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5
Chapter 4. 늦더위. 해변, 유화, 해바라기 (1)
한동안 폭우가 쏟아졌지만 다행히 닉시의 고구마 밭은 무시했다.
그녀는 그동안 미뤄뒀던 세느강 분위기의 물길 만드는 걸 끝마치고, 폭우에 목이 꺾인 가여운 토마토를 정비했다.
“밭 보수는 잘 되고 있어?”
그런 그녀의 밭을 방문한 건, 아직 머리에 큰 땜빵 자국이 남아 있는 마을 이장이었다.
그는 빵을 갓 구웠다며 기다란 바게트를 선물했다.
“잼이랑 먹어도 맛있을 거고 좀 더 사치스럽게 먹고 싶으면 수프에 찍어 먹어.”
마침 라울의 가게에서 앵두 잼을 받았던 닉시는 바게트를 잼에 발라 먹는 생각에 흐뭇해졌다.
“근데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주고 싶은 게 있어서.”
그는 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꺼냈다.
지폐 모양처럼 생긴 기다란 직사각형의 종잇조각이었다.
“수표?”
“응. 경관한테 받았어. 범인을 잡는 데 일조한 보상이래. 그동안 까칠하게 군 것도 미안하다면서.”
수표엔 제법 괜찮은 숫자의 금액이 적혀 있었다. 경관이 라울의 술집 바닥에 구멍 낸 보상금만큼.
“너 줄게.”
“이걸 나한테? 왜?”
길버트가 굳이 이유를 찾는 듯 눈을 빙글 돌렸다.
“난 이런 거 없어도 돈이 부족하진 않아서.”
참으로 더러운 부르주아 같은 발언이었다.
뼛속까지 프랑스 소시민의 피가 흐르는 가난한 농민 닉시는 혁명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줬다.
“그렇게 말하면 받을 마음이 없어도 받아야 할 것 같네.”
“하하. 받아 줘. 네 덕분에 이것저것 많이 털어 버릴 수 있었으니까. 나도 뭐라도 해 줘야지.”
응? 그가 샐쭉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그는 자신의 눈웃음이 보통보다 조금 더한 정도로 얄궂은 매력을 준다는 걸 아아아주 잘 알았다.
“좋아. 이번만 받아 줄게.”
이래서야 누가 돈을 주는 입장인지 모르겠지만, 닉시는 그것을 고이 접어 제 멜빵바지 앞주머니에 넣었다.
장마가 끝난 뒤로 마을은 한층 바빠졌다.
눈치 없이 훌쩍 자라버린 잡초들을 제거해야 했고, 불어난 물 때문에 난리 난 흙을 다시 예쁘게 다져야 했다.
닉시 또한 꽤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장마를 견딘 식물들이 갑자기 우람하게 성장하는 바람에, 빈둥대며 미뤄두었던 가지치기를 해야 됐으니.
그녀가 씨앗&모종 숍의 에드가 씨에게 쪽가위를 빌린 뒤, 양 목장을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바이올렛가 사람들이 비를 맞아 꼬질꼬질해진 양들을 시원하게 빨아 주고 있었다.
본래의 색을 되찾은 양들은 들판을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었고 아직 털이 흙탕물 색인 양들은 울타리 모퉁이에 옹기종기 모여, 본인의 차례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꼭 양털을 사야 하는 닉시가 몽실몽실한 양들과 친목을 쌓을 겸, 바이올렛네 울타리로 다가갔다.
“안녕 양들아. 빨리 체모를 길러 주렴. 그래야 내가 겨울옷을 장만할 수 있을 테니까.”
양이 갑자기 박치기 해 오는 걸 가뿐히 피하며, 닉시는 양들의 콧잔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때, 저 멀리 누군가 앉아 양털을 밀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면서도 손은 프로페셔널하게 양을 빡빡이로 만들고 있는 소녀.
그레타 바이올렛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조난당했을 때 그레타도 우릴 구해 줬다 했었지?’
감사 인사해야겠다!
닉시가 그레타에게 인사하기 위해 양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
“안녕 그레타! 저번에 네가 우릴 도와줬다 들었는데, 내가 정신이 없어서 인사를 못 했네. 그땐 정말…….”
“…….”
“고마웠, 는데. 내 말 들려?”
가까이에서 본 그레타는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얼마나 정신 팔려 있는 건지 바로 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모르는 정도였다.
그러면서 손은 벌써 다섯 마리의 벌거숭이 양을 만들고 있으니.
‘선 채로 잠든 건 아니지?’
닉시는 그레타의 앞에 섰다.
한참을 그레타의 공허한 눈을 바라보던 닉시는 손을 들었다.
동공 반응이 없었다.
닉시는 손가락을 굽혔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레타의 눈을 콕 눌렀다.
“그렇게 된 거였어요.”
그레타는 빨갛게 충혈된 눈을 하고 말했다.
“그렇구나. 그, 눈은 괜찮아? 네가 눈을 안 감을 줄은 몰랐어. 나도 누군가의 동공에 손가락을 대 본 건 처음이라…….”
졸지에 닉시는 애먼 사람 눈을 찌른 성격파탄자가 됐다.
그녀는 반성하는 자세로 그레타의 말을 경청했다.
다행히도 그레타는 본인의 고민 외의 것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괜찮다 말한 뒤, 코를 훌쩍였다.
그레타의 고민은 이러했다.
어느 날, 라울의 바 앞에서 라울에게 줄 손수건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라울이 엄청 깔끔하게! 멋지게! 차려입고는 마을 밖으로 나갔다는 것.
‘라울은 매일 깔끔하고 멋지게 차려입는 것 같은데.’
얼마나 멋지게 차려입었으면 그레타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 건지.
루이 14세처럼 차려입었으면 넋 놓을 만하겠다만.
“떨려서 잘 보진 못했지만…… 선생님…… 아니 라울 씨는……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같았어요. 평소에 잘 안 뿌리는 향수도 뿌리셨거든요.”
“아하. 관찰력 좋은데?”
“게다가 머리도 넘기셨는데, 평소와는 다른 왁스를 사용하신 것 같았어요. 모발의 굳은 강도가 달라 보였으니까요. 또 정장 커프스단추도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으시는 걸 사용하셨는데, 심지어 평소 답답해서 잘 안 하시던 넥타이도, 넥타이핀도 착용하셨어요.”
“그, 그 정도면 떤 것치고 꽤 잘 봤어…….”
“설마 라울 선생님에게 연인이 생기신 걸까요?”
그레타의 얼굴은 울먹임에 가까운 정도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맞다. 그제야 닉시는 그레타가 라울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방앗간을 참새가 그냥 못 지나가고, 재밌어 보이는 것을 그녀가 그냥 못 지나가는 법.
닉시가 그레타의 손을 턱 잡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으면 알아봐야지!”
“라울한테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녀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그녀의 밥이자 마을 사람들의 티눈. 화가의 집이었다.
화가는 이제 막 일어났는지 담요를 칭칭 두른 채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늘 저를 찾아오는 재앙 같은 닉시와는 안면이 있지만, 그레타와는 처음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과 한 번도 말 걸어 본 적 없는 수줍은 아가씨 조합.
그에겐 여러모로 감당하기 힘든 조합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시끄러워지기 전에 빨리 돌려보내야겠군.’
그러고 보니 라울이 이번 주에 누굴 만나러 간다 말한 적은 있다.
“누굴 만나러 간다는 것만 알아.”
“그건 안 본 나도 알지.”
마을 밖으로 나간 거면 누굴 만나러 간 거 아니면 뭐겠는가.
‘역시 선생님껜 연인이 있던 거야!’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된 그레타가 훌쩍였다. 괜히 마음 급해진 닉시가 화가의 귀에 속삭였다.
“그런 거 말고, 좀 더 상세한 정보가 필요하다구. 여기 있는 이 아가씨가 라울의 행보에 관심이 많아. 그의 하트가 어딘가에 정착하길 바란단 말이야. 이왕이면 가까운 데. 응? 무슨 뜻인지 알지?”
‘뭔 소리야.’
화가는 전혀 모르겠단 눈치였다.
이 예술가는 어떻게 전두엽이 마비된 저보다 더 감정을 모르는 건가.
답답해진 닉시가 가슴을 쳤다.
“그러니까 라울이 왜 나갔는지만 알면 우리의 마음은 아주 편해질 거라고!”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벤자민 본인의 마음은 아주 불편했다.
꼭 정답이 정해진 서술형 문제를 맞이한 느낌.
맞히면, 눈앞의 이 사람들의 마음이 편해지는 거고,
틀리면, 그가 아주아주 괴로워질 것 같은, 좋을 거 하나 없는 문제.
‘행보? 하트가 정착?’
그가 골똘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마을에 본인이 라틴어를 가르친 제자가 있다 했지. 깔끔한 흑발에 단정한 단발머리가 귀엽다던…… 선생님을 그렇게 생각해 주는 아주 기특한 제자라고. 그게 이자인가.’
화가가 그레타를 흘긋 바라봤다.
“…….”
“…….”
선생님의 하트가 정착. 기특한 제자.
‘……선생님이 누구랑 교제해서 빨리 안정되길 바라는 건가?’
기적의 논리. 그렇게 결론 내린 화가가 입을 열었다.
“선이라도 보는 건가 보지.”
일순간 화가는 그레타의 머리 뒤로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환상을 보았다.
벤자민은 본인이 엿됐음을 직감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라, 라울 선생님이 선을 보신다고요……? 선생님은…… 결혼하시는 걸까요?”
그레타는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아, 아냐! 이 화가 녀석이 말하는 선은…… 그래, 선행 같은 걸 본…… 본다는 거야. 누가 선행하는 걸 지켜보면 흥분하는 페티시가 있대! 그치 화가?”
“녀석이 음흉한 구석이 있긴 하지.”
“저 그렇게까지 바보 아니에요.”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를 달랠 법 모르는 둘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선생님께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던 거였어요. 그래서 그렇게 멋지게 차려입고 나가셨던 거군요…….”
갑자기 진정한 그레타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선생님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걸 볼 바엔.”
그리고 비장한 눈으로 주머니에서 양털깎이를 꺼냈다.
“워, 워. 물리적인 방법은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자!”
삭발 투쟁이라도 하겠다는 건지, 아님 누군가의 털을 밀어버리겠단 건지.
닉시가 양털깎이를 가져갔다. 그레타의 후후 웃는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나사 빠진 분쇄기 같았다.
무서웠다. 그것도 매우 겁나게.
“그래! 우리가 무슨 일인지 알아볼게!”
“우리?”
화가가 반문했다. 닉시가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웃었다.
“여기 이 화가는 라울이랑 친구거든! 화가 입장에선 아주 친한 친구지. 라울 입장에선 모르겠지만!”
“…….”
“그러니까 우리가 대체 라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아볼게!”
“정말인가요?”
그레타가 끼긱 고갤 돌렸다.
도대체가 말투는 짝사랑하는 수줍은 소녀인데 왜 얼굴은 한여름 무서운 이야기에 나오는 인형 얼굴 같은지 모르겠다.
그와 그녀의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그럼! 하하. 그렇지 화가?”
‘이게 다 네가 이상한 소리 해서 그런 거잖아!’
닉시가 화가의 팔짱 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레타의 정신 나감 스위치를 눌러버린 화가가 마지못해 고갤 끄덕였다.
“그……래.”
“감사해요……. 하지만 정말 라울 선생님이 사랑을 찾은 게 맞다면 차라리…….”
그레타는 반대쪽 주머니에서 양털깎이를 꺼냈다.
닉시가 오들오들 떨며 다시 그것을 수거해 갔다.
* * *
“준비됐지?”
오베르의 하나뿐인 마차 정거장.
노란 머리 이웃과 화가는 정거장 앞에 섰다.
라울이 부른 마차는 지금으로부터 30분 뒤 도착 예정.
라울은 지금쯤 바 앞에 팻말을 걸어 두고 이쪽으로 오는 중일 것이다.
모두 그레타의 놀라운 정보력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날씨? 이상 없음. 풍향, 이상 없음. 컨디션! 이상 없음. 화가의 정장? 이상, 함.”
“시끄러워.”
“화가. 난 정말 이해가 안 가. 대체 이 촌스러운 바지는 뭐야?”
닉시는 화가의 체크무늬 바지를 가리켰다.
딱 봐도 장롱에서 10세기쯤 묵혔다 꺼내 입은 것 같은 촌스러운 바지였다.
“그 좋은 허울을 가지고 꼭 그렇게밖에 못 쓰겠어? 맛있는 스테이크를 구워놓고 케첩을 발라놓은 것 같은 짓이야. 그 바지, 꼭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바지 같다고.”
“그 자식들은 바지를 안 입잖아.”
“내 말이 그 말이야 화가. 안 입는 것만 못해.”
그녀가 오늘 라울을 따라 도시 근교에 간다는 작전을 짜면서 벤자민에게 신신당부한 게 한 가지 있었다.
“내가 도시의 모던 보이처럼 입고 오라 했잖아!”
말끔한 정장을 입고 올 것.
그러나 가난한 화가가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있는 건 그저 흰 셔츠, 검은 셔츠, 베이지 셔츠.
그래서 낯 뜨거움을 무릅쓰고 길버트 그레이스에게 빌려 온 거였는데.
[정장이요? 아버지 거밖에 없는데 괜찮으세요?]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다.
사실 제 눈에도 좀 뭔가 이상해 보였지만 프랑스와 독일의 문화 차이겠거니 했지.
“그래서 뭐. 벗으란 건가?”
계속되는 타박에 빈정 상한 화가가 벨트를 풀었다.
제 옷이면 억울하지도 않을 텐데.
“미쳤어? 머리 스타일 뭐라 했으면 대머리로 다닐 사람이네.”
닉시가 황당하단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닉시와 벤자민이 벨트를 푸니 마니 옥신각신할 때쯤 옆쪽에서 큼큼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크흠. 벤자민? 닉시? 표지판 뒤에 사람 있어요.”
타이밍이 더럽게 좋은 바텐더 라울이었다.
그들이 저를 미행할 거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라울은 흔쾌히 마차 합석을 수락했다.
마차 안은 셋이 타자 꽉 들어찰 만큼 작았다.
