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_6
“……그 녀석 어디 있어.”
“아마 지금쯤 축제를 즐기고 있을…… 걸요? 아, 안 그래도 저, 리히터 씨에게 축제에 오시라고 말하러 온 건데.”
애써 길버트가 분위기를 환기하려 밝게 말했지만, 그에겐 씨알도 안 먹히는 짓이었다.
아니. 그 미친 녀석은 지금 남의 집 마당 꼴을 잭과 콩나무로 만들어 놓고 축제를 유유자적 즐기고 있다고?
길버트는 입꼬리를 올려 말갛게 웃으며 벤자민에게 토마토와 축제 팸플릿을 건넸다.
“오실 거죠?”
그는 오늘 하루는 절대 집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정말, 진심으로.
벤자민은 축제 팸플릿을 낚아채듯 손에 쥐었다.
“……안내해.”
* * *
오베르 마을의 봄 축제는 레몬, 오렌지, 라임으로 이뤄진 시트러스 향기로 가득했다.
마을이 비교적 따뜻한 프랑스 남부 지방에 위치했기에 봄의 시작과 온갖 시큼한 향 나는 과일들의 수확 시기가 엇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마을이었기에 축제라고 해도 거창한 건 아니었다.
각자 가판대로 쓸 나무판자들을 거리에 세워 두고, 각자 겨울 작물로 만든 음식들을 준비해 놓거나, 이번 연도 들어서 새롭게 수확하고 거둔 첫 작물들을 내놨다.
겨울을 묵은 작물들은 뭉근하고 깊게 익은 맛이 났고, 이번 봄에 갓 수확한 작물들은 풋내가 났기에 적절히 번갈아 먹으면 꽤나 큰 축제에서 내놓을 법한 음식다운 맛이 났다.
그래서 길버트는 갓 딴 토마토에 지난 추운 겨울을 났을 스미스 씨네 치즈를 얹어 먹고 싶었다.
화가의 집에 들른 뒤에 바로!
그러나 이번 해는 마가 낀 건지 그는 화가의 손에 이끌려, 천방지축의 새 이웃을 찾으러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리히터 씨. 닉시가 이런 곳에 왔을 것 같진 않은데요.”
길버트가 말했다.
벤자민은 마을을 돌아다닌 지 삼십 분 만에 하룻밤을 꼬박 새운 사람처럼 피곤해 보였다.
제집 마당을 쑥대밭으로 만든 닉시를 찾아 마을까지 온 건 좋았으나, 축제로 인해 사람들이 북적이는 마을을 활개 칠 만큼 그의 담력은 좋지 않았다.
겨우겨우 뒷골목만 빙빙 돌던 그들은 결국 라울의 바 앞에 멈췄다.
“그럼…… 그 녀석은 보통 어디 있지?”
“아마 마을 광장에 있을 거예요. 어제 샬롯 할머니의 브라우니 가판대를 만들어 준다 했으니까.”
하필 있어도 마을 중앙이라니.
가장 시끄러운 곳이다. 벤자민은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지.”
“네에.”
마을 사람들이 저를 보고 흠칫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오늘따라 그 반응들이 유독 피곤하고 적응 안 됐다.
왤까. 오늘따라 마을이 활기차고 온갖 상큼한 냄새 가득해서인가.
그럴 때마다 벤자민은 있으면 안 되는 자리에 있다는 걸 실감했다.
‘빨리 그 녀석을 찾아서 마당을 원상 복구시키고…….’
“리히터 씨, 드실래요?”
멍하니 생각하고 있던 벤자민의 시야에 불쑥 토마토가 나타났다.
길버트는 축제 가판대에서 나눠 주는 새싹 모둠 쌈을 입에 문 채 그에게 토마토를 내밀었다.
가만 보니 입에만 뭔갈 물고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 가판대를 휩쓸고 온 건지 길버트는 한 손 가득 이것저것 들고 있었다.
“됐어.”
“그럼 당근 주스는요? 맛있는데.”
“그…… 아니.”
“그럼 좀 이것 좀 들어 주세요. 제가 손이 부족해서.”
길버트는 벤자민에게 레몬을 들이밀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그의 손엔 먹을거리가 차고 넘쳤기에 벤자민은 어영부영 건네받을 수밖에 없었다.
표면이 딱딱한 레몬에선 시큼한 과육 향보다 레몬꽃 냄새가 났다.
“길버트! 이것도 먹어 봐. 엊그제 잡은 꿩으로 만든 수프라고!”
“아하하, 감사해요! 근데 지금 제가 손이 없어서. 이따 오는 길에 들를게요.”
역시 마을 이장이란 건가.
벤자민은 사람들에게 넉살 좋게 웃는 길버트를 흘긋 바라봤다.
