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20
외전 6. 네가 떠오르는 시간에, 나는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사랑을 증거 삼으라고 한다면 난 네게 주장할 수 있는 게 그다지 없다.
나에게 사랑이란 무지개 같은 것이었다. 존재하는 걸 알지만 확신하지 못하는 것. 배운 적이 없어 표현하지 못하는 것.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것. 결코 닿을 수 없는 것. 아름답고 다채롭다고 여겨지는 감정의 스펙트럼.
그녀는 늘 내게 ‘넌 무슨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원하는 게 있는지 묻곤 했다.
그녀는 아마 ‘너를 원해’라는 말을 듣고 싶었을 거다. 말은 은근하게 건넸지만,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곤 했으니까.
그럴 때마다 나는 저절로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대답을 하지 않는 건 다 웃음을 참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휴, 또 대답 안 하지? 하여간 말을 너무 안 듣는다니까.]그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것은 곧 갈망하는 것이다.
갈망은 곧 욕망이다.
내겐 뭘 갈망하는 것도, 간절히 욕망하는 것도 없었다. 예전엔 ‘굶지 않기’ 같은 동물적인 갈망이 있었다만, 진짜 짐승처럼 살아보고 나니 그것마저 희미해졌다. 정확히는 무의미해졌다는 쪽에 가까웠다.
다 타고 남은 재에 불이 붙지 않듯이, 삶의 의미를 전부 태운 내게 이 세상을 떠나지 않아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미련이 있다면 그건 너다, 닉시.
아직 네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어.
너는 몸집도 손도 발도 작은 주제에 태양처럼 빛났다.
마음속 작은 실금에서 비롯된 빛 한줄기인 줄 알았던 넌 두 손으로 가려지지 않는 태양이었다.
눈을 감아도 잔상처럼 남는다. 너는 나의 미련을 태워 소망을 만든다. 덧없이 새하얗던 삶에 뿌리를 내린다.
그리하여 나는 너를 원하게 되고, 갈망하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사랑받지 못한 자의 사랑은 의심과 불안의 연속이다.
요즘 들어 그것을 실감한다.
닉시. 난 너에 비해 줄 수 있는 것도 없고, 너를 늘 웃게 만들 수 있을지도, 네 재미 없는 농담과 늘 일으키는 골치 아픈 소동에 즐거워해 주지도 못해.
너는 내게 과분하다.
너는 내게 특별하다.
나는 네가 유일하지만, 너는 내가 유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간극과 그 간극에서 오는 공백은 늘 나를 초조하게 해서, 나도 모르게 네 마음을 증명해 주길 바라면서 사랑의 증거를 찾는다.
할 말이 없어도 괜히 머리카락을 만져서 네 관심을 끌고, 한평생 온기를 찾아 헤맨 사람처럼 네 허리를 당겨 안는다.
“닉시.”
“응?”
“사랑해.”
나는 네게 증명할 것이 없는 주제에 네게 질문한다. 사랑한다고. 그러면 너는. 너는 어떠냐고.
말과 말 사이의 붕 뜬 침묵의 시간을 얼버무리기 위해 그녀의 입술을 혀로 축인다.
너는 늘 내게 질문하고 내가 대답할 시간을 기다리지만, 나는 늘 네게 질문하고 네 대답을 듣기 무서워 네 입을 막는다.
난 내 사랑을 증거 삼아, 네게 사랑을 갈구한다.
“마을 이장이랑 너무 붙어 다니지 마.”
“질투나?”
“응.”
“비티는?”
“목수도 싫어.”
“그럼 라울은?”
“걔는 괜찮아.”
“음…… 기준이 뭐야?”
글쎄. 그건 아무래도…….
“사랑.”
“그거참 까다로운 기준이네.”
너는 헷갈린다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기댄다. 그러면 난 네가 조금이라도 더 안겨 있길 바라며 네 몸을 깊숙이 묻는다.
넌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지. 모를 수밖에. 숨기고 있거든. 내가 네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네 말을 온종일 생각한다는 걸 알면 넌 우쭐해할 게 뻔하니까.
사랑받지 못해서 불행했다고 생각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런 걸 생각하면서 살기도 벅찬 시간이었다
다만 이제 와 사랑받은 적 없어서, 네게 사랑이 뭔지 능숙하게 알려줄 수 없는 게 아쉬운 건 내 욕심일까.
[그럼 증명해 보라고.]이 고민의 시작은 그 말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증명하라는 네 말.
어떤 짓이 네 마음에 가장 흡족할까를 고민하다 바보 같은 짓을 하기로 했다.
[그나마 쟁취하지 못해서 한으로 남았던 거라고 한다면, 제비꽃설탕절임 정도인가.]아직 봄도 오지 않은 언 땅 위에서 네가 여기 온 이유를 찾아 헤매는 짓.
추운 날씨인데 꽃을 피운 미친 제비꽃이 있을까 생각하며 폭탄으로 날아가 버렸다는 제비꽃밭으로 갔다.
역시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는 건지, 있긴 있었다. 네 포기 정도.
꽃만 꺾을까 하다, 너라면 어쩐지 잡초로 취급받는 이런 식물도 예쁘게 다듬어진 것보단 흙째로 받는 걸 더 좋아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큰 화분에 조심스레 옮겨 담았다.
