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3
Chapter 2. 여름. 오두막, 사냥꾼, 마꽃 (2)
* * *
자정이 다가올 시간. 닉시는 작은 배낭 안에 잡동사니들을 챙겨 넣었다.
출출할 때 입에 넣을 작은 열매들부터, 혹시나 나쁜 녀석과 조우하게 됐을 때 모든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지팡이까지.
“왔어?”
회관 앞에는 가벼운 옷차림의 길버트가 서 있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소담한 등불 말고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때마침 정시를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들렸다.
닉시와 길버트는 씨앗&모종 숍을 하는 에드가 씨 집을 처음으로 순찰을 시작했다.
마을은 가로등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는 편이라 빛 하나 없이 고요했다.
게다가 시골 사람들의 하루는 해와 함께해서, 이렇게 해가 뜨지 않는 저녁이면 모두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작은 소음 하나 없었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막 자라기 시작한 잔디 밟는 소리가 사부작거렸다.
“길, 이거 먹을래?”
닉시가 주머니를 뒤져 앵두 열매들을 꺼내 놓았다. 이 밤 산책을 위해 하루 종일 가장 잘 익은 것만 채집한 것들이었다.
“고마워.”
오베르의 새콤달콤한 여름 앵두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길버트는 앵두 다섯 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하나하나 입에 집어넣었다.
“뭘. 많이 땄으니까 많이 먹어도 돼!”
그녀는 자신이 짊어지고 온 배낭을 열어 그에게 보였다. 닉시의 말대로 배낭 안은 시뻘건 앵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건 뭐야?”
길버트는 앵두 사이에 푹 박혀 있는 갈색 길쭉한 것을 가리켰다.
“나쁜 놈을 저세상으로 보내 버리는 마법의 지팡이.”
“리볼버잖…….”
“마법의 지팡이.”
“쿨하네.”
만반의 준비를 한다더니, 이런 것까지 준비하다니.
길버트는 절대로 그녀가 그 지팡이를 꺼내는 일이 없게 만들어야겠다 다짐했다.
양쪽에 돌담이 있는 좁은 골목길. 장미가 절정을 이룬 녹색 지붕 집.
평소에 익숙한 길로만 다녀서 몰랐던 풍경들.
닉시는 낮은 창고 지붕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는 고양이에게 인사했다.
길버트는 이런 깜짝 밤 산책 말고 다른 이벤트는 없는지 묻는 닉시에게 몇 가지 솔깃할 법한 이벤트를 알려줬다.
“겨울엔 캐롤링이라는 걸 하는데.”
“캐롤링?”
“응. 이브에서 크리스마스로 넘어가는 자정…… 그러니까 딱 지금 같은 시간에 마을 사람들의 집 앞에 선물을 두고 오는 행사야. 캐롤을 부르면서 선물을 두고 온다고 캐롤링이라고 부르지.”
“나 왔다고 소리치는 산타클로스네?”
“그런 셈이지.”
“이번 연도에도 할 거야?”
“응. 지금 순찰하는 길 잘 기억해 둬. 이번 연도에 선물 배달해야 하는 루트니까.”
“뭐어? 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래!”
길버트가 달려가는 닉시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더 없어?”
“뭐가?”
“마을 행사! 이왕이면 지금 같은 여름에 하는 걸로. 그래야 이번 여름을 그거 하나 보고 열심히 살아갈 거 아냐.”
“으음.”
모두가 잠든 적적한 밤. 때 아닌 이벤트 공지에 닉시가 눈을 빛냈다.
“초여름 장마가 끝나고 나면 바다에 흙이 쌓이거든? 그걸 없애는 행사가 있…….”
“노동 말고.”
“나름 행사인데. 그게 끝나면 해변에서 바자회를 여니까.”
“음…… 바다 근처는 좀…….”
“물론 바닷가 근처 들판에서도 하지.”
“너무 신난다! 장마는 언제 와?!”
장마가 싫다 했던 건 깜빡 잊은 건지, 닉시는 선물 개봉을 기다리는 꼬마처럼 씩씩하게 말했다.
“그 전에 장마 준비부터 해야지. 애써 심어놓은 베리들이 다 물에 떠내려갈 수도 있어.”
그의 말에 초보 농부는 숙연해졌다.
딱 봐도 아무 준비 안 하다가 풍비박산하게 되는 사람의 숙연함이었다.
‘잠깐.’
순간 마을 이장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사람, 설마 했는데 진짜 장마 준비 안 한 건 아니겠지?
“……잘 들어 닉시.”
이러다간 장마에 베리들이 떠내려가는 것뿐 아니라, 농사를 망쳐 버린 농부의 눈물과 애통함도 같이 떠내려갈 것만 같았다.
길버트는 닉시가 엄숙해진 틈을 타 그녀에게 장마철 대비 밭에 물꼬 트는 법을 연설했다.
“알겠지? 꼭 예상 물 높이보다 조금 높게 흙을 쌓는 거야.”
“어휴. 그냥 공중정원을 만드는 게 낫겠네.”
“이론상으론 그렇, 잠깐 닉시. 미리 경고하는데 우리 마을을 공중에 띄운다거나, 콩나무 위에 사는 거인의 집처럼 만드는 건 절대 안 돼.”
오베르에서 본 비상식적인 건 콩나무 하나뿐으로 족하다.
그랬기에 길버트는 닉시의 콧잔등 간지러운 표정을 보고 엄중히 경고했다.
“옛 썰. 롸져.” 닉시가 경례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장마구나.’
날이 좋고, 나쁜 건 불규칙해도 장마철만큼은 기가 막히게 정확했다.
‘준비해야 할 게 많겠네.’ 길버트는 생각했다.
뭘 해도 잠 안 오고 더운 여름이 되면 그레이스가가 늘 하던 게 있었다.