이 젊은 농부는 누굴 만나도 친근히 아는 체했다.
그것뿐인가.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이것저것 챙겨 주려 안달이었다.
여러모로 저완 다른 사람이다. 저는 어둡고 그는 밝고.
하다못해 방금 들고 있게 된 샛노란 레몬이 제 모든 것 중에 가장 밝은 것일 만큼, 저는 빛이나 화창, 밝음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벤자민은 길버트에게 인사하면서 덤으로 떨어지는 관심 따위를 애써 무시해 가며 길을 걸었다.
딱 광장까지 한 골목 걸었을 뿐이었다.
“사과 맛 나는 양파 절임 드실래요?”
“아니.”
끔찍하다.
“그럼 레몬이랑 라임을 넣고 얼린 빙수는요?”
“아니.”
제발 그만…….
벤자민의 손은 레몬 이외에 잡다한 먹을거리로 포화 상태였다.
오지랖 넓은 갈색 머리 청년 덕이었다.
▶ 누군가의 수확
야채 모둠 꼬치, 호박스튜, 당근 주스, 산딸기 6알, 수선화, 레몬.
▶ 총평
집에 가고 싶다.
* * *
“이거 리히터 씨 아니었으면 다 못 들었겠네요. 감사해요. 참, 들고 계신 거 드셔도 돼요! 저는 배불러서. 광장으로 가기 전에 저쪽으로 가 볼까요?”
길버트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벤자민은 먹을거리가 한 손을 넘겼을 때, 길버트의 속셈을 눈치챘다.
그는 저에게 얼레벌레 먹을 걸 떠넘기며 제게 축제 음식을 먹이려는 것이었다.
그걸 눈치챈 이후로 벤자민은 그의 “무거운데 들어 주실래요?”란 부탁을 받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천연덕스러운 젊은 마을 이장은 벤자민이 이미 한 손을 못 쓴다는 것을 알고선 아무렇지 않게 그의 웃옷 주머니에 산딸기 몇 알을 집어넣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엔 인상을 구기고 있는 벤자민을 보고 흠칫 놀라기 바빴다.
그러나 이윽고 그가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끝내주게 멋진 축제를 즐기고 있는 사람처럼 먹을거리를 잔뜩 들고 있는 모양새를 보곤 고갤 갸웃했다.
뒤이어 그의 뒤에서 반짝 나타나 서글서글 인사하는 길버트를 보곤 마을 사람들은 벤자민에 대한 경계를 아예 누그러뜨렸다.
“아, 에드가 씨! 양배추절임 맛있더라고요.”
“그럼. 누구 작물인데. 거기 화가 양반도 먹어 봐.”
또 손에 먹을 게 쥐어졌다.
축제한다고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저는 당신들이 그렇게 증오하던 독일군(이었던 사람) 사람이다. 축제 날이라고 그 딱지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왜.
벤자민은 사근거리는 친절들이 불편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받아 버린 것들은 제 마음을 무겁게 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의 채근에 못 이긴 벤자민이 산딸기 하나를 입에 넣었다.
단맛이라곤 없는 지독하게 신맛이었다.
‘피곤해.’
* * *
“어라? 없네.”
닉시는 화가의 텅 빈 집 앞에 서 있었다.
지금쯤 안에서 자고 있을 화가가 보이지 않았다.
제 실험 결과도 보러 올 겸, 어두컴컴한 굴속에만 살고 있는 화가 집에 불이라도 지펴 줄까 싶어 그의 집에 들른 것인데.
“축제 갔나? 아니지. 그 성격에 무슨.”
설마 마당에 자란 이 식물 때문에 도망갔나.
닉시는 고갤 돌렸다. 마당에 큰 그늘을 만들고 있는 강낭콩이 눈에 들어왔다.
바오밥나무까지는 아니지만 메타세쿼이아에 버금가는 크기.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흐으음. 일단 마을로 내려가 볼까.’
닉시는 미련 없이 뒤돌았다.
이번 축제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강낭콩을 나눠 주려 했는데 이건 들고 가기엔 쫌 버거운 크기였다.
이따 여기서 콩 나눔이라도 해야겠다 생각한 닉시는 마을로 향했다.
* * *
마을 사람들에게 벤자민은 늘 두려움 혹은 경계 대상이었다.
전쟁이 한창이었던 2년 전, 갑자기 나타난 독일군.
숨만 간신히 붙어 들판에 쓰러져 있던 걸 길버트가 데려왔다.
의식이 없었고 피가 낭자했지만 그 검붉은 핏빛 아래 입고 있는 건 확실히 독일군의 군복이었다.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인 거, 사람들 대부분은 그냥 죽게 내버려 두자 했다.
그걸 반대하던 사람은 마을에서 고작 둘.
그를 데려온 길버트와 술집 주인 라울이었다.
