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4
Chapter 3. 장마. 길버트 그레이스
“어휴.”
편지를 읽은 닉시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나 꾹꾹 눌러 쓴 건지, 편지의 마침표마다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제키에게 답장을 보낸다는 걸 아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 편지가 오지 않았더라면 영영 잊고 있을 뻔했다.
‘제키가 한 달이 넘는 여름휴가를 오베르에서 보내게 되기 전에 답장을 보내야 할 텐데.’
그렇다고 화가를 닦달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화가의 그림 없이 편지를 부치는 건 싫었다. 그동안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무슨 일 있어 닉시?”
헬렌이 토마토를 자르며 말했다.
마침 잡초를 태워 비료로 만들기 위해 작은 점화기를 사려 했던 닉시가 그것도 살 겸, 병문안도 할 겸, 겸사겸사 그녀의 잡화점을 방문했었다.
닉시는 손바닥만 한 작은 점화기를 골랐다.
이걸로 지긋지긋한 잡초들의 화형식을 치를 차례였다.
“아뇨. 오랜 친구가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언제 할 수 있으려나 걱정돼서요.”
“으응?”
“별거 아녜요. 그냥 편지를 보내는 길이 너무 험난하네요.”
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했다는 거나, 그게 완성돼야 답장을 보낼 수 있단 말은 헬렌에겐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닉시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결국 오베르의 잔잔한 일상은 모두 화가의 손에 달리게 됐다.
“흐음……. 뭔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요즘 길이 험해지긴 했어.”
그녀의 비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헬렌이 말했다.
“길이요?”
“그래. 내 발이 이렇게 된 것도 그렇고. 멀쩡한 길에 덫이 있질 않나.”
헬렌은 붕대를 감고 있는 제 발목을 가리켰다.
‘아. 그 길 말이구나.’ 닉시가 생각했다.
“부쩍 들짐승이 는 건지 마을에 가축이 죽는 경우도 늘었고. 여러모로 흉흉해.”
“그건 들개의 소행 아니었어요? 며칠 전에 산에서 죽어 있던 걸 찾았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봐. 그 이후로 잠잠하나 싶더니 마구간에서 파스칼이 키우던 망아지가 사라졌거든. 난 이제 들짐승이 한 게 맞는지도 의심돼. 혹시 남의 집 가축을 함부로 훔쳐 가는 사냥꾼 같은 게 있는 거 아닐까?”
사냥꾼. 닉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길버트에게 제집 지하실에 대해 말해 준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편지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고마워요, 헬렌! 연고는 여기 두고 갈게요! 꼭 아침저녁으로 발라 줘야 돼요!”
“어머나. 벌써 가는 거야? 그래, 고마워!”
닉시는 후다닥 잡화점을 나왔다.
자기 집 지하실에 누가 살았던 흔적이 있다.
정황상 자신이 이사 오기 전까지 살았던 것 같은데, 그자가 지하실에 두고 간 것들이 심상치 않았다.
마을 곳곳에 숨겨져 있는 사냥꾼의 흔적과 동일하다.
만약에 마을의 불쌍한 가축들을 훔쳐 가는 게 사냥꾼의 소행이 맞다면, 사냥꾼은 아마.
“길버트, 길버트!”
오베르에 있는 것 같다.
닉시는 마을 회관 문을 쿠당탕 열었다.
회관 안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심각해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닉시? 무슨 일이야.”
그녀가 찾고 있는 길버트는 마을 사람들 중간에 있었다.
“그게, 우리 집 지하…….”
“길버트. 이게 짐승의 소행이든 뭐든 간에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냐.”
“맞네. 망아지나 양 같은 짐승들도 습격당하지 않았나.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어.”
분위기가 심각했다.
눈치가 없는 편인 닉시도 지금은 끼어들면 안 되겠다 싶은 기류가 흘렀다.
그 가운데 길버트는 여러모로 생각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며칠간 조를 짜서 밤에 마을을 순찰하도록 하죠. 우선 오늘은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회의 결과가 나왔다.
순서를 정해 자정부터 새벽에 마을을 순찰할 것.
여름이라고 문을 열어 두지 말고 밤에 문단속을 잘할 것.
당분간 밤에 가축들을 풀어놓지 말 것.
울타리나 우리가 허술한 것 같으면 수리할 것.
문제의 근본이 해결되지 않아서인지 시원찮기만 한 방침이 내려졌다.
찝찝한 건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 같았다. 다들 영 떨떠름한 얼굴들이었으니까.
하루아침에 망아지를 잃어버린 마구간지기 파스칼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경관을 부르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러자 정말 신기하게도 주위가 싸해졌다.
‘분위기가 이상하네.’ 닉시가 구석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아 발끝을 까닥였다.
“파스칼 씨. 그건…… 나중에요. 우리끼리도 도저히 해결이 안 될 때…….”
“하아, 길버트. 우리끼리 해도 해결이 안 된단 건, 가축이 더 죽어 나가야 부르겠다는 말 아냐. 그럴 거면 그냥 지금 부르는 게 낫잖아.”
“그만하게 파스칼.”
마구간지기의 투덜거림을 씨앗&모종 숍 에드가가 저지했다.
평소 말수가 없었던 그가 입을 열었기에 마구간지기도 별말 없이 혀만 찼다.
길버트가 마구간지기를 달래기 위해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 상황은 대충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해산한 뒤, 닉시도 돌아가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길버트가 회관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안 갔어?”
“기다리고 있었지.”
길버트가 테이블에 걸터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하루의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진땀을 쭉 뺀 얼굴이었다.
“고생했네. 마구간지기랑 이야기는 끝냈어?”
“아니, 잘 안 풀렸어. 파스칼 씨가 화가 많이 났나 봐. 애지중지 키운 망아지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하긴. 안 그래도 마구간에 말이 두 마리밖에 없었는데, 망아지는 얼마나 소중했겠어.”
“답답하신 걸 거야. 어떻게 사라진 건지도 모르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니까.”
마구간지기와의 대화는 잘 끝났다고 보긴 어려웠다.
길버트가 마을 사람들의 사정이나 상황의 어려움을 들어 파스칼의 화를 달래 보려 했으나, 파스칼의 화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닉시 말대로 가뜩이나 말이 두 필밖에 없는 마구간이었다.
그걸로 먹고 살려면 말도, 저도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녀야 하는 판에 망아지가 사라졌으니.
“원인이라도 알면 좋겠는데 말이야…….”
“아. 길버트 그거에 대해서 말인데.”
닉시는 그에게 자신의 집 지하의 수상한 방에 대해 말했다.
“지하실이라…… 일단 한번 가서 볼게.”
어쩌면 지금 이 골치 아픈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길버트는 닉시의 뒤를 따랐다.
“근데 이런 작은 시골 동네에도 경관이 있어?”
“아.”
닉시는 경관을 언급하고 그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길버트의 표정은 언짢았다.
아까 마을 사람들이 회의할 때 느낀 싸한 분위기를 보면 뭔가 있겠거니 했던 건데, 역시 없진 않은 듯싶었다.
“마을 사람은 아니고, 우리 마을에서 10km쯤 떨어진 조금 큰 동네 사람인데…… 좋은 사람은 아니라 그래.”
웬만한 사람을 다 좋게 보는 그의 입에서 좋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 나왔다.
닉시에겐 그게 인간 말종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들은 닉시의 집에 도착했다.
그녀는 현관에 깔아 두었던 두꺼운 매트를 치웠다.
화가가 제법 괜찮은 솜씨로 수리해 준 바닥이 나타났다. 땜질했단 느낌이 강한 지하실 문.
혼자 잠기는 일 없게 크게 만들어 놓은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묵직한 소리가 들리며 지하실 문이 열렸다.
“여기야.”
“이런 곳이 있었구나…….”
길버트는 작은 지하실 방을 슥 둘러보았다.
“여기서 그걸 발견했거든? 잠깐만 내가 서랍에 넣어 놨는데.”
닉시는 작은 테이블 밑에 달린 서랍을 열었다.
길버트가 그녀를 기다리며 서랍 옆에 반으로 반듯이 접혀 있는 무언가를 바라봤다.
목발이었다.
그가 숨을 훅 들이켰다.
“찾았다! 이거.”
닉시는 올무를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길버트는 벽에 세워놨던 목발을 들고 있었다.
“이거 봐봐. 이 올무 헬렌이 사고를 당했던 거랑 똑같지 않아? 그리고 왜, 산 중턱에 있던 네 아지트에서도 똑같은 걸 발견했어. 좀 오래됐긴 했지만.”
“…….”
“그리고 이것도 한 번 볼래?”
닉시는 서랍에서 총 한 자루를 꺼냈다. 그녀가 지하실 문을 날릴 때 썼던 산탄총이었다.
“총이야. 화가가 그러는데 사냥에 쓰기 좋은 모양으로 개조된 것 같다더라고. 마을에 꼬꼬들이 사라진 걸 생각해 봐. 흔적 하나 없이 깔끔했잖아? 그런 거 보면 IQ 130의 산짐승 아니면, 전문가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 한 짓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내 생각엔!”
와다다 자신의 의견을 정렬한 닉시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마을에 그 범인인 사냥꾼이 숨어 있는 것 같아.”
게다가! 마지막 결정타로 닉시가 곰팡이 핀 비스킷을 길버트의 눈앞에 보여줬다.
이빨 자국 선명한 버터 비스킷.
그의 올리브색 눈이 크게 뜨였다.
“이것 봐. 이 목발이나 총의 주인이 우리 집이 비어 있었을 때 지하실에서 몰래 살…….”
“닉시.”
그가 짧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닉시는 여전히 뿌듯한 얼굴로 고갤 들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본 뒤 얼굴을 굳혔다.
“여길 알고 있는 사람. 너 말고 더 있어?”
그는 닉시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꼭 그런 표정이었다.
전투 후, 남겨진 패잔병들을 정리하기 위해 소총을 들고 산을 수색한다.
그때, 다쳤거나 겁에 질려서 차마 도망치지 못하고 진흙 위에서 허우적대는 자들을 찾아, 총을 그들의 이마에 겨눈다.
그때 볼 수 있는 표정.
증오와 두려움. 원망과 현실 부정이 발악처럼 점철된.
“있어.”
“……누구?”
“화가.”
제길. 그가 조용히 짓씹었다.
길버트는 들고 왔던 자루 같은 주머니에 소총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놀랍도록 차분해진 얼굴로 고갤 돌렸다.
“닉시. 여길……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면. 그렇게 해 줄래?”
‘왜?’라는 물음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다음으론 청개구리 같은 그녀의 심보에서 비롯된 ‘NO’라는 본능적인 거부.
그러나 닉시는 꽤 참을성 있게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런 중요한 순간이면 섣부른 대답보단 침묵이 더 나았으니까.
긴 침묵 끝에 그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냐. 못 들은 걸로 해.”
그는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왜일까.
지하실에 남겨진 닉시가 이유를 찾기 위해 제 손의 올무를 바라봤다.
길버트는 총을 보고 놀란 것처럼 보였고, 제 말을 듣곤 얼굴을 굳혔다. 어째서?
끝내 실마리 하나 찾지 못한 닉시가 지하실 밖으로 나갔다.
“저, 길버트.”
고개만 먼저 빠져나온 닉시가 그를 불렀다.
그는 벌써 마당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내키지 않는 껄끄러운 의문을 삼키곤 그녀는 가장 그를 위한 답변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이따 자정에. 나도 같이 순찰해도 돼?”
“…….”
길버트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그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북쪽 강 건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웃이 그 웃음의 의미를 뭐라고 판단했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설핏 웃기만 하고 바로 고갤 돌렸었으니.
닉시는 머리를 긁적였다.
[여길 알고 있는 사람. 너 말고 더 있어?] [있어.] [……누구?]화가.
길버트는 그 남자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찾아가서 뭐 어쩔 거야. 닉시에게 했던 거랑 똑같이 누구한테도 그곳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게?’
길버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요 며칠 동안 영문도 모르게 죽거나 사라진 동물들을 보곤 막연하게 떠올렸던 과거.
마을 정비한 게 이번 연도 겨울이라 올무 같은 게 있을 수 없었는데, 사고가 났던 것을 보고 ‘기분 탓이겠지.’ 하고 무시했던 사건이.
[우리 마을에 그 범인인 사냥꾼이 있는 것 같아.] [이것 봐. 이 목발이나 총의 주인이 우리 집이 비어 있었을 때 지하실에서 몰래 살…….]“젠장.”
‘어떻게. 어째서. 도대체 왜.’
지하실에서 발견한 목발과 산탄총.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당시의 하루하루.
개머리판에 투박하게 새겨진 선명한 글자 하나가 그의 속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 놓았다.
‘만약, 가축들을 해친 게 진짜 그자가 한 거라면. 그자가 진짜 오베르에 있다면.’
찾아서.
“이게 누구시더라?”
그의 앞에 짙은 그림자 하나가 멈춰 섰다.
길버트가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갤 들었다.
흰 말을 타고 있는 탁한 남색 제복의 중년 남자.
길게 찢어진 하이에나 같은 인상을 가진 경관.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군. 건방진 꼬마.”
“칼…… 경관님.”
길버트는 날카로운 눈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그의 적개심을 눈치챈 칼이 허, 하고 헛웃음 쳤다.
“눈빛 하난 여전하군. 뭐. 최근에 일어난 사건은 파스칼에게 대충 들었다. 가축들이 사라졌다지?”
“…….”
마을 사람의 입에서 경관을 부르자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길버트로서는 달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첫째론 그가 좋은 사람엔 속하지 않는 이여서였고 둘째론 저에게 극도의 적개심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참 희한한 동네야. 불쾌한 사건이 끊이질 않잖아?”
말을 길게 섞어 봐야 좋을 거 없었다.
길버트는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그를 스쳐 지나가려 했다.
“역시 10년 전 그날 건방지게 설쳐대던 그 살인자 놈을 잡았어야 했는데.”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경관이 검은색의 곤봉으로 그의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너도 기억하지? 그렇게 거의 다 잡았던 걸 눈앞에서 놓쳤잖아. 이 마을에서의 시작이 안 좋았던 게 그때부터였어. 그놈만 잡았다면 여기도 이런 불쾌한 일 없이 조용히 평화로웠을 텐데.”
“…….”
10년 전.
오베르는 푸른 밀밭과 보랏빛 제비꽃밭으로 구석진 시골 마을치고는 소소하게 인기 있었던 곳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이었건만 있을 건 다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두셋씩 관광객이 끊이질 않았으니까.
그런 오베르에 이상한 사건이 생기기 시작한 건 10년 전. 딱, 이맘때쯤.
한여름 장마 직전의 후덥지근하고 끈덕지던 날.
작은 마을에서 관광객이 연달아 실종되는 일이 있었다.
칼 데옹이 오베르로 처음 부임되었을 때가 바로 그때였다.
세 번째 실종이 있던 날이었다.
“난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봐. 사람마다 타고난 천성이라는 게 있는 거지. 근데 이게 고친다고 해서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거든. 숨길 수는 있어도.”
칼은 그때 산기슭에서 처음 만난 소년을 기억했다.
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떤 시간을 보낸 건지 알고 싶지도 않을 만큼, 소년은 잘 벼려진 날짐승의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몸을 사리는 게 좋을 거야.”
“…….”
“지금은 친절한 그레이스 씨도 없으니까.”
―팍!
길버트는 제 앞을 가로막는 곤봉을 소리 나게 쳐 냈다.
그에 놀란 말이 푸르릉거리며 물러났다.
“말조심해.”
“이 새끼가……!”
욱하는 기질이 있는 칼이 욕설을 지껄이며 곤봉을 세게 쥐었다.
길버트는 여차하면 받아칠 준비를 하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경관이 손을 있는 힘껏 들어 올렸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벤자민이었다.
벤자민은 눈앞의 상황을 무기질 보듯 바라봤다.
말을 탄 채, 사람을 때리려는 건지 곤봉을 치켜들고 있는 경관과, 달려들 생각인지 말의 고삐를 꽉 쥐고 있는 마을 이장.
누구나 호들갑 떨며 소리 지를만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않았다.
그저 아무 반응 없이 그저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쳇.”
심각한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화가 탓에 한껏 날 서 있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낯선 이의 등장에 상황은 흐지부지됐고, 덕분에 화를 풀 길이 없어져 심기 나빠진 경관이 길가에 침을 뱉었다.
“이번엔 그 버르장머리를 봐주도록 하지. 다음에도 똑같이 굴면 재미없을 거야, 길버트 그레이스.”
그는 곤봉을 도로 허리춤에 찬 뒤 말을 돌렸다.
길버트는 경관의 재수 없는 뒤통수를 지그시 바라보다 고갤 돌렸다. 저딴 녀석한테 쓰고 있을 시간이 아까웠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벌써 저만치 걸어간 화가를 따라잡았다.
“리히터 씨. 감사해요.”
화가로선 그 인사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뭐가 고마운 거지. 저는 그냥 갈 길 갔던 것뿐인데.
그래서 굳이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길버트는 그에게 할 말이 있었다. 지하실에 관한 것.
거기에서 봤던 게 뭐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왜냐면…….
그들은 발목에 풀이 스치는 자갈길을 함께 걸어갔다.
벤자민은 용건이 끝난 게 분명함에도 계속 자신을 따라오는 길버트를 흘긋 바라봤다.
답지 않게 초조한 표정으로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는 문득, 그가 메고 있는 주머니 밖으로 비죽 튀어나와 있는 낯익은 것을 발견했다.
지하실에서 봤던 총이었다.
“……마크 릭터.”
그의 말에 길버트가 고갤 홱 쳐들었다.
“그 총에 적힌 이름이지.”
“…….”
“너와 관련이 있나?”
길버트는 살짝 입을 벌렸다. 하지만 입가에선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도로 입술을 꾹 깨문 그가 고갤 떨구었다.
관련이 있냐고? 있고말고.
아주 지독하고 증오스럽게도 있다.
벌써 10년이 지났는데도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얼굴. 목소리. 이름.
그때의 공기. 빗줄기와.
“제가 죽인 새끼예요.”
피비린내.
* * *
마크 릭터.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이름.
그건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헉…… 헉…….”
우욱. 소년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헛구역질했다.
채운 거 없는 빈속에선 위액만 나왔다.
손에, 목구멍에, 머리에 열이 올랐지만 그 모든 건 쏟아지는 장맛비에 차갑게 식어만 갔다.
소년은 엉금엉금 기어 벼랑 아래를 내려다봤다.
열흘 내내 이어졌던 소나기에 강물이 시커멓게 불어 있었다.
이곳으로 떨어졌으면 그 누구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설사 숨이 붙어 있다 해도 물살이 저렇게 흉흉하게 휘몰아치는데, 몸이 성할 리 없다.
몸이 찢기거나 결국 익사하고 말겠지.
하물며 다리 하나를 저는 그 남자라면 분명…….
소년은 마른침을 삼켰다.
화끈하게 달아오른 손바닥이 아파 왔다.
피가 낭자하게 묻어 있는 손바닥. 흘러내리는 죄.
소년은 고여 있는 흙탕물에 손을 벅벅 닦았다.
닦아도 닦아도 검붉은 것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곤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났다.
“이봐 꼬마.”
산을 뛰어 내려오느라 구르고, 찢겨 너덜너덜해진 꼴로 겨우 기슭에 도착했다.
그때 가장 먼저 마주친 건 요 며칠 마을을 들쑤시고 다니던 젊은 경관 칼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소년에게서 나는 비릿한 냄새를 눈치챘다.
