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6
Chapter 4. 늦더위. 해변, 유화, 해바라기 (2)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벤자민은 약 하나를 입에 털어 넣었다.
종일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서 창밖으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마저 두통이 일 정도였다.
[꼴사나워서.]그렇다고 억지로 잠을 청하자니 자꾸만 그렇게 말하던 그녀의 태연한 얼굴이 떠올랐다.
“……누가 그걸 모를까 봐.”
―똑똑.
때마침 그의 집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벤자민?”
마을 이장 길버트였다.
“……뭐지.”
그는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쉬고 계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근데 혹시 닉시가 여기 있나요?”
그 여자? 손끝이 저릿한 느낌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래요? 이상하다. 어딜 간 거지.”
“……어딜 갔다고?”
“아. 닉시가 통 안 보여서요. 아까 아침엔 봤었는데 이 시간이 되도록 가게를 비워 두길래, 무슨 급한 일 생겼나 싶어서 찾고 있었어요.”
아까 그렇게 최악으로 헤어진 이후 본 적 없다.
하지만 그 여자면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며, 하던 걸 다 팽개치고 어디 구석진 곳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을 사람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갤 돌렸다.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녀석이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그렇게 기다리던 서커스도 안 보고 사라진 게 좀 이상해서요. 곧 시작할 텐데. 혹시 알고 있는 거 있으세요?”
“몰라. 알아도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고.”
길버트가 들어가려는 그를 붙잡아 세웠다.
“네. 그래도 혹시 닉시를 보게 되면 전해 줄래요?”
“…….”
“불꽃놀이를 보려면 꼭 자정 전엔 해변에 와야 한다구요!”
벤자민은 문을 닫고 들어왔다.
안 그래도 서커스인지 뭐 때문에 더 요란이었는데 불꽃놀이까지 한다라. 오늘은 자정 전까지 잠들긴 글렀다.
그는 결국 바닥에 깔아 뒀던 담요를 치워 버렸다.
커튼을 슬쩍 밀어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북쪽으로 그녀의 작은 집과 여전히 노란빛인 해바라기 밭이 보였다.
‘없어졌다기에 저걸 갈아엎으러 갔나 생각한 내가 바보지.’
그는 도로 커튼을 쳤다.
이제 해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시끄러운 소리는 이골이 날 정도로 끊이지 않았고, 그의 휑한 방 안을 메아리치듯 울리게 만들었다.
덕분에 벤자민은 정신 사나운 방에서 벗어나 서늘해진 밤바람을 맞으려 잠시 마당으로 나왔다.
울타리에 기댄 그는 저 멀리 화려한 불빛이 번쩍이는 해변을 바라봤다.
지금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양 반짝이고 즐거워 보였다.
그는 턱을 괸 채 그 광경을 무심하게 바라봤다.
‘……남들이 볼 땐 유난이고 꼴사납겠지.’
그럴 터였다.
누가 그 흔하고 무서울 거 하나 없는 해바라기를 보고 덜덜 떨고 있을까.
누가 저 밝고 즐거워하는 곳이 무서워 이 조용하고 우울한 집에 박혀 살고 있을까.
그렇지만…….
‘나아질 방법 같은 건 모르니까.’
“……가…….”
그가 설핏 내리깔았던 눈을 떴다.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화……!”
시끌벅적한 소음 속, 선명한 목소리 하나.
“화가아……!”
그는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엔 작은 언덕이 있었다.
“여기야!”
언덕 아래, 그가 누우면 딱 찰 만한 작은 모래사장.
그곳에 고립되어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 건, 닉시였다.
“야호! 살았다. 화가, 나 좀 구해 줘!”
닉시는 어둠 속 한 줄기 빛을 본 사람처럼 눈을 글썽였다.
그녀는 좁은 모래사장에 발을 모으고 쭈그려 앉아 있었고, 그녀가 앉아 있는 작은 모래사장 앞으로 파도가 이리저리 찰방이고 있었다.
“대체…… 거기서 뭐 하는 거야?”
“그게, 바다에 들어가 보려고 눈 딱 감고 이리 뛰어내렸는데, 밀물이 되는 바람에 탈출을 못 하게 됐지 뭐야.”