전쟁 이전에 국경 근처에 살아서 이방인에게 거부감 없는 라울은 그렇다 치고, 길버트가 그를 죽이는 데 반대한 것은 의외였다. 그는 독일군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사람이었으니까.
독일군을 제일 증오할 사람일 그가 반대하니 마을 사람들을 더 뭐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양심과 증오 사이를 갈팡질팡하던 마을 사람들은, 마을과 떨어진 낡은 창고에 그를 방치했다.
건더기 없는 밍밍한 야채수프와 빵은 그들의 마지막 인간성이었다.
그는 한 달을 앓았다.
상처에 굳은 딱지가 지자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손가락만 까닥일 수 있었던 그가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자,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오베르의 들판 한가운데 서서 살아 있는 망령처럼 하루 종일 넋 놓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한 달을 의미 모를 행동을 했다.
결과적으로 상처 입은 독일군은 오베르 마을 끝, 낡은 창고에 제 둥지를 틀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고, 아무 안녕도 묻지 않았고, 아무 감사 인사도 하지 않았다.
그냥 죽은 듯. 없는 사람처럼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에게 벤자민은 안 보이는 발바닥의 굳은살 같은 존재가 됐다.
전쟁이 끝난 이후엔 간혹 그가 마을에 모습을 드러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다 식료품을 살 때 같은 아주 찰나의 순간뿐. 마을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그를 볼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마을은 지금 갑작스러운 벤자민 등장에 비상사태였다.
그건 마치 그동안 나 몰라라 했던 마을 뒷산의 퓨마가 어슬렁대며 내려온 모양새였다.
2년 동안 저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걸 봐 오기도 했고, 전쟁도 끝났다지만 그렇다고 있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마을에 내려와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한 그를 본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좋은 날이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친절히 대해 보려는 부류와 표정을 구기며 경계하는 부류.
그러나 아무렴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든 벤자민은 아무렇지 않아 했다.
저를 향한 적개심 어린 표정은 오히려 반갑기만 했다.
“이거 받아요! 내가 키운 거예요.”
“…….”
벤자민은 꼬마가 쥐여 준 수선화 화분을 받았다.
“엘리……! 가까이 가면 안 돼.”
그러자 꼬마의 뒤에 있던 여인이 제 아이를 끌어당겼다. 뻔히 그 광경을 봤지만 모른 척한 길버트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벤자민은 향기 없는 노란 수선화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 마당에 심으면 되겠네요.”
“…….”
“어…… 음……. 아, 맞다. 마당이 강낭콩 때문에 난리였지.”
어색해 미치겠네. 길버트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닉시는 광장에 없어 보이는데. 다른 곳으로 가 볼까요?”
“……됐어.”
“네? 어디 가요, 리히터 씨!”
“돌아가겠어.”
그는 홱 뒤돌았다.
이런 친절이 불편했다.
저는 이런 걸 받아도 될 사람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하나하나 손에 얹어질수록 마음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는데, 수선화 한 송이를 받았을 땐 도망치고 싶었다.
이런 작은 친절 때문에 본인이 지금까지 어영부영 살게 된 것 아닌가.
2년 전의 그는 죽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여기가 독일인지, 프랑스인지 위치는 상관없었다. 그저 그는 마지막이 될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더 이상 몸이 움직이지 않게 됐을 때.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고요한 숲속에 털썩 쓰러지게 됐을 때.
그는 이제야 죽게 되는구나, 하고 눈을 감았다.
근데 뜨고 나니 낡은 오두막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깊은 잠을 잤다.
이따금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환청이 들릴 때도 있었다.
포탄이 스치고 지나간 피부가 욱신거릴 때마다, 자상으로 인해 열이 펄펄 끓을 때도.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을 느낄 때도.
이번엔 정말 죽겠구나 싶을 때마다 제 앞엔 붕대, 건더기 없는 수프, 물 같은 작은 친절이 얹어졌다.
그렇게 어영부영 여기까지 왔다.
저는 이런 걸 받아도 될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마을 사람들에겐 더더욱.
왜냐면…… 왜냐면.
벤자민은 길버트를 바라봤다.
제 시선을 느낀 건지 라울과 잡담하던 길버트가 고갤 돌렸다.
“돌아가겠어.”
“네? 벌써요? 여기까지 왔는데요?”
벤자민은 손에 잔뜩 들려 있는 잡동사니들을 바 테이블에 올려놨다.
여기 온 것부터 잘못된 것이다.
본인이 마을에 내려왔을 때부터. 오베르에 오게 된 것부터. 살아 있었을 때부터.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 발길을 돌렸을 때였다.
“화가?”
눈쌀 찌푸려질 만큼 신맛 나는 목소리가 울렸다. 닉시였다.