그리고 눈앞의 소년이 보편적인 사람에게선 볼 수 없는 섬뜩하게 번뜩이는 눈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이름이 뭐지?”
“…….”
지저분한 몰골에 가려졌지만 그건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눈빛은 누군가를 해친 후 인간성을 잃어버린 짐승의 눈이었으니까.
칼은 곤봉을 휘둘러 소년을 퍽 때렸다. 소년은 뒤로 털썩 넘어졌다.
“다시 묻는다. 이름이 뭐야.”
“길버트!”
그때, 누군가 축축한 흙길을 달려왔다.
우산이 뒤집힌 줄도 모르고 부리나케 달려온 남자는 쓰러진 소년을 감싸 안았다.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니. 미안하다. 아침에 그렇게 혼내는 게 아니었는데!”
과장된 손짓으로 소년의 얼굴을 감싼 남자는 두꺼운 큰 손으로 소년의 꼬질꼬질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칼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야 넌?”
“아이고 경관 나으리. 우리 아이가 뭔 잘못이라도……?”
“우리 아이?”
경관은 삐뚜름히 가시 돋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익숙하다 했더니 안면이 있는 자였다.
갈색 곱슬머리의 인심 좋은 웃음을 짓는 남자. 늘 헤실헤실 웃는 상이라 보는 사람 기운 빠지게 하는 데 일가견 있는.
“제레미아 그레이스.”
“네, 경관 나으리.”
그는 곤봉을 도로 집어넣었다. 칼이 대응하기에 껄끄러운 인간상이었다.
정보를 얻으려고 다가가 봐야 멍청하고 좋은 사람인 양 얻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사람 빈정 상하게 만드는 그런 자들 있지 않은가.
저런 웃는 상의 타입은 얼굴에 침을 뱉어도 손수건을 내밀 타입이다.
“……이 꼬마가 네놈 아들이라고?”
“네. 저희 집 첫째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소년은 저를 꼭 끌어안은 제레미아를 바라봤다.
“……자식 간수 잘해. 저 녀석한테 피 냄새가 진동을 하니까.”
“어휴. 저는 장마철만 되면 코가 막혀서…….”
“멍청하긴. 말이 그렇다는 거 아냐. 네 아들놈이 사람 죽인 날짐승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어휴 그럼요! 이 녀석이 요즘 사춘기라 좀 까칠해서 그런가 봅니다. 이해해 주십쇼.”
“쳇.”
여전히 할 말 없게 만들긴. 경관이 뒤돌았다.
그리고…….
“리히터 씨는 본인이 없애 버렸다고 생각했던 게 멀쩡히 살아남았다는 걸 알면 어떡하실래요?”
길버트는 옛 생각에서 벗어났다.
어쩌다 보니 그와 화가는 벤자민의 집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벤자민이 질문을 곱씹듯 중얼거렸다.
“없애 버렸다고 생각했던 게 멀쩡히 남아 있다면…….”
“네.”
마크 릭터. 그 증오스러운 사냥꾼.
분명히 10년 전, 그 남자는 벼랑에 떨어져 죽었다.
본인이 직접 밀었고, 죽었다는 소식도 직접 들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남자의 흔적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자신이 살아 있단 것을 저가 눈치채길 바라는 것처럼 주변에서부터 차츰차츰.
걸린 줄 모르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목을 조여 오는 그것처럼.
“……난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믿지 않아.”
화가가 말했다.
“……그런가요?”
“…….”
“강하시네요, 리히터 씨는.”
“…….”
“전 그렇지 못한데.”
지하실에서 남자의 목발과 산탄총을 봤을 때부터 그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그자가 살아 있다. 그자가 여기 있다.
“저는 그 자식을…….”
동시에 저 멀리에서 정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상념에서 벗어난 길버트가 고갤 들었다. 오늘부터 시작될 마을 순찰에 그가 나서야 할 시간이었다.
노란 머리 이웃이 함께하겠다 떵떵거렸던 터라,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온 동네에 길버트가 실종됐다고 외치고 다닐지도 모른다.
“……저 가 볼게요. 오늘부터 마을 순찰을 하기로 해서.”
“그래.”
길버트는 부지런한 걸음으로 그의 집 마당을 빠져나왔다.
뒤늦게 화가에게 지하실에 대한 것을 말하지 말아 달라 부탁하지 못한 게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집으로 되돌아가기엔 이미 멀리 와 버린 뒤였다.
게다가 평소라면 술 취해서라도 절대 하지 않을 말까지 줄줄 늘어놨고, 아무리 저라도 지금 그 집을 다시 뻔뻔하게 찾아갈 용기는 없었다.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군.’
정신 차려야지.
―짝!
길버트는 두 손으로 제 뺨을 소리 나게 내리쳤다. 그리곤 제레미아 그레이스를 떠올렸다.
인심 좋은 얼굴. 늘 느긋한 분위기의 걸음걸이. 허허 웃는 목소리.
아버지.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평소 그였다.
* * *
경관이 오베르로 온 뒤, 그는 본격적으로 마을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순찰하고, 평소 수상한 점은 없는지 마을 사람들을 취조하고 다녔다.
달갑잖은 이방인이 들이닥치면서 평화로움이 깨질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뒤숭숭해질 줄은.
닉시는 라울의 바 테이블에서 병아리콩을 깨작였다.
“요즘 마을은 너무 처져요. 사람들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일이 커지긴 했으니까요. 게다가 안 그래도 곧 장마철이라 날씨도 흐리고요.”
“으아아아.”
빗소리를 들은 닉시가 테이블에 늘어졌다.
습한 걸 싫어하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며칠 동안 주야장천 쏟아지는 비 소식은 장마철에 태어난 매미만큼 절망적인 선고였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몰랐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아는 오베르라면 사건이 범인이 들짐승이든, 사람이든 간에 합심해서 족치는 곳에 가까웠다. 이렇게 쉬쉬하면서 축 처져 있을 게 아니라.
“저도 들어서 안 거지만. 오베르에 오래전, 큰 사건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컵을 닦던 라울이 말했다.
“사건이요?”
“네. 전쟁 전에 오베르에 관광하러 온 외지인들이 다치고 사라지는 일이 있었다 들었어요. 그때 칼 경관이 오베르에 부임돼서 사건을 해결하려고 했었지만, 결국 범인은 찾지 못했고 사건은 흐지부지 끝났었다고 해요. 마을 사람들도 그때가 생각나서 조심스러운 걸 거예요.”
‘누군가 다치고 사라지는 일.’
포크로 깨작이던 노란 병아리콩이 접시를 빠져나와 테이블 위를 굴렀다.
“그렇구나.”
창밖으로 라울이 말한 것처럼 비를 머금은 흐릿한 구름이 흘러갔다.
뙤약볕일 땐 죽어도 불지 않던 바람도 스산하게 불어왔다.
비 내리기 전 물먹은 바람이었다.
곧 장마가 온다면 해야 할 일이 뭐가 있더라.
땅이 단단한지 확인하고 물길을 터야 한다.
또 고추랑 배추들이 떠내려가지 않게 부목을 세워 두고, 땅이 낮은 곳에 심은 것들은 답이 없으니 명복을 빌어 줘야 한다.
“좋지 않네요.”
“그렇죠.”
이 상황이든 저 상황이든 뭐 하나 좋지 않았다.
그녀는 제 몸이 빗소리 때문에 방전되기 전에 빨리 몸을 움직여야겠다 생각했다.
* * *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경관은 마을 회관의 2층에서 머물기로 했다.
경관이 싫긴 하지만 일단은 마을 이장인 길버트가 제집에 남은 회색 이불을 경관의 침대에 올려놨다.
경관은 느긋하게 움직이는 길버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윽고 길버트가 이부자리 정리를 마쳤는지 경관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필요한 게 있으면 더 말씀하세요.”
그렇게 말하고 유하게 웃는 얼굴이 오래전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와 똑같았다.
얼굴에 침을 뱉어버리고 싶었다.
“하루 종일 할 일을 하느라 속이 허하군. 먹을 건 없나?”
“먹을 거, 말이죠?”
길버트는 그를 위해 요리를 해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경관을 데리고 라울의 바로 향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는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음식을 세 개나 시켰다.
금붕어나 어린 강아지는 제 양을 가늠하지 못해서 배가 터져 죽는 생물 중 하난데. 이 경관도 껴야 하지 않을까. 길버트는 하하 웃으며 생각했다.
라울은 길버트에게 본인이 적당히 대접하겠다 눈짓했다.
잔잔한 재즈가 흘러나오는 술집 안.
평소 같았으면 술잔 기울이는 소리와 시시한 농담에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을 터였다.
하지만 사람 깔보는 태도가 기본으로 베여 있는 경관 한 명의 등장으로 술집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음식이 나오고, 칼은 투덜거리며 포크를 들었다.
“양이 너무 적은 거 아냐?”
“더 드시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언제든 더 드릴 테니까요.”
라울이 싹싹하게 말했다.
동시에 술집 문이 벌컥 열렸다.
“라울! 아까 제가 깜빡하고 돈을 안 드리고 갔었죠! 드리러 오는 김에 손님도 데려왔어요!”
시끄러운 노란 머리의 이웃. 화가의 손을 질질 끌고 들어온 닉시였다.
“오. 다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모여 있었네. 길버트 안녕!”
그녀는 태연하게 길버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길버트도 그녀를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벤자민.”
“나도 모르니까 물어보지 마…….”
라울의 질문에 벤자민은 골 아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흑맥주 두 개랑 소시지 모둠 하나요!”
닉시가 낭랑하게 외쳤다.
경관은 길버트의 시선을 따라 요란한 바 입구를 바라봤다.
노란 머리의 여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고, 그 옆에 서 있는 남자는 그 전에 길가에서 한 번 마주쳤던 남자였다.
‘저 둘은 마을에서 본 적이 없는데. 좀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는 건가.’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아는 척하면서도 뭔지 모르게 떨떠름해하는 게 보였다.
‘반가운 것 같은데 꺼려한다?’
두 가지 상반된 이질적인 분위기.
그 미묘한 반응을 놓칠 경관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저를 향한 적개심을 숨기고 멀끔한 척 미소 짓는 속 까만 길버트 그레이스가 그들을 보고 한순간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금발의 여자와 딱딱한 인상의 남자.
길버트 그레이스를 후벼파는 데 있어서 좋은 거리가 될 거란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경관이 운을 뗐다.
“너 빼고 그레이스가 사람들은 전부 다 죽었다지?”
순식간에 바 안이 싸해졌다. 누가 물을 마시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칼은 창가 테이블에 앉았던 금발의 여자와 베이지색 머리칼의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길버트의 사람 좋았던 표정에 조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역시 그 정보가 맞았군.’
경관은 아무렇지 않게 술을 홀짝였다.
“친척도 없으니, 그레이스가에 남은 사람은 너 하나뿐이지.”
“…….”
“덕분에 큰 유산을 물려받고 좋겠어.”
길버트가 경관의 멱살을 잡았다.
―와장창!
식기와 빈 잔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고, 바는 삽시간에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길버트, 진정해!”
바 주인 라울이 급히 그 둘 사이로 손을 내밀어 저지했다.
주변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작 멱살을 잡힌 칼은 태연했다.
‘이제야 그때랑 똑같아졌군. 사람 좋은 척하는 게 역겨웠는데.’
그는 당장이라도 저를 후려칠 듯한 남자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끝이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청년의 눈빛은 오래전, 칼이 소년을 처음 봤을 때의 눈빛과 똑같았다.
10년의 세월이 흘러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요 며칠 마을을 들쑤시며 정보를 캐냈다.
경관이 마을에서 모은 제법 쓸모 있는 정보. 그건 대부분 길버트 그레이스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길버트 그레이스의 어린 시절.
그레이스가 사람들이 폭격에 죽어 버린 일.
20살, 갓 성인이 된 주제에 그 많은 밭과 집을 혼자 지키게 된 소년.
특유의 서글서글함으로 어린 나이에 마을 이장이 된 길버트 그레이스.
칼은 10년 전 그 사건과 지금 이 사건의 범인을 ‘길버트 그레이스’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길버트의 귓가에 짧게 속삭였다.
“너. 마크 릭터라는 사냥꾼을 알고 있나? 한쪽 다리를 저는 사냥꾼인데.”
그 말을 들은 길버트의 눈이 가늘게 흔들렸다.
‘알고 있군.’
칼은 그의 손을 팍 비틀어 쳐내곤 구겨진 옷깃을 다듬었다.
몸싸움이 일어날 줄 알았던 주위 사람들이 술렁였다.
“왜 그렇게 보지? 꼭 내가 알면 안 되는 사실이라도 되나?”
“……그 사람이 왜요.”
“고향에서 만나서 친해진 사이거든. 여기 사는 누군가를 누굴 꼭 만나고 싶어 한다길래 말야. 마을 이장인 길버트 그레이스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
“너. 아는구나?”
“그자가……”
정말.
“살아…… 있어요?”
경관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왜. 죽었어야만 했나?”
역시 10년 전 그 사건의 범인은 길버트 그레이스다. 칼은 확신했다.
“있잖아. 화가.”
닉시가 포크를 우물거렸다.
“저 사람 꼭…… 패고 싶지 않아?”
말투는 농담 따먹기 하는 것처럼 가벼운 주제에 동공이 열려 있었다.
까닥 잘못하면 닉시라는 미사일이 날아갈 것 같아 벤자민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경관을 건드렸다가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알 게 뭐야. 저 사람은 내 친구를 건드렸는데.”
“잡혀갈 텐데.”
“방법이 있어.”
결국 닉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혁명의 시작이었다.
“이봐.”
그녀의 단 한마디에 수많은 인파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움직임들에 흠칫한 칼이 고갤 돌렸다.
인간들을 반으로 쪼갠 이의 정체. 그건 고작 제 턱 언저리에 올 법한 여자였다. 아까 이 길버트에게 인사했던 자들 중 하나.
닉시는 그를 향해 척척 걸어갔다.
그녀가 신은 3cm 통굽 샌들에서 코끼리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런. 날 부른 건가 아가씨?”
“…….”
“응? 대답은 해 줘야지.”
경관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제 쪽으로 걸어오는 여자를 보며 픽 웃었다.
앙칼진 목소리로 누굴 호기롭게 부르면 촌뜨기인 양 얼타고 있을 줄 알았나 보다. 저렇게 입이 얼어붙어 말도 안 나오는 모양새를 보면.
“보아하니, 이 친구 또래로 보이는데. 제 친구 편을 들어주겠다 이건가?”
“…….”
“그래. 그 또래엔 그럴 수 있어. 혈기가 넘치는 시기니까. 근데 아가씨, 네 친구는 네가 편을 들어줄 만한 사람은 아냐. 그러니까…….”
가만 보니 얼굴이 제법 반반하게 생겼다. 윤기가 도는 짙은 금발이나 약간은 탄 듯하지만 여전히 잡티 하나 없는 피부도 그렇고.
마을에서 본 적 없는 사람이다 했더만, 마을에 놀러 온 뭣 모르는 이방인인 듯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도도하게 굴지.’
“예쁜 얼굴에 흠나기 전에 꺼져.”
‘눈이 삐었군.’
벤자민은 그 광경을 보며 술을 홀짝였다.
경관의 말과 동시에 닉시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그녀의 발걸음이 멈추자 마을 사람들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너.”
닉시의 손가락이 경관의 어깨에 사뿐 내려앉았다.
경관의 눈엔 비교적 나비 다리가 꽃잎을 간질이는 교태처럼 느껴졌지만 길버트의 눈엔 달랐다.
흡사 파리지옥의 빨판을 보는 듯했다.
닉시는 경관에게 살짝 몸을 들이댄 채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누군지 알아?”
화가는 차마 들어 줄 수 없어 마른세수한 채, 고갤 푹 숙였다.
“누…… 누군데.”
“……요.”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매로 다가오기에 까칠한 반응을 예상했던 경관이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흐느적거리는 여자의 몸짓에 그의 얼굴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내가 누군지…… 몰라?”
그녀의 아쉽다는 듯 한숨 어린 목소리가 경관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길버트는 차마 두 눈을 뜨고 보기 힘든 광경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경관이 새빨개진 얼굴을 들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
―이려는 찰나.
경관은 본인의 구레나룻이 시원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엄청나게 큰바람이 불어온 것처럼.
그게 뭘까, 눈을 돌린 그곳.
경관의 옆머리 부근엔 닉시의 샌들 통굽이 놓여 있었다.
―뻐억!
깨달은 순간은 이미 늦은 법.
닉시는 뒤돌려차기로 경관의 머리를 걷어찼다.
혜성처럼 날아간 경관의 머리는 순식간에 바닥에 내리꽂혔고, 바닥엔 커다란 분화구가 생겼다.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라울의 술집 바닥은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
마을 사람들이 서커스 관객처럼 허억 하고 숨을 들이켰다.
숨 막히는 정적 속. 경관의 머리가 땅에 스트라이크를 날리는 소리만 메아리쳤다.
닉시는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길버트의 손을 붙잡았다.
“들었어, 길? 내가 누군지 모른대.”
길버트의 올리브 빛 눈동자에 샛노란 이웃이 가득 들어찼다.
“튀어!”
그녀는 그의 손을 붙잡고 술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대책 없는 사랑의 도피 같은 현장이었다.
“…….”
“닉시가 한 건 했군 그려.”
“그렇구만.”
“저 시끄러운 놈. 자꾸 귀찮게 마을을 들쑤시고 다니더니,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남겨진 마을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입구 근처에서 건강 마즙을 마시던 샬롯 할머니도 들고 있던 망치를 다시 내려놨다.
옥수수 밭의 농부 콜레트와 비글에게 먹힌 두 번째 암탉 주인 레미가 허허 웃으며 농담했다.
“젊은것들이 다 먼저 나서니, 이제 늙은것들은 끼어들 참도 없어.”
“그러게 말이에요. 근데 저 경관은 어떡하죠?”
“머리 좀 식히게 놔두자고.”
마을 사람들은 경관이 바닥에 쓰러져 있건 말건, “내가 누군지 알아?”, “누군데~!” 각자 축배를 들기 바빴다.
라울이 샬롯 할머니에게 빌려주었던 망치를 도로 연장 서랍에 넣었다.
“아니면, 진상도 손님이라는 바 주인이 잘 처리해 주겠지. 안 그래요, 바텐더 양반?”
“하하, 너무하시네요. 돈 안 되면 진상 취급도 안 해요.”
라울이 테이블을 닦았다.
달갑잖은 손님이 시킨 음식이었지만 자신의 야심작인 에그인헬 접시가 말끔히 비어 있었다.
음식점 주인의 행복은 빈 접시에서 나오는 법. 라울은 흐뭇하게 웃었다.
“깔끔하게도 박살 냈군.”
벤자민이 바닥에 널브러진 경관의 다리를 피해 카운터로 걸어왔다.
어찌나 깔끔한 솜씨인지 한 뼘 정도로 나란히 붙어 있는 바닥 판자 세 개를 정확히 일자로 쪼개 놓았다. 그런데 머리엔 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은 형태라니.
‘그 여자…… 사실은 특수부대 출신인 건가.’
그가 고민할 무렵. 라울이 때마침 찬장에서 가장 싸구려 와인을 꺼내오고 있었다.
“어, 벤자민.”
“계산.”
벤자민은 불친절한 이웃이 동의 없이 시킨 흑맥주 두 개랑 소시지 모둠 값을 지불했다. 사 준다고 해 놓고 갈취당한 입장이라 씁쓸한 기분이었다.
