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_5
닉시는 화가의 밀크티 같은 머리색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는 붓을 집어 들고 캔버스에 짙은 녹색을 펴 바르기 시작했다.
이젠 날도 따뜻해졌음에도 서늘한 집 안.
유증기 때문에 오래 킁킁대고 있으면 머리가 아픈 화가의 오두막.
부엌과 거실 겸 화실이 전부인 작은 방의 모든 모서리엔 캔버스들이 기대 있었다.
그린 그림이 이렇게 많이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벽에 걸린 그림이 하나도 없는 게 이상하기만 했다.
그러면서 그림은 계속 그리는 그의 모습은 더 요상하다.
그림을 이렇게 많이 그렸는데도 그림을 그린다는 건.
“넌 그림 그리는 걸 사랑하는 거 아냐?”
그의 뻑뻑한 붓 터치가 멈췄다.
“아냐?”
“…….”
“아님 말고.”
―삭삭. 다시 붓 터치 소리가 이어졌다.
그림 그리는 걸 사랑하는 게 아니면 왜 굳이 그림을 그리는 거지?
닉시는 화가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봤다.
‘뭐 하긴. 나도 전쟁을 사랑하는 건 아니었는데, 군에 입대했었으니까.’
세상이 사랑으로 돌아가는 곳은 아니니까 어련히 사연이 있겠거니 싶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군에 입대했더라.’
그 뒤로 한참을 마른 캔버스 위에 뭉툭한 액체 발리는 소리와 붓을 바꾸는 건지 덜그럭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이윽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닉시는 고갤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는 동상 걸린 사람처럼 파르라니 떨리는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림을 끝낼 시간이었다.
그는 척척 캔버스를 정리했다.
유화 위에 독한 알코올을 뿌리고 의자를 치우고 화구를 정리했다.
그림을 치운 자리엔 서늘한 나무 바닥. 얇은 바닥 깔개와 담요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없이 초라한 그의 잠자리였다.
거실 곳곳 켜둔 등불은 아직 끄지 않아서 방은 환하게 밝았지만, 그는 담요를 덮고 자리에 누웠다. 닉시가 있든 말든.
“그거 잘 거니까 빨리 돌아가라고 항의하는 거지.”
“알았으면 빨리 돌아가.”
“하여간 우리 화가님은 까탈스럽다니까.”
닉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베르의 친절한 이웃들관 달리 화가는 집 앞 마중조차 나오지 않았다.
남쪽 마을 특유의 따뜻한 기후에서 나오는 정 많고 따스한 인품은 오베르의 기본 소양인데 말이야. 그녀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이 마을관 어울리지 않는 남자.
패전국의 군인. 손에 흉터가 가득한 화가.
“……후회할 선택을 하는 거야.”
―끼익. 문을 열었을 때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뭐?”
닉시가 되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일주일 뒤면 축제다.
마을은 축제 준비로 들떠 있었다.
사람들은 각기 겨울을 견딘 작물들로 만든 맛있고도 명줄 질긴 음식들을 준비했다.
잡화점의 헬렌은 이번 연도가 적힌 카드와 책갈피를, 씨앗 모종점 에드가 부부는 새끼손가락만 한 낑깡 모종. 라울은 작년에 담근 당근 피클과 버드나무 껍질 술을 준비했다.
“왜 하필 버드나무예요? 담금주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작년엔 전쟁 막바지였을 때라 풀뿌리 하나 없었거든요. 술 담글 수 있는 게 껍질뿐이었어요.”
“하긴 그땐 저도 신발 깔창 씹고 있었어요. 소가죽이었거든요.”
닉시는 라울의 술집 카운터에 앉아 자신은 무엇을 준비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왔다.
돈은 이제 거의 다 떨어졌는데, 안 그래도 없는 살림에서 다른 이들에게 뭔갈 나눠 주려면 지붕이라도 뜯어야 할 판이었다.
일주일 안에 준비할 수 있을 만한 것…….
‘일주일 만에 자라는 작물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아 참.”
평범한 작물을 순식간에 자라게 할 수 있는 연구 이론은 있다.
먼 과거의 과거.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 그녀가 대학을 다니고 있었을 때, 그녀의 선배가 진행했던 실험 하나가 있었다.
그때 닉시와 그는 같은 줄기세포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목적은 전혀 달랐다.
그는 인류 식량을 위한 대형 작물 연구였고, 닉시는 세포 분열을 통한 신체 재생에 관한 연구였다.
식물 세포를 조작하는 것과 인간 세포를 조작하는 것. 둘 중 뭐가 더 어렵냐는 것에 대한 답은 뻔했다.
닉시는 쭉 기지개를 켰다. 테이블 위엔 강낭콩 모종과 온갖 실험 장비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진짜 성공했네.”