* * *
축제는 이게 좋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길도 꽃가루 조금 뿌리고 울타리에 리본을 새로 달았다고 기분이 들떴다.
닉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평화로운 이웃들에게 손 인사했다.
“자, 자 에드가 씨 뽑아 봐요.”
“이건…….”
“점괘예요! 저랑 길버트가 열심히 만들었다구요. 길버트는 반으로 접는 것밖에 안 했지만.”
닉시는 빙긋 웃었다.
그녀의 말에 주변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한둘 그들에게 다가왔다.
내용이 하나같이 정상적이지 않았기에 마을 사람들은 해석하기 난해해했다.
포도 농장을 하고 있던 여인은 점괘 내용을 아주 맘에 들어 했다.
닉시는 흐뭇한 마음으로 마을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때, 라울의 바 근처에 뭔가 소란스러움을 느꼈다.
평소의 부산함보단 약간 뭐랄까. 동물원에 원숭이 보러 온 듯한 묘한 기류가 느껴진다 해야 하나.
“잠시만요. 들어갈게요.”
호기심을 그냥 넘길 닉시가 아니었다. 닉시는 뭉쳐있는 마을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곳엔 화가가 있었다.
“화가? 마침 찾고 있었는데 잘 됐다.”
“너…….”
벤자민의 울화통이 터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닉시는 점괘가 든 통을 덜렁거리며 벤자민과 길버트가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집 마당에 강낭콩 봤어? 위대한 천재 화학자 이 몸의 솜씨라고?”
엣헴. 닉시가 어깨를 으쓱하며 떵떵거렸다.
길버트는 벤자민의 손안의 레몬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레몬이 곧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내가 대체 언제 마당을 써도 된…… 하. 됐고, 저거 대체 어떻게 처리할 거야.”
“열매를 다 따면 알아서 말라죽을 거야. 저 콩나무는 일회용이거든.”
마을의 신참과 불청객의 흔치 않은 조합. 마을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그들 주위에 모였다.
“저 무식하게 큰 콩나무에, 무식하게 많이 매달린 콩을 어느 세월에 다 딴다고 하는 거지.”
벤자민은 제집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마을 사람도 벤자민의 손가락 따라 시선을 옮겼다.
“바로 그 방법을 너한테 말해 주려고 널 찾은 거야, 화가!”
“하…… 뭔데.”
“뭐, 뭐야 저 나무는……?”
“뭔데, 뭔데?”
그곳엔 벤자민의 집 굴뚝 조금과 굴뚝보다 높이 솟아 있는 어처구니없이 큰 기둥이 있었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강낭콩이었다. 좀 많이 크고 굵은 강낭콩.
마을 사람들은 저들이 뭘 본 건지 휘둥그레 놀라 눈을 부비적거렸다.
“자자, 여러분!”
그런 소란 와중에 닉시가 갑자기 손뼉을 짝짝 쳤다.
이미 ‘잭과 콩나무’의 콩나무를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그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기 저 엄청나게 큰 콩나무 보이죠? 아마 알맹이는 머리통만 할 거예요!”
제각기 자신들의 머리통을 더듬는 마을 사람들 뒤로 벤자민은 불길함을 감지했다.
어쩐지 불안하다. 저 정신 나간 이웃에게 조용히…… 그저 조용히 나무만 처리하라고 으름장을 놓은 뒤 다시 집에 틀어박혀 있을 생각이었는데.
왜 저 미친 이웃은 관광지를 안내하는 가이드마냥 본인의 집을 가리키고 있는 거지.
설마, 설마.
“지금부터 화가의 집 앞에서 강낭콩을 무료로 드리고 있으니, 많이 찾아 주세요!”
제기랄. 벤자민은 머리를 짚었다.
그의 탄식을 아는지 모르는지, 닉시와 마을 사람들은 ‘기이한 콩나무 관람 쇼!’와 ‘머리통만 한 콩 무료 나눔 행사!’라는 원 플러스 원 행사에 그저 해맑을 뿐이었다.
“자 그럼 지금 당장 떠나 볼까요?”
“대체 누구 맘…….”
울컥한 벤자민의 어깨를 누가 톡톡 두드렸다.
그의 손아귀 아래 터지기 일보 직전인 레몬을 도저히 못 본 척할 수 없었던 길버트였다.
“레몬…… 터질 것 같은데요 리히터 씨.”
길버트의 말에 벤자민은 제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타원형의 동그랗던 레몬이 말린 문어 머리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실은 그거 제 오늘 간식이거든요. 레몬청을 만들려 했어서. 아, 물론 리히터 씨의 손맛이 들어간다고 싫은 건 아닌데, 과즙이 많이 아까워서요.”
벤자민은 크게 놀랐다. 저가 길버트의 간식을 쥐어짰었다는 것에 놀랐다기보단…….