“잠시만. 으쌰.”
라울은 깔끔하게 기절한 경관을 뒤집어 얼굴이 천장을 향하게 눕혀 둔 뒤, 입에 싸구려 와인을 꽂았다.
벤자민은 팔짱 낀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길버트가 인복이 좋아. 그렇지?”
“뭐…… 그런 것 같더군.”
바로 옆에 있는 성격 좋은 청년이 헤헤 웃어 주니, 경관의 하이에나같이 찢어진 눈엔 보이지 않았겠지만……. 젊은 마을 이장이 경관의 멱살을 잡았을 때, 마을 사람들은 각기 투박한 연장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포크, 술잔, 청어찜. 치와와 해피.
자칫 손찌검이라도 하면 경관의 머리 위로 날아갈 흉악한 것들이었다.
“이 경관이 길버트의 뒤를 캐고 있는 것 같아. 마을 어르신들 말로는, 이 자가 10년 전 ‘관광객 실종 사건’을 해결 못 한 화풀이로 길버트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 같더라고.”
“나한텐 말해도 몰라. 관심도 없…… 근데 그거, 이제 그만 먹이지 그래.”
“아. 까먹고 있었네. 고마워.”
라울이 경관의 입에서 와인을 뿅 뽑아냈다.
이로써 완전 범죄가 완성됐다.
라울이 지금 즉석에서 만들어 낸 사건은 이러하다.
매우, 몹시 술에 취한 경관이 바닥에 걸려 넘어졌다. 하필 머리부터 박아 버려서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근데 그의 머리가 어찌나 딱딱했던지! 바닥에 구멍이 뚫려 버렸고.
술집 주인 라울은 그의 앞으로 술값, 바닥 보수 비용, 술집 주인의 심적 충격 위로비용을 포함하여 총 300유로를 청구할 예정이었다.
“어때, 벤자민?”
“……너랑 채무 관계로는 절대 엮이지 말아야겠어.”
진실이 뭐든지 간에 친구 괴롭혔다고 눈이 돌아버린 이웃이든, 그 이웃의 범죄 현장을 숨겨 주기 위해 경관에게 술을 먹이는 술집 주인이든 그는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다들 제정신은 아니었다.
* * *
닉시와 길버트는 그 길로 오베르의 언덕 위까지 달음박질했다.
길버트와 닉시는 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있는 힘껏 달려서 폐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아…… 왜, 왜 갑자기 그런 거야! 경관을 건드렸다가 나중에, 헉…… 어떻게 될 줄 알고.”
“헉…… 구해 줘도 뭐라네.”
“그게 아니라……!”
“표정에 다 쓰여 있었어! ‘누가 좀 어떻게 해 봐!’ 하는 표정.”
[왜 경관에게 거짓말을 한 건지 묻는 듯한 얼굴이구나 길버트.]길버트는 손등으로 땀을 훔쳐 닦았다.
그는 농부의 말에서 괜스레 오래전, 그리운 목소리를 떠올렸다.
“내 표정이 어때서…….”
[표정에 다 쓰여 있었거든.]“몰라? 길, 넌 웃는 얼굴이 아니면, 헉…… 무슨 생각하는지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일단 튀자고 해서 닉시를 따라 어디로 튀어가긴 했는데, 길이 낯익다 싶어 주윌 둘러보았다. 익숙한 길.
닉시의 집으로 향하는 곳이었다.
아직 새싹 수준인 해바라기 길 위에서 길버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닉시! 하, 하하! 도망가자고 하면…… 헉, 찾을 수 없게 뒷산이라든지, 아니면 오베르 밖으로 나가는…… 헉…… 마을 입구가 있는 쪽이어야지. 왜 너희 집 앞이야. 아하하!”
“왜, 왜! 전투의 기본은 거점 사수라고……!”
도망치자더니 끽 해 봐야 본인 집으로 향하는 언덕이라니. 바보 같아.
길버트가 사레들릴 정도로 크게 웃자 민망해진 닉시가 괜히 머릴 긁적였다.
그래도 그는 이런 그녀의 허접하고 무모한 방식이 나쁘지 않았다.
그가 너무 웃어서 맺힌 눈물을 슥 닦아내곤 물었다.
“나한테 네 집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거야?”
“그러엄.”
“왜?”
“내 옆이니까!”
닉시가 가슴을 통통 두드렸다.
가진 건 배짱밖에 없는 뻔뻔한 사람이 무슨, 저보다 키 한 뼘은 더 큰 사람을 지켜 준다고.
물론 그녀의 손가락 마디만 한 통굽 샌들은 무시무시했지만 그걸 제외하고…… 아니 무슨 기상천외한 방식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머리도 제외하고, 이상한 걸 만드는 손도 제외…….
아무튼.
“그럼 날 지켜 주려는 거네?”
“당연하지. 우린 친구잖아?”
모든 걸 감안해도 그녀는 연약에 기울어진 모습인데, 이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뻔뻔함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빨간 눈? 장난스러운 입꼬리? 가는 목?
그래서다. 왠지 모르겠어서.
길버트는 닉시의 손목을 살짝 끌어왔다. 그리곤 강하기만 한 그녀를 꼭 껴안았다.
“……고마워 닉시.”
그는 그녀를 믿어 보고 싶어졌다.
그녀라면 왠지 자신을 지켜 줄 것만 같았다.
그녀의 친구 길버트 그레이스를. 자신이 이 모습 이대로 쭉 있게 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왠지 그녀의 곁이면 자신도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랬다.
“오랜만이구나.”
그의 눈앞에 소름 끼치게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닥에 목발을 질질 끌고 오는 소리.
거칠게 자란 턱수염. 피비린내. 갈색 머리칼. 탁한 올리브색 눈동자.
길버트는 제 앞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숨을 들이켰다.
“아들.”
마크 릭터. 사냥꾼.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저와 똑같이 생긴 얼굴의 남자였다.
‘누구지?’
닉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바라봤다.
아무리 길버트가 마을의 아들이라곤 하지만…… 이렇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시도 때도 없이 아들이라 불릴 이유는 없다.
“누구세요?”
닉시는 절뚝이며 다가오는 남자에게 물었다.
가만히 보니까 남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충혈된 눈에서 풍기는 피폐함이나 훅하고 풍기는 날것 냄새 따위.
닉시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나 말인가?”
위험한 자다.
“길버트의 아비 되는 사람이지.”
남자가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의 단어적 정의는 알고 있다.
다만 그녀는 지금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의문이었다.
“내가 알기론 길버트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흘긋 바라본 길버트의 얼굴은 역시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모습을 본 듯한 창백한 얼굴이었다.
저가 아무리 남의 감정을 못 느낀다지만, 그의 표정은 두 살배기 어린애도 눈치챌 만했다.
“음…… 보아하니 아드님은 아버지가 등장하신 게 반갑진 않은 것 같은데요.”
닉시가 빈정거리자 길버트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녀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돌아가자, 닉시.”
“길?”
“빨리.”
이번엔 역으로 길버트 쪽에서 도피를 제안해왔다.
거절할 이유 없었기에 그녀는 흔쾌히 동참했다.
남자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불러 놓고, 그와 그녀가 도망치자 그것을 말리려 들진 않았다.
그의 뒤를 따르며 그녀가 고갤 돌려 남자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다리 한쪽을 저는 저 남자는 아마 본인들을 따라잡지 못할 듯 보였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그럴 마음도 없는 것 같고.
하지만 묘하게 그 태도가 기분 나빴다. 언제든 저들 앞에 등장할 수 있을 것 같단 느낌을 줘서.
그녀는 고갤 돌렸다.
벤자민과 라울은 술에 절어 쓰러진 경관을 침대에 뉘었다.
화가가 뻐근한 목을 몇 번 돌렸다.
그저 집에 들어가고 있을 뿐인데 중간 과정은 몽땅 잘라먹고 경관을 침대에 눕히고 있어야 한다니.
짧은 시간에 너무 과도한 게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져서 정신없었다.
“아, 벤자민.”
마을 회관 앞에서 그대로 헤어지려는 차, 라울이 그를 불렀다.
“닉시한테 들었어. 집 현관 바닥에 구멍이 뚫렸었는데 네가 고쳐 줬다며?”
그랬지. 저 때문에 그 이웃이 바닥을 날려 먹는 바람에.
벤자민이 고갤 끄덕였다.
“실력이 꽤 좋다 들었어. 가게 바닥 보수하는 것 좀 도와줄래?”
“내가 왜 그런…….”
“다 고칠 때까지 식사는 공짜로 대접할게.”
제법 괜찮은 딜이었다.
역시 저리 선량하게 미소 지어도 돈 계산 하난 빠삭한 바텐더다.
아마 인부를 고용해서 보수 주고 식사를 챙겨 주는 것보다, 가난한 화가에게 밥을 저당 잡고 소처럼 일을 시키는 게 더 수지에 맞단 판단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있으랴.
예로부터 예술가는 배고파 주리는 게 일상이었던 것을.
“……몇 시부터 가면 되는데.”
* * *
그날 밤. 마을 이장은 하늘에서 아버지가 떨어져도 순찰을 빠지지 않았다.
분명 그에게 있어서 큰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한데도 묵묵부답인 그가 닉시는 신경 쓰였다.
그래서 닉시는 이번에도 길버트의 밤 순찰에 동행하기로 했다.
“저번에 여름 축제 같은 걸 한다 했잖아? 언제쯤 해?”
“아마 장마가 끝나고 할 거야.”
“축제에서 많이 먹기 대회 같은 거나 여름 과일 나눔 이런 것도 하면 어때? 이번 여름엔 우리 집 블루베리가 풍작일 예정이거든. 마을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싶은데!”
그녀는 신나는 것들을 나열했다. 축제. 많이 먹기 대회. 여름 과일.
하지만 길버트의 왠지 모를 처진 분위기는 여전했다.
이런 머쓱한 상황을 싫어하는 닉시가 큰 숨을 들이켰다.
“역시 아까 만났던 남자 때문이야?”
길버트가 그녀를 바라봤다.
“아버지라고 했잖아. 근데 네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았어?”
“……그런 줄 알았어. 그리고 그 자식은 내 아버지가 아냐.”
그럼 또 뭐람. 아버지를 왜 아버지라 하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좀처럼 축 처진 분위기가 풀리지 않았다.
그들은 조용히 길을 걸어갔다.
“네가…….”
“응?”
“네가 그랬지. 그런 표정 하지 말라고.”
[너 자꾸 그런 표정 짓지 마. 신경 쓰인다구.] [……어……? 그런 표정?] [엉. 마을 이장 길버트 말고 길버트 그레이스 표정.]닉시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랬지.”
“그건 사실 길버트 그레이스의 표정도 아닐 거야.”
“그럼?”
그녀가 되물었다. 하지만 길버트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인내심이 별로 없는 그녀가 다시금 그를 재촉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길버트가 더 빨랐다.
“닉시. 그냥 알려고 하지 말아 줘. 그냥…… 응?”
길버트는 낯선 얼굴로 미소 지었다.
당사자가 그렇게 말하니 타인은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막상 그의 이야기를 듣는대도 저는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한다거나 위로 같은 걸 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닉시는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갤 끄덕였다.
그 뒤로 궁금함이 무색하게 사냥꾼은 마을에 보이지 않았다.
길버트는 그가 어디 있는지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평소처럼 행동했지만, 닉시는 굳이 묻지 않았다.
경관이 일어난 건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다행스럽게도 눈을 뜬 경관은 본인이 술을 마시고 저지른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마지막 기억이랄 건 에그인헬을 아주 맛있게 먹었던 것뿐이랬다.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라울의 술집 카운터에 앉은 경관이 중얼거렸다.
그의 머리엔 토끼 스티커가 붙은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다.
“그러실 만도 하죠.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라울이 식사와 함께 바닥 수리 청구서를 내밀었다.
0이 하난 더 붙은 금액에 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술을 마신 기억이 없는데 술에 취했었단 것도 이상한데, 본인이 술이 떡이 돼서 바닥에 엎어지는 바람에 구멍까지 만들었단다.
억울한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근데 정말 유감스럽게도 라울네 술집 바닥에 난 구멍은 제 머리와 딱 맞아서 억울하다고 항의할 수도 없었다.
일곱 번이나 확인해 봤지만 맞았다.
“크흠. 나눠서 지불하는 건…….”
“곧 장마인데 큰일이네요. 이 바닥 구멍으로 물이 들어오면 이 술집은 곧 나일강처럼 될 테고, 그럼 전 거리에 나앉게 되겠죠?”
바 주인은 태평하게 웃었다.
본인은 파라오도 아니니 라울의 술집에 불어난 물을 잠잠해지라고 쇼할 수도 없었다.
결국 경관은 앓는 소릴 내며 영수증에 서명했다.
“라울! 집에서 앵두청을 너무 많이 만들었는데 괜찮으면 여기서 나눠 줄래요?”
경관이 부들거리며 서명할 때 헬렌이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손이 큰 헬렌이 앵두청을 냄비째로 들고 온 것이다.
설탕을 많이 넣고 끓였는지 입구에서부터 단내가 진동을 했다.
“헬렌, 그럼요. 라임 탄산에 섞으면 근사한 칵테일을 만들 수 있겠네요. 어서 오세요.”
카운터엔 나눔 음식 전용 자리가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는 건강 마즙 시식회가 있던 그 자리였다.
경관은 일개미들마냥 부지런한 마을 사람들이 참 아니꼬웠다.
그렇게 빨빨 다니며 돌아다녀 봐야 무슨 이득이 있나 싶기도 했고, 미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경관은 헬렌의 굽이치는 붉은 머릴 바라보다 툭, 아는 체했다.
“머리칼은 여전히 예쁘군.”
헬렌은 자신에게 수작 부리는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골라내는 재주가 있었다. 어디서 배워먹고 오는 건지 그들의 수작 멘트는 거의 다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1위가 붉은 머리칼이 매력 있다. 2위가 머리칼이 붉은 장미 같다. 3위가 머리칼이 예쁘다.
심지어 경관이 한 말은 제일 정성도 없고 구렸다.
“식상한 멘트 칠 거면 마을로 돌아가. 칼.”
“워우, 그렇게 날 세우지 말자고. 그냥 옛날처럼 친하게 지내자는 것뿐이야. 요즘 마을 사람들 사이에선 까칠하게 구는 게 유행인가?”
잠깐만. 까칠하게 구는 게 보통? 그게 누구였지. 여자였던 것 같은데.
경관이 본인이 말하고 누굴 잊어버린 것 같아 가늘게 인상 썼다.
‘큰일이네, 헬렌이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되는데.’
곧 있으면 배고픈 화가가 니스칠한 나무판자를 들고 돌아올 시간이었다.
헬렌과 벤자민을 만나게 했다간 제14차 오베르 냉전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그는 제 가게가 얼음 왕국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라울은 초조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헬렌, 너는 오베르에서 태어나고 자랐지? 그럼 여기 이웃들을 빠삭하게 알겠군.”
“알아도 너한테 말해 줄 이윤 없어.”
“왜 그래. 당신과 내가 보통 사이인가? 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나랑 함께 자주 술 먹는 거 봤잖아?”
“……그래. 우리 남편한테 이상한 술버릇 들여놓은 놈이라 똑똑히 기억하지.”
“참나. 프러포즈를 망친 걸로 아직도 꽁해 있는 거야? 그래 그건 미안하게 됐어.”
창문 너머에서 밀크티 색 머리칼이 삐죽 튀어나왔다. 화가였다.
“잠시 실례할게요. 이야기 나누세요.”
라울이 소리 없이 카운터에서 나왔다.
벤자민은 술집 구석에 서 있었다. 헬렌이 안에 있어서 들어오진 못하고 그늘에 몸을 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들어와서 주방에 있을래?”
“됐어. 좀 이따가…….”
“이거 놓으라 했어!”
그가 말을 이어가려던 차, 가게에서 헬렌과 경관이 뛰쳐나왔다.
“내 질문에 답해 주면 놔 준다잖아.”
경관은 헬렌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화가가 바로 라울 뒤로 몸을 숨겼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헬렌이 화가의 비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보곤 아무 말 없이 고갤 돌렸다.
“그러니까 그걸 왜 묻는데! 네가 무슨 의도로 그걸 묻는지 모를 거 같아?”
“그레이스가 가계도에 아들이 없었다는 게 맞는지만 대답해 주면 된다고! 어려운 질문 아니잖아.”
처음엔 말로만 아웅다웅했던 게 점점 몸싸움으로 번졌다.
라울이 다급히 둘 사이를 가로막아 중재했다.
“칼 경관님. 건강 회복하신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러시면 안 돼요.”
“난 모르는 일이야. 꺼져!”
“쳇!”
경관이 팍 소리 내며 헬렌의 팔을 놔 주었다. 손목엔 희미하게 붉은 자국이 남았다.
보기에 유쾌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본인이 껴 있는 게 아니면 대부분의 소동에 무감흥했던 화가도 그걸 보곤 눈을 찌푸렸다.
“나도 아무 확신 없이 이러는 사람이 아니야. 믿을 만한 사람한테 듣고 온 거라고!”
“하. 마을 사람도 아닐 텐데 어디가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건데?”
“이 마을에 살았던 자랬어.”
“뭐?”
헬렌이 헛웃음 쳤다.
마을에 그런 걸 쉽게 나불대는 놈이 있다고? 그럴 리 없다.
헬렌이 아는 마을 사람들은 본인들끼리는 네가 죽니 내가 죽니 해도, 이방인들에게 제 이웃을 파는 사람들은 아니다.
전쟁을 거치면서 피와 슬픔을 함께한 사이인데. 절대 그럴 리 없었다.
“그게 누군데.”
칼은 짜증 섞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크 릭터.”
“……뭐?”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헬렌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입을 막았다. 그녀의 눈가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역시 뭔가 알고 있는 거지?”
경관이 헬렌의 심상찮은 분위기에 슬쩍 떠보듯 말했다.
하지만 헬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친 발을 절뚝이며 급히 몸을 돌릴 뿐이었다.
“뭐야! 대답은 해 주고 가야지! 이봐! 헬렌!”
경관이 헬렌을 따라가려다, 가게에서 제 모자와 곤봉을 챙기지 못한 것을 깨닫곤 다시 돌아왔다.
기묘한 위화감을 느낀 건 헬렌뿐만이 아니었다.
“……마크 릭터?”
벤자민이 중얼거렸다.
“너도 아는 사람이야?”
“아니.”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름은 낯이 익었다.
어디서 이 껄끄러운 이름을 봤을까.
그는 문에 기대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갑자기 기댄 탓에 벽에 세워놨던 니스칠한 나무판자들이 바닥에 와르르 넘어졌다.
“이런, 아직 니스 다 안 말랐을 텐데.”
“…….”
“뭐 해, 벤자민. 네 발아래 있는 것도 좀 주워 줘.”
“나무…… 개머리판.”
“뭐?”
나무판. 나무로 되어 있던 개머리판. 긴 산탄총.
지하실에서 봤던 총의 주인이었다.
“사냥꾼이야.”
“사냥꾼?”
“이웃이 눈에 불을 켜고 잡겠다고 난리인 사냥꾼.”
어쩌면 마을의 짐승들을 습격한 범인일지도 모르는 사람.
형태가 없다고 생각한 것들이 하나하나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화가에게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벤자민은 그 이름과 길버트 그레이스의 연관성을 일부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의 경험상 사건이 저와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면, 언젠가 깊이 빠져 버렸다.