그 증거로 닉시는 헬렌에게 강낭콩 모종을 선물 받은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연구를 성공시켰다. 군 복무 시절을 포함해 그의 선배가 6년을 붙잡고 있었던 연구를 말이다.
물론 저가 천재여서 그런 것도 있고, 선배가 남긴 자료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연구를 마칠 수 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성공에 신나거나 뿌듯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뒷맛이 묘하게 썼다.
연구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닉시는 자축을 위해 라울의 바에 출석했다.
오늘 식사는 보통 때보다 사치스럽게 일반 모둠이 아닌, 특제 소시지 모둠으로 주문했다.
‘이제 그걸 땅에 옮겨 심으면 되는데. 그럼 이걸 어디에 심는다.’
본인의 집 마당엔 이미 작물들의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실험으로 떼어낸 새끼손톱만 한 떡잎이 지금은 손목만큼 굵어져 있었다.
아무 데나 막 심었다간 애써 수학적 근거를 대며 정해놓은 작물들 지정 자리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냥 산에 심어? 아냐. 실험 결과를 자주 볼 수 있는 곳이면 좋겠는데.’
“오늘은 아스파라거스 상태가 좋아서 평소보다 많이 드렸답니다.”
“감사해요, 라울!”
결국 마땅한 장소를 찾기 전에 라울의 특제 소시지 모둠이 닉시 앞에 놓였다.
그래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자. 그녀는 포크를 집어 들었다.
“어머, 여기 있었네?”
“헬렌?”
닉시가 앉아 있던 카운터 옆에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칼이 보였다. 헬렌이었다.
“안 그래도 보여 줄 게 있어서 찾고 있었어.”
“뭔데요?”
“짜잔.”
헬렌은 손바닥만 한 앨범을 내밀었다.
그 안엔 남편과 찍은 낡은 사진 따위가 붙어 있었다.
“왜, 엊그제부터 네가 사랑이 뭔지 물어보고 다녔잖아?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내 사랑은 이거 같아서. 잊지 않는 거지. 그 사람과의 모든 순간을.”
그녀의 남편은 큰 눈과 웃을 때 보이는 보조개가 순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헬렌은 사진의 표면을 훑으며 이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낮잠 자는 개를 쓰다듬는 것 같은 평화롭고 그리운 얼굴이었다.
접시에 있는 소시지를 다 먹었을 무렵엔 헬렌은 그의 남편이 본인에게 프러포즈했을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땐 정말 숨고 싶었다니까? 아니, 누가 청혼하는데 떨린다고 술을 먹고 청혼해!”
요약하자면 헬렌의 남편이 취해서 헬렌의 어머니에게 청혼한 뒤, 그녀의 아버지에게 뒤지게 맞았단 이야기였다.
오베르에서 유명한 망신거리였는지 헬렌이 점점 몰입해 분통을 터뜨릴 쯤엔 마을 사람 여럿이 함께 앨범을 보며 허허 웃고 있었다.
그렇게 닉시가 접시를 다 비웠을 때엔 바의 모든 사람이 그녀와 헬렌 주위를 둘러싸고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늘 갑자기 깨지기 마련.
추억여행으로 떠들썩했던 분위기는 단 한 명의 손님으로 인해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뻔하지만, 비 냄새 나는 화가 때문이었다.
그가 나무 바닥을 터벅터벅 걸어올 때도 사람들은 농담하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조용히 웃음을 거둬들이는 웃음 살인마처럼, 그가 지나간 자리는 침묵만이 남아 있었다.
“어서 와, 벤자민.”
“압생트.”
나름 친근함을 표하는 라울에게도 그는 딱딱하게 원하는 것만 내뱉었다.
‘저러니 친구가 없지.’ 닉시는 포크에 묻은 샐러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제일 먼저 불쾌함을 표현한 건 헬렌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와락 구기며 입을 다물었다.
주변에 있는 몇몇은 그녀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몇몇은 그녀의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노골적인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벤자민은 익숙한 건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가 시킨 초록빛 술 압생트와 라울이 서비스로 주는 볶은 병아리콩이 나왔다.
처음 그가 등장했을 때처럼 정적이진 않았다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껄끄러움이 감돌았다.
그러나 볶은 콩에 벌레 먹은 알맹이가 껴 있는 걸 발견한 것 같이 불쾌하다는 시선들은 여전했다.
닉시는 그 시선을 잘 알고 있었다. 천재란 고독한 법이라 인생의 대부분을 저런 시선을 받고 살았으니까.
저런 유형은 둘 중 하나다. 이런 시선을 즐기는 정신 나간 사람. 혹은.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 닉시. 너도 집으로 돌아갈 거지?”
“아 네.”
이런 시선이 아무렇지 않은, 아무렇지 않게 된 사람.
화가는 그의 지정석 같은 술집 구석에 앉아 조용히 술을 홀짝였다. 그는 종이와 펜 같은 걸 들고 있었다.
“그래야죠.”