옆에는 죽어도 붙어 있기 싫었던 벤자민은 라울 옆에 앉았다.
닉시는 앉자마자 라울과 하하 호호 떠들기 시작했다.
그중 대부분은 영양가 없는 아이스 브레이크 위주의 이야기였다. 날씨가 어떻니, 아침 식사가 어떻니 하는 그런 것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기만 해도 체력이 깎이는 화가는 굳이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합석하는 거 좋죠. 근교로 한번 나가려면 차편이 꽤 많이 드니까요.”
“저도 오베르에 오고 난 뒤로 처음으로 근교에 나가는 거예요!”
내심 그녀의 ‘안 입는 게 더 낫다!’는 말이 계속 신경 쓰였던 벤자민은 제 옷차림을 흘긋 바라봤다.
허벅지까지 오는 얇은 노퍽 재킷과 무난한 색의 앞이 접힌 윙 칼라 셔츠. 여유롭게 묶은 크라바트.
바지는 길버트 아버지의 취향인지 요란한 체크무늬였지만, 최악까진 아니었다.
오히려…….
벤자민은 눈을 들어 조잘거리는 노란 머리 이웃을 바라봤다.
깔끔하게 올려 묶은 금색 머리칼. 챙이 넓은 모자엔 복슬복슬한 그레타네 양털과 여름 장미가 꽂혀 있었다.
평소엔 안 입는 꽃무늬 자수가 들어간 가벼운 녹색 드레스. 허리선이 잘록하게 들어가게 하는 게 유행인 건지, 리본으로 둘러맨 허리.
‘……오히려 저 녀석 옷차림이 더 이상할 줄 알았는데.’
억울하지만 그녀와 꽤 잘 어울렸다.
노랗고 초록빛이니 정말 걸어 다니는 인간 해바라기라도 된 것 마냥.
그녀의 복장에서 트집 잡을 게 없어진 벤자민이 고갤 돌렸다.
“근데 둘 다 근교엔 웬일인가요?”
“시골에만 있으니까 좀이 쑤셔서요! 오랜만에 도시의 석탄 공기도 좀 쐴까 싶어서 나가는 거예요. 라울은요?”
“약속이 있어서요.”
“약속? 친구 분이랑요?”
닉시가 스리슬쩍 그의 목적을 떠봤다.
라울은 창밖을 보며 약간은 어색한 듯, 뭔가 민망한 듯 웃었다.
“아뇨. 친구는…… 아니에요.”
“어머. 그럼요?”
“……글쎄요.”
‘화가야, 저것을 보아라. 저것은, 수줍은 웃음이 아닌가.’의 제스처를 담아 닉시가 뺨 근육을 씰룩였다.
벤자민은 팔짱 낀 채 그녀의 안면 근육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딱 한마디 했다.
‘뭐.’
‘저 자식이 진짜.’
한편 라울은 서로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닉시와 벤자민을 바라봤다.
라울은 아까 자신이 본 광경을 다시 떠올렸다.
벨트를 풀고 있던 벤자민, 그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던 닉시.
부쩍 같이 다닌다 싶었는데 이미 갈 데까지 갔을 줄은 몰랐다.
야외플레이라니.
본인도 나름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다 생각했는데 도시에서 온 아가씨와 다른 나라의 이방인 조합의 핫함은 이길 수 없었다.
‘좋을 때지.’
라울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향해 고갤 돌렸다.
‘화가. 봐라. 저 미소는, 그 사람을, 생각하는 거다.’ 닉시가 턱 끝으로 라울을 가리켰다.
이번엔 어지간히 알아챈 건지, 벤자민이 슬쩍 눈을 굴려 라울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마디 내뱉었다.
‘어.’
“화가.”
“왜.”
“거기~ 둘이 앉으면 안 좁아아? 내 옆자리 넓어어. 대화, 하기도, 편하고!”
“역방향으로 앉으면 멀미 나.”
누구 좋으라고. 화가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하여간 협동의 ‘협’도 모르는 사람 같으니. 닉시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근데 라울. 요즘 자주 나가시는 것 같은데, 다 ‘글쎄요’ 분을 만나러 가시는 거예요?”
“그런 셈이죠. 지금 아니면 만날 일이 별로 없어서.”
라울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그제야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 하나가 있었다.
손바닥에 들어올 법한 정사각형 사이즈. 여닫는 형식의 모양새.
저건, 분명히.
‘반지 케이스?’
닉시 귓가에 게임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첫째. 친구는 아니지만 묘한 기류를 뿜는 인물과의 잦은 만남.
둘째. 수줍은 얼굴의 남자.
셋째. 반지 케이스.
그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울이 절도범이 아니라면 분명, 곧 저걸 끼워 줄 ‘연인’ 같은 게 있단 말이 되지 않겠는가.
‘야, 야, 화가!’
닉시가 허둥대며 벤자민을 노려봤다.
시선을 느낀 벤자민이 의문을 담아 고갤 가볍게 끄덕였다.
‘저기, 저거 보라고! 저거 반지 케이스잖아!’
닉시는 눈이 빠지게 크게 뜬 뒤 라울이 쥐고 있는 반지 케이스를 향해 눈짓했다.
그가 그녀의 시선 따라 라울의 손을 바라봤다.
‘저거, 반지. 반지! 약지!’
닉시가 주먹 쥔 오른손에서 본인의 약지만 펼쳐 왼손으로 반지 넣는 시늉을 했다.
창밖을 보고 있던 라울이 고갤 돌렸다.
“그나저나 두 분은 함께 근교로 나가시는…….”
라울은 닉시가 벤자민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거예요?”
라울의 머릿속엔 순간 물음표가 가득 들어찼다.
하지만 바텐더 경력 8년 차. 웬만한 일 아니고선 미소를 띠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아뇨! 우연히 길이 겹쳤을 뿐이에요.”
“그렇군요.”
라울이 다시 창밖으로 고갤 돌렸다.
‘눈치 못 챘냐고! 반지라고 저거!’
닉시는 다시 손가락을 바꿔 반지를 설명했다.
“참. 그러고 보니 저번에 줬던 양배추 잘…….”
라울은 이번에도 화가를 향해 중지를 치켜세운 닉시를 바라봤다.
“먹었……어요.”
“그, 그래요?”
“그…… 손가락은…….”
아까와 다른 점은, 이번엔 반대편 손의 검지 엄지를 붙여 동그랗게 만 손에 중지를 끼우고 있었단 것.
“하하, 짜잔.”
닉시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중지가 사라지는 마술을 보여 줬다.
‘못 봐 주겠군.’
벤자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닉시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야. 멀미난다며.”
“네 쇼가 워낙 정신 사나워서 말이지. 너랑 맞은편에 있는 게 더 멀미 나.”
닉시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서. 저 반지 어떡하냐고. 고백하러 가는 길 아냐? 뺏어서 창밖으로 던질까?”
“절도죄로 철창에 갇히고 싶어?”
라울은 투닥거리는 둘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실상은 본인의 반지가 갈취당할 위기였지만 그가 알 리는 없었다.
장장 두 시간 뒤, 기차로 갈아타 한 시간을 더 달린 뒤에야 오베르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 호시탐탐 반지를 노렸지만, 닉시는 결국 그레타의 사랑과 라울과의 우정, 둘 중 하나도 고르지 못했다. 때문에 눈물로 반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쪽으로 가야 해서요. 이따, 마을로 돌아갈 때도 함께 가실 건가요?”
“네! 같이 가죠.”
“그럼 기차역에서 7시에 봬요.”
라울이 먼저 인사한 뒤, 인파 속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닉시와 벤자민이 시선을 교환했다.
“쫓아가자.”
미행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 *
그들은 라울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도시 특유의 코가 칼칼한 공기. 바쁨과 여유로움이 공존하는 분위기.
벤자민과 닉시는 바텐더의 뒤를 쫓았다.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그들만 재난 현장 같은 분위기였다.
“좀 떨어져서 걸어.”
닉시는 손과 발을 같이 움직이며 뚝딱거리고 있었다.
부끄러워진 화가가 그녀와 모르는 사람인 양 떨어져서 걸었다.
그렇게 ‘미행하자!’ 큰소리쳐놓고 미행을 처음 하는 건지 뭔지.
라울은 큰길가에서 모퉁이를 돌았다. 그들이 황급히 뒤따라갔다.
혹시나 놓칠까 허겁지겁 달려간 그들이 모퉁이를 휙 돈 순간.
“5유로요, 감사합니다!”
바텐더는 바로 코앞 가게에서 꽃을 사고 나왔다.
라울이 묘한 인기척에 고갤 돌렸다.
다른 곳으로 간다 생각했던 닉시와 벤자민이 꽃집 앞에 진열된 꽃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우와. 이걸. 나한테. 주는 거야?”
수국 한 다발을 집어 든 닉시가 뚝딱이며 말했다.
벤자민은 머리를 짚으며 고갤 끄덕였다.
‘뭐야, 역시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보네.’
라울은 장사꾼 기질이 있는 것치고 그런 허접한 연기에도 깜빡 속아 넘어갔다.
그는 미소 지으며 다시 가던 길을 갔다.
“갔어?”
“그래.”
수국 꽃다발 뒤에 비죽 튀어나온 머리카락.
꽃다발에 얼굴이 다 가려질 리 없는데 그녀는 굳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화가는 그런 그녀가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결국 그녀가 들고 있는 꽃을 사 버렸다.
“……이거 주세요.”
“어? 사 주게?”
“네가 꽃 머리를 잡았잖아. 사야지.”
“네, 3유로입니다.”
“고마워 화가!”
닉시는 라울을 놓치지 않기 위해 후다닥 가게 밖으로 튀어 나갔다.
“어머.”
꽃집 주인이 수국을 포장하다 말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왠지 모르게 익숙했던 밀크티색 머리칼. 예전에 이 꽃집에 한 번 왔던 손님이었던 것이다.
“또 오셨네요?”
화가는 잠시 생각하는 듯 가만히 있었다.
‘아. 예전에 튤립을 샀던 그 가게였군.’
“소중한 분에게 꽃을 주겠다고 사 가셨죠? 소중한 분이 누굴까 했는데 연인분이셨군요?”
“화가, 빨리 와!”
가게 밖에서 닉시가 소리쳤다.
‘저런 녀석이 어딜 봐서?’
“아닙니다.”
라울도 그렇고 이 사람도 그렇고. 대체 저와 그녀의 뭘 보고 연인 같다는 건지 모르겠다. 원수라면 몰라도.
그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포장된 꽃을 받았다.
가게 밖. 저만치 큰길가를 걸어가던 라울은 어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는 모양. 극장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라울은 누굴 찾는 건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누군가를 찾은 그가 극장 로비 안쪽으로 걸어갔다.
벤자민 화분 뒤에 숨은 닉시가 머릴 빼꼼 내밀었다.
그녀는 나무 기둥을 쓰다듬으며 눈물지었다.
“……망한 것 같아, 화가. 라울이 만나고 있는 저 사람, 아무리 봐도 여성분이잖아. 그것도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도시의 우아한 여성.”
“나무 보고 뭐라 중얼거리는 거야?”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라울이 만난 ‘글쎄요’는 아주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우아함과 단아함을 적절히 섞은 외향. 부드러워 보이는 눈매. 나열하면 입 아픈 분위기, 옷 태 블라블라.
“우리 그레타도 외모로는 오베르에서 지지 않지만 저 여성분은 누가 와도 못 이길 것 같은데?”
어느 나라 여왕님이라도 불러와야 겨우 데스매치 할 수 있을 정도.
가능성 없는 게임에 닉시는 벤자민이 사 준 수국 잎사귀에 눈물을 닦았다.
그때 화가가 손을 들었다.
“이봐. 저기부터 보고 이야기하지.”
“엉?”
“저 여자. 약지에 반지를 끼고 있잖아.”
화가의 말대로 후후 웃는 여성의 약지엔 반지가 걸려 있었다.
누가 봐도 결혼반지였다.
‘이미 결혼한 사람?’
“응? 그럼 라울이 들고 있었던 건 뭐야.”
“그건…….”
라울과 미지의 여성이 그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닉시는 벽에 붙어 포스터인 척했고 벤자민은 벤자민인 척 화분 옆에 그냥 서 있었다.
“그럼 이걸로 정할까요?”
“그래, 좋지.”
누가 봐도 평범하게 데이트하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아들은 잘 지내나요?”
“그럼. 라울 너는?”
“그럭저럭이요.”
아들? 닉시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곧장 비장하게 돌아봤다.
“화가. 확신이 섰어.”
그런 말 하는 것치고 영 영양가 있었던 적은 없었으면서.
화가는 마지못해 되물었다.
“뭔데.”
“불륜이야.”
‘역시.’
화가는 잠시 세상의 무엇이 그녀의 사고 회로를 이렇게 괴상망측하게 만든 건지 상념하기 시작했다.
화가의 명상 시간을 눈치 못 챈 닉시가 본인의 의견을 늘어놓았다.
“라울은 지금 위험한 불놀이를 즐기고 있는 거라고. 반지 케이스 같이 생긴 건 폭탄인 거야. 만약 현장을 누군가에게 들키면 폭탄을 던져서 본인들의 사랑을 지키려는 거지.”
‘미친 건가.’
화가가 구린내 풍기는 노린재 보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저 녀석이 그렇게까지 선 넘는 녀석은 아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읍!”
쉿. 화가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막 라울과 미지의 여인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참이었다.
위험한 불놀이를 즐기고 있는 그들이 관람하러 들어간 영화는 쟌 콕트의 .
참으로 연인들이나 볼 법한 영화였다.
화가와 농부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짜 가야만 하나?’와 ‘와! 재밌겠다 꼭 가야 한다!’의 팽팽한 시선.
벤자민은 갑자기 튀어 나가 싱글벙글 팝콘을 사는 닉시는 보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원래 그들의 목적은 마을의 바텐더와 여왕 같은 여인이 무슨 사이인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고 10분 후.
그들은 목적을 새까맣게 잊곤 영화에 푹 빠져 넋을 놓고 있었다.
“출구는 이쪽입니다!”
정신이 든 것은, 알차게 먹은 빈 팝콘 통을 들고 영화관 출구로 나왔을 때.
