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_4
전선은 밀리고 있었고, 후퇴 명령은 진작 떨어진 지 오래. 그녀도 어차피 발등이 깨져 있었기에 도망가는 건 힘들었다.
노엘과 함께 죽기를 기다렸을 뿐.
그러나 그녀의 선배는 안주머니에서 약통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그 안에 흰색 알약이 있을 거야. 내가 먹으려고 아껴 뒀던 건데, 특별히 너 준다. 먹어.”
그는 멍하니 있던 그녀에게 억지로 약통을 내밀었다.
귀를 찢는 폭음 속에서 그의 입 모양만 생생했다.
[먹고 달려.]그녀에게 그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녀는 그 알약을 먹고 달렸다.
사방이 진동했다.
땅이 마구 흔들리고, 비가 어지럽고, 울렁이고, 쾅쾅. 하하, 하하하.
빗속을 달리면서 그녀는 마구 웃었다.
내 발등이 부러졌던가. 방금까지 누구와 싸우고 있었는지, 누굴 버리고 왔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비를 맞으러 뛰어다니는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낄낄 웃으며 미친 듯이 달렸다.
약 탄 물을 머그잔에 옮겨 담았다.
이제 이걸 먹이기만 하면 되지만 환자는 아직까지 열에 끙끙대고 있다.
약을 온전히 먹이려면 입으로 먹여 주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닉시는 그런 로맨틱한 짓은 못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냥 들이부었다.
공교롭게 물고문을 당한 벤자민이 무의식중에도 얼굴을 와락 구겼다.
흘리는 게 반, 먹는 게 반이었다.
“그럴 줄 알고 약도 큰 냄비 하나에 가득 만들었지.”
약을 먹긴 한 건지 콜록거리는 그를 놔두고 닉시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
“…….”
“그러니까 죽지 마.”
나중에야 그녀는 제가 먹은 약이 뭔지 알게 됐다. 사지가 잘려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약성 진통제.
아마 노엘 휴거는 고통 속에 죽어 갔을 것이다.
―달그락.
닉시는 머그잔을 옆에 내려놓은 뒤 소매를 문질러 입술에 감도는 쓴맛을 닦아냈다.
어울리지 않는 친절 후 그녀는 벤자민의 목에 손을 올렸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살아 있다.
표정도 아까보다 한결 나아 보였다.
‘당연하지. 누가 제조한 약인데.’ 닉시는 그제야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창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우중충했지만 비는 그쳐 있었다.
▶ 오늘의 수확
닐슨의 집게발
▶ 총평
애완동물을 소중히 하자!
* * *
“꽃 따러 가자, 닉시.”
아침 일찍 헬렌이 찾아왔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침과 새벽을 구분하지 않는다.
닉시는 졸린 눈을 비비며 파자마에 카디건만 걸친 채 그녀를 따라갔다.
오베르 마을의 서쪽 숲엔 작은 호수가 있었다.
가는 길이 험해 사람들 발길이 드문 곳이었다. 정글 같아 보여도 물 근처에 사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제법 구경하기 괜찮은 장소였다.
“봄에 피는 꽃들이 색이 제일 곱거든. 꽃이나 꽃 조각들을 넣은 비누들이 도시 양반들에게 인기가 많아.”
“아하. 그럼 지금 주우러 가는 꽃은 뭔데요?”
“동백이랑 수선화.”
수풀을 지나 꽃들의 무법지대에 도착했다.
뭉근하게만 불어오던 꽃향기가 훅 코끝을 간질였다.
“수선화에는 독이 있는데 괜찮아요?”
“응? 어떤 독?”
“설사랑 복통이요.”
“비누를 먹을 일은 없지 않을까? 설사랑 복통으론 안 끝날 텐데.”
“하긴 그건 그래요.”
물가에 쪼그려 앉은 헬렌은 수선화의 꽃잎 부분만 가위로 똑똑 잘라냈다.
반면 손으로 우악스럽게 뜯은 닉시는 손안에서 구질구질해진 노란 꽃을 바구니에 넣었다가 헬렌에게 잔소리 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동백꽃 중 꽃잎이 상하지 않은 것들을 주웠다.
몇 개 주워 담지도 않았는데 손가락이 얼룩덜룩해져 있었다.
“꽃을 곱게 말려서 입욕제에 첨가하면 참 좋아. 말려 있던 꽃이 물에 불어서 살아나면 꽃이 피는 것 같거든.”
바구니에 한 아름 꽃을 주워 담은 뒤 호수를 벗어났다.
꽃을 딸 때만 해도 이렇게 많이 따도 되나, 수선화의 멸종에 도모하고 있는 거 아닐까 걱정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꽃 걱정은 안 해도 돼. 십 년 전엔 관광객이 있었던 것 같긴 했는데 이젠 아예 안 오는 곳이라 꽃이 차고 넘쳐. 물론 제비꽃은 없지만. 오히려 꽃을 적당히 안 따 주면 말벌들이 꼬여서 무서운 곳이 돼 버린다니까. 물론 제비꽃엔 벌이 잘 안 꼬이지만!”
“헬렌, 제비꽃 없다고 저 놀려요?”
꽃 따는 걸 도와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헬렌은 자신의 집에 들르길 권했다.