좀 도와줘. 닉시가 말했다.
그녀가 있는 작은 모래사장으로 가려면 언덕 아래로 빙 둘러 내려가 발목까지 차 있는 바닷길을 가로질러 걸어가야 했다.
화가가 그 귀찮고 번거로운 짓을 할 리 없었다.
“알아서 와. 이 언덕을 기어 올라오든, 바다로 헤엄쳐서 오든.”
어차피 깊이도 물살도 그렇게 세지 않는데 대체 저게 뭐가 무섭다고 저러고 있는 건지.
“……꼴사납긴.”
“아까의 복수는 좀 나중으로 미뤄 주면 안 될까?”
그녀는 발목을 쭉 뺐다. 발목이 주먹만큼 부어 있었다.
“절벽 기어오르기는 아까 시도했거든. 보다시피 이렇게 됐지만!”
벤자민은 괜스레 시큰거리는 머릴 부여잡았다.
당분간. 적어도 오늘만큼은 저 이상한 이웃을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 상황은 미운 놈 꼴 보기 싫어 가 버린다 이전에, 밀물에 떠밀려갈 사람을 보고 지나치는가 마는가 하는 인간성에 대한 문제였다.
지금이라도 마을 이장을 불러올까 고민했다.
하지만 밀물이 그녀의 작은 모래사장을 덮어오는 게 더 빨라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녀가 있던 곳에서 30cm쯤 떨어진 곳에서 찰방이던 파도가 이젠 그녀의 발끝까지 성큼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거긴 왜 기어들어 간 거야?”
결국 인간성의 승리였다. 그는 언덕 아래로 빙 둘러 내려갔다.
저 멀리 바다를 사이에 끼고 그녀가 고립된 작은 모래사장이 보였다.
암초가 있는 곳으로 휙 뛰어내린 그는 바닷물의 수심을 가늠했다. 무릎, 깊으면 복부까지의 수심이었다.
“네가 무슨 기분이었는지 알고 싶어서!”
그녀가 구조대에게 손 흔들듯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벤자민은 신발을 벗어 백사장 위에 던졌다.
“그게 바다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첨벙, 그의 몸이 물속으로 매끄럽게 들어갔다.
“너한테 진심으로 미안해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니까.”
그는 천천히 물살을 헤치며 걸어갔다.
확실히 물이 차오르는 시간이라 그런지 중간 중간 깊은 곳이 있었다.
무릎까지만 적시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본의 아니게 허벅지까지 젖어 버렸다.
“너한테 마음 깊이 미안하단 말을 하려면, 네가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아야 했으니까.”
“……나한테 미안하긴 했군.”
“그러엄! 덤으로…….”
닉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샌들 신은 발 사이로 눅눅한 바닷물이 스며들었기에.
그녀는 그 서늘한 느낌에 흠칫 뒤로 물러났다.
벤자민은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바닷물이 복부까지 차올랐고, 닉시가 있는 곳은 앞으로 한 일곱 발자국만 걸어가면 닿을 거리였다.
그는 그녀가 서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네가 이쪽으로 오라는 듯.
“…….”
“…….”
“……안 갈 건가?”
“그게…….”
읏. 닉시가 눈앞의 넘실거리는 바닷물을 보며 작게 눈을 찌푸렸다.
그녀가 바다를 싫어하는 건 그때 같이 술을 마시면서 봐서 알고 있었다. 왜 싫어하는진 몰라도.
‘아마 나랑 비슷한 이유겠지. 남들이 볼 땐 무서울 거 하나 없는 것에 유난인 거 보면.’
굳이 바다 한가운데 서서 네가 저한테 오라고 손짓한 것 바로 그것 때문이다.
갑자기 저를 그날, 해바라기 한가운데 떨어뜨려 놓은 것처럼. 너도 한번 당해 보라는 유치한 심보.
“빨리 와.”
“싫어, 네가 와……!”
그는 미련 없이 휙 뒤돌았다.
“미안! 가지 마, 화가!”
그녀가 빽 우는 소릴 냈다.
“부탁하는 사람이 건방져.”
“남의 약점을 잡고 비겁하다!”
“먼저 시비 건 녀석이 누군데.”
“……저요.”