로맨틱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닉시는, 야수가 등장하는 부분엔 눈을 빛내며 관람하다 야수가 사람이 됐을 땐 오열했다. “짐승일 때가 더 멋있었는데!”라며.
반대로 가난한 예술가 화가는 야수에게 빚진 아버지를 위해 소녀 가장처럼 야수의 성으로 간 벨에게 몰입했다.
“당연히 벨의 잘못이지! 일주일 만에 돌아왔으면 야수가 죽을 위기에 처하지 않았을 거잖아!”
“애초에 야수 녀석은 아버지를 인질 삼아 딸을 내놓으라 협박한 것부터 글러 먹은 놈이었어.”
“장미꽃을 안 꺾었으면 됐잖아. 청개구리야? 하지 말란 짓만 골라서 하게.”
“가족이 아프다면, 그 가족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끝까지 곁을 지킬 수 있게 풀어 줘야지.”
둘은 투닥이며 극장 밖을 나왔다.
하지만 둘의 의견이 같은 게 한 가지 있었다.
결론적으로 둘의 사랑은 염병. 지들만 유난이라는 것.
화가와 농부가 피 튀기는 백 분 토론을 하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미혼 바텐더와 기혼 모던 걸 여성이 걸어왔다.
“화가! 저기 바텐더!”
이대로 있다간 그들에게 들킬 위기였다.
―턱!
닉시가 곧장 벤자민을 벽에 몰아세우고 척, 손으로 벽을 짚었다.
흡사 로맨스 영화에 나온 한 장면 같이, 박력 넘치는 모습이었다.
“……뭐 하는 거야……!”
화가가 제 머리 옆에 척 하니 놓인 그녀의 손을 보고 당혹스럽게 속삭였다.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거든?”
라울에게 들켜서 반지 폭탄을 맞기 전에 공공장소에서 애정행각 하는 커플로 보여야 했다.
그런 커플은 눈살 찌푸려져서 시야가 평소보다 78%는 흐릿하게 보이니까.
닉시는 챙 넓은 모자로 시야를 가렸다.
화가가 불쑥 들이민 그녀의 얼굴을 애써 피하고자 고갤 돌렸다.
버둥대는 남자와 들이대는 여자. 멀리서 봤을 때 꽤 과격한 모습이었다.
“벨의 헌신적인 사랑에 요정도 감동했을 거예요.”
“후후. 그래, 라울. 재밌는 영화였어.”
라울과 미지의 여성이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갔다.
“나중에 아드님도 같이 보면 재밌겠네요. 안녕, 벤자민, 닉시 양.”
“어? 어! 안녕.”
“아, 슬슬 그곳으로 가 볼까요? 아이 교복을 맞춰야 한다 하셨잖아요?”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그와 그녀의 싸늘한 침묵이 맴돌았다.
“…….”
“…….”
“……떨어질까?”
“……떨어져.”
남겨진 닉시와 벤자민은 싸하게 서로를 바라보다 어색하게 떨어져 나갔다.
위험한 속내를 숨긴 바텐더와 어떤 사람일지 감도 안 오는 여인이 다음으로 간 곳은 양복점이었다.
아까의 대화로 봐선, 여인의 아이로 추정되는 친구의 교복을 맞추러 가는 듯했다.
라울과 여인이 검정 패턴에 노란 체크무늬가 예쁜 안감을 고르고 있을 무렵, 닉시와 벤자민은 건너편 가게 마네킹 뒤에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냥 칵테일 파는 로미오와 애 있는 줄리엣 아닐까? 집안이 둘의 사랑을 반대해서 이렇게 몰래 만나게 된 거야.”
호호 웃는 양복점 주인이 닉시에 보라색 원피스를 대 보았다.
닉시는 본능적으로 포즈를 취했다.
“왜 굳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 생각하는 거지? 사촌지간일 수도 있지 않나?”
벤자민은 본인에게 쥐어진 정장 바지를 보았다.
‘역시 가게 주인 눈에도 본인 바지가 이상하게 보인 건가’ 화가가 유심히 생각했다.
“와. 화가, 넌 어디 가서 연애 코칭 같은 거 해 주지 마라. 저게 어딜 봐서 사촌지간의 눈이야? 저, 저 눈을 보라고!”
‘이 거리에서 눈을 어떻게 보라는 거야. 사람이 성냥개비만 한데.’
벤자민은 눈부신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저게 사랑 아니면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아!”
“거절하겠어.”
“왜!”
“필요 없으니까.”
그들의 의미 모를 말다툼이 이어지고, 닉시와 벤자민 손엔 가게 주인이 골라준 옷들이 수북이 쌓여 갔다.
건너편 양복점의 라울과 아름다운 여인이 교복으로 만들 천을 다 골랐을 무렵이었다.
―촤악!
닉시와 벤자민은 피팅 룸 커튼을 걷으며 위풍당당 등장했다.
“사랑이야!”
“아냐.”
벤자민이 커프스단추를 느슨히 풀며 말했다.
“사랑이면 더 이상한 꼴이라고. 누가 봐도 상대는 기혼자야. 라울 녀석이 외상에 이자는 좀 많이 붙이는 녀석이지만 다른 사람의 아내를 좋아할 만큼 막돼먹은 녀석은 아냐.”
밝은 밀크티 머리색이랑 어울릴 법한 차콜색 재킷.
다리 길이에 딱 맞는 완벽한 기장. 허리 부근은 살짝 붙게 만들어서 낭창하게 떨어지는 바지 핏과 윗부분은 심플하게 떨어지는 세련된 셔츠.
흡사 파리의 완벽한 모던에 가까운 고급스러운 모습이었다.
닉시는 반묶음 한 머리를 뒤로 휙 넘기며 반박했다.
“아니, 사랑이 미혼 여성이랑 미혼 남성만 누릴 수 있는 권리인가? 그런 구시대적 발언하면 인기 없어 화가. 사랑은 인간이면 기본적으로 누릴 수 있는 감정적 상태라고. 국가가 허락한 합법적 정신 이상 상태 몰라?”
어깨를 살짝 드러낸 보랏빛 실크 드레스.
앞섬엔 은실로 짠 듯한 흰색의 레이스와 진보라색 리본이 우아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허리 아래로 오는 물결치는 치마엔 촘촘한 자수가 박혀 있었다.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한 파리처럼 빼어난 모습이었다.
“사랑이야!”
“아냐.”
“사랑!”
“어머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세요!”
“고마워요!”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 의견 사이. 둘이 으르렁거렸다.
마침 옷감을 다 고른 라울과 예쁜 여인이 가게를 나왔다. 닉시와 벤자민은 그들을 따라가기 위해 허겁지겁 벗어놨던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하아…… 그래서, 넌 사랑 같은 게 뭔지 알고 주장하는 건가?”
“몰라! 근데 꼭 알아야 주장할 수 있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도 그런 거 몰라도 잘만 번식 했어.”
“……그러니까 그 녀석들이 멸종했지.”
“모두 합쳐서 300유로입니다!”
“네! 여기요!”
그와 그녀는 서로의 고집에 머리를 짚었고, 가게 주인은 그런 것 따윈 아무렴 상관없이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낭랑한 점원의 안녕 인사와 함께 딸랑. 가게 종이 울렸다.
그들은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당했다.’
‘당했군.’
그들은 뒤늦게 본인들이 홀랑 벗겨져 먹혔단 걸 깨달았다.
라울 일행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한눈에 봐도 부르주아만 올 수 있을 법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레스토랑이네.”
“……레스토랑이군.”
양품점 점원의 영입에 속아 파리 피플처럼 꾸민 촌사람 농부와 화가였지만, 감히 문지방을 넘는 게 두려운 그런 곳.
금테두리 입간판에 적힌 파스타의 단가가 허리 부러져서 치료하는 비용과 맞먹었다.
“여긴 안 되겠군. 저기로 가지.”
벤자민은 엄지손으로 레스토랑 맞은편의 샌드위치 가게를 가리켰다.
하지만 닉시는 가게 앞에서 묵묵부답이었다.
“이봐?”
그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닉시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켠 뒤 어떤 종이를 휙 들어 화가 앞에 내보였다.
“이걸 쓰자.”
길버트 그레이스의 이름이 적힌 수표였다.
화가가 수표 종이에 적힌 이름을 보고 눈썹을 좁혔다.
“절도……했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도둑놈을 보는 표정이었다.
억울해진 닉시가 마구 손사래 쳤다.
“아니! 준 거라고! 길이 너랑 맛있는 거 사 먹으라 했어!”
하지만 그는 여전히 범죄자를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이없어진 닉시가 그의 손을 잡아 레스토랑 안으로 척척 들어갔다.
크리스탈 하나가 잘 키운 감자 한 박스 값일 것 같은 샹들리에.
훅 풍기는 바질과 풍미 깊은 와인 냄새.
예약 같은 건 하지 않았다는 당돌한 닉시의 말에 종업원은 그녀를 어느 명문가의 까탈스러운 아가씨로 착각했다.
하지만 덕분에 그들은 창가 가장 좋은 자리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중앙에 피아노가 있는 넓은 홀.
운 좋게도 라울이 있는 테이블 뒤편이었다.
메뉴판에서 적당히 괜찮을 법한 메뉴를 시키자 식전주가 나왔다.
화가가 제법 능숙하게 시음한 뒤 와인을 골랐다.
매일 압생트만 먹는 주제에 꽤 고급스러운 취향이네. 의외의 모습에 닉시가 휘파람을 불었다.
“오, 자주 왔나 봐?”
“처음이야.”
“근데 왜 능숙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그래 보여.”
요컨대 뻔뻔하게 굴면 된다는 것.
갓 구워 따뜻한 식전 빵과 발사믹 소스가 나올 때쯤, 라울의 테이블에서는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래서 불륜이냐 아니냐!
닉시의 상체가 절로 그쪽을 향해 기울었다.
“내가 결혼한다 했을 때 네가 울었던 게 생각나네, 라울. 참 귀여웠는데.”
“그걸 왜 아직도 기억하고 계세요……. 하지만 귀여우셨다면 다행이네요.”
‘거 봐, 내 말이 맞지? 금지된 사랑이다 이거야.’ 닉시는 화가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선생님께서 좋은 분을 만나게 된 게 기뻤죠.”
“후후. 나도 네가 그렇게 기뻐해 줘서 너무 고마웠단다. 넌 내 최고의 제자야.”
뜻밖의 관계. 예상치도 못한 스승의 은혜였다.
갑자기 훈훈해지는 분위기에 벤자민이 빵을 입에 넣으며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닉시는 주먹으로 포크를 쥔 채 짜게 식었다.
“선생님? 제자?”
“뭐, 둘이 어떤 사이인지 이제야 알게 됐군.”
“진짜? 끈적끈적한 사이 아니고?”
“넌 그 극단적인 사고를 고칠 필요가 있어.”
닉시가 맹하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의 허탈함을 보다 못한 벤자민이 그녀의 입에 엄청 큰 고기 한 점을 밀어 넣었다.
뭔가 뭔 길을 돌아온 것 같지만 어쨌든 그들의 목표는 완료되었다.
라울이 만나러 온 미지의 여인은 그의 오래된 선생님. 라울은 기특한 제자.
드디어 그레타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줄 수 있게 됐다.
사실 그들은 어느새 새카맣게 잊고 있었지만.
“당연히 사랑일 줄 알았어. 그게 아니면 누구한테 저렇게 시간과 관심을 쏟을 리 없잖아.”
닉시가 간신히 고기를 씹어 삼킨 뒤 말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감정이었다. 사랑이란 거.
특히 그 사랑에 빠진 자들의 비상식적인 행동 양상은 더 이해할 수 없다.
뭐, 사랑에 빠지면 저절로 이해한다지만 빠진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거 참, 사랑 맞히기 한 번 어렵네. 잠깐, 그러고 보니…….’
닉시는 저가 마을 사람들한테 한창 사랑 타령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화가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는데.
화가는 뭐라 대답했더라.
[후회할 선택을 하는 거야.]“화가. 너 혹시 사랑 해봤어?”
그때 설핏 지나가듯 말해서 대답이 맞는지 가물가물했던 말.
뭔가 모르게 미련이 뚝뚝 떨어져 있는, 사랑 같은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 분위기 잡고 할 말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닉시의 질문에 벤자민이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응? 해 봤냐구. 네가 먼저 나한테 말했잖아. 사랑은 후회할 선택을 하는 거라고.”
닉시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 보통 저 이웃이 눈을 저렇게 뜨면 질문을 그냥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화가는 표정을 갈무리하곤 입에 고기 한 점을 넣으며 대꾸했다.
“해 봤어.”
과거형의 대답.
그 말인즉슨, 그녀의 예상대로 미련이 남을 법한 사랑이었단 말이다.
화가의 사랑이라.
눈앞의 남자가 원체 어둡고 침침한 기운의 결정체라 그런가, 썩 정상적인 사랑 같은 건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의 이런 생각을 알아차린 화가가 말을 덧붙였다.
“보통 남녀 간의 사랑 같은 게 아니니까 이상한 상상은 하지 마.”
“엥. 그럼?”
그게 더 수상하고 이상한데.
닉시가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그는 본인과 네 살 차이 났던 남동생을 떠올렸다.
몸이 약했지만 늘 씩씩하게 굴었던 동생.
늘 자기가 형의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다 말하던 착한 동생.
그런 말을 할 때면 그는 아프지나 말라고 핀잔주곤 저녁을 동생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준비했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비 막아 줄 우산 하나 없는 처량한 길바닥 신세에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이 악물게 해 줄 수 있었던 이유.
“그런 게 있어.”
그는 브로콜리를 입에 넣었다.
‘또 과묵하게 구는 거 보면 옛날 생각 같은 걸 하나 보군.’
닉시는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럼 넌 연인 같은 건 한 번도 없었던 거야?”
“그럴 시간 없었어.”
“와. 인생 헛살았다.”
“그럼 넌.”
“난 있긴 했어. 다들 도망갔지만.”
자발적인 솔로나 타의적인 솔로나 그게 그거였다. 결론적으로 둘 다 헛산 인생이란 점.
닉시는 예쁘게 자른 고기를 입에 넣으며 우물거렸다.