어제 만든 스튜 맛이 기가 막혀서 꼭 먹어 봤으면 한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집에 있는 거라곤 풀떼기뿐이라 거절할 이유가 없던 닉시는 그녀를 따라 파자마 차림으로 마을을 활보했다.
“난 원래 그이랑 다녔었는데. 넌 이맘때쯤 뭐 했니?”
“이맘때쯤?”
총을 쏘고, 찌르고, 폭탄을 던지고, 달리고.
“전쟁 전에 말이야.”
“아.”
닉시는 눈을 끔뻑였다.
이맘때쯤이라기에 지난해 이맘때 뭘 했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 전이라.
전쟁이 인생의 4분의 1을 넘게 차지해 버린 터라 전쟁이 없었던 이전 날은 까마득하기만 했다.
겨우겨우 기억을 더듬자 갓 성인이 됐을 무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제2의 마리 퀴리를 꿈꾸는 화학자였다.
화학식을 읽고, 논문을 쓰고, 쥐에게 약물을 주입하고, 주사기로 찌르고, 가르고.
생각해 보니 둘 다 살아 있는 좀비 같은 생활이었다는 건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비슷비슷했어요. 아 헬렌, 이 동백 헬렌 머리색이랑 비슷하네요.”
“그래? 동백 같단 말은 처음 들어 보네. 산호 같단 말은 들었는데.”
헬렌의 잡화점에 도착했다.
그녀는 곧장 난로에 불을 켰다.
곧 훈기와 함께 연어 스튜 끓는 소리가 났다.
연어 스튜를 바게트에 찍어 먹으면 천상의 맛이라 주장한 헬렌은 닉시를 천국으로 보내 주겠다며 바게트를 썰었다.
“아, 바다에 나가 봐. 이 스튜, 거기서 나는 소금으로 만든 거거든.”
“바다 싫어해요.”
“왜?”
“삼켜질 것 같아서요.”
스튜가 나왔다. 맛은 가히 천상의 맛이었다. 너무 짜서.
다행히도 스튜가 짰던 건 헬렌의 미각 문제가 아니었다.
크림을 넣었어야 했는데 깜빡했던 탓이었다.
결국 점심 식사 약속은 저녁 식사로 변경됐다.
전쟁 전의 삶도 지금과 다를 바 없었단 그녀의 말을 들은 헬렌은 ‘그럼 안 된다’는 둥 ‘인생에 소소한 재미를 찾으라’는 둥 말하며 강낭콩 모종을 선물로 줬다.
인생의 소소한 재미와 강낭콩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선물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포기했던 유전자 조작실험을 다시 시작해 볼까.’
그녀가 군에 입대하기 전, 그러니 약 6년 전쯤이다.
그녀는 나름 천재 화학자로 불리는 유명인이었다.
그때 하던 연구 내용이 줄기세포를 이용한 어쩌고저쩌고 실험이었다.
‘그거 가지고 뭐 하려 했더라. 아, 기억났다. 대형 작물을 만들려고 했지. 강낭콩 하나만 있어도 여러 사람이 먹고살 만한 식물을 만들려고 했어.’
가물가물하긴 해도 아예 기억 안 나는 수준은 아니다.
게다가 유전자를 조작해서 작물의 크기를 단순 확대시키는 것에 불과한 실험은 기초 중의 기초.
‘먼 옛날의 나는 왜 이런 기초적인 실험도 못 마치고 입대한 거지.’
닉시는 파릇파릇한 강낭콩 줄기를 툭 쳐냈다.
‘좋아. 이번에야말로 잭과 콩나무를 만들어 보지 뭐.’
이왕 만드는 거 맛도 좋게 하면 멋지겠다 판단한 닉시는 마을 어딘가에 작물 재배에 대한 서적이 있진 않은지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을을 두 바퀴 돌았을 때쯤 알 수 있었다.
여긴 종이 한 장 보이지 않는다!
허나 오베르 오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일단 길버트를 찾으면 된다는 것.
결국 작물 재배서 따위를 찾겠단 목적은 길버트를 찾는다는 것으로 변경됐다.
닉시는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끼익. 기름칠 덜해 뻑뻑한 문을 열었다.
농사로 한창 바쁠 오후 3시 무렵. 회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마을 촌장을 위한 사무적인 공간.
말이 좋아야 ‘사무적인’이지, 작은 시골 마을에서 회관이란 그저 깔끔한 창고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마을에선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종이 냄새가 났다.
회관을 두리번거리던 닉시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을 발견했다.
그곳엔 큰 복도와 객실로 보이는 몇몇 방이 보였다. 종이 냄새는 2층 복도 끝에 작은 나무 계단 쪽에서 났다. 그녀는 그곳으로 향했다.
위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귤과 딸기 같은 것들을 말리기 좋을 법한 해가 잘 드는 아담한 크기의 다락방.
그녀가 눈 빠지도록 찾던 서재였다.
그곳엔 각기 작물이니 농사에 대한 책들이 빼곡히 진열돼 있었다.
뜻밖의 보물창고를 찾은 닉시가 눈을 반짝이며 우당탕 다락으로 올라갔다.
닉시가 책에 정신이 팔려 간과하고 있던 게 있었다.
그 다락방 안엔 먼저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는 것.