천천히 느릿한 물살을 가르고 그가 다시 한 발자국 걸어갔다.
이제 그녀가 표류하고 있는 곳은 세 발자국밖에 남지 않았다. 넘어지면 물 닿을 거리였다.
세상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 속, 그녀 혼자만 심각한 이 상황이 답지 않게 우스웠다.
그래서 그는 아까 전까지만 해도 지끈거리던 두통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도 모르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눈을 접어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잠시 바닷물을 바라보던 그녀는 여전히 겁먹은 동물처럼 고갤 저었다.
그럴 줄 알았지. 정말, 끝까지 귀찮기만 한 여자.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맘 같아선 이 여자가 싫어하든 말든 그냥 물속으로 풍덩 끌어오고 싶었다. 근데.
그녀는 제 손끝에서 떨어지는 바닷물에 흠칫 몸을 떨었다.
“…….”
그 설핏 떠는 몸짓이 뭐라고.
그는 한숨을 폭 내쉰 뒤 그녀를 안아 올렸다.
“떨어지기 싫으면 꽉 잡든가.”
깜짝 놀란 그녀가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감아 안았다.
그는 그녀를 안아 든 채, 천천히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검푸른 파도 위, 저 멀리 해변의 노란 전구들이 반사되어 빛났다. 꼭 젖은 종이 위에 떨어진 노란 수채화 물감처럼.
“……아까 마을 이장이 널 찾더군.”
“어? 왜?”
“네가 ‘뭘 봐야 한다’고 시끄럽게 떠들어댔는데 사라져서 이상하다 했던 것 같은데.”
뭔가 생각났는지, 닉시가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둑해져 있었다.
그는 바다 아래 최대한 부드러운 모래를 밟기 위해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걸었다.
중간에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약간 깊은 곳을 지나니 물이 한층 낮아졌다.
이제야 조금 안심된 건지 그녀가 품속에서 바르작대는 게 느껴졌다.
“서커스 보려고 했었는데. 바닷물에 발 한번 담가 보겠다고 뛰어들었다가 이렇게 되는 바람에 못 봤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장사도 다 망했잖아. 그녀가 투덜거렸다.
“넌 바다를 왜 싫어하는 건데.”
그가 툭 말했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건데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 밀려나다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꺼내 버린 것이었다.
그녀가 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화 풀린 거야?”
“…….”
“안 풀렸구나. 하긴 그럴 수 있지.”
이제 바닷물은 무릎 언저리에서 넘실댔다. 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그에게 딱 붙어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유를 찾기 위해 제 머릿속을 뒤적였다.
이윽고 오래전, ‘잊어버리기 상자’ 속에 묻어 뒀던 기억이 걸려들었다.
“우리 부대는 죽은 동료들을 바다에 버려서 처리했어.”
“…….”
“처음엔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했어. 그다음엔 사람 던지는 것도 만만찮게 힘들구나. 한땐 이렇게 많이 던져버렸다간 어느 날 바다가 넘쳐버리는 거 아닐까 싶기도 했지. 언젠가 그렇게 넘쳐 버린 바다에서 죽은 동료들이 내 발목을 잡을 것 같았어. 그러다가 문득, 나도 죽으면 이 바다로 끌려 들어가겠단 생각이 들었지.”
내가 버린 내 사람들에게 끌려가겠구나.
소금기 가득한 짠 바닷바람이 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끝. 그게 다야.”
그녀는 다시 기억을 잊어버리기 상자에 넣곤 깊이 묻었다.
툭, 그는 제 가슴께에 기댄 금발 머리칼의 무게감을 느꼈다.
“그럼 넌? 넌 왜 해바라기가 싫어?”
문득 그는 그녀의 반짝이는 금발 머리칼이 빛줄기 같다 생각했다.
저 멀리 해변의 밝은 주황색 전구 빛을 받아 반짝이는 노란 빛 무더기.
“……많은 걸 잃어버렸거든.”
그는 그 해바라기 밭에서 일어난 공습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비단 그의 동료뿐만이 아니었다.
오른손을 잃어버렸고, 동생에게 보여 주기 위해 틈틈이 그렸던 크로키 수첩도, 하나밖에 없었던 그의 동생 사진도 잃었다. 그리고.