“……제비꽃밭으로 소풍을 가거나, 밀밭 중앙에서 작은 천막을 치고 캠핑을 했었는데.”
제비꽃밭 소풍은 말만 들었지 가 본 건 딱 한 번뿐이고, 그마저도 지금은 꽃밭이 사라졌으니 소풍은 글러먹은 지 오래다.
하지만 밀밭은 아직도 건재하고 여름날의 캠핑은 제법 괜찮은 생각이었다.
살짝 솟아 있어서 바람이 많이 부는 장소.
자다가 천막이 날아가 버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웃었던 언젠가의 여름.
“캠피잉?”
옆에서 끝이 늘어지는 의문사가 흘러나왔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들뜬 목소리가 웃겨, 길버트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할까?”
“뭘 물어보고 그래. 당장 해야지.”
“싫을 수도 있잖아.”
“길이라면 뭘 해도 싫지 않을걸.”
그녀의 찡긋하는 윙크가 오늘따라 새콤했다.
“……그럼 아침에 고구마 밭에 비료나 뿌리러 가자. 싫지 않지?”
“아니 노동 말고라니까. 취소야 취소.”
‘……불빛을 너무 오래 봤나.’
이상하게 시야에 노란빛이 어른거렸다. 들고 있던 등불 빛이 눈을 감아도 잔상을 만들어 내는 건지 뭔지.
길버트가 노란 시야를 지우기 위해 눈을 비볐다.
노력이 무색하게 노란색 자체인 이웃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졸려?”
“……요란스럽기로 마을 제일가는 이웃과 함께 있는데, 그럴 리가.”
“근데 눈이 빨간데.”
길버트는 제게 다가오는 닉시의 얼굴을 턱 막았다.
워낙 반사적인 행동이어서 길버트 본인도 얼굴을 틀어막곤 어리벙벙했다.
“너무 그렇게 가까이 오지 마.”
“왜? 나한테 냄새나?”
“어……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럴……지도?”
길버트는 조심조심 손을 치웠다.
나한테 냄새라니……! 닉시는 본인에게 냄새가 난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었다.
그 우스운 표정에 방금까지 노란빛이었던 시야가 삽시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크흠. 몇 번 헛기침한 길버트가 앞장섰다.
“빨리 가자 닉시. 이러다가 날 밝겠어.”
“진짜야? 끔찍해? 같이 못 걸을 정도로?”
그의 뒤를 닉시가 헐레벌떡 뛰어갔다.
* * *
닉시는 장마 대비 물길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예쁘게 구역을 나눈 밭 사이로 물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고, 빗물에 모종들의 목이 꺾이지 않게 지지대를 꽂아 준다.
그렇게 한참 중노동을 시작하던 때, 근처에서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씨앗&모종 숍의 에드가가 큰 수레를 몰고 오는 소리였다.
‘에드가 씨가 우리 집까진 웬일이지? 뭐 주문했던가. 고구마랑 감자 모종은 이미 다 심었는데. 그럼 남은 건…….’
해바라기?
방금까지만 해도 계속되는 중노동에 이를 악물고 있던 닉시가 환히 웃으며 호미를 쥔 채 뛰어갔다.
초봄에 주문했던 해바라기 모종들이 도착한 것이다.
“닉시. 주문한 해바라기들이다.”
“에드가 씨!”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모종들이 수레 가득 쌓여 있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이파리를 두 개씩 달고 있는 아기자기한 모습들.
아직은 덜 자라 겉으로 보기엔 수수한 콩잎과 다를 바 없는 것들이지만, 지금 심어서 여름내 햇볕과 물을 마시고 쑥쑥 자란다면 머잖아 지금의 닉시보다 훌쩍 커 버릴 것들이었다.
“집 앞에 내려 주면 되겠냐?”
“네! 야호! 에드가 씨 감사해요!”
신난 닉시가 그를 따라 모종을 바닥에 내려놨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해바라기로 가득했다. 언젠가, 제 마당 앞과 언덕을 올라오는 길에 끝없이 피어 있을 노란 풍경.
장마니, 물길을 놓니 마니 하는 건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재미없는 건 바로바로 제거해 버리는 그녀의 낙천적인 습관 때문이었다.
모종을 전부 그녀의 마당으로 옮긴 뒤, 에드가 씨에게 앵두 주스를 쥐여 준 닉시는 신나는 얼굴로 마당 한가운데 섰다.
그리고 당당하게 외쳤다.
“화가 집에서 삽 가져오는 거 까먹었다.”
해바라기들을 심기 위해 필요한 제1장비. 그 중요한 걸 놓고 온 것이다.
그 징한 강낭콩 구덩이를 메운다고 가져갔다가 말이다!
마당 울타리 앞은 미리 땅을 뒤엎어 놓긴 했지만 문제는 자신의 집 앞, 언덕을 올라오는 길이었다.
저긴 그냥 삽질해도 반나절 이상이 걸릴 넓이인데 그걸 맨손으로 저길 파헤친다?
참신한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화가라면 지금쯤이 아마…….’
닉시가 고갤 쭉 빼고 내밀어 언덕 아래 넓은 밀밭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막 들판 한가운데 도착한 화가가 자리를 펴고 앉는 게 보였다.
그녀는 배에 힘을 주고 있는 힘껏 소리쳤다.
“화가아아아! 너희 집에 삽 두고 갔는데에에! 집 좀 들러도 될까아?”
들판 아래 화가가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흠칫하는 게 보였다.
그가 이쪽을 보자 닉시는 두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는 지그시 제 쪽을 바라보다 고갤 캔버스 쪽으로 돌렸다. 명백한 무시였다.
