 로부스 박물관에 데려가 달라 했던 건가. 로부스 박물관은 파리에 있으니까…….’
“헬렌의 남편분은 게르강 전투에서 돌아가셨어. 독일군의 총탄에 즉사하셨지. 그래서 헬렌은 리히터 씨를 꺼려. 우리도 헬렌 앞에선 독일군이나 리히터 씨 이야기를 안 꺼내는 편이고.”
“몰랐네……. 그래서 갑자기 내 입을 막았구나?”
“헬렌 앞에서 갑자기 말하지 말라고 할 순 없었으니까.”
덕분에 큰 오해를 산 것 같지만. 길버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닉시는 머리칼을 꼬았다.
독일군이라. 전투에 소집됐다기에 너무 당연히 프랑스군인 줄 알았다.
근데 하필 게르강 전투라니.
게르강 전투는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큰 승리를 가져온 전투 중의 하나였다.
그 전투를 계기로 독일군의 전선이 물러나기 시작했고, 종전에 가장 영향을 미친 전투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녀가 훈장을 받게 된 전투기도 하고.
‘그런 전투에서 살아남은 패잔병이라.’
닉시는 애초에도 오베르 사람들 그 누구에게 본인이 군인이었다는 걸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더더욱 말하지 못할 이유가 생겼다.
그 전투가 승리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만든 생화학 무기 덕분이었기 때문에.
―톡톡.
창문가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돌아갈게.”
“저녁 내기는?”
“오늘부터 저녁 안 먹기로 해서.”
“그래. 내기는 다음에 하자.”
길버트는 닉시를 마중하기 위해 현관까지 바래다줬다.
우산을 안 가져왔다는 닉시로 인해 길버트는 창고에서 낡은 양산을 꺼내야 했다.
동생이 공주님 놀이할 때 쓰던 프릴 달린 화려하고 예쁜 양산이었다.
길버트는 닉시가 갑자기 침울해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원래 사람의 변덕이란 말론 설명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으니.
전쟁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참. 닉시, 이거 가져가.”
길버트가 닉시를 불러세웠다.
“뭔데?”
“후추. 오늘 샀어. 감자 으깬 거에 마요네즈 넣고 뿌려 먹으면 맛있어.”
“맛있겠다. 오늘 해 먹어야지.”
“오늘 저녁에?”
“응, 오늘 저녁에.”
길버트는 픽 웃으며 짚 바구니에 통후추와 후추 그라인더를 같이 넣어 주었다.
“비 많이 오네. 돌다리 잠기기 전에 데려다줄게.”
오늘도 어김없이 길버트는 밀밭의 들판을 넘어 시냇물 건너편까지만 데려다주겠다 말했다. 닉시는 쓸데없이 화려한 양산을 어깨에 걸쳐 맸다.
빗물 때문에 질척한 바닥을 밟으며 오솔길을 헤쳐 나갔다.
이야기를 해도 빗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을 게 분명했기에 닉시와 길버트는 딱히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았다.
길버트는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오면 햇빛을 보지 못해서 사람이 축 처지는 거라고. 비가 오면 해를 보지 못하게 되니까.
‘지금 내가 축 처지는 이유는 그래서인가. 해가 들지 않아서?’
“길.”
“어?”
그는 퍼뜩 감상에서 벗어났다.
닉시는 쓰고 있던 우산을 길버트에게 건네줬다.
“갑자기 왜…… 다 젖어. 안 쓰고 가?”
“비가 오면 툭툭 소리가 나.”
그건 당연한 말이었다. 우산을 쓰면 당연히 빗물 때문에 톡톡 소리가 나니까.
닉시의 뜻 모를 이야기에 길버트는 눈만 깜빡였다.
“난 그 소리를 싫어해. 우울해지거든.”
“우울?”
‘처지는 게 아니라 우울한 건가. 그럼 내가 지금 우울한 이유는 뭐지.’
닉시는 우산으로 툭툭 떨어지는 규칙적인 빗소리가 싫다 말했다.
역시 전혀 뜻 모를 이유였다.
“알았어.”
길버트는 공주풍 양산을 건네받았다.
그럼 저가 우울한 이유는 뭐 때문일까.
눈앞의 시끄러운 이웃이 평소완 달리 축 처져 있어서 그럴까. 아니면 동생의 이야기를 꺼내서?
잊고 있었던 전쟁 따위를 이야기해서? 오랜만에 동생이 아끼던 공주풍 우산을 봐서?
5년 전, 독일군의 포탄에 죽은 동생이 떠올라서?