그녀는 궁금했다. 저 사람은 혼자여도 아무렇지도 않을까.
고고한 천재였던 유년기 무렵부터 총을 쏠 때 꽃향기가 나는 게 좋아서 유채꽃 기름으로 총을 닦은 또라이 신병 시절까지. 그녀는 늘 이런 시선을 받았다.
그래서 익숙하다지만, 그래도 때론 심심할 때가 있었다.
그녀의 선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무리라는 것에 적응했을 땐 전엔 몰랐던 외로움 따위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사회적인 동물이니까.
혼자 있는 것의 쓸쓸함. 모멸감 섞인 시선. 적개심 가득한 발소리.
[닉시, 난 네가 부럽지 않아. 넌 천재일지 몰라도 진짜 사람은 못 될 테니까.]‘생각났다. 내가 군대에 입대한 이유.’
닉시는 문득 오래전 제 선배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노엘 휴거.
닉시의 오래된 질긴 인연. 대학교 선배이자 제 부대 상관이었던 그는 여러모로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을 좋아하고 올곧은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터의 군인보단 의사나 농부에 어울렸다.
오히려 전쟁과 어울리는 사람은 닉시 자신이었다.
저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도덕적인 윤리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사람이라면 으레 존재해야 하는 감정을 알지 못하는, 정신 나간 닉시.
사람들은 모두 저를 그렇게 불렀다.
그녀의 상식 밖의 천재성에 감탄하면서도 종종 나사 빠진 듯한 비윤리적인 발언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러모로 ‘미친’, ‘정신 나간’ 이란 수식어와 꼬리표가 빠지지 않는 사람.
그는, 그러니까 닉시가 군대에 들어간 이유가 되는 그녀의 질긴 인연은 닉시가 그 꼬리표를 떼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었다.
어떻게?
“닉시. 넌 날 영원히 못 이겨. 난 네가 부럽지 않아. 넌 천재일지 몰라도 진짜 사람은 못 될 테니까.”
라는 충격적인 말로.
그 말을 뱉은 그녀의 선배는 그녀가 ‘사람은 못 된다’라는 말에 충격을 받길 바랐지만 그녀는 다른 포인트에 꽂혀 있었다.
‘내가 당신을 못 이긴다고?’
‘이 내가?’
그리고 닉시는 그 말을 내뱉은 노엘 휴거를 죽을 때까지 쫓아다녔다.
그랬었다.
[닉시. 그러니까 너는……]그녀가 벤자민에게 다가간 건 그 때문이었다.
옛날 어느 옛적 그녀의 선배, 노엘 휴거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에.
저를 향해 쏟아지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 보이는. 닳은 그 남자의 속내가 궁금해서.
벤자민은 제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올려다봤다.
“화가. 나랑 친구 할래?”
* * *
오랜만에 찾아온 열병이었다.
열에 달뜬 몸은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어지러웠으나 이상하게 몸은 지독히 서늘했다.
벤자민은 힘겹게 눈을 떴다.
어질어질한 시야 사이. 눅눅하게 젖은 채 바닥 한가운데 누워 있는 제 모습이 보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는 지펴져 있는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누구랑 만난 것 같은데.’
―콜록.
목구멍 사이로 씁쓸한 약 맛이 났다.
벤자민은 미처 삼키지 못한 쓴 약물을 콜록대며 토해 냈다.
‘뭐지. 난 분명.’
창밖으론 비가 그쳐 있었다.
암녹색의 대지. 잿빛이 섞인 허여멀건 구름. 아직도 바람은 세게 불고 있는지 잔풀들이 마구 흔들렸다.
‘난 분명 다리에서…….’
“윽…….”
머리가 욱신거렸다. 관자놀이의 아련한 두통. 그가 종종 먹는 수면제의 부작용 중 하나다.
비가 내리면 찢어졌다 붙은 손바닥 마디마디가 아팠다.
하루면 참고 넘어갈 만했는데 예고 없던 봄비는 장장 사흘간 쉬지 않고 내렸다.
그 때문에 벤자민은 그림 한 점 그리지 못한 채 신경통을 앓고 있었다.
눈을 붙여야 하는 시간에도 도저히 잠들지 않는 몸뚱이. 마디마다 불을 지핀 듯 떨려오는 손.
그렇게 버티다 도저히 잠들 수 없었던 새벽. 그는 수면제를 먹고 바닥에 누웠다.
비 특유의 물비린내 나는 서늘한 바닥에 누워 죽길 기다리는 물고기마냥 잠이 오길 기다렸다.
그게 그나마 선명하게 기억하는 기억 중 가장 마지막 기억이었다.
너무 더워서 잠깐 비척대며 눈을 떴던 것이 어렴풋 떠오른다.
비를 맞았던가.
아니, 다리에 주저앉아 하늘을 봤던 것 같기도.