길가에서 두 포기. 너의 집으로 가는 오솔길에서 한 포기. 마을 벽돌 사이에서 한 포기.
모양도, 크기도 엉망. 같은 화분에 꾹꾹 옮겨 심어서 선물처럼 꾸며보려 해도 그저 잡초 무더기처럼 보이는 어설픈 선물.
사실은 닉시, 이 보라색 꽃들로 멋들어진 꽃다발을 만들어 보려고 했어.
하지만 꽃다발은커녕 제비꽃 설탕절임을 해도 작은 병 하나에 겨우 찰까 싶은 양이었다.
이걸 선물하면 분명 비웃겠지. 흙이나 파고 돌아다녔냐고 하루 종일 배를 잡고 놀릴 것이다.
선물을 받은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마을 사람들 전부가 내가 그녀에게 제비꽃을 선물한 걸 알게 될 거다. 너는 한 이틀 정도는 나를 리틀 플라워 보이라고 부르겠지.
그리고 넌 이 꽃을 네 집 거실 한가운데 장식할 거야. 지나가면서 볼 때마다 ‘뭐 이런 선물을 다 줬지?’ 조잘대며 웃을 거고.
꽃을 따기엔 아깝다고 징징대면서도 꽃이 완전히 지기 전에 따서 예쁘게 말려 볼까 생각하겠지.
아침에 화분을 한번 들여다보고, 저녁에 자기 전에 화분에게 손을 흔들어 주겠지.
괜히 으스대면서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게 사랑의 증거야? 좀 부족한 것 같은데.
얄미운 입꼬리. 잔뜩 신이 난 어깨.
말하면서도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넌 아마, 무척이나 사랑스럽겠지.
그러니까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는 제비꽃들을 옮겨 담은 화분을 그녀에게 건넸다. 제 밭에서 잡초를 뽑아내고 있던 그녀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같이 살까.”
나는 잠깐 생각했다. 욕조에서 씻다가 프러포즈를 받는 것과 그녀의 집 마당에서 밭일하던 그녀에게 프러포즈하는 것. 내가 하고 싶다고 우긴 것치곤, 별반 차이가 없어서 우스웠다.
“어?”
네가 아직까지 상황 파악을 못 한 듯 말했다. 나는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게 사랑한다는 걸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마 넌 평생 나한테 ‘오늘은 사랑하냐’고 묻게 될 거야. 너나 나나 그런 걸 잘 아는 사람들도 아니고, 늘 말해 주지 않으면 모르는 멍청이들이니까…….”
“…….”
“그러니까 네 옆에 있으면서, 네가 물어볼 때마다 계속 말해 줄게.”
닉시는 화분의 듬성듬성 심겨 있는 제비꽃들을 바라보았다. 꽃다발이라고 준비한 모양새가 우스운 프러포즈 선물.
하지만 보통 사람들, 보통 선물처럼 수려하거나, 번지르르한 것들은 퍽이나 독할 만큼 안 어울리는 우리에게 어울리는 어설픈 선물.
“어…… 음, 그러니까.”
“아직도 모르겠어?”
나는 약간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한다는 말이야.”
그녀가 풉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녀는 화분을 받아들였다. 그러곤 그것을 열심히 관찰하다가 이윽고 끌어안은 채 깔깔 웃었다.
“지금 프러포즈한 거야?”
“응.”
“난 또 뭘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말하나 했네.”
“……가볍게 말할 순 없잖아.”
“그래, 그래. 저번에 내가 물었을 땐 마무리할 게 있다고 거절했잖아, 그건 다 끝난 거야?”
“그래.”
“그렇구만!”
닉시는 얼굴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제비꽃을 한번, 내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본 그녀가 샐쭉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웃기다. 반지도, 결혼증서도 아니고 뭐 이런 선물을 다 주지?”
그렇게 가볍게 말하지만 난 안다. 닉시는 그것을 거실 한가운데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둘 것이다. 턱을 괴고 꽃을 관찰하다가 괜스레 보라색 꽃잎을 툭툭 건들여 보기도 할 거고. 향기도 안 나는 꽃의 향기를 찾겠다고 한참을 킁킁대겠지.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작은 손을 붙잡았다. 너는 늘 아주 작은 동작에도 나를 속절없이 만든다.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현관을 지나 익숙한 소파, 익숙한 커튼. 거실에 도착했다.
“예전에 썼던 네 이불이랑 베개, 아직도 우리 집에 있어.”
“응.”
“슬리퍼도 꺼내 놨고. 실은 네 집에 있는 비누, 이번에 비슷한 향으로 하나 만든 거 있다?”
“그래.”
“설마 이번에도 소파에서 자겠다고 말할 건 아니지?”
그녀의 농담에 실없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네가 원한다면.”
“이런 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알겠어?”
그녀가 툴툴거린다. 하지만 이윽고 나를 따라 씩 미소 짓는다.
그녀는 거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화분을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그런 뒤 내 앞에 쪼르르 다가와 기대에 찬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그러면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주고, 그녀는 발끝을 들어 내 뺨에 입을 맞춘다.
“기다리고 있었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어려운 법이었다. 하물며 그게 배운 적도, 받은 적도 없는 감정이라면.
하지만 이 순간. 나는 그녀의 눈빛에서 다채롭게 빛나는 무지개를 보며, 그것이 설령 평생을 증명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기어이 그러겠노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서 배우게 된 첫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