“그럼 이 우산 가져가. 이거 싸구려 우산이라 빗물 맞아도 흡수해서 소리 잘 안 나거든.”
길버트는 저가 들고 있는 우산을 건넸다.
“그래?”
“응.”
“고마워.”
둘은 다시 길을 걸었다.
우습게도 우산을 들고 있으면서 둘 다 쓰지 않고 걸었다. 덕분에 아까완 다르게 조잘조잘 대화하면서 걸어갈 수 있었다.
“근데 왜 꼭 시냇물 건너편까지만 데려다주는 거야?”
“음…… 딱히 이유는 없어. 왜?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어?”
“응.”
“흐음…… 생각 좀 해 봐야겠는데.”
“어…… 내가 동생 같아서 그렇다는 건 어때?”
“동생이면 잘 가든 말든 신경 안 썼지.”
“놀랍네.”
닉시는 생각보다 냉정한 길버트의 형제애에 큰 충격을 받았다.
왠지 길버트는 동생이 있으면 동생이 몇 살이 되든 간에 업어서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것 같은 이미지에 가까웠으니까.
“헬렌한텐 네가 동생 같다고 이야기했지만…….”
길버트는 닉시를 바라봤다.
빨간 눈동자는 오래전 죽은 여동생의 고동색 눈동자와 확연히 달랐다.
제 여동생은 웃으면 보조개가 들어가는 어린 소녀였다.
노란 머리칼도 아니었고, 수줍고 얌전했던.
“사실 넌 코코랑 닮았어.”
“코코?”
무서운 거 모르고, 왕왕 짖기 좋아하고, 종일 정신 없이 돌아다니던.
목구멍은 조그만 게 식탐은 많아서 닭 뼈를 삼켜 버리고 죽어 버린 코카 스파니엘.
닉시는 그게 누구냐 고갤 갸웃했다. 길버트는 비밀이라며 킥킥 웃었다.
“뭐…… 걔도 내 동생 같은 녀석이었지.”
“뭐지. 뭔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이상한데. 꼭…… 개 같아.”
“아직도 우울하면 음, 좋아하는 거 말하기 내기할래? 좋아하는 걸 더 이상 못 말하게 된 사람이 내일 저녁 사는 거야.”
“좋아.”
그와 그녀는 경쟁하듯 입을 열었다.
“양배추 샐러드”, “재즈”, “겨자 샐러드”, “시나몬 애플 티” , “양상추 샐러드”, “닉시, 이 세상 모든 샐러드를 댈 참이야?”
어느새 그와 그녀가 헤어질 약속의 장소인 시냇물 앞까지 도착했다.
내기는 내일 라울의 술집에서 이어 하기로 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선 시냇물 돌다리 하나를 건너야 했다.
길버트와 시냇물 앞에서 인사한 뒤, 닉시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시냇물 앞에 쪼그려 앉아 도랑 속 민물 가재를 관찰했다.
불어난 물 때문에 돌다리를 건널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아챈 건, 민물 가재 하나를 골라잡았을 때였다.
랍스터가 될 때까지 키우기 위해 ‘닐슨’이란 이름까지 붙여 준 참이었다.
넘실넘실 흐르는 흙탕물을 가만히 보던 그녀는 닐슨과 함께 들판 위쪽에 있는 다리를 향해 여정을 떠났다.
닐슨은 옹졸했다. 여정을 떠난 지 10분도 안 돼서 픽 죽어 버렸으니.
닉시는 덜렁대는 가재의 집게를 허망하게 흔들며 길을 걸었다.
‘묻어 줘야 할까.’
비 오는 날 죽은 전우의 시체를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죽은 전우에 대한 예우 때문이라기보단, 묻어도 흙이 금방 쓸려나가는 바람에 전우가 다시 까꿍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닉시는 가재를 물에 띄워 보내 주기로 했다. 내키지 않지만.
저만치 멀리 돌다리가 보였다.
‘어라……?’
닉시는 빗물로 어지러운 시야를 밝히기 위해 눈을 벅벅 닦아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 돌다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마.
“화가?”
벤자민은 제게 불쑥 우산을 들이민 시끄러운 이웃을 바라봤다.
어디서 헤엄치다 온 건지, 그녀는 홀딱 젖은 채로 죽은 가재를 쥐고 있었다.
그는 방금 먹은 수면제의 몽롱한 수마를 느끼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여기서 뭐 해?”
벤자민은 닉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와 마주친 건 닷새 만이었다.
‘어떻게 말 걸지 말란 말이 일주일도 못 갈 수 있지.’