‘손에 힘이 들어갔어……?’
길버트는 머쓱하게 웃으며 그의 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우그러진 레몬 대신 던지고 놀려 마련해 놓은 감자 전분 풍선을 얹어 주었다.
“이왕 터뜨릴 거면 이쪽이 더 말랑말랑하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벤자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잉크 펜으로 못생긴 눈코입을 그려 넣은 풍선이 꾸악 일그러졌다.
‘아까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히 손에 힘이 들어오고 있다.’
“음……. 시끄러운 게 싫으면 닉시랑 마을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나서 집으로 돌아갈래요? 그때까진 제집에 있으셔도 되고요.”
길버트가 제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벤자민은 멍하니 전분 풍선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꾸악 쥐어졌다, 도로 풀어졌다, 다시 일그러진 전분 풍선이 마치 미래의 닉시 같았다.
몇 번을 그러다 갑자기 손을 파들파들 떨게 된 벤자민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 그 녀석을 따라가자.”
닉시의 말은 파급력이 컸다. 그녀의 목소리는 클 뿐만 아니라 또랑또랑하기까지 했기에.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화가의 집, 잭 없는 ‘잭과 콩나무’를 구경하기 위해 슬금슬금 그의 집 앞에 모여 있었다.
그곳엔 정말 거대한 강낭콩이 자라 있었다. 콩알이 송아지만 한 어마어마하게 큰 콩나무.
화가의 집 앞에서 뜻밖의 콩 나눔 행사가 열리자,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집결했다. 축제의 마지막 행사인 라즈베리 와인 시음회는 얼렁뚱땅 화가의 집 앞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콩은 마음껏 가져가도 돼요.”
닉시는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제 얼굴만 한 콩에서 멀쩡히 콩 맛이 난다는 것에 신기해하면서도 먹었다가 속에서 불어 버릴까 봐 함부로 콩들을 가져가진 못했다.
적당히 한 가정에 한두 알씩 챙겼을 뿐이었다.
콩 하나를 냄비째 삶던 빅토리아가 입을 열었다.
“닉시. 이거 심으면 우리 집 앞에도 엄청난 콩나무가 자라는 거예요?”
“아니. 나무만 실험한 거라 종자인 콩은 일반 강낭콩이랑 똑같아.”
“아쉽다. 콩나무로 의자를 만들어 볼 기회가 생기는 건가 싶었는데요. 언제 이런 큰 콩나무에 조각을 해 보겠어요!”
“말만 해! 널 위해서라면 이깟 콩나무 몇백 그루도 만들 수 있어, 비티.”
닉시의 말에 비티가 애교스럽게 웃었다.
라즈베리 와인과 삶은 강낭콩은 은근히 잘 어울렸다.
라즈베리 와인 특유의 달짝지근한 맛이 삶은 강낭콩의 비릿한 맛을 잡아 줬고 포슬포슬한 강낭콩의 식감이 라즈베리의 금방 질리는 맛을 완화시켰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있는 곳이 방금까지만 해도 경계했던 독일군의 집 마당이라는 사실도 잊고 저물어 가는 하루를 만끽했다.
언제 왔는지 맥주잔을 들고 있는 길버트가 닉시 옆에 앉았다.
“대단하네, 닉시. 도시에 살 때 연구원이었다고 했지? 이 강낭콩도 예전에 발명했던 거야?”
“응? 아. 응 그렇지. 6년 전에 학교 선배랑 같이 연구했던 거야.”
“6년? 그걸 지금 성공시킨 거야?”
“뭐 그렇지.”
닉시는 콩나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심드렁히 대답했다.
길버트는 그녀의 대답에 의아함을 느꼈다.
눈이 삐지 않은 이상 누가 봐도 실험은 대성공인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불만족스러운 게 있나? 아니면 도시 사람들은 다 이런 건 아무렇지 않은가.’
“실험이 성공한 건데 기뻐 보이진 않네.”
“응. 이렇게 쉬운 걸 그땐 왜 못했었지 생각하고 있었어.”
아무리 저가 천재라곤 해도, 참고 서적도 변변찮고 실험 도구도 시원찮은 이런 시골 촌 동네에서 실험을 성공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저가 누구인가. 그냥 천재였으면 못했겠지만, 저는 위대한 천재 화학자 닉시 아니던가.
닉시는 근 일주일도 안 돼서 실험을 성공시켰다.
허나 뭔가 찜찜했다.
‘예전엔 대체 왜 이런 쉬운 실험을 성공하지 못했던 거지?’ 하는 의문스러움.
닉시는 가만히 옛 생각에 잠겼다.