침샘을 돋우는 뭉근한 감각이 혀끝을 간질였다.
마치 그 여느 때, 동굴에서 섞였던 미묘한 감각처럼.
“……근데 왜 그렇게 키스가 능숙했지? 그것도 능숙한 척을 잘해서 그런 거야?”
콜록. 웬만해선 당황하는 법이 없던 벤자민이 콜록거렸다.
“뭐? 그게 무슨…….”
“너 나한테 키스했잖아. 동굴에서.”
“정신이 있었어?”
“반쯤은.”
그녀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열 때문에 제정신은 아니었던 터라 드문드문 기억이 비어 있었지만 그가 제게 입 맞췄던 건 기억났다.
입으로 넘어왔던 약이 더럽게 써서 일순간 정신이 확 들었으니까.
그렇게 쓴 걸 무식하게 입에 들이붓는데, 당연히 무의식중에도 기억할 수밖에.
게다가 살을 감아왔던 타인의 느릿한 움직임은, 연인이 없진 않았던 그녀가 ‘오, 잘하네.’ 감탄한 정도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젠장.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벤자민이 머릴 마구 헝클이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네가 먼저 나한테 키스했잖아. 지난번에 너도 이렇게 약을 먹여 줬다면서.”
“내가?”
닉시가 무책임하게 얼빠진 소릴 냈다.
지난번이라면 화가가 약 부작용으로 아팠던 때를 말하는 건가.
“제길……. 그걸 왜 기억하고 있는 건데…….”
벤자민이 붉어진 얼굴로 마른세수했다.
사레 때문일 수도 있건만 설익은 딸기처럼 붉어진 귓가가 제법 귀여웠다.
닉시는 문득 그날 동굴 안에서 저를 바라보던 화가의 얼굴을 기억해 냈다.
[곧 죽는단 말을 하고 싶은 건가?]그때도 지금과 비슷했던 것 같다.
표정이 비슷하다기보단, 비 맞아서 애처로운 주제에 눈만은 끈질기게 저를 바라봤던 모습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저를 통해 누굴 바라보고 있는 건지 죽는다 농담하는 제게 절절하게 구는 모습이.
그렇게 애절하게 굴면서 아닌 척은 능숙히 잘해서 제 머리를 태연히 쓰다듬었던 게.
“그건 그냥 의료행위니까 잊어.”
“어.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거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지금처럼.
‘귀엽다?’
그녀는 본인이 그렇게 떠올리곤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어디 박혔는지는 모르지만, 존재감만 과시하는 손바닥의 가시 같은 따끔한 이물감.
‘뭐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그녀는 씁쓸한 와인을 들이키며 입맛을 다셨다.
그 뒤로 다시 라울과 마주친 건, 레스토랑 앞에서였다.
급해서 레스토랑 화장실을 빌린 것처럼 구는 닉시 앞에서 라울은 이번에도 그녀의 거짓말을 믿어 주었다.
‘어떤 레스토랑이 밥도 안 먹는 손님한테 화장실을 빌려주냐고.’
벤자민은 하하 호호 웃는 노란 머리 이웃과 바텐더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예쁜 옷으로 갈아입으셨군요?”
“네! 새로운 옷을 하나 장만해야 했거든요.”
닉시가 들뜬 아가씨처럼 옷자락을 잡고 빙글 돌았다.
“잘 어울려요.”
라울이 미소 지었다.
‘봐봐, 나한텐 영혼 담기지 않은 비즈니스 미소잖아. 아까랑 다르게. 근데 어딜 봐서 그냥 스승과 제자 사이냐고.’
아직까지 사랑이다! 주장을 버리지 못한 닉시가 투덜거렸다.
기차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그에게 받은 수국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꼬물거림을 보던 라울이 입을 열었다.
“벤자민이 선물해 주던가요?”
“네.”
정확히는 갈취에 가까웠지만.
화가의 시선이 뒤통수에 날아와 꽂혔다. 그녀는 무시했다.
“부럽네요.”
“뭐가요?”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을 수 있으니까요.”
라울은 제 주머니에 있는 정사각형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인생 대부분을 눈칫밥으로 살았던 닉시가 그 잠깐의 우물쭈물거림을 놓칠 리 없었다.
“아까 그 여성분 누구예요?”
그녀가 냉큼 질러 버렸다.
화가는 그녀의 용감한 뒤통수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뻔뻔히 물어볼 거면 왜 이 고생을 한 건데, 하는 경악이었다.
라울은 그녀의 대답에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제 스승님을 보셨군요.”
닉시와 벤자민이 고갤 끄덕였다.
라울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제가 어릴 때 라틴어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이세요.”
“좋은 제자군.”
닉시의 미련을 눈치챈 벤자민이 일찌감치 선을 그었다. 마을에 별로 없는 제 친구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원래 오늘 고백하려 했는데.”
이 자식이? 화가는 반지 케이스를 보며 아련한 얼굴을 한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남편이 없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는데…….”
“어, 네?”
사랑이길 바랐지만 그렇게까진 바라지 않았다.
닉시가 그의 충격적인 발언에 머릴 긁적였다.
“그러니까…… 라울 씨는 임자 있는 여성분을 좋아한 거예요? 어…… 혹시 둘이 금지된 사랑을 하고 있다거나?”
“있었던……이라고 해야 할까요. 선생님의 남편 분은 오래전 세상을 떠나셨거든요.”
“아, 아! 그렇군요. 뭐, 그럼 그럴 수 있죠. 법적 상대가 죽고 없으면 법정은 안 갈 테니까.”
“그놈이 살아 있을 때도 제 마음을 고백하려 시도해 봤지만…….”
‘어이 화가. 네 친구는 글러 먹었어. 쓰레기 같은데.’ 닉시가 몰래 속삭였다. ‘……나도 알아.’ 하루아침에 친구를 잃어버린 듯한 화가가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포기해야겠죠. 선생님께 필요한 건 제가 아니니까요.”
라울이 말했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행동도 생각으로만 그치면 범죄라고 할 순 없으니.
“좋은 생각이네요.”
“좋은 생각이군.”
그들의 마음속에서 라울의 입지가 다시 바텐더와 친구로 등극했다.
어찌 됐든 라울의 사랑은 실패로 끝났고 그레타의 사랑은 가능성으로 남게 됐다.
가장 최고의 엔딩이었다.
마을로 돌아가기 위한 기차 안.
하루 종일 돌아다니기 바빴던 닉시는 곧장 곯아떨어졌다.
자꾸 딱따구리마냥 창문에 머릴 처박으면서도 잠에서 깨지는 않는 게 신기했다.
이대로 있다간 창문과 그녀의 머리 둘 중 하난 박살 날 것을 염려한 벤자민이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녀의 머리를 어깨에 얹으려면 저가 좀 불편하게 자세를 기울여야 했다.
그래도 밥값은 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벤자민은 굳이 자세를 틀어 그녀의 머릴 제 어깨 위에 얹었다.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보던 라울이 미소 지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거야, 벤자민. 전혀 눈치 못 챘잖아.”
“그런 거 아냐.”
“그럼 무슨 사인데?”
굳이 따지면 고용자와 고용인의 사이?
저는 그녀에게 그림 의뢰를 받았고 저는 그림을 그리고.
오늘도 그녀는 저에게 라울 미행 의뢰를 제안했고 그는 그걸 수락했다.
그녀는 제안하고, 그는 수락하고. 끌고 다니고, 끌려다니고. 이끌고, 끌리고.
‘이래서야 농부랑 밭 가는 소 같군.’
벤자민은 새삼 자신의 위치가 가축과 비슷한 것을 깨닫고 쓴 입맛을 다셨다.
“거봐, 말 못 하는 거 보면 뭐 있네.”
라울이 농담했다. 생각하느라 대답을 못 한 그만 억울하게 됐다.
“이 녀석이랑은 그냥 그런 사이야.”
“‘그냥 그런’은 또 뭔데?”
“그냥…….”
끌고 다니고, 끌려다니고. 이끌고, 끌리고.
근데 또 늘 쫓아도 떠나지 않는 파리마냥 귀찮게 굴긴 해도 또, 막상 그 이끌림에 질질 끌려갔을 때 무료했던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건 무슨 사이일까. 있으면 성가시기 짝에 없는데, 없으면 그게 또.
그의 멍하니 생각에 잠긴 표정을 보며 라울이 물었다.
“닉시, 좋아해?”
끌리고, 끌리는.
라울의 질문에 벤자민은 잠시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니.”
그는 질색한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일말의 고민도 없는, 잘 자른 무의 단면 같은 단호한 부정이었다.
“그런 것치곤 잘 어울려 주잖아. 원래라면 무시했을걸.”
저는 늘 무시했다. 그걸 어떻게든 뚫고 오는 그녀가 이상한 거지.
그녀와 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였다.
그래서 그는 그냥 뺨만 긁적이다 말았다.
“아무튼 아냐.”
“흐음…… 네가 그렇다면야.”
대화가 끝났다. 벤자민은 몸을 등받이에 깊이 묻었다. 창밖으로 어둑한 숲길이 빠르게 지나갔다.
‘좋아하냐고?’
그가 흘긋 닉시를 바라봤다.
어지간히도 피곤했던 건지 작게 코도 골며 자고 있었다.
인식하지도 않았던 걸 인식하자 별게 다 신경 쓰였다.
예로 들면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이 자꾸 제 목덜미를 건드리고 있는 것. 고개가 흔들리고 있을 때마다 살풋 벌어진 입술이 작게 달싹인다는 것.
은근히 속을 간질여오는 그런 감각.
벤자민은 가만히 제 소맷자락을 끌어와 닉시의 입가를 마구 문질렀다.
눅눅해질 뻔한 그의 어깨를 막기 위함이었다.
“으, 응…….”
‘내가 이런 녀석을?’
그렇게까지 했는데 그녀는 좀처럼 잠에서 깨지 않았다. 놀라웠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기차는 그렇게 오베르로 향했다.
▶ 오늘의 수확
수국 한 다발, 영화 티켓, 버터나이프, 화가의 손수건.
▶ 총평
잠깐 잠든 사이에 화가가 내 머릴 베개 삼아 기대서 졸고 있었다. 불편해 보이기에 라울의 무릎으로 옮겨 줌! 이게 바로 배려! 인간의 미덕! 근데 내 입에 손수건은 왜 물려 놨지?
* * *
닉시의 밭은 어느덧 푸른 녹음을 자랑했다.
초보 농사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작물들은 제각기 튼실한 열매를 맺고 있었다.
그중 가장 그녀의 사랑을 많이 받은 베리들은 다음 주가 지나면 슬슬 수확할 수 있을 만큼 부쩍 자라 있었다.
그녀는 다가올 수확 시기를 대비해 다람쥐, 사슴, 너구리 등 제 작물을 털어 가는 동물들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바로 호랑이 체취 스프레이를 개발하는 것.
마당의 해바라기도 어느덧 그녀의 무릎까지 자랐다. 한 달 만에 제 키를 넘기길 바랐는데 약간 아쉬운 성장 속도였다.
“음…… 식물 성장 촉진제를 만들어 볼까.”
‘질소랑, 인산이랑, 칼륨을…….’
중얼거리는 닉시의 시야에 소담하게 꾸며진 마을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긴 줄에 엮어 놓은 색색의 전구들. 프랑스 깃발을 꽂아 놓은 기둥. 붉은색 흰색 푸른색이 하늘에서 너울지는 날.
언젠가 길버트가 말했던 마을 축제, 프랑스 혁명을 기념한 바스티유 데이와 더불어 마을은 바자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아무래도 바스티유 축제는 나라 차원의 기념적인 행사다 보니 거의 여름 내내 마을이 시끌벅적 즐거울 예정이었다.
게다가 올해는 전쟁이 끝난 후, 대대적인 축제를 처음 여는 해이기도 했다. 마을 이장은 이번 축제는 봄 축제보다 더 크게 열릴 거라 말했다.
닉시도 파리에 있을 때 바스티유 축제를 본 적 있었다.
온갖 색색의 종이들이 흩날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거리로 나와 음악 축제를 벌였다.
그땐 연구에 찌들어 있을 때라 뭐가 저렇게 즐거울까 했는데.
닉시는 바다까지 연결된 길의 화려하게 꾸며진 전구들을 보고 부르르 몸을 떨며 미소 지었다.
‘아무렴! 즐기라고 있는 게 축젠데 맘껏 즐겨야지!’
그럼 가장 첫 번째로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 바로 마을의 비선 실세, 길버트가 마을의 문제아들에게 내린 소집령에 응하는 것이었다.
* * *
“바자회는 3일 동안 열려. 마을부터 바다까지 이어지는 길에, 한 가구당 하나의 좌판을 쭉 마련해 놓을 거야.”
길버트는 마을의 문제아 닉시와, 요주의 인물인 벤자민을 앉혀놓고, 축제에 대해 아주 친절히 설명했다.
자다가 제집 마당으로 끌려 나온 화가가 아직도 졸음 가득한 얼굴로 작게 하품했다.
“자 여기서 문제. 한 가구당 하나의 좌판을 마련했단 말을 둘한테 하는 이유는 뭘까요?”
“정답, 정답!”
닉시가 손을 팍 치켜들었다. 길버트가 호응하듯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꼭 참석하란 말이겠지! 자리도 펴 줬으니까?”
“정답.”
길버트는 마당 바닥에 그린 삐뚤삐뚤한 그림을 가리켰다.
본인은 저와 농부, 화가라고 그려 놓은 거라는데, 아무리 봐도 콩나물 세 개였다.
‘길버트 그레이스……. 그림을 정말 못 그리는군.’
“필히 참석해야 하니까 뭘 내놓을지 미리 생각해 두라고!”
“하지만 길. 난 바자회에 내놓을 만한 게 없는데?”
그녀는 아직 작물을 수확하기 전이었다.
그러니 뭘 내놓으려면 집안 살림을 벅벅 긁어 와야 하는데, 가뜩이나 없는 살림. 그마저도 내놓으라 하면 닉시는 간이라도 팔고 와야 한다.
“굳이 물건이나 잡동사니 같은 게 아니어도 돼.”
“그럼?”