그는 우산을 사양했다. 우산이 필요 없을 만큼 이미 젖기도 했고 어차피 이제 돌아가려 했었으니까.
“계속 있으면 감기 걸려.”
“나보단 본인 먼저 걱정해야 할 거 같은데.”
“나? 나는 튼튼해서 괜찮아. 근데 너 약 먹었구나?”
벤자민은 답하지 않았다.
이 시끄러운 여자는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행동하면서 이상한 곳에서 눈썰미가 좋았다.
닉시는 돌다리에 붙어 있는 담쟁이넝쿨을 덥석 뜯어냈다.
적당히 뜯은 긴 식물 줄기로 작은 돌멩이 하나와 가재의 몸을 같이 꽁꽁 돌려맸다.
벤자민은 뭐 하는 건가 싶어 잠시 닉시를 바라봤으나 금방 시선을 돌렸다. 이상한 여자가 이상한 짓을 하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
토끼풀꽃 하나를 가재 집게에 끼운 닉시가 전사한 가재를 물에 띄워 보냈다.
“외로운 장례식이 아니게 됐네.”
“동물 사체 장례 해 주는 걸 좋아하는 취미도 있군.”
“안 좋아해. 10분 동안 주인이었던 의무감 때문에 해 주는 거지.”
무슨 소리야. 벤자민은 생각했다.
닉시는 벤자민이 기대앉아 있는 난간 옆에 주저앉았다.
그는 그녀가 빨리 지나가길 바랐지만, 아예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모습을 보니 쉽사리 돌아가진 않을 것을 직감했다.
벤자민의 바람을 알 리 없는 닉시는 그녀 나름대로 큰 배려와 관심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본 그는 우울증 온 카피바라와 같았다.
물가에 살다가 재규어나 하이에나 같은 천적 따위를 만나면 뜯어 먹히기 전에 차라리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카피바라.
그래서 다리에서 그를 마주쳤을 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오늘 장례 치르는 건 닐슨 하나뿐이면 좋겠는데.”
무릎만큼까지 잠길 수위의 강이었지만 죽을 결심을 한 사람은 접싯물에도 코를 박고 죽는다는데, 매일 죽겠단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야. 코만 잠겨도 익사할지도 모른다.
닉시의 중얼거림을 들은 벤자민이 어이없단 헛웃음을 내뱉었다.
“비 오는 걸 구경하고 있던 거뿐이야.”
“그걸 구경해서 뭐 해?”
닉시에게 비란 수증기의 응결 현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비 맞는 느낌을 좋아해서.”
“그렇구나.”
‘참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네.’
닉시는 눅진하게 눌어붙는 머리카락을 떼어 냈다.
‘그러고 보니……’
“네가 뭘 좋아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 거 같아.”
뭘 해도 싫어한단 티만 내는 화가였다. 특히 저가 알짱거리는 걸 제일 싫어하고.
처음 만났을 때 그랑 친해지기 위해 으레 좋아하는 것을 묻는 절차를 거쳤지만 영 수확이 없었었다.
싫어하는 것만 많은 다섯 살 떼쟁이 아닐까 했는데.
“더 좋아하는 거 없어?”
역시 벤자민은 그걸 왜 물어보냐는 듯 바라봤다.
글쎄 그걸 묻는 이유는…….
“난 사실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거든.”
“…….”
“좋아한다는 감정 말이야. 싫지 않으면 좋은 건가? 했는데 그건 또 아니라고 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려앉았다.
빗줄기는 굵지 않았으나 이미 젖어 버린 옷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없으면 못살 것 같은 거라고도 하던데. 그럼 나는 공기를 좋아하는 건가? 그건 좀 이상하잖아.”
“그런 건 네 스스로 생각해.”
“좋아하는 거, 더 없어?”
벤자민은 제 의사를 묻지도 않고 씌워졌던 우산을 닉시에게 돌려주었다.
우산 표면에 툭, 툭 떨어지는 소리를 가만히 듣던 닉시는 우산을 접었다.
“싫어하는 건 많아. 우선 우산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싫어.”
“…….”
“도마 위에서 당근 써는 소리도. 민들레 뿌리도. 불꽃놀이도. 하이힐도.”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작아진다.
그녀가 말한 ‘싫어하는 것들’의 나열은 규칙성이 없었다.
벤자민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수면제 약효가 돌아 까무룩 잠들 시간이었다.
닉시는 여전히 난간에 앉아 비 오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 오는 날도. 바다도. 나도.”
―쿠르릉!
하늘이 일순간 하얗게 물들더니 곧장 천둥소리가 빗소리 사이를 가득 메웠다.
