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21
외전 7. 마지막으로, 사랑을 담아
이른 아침, 길버트는 자기 집 앞에 놓인 편지 한 장을 바라봤다. 악필인 것을 보아 농부가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길버트는 그것을 펼쳐 봤다.
진짜로 이뤄 주겠다는 건가? 길버트가 작게 하품했다. 편지의 가장 아래엔 선물이 놓인 장소가 적혀 있었다.
그걸 어떻게 이뤄 준다는…….
길버트가 그 장소를 보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그는 늘 그림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다. 늘 완성 직전에 멈추곤 해서, 제대로 완성한 그림이라곤 닉시의 의뢰로 받았던 그녀의 집. 그리고 그녀에게 줬던 해바라기 그림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림을 보여 줄 사람이 없으니까.
‘테오, 네가 없다는 걸 실감하니까.’
지금 너는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조용히 묻혔는지, 아니면 뿌려졌는지 알 수 없는, 그가 평생을 돌아가고 싶었던 곳.
그는 낡은 오두막을 정리했다.
집이라고 마련했던 적은 양의 잡동사니들은 전부 닉시의 집으로 옮겨 버렸고, 이제 남은 건 북쪽이 보이는 창문, 낡은 벽난로, 찬장 그리고 캔버스 하나뿐이었다.
그가 마무리할 게 있다며 그녀의 프러포즈를 보류했던 이유였다. 초봄의 시작에 완성된 그림 한 장.
그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림에는 보랏빛 언덕이 있었다. 사선으로 넓게 펼쳐진 보라색 제비꽃밭 언덕. 그 한가운데 웃고 있는 테오. 그의 눈을 닮은 언덕이 담긴 그림.
그는 캔버스 앞에 앉았다.
물감이 마른 뒤, 거친 표면이 손끝에 와 닿았다.
“……이제야 너를 추모하게 됐어, 테오. 너무 늦었지. 미안해.”
그는 동생을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미소 지었다.
길버트는 숨을 몰아쉬며 언덕 위로 달려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 옛날, 왜 난 그곳으로 빨리 뛰어가지 못했던 걸까 후회했던 시간을 되새김질하며, 마치 과거로 되돌아간 것마냥 더 빨리 뜀박질했다.
언덕 위로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그는 언덕 위, 마지막 발을 내디뎠다.
“하아…… 후, 하아…….”
바람이 불었다. 다가오는 봄을 품은 바람에 꽃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그곳엔 끝없이 넓게 펼쳐진 제비꽃밭이 있었다.
“사실 묘비 같은 걸 만들까 했어. 하지만 네 성격이라면 매장하지 말고 뿌려 달라 했겠지. 근데 미안하지만 그건 못 하겠더라. 혹시라도 네가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떠돌아다닐까 봐 걱정됐거든.”
그는 그림 앞에 앉아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림 속 테오는 그의 기억에 새겨진 그대로, 꿈에서 봤던 것처럼 선명하게 웃고 있었다.
“혹시라도 지금 여행 중이라면…… 충분히 재밌게 놀다가 여기로 돌아와 줘. 기다리고 있을게.”
벤자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꿈에 자주 나와 줘.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벤자민은 오두막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길버트는 한참이나 그 넓은 보랏빛 언덕을 바라만 보았다.
일순간 시야가 흐릿해져 와서 그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뒤늦게 떨리는 미소를 지은 길버트가 천천히 그 꽃밭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오랜만이에요, 아버지.”
뺨을 간질이는 바람 속, 어디선가 그리운 웃음소리가 흘러 들어오는 듯했다.
“보고 싶었어요.”
길버트는 그 언덕 한가운데 서서 따뜻한 햇볕을 쬐었다.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가 그리고 바라던 그때의 오후처럼.
안식처가 됐던 오두막을 떠나, 사랑하는 사람의 집으로 향하는 길.
벤자민은 오두막의 문 앞에 서서 잠시 뒤 돌아보았다.
텅 빈 집 안, 그곳엔 그림 한 장만이 이곳의 주인처럼 우두커니 놓여 있었다.
그의 낡은 오두막은 빈집으로 남게 되지만, 이 그림은 늘 이곳에 머물러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어도 늘 이곳을 돌아올 곳으로 생각하며 살게 될 것이다.
보라색의 제비꽃 언덕, 여전히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웃고 있는 동생. 편안했던 시간, 풀냄새 가득한 웃음소리. 그리운 네가 있는 곳.
그는 그것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문을 닫았다.
닉시는 달콤하게 졸인 꽃 위에 설탕을 뿌렸다. 설탕에 코팅돼 반짝이는 보랏빛 꽃. 그의 눈을 닮아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싶은 그런 오묘한 색.
닉시는 그에게 받은 제비꽃들로 한 가지 재밌는 짓을 했다. 바로 몇 포기의 제비꽃다발을 몇 제곱미터의 꽃다발로 만들어 버리는 짓이었다.
난생처음 프러포즈를 받고 꽃다발을 선물받았는데, 요 작고 상냥한 것들을 화분에만 둘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의견이었다. 평생을 기념하고 싶다고, 이왕이면 크고 웅장하게 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겨울 내 꽃을 피워 낸 생명력 넘치는 제비꽃들은 눈을 녹여내고 계절을 알려오는 산들바람처럼 순식간에 들판을 점령했다.
“지금쯤 길버트도 제비꽃밭을 봤을 테고.”
그녀는 마침내 제비꽃설탕절임을 완성했다. 오베르에 오고 싶었던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
닉시는 달콤하게 졸여진 보랏빛 꽃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혓바닥에 꽃을 올려놓고 녹여 먹었다. 그녀의 취향 따라 만들어져서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제비꽃설탕절임을 먹고 싶었던 거였더라.