그 손님은 갑자기 들이닥친 닉시를 보고 야생에서 곰을 만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는 것.
“누, 누구세요……!”
닉시가 손님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그녀가 굵은 백과사전을 둔기마냥 닉시에게 겨눴을 때였다.
두 손으로 들기도 무거운 건지 파들파들 떨면서.
닉시는 포식자 앞의 토끼 같은 손님의 표정에 문득 짓궂은 미소를 짓고 싶어졌다.
“……친절한 이웃 닉시예요.”
“아 그 빈집에 이사 온다 했던…….”
닉시는 백과 사건에 얻어맞아 부은 이마를 매만졌다.
보기보다 힘이 세다, 이 아가씨.
제 또래로 보이는 눈앞의 여성은 우물쭈물대며 제 이마와 바닥을 번갈아 봤다.
아무래도 백과사전으로 엄한 사람 이마를 쪼개 놓은 것이 미안한 듯했다.
물론 오해는 닉시가 먼저 하게 했다.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강낭콩 화분을 마치 훔친 금괴마냥 감싸 안았으니까.
“그레타예요.”
목 언저리까지 오는 까만 칼 단발을 가진 그녀가 조곤조곤 말했다.
보면 볼수록 단아하게 생긴 미인이었다.
예쁜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닉시는 그레타의 올리브색 눈을 빤히 바라봤다.
영 수줍음이 많은 그레타는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
“네, 네? 그게…… 라틴어 사전을 읽고 있었어요.”
“우와 이 서재에 그런 것도 있어요? 감자 키우기, 감자 수확하기 이런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물론 그것도 있죠.”
그레타는 이 서재에 꽤 많은 책들이 있다고 말해 줬다.
이곳이 주변 도시와는 거리가 있는 외진 곳이라, 학교를 다니기 힘든 아이들을 위해 만든 장소라 했다.
덕분에 사전, 잡지, 악보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책들이 있었다.
“근데 ‘싸이코의 살인법’ 이런 건 애들 보여 주기 좀 그렇지 않나……? 책은 누가 사 오는 거예요?”
“길버트요. 아마 표지가 멀쩡해서 그럴 거예요.”
참 요상한 선정기준이다. 겉만 멀쩡하면 알맹이는 피가 튀기든 선정적이든 상관없다는 말인가.
‘하하 웃는 성격 좋아 보이는 인상에 이런 무서움을 가지고 있었군, 길버트.’
책들 중엔 글자가 참깨만큼 작은, 학술서에 가까운 책도 많았다.
보통 학생들이 보는 책이라 하면 그림책. 글자가 많아 봐야 단편 소설집일 텐데, 제가 잠시 군대에 있을 동안 학생들의 수준이 말도 안 되게 높아진 건가!
닉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책을 펼쳤다.
심지어 이 학술서는 영어로 쓰여 있었다.
슬슬 닉시는 혼란스러웠다.
이건 길버트가 편견이 없는 건가, 아니면 오베르의 학생들은 불어는 물론 영어도 마스터했단 말인가.
‘잠깐만 옆에 있는 제 또래의 그레타는 라틴어 사전을 읽고 있잖아. 그렇단 말은…… 이런 지식은 오베르의 기본 소양인가? 작물을 재배하려면 고학력자가 돼야 하는 건가?’
닉시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한 채 콩류 재배서 두 권과 영어로 된 식물학 책을 집어 들었다.
방금까지 스스로 천재 화학자 어쩌고 했던 게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은 법이다.
[넌 네가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아니, 넌 떼쓰는 어린아이에 불과해.]누가 그랬듯.
그레타는 슬슬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며, 닉시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오래 있던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노을 질 무렵이었다.
그레타와 닉시는 회관 앞에서 어색하게 다음에 또 만나자, 인사했다.
어떡할까. 집에 들렀다 가긴 시간이 애매한데.
헬렌이 초대한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움직인 강낭콩이 비실비실했으나 어쩔 수 없이 닉시는 헬렌의 집으로 향했다.
그레타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가세요?”
“저…… 집으로요.”
“음. 저는 헬렌 집으로요.”
“그 옆의 보라색 우체통 있는 집이 저희 집이에요. 목장이요.”
얼떨결에 안녕! 작별 인사를 해 놓고, 행선지가 같게 된 바람에 회관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 어색한 동행을 해야만 했다.
닉시는 그레타에게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고 싶었지만 소심한 고양이 같은 사람에게 괜히 치근덕댔다간 좋은 것보단 안 좋은 게 더 많을 것이다.
이 좁은 시골구석에서 두 번 다신 얼굴을 못 보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동안 둘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침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붉은 산호색 머리칼이 저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왔니? 이번엔 정말 맛있게 끓였어. 아까 그 소금 피클처럼 짠 스튜를 잊어 달라구. 어머, 그레타도 있구나?”
헬렌은 스튜를 얼마나 많이 끓인 건지 솥째로 들고 있었다.
고소한 밀가루와 우유 냄새가 올라왔다. 적당히 뜨거운 액체 특유의 미각을 자극하는 향기.
닉시는 헬렌이 먹어 보라 건네준 스튜 한 컵을 쭉 비웠다.
적당히 짜면서 양파의 달짝지근함이 남아 있는, 제법 배부르면서 맥주가 먹고 싶은 맛이었다.