“그날.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동생도 잃었다.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 중 의외로 나라의 영광이니, 조국의 미래니 하는 거창한 사명감을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그들 대부분은 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싸웠다. 아주 작고 사소한, 개인적인 이유로 목숨을 걸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날, 그는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더 이상 세상에 지켜야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아가 자기가 여태껏 무엇을 지키려 그렇게 애쓴 건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렇게 총을 들고 나가 싸워야만 했던 이유를 하나하나 덜어내다 보니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오로지. 명령에 따라 누굴 죽이고만 있는 저 하나뿐.
“……나도 그게 다야.”
이윽고 그들은 바닷물이 발목 언저리까지 오는 곳으로 왔다.
밀려오는 물결과 쓸려 나가는 모래. 하얀 파도 거품이 넘실거리는 곳으로.
“해바라기 다 뽑아 버릴까?”
“이제 와서?”
그는 모래사장이 있는 곳에 그녀를 사뿐히 내려 주었다.
“네가 그럴 테니 나보고 바다를 다 메우라는 건 아니겠지?”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그래서…….”
그는 그녀의 손끝을 가만히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해바라기 테러로 불쾌하던 마음은 바닷물 때문인지 뭔지 식은 지 오래고, 저도 그녀도 결국 오래전 그런저런 일을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한 꼴사나운 놈들이란 걸 확인했다.
이젠 그녀가 무슨 같잖은 이유로 해바라기를 심었는지 들어도 딱히 짜증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이유가 뭔데. 내가 싫어할 걸 알면서 해바라기를 심은 거.”
“이제야 들어 줄 맘이 든 거야?”
닉시가 씩 미소 지었다.
그때, 밤하늘을 가르는 짤막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화악 밤하늘을 밝은 불꽃이 수놓았다.
불꽃놀이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엔 아름답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지만 그와 그녀에겐 달갑잖은 소리였다. 그건, 그와 그녀가 피 튀기는 현장에 있을 때 매일 듣던 지독한 죽음의 소리와 닮았으니까.
화들짝 놀란 그녀가 그의 팔을 꽉 붙잡았고, 그녀의 무게에 떠밀려 그는 파도가 밀려오는 백사장에 떠밀렸다.
―첨벙!
닉시는 제 무릎에도 오지 않는 깊이에서도 허우적거렸다.
―펑!
“닉시.”
한 번 크게 놀란 뒤 오는 패닉 상태마냥, 늪에 빠져 찬찬히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바닥을 짚고 허둥거렸다.
“닉시!”
―펑, 펑!
꼬리뼈가 찡하게 아파서 얼굴을 구겼던 화가가 허우적대는 닉시의 팔을 잡았다.
그 사이에도 연신 하늘엔 불꽃이 터졌다.
그는 손을 들어 닉시의 두 귀를 막았다.
일순간 그녀는 제 주위가 잠잠해졌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버둥거리던 걸 우뚝 멈췄다.
“가만히 좀, 있……어!”
“화…….”
그리고 그는 닉시를 그대로 바닷물 속으로 담갔다.
닉시가 도로 허우적거리며 제 귀를 막은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차마 다물지 못한 입 안으로 미친 듯한 짠맛이 밀려들어왔다.
“야, 야 콜록! 이 미친놈아, 뭐 하는 짓이야!”
그녀가 뭐라 쏘아붙이건 말건, 그는 그대로 그녀의 시선이 하늘로 향하게 몸을 뒤집은 뒤 물속에 집어넣었다.
“자, 잠깐 아무리 내가 잘못했어도 이건 좀……!”
쉿. 그가 속삭였다.
그녀는 그제야 버둥거림을 멈췄다.
그가 귀를 막고 있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단단히 막혀 있는 손 너머로 물속의 고요한 물거품 소리만 들렸다.
그녀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새카만 밤하늘에 아름답게 만개한 불꽃들이었다.
그 찬란한 아름다움에 그의 손목을 꽉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몸에 힘이 탁 풀리자 그제야 등 뒤에 부서지는 파도와 부드러운 모래사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저가 그의 다리를 베개 삼아 얕은 바다에 누워 있다는 것도.
다음으론 그의 보랏빛 눈이 보였다.
이제야 조용해졌군.