어쨌든 자신은 물가에 얼굴만 내놓고 숨만 쉬고 싶은 사람. 그러니 가급적 끼어들고 싶지 않았는데.
‘그 이름을 처음 본 건 그때였지.’
비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쏟아지던 날.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에. 당신만 없었어도. 당신만…….]복부가 찢긴 고통과 너무 많이 흘린 피 때문에 아득해져만 가는 시야 속에서 봤던 청년.
갈색 머리와 올리브색 눈을 가진 청년.
그가 자신의 머리에 겨누고 있었던 총.
그 총의 개머리판에 새겨져 있던 이름.
“……이미 그때부터 발 빼긴 글렀던 건가.”
벤자민이 중얼거렸다.
그들이 서 있던 문 옆에서 잿빛 연기가 풍겨왔다. 독한 박하향 시가 연기였다.
“쯧. 이 마을에서 맘에 드는 건 저 밀밭 풍경밖에 없다니까.”
경관이 입에 문 시가를 질겅거렸다. 일이 잘 안 풀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매캐한 냄새가 역했던 벤자민이 슬그머니 그를 스쳐 지나가려 했다.
경관은 벤자민의 옆모습을 보며 후, 깊은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근데 자네. 억양이 특이하군.”
“…….”
“여기 살던 사람이 아니지?”
벤자민은 대꾸 없이 술집의 구멍 난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그는 들고 있던 나무판자를 들고 바닥에 갖다 댔다.
“오래 전부터 여길 순찰했는데 당신 같은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단 말이야.”
볕에 말린 갈대 마냥 밝은 머리카락. 길게 뻗은 눈과 콧대가 재수 없게도 잘생겼다.
칼이 끝이 다 탄 시가를 길가에 툭 던져 버렸다.
벤자민이라 불린 눈앞의 남자.
말을 길게 하는 걸 들어 보진 못했지만 얼마 안 되는 몇 마디에서 그의 억양이 이 근처 사는 사람들관 미묘하게 다르단 느낌을 받았다. 악센트 끝이 거칠고 둔탁한 느낌.
꼭 어느 나라 사람처럼.
“……난 게르만족을 보면 치가 떨리거든. 머리에 총알구멍을 만들어 주고 싶어.”
벤자민이 손에 못을 들곤 칼을 바라봤다.
“숨기고 있는 거면 끝까지 잘 숨기라고. 네가 더러운 게르만인 게 들통나면 널 스파이 혐의로 철창에 처넣어 버릴 테니까.”
오베르에서 인사처럼 듣는 게 게르만계 욕설이라서인가, 큰 타격은 없었다. 철창에 넣어 버릴 거란 협박은 처음이라 신선하긴 했지만.
벤자민은 끝끝내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에 시시해진 칼이 담배를 비벼끈 뒤 술집 밖으로 가 버렸다.
“조만간 네가 사라지면 철창 갔다고 봐야겠네.”
“그렇군.”
“……내가 말은 이렇게 해도 걱정하고 있는 거 알지, 벤자민?”
“전혀.”
마지막 나무판자에 못을 박아넣었다.
때운 게 여실히 티 났지만, 등받이 없는 의자를 위에 두면 그럭저럭 가려질 수 있었다.
라울이 수고했다며 멋들어진 점심을 내왔다.
와인에 조린 닭요리와 앵두청을 넣은 탄산.
그가 거래했던 것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요리였다.
오늘은 제 생일도 아닌데.
벤자민은 잘 조려져 윤기 도는 닭가슴살을 포도주 향이 나는 수프에 푹 찍었다.
‘사형수의 마지막 식단이란 건가.’
곧 경관이 자신을 잡으러 올 테니까.
자신이 독일인이라는 건 마을 사람 중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니 제 정체가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역시 이래서 시끄러운 사건에 발 들이기 싫었던 건데.’
그는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단맛을 씹었다.
* * *
일주일이 넘었는데 벤자민은 감옥에 잡혀 들어가지 않았다.
마을을 들쑤시던 경관도 김이 식은 건지 잠잠했다.
나름 마음의 준비까지 해 놓은 입장으론 머쓱하게 됐다. 물론 그렇다고 붙잡혀 가고 싶었단 말은 아니지만.
벤자민은 현관문에 기대 언덕 너머 먹구름이 짙게 껴 있는 하늘을 바라봤다.
저릴 때가 아닌데 손이 저릿한 것 보면 필시 비구름이었다. 그것도 꽤 긴.
마을도 조용하고, 경관도 조용한데, 이장도, 이웃도 조용했다.
평소 같았으면 천국이 따로 없는 상황이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그는 슬슬 물비린내가 나는 것을 느꼈다.
아주 티끌만 한 연관성.
길버트와 처음 만났을 때, 하나.
그에게 총이 겨눠졌다는 사실 둘.
어느새 말을 붙여 와서 꽤 이것저것 얻어먹은 게 있다는 게 셋.
별거 아닌 호의가 제 발목에 감겨 엮여 있었다.
‘또다. 이런 알량한 감정 때문에 상황을 외면하지 못하게 되는 거.’
그의 안 좋은 버릇.
어느새 저는 몇 가지 정같이 사적인 감정에 의해 사건에 빠져 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일이 쉽게 끝날 것 같진 않은데.’
저 멀리 짙게 깔린 어둠과 물비린내를 몰고 오는 긴 장마 구름처럼.
‘귀찮게 됐군…….’
벤자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벤자민은 길버트에게 경관이 ‘마크 릭터’란 사람을 알고 있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집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안녕 화가.”
근 열흘 만에 보는 이웃이었다.
늘 하루도 빠짐없이 눈도장 찍다가 겨우 일주일하고 사흘 남짓 못 본 것뿐인데 그녀의 목소리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살아는 있었군. 안 보이길래 굶어 죽었거나 잡혀갔거나 했는데.”
“아하, 그게 말이지, 혹시나 경관한테 들킬까 봐 집안에서만 숨어 살았거든. 겸사겸사 장마 대비도 하고!”
그녀는 본인의 밭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몸뚱이만 한 흙벽을 쌓았다 떵떵거렸다.
“이제 고구마밭만 남았어. 고구마밭 물길은 세느강처럼 예쁘게 꾸며 줄 거야.”
평소처럼 그녀의 조잘거림을 들으며, 그는 커피를 내렸다.
“화가, 약 떨어질 때 됐지? 내가 잘 알고 새로 지어왔지.”
한 잔 내릴걸 두 잔으로 나눈 탓에 커피는 커피 향 물에 가까웠다.
이걸 어떡할까 잠시 고민한 그는 어쩔 수 없지 하며 커피 두 잔을 들었다.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이번엔 겸사겸사 진통제랑 해열제도 함께 넣어 놨어. 진통제는 흰색이고 해열제는 노란색. 손 아프면 흰색 약 먹으라고! 오, 땡큐.”
그녀는 커피를 받아들었다.
“설마 그것도 맛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는 아직도 딸! 까지만 나는 약 맛에 적응하지 못했다.
닉시는 말없이 씩 웃었다.
있구만 맛.
“약값은 이 커피로 할게!”
주머니를 뒤져 돈을 찾는 화가보다 그녀가 먼저 선수 쳤다.
그녀는 카페테리아의 우아한 촌뜨기처럼 커피를 들이켰다.
“……이거 보리차야?”
‘커피 하나도 물맛 날 때까지 우려먹다니…… 가여운 화가…….’
“그런 거 아니니까 그렇게 보지 마.”
“헉! 어떻게 알았어?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런 건 이제 척 보면 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커피를 단숨에 비운 닉시가 컵을 탁 내려놨다.
“있잖아, 화가. 오늘 밤에 순찰 같이 돌래?”
순찰?
마을에 친구가 없어 소식통이 느린 벤자민이 그걸 알 리 없었다.
닉시는 마을에 있던 일련의 과정을 설명하며 며칠 전부터 길버트와 자신이 마을을 순찰했음을 말했다.
“마을 사람들을 지켜 주고, 보람도 있어. 운동도 되고! 게다가 요즘 들어 엄청 바쁜 길버트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인데.”
이렇게 좋은 점을 구구절절 말해도 그걸 들은 화가는, 당연하게도 ‘싫어.’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서 닉시는 화가가 집 밖에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 머릴 마구 굴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
“역시 그렇게 말할 줄……! 은 몰랐네.”
“정시에 마을 회관으로 가면 되나?”
“뭐야 화가. 왜 수락해? 곧 죽어? 너 그런 녀석 아니잖아…….”
그런 녀석은 또 뭐야.
그녀의 머릿속에 자신이 대체 어떤 모습인지 모르겠다.
“여튼 잘 됐다. 요즘 길버트가 조용해서 심심하던 참이었거든! 네가 있으면 더 신나겠지.”
길버트는 수상한 남자와 만난 이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묘하게 조용해졌다.
덕분에 닉시는 침묵을 깨기 위해 매일 밤 혼자서 웅변대회를 하고 있었다.
물론 화가가 끼어든다고 길버트가 각성할 것도 아니고, 저가 웅변을 그만둘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벽 보고 이야기하는 느낌은 안 들겠지!’
한편, 벤자민은 닉시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낯선 이유를 알았다.
처음엔 오랜만에 들어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녀는 아아아아주. 저어어엉말 미세에에하게…….
‘풀이 죽어 있다?’
그게 닉시에게 적합한 말인진 모르겠다.
다만 한 번 의식하고 나니 자꾸만 신경을 건드려댔다.
닉시가 화가 집구석의 좁쌀만 한 거미를 관찰하는 것도 ‘오늘따라 넋 놓고 멍하니 있잖아.’로 착각하게 될 만큼.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응?”
“한 잔 더 마실 건가?”
그래서 벤자민은 평소 그답지 않은 친절을 짜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드디어 죽을 때가 됐군’ 의심하듯, 괜히 뒤숭숭한 생각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우울해 보이는 농부는 단 하나였지만, 우울한 농부 때문에 괜히 저만 생각이 많아지게 되는 건 사양이었다.
마찬가지로 뭐 마땅히 위로하는 방법도 모르겠고, 가진 거나 식재료는 없어도 커피는 많다.
커피 한 잔으로 복잡한 생각들을 퉁칠 수 있다면 제법 나쁘지 않은 교환 아니던가.
닉시는 그의 말을 듣곤 씩 웃었다.
“그럼 어디 촌구석의 바리스타가 내려 주는 커피 맛을 볼까?”
그렇게 그녀는 화가네 집에 있는 세계 각국의 커피콩 맛을 봤고, 심장병이 온 것 같다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 * *
―끼익.
길버트는 상자를 열었다.
어느 옛날,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아버지였을 무렵 했던 말이 있다.
[사냥꾼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게 뭔지 아나?]내가 들고 있는 총?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사냥감? 가파른 산길과 위험천만한 사냥터?
[나 자신이야.]길버트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을 왜 조심해야 한단 거지?
어느 날 갑자기 내 손이 자아를 잃고 내 목을 조를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갑자기 사냥감이 된 것 같아서 벌벌 떨 것 같지도 않았고.
그의 아버지는 총을 닦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사냥꾼은 생물의 목숨을 빼앗아 살아간다. 처음 사냥을 하면 사냥감이 작은 토끼든 내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큰 늑대든, 무언가를 죽였을 때 오는 죄책감이 상당해. 근데 처음이 어렵다는 말 들어봤지? 그런 마음은 아주 잠시고 결국 짐승을 잡고 가죽을 벗기는 일이 익숙해진다. 그러다 보면 뭔가를 죽이는 데 아무런 감흥이 없어지지. 그렇게 괴물이 되는 거야.]어린 길버트로서는 알 듯 말 듯한 어려운 말이었다.
남자는 길버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나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된다.]―달칵.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산탄총이었다. 닉시의 집 지하실에서 가져왔던 그 총.
본인이 버린 그 총.
그놈의 이름이 박혀 있는 피 냄새 나는 총.
콩을 심은 곳엔 콩이 나고 짐승의 새끼는 짐승이다.
뭐든 처음이 어렵다 했던가. 어떤 면에선 맞는 말이었다.
정말 우습게도 그 남자가 살아 있단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는 그자를 어떻게 다시 죽여 버릴지를 생각했다.
길버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상자 뚜껑을 닫았다.
자정까지 10분 전.
화가는 마을 회관 앞의 나무 아래서 이웃과 이장을 기다렸다.
여름이라지만 밤엔 날이 제법 쌀쌀했다. 그는 긴 숨을 내뱉었다.
“오 화가! 일찍 왔네?”
닉시는 3분 늦었다. 왜 늦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의 두 손을 보면 절로 알 수 있었다.
물 떠 마시듯 오목하게 들고 있는 그 손바닥 안엔 오디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녀의 이가 시커먼 것으로 심지어 오면서 몇 개 주워 먹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길은?”
“아직.”
“그럴 리가 없는데!”
지각이란 단어는 마을 이장님의 사전엔 없었다. 늘 아침 새처럼 부지런했던 게 그인데.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닐까? 계단을 내려오다가 굴러서 정신을 잃었다든지?”
“3분 가지고 호들갑이군.”
“인생은 어떻게 굴러갈지 몰라. 너도 오늘 이 시간에 집에 안 있고 여기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차라리 잠들었다고 보는 게 더 신빙성 있지 않나.”
“화가.”
“……왜.”
“똑똑한데?”
벤자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모로 까닥였다. 그리곤 희미한 자괴감에 빠졌다.
방금 그는 누가 봐도 뭐 이런 걸 다. 하는 제스처를 취했으니까.
“그럼 깨워야 하나? 안 그래도 요 며칠 마을 순찰하느라 잠을 잘 못 잤을 텐데.”
말은 누굴 걱정이라도 하는 듯했지만 그녀의 발은 착실하게 길버트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화가는 그녀 특유의 깽판에 시동을 거는 발소리를 기가 막히게 알았다.
“어? 길!”
그와 그녀가 길버트의 집 앞에 도착했을 쯤, 때마침 그가 문을 열고 나왔다.
“미안, 조금 늦었지.”
“나한테 미안할 건 없지, 이건 약속 같은 게 아니고 마을 순찰일 뿐이니까. 정 미안해할 거면 마을의 치안에 용서를 구하라구.”
“미안합니다, 마을 사람들.”
길과 닉시가 시답잖은 농담을 조잘대며 길을 걸었다.
닉시의 말대로라면 길은 제법 조용한 상태여야 하는데 생각보다 평소 같았다.
그들은 가장 처음으로 버드나무길을 낀 돌담을 지났다.
갈색 고양이가 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흰색 집의 테라스를 스쳐 지나가고, 조금 솟아 있는 언덕을 올라갔다.
“아깝다……. 진짜 맛있었는데.”
닉시는 두 손 가득 오디를 들고 다니다가 언덕에서 넘어졌다.
안타깝게도 넘어지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버렸기 때문에 탐스럽던 오디들은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즙이 되었다.
그녀의 주먹은 장렬히 전사한 오디들의 희생으로 시커멓게 물들어 버렸다.
“이빨이 안 깨진 게 다행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다 따지 말고 그냥 놔둘 걸 그랬어. 그럼 내일도 먹었을 텐데.”
소담한 언덕길을 지나 양 목장을 끼고 걸어간다. 작은 호수가 있는 곳에서 멈춘다. 호수에 비친 달이 예쁘단 이유였다.
“오늘도 수상해 보이는 건 없네. 들짐승도 없고 사냥꾼 같은 것도 없고.”
“……이제 나타날 필요가 없어졌는지도 모르고.”
“무슨 뜻이야, 길?”
길버트가 뭔갈 생각하는지 길게 흐음 하는 소릴 냈다.
“닉시. 집 안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초인종을 계속 눌렀어. 그러다가 초인종 누르는 걸 멈춘다면 이유가 뭘까?”
“어…… 안에 있던 사람이 ‘나가요!’라고 해서?”
“비슷한 이유야.”
닉시는 더 모르겠단 말을 했다.
들짐승과 초인종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요즘 들짐승은 초인종을 누르고 사냥하겠습니다, 하고 들어간다는 말인가.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일 때, 벤자민은 얼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눈치챘다.
‘마을 가축을 사냥하던 사냥꾼이, 마을 안의 누가 자신을 눈치챈 것 같아서 사냥을 멈췄다라.’
마크 릭터가 사냥꾼이라는 걸 알았으니, 사냥꾼을 눈치챈 마을 안의 누군가.
그건 길버트겠지.
그럼 사냥꾼이 길버트를 찾는 이유는…….
‘그건 경관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
자신을 곧 스파이 혐의로 철창에 넣을 예정인 경관.
북쪽 숲에 붙어 있는 가장 끝 집까지 무사한 걸 확인했다.
어느덧 깊은 새벽. 가장 어둡다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마을 사이를 돌아 오솔길 삼거리로 가는 대신, 마을의 밀밭을 가로질러 가기로 했다.
무릎 위쪽을 간질이는 넓고 푸른 물결. 달이 밝아서 진 푸른 밀밭이 훤히 보였다.
닉시가 수풀 사이로 와악 달려 들어갔다.
일순간 밀밭 사이로 수많은 빛 덩어리들이 솟구쳤다. 반딧불이었다.
“와아……!”
수많은 반딧불이가 덩치 큰 노란 인간의 습격에 놀라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닉시는 눈을 잡으려는 강아지처럼 감탄사를 내뱉으며 겅중겅중 뛰었다.
“화가, 길! 보여? 너무 예쁘지!”
도시에선 보기 힘든 빛무리들이었다.
닉시는 해사하게 웃으며 일부러 밀밭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가 저 멀리 뛰어가 버리고 화가와 이장은 덩그러니 들판 한가운데 남아 버렸다.
[나도 아무 확신 없이 이러는 사람이 아니야. 믿을 만한 사람한테 듣고 온 거라고!]그제야 화가가 마을 이장에게 해야 할 말을 꺼낼 수 있는 시간이 온 것이다.
“……경관이 마크 릭터란 사람을 알고 있었어. 그 사람이 경관에게 너에 대해 말해 줬다더군.”
벤자민의 예상대로 뭔가 있긴 한 건지 길버트가 눈을 크게 떴다.
길버트는 밀밭 울타리에 몸을 기대며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경관이 뭘 알고 찾아온 건가 보네요.”
경관의 묘하게 확신하는 말투가 거슬렸는데, 들은 게 있는 거였다. 그놈한테.
벤자민이 그를 흘긋 내려다봤다.
“그자를 죽였다 하지 않았나?”
[제가 죽인 새끼예요.]벤자민은 그렇게 말했던 길버트의 구겨진 얼굴을 기억했다.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멀쩡히 살아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건가.’
[리히터 씨는 본인이 없애 버렸다고 생각했던 게 멀쩡히 살아남았다는 걸 알면 어떡하실래요?]“…….”
화가는 그의 옆에 섰다.
밀밭에서 날아오른 반딧불이들이 바람 따라 하나둘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벤자민은 밀밭의 밤바람을 맞으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툭, 내뱉었다.
“네 가족이었군. 그자.”
“그걸…….”
어떻게. 길버트는 뒷말을 삼켰다.
“……직접 본 닉시도 가족이라는 걸 못 믿는 눈치던데, 리히터 씨는 보지도 않고 바로 피가 이어진 가족이란 걸 눈치채시네요.”
“…….”
“어떻게 아셨어요?”
“…….”
“……티가 나던가요?”
그는 그렇게 말하곤 주먹을 꽉 쥐었다.