그러자 닉시는 전신 거울을 들고 와 그에게 흔들었다. 누굴 실명시킬 속셈인가. 그건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화가가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는 게 보였다. 바닥에 뭐가 있는지 허릴 숙인 그가 일어났다. 그는 한 손에 뭔갈 쥐고 있었다.
그녀의 삽이었다.
닉시가 집에 들이닥치는 일을 최소화하고자, 바깥으로 나온 김에 들고 나왔던 것이다.
‘역시 예술가는 섬세해!’
닉시는 기쁜 마음에 헐레벌떡 언덕을 내려와 화가에게 삽을 받았다.
* * *
딱 세 시간이 지나자 어김없이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벤자민은 버티지 않고 익숙하게 자리를 정리했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는 아까 노란 머리 이웃이 삽을 받아 갈 때 했던 말을 떠올리고 멈칫했다.
‘삽 가져다줘서 고마워! 이따 그림 다 그리면 우리 집에 들를래? 오늘 양배추 수확할 거거든.’
선택지는 두 개였다. 첫째, 그냥 집 간다. 둘째, 양배추를 얻고 집 간다.
평소 그 같았으면 망설일 필요도 없이 ‘그냥 집 간다.’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변수가 하나 있었다면, 그가 알거지라는 것.
그림 그리기 시작하면서 번역 일을 줄였기에 찬장에 식료품이라곤 계란뿐이었다.
그런 때니 양배추 한쪽도 아쉬운 상황.
결국 벤자민은 그녀의 집에 들렀다 가기로 결정했다.
나름대로 선행의 보상을 받으러 가는 건데 묘하게 자존심 상하는 게 이상하다 생각하며.
“왔어?”
그림 그릴 때부터 봤었지만, 뭘 그리 심는 건지 마당 밖에서 꼼지락거리던 그녀였다.
마당의 울타리 따라 푸릇한 모종들이 쪼르르 심겨 있었다. 언젠가 벤자민이 튤립을 심으면 볼 만하겠다 싶었던 그 자리였다.
“이게 뭔지 궁금하지?”
화가가 갓 심은 모종들을 빤히 바라보자니 닉시가 말했다.
“근데 뭔진 안 가르쳐 줄 거야.”
닉시가 얄밉게 말했다.
왜냐면 화가는 해바라기를 싫어하니까!
알면 화가가 지금 당장이라도 삽을 들고 모종들을 도로 뽑아 버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제 노동을 허무하게 날릴 순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벤자민은 별 관심 없다가 그녀의 안 가르쳐 줄 거라는 말에 뒤늦게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서 괜히 울타리에 나란히 심겨 있는 모종을 다시 한 번 응시했다.
닉시는 헤헤 웃으며 그를 집 안으로 초대했다.
벤자민은 그녀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전에 약을 먹고 기절해서 잠든 적도 있는 집이지만 여전히 낯선 곳이었다.
닉시는 벤자민을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에 앉혀 둔 뒤 작물을 보관하는 창고로 쪼르르 달려갔다.
남의 집에 남겨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어색하게 집 안을 익히려 노력하는 것뿐.
그는 천천히 집 안을 관찰했다.
닉시의 집은 좋게 말하면 가구 하나하나가 개성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지저분했다.
엔틱함과 세련됨이 일관성 없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꼴.
입을 다물고 있으면 도도한 모더니즘 시대를 표방할 듯했지만, 입만 열면 혁명인 집주인과 어울리는 집이었다.
“자. 처음 키운 것치고 잘 컸지? 이름은 티미야.”
닉시는 소담한 크기의 양배추를 내려놨다.
확실히 집에서 키운 티가 나는 귀여운 사이즈였다. 주먹보다 조금 클까.
그는 한 손으로 양배추를 들어 올렸다.
왠지 모르겠지만…….
“양배추가 집채만 할 거라 생각했는데.”
강낭콩의 악몽이 남아 있는 그가 중얼거렸다.
왠지 모르게 이 이웃이 키운 거라 하니 평범함을 넘어선 모양새일 거라 여기고 있었던 거다.
“그거 편견이야. 나라고 늘 이상한 것만 만드는 건 아니라고…….”
“이상하단 자각은 있었군.”
“많이 들었으니까. 근데 사람들은 희한하게 내가 평범한 걸 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하더라? 왜 그런지 알아?”
닉시는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손님맞이용 캐모마일 티에서 은은한 꽃향기가 올라왔다.
“여기 올 때도 다들 놀랐지. 아, 그때도 그랬어. 사관학교를 간다니까 사람들이 다 놀라더라구.”
사관학교? 참. 그랬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농부는 군인이었지. 게르강 전투. 23사단.
“……내가 볼 땐 그건 평범해서가 아닐 것 같은데.”
“그럼?”
“…….”
벤자민은 찻잔에 각설탕을 넣는 닉시를 바라봤다.
연한 속눈썹과 그 속의 루비같이 붉은 눈.
입을 다물고 웃고 있으면 퍽 여린 느낌을 주는 무르고 약해 보이는 인상.
닉시는 왜 자신을 그렇게 빤히 바라보는지 이유를 몰라 그냥 눈만 끔뻑였다.
눈 아래로 시선을 옮긴 그가 닉시의 뺨에 묻어 있는 캐모마일 꽃잎을 발견했다.
‘어쩐지 차에서 풋내가 난다 했는데, 직접 말린 거였나.’
그런 취미도 있었군. 꽃 같은 걸 키우고, 말리고…….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쓸었다.
미적지근했다.
그는 그제야 아, 하고 정신 차렸다.
“화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어오는 목소리.
벤자민은 작게 인상을 찌푸린 뒤 제 손으로 옮겨온 꽃잎을 탈탈 털어냈다.
그는 어쩌다 이 이웃이 꽃차를 만들 생각을 했는지 의문스러울 뿐이었다. 꽃잎을 떼어낼 생각까진 전혀 없었지만.