그녀는 찬찬히 그의 입 모양을 읽어 냈다.
등 뒤로 파도가 그녀를 밀고 당겼지만 쓸려갈 것 같다든지, 바닷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 같다든지 하진 않았다.
바다가 눈에 안 보여서일까. 소리가 들리지 않게 귀를 막고 있는 그의 손이 저를 꼭 붙잡고 있어서일까.
그녀는…….
“화가. 이유를…… 물었지?”
바다가 아무렇지 않았다.
“이유가 뭐냐면.”
닉시는 짠 내음 나는 물결이 제 뺨을 간질이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굳이 화가가 싫어할 걸 알면서 해바라기를 심게 된 이유.
그 전에, 오늘 저가 지금 끔찍이도 싫은 바다를 보러 온 이유는.
더 이 전에, 마을 한가운데 살지 않고 굳이 들판과 바다 사이의 외딴집으로 이사 온 건.
더더 이전에. 바다가 그렇게 싫은데도 바다가 있는 대륙 남쪽 끝으로 이사 온 건.
“네가 듣고 비웃을 거 아는데…….”
그녀는 머릴 마구 헝클이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 그걸 봐도 아무렇지 않아졌으면 해서.”
허. 화가가 탄식했다.
“봐 봐! 내가 비웃을 거라 했지!” 닉시가 괜히 화가의 옷자락을 쥐고 흔들었다.
그녀는 지금 바다가 제법 아무렇지 않았다.
물론 몸을 일으켜서 다시 이 검푸른 파도를 보면 말을 취소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너나 나나 사실 해바라기나 바다가 싫은 게 아니잖아. 그걸 보면 싫은 기억이 떠오르니까 그게 싫은 거지. 그렇다고 무섭다고 평생 피할 순 없으니까, 차라리 다른 기억으로 덮으면 되지 않을까 했어.”
“…….”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기억들 같은 걸로. 차차 시간을 쌓아서 그 기억을 묻어 버리면……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저가 어느 순간 바다가 아무렇지 않길 바라며.
“알아. 안 믿겠지.”
닉시는 물에 반쯤 잠긴 손을 첨벙였다.
사람의 사고 회로는 복잡하다.
간단히 믿는다, 믿지 않는다라는 범주 안에도 수많은 신뢰의 단계가 존재한다.
그래서 닉시는 사람이 어려웠다.
무엇이 상대방을 신뢰하게 만드는지, 무엇이 상대를 미워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화가의 저 눈도 알 수 없었다.
제 말을 듣긴 한 건지.
듣고, ‘믿는다’인 건지, ‘믿지 않는다’인 건지.
닉시는 손을 들어 화가의 뺨에 댔다.
“……있잖아. 우리 이제 절교하는 거야?”
손바닥에서 후두둑 떨어진 물방울이 젖은 그의 옷자락으로 떨어졌다.
밤하늘.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불꽃들이 어두운 밤하늘 가득 반짝이며 눈부셨다.
그 불빛의 색에 따라 보라색이 되었다가, 노래졌다가, 붉어지는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가 무어라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귀를 막고 있는 터라 닉시에겐 들리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천천히 말해 봐. 입 모양 읽어 볼 테니까.”
‘쓸 데 없 는 소 릴.’
“그, 그치? 쓸데없는 소리지? 어휴. 난 또 해바라기 때문에 절교하는 줄 알았지.”
‘처 음 부 터 아 니 었 어.’
“진짜?!”
불꽃놀이가 끝났다. 희미한 화약 냄새가 바닷바람에 실려 왔다.
충격받은 그녀를 뒤로하고 벤자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닉시도 벌떡 일어났다.
그는 모래사장으로 걸어와 젖은 셔츠의 물기를 꾹 짰다.
“정말? 정말 친구 아냐?”
“그래.”
기어 오다시피 후다닥 모래사장으로 뛰어온 닉시 또한 몸에 덕지덕지 붙은 해초를 황급히 떼어냈다.
괜찮나 싶었는데 그녀는 여전히 바다가 싫은지 멀미를 참는 얼굴이었다.
‘아무렇지 않아지길 바란다면서 본인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주제에.’
그는 던져놨던 신발을 집어 들었다.
“들렀다 가.”