화가는 답하지 않았다. 때론 침묵이 더 도움 될 때도 있는 거니까.
길버트는 울타리에 기대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눈높이까지 차오른 푸른 밀밭은 넘실거릴 때마다 꼭 시야에 물이 차오른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손을 뻗어 서늘한 촉감의 풀을 매만졌다.
“……저는 늘 아버지처럼 살고 싶었어요.”
길버트가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다.
제게 그레이스란 성을 물려주고 허무하게 죽어 버린, 웃는 게 무기라 했던 남자. 사냥꾼 같은 쓰레기 자식이 아니라.
“왜 그런지 알아요?”
“글쎄.”
“전 죽었다 깨도 그 사람의 진짜 아들이 아닐 테니까.”
아무리 그의 집에 살고, 그를 닮으려고 노력해도. 그의 성을 붙이고 있어도 한계가 있었다.
타고난 피라는 한계.
길버트는 웃으면 둥그렇게 휘는 눈매를 가졌지만, 사실 그건 열심히 노력한 결과물이었다.
실상 그의 눈매는 끝이 날카롭게 올라간 형태였다.
그자를 닮은 꼴. 태생적인 한계.
사실 처음엔 괜찮을 줄 알았다.
모든 건 마음 먹기 달렸다지 않은가. 얼굴 닮은 게 뭐 대수인가. 그자의 유전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근데. 아니더라고요. 대단하더라고요, 물려받은 천성이라는 거.”
“…….”
“말해 줘요, 리히터 씨.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란 건 변하지 않을까요?”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기울어만 가는 새벽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변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겪어 봤으니까.”
“어떻게 변하셨는데요.”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군.”
“그래도 말해 주세요. 한 귀로 듣고 흘릴 테니까.”
“……지금보단 친절했지.”
친절한 화가라. 길버트는 설핏 웃었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거짓말. 당신은 지금도 친절해요.”
그의 중얼거림에 벤자민도 픽 웃었다. 꼭 제가 아는 누구랑 똑같은 말을 해서.
저 멀리 드디어 반딧불이를 잡은 건지 신난 이웃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경관이 그자에게 모든 걸 다 들었다면 잡혀가는 건 시간 문제겠죠?”
“혼자는 안 가겠군. 나도 조만간 적국의 스파이라느니 오명을 쓰고 함께 가게 될 것 같으니까.”
“하하. 그거 참 위로되네요.”
그럼 지금 보는 풍경이 마지막 오베르의 마지막 풍경인가.
길버트는 눈을 깜빡였다.
마지막 풍경이 뭐 하나 잘 보이는 것 없는 캄캄한 새벽녘에, 엉덩이에서 불나는 벌레들이 가득한 풍경이라니. 이왕이면 예쁘고 아름다웠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 그 어느 때. 보랏빛 제비꽃이 벅차게 찰랑이던 언덕. 그의 평화로운 가족들과 함께 소풍을 갔던 그 풍경처럼.
“벤자민 씨.”
이름을 불린 화가가 길버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앞으로 전 어떡해야 할까요.”
길버트의 질문에 벤자민은 제법 긴 시간을 침묵하다 말했다.
“그냥 입 다물고 있어.”
“하하. 그게 무슨 대답이에요. 입마개 한 개처럼 굴라고요?”
“그러면 이 마을이 죽어도 널 지켜 줄 테니까.”
벤자민은 알았다. 저는 이방인에 불과하지만, 마을의 일원인 길버트 그레이스를 마을은 가만히 놔둘 리 없다는 것을.
길가의 밥 주던 개가 잡혀가도 악을 쓰고 쫓아가는 게 정을 나눈 자의 습성이다.
근데 그런 끈끈한 마을 사람들이 싹싹하고 친절한 마을 이장 길버트가 잡혀가는 데 가만 놔둘 리 없었다.
다들 이를 세우고, 연장을 들고 난리 치겠지. 뻔했다.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죽어도 지켜 줄 거란 거.”
길버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입 다물고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다칠 거란 말이잖아요. 다…… 다 나 때문이라고요.”
“…….”
“그러니까 제가 먼저 하지 않으면…….”
“길! 화가!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닉시가 밀밭을 헤치고 나타났다.
그녀는 심상찮은 분위기에 둘을 번갈아 봤다.
산통을 깨는 건 화가의 특기니 화가가 범인인가 싶어 그를 바라봤지만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았다.
평소 같지 않은 건 요즘 유난히 조용한 길버트 쪽이었다.
“자, 자, 내가 반딧불이 잡아 왔다고! 그거 알아? 반딧불은 죽은 자의 넋두리래. 우리 무슨 말 하는지 들어볼까?”
닉시는 시꺼메진 손을 조심조심 펼쳤다.
그러자 야광별 같은 은은한 빛과 함께, 짝짓기하는 한 쌍의 반딧불이가 나타났다.
“뭐야 이 미친놈들!”
닉시는 기겁하며 손을 파드득 털어냈다.
길버트가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안타깝게도 넋두리는 들을 수 없었다. 들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했고.
그는 저 멀리 흩어지는 빛무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돌아가자. 잘 시간이야.”
“좋은 생각이야. 마침 피곤했거든.”
“그건 아마 반딧불이를 잡으려 해서 같지만!”
길버트와 닉시가 앞장서서 길가를 걸어 나갔다.
화가는 한 발짝 뒤에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닉시는 갑자기 삼거리 오솔길까지 달리기 내기를 할 것이라 소리쳤다.
닉시는 바닥에 긴 금을 그었다. 스타트 라인이었다.
“준비하고!”
그사이에 낄 마음은 죽어도 없는 벤자민은 그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땅!
반칙의 여왕 닉시는 반 박자 일찍 출발했다.
“화가! 여기, 내일 또 오자!”
그녀는 벤자민 옆을 스쳐 지나가며 외쳤다.
닉시가 저 멀리까지 전력 질주하며 멀어지고, 길버트는 적당히 뛰는 척하다 벤자민 근처까지 오자 걸음을 늦췄다.
왜 안 뛰고 있느냐 묻는 듯한 화가를 본 그가 싱겁게 웃었다.
“어차피 져 줄 생각이었으니까요.”
참으로 그다운 이유였다.
벤자민은 저 멀리 승부가 정해진 줄도 모르고 열심히 달려가는 닉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래. 저 녀석한텐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 * *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됐다.
닉시는 물골을 어떤 모양으로 틀까 하다 아직 물길을 트지 못했다.
밤낮으로 곡선이냐 직선이냐를 고민했건만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예술적이면서도 심플한 모양을 찾으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결국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농사의 신 길버트를 찾기로 했다.
“어라? 집에 없나?”
닉시는 그의 텅 빈 집에 도착했다. 언제부터 없었던 건지 집 안 공기가 탁했다.
“우산은 여기 있는데.”
그의 깜찍한 레이스 우산(겸 양산)은 얌전히 신발장 안에 끼워져 있었다.
그럼 비가 이렇게 주륵주륵 내리는 오늘 같은 날, 대체 어딜 갔단 말인지.
창밖으로 지겨운 비가 후두둑 떨어졌다.
“엔간하면 집을 비우는 일이 별로 없는데.”
결국 닉시는 그의 집을 나왔다.
집 앞, 테라스에 놓인 빈 의자에 앉아 마을 이장님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의 인내심이 반쯤 떨어졌을 무렵. 저 멀리 익숙한 누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산을 손에 쥐고 비를 맞으며 걸어오고 있는 화가였다.
‘하여간 이놈의 사람들은 가랑비 무서운 줄 모른다니까.’
“우산이 있으면 쓰고 오지 그걸 또 왜 맞고 있어? 누가 샌님이라 그래?”
그래 놓고 대머리가 되면 그제야 아~ 내가 남들한테 계집애 같다고 놀림받아도 우산을 쓰고 다닐걸, 후회할 거면서.
벤자민은 길버트의 집 테라스에 들어와 머리칼을 털었다.
이미 흥건한데 털어 봐야 쫄딱 젖은 꼴은 그대로였다.
“내가 불 빌려줄까? 마침 예쁜 점화기를 샀거든.”
머리를 태워 줄까? 와 비슷한 말을 하는 그녀를 힘껏 사양했다.
“길버트 그레이스는.”
“지금 집에 없어. 근데 이 이른 시간에 마을엔 웬일이야?”
“비가 와서.”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그의 집 문고리에 걸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길버트의 우산을 이 남자가 부숴 먹었지.
그렇다고 하나뿐인 우산을 갖다주러 오다니.
미련한 건지. 미련하고 융통성도 없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
벤자민이 다시 빗속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닉시가 그의 옷을 붙잡았다.
“시간 괜찮으면 같이 기다려 주라.”
“괜찮지 않으면 놔줄 건가?”
“알면서.”
그녀가 장난스레 윙크했다.
멀리서 이 이웃이 집 앞을 지키고 있는 걸 보았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그는 한숨 쉬며 닉시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뼈 시린 비 오는 날의 이른 아침이었지만 시골 사람들은 굴하지 않았다.
닉시와 벤자민이 길버트의 집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하나둘 깨어난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활보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이른 시간부터 마을 이장의 집을 점거하고 앉아 있는 닉시와 벤자민을 보며 약간의 측은한 눈을 하고 지나갔다.
그들은 모르겠지만 비 때문에 머리카락이 축 눌어붙은 꼴을 하고 있는 닉시와, 비를 맞고 추워서 입술이 창백해진 벤자민의 꼴은 꼭 집주인을 기다리는 꼬질꼬질한 시골 개들 같았기 때문이었다.
처량하고, 추레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길버트의 갈색 머리칼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닉시가 의문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마을을 찾아봐야겠어. 더 있다간 우리 집 고구마들 다 수장당해.”
드디어 풀려나게 된 화가도 다시 앉게 될세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헬렌!”
“닉시! 랑…….”
타이밍 좋게 헬렌이 걸어왔다. 헬렌이 화가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줄였다. 벤자민은 도로 쭈그려 앉았다.
그가 등을 돌렸다. 그제야 헬렌이 조근조근 입을 열었다.
“길버트 없니?”
“네. 혹시 어디 갔는지 알고 있어요?”
“아니. 새벽부터 찾아와서 이런 걸 주고 갔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게 계속 걸려서. 무슨 일 있었나 보려고 왔는데…….”
헬렌이 들고 있는 건 소나무 실링 왁스가 발린 편지 봉투 한 장이었다.
“길버트가 이런 편지 같은 걸 나한테 준 것도 좀 이상했고.”
[헬렌. 이걸 헬렌이 가지고 계셔 주세요.]누군가에게 보낼 비밀 편지라기엔 표정이 짙었고, 중요한 서류라기엔 길버트는 글을 쓸 줄도, 읽지도 못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헬렌이 경관에게 마크 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아침에 길버트가 찾아오자 그녀는 조심스레 경관과 마크 릭터가 아는 사이임을 드러냈다.
길버트는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그냥 미소 지었다.
[걱정 마세요, 헬렌. 제가 알아서 할게요.]그렇게 말했던 게 고작 몇 시간 전인데.
“이유를 물어보기도 전에 어디로 가버렸거든. 주인 허락 없이 열어 보기도 좀 그래서.”
닉시가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헬렌은 반사적으로 종이를 그녀의 손에 올렸다.
“얍!”
“어머!”
닉시는 손등으로 깔끔하게 왁스를 떼어냈다.
망설임이라곤 손톱 때만큼도 없는 뻔뻔한 행위에 헬렌이 깜짝 감탄사를 내뱉었다.
닉시는 종이를 부스럭거리며 펼쳤다.
양심보다 불안함과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헬렌도 고개를 내밀었다.
“음…… 이게 뭐로 보여요?”
“음……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면…….”
집문서였다.
닉시와 헬렌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봤다.
“……혹시 길버트가 헬렌한테 저당 잡혔어요?”
“그럴 리가. 빚은 오히려 내가 있는데, 40유로 정도. 여름 장터에 갔었을 때 지갑을 가져온다는 걸 까먹어서 조금 빌린 적이 있거든.”
“여름 장터요? 지금도 여름인데. 며칠 전인데요?”
“작년 여름!”
“작년? 헬렌 양심 어디 있어요?”
“근데 이걸 왜 나한테 줬을까…….”
닉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보통 이런 문서를 남에게 넘기기도 하나? 가족끼리도 안 넘길 텐데.
도통 이해하기 힘든 건 헬렌 또한 마찬가지인지 그녀는 집문서를 이리저리 바라봤다.
“나한테 집을 잘 부탁한다 한 것도 아닐 텐데.”
바로 옆에서 떠들어대니 화가는 내용을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그런 중요해 보이는 걸 마을 사람에게 주고 간다?
아무리 남에게 퍼 주는 거 좋아한다 해도 그런 것까지 퍼 주는 건 ‘사람 좋아서’란 말로 함축하긴 어려웠다.
‘보통 둘 중 하나지. 바보거나, 곧 죽거나.’
방금까지 아무렇지 않았던 솨아아 쏟아지는 빗소리가 괜스레 제 귓가를 아프게 때려왔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입 다물고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다칠 거란 말이잖아요. 다…… 다 나 때문이라고요.]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에. 당신만 없었어도. 당신만…… 너만 없었으면.] [그러니까 제가 먼저 하지 않으면…….] [……나만 없었으면.]밀밭이 흔들리며 비 오는 소리를 냈던 새벽과 지금처럼 쏟아지는 빗속에서 죽어 가던 그때.
둘 중 하나. 바보거나, 곧 죽거나.
“설마.”
벤자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곧장 이웃과 헬렌에게 물었다.
“이봐. 길버트 그레이스는 어디 있지?”
“어, 어? 그걸 몰라서 우리도 이러고 있잖아.”
“하…… 질문을 바꾸지.”
설마, 하고 화가의 머릿속에 번뜩 스쳐 지나간 생각.
“길버트 그레이스가 갈만한 곳은 어디 있지?”
길버트 그레이스는 그 남자를 죽이러 갔다.
* * *
비가 오면 소년의 집은 금세 눅눅해졌다.
나무와 진흙으로 지어진 집은 아무리 모닥불을 피워도 마르는 법이 없다.
비가 오면 소년의 집은 숨 막히게 조용했다.
이런 날에 사냥하러 나갔다가 아킬레스건을 다친 아버지는 늘상 비가 오면 절게 된 다리가 아프다며 술을 마셨다.
비가 오면 소년의 집은 쉽게 엉망이 되었다.
사냥을 못 하게 된 남편 대신 산나물을 뜯으러 나갔던 어머니가 독사에 물려 죽은 뒤론 더 쉽게 엉망이 되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언젠가 제가 경고했던 것처럼 괴물이 되어 가고 있었고, 그 자신도 스스로를 제어할 생각이 없었다.
비가 오면 소년은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다 문짝이 부서지고, 나무 파편이 날카롭게 찢긴 그곳에 손바닥이 찍히게 됐다.
문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소년과 문을 쾅쾅 두드리는 아버지의 싸움으로 방문 벽은 핏자국으로 지저분하게 물들었다.
그 추레한 집에 살던 소년은 철사를 감아 짐승의 목에 잘 걸릴 덫을 만드는 것보다, 주운 동화책을 읽고 싶었다. 거기 나오는 주인공 개가 마지막에 왜 죽는지 알고 싶었으니까.
글을 모르니 알 수 있을까 싶었지만.
비가 오고, 천둥이 치고. 그의 아버지가 오면 세상이 온통 쾅쾅댔다.
“그날도 그랬죠.”
길버트는 총알을 장전했다.
빗소리가 거칠어서 묻힐 만도 했는데, 서늘한 금속음은 조용히 묻히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겨눠진 총구를 보며 사냥꾼이 킬킬 웃었다.
“그날. 그날이라.”
“마을 근처를 서성이신다면 여기 한 번은 꼭 오실 줄 알았어요.”
“하하. 네가 이 절벽에서 나를 밀었던 때를 말하는 거냐?”
사냥꾼이 다가왔다.
다 무너져가는 오두막. 그의 작은 아지트. 그와 그가 살았던 과거.
군데군데 무너진 곳으로 비가 쏟아져 내렸고, 바닥을 적신 것들은 질척한 진흙이 되어 발을 푹푹 빠지게 만들었다.
“난 당신의 피가 나한테 흐른다는 게 너무나 저주스러워. 차라리 그때 죽지 그랬어.”
길버트는 남자에게 총을 겨눴다.
그의 아버지는 언젠가 그도 짐승을 쏘게 될지도 모른다며, 총 쏘는 법을 가르쳐 줬다.
그게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그 이후로 총을 만진 건 손에 꼽는데, 그의 자세는 완벽했다.
마치 사냥꾼의 아들이 사냥꾼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대체 왜. 왜 돌아왔어? 왜 살아 돌아온 건데. 왜, 살아 돌아온 게 당신인데. 왜 하필 당신이 살아 돌아온 건데.”
“길버트 릭터.”
“그딴 이름으로 부르지 마!”
눈앞의 남자는 제 아비가 아니다. 제 아버지는 제비꽃밭에서 포탄을 맞고 죽었다. 소풍날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이 까매서, 새카만 구름이 몰려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하늘을 덮은 전투기의 굉음. 쏟아지는 포탄을 맞고 가족들은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가 잠시 우산을 들고 오겠다며 마을에 내려간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널 왜 찾아왔…….”
“아니! 당신이 지껄이는 말 따윈 들을 가치도 없어. 네 같잖은 변명 따윈 안 들어. 말 한마디라도 해 봐. 바로 머릴 날려 버릴 테니까.”
길버트가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남자는 한 발짝씩 물러났다.
이윽고 그들은 지옥 같던 오두막에서 벗어나 오두막이 있는 언덕길. 가파른 비탈. 비가 오지 않을 땐 고기 잡기 좋던 작은 강가 같은 강. 하지만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장마가 되면 순식간에 불어나 아가리를 벌리는 흙탕물이 되는 강가 위.
절벽에 닿았다.
“그때처럼 밀어 버리려는 거냐? 못 본 새 꽤 잔인해졌구나.”
[길버트. 그렇게 해서 이것이 죽을 것 같아? 확실히 목을 비틀어야지. 넌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여.]빗물이 눈에 들어가 따가웠다. 빌어먹게도 더럽게 따가웠다.
사실…… 그렇다고 이 자와 좋은 기억이 아무것도 없었나 하면, 그건 아니다.
좋았던 기억도 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다리가 멀쩡할 때 사냥꾼은 자상하고 멋진 아버지였다. 저를 목말 태우고, 나무 오르는 법을 알려 주던, 정상적인 아버지.
추억이란 건 늘 그랬다.
나쁜 기억을 태산만큼 쌓아 놓고선, 티끌만큼의 좋은 기억이 있었다고 씁쓸하게 미소 짓게 만든다. 역겹게.
길버트는 제 눈앞의 괴물이 지금처럼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을 때를 늘 상상했다. 잠을 자다, 밥 먹다, 쉬다 불쑥불쑥.
혹시나. 그럴 리 없지만, 살아 있냐고.
그럼 어떻게 살고 있냐고. 잘 지내고 있냐고.
만약 그렇다면 죽어 버리라고.
쏟아지는 빗속.
오랫동안 비를 맞아 시야가 먹먹해져 왔다. 펄펄 열이 끓었다.
길버트는 이를 꽉 깨물었다.
문득 흐려진 시야 사이로 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눈앞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빌어먹게도 늙어버린 남자였다.
일순간 그의 방아쇠에 굽어 있는 손가락에 힘이 탁 풀렸을 때.