“음…… 네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거? 참고로 예전에 에드가 씨는 팔씨름 가판대를 열었어. 이기면 5유로를 주고 지면 5유로를 뜯으셨지.”
“아하, 그런 식이란 말이지.”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거라.
그녀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장기가 스쳤다.
그중 제일 화려하고 멋있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대공 미사일 발사.
백발백중의 명중률을 자랑하는 그녀의 특기 중 하나였다.
“아. 미리 경고하지만 저번 강낭콩처럼 마을을 혼란스럽게 할 건 안 돼. 꼭 무해하고 평범한 걸로 해야 돼.”
그녀의 머릿속에서 날아다니던 미사일이 푸쉬식 식어버렸다.
“강낭콩이 어때서. 반응 좋기만 했는데.”
“마을 어르신들 기절한다니까. 아무튼, 뭘 할지 정했으면 나한테 알려 줘. 미리 간판 만들어야 하니까.”
“알겠어.”
바쁜 마을 이장 길버트는 그렇게 가 버렸다.
담요를 둘둘 메고 있던 화가가 못다 잔 잠을 다시 청하기 위해 도로 집으로 들어가려는 때, 닉시는 그의 담요를 붙잡았다.
“화가, 넌 뭐 할 거야?”
그냥 검지 엄지로 붙잡은 것뿐인데 담요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대단한 힘이었다.
아끼는 담요가 찢어지는 걸 원치 않았던 그는 도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안 가.”
“방금 마을 이장님 말 안 들었어? 꼭 참여해야 한대. 필참.”
저가 가서 뭘 하라고.
저번 봄 축제 때야, 사람들이 강낭콩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무사할 수 있었다지만, 이번엔 강낭콩도 금지 당했으니 마을 사람들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릴만 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 아닌가.
그럼 분명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토마토를 던져댈 텐데.
“넌. 뭘 할 건데.”
“나?”
안 그래도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강낭콩도 안 돼, 미사일도 안 돼. 그럼 폭탄도 안 될 테고. 분당 500발을 쏘는 기관총 축포 쇼도 안 된다는 거 아닌가.
“나 팔 수 있는 것도 보여 줄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데?!”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닉시는 전쟁에 대한 것을 제외하면 보여 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어떡하지? 혹시 낙하산 타고 공중 착륙 같은 건 안 될까? 아! 나 탄피로 반지 잘 만들어. 마을 뒷산 파보면 탄피 한 무더기는 나오지 않을까?”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세기의 천재 닉시 님이 무해하고 평범한 건 전혀 모른다니!
‘낙하산 공중 착륙? 차라리 서커스단이 낫겠군.’
그녀의 허둥댐을 바라보던 벤자민이 하품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쇼를 해라, 쇼를.”
* * *
“그래서 쇼를 준비했어!”
닉시가 길버트의 책상을 쾅 내리치며 말했다.
길버트는 축제 때 얼려 먹을 과일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뭐, 무슨 쇼?”
“식물 교배 쇼.”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자두를 떨어트렸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환청이 들린다 생각하며 그는 더듬더듬 되물었다.
“교, 교 뭐……?”
“교배.”
안타깝게 환청이 아니었다.
대체 식물과 교배와 쇼라는 단어 조합이 웬 말인지.
그래, 식물과 교배의 만남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농부라면 익히 알아야 하는 지식이니까.
포도나 복숭아같이 과일나무에서 열리는 꽃의 암술과 수술을 이리저리 섞어서…… 중간 생략하고 짜잔. 열매를 맺게 하는 법.
근데 쇼라고?
쇼라는 건 보는 사람이 흥미진진한 행동을 하는 무언가를 말하는 거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도 그녀가 말하는 ‘쇼’가 정상적일 리 없지 않은가.
“설마 움직이는 식물들을 만든 건 아니겠지……? 막…… 미모사나 파리지옥들이 광란의 교…… 그러니까 그런…… 그, 생식 활동하는 걸 말하는 건 아니지?”
제발. 길버트가 신께 간절히 빌었다. 천지를 창조한 거 정말 좋은데요, 생물들이 그렇게까지 괴랄하게 움직이진 않을 수 있게 창조했길. 제발!
“아니? 식물들이 힘쓰는 거 봐서 뭐 해.”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길버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가 가장 잘하는 걸 생각해 봤는데.”
닉시는 본인이 잘한다 생각하는 것을 쭉 나열해 봤다.
그중 1순위가 파괴. 2순위가 파괴한 거 재조립하기. 3순위가 그렇게 만들어 낸 자신의 위대한 결과물 감상하기.
“마을 사람들이 야채 모종을 들고 오면 내가 다른 사람이 들고 온 다른 야채 모종이랑 교배 시켜 주는 거야. 토마토 모종을 가져왔는데, 뿌리에서 감자나 양파가 자라면 얼마나 재밌겠어!”
그렇게 생각해 낸 게, 품종개량이었다.
마을에서 나는 식물들은 하나같이 튼튼하고 질겼다.
바닷바람 부는 짠 토양에서도 살아남고 억센 바람에도 견디니까.
그 말인즉슨, 웬만하면 죽지 않는다는 것.
“뿌리가 감자인 토마토……?”
상식인 길버트는 닉시가 말하는 난잡한 식물 교배 쇼가 이해되지 않았다.
“일단 할머니들이 보고 기절하진 않는 거지?”
“응! 상식은 좀 파괴되시겠지만 아마도.”
“식물들이 막 움직이진 않고?”
“응! 아. 식물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겐 만들어 줄 수 있어.”
“……어떻게?”
“대마나, 양귀비로?”
“그건 참아 줘.”
그녀가 농담이라며 킥킥 웃었다.
아무튼 그녀는 ‘오베르 바스티유 바자회’에 ‘식물 교배 쇼!’로 상점을 내기로 했다.
* * *
닉시는 밤을 새워서 피곤한 눈을 하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유전자 공학이라고 신나서 그만 이것저것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성공적인 핵융합을 위한 조직 배양체 샘플들과, 식물이 결합 중에 죽지 말라고 튼튼해질 수 있도록 돕는 성장 촉진제.
이걸 어디다 실험해 볼까 하던 닉시의 시선에 해바라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당 근처에 아담한 높이로 자라있는 해바라기 수십 그루.
“무럭무럭 자라렴!”
그녀는 성장 촉진제 샘플을 물에 타 해바라기들에게 뿌려줬다.
실험이 성공이라면 이 해바라기들은 누가 발로 차도 부러지지 않는 강철 몸통을 얻게 될 것이다.
이제 축제 준비는 끝났다.
닉시는 어젠 없었던 가판대들과 천막이 길가에 늘여서 있는 것을 보았다.
조용한 곳에선 작은 변화도 크게 다가오는 법.
닉시는 곧 있을 축제 거리의 분위기를 상상하며 마음이 간질거림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화가가 안 보이네.”
항상 늦은 아침과 이른 점심 무렵에 들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화가가 그림 그리는 자리에는 마을 사람들이 꽂아 놓은 축제 팻말들이 놓여 있었다.
뻔하네. 혼자 있어야 하는 자리에 사람들이 보여서 꼬리 빠지게 도망갔구만.
이러다 축제 끝날 때까지 밖에 안 나오는 건 아니겠지?
“설마…….”
벤자민은 막 오늘의 작업을 마쳤다.
오늘 그는 밖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저 멀리 마을 사람들이 축제 용품들을 들고 뛰쳐나오는 것을 보고 후다닥 자릴 피했다.
축제랍시고 길거리에 이것저것 펼쳐 놓더니, 그가 그림을 그리는 영역까지 휘황찬란한 갈런드들로 점령당해 버렸다.
이제 진짜 조금만 있으면 의뢰를 마칠 수 있게 되는데.
그렇다고 저 떠들썩한 들판 가운데서 태연히 그림을 그리고 앉아 있을 용기는 없었다.
그는 잠시 쉬기 위해 창가로 향했다.
마을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는다.
하필이면 이번 축제는 마을 광장이 아니라 해변에서 열렸다.
그의 집과 바다가 가까운 편이었으니, 덕분에 축제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없어도 축제의 장 한가운데 있어야만 했다.
‘당분간 밖은 못 나가겠군.’
“야호! 화가 안녕?”
창문 너머로 노란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익숙하게 커튼을 쳤다.
“뭐야! 잠깐! 저 그림 내가 의뢰한 그림 맞지? 벌써 그림 다 그린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우당탕 소릴 내며 창문으로 기어들어 왔다.
그녀는 곧장 서늘한 구석에 말려두고 있던 그림 앞으로 달려갔다.
오베르의 밀밭이 그녀의 집을 감싸고 있는 것 같은 풍경. 분명 저가 의뢰한 그림이었다.
“아직.”
“이게 아직이라고? 내 눈엔 최종의 최종인데!”
“보색을 덜 넣었어.”
“보, 뭐?”
그의 그림은 어느덧 완성 직전까지 돌입했다.
스케치할 때만 해도 그림 그리는 속도가 달팽이 기어가는 속도여서 되려나 싶었는데, 조용하고 차분히 쌓여 간 물감들이 어느덧 캔버스를 빼곡 메우고 있었다.
그의 말론 보색인지 뭔지를 덜 넣었다지만 문외한인 닉시 눈엔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약속한 날이 머지않았군.”
“응?”
화가가 창틀에 기대며 툭 말했다.
“네가 나한테 약속한 거 말이야.”
[엠마오의 그리스도를 보여 줘.]‘아.’
짧은 감탄사를 시작으로 닉시의 머릿속엔 긴급 공습 사이렌이 울렸다.
‘악! 그러고 보니 그랬지! 화가를 로부스 박물관으로 데려간다고 약속했었어!’
[아는 사람이 그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 했지.] [응? 맞아.] [로부스 박물관이 고향에 있다고…….] [응.]하지만 그 그림은 가품이었고, 가품인 걸 모른 채 물고 빨고 자랑하고 애지중지해 온 대령은 진실을 알아 버린 뒤, 그 그림을 불태워 버렸다.
가품도 없고 진품은 어디 있는지 모르고!
한마디로 설상가상, 허위 계약, 곧 있으면, 우정 파괴!
닉시의 머릿속이 활활 불타오를 무렵, 눈앞의 화가는 여전히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사기 계약 피해자라는 것을.
“……화가, 너 혹시 그림 가르쳐 줄 생각 없어? 나한테.”
“……너 혹시 이상한 걸 그려 놓고 그걸 엠마오의 그리스도라 우길 생각은 아니지? 나한테.”
“미, 미쳤냐? 나 그 정도로 막돼먹은 인간은 아냐.”
그녀는 약 3초 동안 막돼먹었다.
그 방법은 철회. 빠르게 맘을 고쳐먹은 닉시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뇌했다.
‘……진짜 배우고 싶은 건가.’
저렇게 그림을 뚫어지게 볼 정도로?
그녀가 생각에 잠겨 허공을 노려보는 게, 그림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는 것으로 착각한 벤자민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씻기 위해 기름에 넣어 뒀던 붓을 꺼내왔다.
마른 헝겊으로 기름기를 말끔하게 짜낸 붓.
그리고 손바닥만 한 크기의 캔버스를 꺼냈다.
벤자민은 멍하니 그림을 보고 있던 그녀 앞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손 줘 봐.”
“어?”
“연필은 쥘 줄 알겠지?”
그럴 리 없겠지만 설마, 아주 설마 이웃이 붓도 쥐는 법을 모를까 화가는 제 손으로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붓을 가볍게 쥔 닉시의 작은 손 위로, 그의 크고 흉터 많은 손이 살풋 덮어 왔다.
멀리서 본다면 묘한 기류가 흐르는 남녀 사이의 묘한 긴장감 어린 스킨십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멀리서 봤을 때야 그렇지, 정작 닉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사기 계약인 거 들켰나? 그래서 신체 포기 각서 쓰라고?’
“일단 뭘 끄집어낼지 생각해.”
“어, 어디서 뭘?”
그녀의 당황한 물음에 오히려 의문스러운 건 화가였다.
그야 캔버스 앞에서 붓을 들었으면 제 속에서 그리고 싶은 것을 끄집어내면 되지 않은가.
“머릿속에서, 여기 토해 낼 걸 끄집어내라고.”
‘토해 내라니……! 역시 각서를 쓰라는 건가!’
“……일단 콩팥.”
콩팥은 두 개니까. 다른 신체보단 쉽게 포기할 수 있지.
그 말을 들은 벤자민은 질색했다.
‘뭐 그딴 걸 그린다는 거지?’
“……그럼 그걸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해 봐.”
“표현?”
“질감이나, 색이나. 물체 본연이 네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런 거.”
역시 예술가의 언어는 쉬운 게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그제야 그의 말을 해석해 냈다.
“아. 콩팥이 나한테 무슨 말을 하는지?”
콩팥 네놈은 이제 방 빼야 하니, 마지막 유감의 말을 쓰라고?
닉시는 벤자민이 건넨 붉은 물감을 손에 쥐었다. 살짝 쨍한 느낌의 갈색 물감이었다.
굳이 보고 싶지 않지만, 굳이. 굳이 콩팥을 그려 보고 싶다 하니…… 얼마 남지 않은 물감이지만 양보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걸 받은 닉시는 마치 최후통첩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크흑. 각서 하나 쓰는데 하필 또 살벌하게 붉은색일 건 또 뭐람.
닉시는 슬픈 눈물을 눌러 참으며, 차분히 붓을 놀렸다.
화가가 각서를 그림이라고 착각해 준 덕분에 그녀의 사기행각이 아직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아직까지 캔버스에 불어로 적힌 ‘미안합니다’란 문장이 어떻게 ‘콩팥’이란 건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꼭 이해할 수 없는 초현실주의 그림을 맞닥뜨린 고뇌에 찬 표정.
그렇게 그녀의 첫 작품은 어영부영 그녀의 윗주머니에 들어갔다.
닉시는 아직 제 사기가 들키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채곤 신나게 두 번째 캔버스를 채웠다. 이번엔 그림의 형태는 하고 있는 걸로.
화가는 그녀가 그린 두 번째 그림인 ‘안구’를 유심히 바라봤다.
“어때? 잘 그렸어?”
“…….”