다리 밑 작은 개울가에 파묻혀 있던 건 꿈인가, 옛날 기억인가.
뭐지.
‘꿈이 아닌가.’
벤자민은 불이 사그라지고 있는 벽난로 앞에 멍하니 앉아 불꽃을 바라봤다.
손의 통증은 가셨지만 동도 트지 않은 애매한 시간에 일어났다.
아마 몽롱한 채로 밤을 지새우게 되겠지. 약을 하나만 더 먹고 자야 하나.
그는 바닥을 더듬어 깜찍한 요정 그림이 그려진 알약 따위를 찾았다.
그러나 바닥을 굴러다니는 것은 정체불명의 컵과 냄비뿐.
그를 깊은 수마로 빠지게 만드는 약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 그 많던 게 어디 간 거지.’
그건 대체품을 쉽게 찾기도 힘든 수면제였다.
전시 상황에서 병사들에게 보급해 주던 독한 수면유도제.
코끼리도 5분이면 곯아떨어진다는 잠의 악마 페어리 그림이 그려진 화학용 수면 유도제.
그걸 보급해 주던 군에서는 탈영했고, 전쟁도 끝나서 약이 제조되는지도 모르겠다.
오베르에서는 팔지도 않아서 도시 근처까지 나가야 하는데.
프랑스인이 아닌 벤자민에게 프랑스의 도시 근처에서 수면제를 산다는 건 타의적인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전쟁이 끝났다곤 해도 아직 독일과 프랑스의 적대적 관계가 끝난 것도 아니니까.
‘가급적 도시론 나가고 싶지 않아서 한꺼번에 많은 양을 사뒀는데.’
약을 사온 지 한 달도 채 안 된 건데 그게 감쪽같이 사라졌다니. 골치 아팠다.
‘설마 약김에 그걸 다 먹었을 리는 없고. 그럼 아마 이 세상에 없었을 테니.’
벤자민은 찬장까지 뒤집어엎고 약이 집 안엔 없다고 결론 내렸다.
잠을 잘 수 있을까.
약은 뭐 어떻게 잃어버렸다 치고, 가장 원초적인 물음에 도달했다.
‘잠을…… 잘 수 있으려나.’
편안하게 자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그는 오랫동안 긴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좀처럼 낫지 않는 불치병.
매일 뜬눈으로 밤을 보내면서도 잠은 오지 않아 정신이 피폐해지는 지독한 병.
어쩌다 잠들게 된다 해도 금세 파드득 깨 버리고 마는 병.
결국 그는 이번 주에 도시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화가였지만 화가로는 돈을 못 벌다시피 하는 축에 속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어떤 그림도 끝까지 완성하지 않았으니까.
대신 그는 영문 서적을 번역하는 일로 죽지 않을 만큼만 벌었다. 성직자가 되고 싶다던 동생을 위해 배웠던 영어 덕이었다.
‘……그동안은 일단 술로 버텨야겠군.’
다행히 월말까지 번역하기로 한 책이 있었다.
이걸 다음 주중까지 번역하려면 잘 시간도 부족하겠으나 어차피 약 없으면 잠도 오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벤자민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오늘 스케치의 밑색을 다 깔고 빛의 방향에 들어갈 그림자 색을 맞춰 넣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론 그림만 망칠 뿐이고…….’
어차피 이제 그 손님은 들판의 그 자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는 그 사실을 라울의 바를 찾았을 때 확신했다.
벤자민은 저를 둘러싼 지독한 침묵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밖에선 실로 오랜만인 듯 아닌 듯 익숙한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도 그랬다.
그저 물끄러미 저를 관찰하는 그 붉은 눈동자만 무심하게 지나쳤을 뿐이었다.
말 걸지 말라고 했던 그 뒤로 밖에선 한 번도 말을 안 걸어오는 게 조금은 웃기기도, 묘하게 뒷맛 쓴 박하사탕을 먹은 듯하기도 했다.
“어서 와, 벤자민.”
“압생트.”
가장 저렴하고 빨리 취할 수 있는 싸구려 증류주를 골랐다. 녹색의 쑥 냄새와 풀치곤 독한 허브 따위의 향이 나는. 맛은 없지만 빠르게 취할 수 있는 술.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 닉시. 너도 집으로 돌아갈 거지?”
술만 시켰을 뿐인데 병아리콩이 함께 나왔다.
라울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는 머쓱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그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바에 들어오자마자 쏟아지는 적개심을 막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의미겠지.
벤자민은 콩을 싫어하지만 그의 호의까진 차마 무시할 수 없어 포크로 몇 알을 깔짝였다.
“아, 네.”
벤자민은 펜을 휘적이며 번역해야 하는 문구를 읽어 내려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읽었는데도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야죠.”
그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이젠 진짜 알았겠지. 저 여자와 친해 보였으니.