“……말했지. 넌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여.”
사냥꾼이 목발로 길버트의 총 든 손을 후려쳤다.
어깨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
―탕!
허공을 쏘아버린 폭음에 한쪽 귀가 멍해졌다.
곧이어 머리에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다.
총을 주워 든 남자가 그것으로 길버트의 머리를 세게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후두둑. 붉은 핏방울이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빗방울관 확연히 다른 감촉의 뜨뜻한 것이 제 머릴 적셔오는 게 느껴졌다.
시야가 뒤집힌 것마냥 핑핑 돌았다.
그는 연신 이명이 울리는 귓가를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쯧, 형편없긴.”
사냥꾼은 총알을 꺼냈다. 철컥, 철컥. 총알은 총탄에 매끄럽게 끼어들어 갔다.
“날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얼마나 잘 사는지 구경이나 할까 했는데.”
“헉…… 으윽…….”
“실망이구나, 아들아.”
“누가…… 네……!”
사냥꾼은 길버트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남자는 그의 옷깃을 끌어다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절벽 위.
엉망인 몰골로 쓰러진 그를 한쪽 다리로 지그시 밟은 사냥꾼은 그의 머리에 대고 총구를 고정했다.
간신히 숨만 내쉬는 짐승을 짓밟은 뒤 숨통을 끊는 행위였다.
“이제 그만 끝내자.”
사냥꾼의 손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는 눈을 감았다. 멍한 귀에서 찡한 이명이 들렸다.
이상했다. 감은 눈 위로 빗물 떨어지는 감각이 여전히 선명했다.
“……야…… 이…… 놔!”
“이…… 뭐……!”
물먹은 듯 웅웅대는 소리. 몸이 마구 흔들리는 듯했다.
일순간 몸을 짓누르던 사냥꾼의 발이 떨어져 나간 느낌이 들었고.
“길버트!”
그는 눈을 반짝 떴다.
“길, 괜찮아? 저 미친놈 아빠라며? 요즘은 가정 교육을 이렇게 시켜?”
“닉시…….”
“아, 아니. 젠장 그럴 리는 없겠지. 그런 놈에게는 대디 대신 더 좋은 단어가 있잖아?”
닉시는 제 소매를 북 찢어 길버트의 머리에 대고 지혈했다.
화가는 사냥꾼이 들고 있는 총의 총열 부분을 잡고 실랑이 중이었다.
“화가! 저 쓰레기 좀 어떻게 치워 봐!”
사냥꾼이 방아쇠를 당긴 순간, 화가가 총을 붙잡고 위로 들어 올렸고 총알은 길버트에게 박히는 대신 허공에 발포됐다.
그 탓에 벤자민이 사냥꾼과 대치하게 됐고, 그 틈을 타 닉시가 쓰러진 길버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말이, 되는, 소릴 해.”
화가가 한 단어 한 단어 씹어먹듯 말했다.
급해서 아무거나 잡았는데 하필 발포되는 타이밍에 맞춰 총열을 만진 탓에 화상 입은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빗물이 곧장 열기를 식혀 준 건 고마웠으나 총기를 가진 사냥꾼을 얼마나 더 붙잡아 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길. 움직일 수 있겠어?”
“……어떡…… 윽…… 하게.”
“어떻게든 해 봐야지.”
‘저 총만 어떻게 하면……!’
닉시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를 손에 쥐었다. 힘 싸움이 팽팽할 때 섣불리 끼어들면 오히려 다칠 위험이 컸다.
그녀는 희미하게 한쪽 다리를 절고 있는 남자의 다리를 노렸다.
그의 무릎을 노린 돌멩이는 둔탁한 소릴 내며 떨어졌다. 사냥꾼의 눈이 일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남자의 자세가 흐트러지자 닉시가 곧장 벤자민과 사냥꾼 사이로 파고들었다.
팔꿈치로 남자의 턱을 가격한 그녀가 몸을 돌려 총을 잡은 손을 비틀고 한쪽 팔에서 총을 빼내었다.
‘이쪽 팔은 그냥 물어뜯어 버리는 게……!’
그 순간.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쿵!
포탄의 첫 발포 소리를 닮은 것.
머지않아 전쟁이 시작된다는 신호와 비슷한 것.
손발이 차갑게 식으며 동공이 크게 확장되게 만드는 것.
천둥소리.
“꺄악!”
닉시가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너……!”
동시에 사냥꾼이 화가의 손을 팔꿈치로 쳐냈다.
그가 비틀거리며 물러난 사이, 그 남자는 총구를 닉시에게 고정했다.
“닉시!”
길버트가 남자의 옷을 잡아당겼다.
―타앙!
간신히 총구는 궤도를 엇나갔다. 하지만 여러 개의 탄환 중 하나가 화가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새끼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사냥꾼이 개머리판으로 길버트의 머리를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길버트가 털썩 쓰러졌다.
‘젠장!’
화끈하게 작열하는 팔. 식을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비. 질척이는 땅. 슬슬 고통이 시작된 손.
벤자민이 환상통을 애써 억누르며 상황을 바라봤다.
사냥꾼이 길버트를 후려갈기고 저를 향해 고갤 돌렸다.
끼릭 하고 돌아가는 룰렛. 힘이 들어가지 않는 한쪽 팔.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리 벗어날 법을 찾으려 해 봐도 전부 절망적인 결론밖에 없다.
남은 건 그럼.
벤자민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길버트를 확 들쳐 멨다. 동시에 주저앉은 닉시의 팔목을 잡았다.
남은 건 도망뿐이었다.
그는 사냥꾼에게서 등을 돌려 뛰었다.
‘멍청한 것. 사냥꾼한테 등을 보여?’
남자는 화가의 등을 겨냥했다.
그가 쏟아지는 빗속에서 흐릿해지는 벤자민의 등을 조준할 때쯤.
“닉시.”
“……으……흐…… 화가…….”
“정신 있으면 숨 참아!”
벤자민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
“…….”
―풍덩.
그들을 삼킨 검은 아가리가 큰 흙탕물을 토해 냈다.
* * *
“케흑…… 콜록…….”
빠르게 흘러가는 물살 속에서 벤자민이 겨우겨우 수면 위로 고갤 내밀었다.
의도치 않게 들이켜게 된 흙탕물을 뱉었다.
수심이 깊었음에도 강물에 빠질 때의 충격으로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이 아팠다.
길버트와 닉시는 쭉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를 짊어지고 있는 왼쪽 어깨도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더 큰 문제는 오른손에 쥐고 있는 닉시의 축 처진 팔이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놓으라고 손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러왔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붙잡을 수 있을 만한 걸 찾았다.
간신히 나무뿌리를 잡아 흙밭에 도착했다. 기어가듯 겨우겨우 뭍에 다다랐다.
골짜기의 깎아내리는 절벽.
둔탁한 지형 사이사이엔 비를 피하기에 적합한 동굴 따위가 있었다.
그는 길버트와 닉시를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그곳으로 향했다.
동굴 안은 간신히 세 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빠듯했다.
벤자민은 동굴 벽에 길버트를 내려놓고 닉시를 벽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벽을 잡고 물을 게워냈다.
“욱, 우욱…….”
물이 잔뜩 들어간 위와 폐가 터질 것 같았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절벽으로 뛰어든 것도 반은 도박이었다.
그대로 남자와 대치했다면 그가 들고 있는 총에 모두 갈가리 찢겼을 테니까.
‘그렇다 해도…….’
먹은 거 없는 위액까지 쏟아내고 나서야 경련을 멈출 수 있었다.
그제야 총탄에 스쳤던 팔 부근이 아릿하게 아팠다.
총을 잡았던 손이나 물에 다이빙할 때, 길이나 닉시의 머리가 흔들리지 않게 거의 정면으로 부딪쳤던 상체나. 멀쩡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제일 먼저 둘이 숨을 쉬는지를 살폈다.
차라리 버둥대지 않고 기절해서 다행인가. 둘 다 숨은 붙어 있었다.
길버트의 머리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상처가 나 있었다.
깊진 않았지만 계속 놔두면 좋지 않았다. 가뜩이나 비도 맞고 물에도 젖어서 지혈이 어려운 판에.
벤자민은 물에 젖어 잘 찢어지지 않는 셔츠의 소맷자락을 찢었다.
물을 짠 뒤, 털어냈다. 그것으로 길버트의 머리를 단단하게 감았다.
닉시는 뛰어내릴 때 기절했던 건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부딪히거나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벤자민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당장 물에 빠져 죽지 않으려고 허우적대느라, 어디까지 떠내려왔는지도 알 수 없다.
비는 장맛비라 언제 그칠 줄도 모르겠고.
여름이지만 물에 젖은 몸은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불을 피울 만한 게 있었으면 좀 나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행운 같은 건 없었다. 그는 쓸 만한 게 있을지 주머니를 뒤졌다.
달그락. 친절한 이웃이 줬던 약통 하나뿐이었다.
‘이거라도 있는 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약통을 열었다.
그녀가 말했던 수면제, 진통제, 이것저것 알록달록 들어 있었다.
그는 진통제로 추정되는 흰색 알약을 집어 들었다.
먹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그것을 도로 집어넣었다. 아직은 그럭저럭 버틸 만했으니까.
힘이 다 빠진 몸뚱이가 벽에 닿았다.
저 아래 시커멓게 불어난 강물이 그들이 있는 곳까지 올 듯 조금씩 몸을 불리고 있었다.
‘산 넘어 산이군.’
그는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비 오는 먼 산을 바라봤다.
“……흐…… 벤자민 씨?”
메마르게 갈라진 탁한 목소리.
길버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눈을 떴다.
아직까진 일어날 힘은 없는지 길버트는 앓는 소릴 내며 제 손을 쥐었다 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길버트가 응급처치 된 제 머리를 더듬었다.
언제부터 기절했던 건지 모르겠다.
마지막 기억이 닉시에게 총을 겨눈 아버지를 저지하려고 그의 팔을 잡았던 거였고, 그 뒤로 암전.
“여긴……?”
“나도 몰라.”
자신을 포함한 그나, 그녀나 전부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게다가 닉시는 기절한 건지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비를 피하기 위한 작은 동굴.
강물의 위치를 봐선 오두막이 있던 곳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건가.’
대충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길버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 구했어요?”
“질문이 많은 거 보니 당장 죽을 것 같진 않군.”
화가는 약통에서 흰색 알약을 꺼내 길버트에게 휙 던졌다. 그가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머릴 다쳐서 한동안 어지러울 테니까 먹어 둬.”
“이건…….”
“진통제.”
보통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으면 한동안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옅게 찢어지기까지 했으니. 원래는 푹 쉬어야 할 테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푹 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진짜 골로 갈 수 있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그저 약으로 버텨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이 깨어나면 움직여야 돼. 그때까지 네가 비실거리면 곤란하고.”
“…….”
길버트는 손바닥 위에 놓인 그의 불친절한 친절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화가는 아까부터 계속 손을 떨고 있었다.
손바닥은 화상인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팔뚝에 총탄에 스친 듯 생채기가 나 있었다. 게다가 저를 짊어지고 올 때 옷에 밴 피 때문에 셔츠가 붉은 피로 엉망진창이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저야말로 이걸 먹어야 할 것 같은 꼴이었으면서.
“필요 없어요.”
“…….”
“그쪽이나 먹든가요. 당신이야말로 지금 손 엄청 떨고 있는 거 알아요? 팔에서 피 나고 있는 건요. 그 개새끼한테 당한 거죠? 젠장. 당신이 왜, 하필 당신이 왜 이걸 나한테.”
“시끄러워. 잔말 말고 먹어.”
“하…… 진짜.”
말할 때마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그 남자에게 이 꼴이 났다는 비굴함. 자신을 향한 자괴감. 남들에겐 보이고 싶지 않았던 밑바닥이 들켜서 꺾인 자존심.
그런 지독한 것들이 점철되어 그의 기분을 탁하게 만들었다.
마을의 이방인. 성격 나쁜 화가. 세상의 우울은 전부 짊어진 것 같은 얼굴.
길버트 그레이스는 벤자민 리히터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싫었다.
“당신이…….”
“…….”
“당신이 이 마을에 처음 나타났을 때. 내가 다친 당신을 치료해 주고 먹을 걸 가져다 줬지. 그게 친절이라 생각해?”
“…….”
“아니. 그날 난 당신을 죽이려 했어.”
지금처럼 비가 쏟아지던 그날.
길버트 그레이스가 중상을 입고 오베르로 기어들어 온 적국의 군인을 만난 그날.
그날 길버트는 자살하기 위해 숲속을 찾았다.
그는 늘 생각했다.
마크 릭터를 벼랑에 밀어 버린 뒤에 그 자리에서 도망치면서.
경관에게 걸려 잡혀갈 뻔했을 때, 제레미아 그레이스에게 구해지면서.
상황을 모면하려던 거짓말로 시작해서 정말로 그의 아들이 되어 그레이스가의 장남 노릇을 하게 됐을 때도.
폭격으로 저를 제외한 가족들이 전부 죽어 버렸을 때도.
그때. 내가 마크 릭터를 빨리 죽였다면, 어머니가 죽지 않았을 텐데.
내가 그 남자를 더 빨리 죽였다면, 하필 선량한 그레이스 씨가 저를 구해 주지도 않았을 테고, 가족이 굳이 제비꽃밭을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저를 위해 가족 소풍 같은 걸 가지 않았을 텐데.
내가 그 괴물을 좀 더 빨리 죽였다면, 그 누구도 죽지 않았을 텐데.
내가 그를 죽였으면, 죽였으면. 죽였으면!
[그렇게 괴물이 되는 거야.]문득 길버트는 이런 자신이 역겨워졌다.
누구보다 그자를 싫어했으면서 누구보다 그자와 닮은 모습이었던 저가.
그래, 증오스러운 그 남자가 했던 말이 아예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르지.
한평생을 그자완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걸 보여 줄 사람은 이미 다 죽어 버렸고. 남겨진 건 악으로, 증오로 똘똘 뭉친 저 하나.
그래 다 헛고생이었다.
도저히 바꿀 수 없는 피라는 사람의 천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사냥꾼의 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기려 했을 때, 수풀에서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진득한 피 냄새가 났다.
길버트는 총을 쥔 채 수풀을 헤쳤다.
빗줄기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쏟아지던 날.
그곳에는 적국의 군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수풀을 헤맨 건지 엉망진창인 얼굴. 붉은색으로 물들어, 숨 쉴 때마다 피가 울컥 쏟아지던 복부. 기괴하게 뒤틀려 있는 손가락.
마치 덫에 걸려 죽기만을 기다리는 짐승처럼. 남자는 그렇게 죽어 가고 있었다.
‘이럴 때도 사냥꾼의 아들다운 생각이라니.’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길버트는 손에 쥔 총을 들어 올렸다.
―철컥.
장전음이 울렸다. 지독하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그는 이를 꽉 깨물었다.
[넌 길버트 그레이스야.]“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에. 당신만 없었어도. 당신만…….”
어째서 나한테 그레이스라는 이름을 물려줘서. 당신은 왜 그렇게 죽었나.
대신 죽을 수 있었으면 천 번은 행복하게 죽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태껏 그를 따라 죽지 못했던 것은 그가 물려준 길버트 그레이스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그들이 남기고 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집이. 따뜻함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따뜻해서.
[가족이 된 걸 환영한다 길버트!] [편하게 어머니라고 불러도 된단다.] [오빠. 저, 이거…… 선물…….]그날. 자신은 이 집을 지키겠다고 다짐해 버려서. 그들이 남기고 간 걸 떠날 수 없어서.
빈집에서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지금까지 겨우겨우 빌어먹고 살았다.
방아쇠에 올라간 손가락이 분노로 굽어들었다.
그의 일그러진 눈가에 빗물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그 짐승을 더 일찍 죽이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달고 있던 절름발이 사냥꾼.
죽어가던 어머니를 방치해 죽음으로 몰고 가고,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습격하는 것도 모자라 저에게 시체 처리를 맡기던 증오스러운 남자.
“너만 없었으면.”
[넌 길버트 그레이스야.]아니. 제 본명은 길버트 릭터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건 변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를 찢어발기고 싶었다. 그의 가족을 죽인 독일 놈들을 지옥의 지옥까지 찾아가 죽여 버리고 싶었다.
아니. 사실…….
“나만 없었다면.”
나만 없었으면 가족들이 죽지 않았을 거다.
그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나만 없었다면 됐을 것이다. 알고 있다. 애써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 모든 건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내가 배고프다 하지만 않았어도 어머니가 죽는 일은 없었을 거고, 내가 그레이스가의 가족이 되지만 않았어도 그들은 지금까지 행복하게 잘 살아 있을 것이었다.
“나 때문이야. 나만 없었어도, 흐, 나만, 윽, 나만…… 나만…….”
그때. 툭, 그가 들고 있는 총구가 흔들렸다.
정신을 잃은 독일군의 고개가 그의 총구를 건드린 것이다. 마치 자신을 죽여 달라고 머릴 들이미는 것처럼.
그제야 그는 제정신이 들었다.
“…….”
“…….”
쏟아지는 빗속. 차갑게 식어 가는 손끝.
길버트는 흐르는 눈물을 어떻게 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안 돼. 죽지 마.”
“…….”
“남은 사람을 몽땅 지옥으로 몰아 놓고 죽겠다고?”
“…….”
“너만 그렇게 편히 죽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개죽음으로 몰아넣고 그렇게 쉬운 길을 택하겠다고? 넌…….”
그리고 난. 그럴 자격 없다.
그의 손에서 툭, 총이 떨어졌다. 길버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저나 독일군의 몸에 총알을 박아넣는 대신 총을 버리는 걸 선택했다.
길버트는 독일군의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 그를 부축했다.
“평생 후회하면서 살아. 평생. 평생 뉘우치면서. 평생을 괴로워하면서. 평생 용서받지 못할 삶을 살라고.”
묵직한 걸음마다 그의 울분이 터져 나왔다.
독일군에게 저주를 퍼붓는 건 자신인데 왜 제가 고통스러운 건지 모르겠다.
그저 짓씹는 한마디 한마디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와서.
그는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두다 숲의 입구가 보일 때쯤엔 거의 통곡하다시피 울었다.
“그날 난 당신을 죽이려 했어.”
“…….”
“근데 왜 당신을 살렸냐고? 난 당신을 살린 게 아니라 지옥에 남겨둔 거야. 평생 남을 죽였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그렇게,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살길 바랐으니까.”
벤자민은 그의 물기 차오른 눈을 바라봤다.
그렇게 퍼붓는 주제에 그는 끔찍하게도 괴로운 표정이었다.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어.”
“……뭐?”
바닥을 꽉 움켜쥐고 있던 길버트의 손이 탁 풀렸다. 둘 사이에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왔다.
“언제부터…….”
“처음부터. 그때…… 깨어 있었으니까.”
총구에 머릴 들이댔던 건 의도였다.
그는 그 총알이 제발 자신의 머리통을 꿰뚫어 주길, 누구라도 좋으니 저를 죽여 주길 바랐다. 실패했지만.
그와 그가 허공에서 시선을 맞췄다. 먼저 시선을 돌린 건 벤자민이었다.
길버트는 멍하니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손바닥에 올려놨던 약을 다시 응시했다.
“하……하하, 처음부터란 말이지? 하…… 하하.”
“…….”
“알고 있었으면서. 왜, 왜.”
“넌…….”
벤자민은 한 박자 쉰 다음 조용히 말했다.