적당히 흰 끼 섞인 회색 동그라미 가운데 붉은색의 동그라미.
현대 예술이라 우기면 그럭저럭 괜찮네, 라는 평을 받을 법했다.
“……동생이 그린 그림 같네.”
“동생이 그림을 어마어마하게 잘 그렸나 봐?”
“아니. 유치원생 수준이었지.”
“뭐?”
화가가 그것을 대충 창틀에 기대 세워 놨다. 나중에 물감 닦는 팔레트로 쓰거나, 나무에서 천을 뜯어내 창문을 닦는 데 써야겠다 생각하면서.
닉시가 다 써 버린 벽돌색 물감을 휙 던져 버렸다.
“그림을 열다섯 때부터 시작했다고 했던가? 누구한테 배운 거야?”
“배운 적 없어.”
그는 잠시 어릴 적을 떠올렸다.
처음엔 석탄이었다.
불 땔 때 쓰는 작은 조각들. 그걸 모아다가 곱게 부순 다음 작은 파이프에 꾹꾹 눌러 담고 굽는다. 그럼 긴 연필처럼 되는데, 그걸 신문지에다 끄적였던 게 그에게 있어서 처음 그린 그림이었다.
몸이 약했던 동생은 몸 상태가 괜찮을 때 빼곤, 매일 집 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저와 동생이 살고 있던 방은 창문이 하나도 없었기에 동생은 늘 밖을 그리워했다.
오늘 날씨는 어떤지, 계절은 어떤지. 거리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웃고 있는지.
그는 동생에게 밖을 보여 주기 위해 그림을 시작했다.
까맣고 누런 종이에 그린 그림을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테오. 오늘은 눈이 내렸어. 사람들이 하나같이 코가 빨개져서 거릴 돌아다녔지. 근데 어떤 멍청한 가게 주인이 가게 앞에 쌓인 눈을 치우겠다고 뜨거운 물을 뿌려댔어. 어떻게 됐긴. 한 시간도 안 돼서 가게 앞이 빙판길이 됐지. 여기. 사람들이 그 빙판길을 걸어갈 때마다 허우적거리는 모습. 꼭 바람 빠진 풍선 같지?]그렇게 하루 있었던 일을 말하면 동생은 그걸 제가 겪은 것처럼 희게 웃었다.
그랬다.
“처음부터 그림을 그려야겠다 생각하고 그리기 시작한 게 아니니까.”
“그으래?”
닉시는 화가가 그려 놓은 수많은 그림들을 바라봤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캔버스들. 그중 완성된 건 하나도 없었다.
하나라도 제대로 완성시켰다면 팔아도 될 것 같은데.
전쟁이 끝나고 이렇게 평화로운 시대가 돌입했지 않는가.
저 같은 사람들은 전시 상황일 땐 돈을 마구 쓸어 담지만, 예술은 늘 여유롭고 살 만할 때 부흥하곤 했다.
즐길 거리란 건 늘 있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것들이었으니.
“그럼 그림으로 하고 싶은 게 있었을 거 아냐. 뭐, 세상이 알아주는 거장이 된다거나. 박물관에 그림을 전시한다거나. 그런 건 없었어?”
“있었지.”
“뭔데?”
화가는 창문에 앉았다. 그리곤 턱을 괸 채 발끝을 까닥였다.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사고 싶었어. 고흐나 고갱 같은.”
“오…… 그런 사람들의 그림이라면 푼돈으론 안 될 텐데.”
“알아. 내 그림 판 돈으론 어림도 없겠지.”
“어……. 그런 뜻은 아니고.”
본의 아니게 화가에게 비수를 꽂은 셈이 돼 버렸다.
닉시는 뻘뻘 식은땀 흘리며 사과했다. 정작 그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완성된 그림을 사는 게 아니라 덜 완성된 그림을 사는 거야. 냅킨에 끄적인 낙서라든지. 선 하나만 그어놓고 까먹은 거라든지.”
그런 걸 뭐 하러 사지? 심오한 예술의 세계에 익숙잖은 닉시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리고 그림을 전부 지우는 거야.”
“어…… 그리고?”
“그 위에 새로 그리는 거야. 그 화가가 완성하지 못한 그림을.”
“오…… 그리고?”
“그 화가의 이름을 걸고 파는 거지.”
고흐(1% 함유)의 이름을 걸고 퍽이나 뻔뻔한 발언이었다.
“사기잖아.”
“과정이야 어쨌든 그 그림의 근본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니까.”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중간 과정이 너무 많이 뛰어 버려서 어디서부터 문제를 제기해야 할지 헷갈렸을 뿐이지.
“뭐, 좋아……. 그걸 팔게 되면 돈은 많이 벌겠네.”
예술가는 제 작품에 대해 자존심이 아주 강하다고 들었는데. 남의 작품을 가져와 덧칠해 놓고 남의 이름으로 판다는 파격적인 생각을 하다니.
생각보다 그림에 대해 애정 같은 게 없는 건가. 닉시가 생각했다.
“그럼 그렇게 열심히 벌어서 뭐 하려고 했는데, 도둑 양반? 술? 물감? 아니면 엠마오의 그리스도?”
“아니.”
벤자민은 제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흉터가 가득한 손이었다.
“약을 사고 싶었어.”
* * *
축제 하루 전.
사람들은 각기 집에서 들고 올 수 있는 가장 큰 컵에 맥주를 따라 마시며 밤새 바스티유의 첫날을 기념했다.
닉시와 그녀의 애정을 듬뿍 받는 비티도 그 틈에 끼어 있었다. 수프 그릇을 맥주잔으로 들고.
도시의 바스티유 축제는 근 한 달 내내 이뤄지지만 시골에서 축제를 한 달 내내 했다간 사람들의 살림도 거덜 나고, 농작물도 아마존 밀림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오베르의 여름 바자회는 축제 당일 아침부터 3일간 열렸다.
이 시기엔 마을부터 바다로 이어지는 길에 늦게까지 불을 켜 놓고 해변에서 맥주를 즐긴다.
평소에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길이 대낮처럼 밝았고 조용했던 밤이 떠들썩했다.
다음 날 아침.
밤새 맥주를 마시며 놀았음에도 시골 사람들은 꼭두새벽부터 본인들의 지정된 가판대에서 부지런히 좌판을 열었다.
이게 다 밭일로 다져진 체력들 덕이었다.
닉시도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세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서 축제를 준비했다.
마을 이장에게 빌린 손수레에, 샘플 모종 몇 개와 줄기세포 키트. 덤으로 영양제로 팔 성장촉진제를 몇 개 챙겼다.
“좋았어.”
닉시는 집을 나섰다. 마을은 벌써부터 들뜬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안녕, 닉시.”
“안녕하세요, 헬렌, 에드가 씨!”
반가운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해 주고, 가는 길에 이웃의 좌판은 어떤지 구경하고. 평소보다 흥이 오른 들판을 콧노래 흥얼거리며 걸어갔다.
“그래, 북쪽 숲 이웃님은 뭘 파시려나?”
“콜레트 씨! 식물이에요!”
“이런, 또 우리 마을에 엄청난 일이 일어나겠구만.”
콜레트가 껄껄 웃었다.
닉시는 길버트와 그레타가 만든 100% 수작업 축제 팸플릿을 확인했다.
바다가 싫다! 바다를 증오한다! 외치던 그녀 덕에 그녀의 좌판은 해변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들판의 길과 해변이 만나는 곳이자, 예전에 화가와 와인을 나눠 먹었던 장소.
화가의 집과 가까운 곳이었다.
그녀의 오늘 일정은 이러했다.
일단 라울네에 들려서 맥주와 슈크르트를 먹는다!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시큼 상큼한 양배추에 소시지, 훈제 햄, 베이컨, 감자를 넣고 허브를 버무려 만든 알자스 지방 전통 요리.
요리만 놓고 보면 평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꼭 그곳에 제일 첫 번째로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닉시네 농장에서 수확한 양배추를 사용해서 만들었다 했으니까!
농작물은 농부의 자존심인 법.
그 때문에 동네방네 라울의 좌판을 자랑하고 다녔으니, 아마 인기 만점일 것이다. 안 봐도 척이지.
그러니 라울의 좌판이 거덜 나기 전에 꼭 들려야 했다.
두 번째로는 비티의 좌판에서 나무 도마와 수저 세트를 사야 한다.
이날을 위해 닉시는 가지고 있던 모든 도마를 죄다 반 토막 냈다. 도마가 없어서 어쩔 수 없네, 꼭 사야겠다! 합리화하며.
심지어 수저 세트엔 비티의 트레이드마크인 햄스터 발바닥 무늬가 새겨져 있다.
비티가 이쑤시개만 한 송곳으로 눈이 빠지게 새겨 넣은 그야말로 정성의 결정체.
비티의 팬클럽 1호인 닉시가 안 살 수 없는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는 그레타네 양말 가게.
뽀송하게 빨아놓은 양들에게서 수확한 양털로 겨울 양말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더운 여름에 털양말이 웬 말이냐! 했지만, 겨울옷 없는 닉시에겐 몹시 반가운 소식이었다. 추위로부터 발가락만은 지킬 수 있게 됐으니. 다른 부위는 아직 몰라도!
그 외에도 헬렌의 모기 퇴치 살충제라든지, 에드가 씨의 수동 두더지 게임장이라든지, 샬롯 할머니의 브라우니라든지. 살 것은 아주 많았고, 들러야 할 곳도 아주 많았다.
‘좋았어. 오늘 목표는 오전 중에 이 식물들을 모조리 다 팔아 버리는 거야.’
닉시는 굳게 다짐했다.
뎅―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닉시는 아직 하나도 팔지 못한 제 식물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의 주위로 결계라도 쳐져 있는 건지 뭔지, 사람들은 이쪽으로 구경 올까? 하는 듯하다가도 주춤주춤 가 버렸다.
닉시는 공연히 제 뒤쪽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화가의 집을 노려봤다.
이게 다 화가 때문이었다.
그래. 장사에 입지라는 건 아주아주 중요하지. 중요한데 저는 똥 같은 입지를 골랐으니 손님이 없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뭘 팔기는커녕 축제도 못 즐기겠어.”
그녀는 결국 판매대를 박차고 나왔다.
어떡하면 저걸 다 팔 수 있을까. 그녀는 파리의 팔이피플과 관련된 기억을 모조리 긁어모았다.
껌 장사를 하던 사람과 신문을 팔던 아이. 구두닦이 아저씨와 성냥팔이 소녀까지.
뒷골목 장사 중에선 뭐니뭐니 해도 약이 제일 잘 팔렸는데. 아니면 사기.
이윽고 그녀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랜덤 박스를 만드는 거야.
닉시는 가지고 있던 모든 모종을 전부 랜덤으로 접목시켰다.
잎은 완두콩의 모양이지만 껍질을 까 보면 블루베리가 튀어나오는 신데렐라.
머리는 토마토지만 뿌리는 고구마인 스노우.
양배추의 모습인데 뿌리 근처에서 블루베리 넝쿨이 자라는 오로라.
블루베리 라즈베리 스트로베리가 열리는 벨.
물론 꽝도 있었다.
그냥 감자 줄기랑 감자인 자스민이나, 우람해 보이지만 그저 잡초인 팅커벨이 그런 유형이었다.
그렇게 키메라 식물 숍 오픈 준비를 마쳤다.
마을 사람들 몇몇이 닉시의 가게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수상한 이웃이 팔라는 물건은 안 팔고, 돋보기를 끼고 식물을 죽였네 살렸네 하는 광경이 꽤 이목을 끌었기 때문이다.
“닉시!”
그중 머리를 양 갈래로 예쁘게 묶은 비티가 그녀의 좌판으로 왔다.
“비티!”
“여긴 뭘 파는 거예요? 길버트가 여기 오면 식물들의 광란의 파티를 볼 수 있을 거라던데!”
“맞아. 여기 이 공주들은 이미 광란의 파티를 즐기고 살아남은 위대한 전사들이야.”
닉시는 흡사 아마존의 전투 여왕을 소개하는 진지한 얼굴로 모종들을 보여 줬다.
“이게 뭔데요?”
“비티.”
닉시는 목소리를 깊게 내리깔곤 비티에게 랜덤 상자를 보여 주었다.
상자 안엔 이름표 테이프를 붙이고 있는 토마토들이 있었다.
“콩 심은 곳엔 뭐가 나게.”
“네? 그야 당연히 콩이겠죠?”
“아니. 신데렐라는 블루베리를 만들어.”
닉시가 들고 있는 건 콩 심고 블루베리를 수확하게 접목한 신데렐라.
그녀는 성장촉진제라는 도핑 약물을 주입 받고 튼튼한 완두콩 깍지를 팔에 달고 있었다.
“말도 안 돼요……! 이건 상식의 붕괴라고요……!”
반응 좋은 비티가 엄지손가락만 한 튼실한 완두콩 자태에 어머! 하고 놀라며 입을 막았다.
닉시와 비티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길 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아무리 신데렐라라도 콩 심은 데 블루베리를 나게 하진 않, 흐아아아! 이게 뭐예요, 닉시!”
비티는 완두콩을 열었다. 그곳엔 완두콩 대신 정말 엄지손톱만 한 블루베리가 들어 있었다.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비티가 완두콩 안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블루베리를 떨어트리지 않고자 허둥지둥 저글링 할 때, 닉시는 마술쇼를 끝낸 마술사처럼 주위에 꾸벅꾸벅 인사했다.
“그럼 비티.”
“네, 네!”
“토마토 고구마 카프레제를 만들어 먹으려면 뭐가 필요하게?”
“그, 그야…… 토마토랑 고구마가 필요하겠죠?”
“아니. 스노우만 있으면 돼.”
“네? 스노우 공주는 사과 아니……! 이! 이, 이 공주님에게 달려 있는 길쭉한 건 뭐죠?”
닉시는 월척이라도 낚은 양 머리는 토마토, 뿌리는 고구마 조합의 스노우를 치켜들었다.
비티가 뿌리에 매달린 튼실하고 길쭉한 고구마들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의 쇼 아닌 쇼에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이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설마 이 프린세스는 감자와 고구마의 조합인가요?”
“이 벨 공주는 무려 트리플 베리……. 근데 감자 고구마 조합 괜찮다! 참고할게!”