왜냐. 그건 눈앞의 이 사람이 할법한 해괴망측한 일과는 달리 수수하고, 평범하고…… 제법 여리여리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그냥…….
“안 어울려서 그래. 너랑.”
그러니 사람들이 놀랄 만도 했다. 그녀와 군인.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그렇게 여긴 그가 자리를 피하고자 일어나려 할 때였다.
“뭔데 화가. 더위 먹었어?”
그런 조여진 긴장감 따위를 알 리 만무한 닉시가 분위기를 초 쳐놨다.
그녀의 눈엔 갑자기 맹해진 화가가 제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 주곤 또 자기 혼자 열 받아서 얼굴을 구긴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의 머릿속이 궁금할 수밖에.
화가는 하. 하고 짧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 그래, 이런 녀석이었지 참. 그는 제 머리를 헝클였다.
“궁금해?”
“응.”
“유감이네. 뭔지 안 가르쳐 줄 건데.”
양배추도 받았겠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저를 따라 하지 마라며 우우 야유했다.
“갈 거야?”
“그래.”
“그래 잘 가아.”
“……이봐.”
그가 양배추를 들고 그녀의 현관 앞에 도착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닉시는 형식적인 배웅을 위해 현관문에 삐딱하게 기댔다.
“왜요, 따라쟁이 화가 씨.”
그는 인사 대신 양배추 든 손을 흔들었다.
“고맙다고, 이거.”
“그래 그러시겠, 어? 뭐라고?”
“다음번엔 좀 더 잘 키워 봐. 괴물만 한 크기로. 그게 너랑 더 잘 어울리니까.”
“잠깐만! 내가 뭐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방금 뭐라 했냐구!”
드디어! 길고양이에게 보은 받는 때가 왔다.
닉시가 상기된 얼굴로 벤자민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려 했는데, 이 이웃은 눈치 없이 또 판을 깔았다.
“뭐, 고…….”
“고?”
흡사 칭찬 스티커 받은 꼬맹이 같은 얼굴에 벤자민이 끙 소릴 냈다.
“고…… 그만 좀 다가와.”
그는 부담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가볍게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는 바람에 그의 소매가 빠져나갔고, 닉시도 뒤로 톡 밀려났다.
그때, 밀려난 닉시의 발뒤꿈치에 위치 선정을 잘못해 비죽 튀어나온 현관 카펫이 닿았다.
“어라?”
무방비한 상태에서 몸의 중심이 뒤로 넘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
그녀는 몸이 뒤로 휙 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심을 잡지 못해 허우적대던 그녀의 손이 벤자민의 멱살을 잡았고,
“……?”
불시에 멱살잡이 당한 벤자민의 상체가 훅 고꾸라졌다.
―쿠당탕탕!
둘은 큰 소릴 내며 넘어졌다.
“…….”
“…….”
벤자민의 밝은 베이지색 머리칼이 닉시의 이마를 간질였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좁은 거리. 약간은 당황한 듯 짧게 들이켜는 숨소리.
드물게 놀라 동그래진 보랏빛 눈동자에 저가 비쳤다.
그와 그녀 옆으로 양배추가 데구르르 굴러갔다.
다행스럽게도 서로의 이목구비가 스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닉시는 제 옆을 지탱하고 있는 벤자민의 팔을 보다 툭 말을 내뱉었다.
“나한테 고마워?”
“……방금 전까진 그랬지.”
벤자민은 자신의 무게를 잘 버텨준 자신의 왼손에 조용히 경의를 표했다.
그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잡고 일어나라는 뜻을 담아 닉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웃은 여전히 현관 바닥에 누워 있었다.
넘어져서 뇌진탕이라도 온 건가.
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앞에 흔들었다.
“괜찮…….”
“…….”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주륵 흘렸다.
괜찮냐 물어보려 했던 그의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였다.
닉시는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기 시작했다.
‘왜?’
그는 넘어진 순간보다 놀라 길게 침묵했다.
난감하게도 그는 누군가를 달래는 법을 몰랐다. 그랬기에 그는 그저 어정쩡하게 일어나다 만 자세 그대로 바짝 굳어 버렸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다가 조금 시간 지난 뒤에야 몸을 부들부들 떨며 움직였다.
“하…….”
“…….”
“하…… 씨…….”
“……괜찮.”
“내 꼬리뼈…….”
이번에도 괜찮냐고 물어보려 했던 그는 입을 다물었다.
꼬리뼈?
그의 머리 위로 수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닉시는 파들파들 떨며 허리를 짚었다. 여전히 눈에선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나오고 있었다.
닉시는 골병든 오리처럼 피들피들 현관 카펫을 걷었다.
그곳엔 엄지만큼 툭 튀어나온 쇠장식이 있었다.
“하…… 씨…… 미친…… 나 여기에 꼬리뼈 박은 것 같아…… 내 꼬리뼈…….”
‘전혀 괜찮지 않겠군.’
절로 으, 하고 인상이 찌푸려졌다. 화가는 빌빌거리는 닉시에게 깊은 유감을 표했다.
“화가 내 꼬리뼈 좀…… 봐, 봐 줘. 부러진 것 같은데…….”
닉시가 골골거리며 화가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걸 내가 왜 봐야 하지?”
“나도 너 웃통 깐 거 봤잖아 괘, 괜찮……아.”
“…….”
그녀가 괜찮대도 그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애초에 자의와 타의는 엄연히 다를뿐더러, 상체와 하체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이지 않던가.
게다가 저는 남자고, 그녀는……. 일단 생물학적으로 여자고.
아무튼 꼬리뼈 확인까진 어떻게 하지 못한 그가 어쩔 수 없이 닉시 옆에 쭈그려 앉았다. 닉시의 고통이 잦아질 때까지 옆을 지키려는 셈이었다.