헬렌. 그녀를 처음 본 건 다 죽어 가는 몸을 이끌고 오베르에 온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프라이팬을 들고 저를 찾아왔다. 아마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그를 혐오하는 부류. 전쟁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는 무너져가는 판잣집에서 웅크려 자고 있는 자신을 깨운 뒤 손가락질했다.
뒤따라온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말렸다.
그때 저는 복부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오른 열 때문에 그녀가 정확히 어떤 식으로 욕을 했는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자신과 같은 독일군에게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여인이었고, 그녀 앞에서 자신은 가해자였다.
그것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발에 빌며 사죄했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신 앞에 고해성사하듯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결국 프라이팬을 바닥에 떨군 그녀는 심하게 울었었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웅웅대는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 뒤로 헬렌은 두 번 다신 저를 찾아오지 않았다. 다만 어쩌다 마주치는 날이 있다면 끔찍하단 표정을 지었다.
저도 그걸 알았다. 그녀에게 저는 악몽이고 살인자겠지.
그랬기에 어쩔 수 없이 마을로 내려갈 일 있어도 최대한 그녀 혹은 그녀와 같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해 왔다.
오늘도 헬렌이 늦은 저녁엔 가게를 정리한다고 바쁘니 바엔 없을 거라 생각하고 들른 그였다.
헬렌은 물론 시끄럽던 이웃까지 있었던 건 의외였지만.
애초부터 사람들과 시답잖은 교류 따위를 하기 위해 오베르로 온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덜컹.
가게를 들어왔을 때부터 그를 경멸스럽다는 듯 바라봤던 헬렌이 요란하게 밖으로 나갔을 때도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하하 웃고 떠드는 사이 속, 수군거리는 소리와 더러운 게르만족 같은 시골스러운 욕설을 듣는 것도 익숙했다.
그의 감정과도 같은 것이 아주 오래전부터 무뎌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바라기 밭에서부터, 불타는 오래된 성당에서부터 그의 남동생 앞에서부터.
그러니 그는 무감각했다. 그게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
저 그림 의뢰인도 이젠 진짜 알았겠지. 나한테 아는 척해 봐야 좋은 거 없다는 걸.
그러니 이젠 두 번 다신 아는 척하지 않겠지. 미치지 않고서야.
[당신은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된 거야?]문득 벤자민은 언젠가 들은 노란 해바라기 이웃의 질문을 떠올렸다.
애초부터 사람들이 그리웠다거나 전쟁에서 죽기 싫다고 도망쳐 온 것이 아니다.
‘내가 오베르로 온 이유는……’
“화가.”
벤자민은 제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올려다봤다.
한동안 제 머릿속을 시끄럽게 들쑤시고 다녔던 장본인이 서 있었다.
벤자민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이제야 술기운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나랑 친구 할래?”
하하. 벤자민은 허무와 허탈 사이의 어중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는 라울의 술집에 폭탄을 떨어트렸다.
누구도 감히 넘을 생각을 못 한 선을 신참 농부가 아무렇지 않게 넘어 버렸으니.
떠들썩했던 바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평소라면 그 정도까진 아니었겠으나 오늘은 달랐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이 자리에 헬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뜬금없는 질문을 받은 벤자민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얼빠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사방이 싸해진 건 둘째 치고, 이 미친 이웃은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히 그녀에게 저를 아는 척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녀도 그동안 그 경고를 충실히 따랐는데.
첫날의 술주정처럼 모르고 다가온 거면 모르는 척 조용히 자릴 뜨면 그만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오롯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시할 수도 없이 올곧은 시선이었다.
평소 그의 집 창가에 앉아 조잘거리던 웃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고요한 침묵 속 잔잔한 얼굴은 결코 그녀가 시시껄렁한 장난을 위해 그에게 다가온 게 아님을 보여 줬다.
벤자민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아 황급히 술집을 빠져나왔다.
라울의 바 안에 있는 그 누구도 그들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지만 전부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벤자민은 인적이 드문 어두컴컴한 들판까지 와서야 그녀의 손목을 내팽개쳤다.
“화가.”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뭘?”
그녀는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 마을에 오래 발붙이고 살려면 나한테 아는 척하지 말라고.”
그제야 “아, 그런 게 있었지?” 따위의 감탄사를 내뱉은 닉시가 말을 이어갔다.
“그거 이제 질렸어.”
“너 내가 누군…….”
“독일군? 그게 뭐. 너 혹시 아직도 나치 찬송하고 그래?”
벤자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알면서도 그랬다고? 그럼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왜?
“조용한 거 보니 아직까지도 나치즘에 절여져 있는 건 아니겠고.”
“하.”
도저히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리자 기가 찼다.
설마 어쭙잖은 동정심인가. 아직도 이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줄 아나 보지.
“정신 나갔군.”
그는 휙 뒤돌았다.