“그게 뭐예요?”
“식물 모종이에요?”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그녀의 좌판으로 몰려들었다. 성공의 첫 단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성공했다.
“네! 이 박스에서 공주님 이름이 적힌 토마토를 뽑아 보세요! 가지와 고추가 함께 자라는 모종을 경품으로 드려요!”
사람들은 미지의 존재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런 확률성 뽑기 게임도 좋아하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는 게 합쳐진다면?
“저, 저 하나 뽑아 볼래요!”
“나도 하나 뽑아 볼래. 얼마예요, 닉시?”
환장하는 거다.
* * *
그녀의 키메라 프린세스들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 팔리고 말았다.
거리의 마을 사람들은 각기 식물 모종과 서비스로 받은 식물 촉진제 하나를 들고 축제를 즐기게 되었다.
아직 키메라 프린세스를 구매하지 못한 마을 사람들은 제각기 밭에서 멀쩡히 숨 쉬고 있던 식물들을 캐와 교배 파티를 열어 달라며 아우성이었다.
“야호! 이제 난 부자다!”
그녀의 랜덤 박스 안엔 축제 토큰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닉시는 배부른 하마처럼 토큰들을 바라보았다.
얼떨결에 닉시네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비티가 방긋 미소 지었다.
“닉시, 아직 바자회 구경 못 해 봤다 했죠? 같이 가 보실래요?”
“데이트라면 언제든지!”
벼락부자 닉시는 그녀의 제안을 아주 흔쾌히 수락했다.
아직 바다 코앞까지 가긴 맘의 준비가 안 된 터라 닉시는 자신의 좌판이 있던 주변부터 차분히 둘러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더위와 입가심 둘 다 해소해 주는 시원한 옥수수 아이스크림.
다음으론 잔디 냄새가 나는 향초를 사고. 대왕조개껍질을 갈아 만든 머리핀으로 머리를 정돈했다.
닉시와 비티는 지친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같이 가판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축제는 입 안에서 터지는 팝핀 슈가처럼 통통 튀고 달콤했다. 매일 매일이 축제였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입 안에 들어간 텁텁한 코코넛 쿠키와, 비티의 요상한 상식을 이용한 재미없는 개그. 더워 죽을 것 같은 뜨거운 한여름 열기조차 즐거웠다.
‘왠지 평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닉시는 배시시 미소 지었다.
헬렌네 가게에서 내년까지 쓸 수 있는 양의 모기 퇴치 살충제를 사고 나니 어느새 해가 저무는 시간이었다.
닉시는 그렇게 먹고 즐기고 사댔는데도 아직까지 박스 가득한 토큰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걸로 오늘 저녁으론 아주 근사한 축제 음식을 즐기고, 비티의 좌판에서 식기 세트를 산다! 그리고 양말도 세 켤레쯤 사고 나머지는 길버트의 환전소에 가서 몽땅 유로로 바꿔 오면…….
“그래도 한 100유로쯤 남잖아!?”
“뭐야 그렇게 많이 벌었어?”
“길!”
“축제는 잘 즐기고 있나요, 레이디들?”
“덕분에요 이장님!”
때마침 타이밍 좋게 길버트가 나타났다.
그는 파인애플이 잔뜩 그려진 특이한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목엔 호루라기를 걸고 있었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 있었는지 콧잔등이 붉게 익어 있었다.
닉시가 먹고 있던 오이를 반으로 쪼개 길버트의 코에 붙여 주었다.
“소문은 들었어 닉시. 가게가 엄청 잘 나갔다며?”
“엄청? 매에에우.”
“역시…… 사람들은 원초적인 것에 끌리는 건가…….”
“뭐라구?”
“아냐. 이 오이 맛있어 보인다고.”
길버트는 오이를 조금 잘라 작은 조각은 제 코에 붙여놓은 뒤 나머지는 입에 넣었다.
“닉시 비티, 어디 가는 길이에요?”
“우린 이제 저녁 먹으려고요. 라울네 슈크르트가 정말 맛있다더라고요. 오랜만에 정겨운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됐어요!”
“너도 같이 먹을래?”
“좋지.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인데. 거기 라임 모히또 맛있어.”
마을 이장은 자연스럽게 농부와 목수 일행에 합류했다.
길버트는 하루 종일 잃어버린 물건 찾기, 미아 보호, 바다에 빠진 사람 구하기를 했다고 한다.
지금 입고 있는 하와이안 셔츠도 원래는 평소 자주 입던 담갈색 셔츠였다.
마을의 유명한 주정뱅이인 매트 할아버지가 수중발레를 한다고 바다에 뛰어 들어가는 바람에 바다에 한 세 번쯤 들어갔다 오니 이런 걸로 변해 있었단 것이다.
“그랬군요. 저는 파인애플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요.”
“사실, 먹으면 혀가 따끔거려서 안 좋아해요. 특히 구운 파인애플은 정말…… 으, 별로고요.”
닉시는 길가 구석의 조용한 가판대를 바라봤다.
마을에 사는 사람은 아닌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축제에 외부 사람들도 많이 와서 좌판을 연다고 하니 그런 사람들 중 하나로 보였다.
“혀가 따끔한 걸 싫어하시나 보군요? 그럼 고슴도치는요?”
“하하. 고슴도치를 핥진 않죠, 비티.”
낯선 외부인의 조용한 좌판대. 그중 기묘한 것이 닉시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곡선의 유리병에 담긴 연핑크색 액체. 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EAT ME’ 병처럼 생긴 것.
“정말요?! 사실 제가 예전에 고슴도치를 기른 적이 있었는데요. 참, 이름은 티티였어요. 성질은 아주 고약했지만 가끔 가시를 눕히고 절 보고 있으면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요!”
“설마 비티…… 고슴도치를 핥으셨나요?”
그들이 외부인의 좌판을 스쳐 지나갔다.
좌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랑의 묘약?’
“설마요! 그저 키스를 해 준 것뿐이었어요. 덕분에 입술에 구멍이 여러 개 뚫렸…… 어머 닉시 뭘 보고 있나요?”
닉시는 좌판의 분홍 물약을 빤히 바라봤다. 길버트가 백스텝으로 걸어와 흘긋 그녀의 어깨너머를 바라봤다.
‘음, 사랑의 묘약이라.’
안 팔려도 너무 안 팔렸는지, 메뉴판 옆에 ‘유기농’, ‘독소 배출’, ‘주름 개선’ 따위의 아무 데나 갖다 붙이는 수식어들이 적혀 있었다.
‘사랑의 묘약이랑 독소 배출이 무슨 상관이지.’
사기를 칠 거면 차라리 뻔뻔하게 ‘그리스산 큐피트 57% 첨가’ 이런 걸 적어놓지. 길버트는 심드렁히 뺨을 긁적였다.
저런 어쭙잖은 콘셉트와 사기론 손님 하나 못 구할 게 뻔했다. 어지간히 사랑에 미친 바보 같은 손님 아니면.
아. 설마.
길버트는 황급히 닉시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왜?”
“그, 닉시 이거…… 살 거 아니지?”
‘누가 봐도 사기인데?’
길버트가 좌판에 있는 연분홍빛 물약을 들어 보였다.
마을 이장의 부정적인 평가에 좌판에 침울하게 앉아 있던 외부인의 눈가엔 눈물이 글썽거렸다.
“응 아냐. 그거.”
“휴 다행이다. 난 또…….”
“그거 하나만 살 거 아니라고. 저기요, 그거 다 주세요.”
어머. 뒤에서 비티의 감탄사가 울려 퍼졌다.
확실히 있었다. 여기, 사랑에 미친 바보 한 명이.
▶ 오늘의 수확
슈크르트 한 접시, 오크나무 도마 세트, 털양말, 봄꽃 책갈피, 수제 만년필.
▶ 총평
길버트에게 자기 이름 쓰는 법을 알려 줬다! 얜 글자 배운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왜 나보다 글씨가 예쁘지?
* * *
축제 둘째 날.
벤자민은 평소랑 달리 새벽에 일어나 그림을 마쳤다.
축제의 여파로 평소 그가 활동하는 시간인 오후쯤엔 들판이 사람들로 바글바글해지기 때문이었다.
이른 새벽. 간밤에 와글거렸던 들판에 사람들이 빠지고, 텅 빈 판매대와 바람 빠진 축제 풍선들이 놓여 있었다.
이곳에 사람들이 가득해지기까진 두 시간 정도 시간이 있다. 그의 목표는 그 전에 집으로 돌아가 밖으론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벤자민은 들판의 이슬로 젖은 바짓단을 탈탈 털고 캔버스를 정돈했다.
이제 곧 그림이 완성될 것이다.
시끄러운 이웃이 맨날 노랠 부르는 지겨운 그림 의뢰가 끝나는 것이다.
벤자민은 고갤 들어 이웃의 집이 있을 북쪽을 바라봤다.
오베르의 들판과 들판 너머 노란 머리 이웃이 사는 집.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짙은 안개가 깔려 지붕만 겨우 보였다.
‘……축제 끝날 때쯤 주면 되겠군.’
그는 뻣뻣해진 손을 관성적으로 주무르며 도구들을 정리했다.
그렇게 자리까지 정리한 뒤, 부지런한 오베르 사람들이 뽈뽈 돌아다니기 시작한 시간이 되었다.
햇살이 들판 위에 깔리자, 어느새 안개는 걷혀 있었다.
벤자민은 멍하니 시끄러운 이웃의 집을 바라보다 우뚝 몸을 굳혔다.
그녀의 집 앞은 노란 해바라기 물결로 가득했다.
들판의 끄트머리. 집 앞 울타리를 넘어 길가 가득 넘실대는 노란 물결.
‘윽……!’
그는 갑자기 욱신거리고 아파 오는 머리를 짚었다.
손끝이 벌벌 떨려오고 아물어 있는 손의 찢긴 상처들이 욱신거렸다.
갑자기 저게 왜.
해바라기. 그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꽃.
해바라기를 좋아하냐, 좋아하지 않냐. 굳이 두 가지 선택지를 줬을 때, 그는 ‘좋아하지 않는다.’ 쪽이었다.
물론 과거엔 아니었다.
파란 여름 하늘과 대비되는 노란 색채를 좋아해서, 해바라기만 그리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지금의 희뿌연 그의 그림 색채로는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 머나먼 옛 무렵.
마지막으로 해바라기를 떠올렸던 건…….
[꺼져.]그래. 시끄러운 이웃과 처음 마주쳤을 때였다.
그 꽃처럼 노란 머리를 가지고 있는, 온통 무채색인 세상에서 본인만 다르게 툭 튀어나온 듯했던 여자.
다음으로는 라울의 바에서 만났지. 그 만남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최악에 가까웠다.
그 당시 그는 술을 꽤 많이 마셨던 터라 머리가 어지러웠고, 그녀는 해바라기를 들고 있었으니까.
[선물이에요.]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대화를 끊어내려 했지만, 여자는 태연히 또 말을 붙여 왔다.
[해바라기 싫어해요?]그는 그때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봤다.
여자의 눈동자는 선명한 선홍색이었다.
노란색과 붉은빛의 강렬한 색채. 괜히 구역질 나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해바라기 싫어하는 사람은 처음이네요. 알러지가 있으시면 그럴 수도 있지만.]그녀에게선 희미한 풀냄새가 났다. 해바라긴 향이 없을 텐데. 아니, 이건 이 여자의 냄새인가.
눈앞에서 여자의 노란색이 흔들렸다. 그녀가 들고 있는 고개 살짝 꺾인 해바라기도.
[그럼 날 싫어하겠다. 난 해바라기를 닮았으니까.]해바라기를 싫어한다. 그것을 미워한다.
왜냐면 제 손이 으스러졌던 그곳이. 하필 저가 사랑해 마지않던 해바라기 밭이었으니까.
그 꽃을 닮은 노란 물결 속에 있으면, 그는 저절로 옛날 그때로 돌아갔다.
25살. 해바라기 밭 앞. 총을 들고 서 있는 자신.
* * *
해바라기란 꽃은 꽃이란 범주 안에 있으면서도 다소 투박한 꽃이었다.
향기를 품기보단 손톱만 한 씨를 품고, 예쁘다라는 말보다 우악스럽다는 말이 어울리는 꽃.
하지만 그래서인지 꽤 여럿에게 사랑받는 꽃이다.
꾸밈이 없어 순수해 보이고, 해를 바라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은 뭉툭하기만 한 꽃을 제법 가련하게 보이게 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꽃을 사랑했듯 저도 좋아했다.
사랑, 이라곤 할 수 없는. 평범한 호감.
이유는 간단했다.
동생이 시든 해바라기에서 씨앗을 뽑아먹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저는 우울할 때 늘 애써 밝은 것을 그리려 애썼는데, 그 밝은 것이 주로 해바라기였을 뿐.
모든 것과 대비되는 크고 진한. 태양을 닮은 강렬한 색채.
늘상 스모그 낀 도시의 새벽같이 우중충한 색 말고 푸른 하늘 아래 있는 강렬한 노란색을 제 캔버스에 담으면, 제 인생도 그렇게 될 것 같아서.
벤자민은 제 앞에 펼쳐진 노란 물결을 멍하니 바라봤다.
한 손에 들고 있는 무거운 총. 땅바닥에 설치하기 위해 메고 있는 묵직한 가방. 그 속에 담긴 지뢰.
그가 있는 곳은 아직 접경지대가 되지 않은 민간인 마을 변두리였다.
얼마 전 있었던 전투로 독일군의 전선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그가 속해 있는 소대는 후퇴하는 척, 이 해바라기 밭에 지뢰를 설치할 예정이었다.
군대가 후퇴하는 것을 본 프랑스 연합군이나 민간인들은 귀한 식량자원인 이 넓은 해바라기 밭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뢰가 있는 것을 모른다면 밟고 터져 나갈 것이며, 알게 된다면 지뢰 해체를 위해 지지부진 시간을 끌게 되겠지.
그가 있는 소대의 목표는 어떻게든 저들을 추격해 오는 연합군의 속도를 늦추는 것.
“빨리 시작해!”
소대장의 외침에 병사들은 부지런히 지뢰를 심어댔다.