“어딜?”
“우리 집.”
“왜?”
“수건 줄 테니까.”
그의 퉁명스러운 호의에 닉시의 얼굴에 희미하게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역시 우리 아직 친구 맞구나?”
“……떨어져. 모래 붙어.”
닉시는 헤헤 웃으며 벤자민의 젖은 셔츠 끝자락을 붙잡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렇게 싫은 바다 한가운데 있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나아지는 거지.
그녀의 단순하고 태평한 사고방식이 이상하기도, 부럽기도 했다.
벤자민은 흘긋 닉시를 바라봤다.
샛노란 머리도 그렇고 여러모로 우악스럽고 자기주장 강한 게, 어째 그녀를 전혀 몰랐을 때보다 더 해바라기를 닮았다.
만약 꽃이 사람이 된다면 이런 모습이겠거니 싶은…….
‘내가 무슨 생각을…….’
그는 즉각 생각을 거둬들였다.
순간이었지만 해바라기로 시작된 무의식은 자연스럽게 그녀로 이어졌다. 그녀의 제정신 아님 세포가 옮기라도 한 것처럼.
‘제길 이러다 그 꽃만 보면 이 녀석을 떠올리게 되면.’
되면?
“…….”
“화가?”
닉시가 그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그가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벤자민은 방금 스치듯 떠오른 생각에 한참을 붙잡혀 있었다.
‘그 꽃을 봤는데, 이 녀석을 떠올리게 되면.’
닉시가 멍하니 생각에 잠긴 그 앞에 손을 흔들고, 손가락을 튕기고, 조용히 중지를 들어 보일 때까지 그는 멍하니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렇지 않게 되는 건가?’
* * *
“정말 벤자민 씨가 축제에 온대?”
“응!”
닉시는 길버트의 질문에 신나게 고갤 끄덕였다.
물론 반쯤은 닉시의 허풍이었다.
어제 바다에 빠진 뒤, 모래로 튀긴 핫도그 같아진 닉시에게 벤자민은 수건을 빌려줬다.
그녀는 샌들에 모래가 잔뜩 들어가서 지압 샌들처럼 됐다며 슬퍼했고, 화가는 그럼 신발만 씻고 나가라 엄포 놓았다.
신발만 씻는다는 게 머리카락까지만 씻게 되고, 세수까지만 더 하다가, 아차 거품이 몸에 묻어버렸네 싶어서 몸까지 닦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녀는 말끔하게 벅벅 씻고 나온 뽀송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물론, 제 샤워 차례를 기다리던 화가는 기다리다 지쳐서 욕실 앞에 수건을 둘둘 감고 자고 있었고.
화가에게 축제 구경을 권한 건, 닉시가 그를 들춰 메고 샤워장 안으로 밀어 넣었을 때였다.
벤자민은 길게 하품하며 중얼거렸다.
[알겠으니까 제발 집으로 가.]“그랬어.”
‘괜찮으려나.’
길버트가 뺨을 긁적였다.
‘그럼 미리 조치를 취해야겠네. 마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알겠어 닉시. 혹시 벤자민이 오면 말해 줘!”
“안 가.”
벤자민이 붓을 내려놨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하루 만에 변할 수 있는 건가! 닉시는 “어째서!” 외쳤다.
“간다고 한 적 없어.”
어젯밤의 마지막 기억은 신발을 씻겠다고 들어가 놓고 안 나오던 그녀를 기다리다가 잠든 기억이었다.
제가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어떻게 축제 가잔 말을 승낙했겠는가. 세상이 뒤집혀도 말이 안 되지.
“정말?”
“그래.”
“알겠어……. 어쩔 수 없지.”
그에겐 축제 나부랭이보다 더 심각한 고민이 있었다.
바로 갈색 섞인 빨간 물감이 다 떨어졌다는 것.
이제 마무리만 하면 그림이 완성되는 이 시점에서 하필 물감이 떨어질 줄이야.
‘대체 이 색을 언제 다 썼던 거지…….’
분명 조금 남겨놨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 뒤로 저가 이 물감을 썼던 기억은 죽어도 없고.
붉은색은 다른 색 물감을 섞어서 만들어 낼 수 없는 원색이다. 고로? 없으면 망했다는 소리.