“이게 쉽다고? 대체 어떤 연구 같은 걸 했길래……”
“원래는 유전자 조작을 통한 ‘인간의 신체 부위 재생’을 연구하려고 했거든? 근데 어느 순간 ‘인간의 식량 확보를 위한 연구’를 하고 있었어. 근데 왜 이 연구를 하고 있었던 건지 기억 안 난단 말이지.”
“나한테 말해도 몰라, 닉시.”
애초에, 이렇게 쉬운 걸 왜 하려고 했던 거지.
‘신체 부위 재생’과 ‘작물 확대’는 같은 유전자 조작을 뿌리로 두고 있었지만 둘 중 무엇이 어려워 보이냐 하면 당연 전자다.
사람 만드는 것과 식물 만드는 것의 난이도가 같을 수가 없으니까.
분명 본인도 더 쉽지 않아 보이는 신체 부위 재생 쪽 연구를 하고 있었다.
‘왜 마음이 바뀌었던 거지. 이렇게 일주일 만에 발명될 시시한 연구를 한다 했을 리 없는데.’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닉시는 떠올리는 것을 포기했다.
“그나저나 화가는 어디 갔어? 집?”
“아니. 저기 느티나무 아래.”
길버트는 언덕 위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나무에 기댄 벤자민이 있었다.
“하여간 쑥스러움이 너무 많다니까.”
“가게?”
“응. 저 사람만 점괘를 안 받았거든.”
닉시는 구석에 놔뒀던 점괘 상자를 들었다. 안에 들어 있는 종이는 이제 딱 세 개 남아 있었다.
그녀가 상자를 들고 느티나무로 향하려 할 때, 길버트가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닉시가 의문을 담아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안 갔으면 좋겠어서.”
“왜?”
닉시는 통을 탈탈 흔들며 말했다.
“음…….”
붙잡아놓고 이제야 이유를 생각하는 스스로가 웃기긴 했는지 길버트가 콧잔등을 긁적이며 웃었다.
“나도 아직 안 받았거든. 그거.”
길버트가 턱짓했다.
“그래?”
닉시는 달랑 종이 세 개 있는 상자를 요란스럽게 흔들었다.
정성스럽게 흔든 상자가 불쑥 길버트 앞에 내밀어졌다.
“자, 골라 봐.”
길버트는 점괘를 하나 집어 들었다.
성질 급한 닉시는 그가 종이 하나를 집어 들자마자 곧장 느티나무로 걸음을 옮겼다.
길버트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 종이가 핑계인 걸 모르는 건가.
“안 갔으면 좋겠다는 건 진심인데.”
그는 저 멀리 느티나무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2년 전 피투성이 상태로 제 앞에 나타난 사람. 고요한 보라색 눈을 가진 남자.
“저기, 에드가 씨.”
“응?”
“여기 뭐라고 적혀 있어요?”
“흐음, 보자…….”
가누지 못하던 고갤 겨우 수그리며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중얼거리던 남자.
세상 모든 우울은 다 저 혼자 짊어지고 있다는 듯 숨죽여 사는 저 남자.
에드가가 말했다.
“쪽지에 그렇게 적혀 있어요?”
“그래.”
“아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드가 씨.”
대체 뭔 의미야.
적을 거 없다고 아무거나 적을 때 알아봤다.
이제 보니 쓰기 귀찮을 때 적은 건지 대충 휘갈겨 쓴 글씨체였다.
길버트는 그것을 도로 반듯이 접어 손에 쥐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제 겉옷 웃옷 주머니에 부시럭대는 종이를 끄집어냈다. 글을 모르는 그도 아는 글자.
“이것도 넣어놓을 걸 그랬나.”
구구절절 적어 놓은 것들관 달리, 싱겁기만 한 쪽지였다.
화가의 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느티나무 아래.
얼마 높지 않아도 언덕은 언덕인지 바람이 세게 불었다.
막 능선에 걸린 저녁놀을 등진 채, 닉시는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벤자민을 바라봤다.
“이런 풍경 오랜만이지?”
으쌰. 그녀는 화가 옆에 자릴 잡고 앉았다.
언덕 아래, 한창 시음회가 진행되고 있는 마을의 평화로운 분위기.
아주 오래전부터 겪어본, 평범하게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조금은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그럴 만도 하지.’
옅은 바람이 불고, 화기애애 행복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고기를 굽는 입맛 돋우는 냄새와 적당히 취할 만큼 달큰한 술 냄새.
전부 다 전쟁 이전의 흔한 일상들이었으니까.
“왜 여기 있어.”
“시끄러우니까.”
“이참에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고 그러지. 일부러 판도 깔아 줬는데.”
“……필요 없어. 서로가 더 걸리는 존재가 될 뿐이야.”
하여간 꽉 막힌 녀석. 닉시가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고 계속 여기 있을 거야? 꼭 집에서 쫓겨난 강아지 같잖아.”