“맛있네요. 근데 이분은…….”
헬렌의 옆엔 그레타와 닮은 검은 머리칼의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헬렌은 그녀를 그레타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친구라며 소개했다. 저 언덕 너머 양 목장을 하고 있다고 덧붙이며.
“캐런이에요. 양 목장을 하고 있죠.”
“어머니요? 저는 언니인 줄 알았어요.”
“어머. 농담도. 혹시 옷감 필요하면 말해요.”
캐런은 닉시의 농담에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곧장 겨울쯤에 입을 솜옷이 없던 닉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레타와 친해져야겠다 다짐했다.
“근데 헬렌, 스튜를 뭐 이렇게 많이 했어요? 혹시 오늘이 스튜의 날 같은 특별한 날이라도 되나요?”
“아니. 그럴 리가! 간을 맞추려고 우유를 계속 넣다 보니 많아졌지 뭐야.”
보통 짠 게 아니긴 했지.
헬렌은 늘어난 스튜의 양을 감당하기 위해서 라울에게 스튜에 넣을 당근과 양파를 빌렸다며 솥을 통통 두드렸다.
“그래서 오늘 라울의 술집에 스튜를 돌릴 참이야. 가게 손님들도 소시지 그만 먹고 건강한 우유 스튜를 먹어 봐야지. 거기에 연어가 약간 첨가된.”
헬렌은 넉살 좋게 웃었다.
때마침 흑맥주가 먹고 싶었던 참이다. 겸사겸사 이 시간쯤이면 라울의 가게 근처를 지나갈 길버트를 픽업해 오려 했기도 하고.
“그, 그럼 제가 라울 씨한테……!”
“그래요? 그럼 제가 갖다줄…….”
그때까지만 해도 조용히 있던 그레타가 닉시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닉시는 솥을 척척 들다 말고 눈을 끔뻑이며 그레타를 응시했다.
그레타는 아무래도 우유 스튜(연어 약간 첨가)의 맛에 홀린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는 아까 회관에서 헬렌의 집까지 같이 걸었던 그 잠깐 사이에도 불편하단 티를 냈던 그레타가, 스튜를 들고 라울의 바로 가는 자신을 쫓아올 리 없으니까.
그것도 간식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열심히!
닉시는 솥을 낑낑 들고 걸어오는 그레타를 바라봤다.
무겁다는데도 극구 자신이 한번 들어 보겠다 해서 시킨 것이었으나, 십 미터를 가는 데 일 분이 걸리고 있었다.
이 상태론 스튜 배달보다 지구온난화가 더 빨리 찾아올 것이다.
결국 닉시는 그레타에게서 솥을 뺏어 척척 들고 갔다. 그레타는 별말은 못 하고 낑낑대며 쫓아왔다.
“어서 오세요.”
“라울! 배달 왔어요.”
“아, 안녕하세요…….”
바 문에 달린 종소리가 짤그랑 울렸다.
닉시는 활기찬 목소리로 라울을 불렀다. 가게 안은 저녁을 먹으러 온 손님들로 복작였다.
“친절한 이웃 닉시로군요. 오늘은 우리 가게 매출에 몇 퍼센트를 도와주려나요?”
“오늘은 아쉽지만 0%요. 돈을 안 가져왔거든요.”
“그거 아쉽네요. 하지만 저희 가게는 외상도 달아둘 수 있답니다. 오, 그레타 양. 반가워요.”
라울이 바로 닉시 뒤에 뒤따라오는 그레타를 향해 인사했다.
그러자 그레타의 목덜미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호오?”
카운터 가장 가까운 자리에 솥을 내려놓은 닉시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거 딱 봐도 그거 아닌가? 술 먹고 제정신 아닐 때 봐도 딱 그건데. 그거잖아 그거.
이맘때쯤 꼭 라울의 술집 앞을 지나가는 길버트는 닉시의 계산대로 때마침 술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라울에게 인사 한번 하고 지나쳤을 그는 카운터에 있는 해바라기 이웃과 마을의 엘리트 그레타란 보기 드문 조합에 고갤 갸웃했다.
그는 흙 묻은 장갑을 털며 카운터 옆에 서 있는 닉시에게 다가갔다.
닉시는 꼭 개미 짝짓기라도 구경하는 소년 같은 표정이었다. 한마디로 짓궂게 음흉한 얼굴.
“닉……시?”
“어. 길.”
“무슨 일…… 있어?”
뭐 그렇게 수상한 얼굴이야. 불안하게. 길버트는 뒷말을 삼켰다.
닉시는 이젠 팔까지 괸 채 그레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레타는 라울과 뚝뚝 끊어지는 요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녁 드셨어요?”
“간단하게 먹었답니다. 그레타 양은요.”
“오, 오늘도 셔츠가 멋지시네요.”
“감사합니다. 혹시 식사 아직이라면 간단하게 야채라도 볶아 드릴까요?”
뭐 이런 서로 말은 안 통하는데 어떻게든 끊어지지는 않는 이상한 대화.
“길, 저거 말이야. 그거 아냐 그거?”
“응?”
“사랑.”
닉시는 할머니 같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길버트는 닉시를 흘긋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콧잔등을 꼬집어 주고 싶은 말투였다.