“내가 모르길 바라는 것 같이 굴었으니까.”
길버트는 늘 사람 좋게 웃었다. 친절한 마을 이장은 마을의 모난 구석인 저까지 신경 썼다.
마을에 오고 일 년 남짓은 그 웃는 얼굴 속에 저를 향한 증오를 감추고 있는 게 보였다. 그건 마을 그 누구보다 큰 응어리 같았다.
괜찮았다.
오히려 괜찮지 않았던 건, 그 호의가 조금씩 인간미를 띠게 변해 갔을 때였다.
미운 정도 정이란 건지, 선의로 숨겨진 악의는 조금씩 시간에 희석됐다.
그러다 어느 날은 무심코 그의 선한 성격에서 나온 무의식적 호의를 받을 때도 있었다.
저가 그랬다는 걸 눈치챌 땐 길버트의 얼굴은 어두워졌고, 그가 눈치채지 못할 땐 벤자민이 먼저 자릴 피했다.
“……그럼 내가…… 제가 당신을 싫어하고 있었단 것도 알고 있었단 말이네요. 처음부터?”
“넌 웃지 않으면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보이니까.”
허탈하게도 웃었다.
그렇게 티가 난단 말인가. 이 사람 좋은 웃음도 죽어라 노력해서 단련한 건데.
‘안 웃으면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보인…….’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제레미아 그레이스가 했던 말.
[왜 경관에게 거짓말을 한 건지 묻는 듯한 얼굴이구나 길버트. 표정에 다 쓰여 있었거든.]다 알고 있다는 듯 호탕했던 아버지의 웃음. 동시에,
[네가 이전엔 뭘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심지어 경관의 말이 맞다 해도 난 신경 쓰지 않는다.]경관에게 자신의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자신을 감쌌던 제레미아 그레이스.
끝까지 저가 사실 사냥꾼의 아들이고 시체를 묻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던 그.
[그저 이거 하나만 기억하고 있으렴. 넌 길버트 그레이스야.]‘알고 있었구나.’
허탈했다.
알고 있었구나. 그날, 저가 제 친아비를 죽인 짐승인 걸 알면서 데려왔구나.
알고도 받아 줬구나.
일평생 그를 닮고 싶어서, 그 사람이 되기 싫어서 맹한 웃음을 연습하는 그에게 아버지가 했던 말. 너는 길버트 그레이스라고.
그 말은 그에게 있어서 인정이었다. 네가 누구든 상관없으며 넌 그저 너라는 인정.
“……비겁해.”
자신은 그렇게 자신을 숨기려고 아등바등했는데, 본인들은 이미 내 본모습을 알고 있었다 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해 버리면, 저는 대체 어쩌란 말인가.
“비겁해요 진짜로…….”
길버트는 손을 머리에 올린 뒤 소리 없이 울었다. 한참 동안을 그랬다.
약을 먹은 길버트가 돌아누웠다. 먹은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머리를 울리던 고통이 잦아들었다.
그는 멍하니 동굴 밖을 바라봤다.
“제가 밉진 않아요?”
길버트가 중얼거렸다.
“여태 좋은 사람인 척 당신을 속였는데. 싫진 않아요? 가만히 있으면 괜히 이런 엿 같은 일에 휘말리지 않았을 텐데.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어요?”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몽롱한 무의식중, 쏟아지는 물음표들은 벤자민에게 묻는 것 같기도 했고, 지금은 없는 누군가에게 묻는 듯하기도 했다.
길버트에겐 영원히 풀리지 않는 매듭이 있었다.
“날 구한 걸 후회하지 않겠어요?”
저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원망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 저 때문에 죽어서 후회하진 않을까 하는 자괴감.
“딱히.”
“왜요?”
“오늘따라 끈질기군. 고마우면 그냥 고맙다고 해.”
길버트가 벤자민의 미약한 짜증에 픽 웃어 버렸다.
어쩌면 남의 입을 통해서 제 고민이 풀리길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기대했다. 얼떨결에 모든 게 다 까발려진 사람 앞이니까.
‘그래. 그 고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 없지. 이건 죽을 때까지 평생 가져갈 숙제 같은 거니까.’
길버트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역시 저는 당신이 싫어요.”
“……알고 있어.”
“어? 방금 말이 반 박자 느렸는데. 상처받았어요?”
“시끄러워.”
길버트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물 소리가 시원했다. 평소엔 그렇게 지독하더라니, 사람의 마음이란 건 정말 간사했다.
“그러니까 벤자민. 전 그날 고의로 당신을 살린 걸 용서해 달라고 하진 않을 거예요.”
“……용서하고 자시고, 넌 애초부터 나한테 뭘 잘못한 게 없어.”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고요…….”
바보 같은 사람. 잘못이 없다고 말해 버리면 마음이 편해지고 싶어지잖아.
길버트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버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당신은 나를 미워하지 않을까요.’
난 나 자신이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데.
“이거.”
벤자민이 뭔가를 툭, 길버트 앞에 내려놓았다.
“네 옷 주머니에서 나온 거야. 받아.”
물에 젖어서 뭉치처럼 되어 버린 종이였다.
“아.”
그는 글을 읽지 못했지만 그게 뭔지 단숨에 알아낼 수 있었다.
자신이 뽑은 점괘 종이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 때나 붙이기 좋은 말. 대충 흘려보내기 핑계 좋은 말.
“……고마워요.”
아마도. 저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길버트는 밀려드는 수마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3, 2, 1. 정확하군.’
벤자민은 정확히 잰 시간에 잠든 길버트를 바라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병든 닭처럼 골골거리더니 지금은 한층 편안한 얼굴로 새근새근 잠들었다.
편한 거 좋지만 이대로 영원히 잠드는 건 아닌지 약간 걱정되기도 했다.
벤자민은 그의 머리에서 흐르던 피가 굳은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어?”
콜록. 잠긴 목소리로 닉시가 물었다.
깨 있던 줄 몰랐던 터라 그가 놀라 눈을 깜빡였다.
“아까 길이 훌쩍일 때부터 깨 있었어. 끼어들고 싶긴 했는데 그런 분위기가 아니길래. 그리고…….”
닉시는 소름 돋은 팔을 쓸어내리며 바르작거렸다.
“보다시피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비 맞은 병아리 꼴이 됐지. 아. 참고로…… 콜록, 병아리는 비 맞으면 죽는 거 알지?”
“곧 죽는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말 한번 살벌하게…….”
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에 그녀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작은 굴 가장 안쪽까지 몸을 묻은 닉시는 두 손을 모아 입김을 불어댔다.
지금 보니 얼굴이 붉었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있군.”
“어. 아까부터 속도 안 좋아. 토할 것 같아.”
“언제부터?”
“천둥 칠 때부터.”
그녀는 불만을 토로하듯 삐딱한 얼굴을 했다.
말은 태연하게 해도 새하얗게 질린 창백한 입술은 결코 시시한 상황이 아님을 알려 줬다.
머리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는데 몸은 차가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화가. 불 피울 만한 거 있어?”
“있으면 벌써 붙였지.”
“잠깐만…… 나 점화기 있어.”
닉시가 주머니에서 점화기를 꺼냈다. 슬프게도 그것은 물을 잔뜩 먹어서 픽픽거리기만 할 뿐, 켜지지 않았다.
닉시는 작게 욕지거리하며 그것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일단 이거라도 먹든가.”
벤자민은 웅얼거리며 눈을 감는 닉시를 흔들었다. 저체온인 상태에서 잠들면 골로 가기 딱 좋았으니.
그는 약병에서 해열제를 꺼내 그녀의 턱 끝에 들이밀었다.
닉시는 그걸 보더니 뭐가 생각난 건지 꺄르륵 웃었다.
“화가 기억나? 너랑 나랑 다리에서 비 맞았던 날.”
‘그런 적이…… 있긴 했군.’
벤자민은 희미한 기억 속 본인이 수면제를 과다복용하고 몸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비를 맞았던 걸 떠올렸다.
그녀는 죽은 가재의 장례식을 치르러 왔다가, 제 옆에 엉덩일 붙이고 좀처럼 떠나질 않았었다.
“그땐 네가 열이 나서 내가 식혀 줬는데. 이번엔 반대네.”
“그건 기억 안 나.”
그때도 천둥소리에 놀랐던 그녀가 도랑물에 빠지려 해서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그 뒤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기어들어 온 건지조차도 기억이 없는데.
“정말? 아쉬운 걸, 기억해 내. 약을 냄비째 부어줬는데도, 안 마셔서 내가 고생 좀 했단 말야.”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닉시는 벤자민의 옷깃을 잡았다. 그리고 제 쪽을 향해 잡아당겼다.
힘이라곤 실리지 않은 가벼운 동작에 그는 속절없이 끌려갔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그에게 살풋 닿았다.
입술이 맞닿는 찰나, 그때 내가 해열제를 먹여 줬잖아. 미약하게 속삭이는 목소리.
틈 사이의 가벼운 물소리.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닉시의 웃음소리가 얽혀들어 갔다.
찰나 같던 순간이 지나고, 그에게서 입술을 떼어낸 닉시의 머리가 풀썩 그의 어깨로 떨어졌다.
벤자민은 무의식적으로 쓰러지는 그녀를 받아냈다.
그는 조용히 미간을 좁혔다.
‘대체 뭘 기억하라는 거야.’
조심스레 그녀의 뒷머리에 손을 받쳐 들었다. 닉시는 다시 정신을 잃은 건지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어쩐다. 억지로 깨워서 약을 먹일 수도 없고.’
그날은 그저 까만 물속에 잠겨 있었던 것 같았을 뿐이었는데.
이봐 들려? 기억 안 난다고. 그런 거.
열에 달뜬 그녀의 입술은 데일 듯 뜨거웠다. 반면 제 옷깃에 닿았던 손가락은 극히 차가웠다.
그는 그녀를 제가 있던 자리에 뉘었다. 그래도 데워놓은 자리라고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물 같은 걸, 먹었던가. 코와 입으로 물이 들어찼었던 것 같긴 했다. 꿈인 줄 알았는데.
그는 동굴 밖으로 손을 뻗었다. 움푹 팬 손바닥에 빗물이 고였다.
대체 그날 뭔 짓을 했길래 이렇게 뜬금없이 제게 입술을 맞춰오는 건지. 저는 기억도 안 나는데. 본인은 태연히…… 잘도 그런 짓을…….
“……그런 건 차라리 말로 해. 들어 줄 테니까.”
그는 훅 달아오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 아래 어느 정도 척척히 물이 고이자 그는 알약을 제 입에 넣었다. 그리고 물을 입에 담았다.
삼키라고 있는 알약을 녹이는 건 꽤 깊은 인내심을 요구했다. 더럽게도 썼으니까.
그는 그녀의 뒷머리에 살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물에 젖은 머리칼이 손가락을 진득하게 감아왔다.
제 손바닥 안에 들어찬 그녀의 손이 차갑다는 걸 느끼며 그는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목이 꺾이지 않도록 살살. 하지만 옆으로 흐르진 않게 고갤 세워서.
그는 옆으로 흐르는 약을 손으로 쓸어 주며 천천히 약을 넘겼다.
아직까지 혀끝에 끈덕지게 남은 쓴맛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미약하게 벌린 입술 사이 희미하게 보이는 붉은 혀.
그 틈으로 흐물거리게 녹아 버린 하얀 약이 넘어갈 때, 벤자민은 기억은 전혀 안 나도 뭘 했던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이랬겠구나.’
타액이 전부 상대의 입 안으로 넘어 들어갔을 때, 그는 그녀가 약물을 본능적으로 뱉어내지 않게 하려고 혀로 그녀의 혀 앞부분을 쓸어내렸다.
그 뒤론 자연스러웠다. 젖은 혀가 섞이고 조여 왔다.
차갑게 식었던 그녀가 무의식중에 온기를 찾아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설핏 내리깐 눈으로 제게 붙어오는 무게를 느끼며 그녀의 머리칼을 넘겼다.
딱 아슬아슬하게 달았던 몸이 타인의 온기로 서늘하게 식어갔다. 위태롭게도 균형이 맞아떨어졌다.
숨이 막히는지 설핏 벌어진 새로 가쁜 소리가 들려, 벤자민은 느릿하게 고갤 틀었다.
그때도 지금 같았다면.
‘기억이 안 나는 게 아쉬울 만한 건가.’
마치 가느다란 줄 위에서 줄타기하며 불장난을 저지르는 것 같은,
그렇고, 그런 짓.
그는 약 속에 들어있는 진정제 특유의 아득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여러모로 많은 일이 있어서인가, 약 때문인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행스럽게 비는 더 내리지 않고 그쳤다.
점화기의 고압 단자는 작은 모닥불 하나를 겨우겨우 만든 뒤 장렬하게 전사했다.
덕분에 간신히 동사는 면했다.
저를 제외한 두 명의 환자 상태가 안정기에 들어서자, 화가의 입에선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일부러 낙엽 위주로 불을 지피며 이 시커먼 연기가 부디 오베르 사람들의 눈에 띄길 바랐다.
* * *
닉시는 몽롱한 수마를 밀어내고 눈을 떴다.
낯익은 천장과 부드러운 이불.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보이는 건 짙은 녹색 위주의 차분한 방. 약초 냄새가 쌉쌀한 곳.
마을 이장 길버트의 방이었다.
마지막 기억이 동굴 속이었던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 봤지만 얼얼하기만 하지, 눈앞의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길! 화가!”
닉시는 문을 벌컥 열며 둘을 찾았다.
가정하기 싫지만 만약 본인만 생존한 거라면?
인생의 대부분이 그런 상황이었던 그녀가 쿵쾅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어머 닉시. 일어났어요?”
거실엔 약통을 정리하는 비티와 라울이 있었다.
“벌써 일어나도 괜찮아요? 열이 심했는데.”
닉시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비티와 라울의 표정에선 누굴 잃은 듯한 서글픔 같은 게 없었다.
살아 있구나, 둘 다.
닉시의 색색대던 어깨가 진정됐다.
“……화가랑 길은?”
“지금 안정을 취하는 중이에요.”
라울이 큰방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단 뜻이었다.
“살아 있지?”
“그럼요. 둘 다 멀쩡해요.”
“팔다리 전부?”
“네.”
“다행이다…….”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닉시는 곧장 앓는 소릴 내며 거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래. 전쟁통도 아니고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조난당했던 건데, 그걸로 죽으면 그거야말로 개죽음이지.
하지만 늘 정신을 잃고 눈 뜨면 대부분 저 혼자만 살아남아 있던 상황이 익숙해서일까.
“……죽은 줄 알았네.”
“다 죽다 살아났죠.”
비티가 약통을 달그락 이며 안에서 아스피린을 꺼내 닉시의 손에 쥐여 줬다.
“벤자민 씨와 닉시 씨, 둘이 그렇게 가 버렸다고 헬렌이 많이 놀랐어요.”
“아…….”
벤자민과 닉시가 급박하게 길버트를 찾으러 간 뒤, 헬렌은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다들 회관 앞으로 모여요! 안 모이면 앞으로 잡화점엔 얼씬도 못 할 줄 알아요!]헬렌은 웬만하면 쓰지 않는 마을의 경종을 울리며 사람들을 소집했다. 마을 사람들은 경종 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회관 앞에 모였다.
그리고 그녀는 달변가 뺨치는 연설을 했다.
[우린 지금부터 짐승 새끼 하나와 마을에 겁도 없이 기어들어 온 파리 하나를 잡겠어요.]그렇게 선언한 헬렌이 무리 사이의 경관을 바라봤다. ‘기어들어 온 파리’에 속하는 자였다.
동시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꽂혔다. ‘내가 왜?’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한 경관이 주윌 두리번거렸다.
“그 뒤로 경관은 어르신들 손에 끌려가서 마을 회관에 구금당했고 저흰 닉시, 당신들을 찾았어요.”
라울이 말을 이었다.
마을에 길버트의 어린 시절, 사냥꾼의 손에 큰 까칠한 소년을 깊게 알고 있던 사람은 셋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는 사이였던 헬렌.
길버트에게 종종 먹을거릴 줬던 샬롯 할머니.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친절했던 제레미아 그레이스.
다리 다친 헬렌과 무릎 안 좋은 샬롯 할머니는 비 오는 날 산기슭을 탈 형편이 못 됐기에, 그녀들은 마을의 젊은이 셋을 불렀다.
라울과 비티, 그레타.
그리곤 그들에게 길버트의 옛집이 있었던 부근을 찍어 주며 그곳 근처를 확인해 보라 일렀다.
“그렇게 산기슭을 올라가던 길에 그레타가 강 하류 비탈 쪽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걸 봤어요.”
연기를 쫓아간 곳엔 닉시 일행이 있었다.
화가가 막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이던 참이었다.
라울이 벤자민을.
나무통 하나는 거뜬히 드는 목수 비티가 길버트를.
집 나간 소도 무력으로 끌고 오는 그레타가 닉시를 각각 부축하고 마을 아래로 내려왔다.
다들 바로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가장 안 좋았던 건 머리가 깨져서 돌아온 길버트였다.
감히 우리 마을의 이장을 건드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누가 이 사달을 냈는지, 걸리기만 하면 오체분시를 해 버릴 듯 흉흉했다고 한다.
“어쩌다 그랬던 거예요? 기억나요?”
“어…… 그게…….”
비티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사랑스러운 비티에게 자신의 고충과 힘듦을 줄줄 읊어 주고 싶었지만, 이건 길버트의 사적인 이야기였다. 그녀가 나불댈 거리는 아니었다.
눈물을 머금고 애정보다 이장과의 우정을 택한 닉시가 머쓱하게 웃었다.
“글쎄에. 난 중간에 기절해서 잘 모르겠어.”
닉시는 조심스레 큰방 문을 열었다. 길버트를 뉘어놨다는 곳이었다.
침대 위 이불이 고르게 오르내렸다.
그녀는 조심조심 다가가 침대 옆 협탁에 앉았다.
처음 보는 그의 곤히 자는 얼굴이었다.
머리가 깨졌다고 하더니, 그의 머리엔 토끼 그림이 그려진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누구 취향인지 모를 깜찍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맡에 앉아 그의 자는 얼굴을 유심히 구경했다.
전쟁터에서 별일을 다 겪었던 그녀도 이렇게 피곤한데, 이런 일이 생소할 마을 이장은 얼마나 피곤할까.
그래서인가. 고른 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이 유난히 평소보다 유난히 어려 보였다.
비가 그친 듯 창밖으로 은은한 햇살이 비쳤고, 창틈에서 새어 나온 그것이 그의 얼굴을 간질였다.
닉시는 빛이 그의 눈가에 스미지 않게 빛을 손등으로 가려 주었다.
그러자 길버트의 손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정신이 들어?”
“여긴…….”
“네 집이야.”
그는 방이 생소한지 눈을 굴렸다.
이윽고 길버트는 이곳이 가장 큰 방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거야?”
닉시는 그가 침대 등받이에 기대앉을 동안 있었던 일을 말해 줬다.
길버트가 사라져서 찾으러 갔던 것. 그곳에서 만난 이상한 남자.
남자에게서 도망쳐 동굴로 피했고, 그 이후에 라울과 비티, 그레타에게 구해졌단 것.
“벤자민 씨는?”
“옆방에서 쿨쿨 자고 있대. 어, 아직 일어나지 마. 당분간은 충분히 쉬어 줘야 된댔으니까.”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드는 길버트를 닉시가 제재했다.
“너는.”
“응?”
“넌 괜찮은 거야?”