시간이 지나, 절로 줄줄 흐르던 눈물이 멎고 닉시의 애매한 부분엔 욱신거리는 멍만 남았다.
고통이 끝나자 닉시는 현관 카펫 아래 숨겨져 있던 쇠 장식을 박살 내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거 때문에 내 엉덩이가 박살 날 뻔했다고! 두 쪽에서 세 쪽이 될 뻔했어!”
닉시는 삽으로 쇠장식의 움푹 팬 부분을 콱 내리쳤다.
그러자 일순간 나무 바닥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닉시가 씩씩대며 쇠 장식을 잡아당겼다.
못이 뽑히듯 쏙 빠질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쇠 장식은 바닥에 박혀 덜컹거렸고, 쇠장식과 연결된 나무 바닥이 살짝 갈라진 것처럼 보이더니 얇은 틈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
“어라?”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바닥이 열렸다. 집주인도 몰랐던 지하 창고로 향하는 문이었다.
그녀는 화가를 데리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바닥에 이런 공간이 있는 줄 몰랐네.”
서늘하고 흙냄새 나는 공간. 삐걱이는 나무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그렇게 더듬더듬 땅바닥에 도착했고 닉시는 들고 있는 등불을 천장에 걸린 고리에 걸었다.
딱 뿌리채소나 와인 창고로 쓰면 적합할 크기의 지하실이었다.
뜻밖의 보물이 있는 장소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에, 닉시는 콧노래를 부르며 지하실을 빙빙 둘러봤다.
원래 뭐 하는 곳인진 모르겠다.
낡은 선반엔 농사에 으레 쓸 법한 날붙이들이, 책상엔 종잇조각들이, 그 옆엔 목발로 보이는 낡은 지팡이가 있었다.
전 집주인의 것인가? 닉시가 목발을 휘휘 살펴봤다.
목발 아래 구석에 뭔가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에 손을 뻗었다.
그중 벤자민은 가장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산탄총이었다.
낯이 많이 익었다. 특히 총열과 방아쇠가 두 개인 부분이.
그는 총의 나뭇결 부분을 잡고 총을 이리저리 확인했다.
M30. 그가 군에 있을 때 지급받았던 것이었다.
모델이 조금 개조된 감이 있어 확신하기 어려웠는데, 아무래도 사냥에 적합하게끔 개조된 것으로 보였다.
개머리판 구석엔 총 주인의 것인지 거친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곳엔 이 총이 유행이었던 건가.’
벤자민은 옛날 일을 떠올렸다. 오래 방치돼서 낡은 감이 있었지만 총의 상태는 양호했다.
이걸 반갑다고 해야 하는 건지. 그는 탄창을 열어 확인했다.
‘실탄이 장전돼 있군.’
그는 본능적으로 탄창을 비웠다. 의도하지 않아도 손에 익은 습관이었다.
잘그락 빼낸 총알을 손에 굴리다 서랍에 넣었다.
“이야. 우리 집 바닥에 되게 흉흉한 게 있었네?”
닉시는 그가 들고 있는 산탄총을 보며 말했다.
그것 말고도 음산한 건 몇 가지 더 있었다.
지저분한 게 묻은 지도. 날 무딘 나이프와 돼지고기를 걸어놓을 때 쓸 법한 굵은 갈고리. 구석에 곰팡이가 피어 있는 비스킷.
정말, 혹시라도 가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집 말이야…… 혹시 이상한 사람이 살고 있었던 곳 아닐까?”
“이상한 사람이라 함은?”
벤자민이 닉시를 바라봤다. 눈앞의 본인도 이상한데, 이상한 사람이 말하는 이상함은 얼마나 제정신 아닐지.
벤자민의 물음에 닉시는 벌레 씹은 얼굴로 툭 내뱉었다.
“왜, 그런 영화 있잖아. 겉으론 인심 좋은 척하는 이웃이, 이런 지하실에 자신의 은밀한 취미를 숨겨 놓고 밤마다 이상한 짓을 벌이는 B급 영화!”
굳이 B급 영화가 아니더라도 그런 제정신 아닌 등장인물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스스로를 되돌아보면 될 걸, 그녀는 굳이 차원이 다른 곳을 헤매고 있었다.
“딱딱한 비스킷을 봐봐. 이 집의 주인이 누군가를 가둬놓고 비스킷만 준 게 틀림없어. 물도 없이. 또 이것 봐! 이거 꼭 뭔가를 묶어놓을 때 쓸 법한 고리잖아! 그, 그 뭐지. 사슬 같은, 있잖아 아무튼!”
“이런 거 말인가?”
벤자민이 두 번째 서랍에서 철사 뭉치를 찾아냈다.
닉시가 퀴즈쇼 사회자처럼 정답을 외쳤다.
“그래! 바로 그거처럼!”
어라? 일순간 그가 손에 쥐고 있는 낯익은 것을 보고 닉시는 눈을 깜빡였다.
“이봐 화가. 그거 줘 봐.”
반강제적으로 철사 뭉치를 가져간 닉시가 그것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벤자민은 서랍 안에서 쪽지 같은 걸 하나 발견했다. 부스럭, 종이를 펼쳤다.
이상한 취향이라. 시끄러운 이웃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냥, 그가 보기엔 그저…….
“사냥을 좋아하던 사람 같은데.”
산탄총이나, 무딘 나이프나, 갈고리나, 올무나.
이 지하실의 주인은 그저 사냥을 즐겨한 것 같은 모양새였을 뿐이다.
“사냥?”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묘한 침묵이 흐르고, 둘은 의구심의 실마리를 붙잡았다.
“사냥꾼이 있었다는 건 확실하네. 그것도 은밀하게 있었어.”
그래. 이건 늙은 비글에 허무하게 묻힐 사건이 아니었단 말이다.