벤자민은 다급히 손을 뻗어 난간 뒤로 넘어가는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그녀의 무게를 이길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 함께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첨벙!
거창하게 뻗어낸 것 치고 소담한 물장구 소리.
‘아파라…….’
닉시는 징 울리는 꼬리뼈를 쓸어내렸다.
그녀는 제 복부에 올라가 있는 묵직한 손을 바라봤다.
흉터 가득한 손.
그 손을 거슬러 올라가자 짜증 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어, 화가? 넌 왜 여기 있어.”
“……네가 갑자기 냇가에 뛰어들었잖아.”
“뛰어든 거 아냐.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서.”
정말 찰나였다.
벤자민은 아득한 천둥소리 사이에서 닉시의 미약한 비명 소릴 들었다.
또 무슨 장난인가 싶어서 흘긋 바라본 자리엔 그녀가 없었다.
닉시는 도랑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긴 했지만 결과는 흙탕물에 다이빙한 꼴.
진짜, 짜증 나는 여자.
벤자민은 풀썩 강물에 얼굴을 처박았다. 약효가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야 너 여기서 자면 죽어. 가재한테 뜯어 먹히고 싶어?”
닉시는 눈을 감고 있는 벤자민을 흔들어 깨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벤자민은 피곤했다.
안 그래도 수면제를 먹어 가물가물했는데, 미적지근한 봄의 강물에 파묻히게 되니 잠이 깨기는커녕 수마가 밀려왔다.
그냥 이대로 잠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전혀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할 만큼 피곤했다.
가물가물. 잠들기 직전의 색색이는 숨소리.
작은 시냇물에 코 박고 죽을 위기에 처했음에도 벤자민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이러다간 정말 장례 치르게 될까 걱정된 닉시가 낑낑대며 벤자민의 몸을 돌렸다.
코에 물이 덜 들어가니 그의 표정은 침대에 누운 것처럼 한결 편해졌다.
닉시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천둥소리도 싫어해.”
그걸 들으면 동공이 확 줄어드는 기분이 든다.
천둥소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곧 폭격이 시작될 거라는 포탄의 첫 발포 소리와 닮았으니까.
그걸 들으면 심해 속 찌그러지기 직전의 빈 페트병이 된 기분이 든다.
“저기 벤자민.”
“…….”
“아마도 지금 우울한 것 같아. 근데 왜 우울한지 모르겠어. 역시 싫어하는 걸 말해서 그런가?”
“…….”
“어떡해? 어떻게 빠져나오지? 이봐. 말 좀 해 봐.”
이미 잠든 사람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닉시는 지금 당장 제 기분을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찌그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중력조차 압박으로 느껴져서, 모든 공기가 몸을 짓눌러서.
물에 젖은 초라한 몸이 납작하게 눌려 팬케이크가 될 것 같았으니까.
아무리 속이 비어서 그렇다곤 하지만.
―첨벙.
벤자민이 손을 들었다.
그의 손은 연신 중얼거리는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 돼. 지금처럼.”
“…….”
잠꼬대처럼 손이 떨어졌다.
닉시는 배려 없이 제 얼굴을 훑고 떨어진 손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
“…….”
“……근데 화가. 너 되게 뜨겁다.”
“…….”
이 멍청한! 그러니까 감기 걸린다니까!
닉시는 그의 몸을 들쳐 메고 일어났다.
* * *
소대에 있던 동료들은 닉시를 ‘행운의 여신’이라 불렀다.
행운과 신. 좋은 단어가 두 가지나 들어가는 별명.
물론 좋은 것만 붙여 놨다고 뜻이 좋다곤 할 순 없지만 닉시는 그 별명을 제법 맘에 들어 했다.
그녀가 그렇게 불리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의 접경지대에 다섯 번 파견되면서, 세 번의 총격전과 여섯 번의 폭격 속에도 살아남은 이후부터.
“잠깐 물 뜨러 간 순간 초소에 폭탄이 떨어졌어요. 바로 복귀했죠. 저녁 배식 시간이어서 대부분 다 한자리에 모여 있었잖아요. 기억나죠, 선배? 근데 거기에 폭탄이 떨어졌으니, 멀쩡한 애들이 있었겠느냐고요. 일단 가장 숨이 붙어 있던 녀석을 업었어요. 바로 본부에 무전을 쳤고. 소대 삼분의 일은 전투 불능 상태였는데, 다행히 1소대가 바로 지원 와 줘서 여차저차 잘 막을 수 있었죠. 그 뒤로? 글쎄요 정확히 기억 안 나네요.”