그걸 알면서 묻는 건가. 벤자민은 허, 하는 한숨을 내뱉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지?”
“내 덕분이지.”
“뻔뻔하군.”
벤자민의 타박에 닉시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푸스스 웃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상자를 짜잔, 하며 들이밀었다. 점괘 상자였다.
“이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
“…….”
“앞으로 일 년간 당신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아주 중요한 거란 말씀.”
닉시는 통을 흔들었다. 종이쪽지 두 개밖에 없는 상자엔 덜그럭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자. 하나 뽑아.”
통을 그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아주 당연하게도 화가는 통을 밀어냈다.
“싫어.”
“이런 말까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네가 이걸 뽑지 않으면 엄청난 불행이 찾아올 거라고.”
“상관없어.”
“뽑을 때까지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거야.”
그녀의 장난스러운 엄포는 진담 같아서 무서웠다.
벤자민은 질린 얼굴로 점괘 상자에 손을 넣었다.
자신이 계속 옆에 있는 게 불행보다 더 큰 재앙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닉시가 상자를 탈탈 털었다.
상자에 남은 점괘는 단 하나. 그것은 마지막 닉시의 몫이었다.
“드디어 다 나눠 줬다! 야호! 만들 땐 머리 아팠는데 다들 받고 기뻐하는 거 보니 잘했다 싶더라구.”
벤자민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내심 닉시가 떠나길 바라고 있었건만 그녀는 움직일 생각조차 없는 태평한 얼굴이었다.
먼저 뽑고 싶은 걸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해 참았던 그녀였다. 닉시는 마지막 종이를 끄집어냈다.
그러든지 말든지 벤자민은 종이쪽지를 잡초 쥐듯 성의 없게 쥐고 있었다.
“화가. 점괘 안 펼쳐 봐?”
“나중에.”
“그럼 난 지금 봐야지.”
닉시는 쪽지를 펼쳤다.
‘음…… 그렇군!’
확인은 1초 만에 끝났다.
닉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쪽지를 도로 반듯하게 접었다.
“…….”
“…….”
“이제 펼쳐 볼 거야?”
“아니.”
“그럼 언제 볼 건데? ‘나중에’가 ‘영원’은 아니겠지?”
“아마 그럴걸.”
그의 대답에 닉시가 야유했다.
그녀는 꽃점으로 지금 볼지 나중에 볼지를 정하자며 풀밭의 꽃을 찾아 뒤졌다.
이윽고 민들레를 찾은 닉시가 그것을 벤자민의 흉터 가득한 손에 쥐여 주었다.
“자. 이걸로 지금 본다, 안 본다를 정하는 거야.”
민들레의 꽃잎은 어림잡아도 100개가 넘는다. 이거, 아니면 저거를 선택하기 위해 100번의 미련한 중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성격 나쁜 화가가 그걸 순순히 해줄 리 없었다.
그는 민들레의 머리를 통째로 툭 끊으며 “안 본다.” 중얼거렸다. 닉시의 야유는 덤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바다 건너까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라즈베리 와인 파티가 무르익었는지, 언덕 너머까지 달큰한 향기가 풍겨 왔다.
멍하니 마을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바라보던 닉시가 툭, 말을 던졌다.
“미안해.”
갑자기 이제 와서?
무슨 꿍꿍이야.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곤 닉시를 바라봤다.
그녀의 두루뭉술한 ‘미안해’란 말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벤자민이 마찬가지로 툭, 말을 던졌다.
“뭐가.”
대충 집 앞마당을 저 꼴로 만들어서, 혹은 피리 부는 사나이마냥 마을 사람들을 줄줄 끌고 와서, 아니면 나오기 싫다는 저를 집 밖으로 끄집어내서 중 하나일 것이었다.
‘……뻔하지.’
그렇게 대충 어림잡은 그가 몸을 나무 기둥에 기댔다.
그보다 더 그의 정신을 빼놓고 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저가 레몬을 터뜨릴 뻔했을 때, 분명 손에 힘이 들어간 걸 느낀 그때.
그의 손은 갈가리 찢긴 이후 손가락만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
벤자민이 흉터 가득한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까 그랬던 게 꿈인 듯 그의 손은 다시 파르라니 떨리기만 했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그녀가 툭, 말을 꺼냈다.
“네 손을 그렇게 만든 거. 나일지도 몰라.”
“……뭐?”
그녀의 입 밖에서 나온 건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덕분에 벤자민이 멍하니 반문했다.
닉시는 저 멀리 평화롭기 그지없는 광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나도 군인이었거든. 프랑스 23사단. 게르강 전투.”
순간 그의 귓속에 그날의 공습 때 울리던 폭음과 사이렌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욱신하고 머리가 아팠다. 벤자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래서 미안하다구.”
“……됐어.”