이 올무. 이 방식. 마을 곳곳에 있던 것들과 다 같은 수작업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벤자민은 바닥에 버려진 비스킷을 바라봤다.
지하실의 습도는 낮은 편이었다. 곰팡이가 한번 피었으면 아주 천천히 잠식할 만한 환경.
하지만 미생물은 보기보다 아주 끈질겨서, 이만한 크기의 비스킷이라면 반년 안에 썩게 만들 수 있었다.
“너. 이 집에 언제 이사 왔었지?”
“나? 초봄. 그러니까 한 3개월 전?”
“그전까지 이 집은 비어 있었다 했던 거 같은데.”
“응. 집주인이 3년 전에 이사 가서 그때까진 쭉 비어 있었댔어. 길버트나 마을 사람들도 그랬고.”
근데 이 비스킷의 곰팡이는 피어난 지 오래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 말인즉슨.
“네 말대로…… 이상한 누가 여기 조용히 살았었단 말이 되겠군.”
그가 중얼거렸다.
“으아아악!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나 혼자 잠 못 잔다고!”
닉시는 사색이 되어 화가를 향해 삿대질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벤자민은 서랍 안을 헤집었다.
문득 그녀는 길버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냥꾼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가 내키지 않는 듯 중얼거렸던 말.
[길. 혹시 이 마을에 사냥꾼이 있어?] [……지금은 없어.]“잠깐만. 길버트는 사냥꾼이 있었던 게 과거형인 것처럼 말했는데?”
“그럼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했나 보지.”
“야, 야아아…….”
닉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찔끔 흘러나온 것 같기도 했다.
“난 더 이상 여기 못 있어. 나갈래. 오늘은 마을 이장님한테 말하고 집을 바꿔 달라 하든지 노숙을 하든지 해야지…….”
닉시가 비틀거리며 계단 위로 올라갔다.
벤자민은 서랍 안에서 총알을 해체했던 산탄총을 다시 집어 들었다.
“…….”
대체 뭘까. 기묘한 의구심. 위화감. 그것이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그런 찝찝한 감정은 이 총을 봤을 때부터 시작됐다.
한참 동안 총의 까만 쇠 부분을 바라보던 그가 총구를 제 쪽으로 가져다 댔다.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과거가 있었다. 장마…… 비 오는 날…… 그리고.
―쿠당탕탕!
나무 계단이 박살 나는 것 같은 소리에 벤자민이 흠칫 놀라 뒤 돌았다.
그곳엔 진짜 유령이라도 보고 온 건지 파리한 안색의 닉시가 서 있었다.
“화가.”
“뭐지?”
“문 잠겼던데.”
“뭐……?”
―덜컹덜컹.
그녀의 말대로 문은 단단히 고정돼 열리지 않았다.
열 때부터 빡빡하다 싶었는데, 어떻게 돼 먹은 건지 단단히 고정되어 잠긴 것이다.
“어, 어떡하지?”
“열어야지.”
“어떻게?”
벤자민은 들고 있던 총을 그녀에게 보여 줬다. 문짝을 날려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닉시가 그건 절대 안 된다고 극구 반대했다.
“우리 집 현관이 박살 날 거라고! 아직 3개월밖에 못 살았단 말이야!”
“그럼 굶어 죽든지.”
벤자민이 총을 내려놨다.
닉시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삐쩍 곯은 비스킷을 바라봤다.
저걸 먹으면 과연 식중독으로 죽을까, 아니면 그래도 수명이 하루는 연장될까.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이, 일단 진정해 보자.”
“……진정은 너만 하면 돼.”
문을 두드려 보기도 하고 달래도 보고 화도 내 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닉시는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기 위해 지하실에 있는 서랍과 찬장을 뒤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찾은 건 코털 정리 집게와 사탕 껍데기 같은 자질구레한 것뿐.
지쳐버린 닉시는 지하실 계단에 털썩 걸터앉았다. 벤자민은 테이블 의자에 앉아 손 아래 총알을 굴렸다.
“한 이틀만 참아 보지 뭐. 내가 안 보이면 마을 이장님이랑 마을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와 줄 테니까.”
벤자민은 여기 온 지 한 계절밖에 지나지 않은 이웃의 영향력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아마 자기가 여기 혼자 갇혔으면 꼼짝없이 굶어 죽었을 텐데.
툭 튀어나온 모서리처럼 생겼으면서 그 누구보다 마을에 잘 녹아 있는, 신기한 여자.
“윽…….”
―달그락.
벤자민은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둔해지는 감각에 다른 손으로 제 손을 감싸 쥐었다.
늘 있는 환상통이 시작된 것이다.
―잘그락, 잘그락.
덕분에 손에 들고 있던 총알들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괜찮아?”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닉시는 그의 손 상태를 살폈다.
자다가 다리에 쥐가 났을 때처럼 그의 손은 뻣뻣한 통나무 같이 굳어 있었다.
손등에 깊게 튀어나온 혈관에 손을 올리려 하자 그가 머리맡에서 조용히 “건드리지 마.” 으르렁거렸다.
“그래그래. 원래 아플 땐 예민해지는 법이니까.”
닉시는 개를 쓰다듬듯 벤자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닉시가 바닥에 떨어진 세 개의 총알을 탑처럼 쌓았을 때야 통증이 가라앉았다.
“후…….”
앓는 소리 하나 없이 몸을 웅크리고만 있던 화가가 벽에 기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아프긴 했던 건지 그의 얼굴엔 작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런 손으로 여태껏 어떻게 그림 그렸대.”
“……글쎄.”
“이제 괜찮아진 거야?”
“몇 분 동안은 괜찮겠지.”
“왜 몇 분 동안인데?”
“진통제를 안 먹었으니까.”
끝이 갈라지는 목소리에 그가 작게 헛기침했다.