“왜 네가 걸어 다니는 사신이라고 불리는지 알겠네.”
“와 선배, 말이 너무 심하다. 근데요, 이쯤 되면 복귀하고 훈장 하나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 덕분에 기습 방어한 건데.”
“복귀부터 하자, 닉시. 전선이 코앞이야. 목숨 줄이 간당간당해.”
“알겠어요. 위대하신 노엘 휴거 선배의 명령은 절대적이니까.”
“또 삐딱하게 굴지?”
“후후.”
목숨을 저울질하는 저렴한 농담이 세상에서 제일 웃긴 코미디였다.
멀리서 봐도 비극, 가까이서 보면 더 비극.
낄낄 웃으며 동료들과 내일 너는 어떻게 죽냐는 둥, 탈영하는 것과 하사 뺨 때리는 것 중 뭐가 더 오래 살 것 같냐는 둥. 그런 시시콜콜한 시간이 그 시절엔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 무렵에는 살아 있다는 걸 가장 큰 훈장으로 삼았다.
말단 조무래기들이 총을 갈겨 봐야 얼마나 공을 세웠겠는가. 자기들 입에 물고 당기지만 않아도 대단한 거지.
아주 오래전엔 들떴던 것 같기도 하다. 영웅심리 같은 거였다.
내가 소중한 동료들을 구했다는 것, 조국에 도움이 됐다는 것. 오늘도 눈 뜨고 있다는 것.
물론 오래가지 않았다.
전쟁터가 익숙해질 무렵엔 그런 것도 무뎌졌을 뿐.
행운의 여신인 닉시는 6년간의 전쟁 속에서도 살아남았지만 일반 병사 1, 2에 지나지 않았던 다른 동료들은 각기 진흙탕에, 도랑에, 절벽에, 기억 속에 묻혔다.
영웅이니, 자긍심이니 그따위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명예로운 죽음이란 전장 한복판에서 발견한 금화만큼이나 쓸모없다. 오래 악착같이 살아남는 게 유일한 자랑거리.
결국 시시콜콜하게 수다 떨던 옛날이 가물가물해졌을 때쯤, 가슴께엔 별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훈장이었다.
그 이후로 행운의 여신이니, 운 좋은 닉시라는 말은 농담으로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 별이니 저 별이니, 짊어지게 된 게 무거웠으니까.
가끔 꿈에 시시한 농담 따먹기를 하던 동료들이 나온다.
그럴 때마다 정신병에 걸렸구나 생각한다.
―털썩.
닉시는 화가의 방 한가운데 그를 내던졌다.
가뜩이나 축 처진 몸을 짊어지느라 힘든데 업혀 있던 남자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서 저도 열이 나는 기분이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열이 나고 있진 않았다.
팔다리 멀쩡한 사람이 단시간 이렇게 급격하게 악화될 수 있나?
닉시는 장작 그러모아 벽난로 앞에 앉았다. 핏, 핏. 물 먹은 성냥이 비실댔다.
결국 닉시는 얼굴을 와락 구긴 채 성냥을 팽개쳤다.
‘이거 약 부작용 같은데.’
이 약을 과다복용한 사람들 중엔 열에 끙끙 앓는 경우가 있었다.
수면유도제 주성분인 양귀비 뿌리 가루와 안 맞거나, 간이 약 속에 포함된 항생제를 해독하기 버거워해 열이 나거나.
램프를 해체해 토치를 꺼낸 닉시가 그것을 장작에 갖다 댔다.
틱틱거리는 마찰음 몇 번. 닉시의 도화선에 불이 붙기 전, 다행스럽게도 벽난로에 불이 붙었다.
물을 끓이고, 젖은 옷을 벗기고 몸을 닦고 새 옷을 입혔다.
집에 그 흔한 해열제 하나가 없다.
‘그럼 만드는 수밖에.’
닉시는 안주머니에서 약통 하날 꺼냈다.
손바닥만 한 통 안에 약을 이것저것 쟁여놓고 들고 다니는 것은 그녀의 오랜 습관이었다.
‘이걸 언제부터 들고 다녔더라.’
흰색과 붉은색 알약을 집었다. 능숙하게 캡슐을 깐 뒤, 적당한 가루를 물에 묽게 탔다.
아, 기억났다. 콩피뉴 공방전부터였다.
그때도 지금처럼 비가 오던 날이었다.
사방이 아비규환이었다.
누가 내 편인지 네 편인지 구별되지 않을 만큼 진창에서 싸웠을 때.
그녀는 건물 잔해에 깔린 노엘 휴거의 팔을 잡고 엉엉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