그는 그녀의 동정심에 고마워 빌빌거릴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거지에게 적선한 사람마냥 뿌듯해하는 눈앞의 꼬맹이랑은 더 이상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제 딴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 용기 내서 자신을 구해줬다 여길 텐데. 이만큼 무시했으면 모멸스러워서라도 쫓아오지 않겠지.
“화가, 화아가아.”
진짜 미친 건가.
벤자민은 저를 졸졸 따라오는 닉시를 보며 생각했다.
“그보다 왜 나랑 친구 안 해 준다는 건데.”
“따라오지 마.”
“어? 나랑 친구 하면 좋을 거야.”
그녀는 그의 주위를 빙빙 돌며 콧노래를 불렀다.
눈치라곤 없는. 아니 저의 짜증스러운 분위기는 신경 쓰지도 않는 모습.
저가 말리지 않으면 집 끝까지 쫓아와 저랑 친구 되자며 조잘거릴 것만 같았다.
벤자민은 그의 집으로 가는 좌측, 바다로 향하는 우측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걸어갔다.
닉시는 여전히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거참 너무 까탈스러운 거 아냐? 게르만족은 다 그래?”
“…….”
“근데 너 집이 이쪽 아니지 않…….”
그녀가 입을 다물게 된 것은 저 멀리 어렴풋이 파도 소리가 들릴 무렵부터였다.
해가 손톱달만큼 남은 긴 수평선 너머, 희미한 주홍빛 거품과 짙푸른 파도가 대비되는 저녁 바다.
훅 불어오는 짠 내음이 속을 후련하게 만들 만큼 장관이었으나 그녀에겐 그러지 못했다.
[난 바다를 싫어하거든.]‘바다를 싫어한다더니. 거짓말은 아니었군.’
정신 사납게 뒤따라오던 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벤자민은 흘끗 뒤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은 노을의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백하게 젖어 있었다.
“…….”
“화가…… 지, 지금 어디 가는 거야?”
“…….”
꼭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주춤거리지만 여전히 따라온다.
바닷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짠 내가 깊어질수록 닉시의 빌빌거리는 목소리는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이봐 화아가아…….”
끝끝내 그 질질 끌리는 단말마의 말꼬리만 내뱉곤 잠잠해졌다.
‘이제야 조용해졌…….’
“…….”
“…….”
“……이거 안 놔?”
벤자민은 자신의 벨트를 꽉 잡고 있는 닉시에게 중얼거렸다.
“싫어! 놓으면 바다로 가 버릴 거잖아!”
원래 그는 바다 앞까지 갈 맘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부턴 안 놔도 갈 거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찰거머리도 이런 찰거머리가…….’
벤자민은 노란 찰거머리를 떼어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걸어갔다.
뒤쪽에선 그런 그를 저지하려는 거위 같은 외마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치에 끌리던 바닥이 흙길을 지나 거친 사암, 모래, 이윽고 희디흰 백사장 앞에 도달했을 때 해는 지고 없었다.
하늘과 바다는 비슷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볕이 없는 넓은 바다는 어슴푸레한 검푸른 빛이 되어 있었다.
“일부러지, 일부러 나 따돌리려고 온 거지!”
“알았으면 좀 꺼지라고!”
“여기서 혼자 어떻게 가! 싫어! 무섭다고!”
벤자민은 손바닥으로 제 허릴 꽉 붙잡고 있는 닉시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녀는 왁왁대며 그의 허리를 더 세게 붙잡아왔다.
아니 무슨. 바다가 갑자기 자기를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왜 유난이란 말인가.
벤자민과 닉시의 밀고, 붙잡는 씨름은 계속 이어졌다.
바다로 가려는 벤자민, 흙길로 되돌아가려는 닉시.
그러다 진이 다 빠져버린 그들이 바다와 흙길이 있는 어중간한 중간에서 헥헥댈 쯤.
닉시는 벤자민의 허리가 아닌 옷 끝자락을 잡았고 벤자민은 겨우 그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벤자민은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체 뭘 했다고 숨이 찼다.
“……대체.”
여전히 벌레 씹은 표정의 닉시는 그 옆에 팔을 붙이고 앉아 바다를 노려보고 있었다.
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싫으면 쫓아오지나 말든가. 왜
“대체 너랑 엮여서 뭐가 좋단 건데.”
벤자민이 한숨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싫은 티를 냈는데 왜.
“말해 봐. 네 녀석이랑 친구 하면 뭐가 좋단 건데.”
왜 자꾸. 그는 울컥 짜증이 났다. 이방인의 철부지 같은 태평함과 무지함에.
저가 누군가의 앞날에 대해 뭐라 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눈앞의 이 사람에겐 좀 해야겠다. 생각 따윈 아예 안 하고 사는 것 같은 이 위인은 누군가가 ‘제발 생각 좀 하고 살라’고 유난이게 만든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운 나쁘게도 지금의 자신인 거고.
닉시는 벤자민의 보랏빛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샐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제 윗옷을 확 들췄다.