“날 걱정해 주는 사람도 다 있네. 후후. 난 멀쩡해. 어지간한 거 아니면 다 괜찮을 만큼 튼튼하거든.”
“그렇……구나.”
길버트가 말꼬리를 흐렸다.
“미안. 괜히 일에 말려들게 해서.”
“아냐. 인생이 그런 거잖아. 내가 조심한다 해서 탄탄대로인 건 아니지. 그나저나 있잖아.”
닉시는 그동안 그녀치고 꽤 깊게 고민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내기로 했다.
“말해 줘.”
“뭘?”
“네 이야기.”
닉시에게 타인의 이야기는 마치 책 한 권을 펼치는 행위와 같았다.
별로 관심 없고, 어렵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괜히 펼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
하지만 이젠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미리 경고하는데, 나 네 이야기를 듣고 이해를 잘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냥 듣고 있을게. 근데 위로나 호응이 필요한 타이밍이면 말해. 내 머릿속에 몇 가지 입력해 놓은 리액션 모음집이 있거든.”
왜냐면 눈앞의 이 사람이 제게 더 이상 타인이 아니게 된 것 같았으니까.
저도 아직 말론 잘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아마 모든 이야기를 들어버리면 길버트라는 사람을 잘 이해해야 하게 될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억지로 입력시켜야 할 것이다.
세상을 논리로 따지는 제 머릿속이 당분간은 혼란스럽겠지만 아무렴 뭐.
“그러니까 나는…….”
“나에 대해서 알고 싶어?”
“바로 그거야.”
길버트는 닉시의 의외의 대답에 눈만 끔뻑였다. 그러다 픽 웃었다.
“……저번엔 그냥 서로 즐기기만 하자면서. 난 한낱 놀잇감이었잖아. 이제 와서 더 깊은 사이가 되고 싶단 거야? 너무한데 닉시.”
닉시가 제 과거의 망언에 이마를 쳤다.
“그건 그때 이야기고. 지금은 마음이 변했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마음이 변해…….”
“우리 과거는 잊어버리고 앞으로의 미래만 생각하자구! 그게 신상에 좋잖아. 그리고 문 닫아요, 라울!”
“혹시 술이나 변호사가 필요하면 말해 길버트!”
한순간에 파렴치한 쓰레기가 된 닉시가 씩씩거리는 발걸음으로 문을 콩 닫고 돌아왔다.
그녀는 다시 그의 침대 옆으로 와 턱을 괴고 말했다.
“들어봐 길. 우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사고락을 함께했잖아.”
“그렇지.”
“여기가 군대였다면 우리는 전우고 여기가 파리였으면 우린 베스트 프렌드로 등극하게 된 거라고. 근데 여긴 오베르잖아? 그러니까 내 생각엔 우린 이제…… 제법 깊게 알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사이가 된 거 같단 말이지.”
길버트는 답지 않게 빙빙 돌리는 그녀의 말이 퍽 우스웠다. 그래서 그는 슬쩍 미소 지었다.
“왜 그렇게 확신이 없어.”
“……확신을 가져? 막 말해도 돼?”
“응.”
“아 그럼 너 왜 아버지가 둘인데! 좀 궁금하다 들어나 보자.”
“……와우.”
당당하게 물어보랬다고 이렇게 들이박을 줄이야.
평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감 잡고 있는 길버트도 아버지가 둘이냐는 패륜 아닌 패륜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곤 풋 웃음이 나왔다.
그 질문이 이제 아무렇지 않은 게 웃겨서.
“별로 재밌는 이야긴 아냐.”
“나도 알고 있어. 각오도 하고 있고.”
“지루할지도 몰라.”
“이제부터 지루한 걸 좋아할 수 있게 노력해 볼게.”
길버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는 건 늘 어려웠다.
“그래, 좋아.”
하지만 이제 못할 것도 없었다.
* * *
“어릴 때부터 배워먹은 건 토끼 잡는 일뿐이어서, 글을 못 배웠어.”
“그랬구나.”
“언제는 그 남자가 놓은 덫에 사람이 걸려 죽은 적이 있어. 아마 외지인이었을 거야. 산길을 헤매다가 운 나쁘게 멧돼지 사냥을 위한 덫에 걸려 죽은 거지.”
당시 남자는 무척이나 동요했다. 어린 길버트의 눈에도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그걸 파묻었는데, 하필 내가 그걸 목격하게 된 거지.”
“그랬군.”
“닉시. 여기선 공감하고 안타까워해 줘야 돼.”
“너무 끔찍한 이야기야! 어린 길이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까!”
닉시는 몇 가지 학습해 놓은 리액션을 써먹었다.
흡족한 반응에 길버트가 말을 이어갔다.
“관광객을 사냥하게 된 건 그때부터야. 짐승 하나를 잡는 것보다 돈 많은 관광객 하나를 꼬드기고 묻어 버리는 게 더 돈이 잘 됐으니까.”
“하긴 그건 그렇지.”
“여기에선 그 남자를 비판해야지.”
“쓰레기 같은 자식! 감방에서 썩을 놈!”
“좋아.”
남자가 사람을 사냥하는 괴물이 된 것을 알아 버린 그날 밤.
길버트는 본인이 여태껏 파묻었던 자루가 짐승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제 어머니를 죽게끔 방치하고, 사람을 죽이고, 그것을 제게 처리하게 만들었던 증오스러운 남자.
[넌 사람도 아냐.]그 남자에 대한 원망이 폭발한 밤.
어린 길버트는 더 이상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를 절벽으로 밀었다.
그렇게 자신이 저지른 일로부터 도망쳤다.
때마침 마을에서 자꾸만 관광객이 실종되는 일 때문에 산길을 순찰하던 경관과 마주쳤다.
길버트는 수상함을 느낀 경관에게 붙잡혔지만, 자신을 그냥 보고 지나치지 못한 제레미아 그레이스에게 구해졌고.
갈 곳 없던 저는 그렇게 그레이스가에 입양되었다.
“아버지가 강 하류에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됐다기에 난 그게 그 남자라고 생각했어.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일부러 거짓말을 하신 것 같아. 그 당시 난 맨날 그 남자가 살아 돌아오는 악몽을 꿨으니까.”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닉시는 길버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죽일 거야?”
목적어는 말은 없었지만 그것이 제 아비를 뜻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닉시의 말은 왠지 모르게 ‘네가 그렇게 한다면 도와주겠다.’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건지, 제 친구가 사이코패스라는 것에 기겁해야 하는지.
길버트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길. 별로 가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 쓰레기 새끼가 경관에게 입을 털어서 자기 죄를 너한테 뒤집어씌울 수도 있잖아. 그럼 네가 감옥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고. 그전에 입막음해야지. 복수라면 도와줄 수 있어.”
내가 그런 거 전문이거든. 경력 10년 차의 준비된 인재! 베테랑 엘리트.
닉시가 가슴을 통통 두드렸다. 참으로 믿음직스러웠다.
“그렇게 되면 나도 그 남자랑 별다를 거 없는 사람이 될 거야.”
저는 애초부터 그 자랑 똑같은 놈이니, 그 남자를 죽이는 것이 제 운명이라 생각했다.
짐승을 죽이는 게 사냥꾼의 운명이듯이. 하지만.
“난 그 사람이랑 달라.”
“…….”
“……여기선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봐 줘.”
“어떻게 다른데?”
그가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 꺼내기조차 부끄러운 말. 하지만 여태껏 본인조차 인정해 주지 않았던 것.
길버트는 씩 미소 지었다.
한여름의 소년 같은 청량한 미소였다.
“아버지랑 약속했거든. 길버트 그레이스처럼 살기로.”
▶ 길버트의 수확
치킨 스프 한 솥, 계피 뱅쇼 1L, 마늘 레몬즙 650ml, 닭 한 마리 ……브라우니 23개, 가자미 뫼니예르 한 냄비, 사과 양파 절임 3통, 감자 그라탱 세 그릇, 포도 한 박스.
▶ 총평
마을 어르신들은 나를 아직도 성장기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건 병문안이 아니라 잔치잖아…….
* * *
마을 이장은 괜히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몸이 움직일 만해지자 집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라울. 벤자민 씨는요?”
“작은 방에. 자고 있을 거야.”
길버트와 닉시는 쾅! 신명 나게 문을 열었다.
휘황찬란한 공주님 방. 발목이 불쑥 나올 만큼 작은 침대 위.
화가는 분홍색 이불을 덮고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어 있었다.
길버트는 그의 팔에 감긴 붕대를 이리저리 들춰 봤다.
한참을 그렇게 보다 그의 상처가 크지 않음을 확신한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팔을 다쳐서 걱정했어.”
“괜찮아. 이 화가 집념이면 발가락으로도 그림을 그릴 테니까.”
화가까지 괜찮은 걸 확인했다.
길버트와 닉시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을 시작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 버리자.”
“그게 죽인다는 거잖아.”
“그럼 가둬놓고 물 한 방울 안 주는 건?”
“그것도 결국 ‘죽인다’지.”
그와 그녀가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머릴 싸매 봐도 ‘해치운다’ 이상의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다 새로운 결심이 무색하게 또 사람 잡겠다 싶은 위기감을 느낀 길버트가 조용히 라울과 비티를 방에 소환했다.
“와 이번엔 무슨 모임인가요?”
“쓰레기 수거반 모임.”
“수거반이요?”
“응. 요 며칠 가축이 사라진 거 기억하지? 그리고 헬렌 발목이 다친 거랑, 여기.”
닉시는 길버트의 머리에 붕대 감고 있는 부위를 가리켰다.
“길버트의 머리를 반쪽 낸 사람은 동일 인물이야. 세 사건의 범인을 찾았어.”
“네에?! 어디 있는데요? 그 좀도둑 놈!”
“그리고 그 사건의 범인이. 10년 전, 이 마을에서 관광객이 죽은 사건의 범인이래.”
“어머, 정말요?! 이거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인간 말종이네요!”
예상대로 라울과 비티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라울은 금방이라도 마을의 경종을 울리려는 듯했고, 비티는 어디서 난 건지 제 팔뚝만 한 톱을 들고 있었다.
“근데 그걸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여기 있는 길버트가 끈질기게 추적한 끝에 알아낸 사실이지. 그렇지 목격자?”
“네, 여기 목격자입니다!”
“설마 이번에 세 분이 다치신 것도 범인을 잡기 위해서?”
“그런 셈이지. 결정적인 증거를 얻기 위해서였어. 그래서 말인데.”
그래서 말인데? 라울과 비티가 닉시 쪽으로 고갤 숙였다.
“그자를 ‘죽인다’, ‘해치운다’, ‘형장의 이슬로 보낸다’ 말고 다른 좋은 처리 방식 없을까? 일단 숨은 붙어 있으면 좋겠어.”
“닉시 양, 이유가 있나요? 사람을 해쳤는데 당연히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죠.”
“맞아요! 오래전 일이지만 잘못은 꼭 심판받아야 해요. 단두대로 보내 버려요!”
이성적인 라울과 감성적인 비티가 반박했다.
물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심판권을 쥐고 있는 길버트가 그러고 싶진 않다는데.
‘그래도 낳아 준 정이란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난 모르겠지만.’
닉시가 그의 기색을 흘긋 바라봤다.
“잠깐만요……. 법의 심판 괜찮은데요? 보내 버리죠. 단두대.”
엥. 닉시가 얼빠진 소릴 냈다. 그녀는 재빨리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괜찮아? 아버지가 죽지 않길 바라는 거 아니었어?”
길버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꾸했다.
“아니. 굳이 내 손으로 처단할 생각은 없단 거였어.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나 그렇게 관용 넘치는 사람 아냐.”
“오, 오우…….”
그의 살짝 돌아버린 정의 넘치는 태평한 말에 닉시가 감탄사를 더듬었다.
“마침 10년 전과 똑같은 사건이 일어났잖아요? 외지인 습격 사건이요. 서른 살 버릇 쉰까지 못 버리고 여기 영어를 끝내주게 잘하는 외지인을 습격했죠.”
길버트는 쿨쿨 자고 있는 벤자민을 가리켰다. 졸지에 화가의 국적은 아메리카로 바뀌었다.
“게다가 소중한 마을 사람들의 재산도 건드렸고요. 마을 이장으로서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사안이라 생각되는데.”
그는 닉시를 한 번 바라봤다.
성격 같아선 닉시가 본인이 하겠다 펄쩍 뛸 수 있지만, 그와 그녀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런 건 믿을 수 있는 친구와 죽어도 저를 지키겠다 아우성인 마을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게 마을 이장의 특권이니까.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라울, 비티?”
맑은 눈의 길버트가 씩 미소 지었다.
* * *
길버트는 라울과 비티에게 네 가지를 부탁했다.
첫째, 경관을 풀어 줄 것.
“이 미친 오베르 놈들. 내가 감히 누구인 줄 알고 날 가둬놔!”
칼이 후줄근한 모습을 한 채, 회관 밖으로 튀어나왔다.
라울은 진정하라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사건만 해결되면 나를 여기 가둬놓으라 명령한 놈을 찾아서 이 몰골이랑 똑같이 만들어 줄 거야! 각오하라고!”
“하하, 경관님. 안 그래도 그거에 대해서 말할 게 있었는데.”
“뭐어?”
“경관님은 10년 전 사건을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셨죠?”
경관에게 마크 릭터가 범인이라고 해 봐야, 둘이 친분이 있기 때문에 경관은 쉽게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둘째. 범인을 말하지 말고 범행 현장을 보여 줄 것.
라울은 경관을 데리고 산기슭의 오두막 앞으로 데려갔다.
그곳엔 사냥꾼이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철 뭉치들이 여전히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이 부근쯤에 10년 전 피해자들의 물품 같은 게 묻혀 있다고?”
“네. 이번 장마 때문에 가방 같은 게 빠져나와 있어서 보니, 오래전에 실종됐던 사람들의 소지품인 것 같더라고요.”
“……여긴 왜 올라왔다고 했지?”
셋. 화가의 국적을 미국인으로 바꿔 버릴 것.
“벤자민, 그러니까 미국에서 온 그 친구가 여기서 어떤 사람에게 습격을 당했거든요. 돈을 벌어서 가족들에게 보내 준다고 열심히 일하던 친구였는데. 며칠 몸을 못 움직이게 돼서 잘릴 위기에 처했어요, 휴.”
“그 남자가 독일인이 아니라…… 미국인이었다고? 아, 아니, 잠깐만……. 이번에도 옛날이랑 똑같이 외지인이 습격당했다……?”
[마지막으로 이걸 경관에게 보여 주면 될 거예요. 경관은 집요한 구석이 있으니까 이게 누구 거인지 금방 알겠죠.]“라우울 씨!”
때마침 저 멀리서 비티가 뭔갈 흔들며 달려왔다.
경관과 라울의 시선이 절로 비티에게 꽂혔다.
“여기요! 벤자민 씨를 습격한 남자가 이걸 들고 있었어요.”
비티는 목발을 들고 있었다. 닉시의 지하실에 있던 그것이었다.
마지막 넷째.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 마크 릭터의 소지품을 보여 줄 것.
그걸 본 경관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170cm 후반대에 맞춘 길이, 익숙한 모양새, 절름발이와 목발이란 기막힌 우연.
그의 2% 부족한 계산 실력과 감만 좋은 본능이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냈다.
‘그러고 보니 마을의 사건이 끊어진 시간과, 그 남자가 우리 마을에 떠밀려 왔던 시기가 비슷하군. 전신마비가 좀 나아지자마자 굳이 여길 꼭 와야 한다 고집 피웠던 것도……. 몇 달 전부터 이곳을 왔다 갔다 했던 것도 혹시 증거들을 처리하려고……?’
“……미안하지만 난 급한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군.”
계산을 마친 경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라울과 비티는 그가 점이 되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서로를 흘긋 바라봤다.
그들은 씩 미소 지었다.
다음은 마을 사람들의 역할이었다.
한참 뒤에 마을 입구들을 점령하고 있던 헬렌과 오베르의 할머니 모임 일행에게서 소식이 들려왔다.
사냥꾼이 마을을 벗어나려다 그들에게 저지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총을 뺏는데, 분노 조절에 문제가 있는 치와와 ‘해피’의 역할이 컸다는 소식도 알려왔다.
해피가 언해피가 되면 말릴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때마침 사냥꾼을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주인아주머니가 언해피를 떼어 주는 척, 그의 총을 갈취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경관이 현장에 도착했고, 그는 사냥꾼의 총 끝에 묻은 혈흔과 그의 초조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 외지인 실종 사건의 범인임을 확신했다.
그리곤 밧줄에 묶어 철창으로 향했다고 한다.
“뭔가…… 내가 활약할 거리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길버트의 집 앞. 닉시가 울타리에 걸터앉아 발을 동동 굴렀다.
농부와 이장, 화가는 환자라고 집으로부터 반경 10m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제약이 걸려 버렸다.
말이 요양이지 어딜 가도 마을 사람이 감시하고 있어서 탈출도 불가능한 뚫린 감옥에 갇힌 것에 더 가까웠다.
“여태껏 했으면서 무슨. 닉시 너, 혹시 차기 이장 자리를 노리는 거야?”
“그래도! 마무리는 내가 하고 싶었단 말이야.”
그녀는 아직 ‘사냥꾼을 잡고 마을 사람과 친해져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본인이 아직 환자라는 이유로 활약할 상황을 놓치게 되다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런 인생에 도움 안 되는 사람들 처리를 굳이 네가 왜 해. 그거 말고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길버트는 동동거리는 그녀의 삐뚠 시선에 눈을 맞춰왔다.
“곧 여름이라구. 우리 반딧불이가 있는 밀밭에서 캠핑도 아직 못 했잖아.”
그래도 여름 저녁이라고 풀벌레가 울었다. 캠핑을 말하는 길버트의 눈이 퍽 반짝여서 귀여웠다.
닉시는 그의 시원한 웃음을 보며 그를 따라 슬쩍 미소 지었다.
“길, 너……. 가만 보면 나를 되게 동생 대하듯 한다? 곧 있으면 맞먹겠어.”
“곧? 난 진작이라고 생각했는데.”
“까불지 마십시오. 너랑 나랑 먹은 밥그릇 차이가 얼마인데. 게다가 너 화가랑 이야기하다가 운 거 다 알거든.”
“뭐?! 그건 언제 들었어!”
길버트가 당황하며 손사래 쳤다.
이 사람들은 잠든 줄 알았는데 다 듣고 있는 악취미라도 있는 건가.
결국 그를 골려 먹는 데 성공한 닉시가 울타리에서 뛰어내렸다.
“그럼 난 화가가 깼는지도 볼 겸, 먼저 들어가 볼게!”
“알겠어. 난 라울 씨가 경관 마중 갔다 오는 것만 보고 들어갈게, 늦을 수도 있으니까 먼저 자.”
“그래? 그럼…….”
닉시는 길버트의 왼쪽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맞추는 거랑은 약간 어색한. 짧게 키스 소리를 내려다 아차, 하고 실패한 굿 나잇 키스.
“맞다. 이게 아니라 했지.”
“…….”
“그래도 동생 같으니까 괜찮지? 나 먼저 들어간다?”
닉시는 룰루랄라 집 안으로 쏙 들어갔다.
혼자 남겨진 길버트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낮의 달궈진 열기가 식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여름밤.
얄궂게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마을에 몇 개 없는 가로등이 깜빡, 깜빡 점멸했다.
“이런 건…… 동생이랑 안 해 닉시.”
길버트는 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