사탕처럼 집어 먹을 수 있는 절임을 바라봤다. 이걸 어디다 보관할까 고민하던 그녀는 좋은 생각이 떠올라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잘그락.
그녀는 약병으로 쓰던 작은 병에 그녀가 만든 제비꽃설탕절임을 가득 채워 넣었다. 화가도 저도 이제는 필요 없는 것들. 빈병으로 남아 버릴까 싶었던 곳에는 달큰한 설탕 과자들로 채워졌다.
더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동시에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도착한 것이다.
닉시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저가 왜 제비꽃설탕절임을 먹고 싶었던 건지 이유가 떠올랐다. 닉시는 이유를 떠올리고 우스워졌다. 입 안의 제비꽃이 달큰하게 녹아내렸다.
“왔어?”
닉시는 문을 열고 벤자민을 바라봤다. 저가 폴짝 뛰어올라 그의 목에 안기자 그가 익숙한 듯 허리를 끌어안았다. 방 안에 달게 졸여졌던 달콤한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그 이유는 아마, 제비꽃설탕절임이 온갖 달콤한 단어들의 집합체여서였을 것이다. 그녀의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하는 꽃과 설탕. 그리고.
“기분 좋아 보이네, 닉시.”
그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응. 잊고 있었던 게 떠올랐거든.”
그중에서도 수수하기만 한 평범하고 작은 보랏빛 꽃 속에 품고 있는 뜻이 제법, 사랑스러웠으니까.
“뭔데?”
벤자민이 물었다. 닉시는 이른 아침의 햇살처럼 미소 지었다.
“있잖아 벤자민, 너 혹시 제비꽃의 꽃말 알아?”
그녀는 그의 귓가에 그 해답을 속삭였다.
벤자민은 잠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도 그녀가 속삭인 보랏빛 꽃말과 같은 상냥한 말을 그녀에게 속삭였다.
혀에 녹는 설탕만큼이나 달콤한 속삭임. 여느 연인과 다를 바 없는.
다정함과 설렘. 마지막으로, 사랑을 담아.
Dear. 닉시
Dear. 닉시.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잠이 안 온다는 너를 달래다가, 정작 네가 잠들고 난 후엔 내가 잠들지 못하게 되어 버렸어. 이건 아마 내 잠까지 너에게 빼앗겨 버린 탓일 거야.
네가 일어나서 이 편지를 보게 된다면 무척 놀라겠지.
동이 트고 있어, 닉시.
이제 몇 시간 뒤면 우리의 결혼식이야.
넌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 내 앞에 서 있을 거야. 다시 한번 해명하지만 모든 드레스가 다 잘 어울리고 예쁘다고 했던 말은 진심이었어.
유감스럽게도 너의 가장 멋있어야 할 신랑은 아직까지 잠을 못 자고 있어. 일단 조금이라도 자려고 노력 중이지만 이따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어도 이해해 줘.
너한텐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나도 이런 일이 처음이긴 마찬가지라 잠이 안 오거든.
넌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결혼식을 만들어 주자 했지. 그러니까 결혼식에 등장해 보지 않는 건 어떻겠냐고.
있잖아, 닉시.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일생에 한 번 있을 우리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자리를 제 발로 걷어차 버리는.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 되는 거야.
네가 특별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특별하지 못하단 게 아쉬운 건 이해해. 특별한 날을 더 특별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도 알겠어.
하지만 적어도 한 명에겐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될 걸 확신해. 그러니까 나 하나로 만족해 줘. 난 너 하나로 차고 넘치게 족하니까.
만약에 그래도 아쉽다면…….
그래.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바보 같은 짓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신랑과 신부가 없는 결혼식을 만들어 보는 것도 잊지 못할 우스운 경험일 거야.
닉시. 언젠가 네가 내게 말했었지.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될 수 있다면 내가 네 첫사랑이 됐으면 좋겠다고.
그 말을 듣고 오랫동안 생각해 봤어. 네게 내가 처음의 의미라면, 내게 너는 어떤 의미라고 말 할 수 있을까.
그동안은 낯뜨거워서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이런 말을 해도 쉬이 뻔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이니, 짧게나마 말해 줄게.
닉시. 나는 내 끝에 네가 있기를 바라.
내 모든 순간. 잠시 방황하고 흔들리고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이 있다 하더라도 너를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결혼해도 늘 그랬듯 많이 싸우고 토라지겠지. 언제는 서로가 없으면 죽겠다는 듯이 살다가 또 언제는 서로의 존재가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 올지도 몰라.
사랑이라는 이름 외에 더 많은 것을 알아 가게 될 테고, 더는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을 깊이 쌓아 가게 되겠지.
수많은 감정과 시간을 지나, 지금의 기분, 느낌, 사랑이 언젠가는 더는 처음 같지 않구나 하고 느끼게 될 날이 올지도 몰라.
하지만 약속할게. 내가 너의 변치 않는 끝이 되기를.
앞으로의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사건이 찾아오고 어떤 마음으로 시작한 건지 희미하게 될지라도.
나는
내 모든 끝에 있을 너를, 내 생의 마침표로 삼아 살아갈 거야.
내가 네 첫사랑이 되어, 비로소 네가 나의 마지막 사랑이기를.
마지막으로, 닉시.
결혼 축하해.
From.
사랑을 담아.
벤자민 리히터.
完
오베르의 들판 외전
총은 로맨스판타지 소설
전자책 발행 : 2023년 11월 8일
지은이 : 총은
발행인 : 고영토
발행처 : 콘텐츠랩블루-세레니티
투 고 : [email protected]
정 가 : 1,800원
ISBN : 979-11-7162-121-7 05810
Ⓒ 총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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