그는 비교적 멀쩡한 왼손으로 잘게 경련하는 오른손을 꾹꾹 눌렀다.
닉시는 그의 앞에 다가와 쭈그려 앉았다.
확실히 아직까지 통증이 완벽히 가신 건 아닌지, 그의 손은 굳어 있었다.
이런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역시 그도 저 못지않은 독종이었다.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한 거야?”
“……열다섯.”
“좋아서 시작한 거야? 참고로 내가 화학을 연구하게 된 건 내가 천재였기 때문이야! 세상이 나를 원했거든.”
‘좋아서라……’
뭐든 처음이라는 것은 의미를 가지기 마련이다.
그에게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처음이 있었다.
그건 아마 오래전. 막 철들기 시작했던 무렵. 그가 그의 동생과 함께 열심히 살아가던 때.
“동생한테 바깥 풍경을 보여 주려고.”
“바깥 풍경?”
“호프 대성당 앞에서 본 저녁노을이 보고 싶다 해서.”
“그래? 그럼 동생은…….”
아, 죽었다고 했지. 닉시가 중얼거렸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전쟁 때문이야?”
“뭐가.”
“동생이 죽은 거.”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 손의 움직임이 멈춰 있었다.
결국 그녀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어설프게 붕 뜨게 된 침묵 속. 그가 입을 열었다.
“넌 가족은 없었나?”
“응 없어. 우리 부모님은 경제 대공황 때 돌아가셨거든.”
“그렇군.”
“너는?”
그녀도 기댈 곳을 찾기 위해 조금씩 벽으로 붙었다.
차가운 돌벽에 기대앉은 벤자민과 바닥에 주저앉은 닉시는 어느새 나란히 붙어 있게 되었다.
“……비슷해.”
대부호가 아니었다면 당시 상황은 다 비슷비슷했을 테니까.
“너도 그럼 지켜야 할 게 없겠구나?”
“지켜야 할 거?”
“응. 뭐, 소중한 사람이라고 해 둘까?”
닉시가 본인이 말하고도 민망한 건지 파핫 웃었다.
“내가 파리를 떠난 건, 거기엔 더 이상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이 없어서였거든.”
뭐 굳이 따지자면 제키나 필립 같은 친구들이 아직 남아 있긴 했다.
하지만 이미 전쟁도 끝난 판에 걔들과 계속 함께 있어 봐야 뭘 하겠는가. 결국 옛날엔 어쨌니, 저쨌니 하는 다 지나간 이야기밖에 못 할 뿐이지.
과거에 얽매인 사람들끼리 뭉쳐 봐야 좋을 거 하나 없었다.
“그래서 난 내 삶의 다른 의미를 찾으려고 왔어. 군인으로서의 삶 말고. 다른 재밌는 삶.”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다 느낄 수 있는 즐거운 삶.
오베르로 왔을 때는 모든 것들이 처음 하는 것투성이여서 퍽 흥미로웠다.
맨날 뒷산의 치커리들을 뜯어 오고, 밭에 물을 주고, 마을 사람들과 떠든 뒤에, 점심을 나눠 먹고.
마당을 뒤엎고, 밭을 갈고. 제 예상대로 자라 주지 않는 자식 같은 농작물들과 씨름하고. 울타리를 만든 뒤에 감자 고구마 밭엔 이름도 붙여 주었다. 포포라고.
어젠 수레에 한가득 싣고 왔던 해바라기를 전부 심었었지. 좀이 쑤셔서 끙끙거리며 자긴 했지만 제법 즐거운 경험이었다.
“화가 넌 어때. 이곳에 온 이유가 따로 있어?”
그녀가 끝이 간지럽게 물어봤다.
그는 왠지 모르게 그녀의 질문이 닿은 귓바퀴가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난.”
괜히 입술이 마르는 느낌이었다.
낯설게 따뜻한 초여름의 온도.
나란히 붙어 있게 돼서 온기가 뭉칠 법도 했건만, 지하실의 벽에서 오는 은근한 냉기가 어색함에서 밀려드는 민망한 열기를 식혀 주었다.
“난 그냥 죽을 자리를 찾았던 것뿐이야.”
내 마지막이 될 곳. 그가 혼잣말하듯 대꾸했다.
전쟁에서 도망친 패잔병.
한여름에 일어난 게르강 전투에서 독일군이 대패하고, 벤자민은 다친 몸을 질질 끌며 도망쳤다가 어떤 산에서 쓰러졌다.
거기가 오베르였을 뿐이었다.
이 와중에 닉시는 그의 앞뒤가 모조리 잘린 애매한 말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었다.
‘이거 위로나 조언을 해 줘야 하는 타이밍 맞지? 우리의 우정이 얼마만큼인지 알 수 있는 시험?’
감성적인 언어 파악엔 약해도 체계적인 언어 정리엔 능숙한 그녀는 빠르게 정황 파악을 완료했다.
요컨대 화가의 말은 이러한 말이 되겠다.
‘난 죽으려고 이곳에 기어들어 왔다. 죽으려고 아주 환장을 했지. 그런데 아직까지 나를 죽이지 않다니, 이런 미련한 프랑스 놈들.’
상황 파악 완료.
그럼 이때 ‘친구’로서 해 줄 말은?
“그렇게 죽고 싶으면 그냥 죽으면 되잖아?”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피슉. 닉시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제 머리에 쏘는 시늉을 했다.
“앗 잠깐. 이거 설마 우리가 서로의 죽음까지 논할 수 있게 된 매우 친한 친구가 됐단 증거?”
닉시는 부끄러운 소녀를 흉내 내는 것처럼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
그 얄미운 호들갑에 벤자민의 눈이 차게 식었다.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이미 들었는데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해.”
“농담이라고 쳐.”
“넌 농담을 죽겠다고 치는 거야? 독일식 유머인가, 재미없네.”