“흐흥.”
“그치?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소녀 얼굴이잖아.”
그래. 극단적으로 시끄러운 닉시와 조용하고 소심한 그레타. 어쩐지 드문 조합이다 했지.
길버트는 닉시의 속삭임에 픽 웃었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가고 이 호기심 많은 이웃은 재밌어 보이는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길버트는 맥주 두 개를 시키고 닉시 옆에 앉았다. 그리곤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상체를 그녀 쪽으로 숙였다.
사실 그레타의 짝사랑은 마을에서 유명했다.
그 대서사시는 라울이 라틴어 선생이었던 6년 전부터 시작됐다.
마을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그레타 아직도 쫓아다닌대요?’ 하지만, 정작 라울은 눈치 못 채고 있는 사이.
“그래서 그레타는 다른 사람들하고 이야기할 땐 말이 없는데 라울한테만 가면 말이 많아져. 떨리는 건지 포인트가 약간 어긋나는 게 문제지만.”
“정말? 라울은 아직도 눈치 못 챈 거야? 전혀 모르고 있는 나도 알겠는데?”
“쉿. 닉시……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뭐. 라울은 모른 척하는 것 같지만.
길버트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라울은 그레타를 그저 귀여운 꼬마 숙녀로만 보는 게 분명했다.
저 그래그래, 하는 표정은 저가 어릴 때 조잘거리는 여동생에게 하던 얼굴이었으니까.
“길. 나 결심했어.”
“뭘?”
“나 그레타의 짝사랑을 이뤄 줄 거야.”
하이고야. 여기에도 꼬마 숙녀가 있네. 길버트는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어떻게?”
“음, 그러게, 어떡하지?”
“사랑이 뭔진 알고?”
“알지. 세상이 온통 하트로 보이는 거잖아.”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이 마을에서 유명한 그레타의 짝사랑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지 않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레타의 짝사랑이 좌절로 돌아서 버릴까 봐.
그랬다간 그레타가 눈물에 묻혀 버리거나, 라울이 땅에 묻힐 수 있으니까.
물론 이뤄진다면 그야말로 6년간의 대장정이 마침표를 찍는 것이겠으나…… 헤어지면 또 라울이 묻히거나, 그레타가 홱 돌아버릴 수도 있는 거고.
“있잖아. 사랑이란 게 보기보다 복잡해, 닉시.”
“사람의 심리란 게 복잡하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 그건 논문이나 학술서를 봐도 모르겠단 말이야. 하지만 도와주고 싶은걸. 난 그레타랑 친해지고 싶단 말이야.”
‘도와줘? 친해지고 싶다?’
그레타는 낯가림만 심하지, 오는 사람 안 막는 착한 친구라 친해짐의 허들이 높진 않다. 오히려 안 도와주고 가만히 있으면 친해질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부터 이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외치고 있는 이 친절한 이웃을 도저히 말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길버트는 턱을 괸 채 눈을 반짝이는 닉시를 응시했다.
“그럼 사랑이 뭔지부터 알고 보는 거 어때?”
“사랑?”
“응.”
그거 재밌겠다. 닉시가 속삭였다.
“그럼 길버트 너도 내 연애 대작전에 동참해 주는 거지?”
닉시는 물었다. 길버트는 내일 할 일이 뭐가 있더라 생각하며 고갤 끄덕였다.
당장 심어야 할 작물은 끝났고, 내일은 그게 남아 있었다.
오베르의 수선화 축제를 위한 꽃점 적기.
“내일 운세 적는 거 도와주면.”
“그게 뭔데?”
“곧 수선화 축제가 열리는데, 매서운 겨울을 난 걸 축하하고 봄을 준비하면서 한 해 농사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축제야.”
수선화 모양의 푸딩을 잘라 먹으면서 마을에 꽃 모양으로 접은 종이를 뿌리는 축제.
꽃 모양 종이 안엔 ‘무병장수’, ‘풍작’, ‘평화’ 같은 한 해 운세를 적어놓는다.
길버트가 내일 해야 할 일은 손바닥만 한 종이 백 장에 운세를 적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없어서 고민이었던 차였다.
“재밌겠다. ……있잖아, 길.”
“혹시 말하는 거지만 좋은 운세만 적어야 해.”
닉시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운세가 좋은 것만 있으면 재미없잖아. 인생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은데.”
“뭘 적으려 했는데.”
“감자 하나가 히틀러 얼굴처럼 생기게 된다.”
“안 돼. 감자 하나에 총알이 수십 발 박히는 걸 보고 싶어?”
“단박에 마을이 유명해질 텐데. 그럼 재미없다구. 길버트 혼자 다 써.”
길버트는 닉시의 퉁명스러운 말에 그냥 웃고 말았다.
사랑. 봄. 꽃. 축제. 수선화.
닉시에게 그 단어들은 뭔가 모르게 제 심장 한구석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단어들이었다.
그것을 정확히 알진 않지만, 봄 하면 자연스레 연분홍색을 떠올리는 것 같은 오래 학습된 그런 간질거림.
“난 글을 못 써.”
“응?”
그의 말에 닉시는 반문했다. 그는 말 대신 카운터 위에 놓인 학술서를 톡톡 두드렸다. 닉시가 빌린 것이었다.