“정말?” 그녀가 물었다. “그래.” 그가 대답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였다. 이제 와 왜 제 손을 뭉갰는지 따질 맘도 없고, 제 전우들을 앗아간 적국의 퇴역군인을 비난하고픈 맘도, 이제 와 용서하고 자시고 할 맘도 없었다.
그는 그저……
그저 그랬다.
“그땐 네 손 아니면 내 손, 둘 중 하나가 박살나야 끝났으니까. 운 나쁘게 그게 내 손이었던 것뿐이지.”
“뭐…… 하긴.”
“그리고 난 누구한테 미안하단 말을 들을 사람이 못 돼. 그러니 사과는 필요 없어.”
‘요컨대 내 사과는 거절당했단 말이군.’
‘이거 아니면 저거’로 이뤄진 닉시의 정신세계에서 ‘이해하지만 거절!’이란 요상한 그의 대답은 참으로 난해한 숙제와도 같았다. 역시 여러모로 어려운 사람이었다.
‘꼭 노엘 선배 같네.’
닉시는 턱을 괸 채 다시 마을 사람들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막 저와 눈이 마주친 빅토리아와 길버트가 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들 앞에 놓인 3인용 바비큐 그릴에 남은 한자리를 차지하길 바라는 손짓이었다.
“으쌰. 난 이제 가 봐야겠다. 내 친구들이 찾네.”
“근데…….”
드물게 반문하는 그의 목소리가 닉시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녀는 뒤돌아보았다.
“그걸 갑자기 왜 말해 주는 거지? 여태껏 조용히 있었으면서.”
“음, 말했잖아.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 있…….”
닉시는 자신의 손에 들린 쪽지를 빙글 뒤집었다.
“소중한 친구한텐 비밀이 없어야 하니까.”
사락. 노을 때문에 주홍빛이 된 그녀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벤자민은 가만히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닉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짜 이상한 여자였다. 공연히 가만히 있는 사람을 들쑤시는 데에 일가견 있는 사람.
“……소중한 사람 보는 눈이 없군.”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깊은 바닷속을 폭풍처럼 헤집어 놓는 여자.
누군 친구 해 준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넌 앞으로 소중한 사람이 될 거다’라며 엄포를 놓는 여자.
그러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바스락거리고 마는 것이다. 손안에 아무렇게나 쥐어진 점괘 종이처럼.
그는 손안에 벼르작거리는 종이를 펼쳐 보았다. 꽤 이른 ‘나중’이었다.
벤자민은 그 안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누가 적은 건지 참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대체 뭐가 무뎌진단 건지. 저 정신 사나운 이웃이 무뎌진단 건지, 손의 고통이 무뎌진단 건지, 아니면 잊지 못하는 기억이 무뎌진단 건지.
그는 여전히 들썩이는 축제 분위기의 제집 마당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오늘의 수확
거대 강낭콩, 라즈베리 와인, 양송이, 양고기 바비큐
▶ 총평
남은 바비큐 재료들은 다음날 스튜로 만들어 먹으면 딱이겠다!
* * *
절대 죽지 않을 것 같았던 강낭콩은 1회용이란 말이 맞았던 건지, 다음 날 아침 바싹 말라서 죽어 있었다.
조만간 시끄러운 이웃이 땔감으로 쓸 거라며 도끼를 들고 올 것 같았다.
벤자민은 제 부엌 테이블에 떡하니 놓여 있는 강낭콩 한 알을 바라보았다.
저주라도 받은 건지, 치워도 치워도 어디서 하나씩 툭 굴러 나왔다.
누가 봐도 콩의 범주를 넘어선 수상한 실험 작물인데 용케 마을에서 배탈이나 급사했단 소식은 없었다.
“닉시! 우리 집 포도나무도 저렇게 크게 만들어 줄 수 없어?”
“우리 집 소도!”
어제저녁. 다들 알딸딸해지자 마을 사람들은 닉시에게 자신들의 밭에서 키우는 작물도 크게 만들어 달라 요청했다.
흔쾌히 승낙할 줄 알았던 닉시는 의외로 딱 잘라 거절했다.
“안 돼요. 파리에서 가져왔던 줄기세포 표본을 다 썼거든요.”
다시 가져오려면 파리까지 가야 하고 자신은 재입대하기 싫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못내 아쉬워하자,
“그럼, 장비가 마땅치 않아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줄기세포를 추출해 낼 DNA 표본만 있으면 가능해요. 단, 조건이 있어요.”
“조건?”
“번식력이랑 생명력이 끈질긴 종의 DNA 표본이 필요해요. 핵폭탄이 터져도 살아남는 종이요.”
번식력과 핵폭탄이 떨어져도 살아남는다는 끈질긴 생명력.
사람들의 머릿속엔 동시에 하나의 생명체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