벤자민은 여전히 그저 노란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 이깟 투박한 꽃이 뭐라고 망설여지는 건지.
‘대체 왜.’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꽃 한 송이, 몇십 그루, 몇 제곱미터의 수백 개의 꽃일 뿐인데. 저는 왜 망설이고 있는 걸까.
“이 개자식! 뭘 정신 놓고 있는 거야! 빨리 안 움직여?”
―퍽!
소대장이 그의 옆머리를 후려쳤다.
그는 비틀거리며 해바라기 밭으로 들어갔다. 한걸음, 한걸음.
이윽고 그가 그 노란 물결의 한 가운데 섰을 때, 바람이 불었고, 제 위에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음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하늘에서 굉음이 들렸다. 머리 위로 수십 대의 전투기가 지나가고 있던 것이다.
“공습이다!”
누군가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보다 더 먼저.
허공, 푸른 하늘에 더러운 먼지처럼 흩뿌려진 수많은 포탄들이 보였다.
퍽! 누군가가 벤자민을 밀치고 도망쳤다. 그제야 그는 악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도망이라는 것이 무색하고 무력하게도, 포탄은 빠르게 수직 낙하하여 사방에 떨어졌다.
주위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노란 해바라기 밭은 삽시간에 폭음을 내며 폭발하는 포탄들로 짓이겨졌다.
저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걸까.
벤자민은 메고 있던 지뢰 가방을 벗어 던지고 마구 도망쳤다.
노란 물결을 마구 헤치며 달렸다. 사방이 전부 아름다운 아비규환이었다. 터져나가는 폭탄들, 노란 꽃들, 같은 소대원들.
“아……!”
그때, 달려가던 벤자민의 옷깃이 해바라기의 투박스러운 이파리에 걸렸다.
그는 이파리를 팍 잡아 뜯었다.
워낙 급박한 움직임이었던 탓에 해바라기의 목이 확 꺾였고, 그의 안주머니에 있던 작은 수첩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파라락.
수첩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연필로 끄적인 수십 개의 스케치 사이. 누군가의 사진이 떨어졌다.
“안 돼! 테오……!”
그가 수첩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그가 있는 곳에 설치해 놨던 지뢰가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무더기로 튀기는 흙과 뜨거운 열기. 그는 열기에 훅 떠밀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저는 무엇을 지키고 있는 걸까.
“흐…… 으아아악……!”
그는 갈기갈기 찢겨버린 손을 감싸 쥐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불에 지져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날아오는 파편에 긁히고 박히고.
그는 피투성이가 된 오른손을 꽉 붙잡았다.
“흐……으…….”
저는, 나는. 무엇을. 지키고 있는 게…….
겨우겨우 고갤 들어 사진이 있던 곳을 바라봤다.
큰 구덩이가 생긴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꽃도, 수첩도, 하나뿐인 동생의 사진도.
아무것도 없었다.
“화가, 집에 있어?”
낭랑한 목소리가 화가의 서늘한 집을 울렸다.
닉시는 오늘따라 더더욱 가라앉아 있는 그의 침울한 집을 빙 둘러보았다.
밖은 축제인데 여긴 늘 장례식이다.
“화가아?”
그녀는 일부러 발소리 내며 그의 집을 쿵쾅거렸다.
화가는 거실 한가운데 담요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집에 유일한 창문이 나 있는 곳이건만 커튼을 쳐놓고 있어서 컴컴하기 짝에 없었다.
닉시는 인상을 가늘게 쓰곤 불을 켰다.
“혼자 궁상맞게 뭐 하는 거야?”
“…….”
“그보다 화가. 오늘 나랑 축제 안 가 볼래? 되게 재밌는 거 많아! 너도 가 보면 분명…….”
“해바라기.”
그가 그녀의 말을 잘라먹었다.
“그건 뭐야.”
“어? 아, 아! 우리 집 앞에 심어놓은 해바라기?”
닉시는 단 사흘 만에 그렇게 쑥쑥 자라 버린 해바라기를 떠올리곤 크게 웃었다.
성장 촉진제를 시험해보려고 했던 건데 그렇게까지 잘 자랄 줄은.
본인도 아침에 일어나서 제 밭이 노란 물결이 된 것을 보고 제 천재적인 능력을 뿌듯해했다.
“예쁘지? 사실은 말이야. 왜인진 까먹었는데 해바라기를 꼭 심고 싶었어. 그래서 우리 집 마당이랑 내가 가진 밭의 3분의 1 정도를 썼지.”
“…….”
“근데 놀라운 게 뭔지 알아? 저게 아직 덜 자랐다는 거야! 좀 있으면…… 아마 일주일 정도? 그 정도 지나면 들판 너머가 노란 해바라기로 가득할 걸. 오베르가 해바라기로 유명해질 날도 이제 멀지 않…….”
“…….”
닉시는 화가의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을 바라보곤 말꼬리를 흐렸다.
아 참. 화가는 해바라기를 싫어했지.
그녀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언젠가 꽃이 피었을 때 화가가 이렇게 얼굴을 구길 것은 예상했다. 싫어한다 했으니까.
본인도 갑자기 제집을 바다 앞으로 갖다 놨으면 그와 똑같은 표정을 지었을 터였다.
닉시는 불현듯 저가 왜 밭에 해바라기를 심으려 했었던 건지를 생각했다.
‘표정이 꼭 그때 같네.’
그와 두 번째 만났을 때.
라울의 바에서, 자신에게 뭘 투영하고 있는 건지 싫어한단 티가 팍팍 났던 그때. 그 얼굴.
이렇게 싫어할 거라는 걸 알았는데, 왜 심으려 했던 거더라.
‘아.’
그녀는 그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화가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이유를 떠올렸다.
[그럼 날 싫어하겠다. 난…….]닮았으니까.
“…….”
“네가 싫어해서 심었어.”
“…….”
“네가 해바라기를 싫어하는 것 같길래, 그래서 심었어.”
“그게 무슨…….”
“네가 해바라기를 싫어하는 모습이 너무 꼴불견이라.”
“뭐?”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고갤 들었다.
“꼴불견이라 그랬다고.”
그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닉시는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누가 봐도 ‘나 사연 있어요!’ 하는 꼴이 너무 웃기잖아. 봐 봐. 풋내나는 애송이처럼. ‘뭐랑 사연이 있냐고요? 탱크요? 미사일이랑요? 아뇨 그냥…… 그냥 해바라기랑인데요!’ 하하, 얼마나 웃겨? 언제까지고 과거에만 빌빌거리고 있는 거, 너무 꼴사납지 않아?”
닉시는 시답잖은 이야길 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심었어.”
그는 가만히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닉시의 멱살을 잡았다.
“……넌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걸 증오하는지 알기나 해?”
오른손으로 붙잡아선,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모양새였다.
“알아.”
“안다고?”
그녀는 그 손을 흘긋 바라보곤 픽 웃었다.
“그래. 알고 있다고. 네가 무슨 마음으로 증오하는 건지.”
“아니. 넌 몰라.”
“왜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넌 왜 안다고 생각하는데.”
닉시는 툭 그의 손을 쳐냈다. 그의 손은 힘 하나 싣지 않은 동작에도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닮았으니까.”
그는 하, 하는 짧은 비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닮긴 했지. 너랑 저 빌어먹을 꽃.”
생긴 건 물론이고 늘 제 심기를 거스른다는 점에서.
“아니.”
이번엔 그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의 몸이 가볍게 뒤로 밀렸다.
이윽고 그의 등이 벽에 닿았다.
“너랑이야. 너랑 내가 닮았으니까.”
“…….”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빌빌거리는 꼴이 닮았다고.”
해바라기를 보던 벤자민의 그 모습. 그건 닉시도 아주 익숙히 봐서 알고 있는 모습이다.
저가 바다를 보던 모습. 그 앞에서 꼴사납게 구질거리는 모습과 똑같았으니까.
그녀는 방 안을 어두컴컴하게 가리고 있던 커튼을 확 젖혔다.
사방에 환한 빛이 가득 들이쳤다.
“틀려?”
벤자민은 눈으로 들어차는 빛에 눈을 찌푸렸다.
그는 체념과 같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벽에 기댔다. 사선으로 기울어진 그의 가라앉은 시선 속, 그녀의 머리칼이 빛에 반사돼 눈이 시렸다.
“……그래서. 지금은 나보고 뭐 어쩌라고. 그 약해빠진 정신머리 꼴사나우니 저걸 보면서 매일 구역질이나 해라?”
꼴 보기 싫으니 엿 먹어 보라는 마음은 이해했다.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본인도 본인의 이런 모습이 지겹게 싫었으니까.
근데 그것과 별개로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이 닥쳐도 금방 훌훌 털고 익숙해질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직 저는 그 기억을 없던 것처럼 할 수 없었다.
“익숙해지려고 노력이나 해 보라고? 아님 식물 테라피나 해라?”
“아니.”
“그럼 대체 뭐. 왜.”
“싫어. 말 안 해. 너 지금 내가 무슨 말 하든 다 안 들어 줄 거잖아. 변명이라고 생각할 거면서.”
“……잘 알고 있군.”
화가는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
“잠깐만! 그렇다고 진짜 아무 말도 안 듣…….”
“지금 당장, 나가.”
나가라고 얌전히 나가 줄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현 상황의 이성적 관점을 토로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싸우길 바란 건 아니었다고? 말 같잖은 소리 하지 마. 그럴 거면 차라리 입 다물고 있어. 그게 더 도움 될 테니까.]일순간 언젠가 들었던 말이 그녀의 목구멍을 턱 막았다.
누가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자신은 이해하지 못하는 이런 익숙한 상황. 익숙한 분위기. 익숙한 결말.
짜증나.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알겠어.”
그렇게 풀린 거 하나 없이 그녀는 화가의 집 밖으로 쫓겨났다.
왜 이렇게 됐지. 그녀는 머리를 벅벅 흩트려 놓았다.
늘 뭔가 타인과 제법 괜찮은 관계가 됐다 싶으면 이렇게 금세 박살이 났다.
백번 양보해서. 아니, 백 번 다 제 잘못으로 시작하니, 백 번 잘못해서 문제가 일어난다고 쳐도. 남들은 주먹으로 치고받고 싸우든, 허심탄회하게 터놓고 이야기하든, 어쨌든 다음날 가 보면 다시 사이가 좋아져 있던데. 왜 저만 이렇게 최악으로 끝나는 건지.
‘그건…….’
자신은 타인의 감정 같은 걸 이해하지 못하니까.
그녀는 고갤 들었다.
저 멀리 이 조용한 집과는 달리 떠들썩한 해변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모여서 하하 호호 떠드는 바다.
닉시는 손을 툭 떨궜다.
“꼴사납네, 진짜.”
하늘만큼이나 새파란 바다. 코끝을 간질이는 짠 내음. 지직거리는 이명을 닮은 파도소리.
아직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화가한테만 뭐라 할 게 아닌 주제에.”
그녀는 꼼짝하지 않는 자신의 발을 보며 중얼거렸다.
유령을 본 어린아이같이, 땅에 깊게 뿌리박혀 움직이지 않는 발.
그녀는 비탈진 언덕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갔다. 그 아래로는 흰 모래사장과 새파란 아콰마린 빛 물결이 일렁였다.
“어쩌지. 이제 화가가 나 싫어할 텐데. 화해할 수 있을까?”
굳이 해야 하나? 본능적으로 머릿속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날 신경 쓰이게 하고, 어차피 오해 같은 건 안 풀리고 더 안 좋아지기만 할 텐데.
그럼 또 닉시는 최대한 마음속의 천사를 일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아냐. 화가가 얼마나 놀랐겠어. 나도 아직 바다를 못 보는데. 비슷한 마음이었을 거야. 게다가 아직 그림을 못 받았고, 또…… 또…… 그림을 아직 못 받았잖아! 이런 제기랄!
닉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화해한다. 지구가 반쪽이 나도.
닉시는 언덕 아래로 찰방이는 바다를 바라봤다.
“…….”
저는 바다가 무서웠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물살 아래, 그녀가 버린 오랜 동료들이 쌓여 있을까 봐.
바다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들이 제 몸을 붙잡고 안 놔줄 것 같아서. 왜 버린 거냐고 저를 원망하고 있을까 봐.
“해야지. 그래 해야지, 화해……할 수 있으려나.”
화해하려면 어떡해야 하지.
‘비슷한 마음이었을 거야.’
닉시는 어지럽게 울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뭔가를 떠올린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길버트는 열세 번째 미아를 찾아주는 길에 언덕 너머 길게 서 있는 줄을 목격했다.
닉시네 좌판의 식물들을 사기 위해 길게 기다리고 있는 줄이었다.
좌판엔 뽑기 상자와 그녀의 식물 프린세스들이 놓여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가게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 어디 갔나?’
그가 스물한 번째 미아를 찾아 준 뒤에도 줄은 줄지 않고 그대로였다.
‘오늘은 가게를 안 여는 건가?’
근처에 있으면 반경 400m는 떠들썩하게 만드는 그녀였다.
근데 저가 아까부터 마을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는데도 그 떠들썩함을 티끌만큼도 느낄 수 없었다.
가게를 열지 않는 것치곤 그녀가 준비한 프린세스들은 주인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듯 가판대에 당당히 놓여 있는 상황이었고.
“이봐 길버트! 이 가게 문 안 여는 거야?”
기다리던 손님 중 하나가 마을 이장에게 아는 체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이상하군. 이 시간에 문을 열 거라 했는데. 무슨 일 있는 건가?”
“음…….”
하기야 그녀는 이렇게 오래 조용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제가 한번 찾아볼게요.”
결국 길버트는 닉시라는 스물두 번째 미아를 찾기 시작했다.
오베르의 들판 2권
총은 로맨스판타지 소설
전자책 발행 : 2023년 7월 18일
지은이 : 총은
발행인 : 고영토
발행처 : 콘텐츠랩블루-세레니티
투 고 : [email protected]
정 가 : 3,000원
ISBN : 979-11-6968-638-9 05810
Ⓒ 총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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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공금 타사X 요게X 개인소장○ –
– PL공금 타사X 요게X 개인소장○ –
오베르의 들판
3권
총은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