“못 배웠거든, 글. 좋은 말 생각하는 능력도 영 젬병이고. 그러니까 괜찮은 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예를 들어 히틀러…… 말고 ‘병아리 모양의 감자를 수확한다.’나…….”
“…….”
“‘세상이 온통 하트로 보이게 된다.’ 같은 거.”
길버트는 말했다.
▶ 오늘의 수확
밀맥주, 크림 듬뿍 연어스튜, 누군가의 짝사랑
▶ 총평
연어는 역시 기름진 맛!
* * *
닉시는 57번째 꽃점에서 막혔다.
지난밤 80개까지는 거뜬히 적을 수 있게 생각까지 하고 왔는데, 처참한 결과였다.
‘이래서 남은 43개는 뭐라고 적어야 하지.’
길 가다 돈을 줍게 된다는 내용만 금액을 바꿔서 벌써 세 번째 쓰고 있었다.
이것은 길버트 앞에서 ‘꽃점? 만만하다.’ 떵떵거린 닉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기도 했다.
“좋은 말만 말고 조금 나쁜 말 적어도 되지 않나? 어차피 점은 다 미신일 뿐인데. 머리카락이 빠지지만, 다시 자란답니다. 같은 시답잖은 조금 나쁜 말도 있잖아.”
길버트에게 혼나지 않고 위트 있는 말. 닉시는 미간을 구겼다.
쾅. 결국 그녀는 펜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에드가 씨. 혹시 원하는 게 뭐예요?”
담배를 태우고 있던 씨앗&모종 숍의 에드가는 후닥닥 연기를 흐트러뜨렸다.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면…….”
“그냥 왜 평소에 이런 말 들으면 좋다. 하는 거 있지 않아요?”
에드가는 비장한 닉시의 얼굴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말을 안 해 주면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얼굴이다.
누군가와 눈을 오래 마주치고 있는 것 자체에 어색한 에드가는 끙 앓는 소릴 내며 고갤 돌렸다.
“그냥 기분 좋은 아침 인사만 들어도 좋은데…….”
“그런 거 말고요! 좀 더 특별하고 듣기 좋은 말이요!”
“뭐…… 하루 장사가 잘될 거다?”
“좋아! 고마워요, 에드가 씨! 당신이 그걸 뽑길 기도하면서 쓸게요!”
닉시는 수첩에 에드가가 했던 말을 휘갈겨 쓰곤 왔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그녀는 마을을 헤집고 다니며 듣고 싶은 말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고민하고 있던 게 곧 풀릴 거란 말을 듣고 싶네.”
“키우는 고양이가 곧 철들 거라고! 사고를 덜 치면 좋겠어. 아, 고양이가 없는 사람들이 들으면 어떡하냐고? 흐음……. 그럼 고양이의 귀여운 애교를 받게 된다 어때?”
“맛있는 밥을 먹게 된다. 어제 돋은 혓바늘 때문에 요즘 통 밥맛이 없거든.”
“네에? 당연히 사랑에 빠지게 된다죠.”
사랑? 닉시는 수첩에 ‘사랑’을 적다 말고 물음표를 찍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언젠가 목수라고 소개받았던 빅토리아라는 또래 여성이었다.
당근과 노을 중간의 주홍빛 땋은 머리와 주근깨가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첫 만남부터 본인을 비티라고 불러 달라는 천연덕스러움도 가지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발음이 세서 깎기 힘든 나무 둥치 같아 보인다라나 뭐라나.
“네. 사랑!”
하여튼 문어인지 말인지 괴상한 조각상 만들길 좋아하는 비티는 그렇게 말했다.
“음…… 사랑이 찾아올 것이다. 알겠어. 고마워, 비티.”
“근데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런 이른 봄부터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수집하고 다니는 건가요?”
“뭐 비슷한 거지.”
“그렇구나. 흥미롭네요!”
길버트가 마을 사람들에겐 꽃점의 내용을 말하지 말라 누누이 경고한 탓에 닉시는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나 테이블이 필요한데. 의뢰해도 될까?”
“그렇다면 잘 찾아왔어요. 마침 엊그제 테이블 만들기 좋은 호두나무가 들어왔거든요! 원하는 무늬나 모양 있나요?”
“밥도 먹고 공부도 할 책상이라 튼튼하면 좋겠어. 모양은…… 그냥 원하는 대로 해줘.”
‘되도록 저 문어만 안 들어가면 좋겠지만…….’ 닉시는 비티가 기대고 서 있는 조각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것을 눈치챈 비티가 킬킬 웃으며 닉시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하핫 닉시! 제가 지금 닉시의 테이블을 햄스터 모양으로 만들 거라 생각한 거예요?”
그녀의 예술적인 안목이 의심 가는 순간이다.
저 뒤틀린 괴물이 햄스터라고? 아무리 봐도 히드라랑 싸우는 헤라클레스 같은데.
심지어 햄스터의 작달막한 신체 부위 중 저렇게 기다란 건…… 기다란 건…….
설마.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걱정하지 마세요. 쓰기 편하고 예쁜 모양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요.”
비티가 자부하며 말했다.
어쨌든 정상적인 테이블의 모양으로 만들겠단 대답이었다. 내심 안도한 닉시가 배시시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잘 부탁…….”