“짜잔.”
뜻밖의 스트립쇼였다.
벤자민은 갑작스러운 강제 관람에 잔뜩 얼어붙었다.
닉시는 제 치마 주머니에 단단히 끼워 놨던 길고 볼록한 병 하나를 끄집어냈다.
라울의 술집에서 가져온 레드 와인이었다.
“나랑 친구 되면 적어도 압생트 같은 싸구려 술은 안 먹게 되지.”
“……훔친 건가?”
“어허. 훔친 거 아냐 빌린 거라구.”
그게 훔친 거잖아. 코르크 따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잔도 없었으나 술을 나눠 마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오래 묵은 건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알코올 향은 독했지만, 뒷맛이 매끄러웠기에 둘은 금세 와인 한 병을 비울 수 있었다.
밤의 바다는 바람도 많이 불뿐더러 서늘했다.
닉시가 춥다며 오들오들 떨자, 벤자민은 그녀를 백사장에 모로 누인 뒤, 모래로 묻어 주었다.
닉시가 황당하단 표정을 짓자 그제야 그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화가, 너 이런 게 취향이었어?”
“……또 뭔 소리야. 이상한 녀석.”
“너도 만만치 않거든? 보통 내가 이렇게 들이대서 친구 안 해 준 녀석 없는데.”
“다 질려서 어울려 준 거지.”
“뭐어? 필립이랑 제키는 그런 놈들 아니거든?”
“감사 인사라도 보내.”
“네가 그림을 완성 못 해서 못 보내고 있잖아.”
“……핑계 좋군.”
모래 속은 은근히 따뜻했다.
서늘함 속에 가려져서 몰랐다가 뒤늦게 은은히 맴도는 술기운에 그녀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지금이 썰물이라 다행이야. 밀물이었으면 난 벌써 저 들판 너머로 도망갔을걸.”
검푸른 바다. 눈을 감으면 그때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넘실거리는 파도, 백사장에 나란히 누워 있는 전우들.
닉시는 고갤 돌렸다.
“어쨌든 화가, 당신한테 말 걸고 싶었던 건 허락을 받으려고 그랬던 거야. 너네 집 마당에…….”
뭐야. 센 척하더니 엄청 약해 빠졌잖아.
벤자민은 언제부터 누워 있었던 건지 모르게 제 옆에서 웅크려 자고 있었다.
희미하게 붉어진 뺨, 모래가 묻는지도 모른 채 널브러진 밀크티 색 머리칼이 엉망이었다.
푸스스. 닉시는 포도주 냄새 나는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팔자 좋네, 좋아.
“뭐 대답 없으면 허락한 걸로 생각할게?”
“…….”
“고마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 위로 쌓아 올렸던 모래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렇게 자는 거 좋지. 낭만적이잖아. 하지만 그냥 잠들었다간 또 감기 걸릴 게 뻔했다.
닉시는 저만치 멀리 밭에 꽂혀 있던 삽을 가져왔다.
―푹, 푹. 사르륵…….
그것으로 모래를 담뿍 푼 그녀가 벤자민의 위로 모래를 쌓아 올렸다.
땅에 파묻혀 있는 건 은근히 따뜻하니까 도움이 될 것이다. 뒤척이면 말짱 꽝이겠지만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푹. 사르륵. 삽이 모래 깊이 들어갔다가 그의 몸 위에 모래를 흩뿌렸다.
파도 소리, 짠 내음. 삽. 누워 있는 누군가.
그녀가 바다를 싫어하게 된 건, 전쟁 중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바다에 던질 때부터 시작됐다.
전쟁 중에 누군가의 무덤을 만든다든가, 태워 화장한다든가 하는 것은 전부 사치였다.
시체 하나 보존하기 힘든 상황에서 사지 멀쩡하게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전쟁 초창기엔 그래도 조국을 위해 순국한 동료들의 예우를 갖추기 위해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그것도 반년 만에 없어졌지만.
목에 걸린 신원 확인용 군번줄만 수거한다.
시체는 포탄에 날아갔다, 지뢰 밟고 터졌다, 건물에 깔려서 이것밖에 못 구했다 등의 핑계를 대며 버린다.
나라에게도 동료에게도 버려진 자들은 바다에 던져진다.
―쏴아아.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죽음의 장송곡 삼아, 묵묵히 던질 것이 이제 없길 바라며. 짐짝을 내던지듯 그들을 바다로 보내 줬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게 바다는 무덤이 되어 있었다.
―푹.
닉시의 삽을 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왔다. 어느새 손에 힘을 쥐고 있던 건지 손이 벌벌 떨려 왔다.
이미 지난 일이다. 이제 와 무슨. 다 잊어 보겠다고 왔으면서 아직도…….
“닉시.”
삽을 들고 있는 제 손에 누군가의 손이 올려졌다. 그녀는 놀라 고갤 들었다.