그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인생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가벼운 시간을 가졌다.
실랑이 후. 둘은 겨우 농담으로 타협하기로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기로 했어.”
“왜?”
“동생이랑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까.”
닉시가 고갤 갸웃했다.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미묘한 말.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세상엔 여러 유형의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녀는 그냥 수긍하기로 했다.
“그럼 어쨌든 네 바람이 이뤄지기 전까진 어영부영 살게 되겠네.”
닉시는 기지개를 쭉 켜곤 벽에 기댔다.
“그럼 이왕 그렇게 지내게 된 거, 너도 네 인생에서 뭐가 의미 있을지 찾아보는 건 어때? 죽는다 말고.”
“…….”
“그런 김에 내 파종 좀 도와주라! 땀 흘리는 거 엄청 보람 있어. 한 50개쯤 하면 천국이 보이기도 해.”
바보처럼 푸스스 웃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그렇게 어이없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도 그녀 따라 몸에 힘을 느슨히 풀고, 벽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늘 고통은 그렇게 풀어졌을 때 찾아왔다.
다시 시작된 환상통에 벤자민이 작게 앓는 소릴 냈다.
“이런, 괜찮아?”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도 들리지도 않을 만큼 아픈 건지, 그는 손을 몸 쪽으로 당겨오며 상체를 헐떡였다.
그녀는 겪지 못했지만 지독한 고통이라고 들었다. 멀쩡한 신체가 찢기는 고통.
그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가, 다시 천천히 되새기는 끔찍한 과정이라고.
‘이걸 여태 어떻게 버틴 거지?’
수면제 하나도 독한 화학 덩어리를 먹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먹는 진통제가 정상적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이걸 늘 참고 있었던 거라고?’
하지만 지금 이곳엔 그런 비정상적인 진통제조차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적어도 하루 이상은 여기 갇혀 있어야 하는 상황.
이걸 약 없이 버틸 수 있을까. 하루에도 이렇게 몇 번을 찾아오는 것 같은 고통을? 과연?
닉시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결론은 ‘아니’였다.
닉시는 바닥에 떨어진 총을 들었다.
“뭐 하는…….”
화가가 손을 붙들고 가늘게 신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닉시는 성큼성큼 걸어가 지하실 문 앞에 섰다. 그녀는 총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철컥.
손에 감기는 익숙한 소리. 총구가 지하실 문을 향해 맞춰졌다.
―쾅!
단말마의 총성과 함께 지하실 문은 폭탄을 맞은 듯 완전히 날아갔다.
* * *
그녀가 나온 뒤 가장 먼저 한 것은 본인이 더 이상 먹지 않게 된 약들을 가져다 이것저것 조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상한 약을 그에게 내밀었다.
평소 같으면 협박해도 안 먹겠다 했을 터였다. 하지만 진정될 기미 없는 고통에 정신없던 그는 곧바로 약을 삼켰다.
그대로 벽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한참을 지지부진하던 고통은 이윽고 사라졌다.
그제야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갔다. 남은 건 날아가 버린 나무 바닥과 엉망이 된 그녀의 테라스뿐이었다.
“이건…… 장마 오기 전까진 고쳐야겠네……. 그래도 살았다. 그렇지? 이게 바로 새롭게 태어난 기분일까. 화가. 솔직히 너도 엄청 쫄았잖아. 갑자기 거기서 죽겠단 말까지 다 하고.”
웃음 살인마 닉시는 실시간으로 그의 표정이 짜게 식어가는 걸 보았다.
“뭐, 뭘 그리 정색하고 그래.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녀가 그의 옆구리를 퍽퍽 찔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나고 보니 굳이 그런 말을 왜 했지? 싶은 부끄러운 말일 뿐이었지.
벤자민은 현관 바닥에 동그랗게 뚫린 구멍을 바라봤다.
“저건…… 내가 고치지.”
갇히게 된 건 본인 의지가 아니었어도, 어쨌든 그녀가 지하실 문을 날려 버리는 데 가장 큰 일조를 했으니.
“진짜? 그럼 나야 고맙지. 나 톱질은 잘 못하거든!”
예술가가 만들어 주는 바닥이라. 그녀가 후후 웃었다.
“잘 보수해 준다면, 다음 네 약을 제조해 줄 땐 서비스로 진통제나 이것저것 챙겨 줄게!”
닉시는 이 신비하고 음침한 지하실을 내일 꼭 길버트에게 자랑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화가는 몸을 탈탈 털며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가려고?”
“그래.”
“어, 양배추 들고 가!”
어느덧 뉘엿뉘엿 져 버린 해와 마을의 불빛. 언덕 위에 있는 집 특유의 들판을 쓸어오는 바람 냄새.
반가운 저녁 공기를 힘껏 들이마신 닉시가 파하, 숨을 내뱉곤 입꼬리를 올렸다.
“혹시 바래다줄까? 마을에 늙은 비글이 나와서 비실거리는 화가를 물어 갈지도 모르는데.”
닉시가 제집 마당 울타리까지 그를 마중 나갔다.
오베르의 비포장 흙길은 가로등 같은 게 마땅히 없었다.
달이나 별 보기엔 딱이었지만 그 빛만을 의지하고 걷기엔 약간 어려울 수도 있는 정도.
“남이 비실거릴 줄은 어떻게 알고.”
“척 보면 알지!”
“……보는 눈이 없군.”
알긴. 눈썰미가 엉망진창이면서.
“그럼 조심해서 가!”
닉시는 친구에게 하듯 손을 흔들었다.
벤자민은 한쪽이 찌그러진 양배추를 한 손으로 단단히 안은 채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 오늘의 수확
양배추 ―1
▶ 총평
양배추로 우정을 얻는 거면 나쁘지 않은 교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