“근데 책상다리는 말 다리 모양이 좋아요, 아니면 뱀 다리 모양이 좋아요?”
“그냥 각목 모양이 좋아! 뱀은 다리가 없다구.”
닉시가 중얼거리자 비티는 “무슨 소리예요. 태초엔 뱀도 다리가 있었어요.”라며 빙긋 웃었다.
물론 태초 사람이 아닌 닉시는 알 리가 없는 이야기였다.
길버트는 97번째 꽃점을 적는 닉시를 바라봤다. 그녀는 아까부터 자꾸만 뺨을 긁적이고 있었다.
“벌레 물렸어?”
보다 못한 길버트가 닉시의 손가락을 슬쩍 치워 보았다. 뺨은 깨끗했다.
닉시는 끙 앓는 소릴 내더니 몇 시간 전에 있던 비티와의 대화를 그에게 말해 줬다.
듣고 싶은 말이 있냐 물어본 닉시에게 비티는 사랑이 찾아온다는 말이 듣고 싶다 대답했다.
안 그래도 사랑 따위가 뭔지 궁금해졌던 닉시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비티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비티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깜찍한 것’이라 대답했다. 이유인즉슨 귀여운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키스하고 싶어지니까.
그리곤 닉시에게 귀엽다며 뺨 키스를 했다는 것이다.
“길. 비티는 날 사랑하는 거겠지?”
진심인가? 길버트가 드물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 음. 그건 아닐걸?”
“그럼 난 잠시 즐긴 유흥거리란 거야?”
“그건 아니겠지만…… 잠깐. 비티를 왜 놈팽이로 만드는 거야?”
“그럼 왜 사랑을 키스하고 싶은 거라 하면서 내 뺨에 키스해 준 거지?”
“뭐, 적어도 증오하진 않는다 확신해.”
닉시는 수줍게 뺨을 긁적였다.
“너무 놀라서 답변의 키스는 못 했어. 내게 뺨 키스해 준 사람은 처음이거든.”
“어…… 와우. 그거 놀라운 사실이네.”
“다음에 보면 꼭 답변해야겠어. 내가 가진 건 별로 없지만, 주변 친구들에게 부탁만 하면 파리에 집 한 채는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누추하지만 거기가 비티와 나의 새로운 거처가 되는 거야.”
“키스 한 번 값치곤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꽃점이 전부 완성됐다.
하도 사랑, 사랑해대다 보니 마지막 쪽지는 대문짝만하게 ‘사랑’ 한 단어만 적혀 있었다.
글자를 모르는 길버트도 그 글자는 사랑이겠거니 짐작할 수 있었다.
“진지하게 말하겠는데, 닉시.”
“응.”
“그건 아마 사랑이 아닐 거야. 비티는 라틴계 프랑스 혼혈이라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눈빛.
길버트는 라틴아메리카 쪽과 남유럽 쪽에선 친근함의 인사 표시로 뺨 키스를 한다고 말했다.
닉시는 나는 프랑스인이지만 한 번도 그런 걸 받은 적 없다 항의했고, 길버트는 그럼 네가 볼 키스할 만한 친근한 사람이 없었던 거 아니냐 물었다.
반쯤은 농담으로 한 말에 닉시는 진지하게 “맞아. 친구가 없어서 몰랐던 거구나.” 대답했다.
한순간 영원을 생각했던 인연이 제 착각이었다니.
닉시는 미역 줄기처럼 축 처져 중얼거렸다.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아.”
“제발 믿어 줘.”
“비티한테 테이블 만들어 달라 했을 때 땔감으로 쓸 톱밥도 잔뜩 주길래, 진정한 사랑인 줄 알았는데.”
닉시는 수북한 봉지를 들어 보였다. 얼추 봐도 하루 종일 불을 땔 수 있을 만큼 많은 톱밥이었다.
‘비티가 장사를 잘하는군.’ 길버트는 예쁘게 접은 꽃점을 바구니에 수거했다.
그 중 아직 접지 않은 ‘사랑’이란 꽃점이 남아 있었다.
“뭐, 그렇게 따지면 나도 받아 본 적 있는걸.”
길버트는 쓸 수 없는 의미 불명의 쪽지를 어떻게 할까 하다 반으로 반듯하게 접었다.
“뭐? 아무렇지도 않았어? 난 속이 울렁거렸는데?”
“아무렇지도 않았지. 평범한 인사 같은 거니까.”
울렁거리는 게 사랑에 빠진 감각이 맞던가.
반으로 곱게 접은 쪽지는 길버트의 윗옷 주머니로 들어갔다.
별다른 느낌이 들거나 갑자기 이 쪽지가 부적처럼 느껴진다거나 하는 건 없었다. 그냥 뭐……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럼 내가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닉시는 말했다.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다.
길버트는 다만 닉시의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톱밥이 신경 쓰였을 뿐이다.
“당연하지. 해 볼래?”
뺨 키스는 서로의 뺨을 오른쪽 왼쪽 번갈아 가며 입맞춤 소릴 내는 제스처로, 친근감을 표시한다.