“집에 갈 시간이야.”
길버트였다.
길버트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 저 멀리 익숙지 않은 희한한 조합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마른 풀 같은 언덕 위 이웃 벤자민 리히터과 들판 너머 친절한 이웃 닉시.
붙어 있는 모습을 본 적 없는 희한한 조합이다. 꼭 개와 고양이?
언제 친해진 건지 모르겠으나 그들 사이에 빈 와인병 하나가 굴러다니는 것을 보면 어색하진 않은 사이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닉시가 화가에게 그림 의뢰를 맡겼다 했지. 그 화가가 승낙했다 했고. 그럼 그럴 만하겠네.’
“어쩐다. 아는 척 해야 하나.”
길버트는 머리를 긁적였다.
안 그래도 내일 있을 오베르의 봄 축제 관련해서 둘에게 볼일이 있던 그였다.
새로운 사람인 닉시와 매번 초대하지만 매번 불참하는 사람 벤자민.
요모조모 마을 이장이라면 신경 써야 하는 부류였으니.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말해 줘야지.’
‘……괜히 둘 사이 끼어들기도 뭐하고. 꽤 재밌는 시간을 보내는 것 같으니까 말이지.’
길버트는 걸음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닉시가 저 멀리 백사장 근처의 양배추 밭에 꽂혀 있던 삽을 집어 들었다.
뭐 하는 거지. 길버트는 가늘게 흐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것으로 누워 있는 벤자민을 파묻기 시작했다.
길버트가 허겁지겁 그녀를 말리러 나타난 건 그 이유 때문이었다.
* * *
[당신한테 말 걸고 싶었던 건 허락을 받으려고 그랬던 거야. 너네 집 마당에…….]다음날.
오베르 마을은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했다.
마을 외진 곳에 위치한 화가의 집에도 그 분위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벤자민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려 있던 창문 사이로 시끄러운 소리가 넘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언제 집에 돌아왔더라.
어떤 튼튼한 사람에게 업혀 돌아왔던 기억은 나는데.
같이 있었던 사람은 그 여자뿐인데. 그 여자가 엄청난 체구를 숨기고 있었던…… 건가……?
그래도 그녀가 ‘싸구려 와인’은 아니라 말한 게 사실인 듯 숙취가 없었다. 오히려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도 들었다.
아침 특유의 맑은 공기를 들이켜며 벤자민은 점점 또렷해지는 머릿속을 환기했다.
어쩐지 지금이면 평소 같지 않은 밝은 색상의 물감도 흔쾌히 사용할 수 있을 법한 기분이었다.
―똑똑.
때마침 누군가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른 아침, 제집을 찾아올 사람은 드물었다.
근래는 노란 머리 이웃. 하지만 그 이웃은 정오가 다 되어야 움직이기 시작하는 게으름뱅이였고, 그렇다면 남은 건.
‘길버트 그레이스인가.’
분명 마을 축제에 나오라 권유하러 온 것일 테다.
성실한 이장님은 매년 그가 마을의 아무 축제도 참가하지 않아도 매번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참가하라고 말을 붙여 왔으니까.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축제에 참여할 마음은 없었다.
길버트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갔다가 토마토나 계란을 맞을 수도 있었으니 사양이다.
축제라고 사람들이 홱 변해서 친절히 대해 준다 해도, 그들이 상냥하게 건네는 축제 기념 야채수프엔 독극물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벤자민은 문을 열었다.
그의 예상대로 길버트 그레이스가 마을에서 나눠 주는 축제용 토마토와 안내 팸플릿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아, 좋은 아침이에요, 리히터 씨.”
좋은 아침이라 말하는 사람치곤 길버트의 표정은 미묘했다. 꼭 하늘 나는 닭을 본 듯한 난처한 표정.
‘표정이 왜 이래.’
벤자민은 의문을 담아 고개를 까닥이려는 차, 그의 시야에 마당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은 웬 우람한 나무 한 그루가 들어왔다.
가만히 올려다본 그것은 나무가 아니었다.
나무라기엔 줄기가 녹색인 모양새. 흡사 동화 속에 나오는…….
“……그…… 저건 말이죠. 어제 닉시가 심어 놓고 갔어요. 리히터 씨 마당에 유전자…… 어쩌고 강낭콩을 심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뭐 대답 없으면 허락한 걸로 생각할게?]그의 마당엔 바오밥나무만 한 강낭콩이 자라있었다.
“강낭콩……인데 역시 정상적인 강낭콩은 아닌 것 같죠? 하하…….”
벤자민은 머리를 짚었다.
없던 숙취가 한꺼번에 관자놀이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마당이 초토화가 돼 있었다.
이게 강낭콩이라고? 강낭콩이 이렇게 크게 자라는 식물이었던가? 아니면 내가 개미만큼 작아진 건가?
절로 이가 까득 악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