이대로 물감 하나를 사려고 도시로 나가면 지금으로부터 완성일이 일주일은 더 뒤로 밀린다. 아니 그 전에, 도시로 나가는 비용과 물감을 사는 비용이 제 수중에 남아 있던가.
벤자민은 팔레트의 티끌만큼도 남지 않은 붉은 기를 착잡하게 바라봤다.
‘지금 당장 붉은색을 내는 산열매라도 캐 와야 하는 건가.’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닉시가 불쑥 고갤 들이밀었다.
“혹시 너 붉은 열매…….”
“붉은 열매?”
닉시는 이상한 이름 스티커가 붙은 토마토를 들어 보였다.
“아니, 아냐.”
붉은 원료를 찾는다 해도 그게 그림에 쓸 수 있는 소재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오히려 색을 탁하게 만들어서 그림을 망칠 수도 있는 노릇이고.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한 번 더 도시에 나가야 하는 수밖에 없나.
“빨간색 안료 같은 거 필요해?”
눈치 빠른 그녀가 물었다.
“나 만들어 줄 수 있어. 연지벌레로. 한 1억 마리쯤 있으면 돼.”
“필요 없어.”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다니.”
닉시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손가락을 튕겼다.
“빨간색이라면 비티가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메이드 인 비티의 햄스터 발바닥 마크가 붉은 안료로 그려진 거거든.”
듣던 중 솔깃한 소리였다.
‘비티라면…….’
사람 얼굴을 잘 외우지 않는 벤자민의 머릿속에서 다홍빛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비티는 아마 목수였고, 목수라면 가구를 칠하기 위한 붉은 안료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희망이 보였다.
“그 사람은 어디 있지?”
“지금쯤이면 해변에 있을걸?”
“……축제 한가운데?”
“엉.”
그는 두 가지 방법 중 뭘 선택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첫째. 원래 다짐했던 대로 축제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뒤, 집 안에 돈 될 만한 물건은 다 팔아서 차편을 구한다.
나라 전체가 떠들썩한 축제 기간이니 마차는 아마 빨리 와도 일주일은 걸리겠지.
어쨌든 그렇게 어렵게 마차를 구해 하루 종일 타고 도시에 나가서 빨간 물감을 구한 뒤, 겨우겨우 일주일 내 그림을 완성한다.
둘째. 눈 딱 감고 축제에 쳐들어가서 붉은 안료를 구해 온 뒤, 오늘 안으로 그림을 완성한다.
‘수지타산이 전혀 안 맞잖아.’
“어때 갈 마음이 생겼어?”
닉시는 뭘 잘못 삼킨 것처럼 끔찍한 표정인 그에게 물었다.
▶ 오늘의 그림
닉시의 역작. 사치스럽게도 붉고 흰 물감으로만 그려졌다. 쓸데없이 디테일한 핏줄이 특징.
▶ 누군가의 총평
징그러워.
* * *
벤자민과 닉시의 때 아닌 등장에 마을은 어수선해졌다.
드디어 침묵을 깨고 등장한 적국의 군인. 침묵은 늘 깨지만 오늘따라 진지한 얼굴인 북쪽 숲의 농부.
그들은 해변 입구에 예쁘게 걸려 있는 ‘봉쥬르’ 현수막 한가운데로 척척 들어왔다.
흡사 누구라도 때려잡으려는 듯 비장한 얼굴이었다.
닉시는 제 맘을 심란하게 하는 바다를 오늘이야말로 한번 조져 보고자 온 거고, 벤자민은 제발 그림 좀 끝내 보고자 온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바자회를 구경 온 사람들은 그들의 심각한 분위기에 절로 길을 비켜 주었다.
축제는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활기 넘쳤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즐겁게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닉시는 코끝을 간질이는 짠 내음과 백사장의 부드러운 촉감을 느꼈다.
‘음. 역시.’
“역시 있잖아.”
벤자민과 닉시는 자신감 넘치게 축제 한가운데에 쳐들어갔지만, 막상 그곳에 도착한 뒤엔 선 채 죽은 망부석마냥 잔뜩 얼어붙어있었다.
‘아직 우리한텐 무리군.’
“일단 구석으로 갈까.”