원래는 키스하는 시늉만 내는 거고 볼에 입을 맞추는 건 절대 안 되지만 비티는 스킨십에 유한 라틴아메리카 쪽의 혼혈이었고, 잘못 배운 거긴 해도 아직까지 추행이니 뭐니로 감옥에 잡혀 들어간 적 없으니. 길버트도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닉시는 길버트의 왼쪽에 볼을 대야 하는 건지 오른쪽에 볼을 대야 하는 건지 가만히 고민했다.
진지하게 좁혀진 미간이 그녀의 심각함을 대변했다.
길버트는 제 얼굴을 덥석 잡아 오는 손길에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의외로 그녀의 손엔 굳은살이 많아 거칠었다.
흡사 5년쯤 괭이질을 한 농부의 손쯤 하려나. 아무리 그래도 저보단 아니겠지만.
길버트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옻칠을 한 나뭇결처럼 부드러운 갈색 머리가 사르륵 움직였다.
닉시는 그의 오른쪽 뺨에 입을 맞췄다.
하이고야 이럴 줄 알았지.
길버트는 간지러운 그녀의 행동에 푸스스 웃어 버렸다.
“그게 아냐 닉시. 뺨 키스는 말이야.”
그는 닉시의 인사에 대답해 주기 위해 그녀의 뺨에 가볍게 제 뺨을 스치곤 짧은 키스 소릴 냈다.
“어때. 아무렇지도 않지?”
“그러게.”
“그래 사랑이 아닌 거야.”
그렇구나. 그건 사랑이 아니구나.
닉시가 학습한 ‘사랑’의 정의는 불꽃놀이와도 같았다.
불꽃놀이를 싫어해서 모르겠지만 눈앞에서 뭔가 확 터지는 것 같고, 보고 있으면 심장이 떨리면서, 울렁거리는 감정이라고.
그래서 처음엔 전쟁을 사랑하는 줄 알았지.
거기도 눈앞에서 불꽃이 터지고 심장이 떨리고 토할 것 같이 울렁거리니까.
그녀는 뺨을 긁적였다.
공감은 못 할지언정 웬만해서 사람의 감정 따위에 대해선 다 익혔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익히지 못한 게 한 가지 있다.
좋다는 감정의 연장선.
사랑.
* * *
“이봐 화가. 사랑은 뭘까. 넌 예술가니까 잘 알고 있겠지?”
모든 예술가는 감성적이다.
사랑은 감성적인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모든 예술가는 사랑을 잘 안다. 라는 다소 편협한 사고를 가진 닉시는 벤자민의 집 창틀에 매달려 말했다.
막 물감을 섞던 벤자민은 노란색에 주황을 문지르며 창문을 닫았다.
닉시는 제 목을 치려는 단두대 같은 창틀을 손바닥으로 꽉 틀어막았다.
“의뢰인을 이렇게 문전 박대해도 되는 거야?”
“그림 의뢰만 받았지 상담 의뢰 받은 기억은 없어.”
“그래도! 소중한 고객인데, 서비스가 너무 엉망 아냐?!”
“내가 말 걸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 알겠어 알겠어. 밖에선 아는 척 안 할게. 됐지?”
닉시는 창문을 통해 우당탕 벤자민의 집 안으로 쳐들어왔다. 벤자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화가는 막 한밤중의 숲속 같은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여전히 밝은색 하나 없는 어두침침한 그림이었다.
“잠깐만. 내 그림은 언제 그려 줄 거야?”
“밑색 작업 중이야.”
“아직도 그거 하고 있었어? 이제 슬슬 이 유화 물감 바르는 거 해 주면 안 돼? 지금처럼!”
물론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닉시는 그림을 뭐 여차여차 붓으로 슥슥 하기만 하면 완성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덕분에 수준 낮은 의뢰인이 이상한 소리 할 때마다 복장이 터져나가는 건 예술가였다.
“낮의 풍경을 그려 달라 하지 않았나?”
“그랬지.”
“지금은 낮이지, 밤이지?”
“세상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본다. 지금은 7시 21분이고 봄이라 해가 애매하게 기울…….”
“둘 중 하나만 골라.”
“밤이지.”
벤자민은 프탈로시아닌 블루 물감과 퍼머넌트 옐로 물감을 흔들었다.
“지금 풍경화를 그리면 하늘은 무슨 색을 써야 하지?”
물론 색에 대한 지식도 얕은 그녀로서는 그것이 물 빠지기 전 청바지 색과 알맹이 썩은 레몬색으로 보였을 뿐이다.
요컨대 둘 다 그녀의 맘에 안 드는 선택이었단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벤자민의 갑갑한 이분법적 논리에 구시렁대며 파란색 물감을 골랐다.
“그래서 화가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사랑?”
화가는 중얼거리듯 반문했다.
닉시는 고갤 끄덕이며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미완성 캔버스를 뒤적였다.
이거 영 사람을 잘못 찾아온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색으로 따지자면 잘 익은 자몽색. 농염한 댄스가수의 립스틱 색깔 같기도 하고, 밝고 어두운색으로 봤을 땐 밝은 쪽에 속했다.
“몰라.”
그러나 화가를 보라. 색으로 따지면 푸른곰팡이 핀 치즈색. 아사 직전의 거지 손톱처럼 메마른 색, 어둡거나 음침함으로 봤을 땐 둘 다였다.
“그럴 줄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