닉시가 말했다.
“다들 잊으신 거 아니죠? 저는 벤자민 씨 없었으면 죽었을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협조 좀 해 주세요. 그냥 못 본 척만 해 주시면 돼요.”
한편, 마을 이장 길버트는 마을의 가장 어르신들 몇몇을 모아놓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마을의 티눈, 벤자민 리히터에 대한 이야기였다.
“저도 매일 즐겁게 지내라곤 안 해요. 그래도 이번 10년 전, 외지인 습격 사건의 범인을 잡은 건 벤자민 씨 덕이잖아요. 그러니까 이번 바스티유 축제 기간에만 조용히 지나가자구요. 알겠죠? 특히 토마토! 계란 절대 던지지 말라고 해요! 그럼 저 화낼 거예요.”
“그래, 그래.”
마을 어르신들은 재롱잔치 하는 손자 보듯 길버트를 바라보며 고갤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사냥꾼을 잡은 그날을 기점으로, 마을의 이방인에 대한 인식이 약간 달라지긴 했다.
이전엔 우리를 탈출한 퓨마였다면, 지금은 우리를 탈출하긴 했는데……. 농부와 이장에게 목줄이 걸려서 질질 끌려 다니는 퓨마 같달까.
“측은하긴 하더라구. 라울이 계속 뭘 먹이길래 왜 그런가 싶었는데 저번에 보니까 뼈밖에 없더라 얘. 어떻게 그렇게 혼자 살았는지 몰라.”
마을의 어머니회 대장이자 포도밭 농부 에이린 할머니가 말했다. 옆에 있던 샬롯 할머니가 조용히 고갤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뼈밖에 없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에이린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죠.”
“그래. 언제 한번 우리 좌판에 오라 하려무나. 과일 한 상자 줄 테니. 길버트 너도! 너는 더 심각해 요 녀석아. 조만간 뼈다구가 와서 친구 하자 할 거야!”
에이린 기준 길버트는 아사 직전의 기아였다.
오베르의 어르신들은 어디서 얻어맞고 다니는 건 ‘으이구 저 모질이.’ 하고 넘어가도 밥 못 먹고 다니는 꼴은 절대 못 봤다.
에이린이 잔소리를 담아 길버트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아, 알겠어요, 에이린 씨! 제 어깨 부서져요. 아무튼 다들 아셨죠? 특히 에드가 씨.”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던 씨앗&모종 숍 주인 에드가가 후다닥 담배를 껐다.
“아저씨들 기강 꽉 잡으세요. 이장 권한이에요.”
길버트는 목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에드가의 목에 걸었다.
마을의 실세들을 설득했으니, 그럼 이제 마을의 분위기는 대충 다졌다. 남은 건 이제 화가가 이 축제를 즐기러 오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오시긴 하려나.’
어지간히 고집불통이어야 말이지.
길버트는 부지런히 걸어가던 길에 축제용 가면과 웃긴 용품들이 진열된 가판대에서 멈춰 섰다.
옹졸한 하트 입술을 가진 털보 가면과 착시 안경을 쓰고 있는 역병 의사 가면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기 딱 좋아 보이는 것들이었다.
‘안 온다 하면 끌고 와야지! 이걸 씌워서.’
그는 씩 미소 지었다.
“이거 둘 다 주시겠어요?”
* * *
길버트가 닉시와 벤자민을 보게 된 건 그로부터 5분 뒤.
“어! 길, 왔어?”
미아보호센터에 미아 두 명이 대기 중이란 말을 듣고 달려간 파라솔 아래였다.
“어? 정말 오셨네요, 벤자민?”
닉시는 파라솔 가장 구석에 앉아 토마토를 우적우적 먹고 있었다.
벤자민은 그녀 옆에 불쾌하단 표정으로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근데 이런 구석에서 뭐 하는 거예요? 미아라고 해서 와 봤더니.”
가만 보니 화가의 머리카락이 끈적여 보였다. 묘하게 축축해 보이기도 하고.
“뭐긴. 난 바다 때문에 진정될 때까지 여기 쉬는 거고, 화가는 혼자만 토마토 축제를 즐기고 있지.”
“아, 제길. 누가 벌써 토마토 던졌어요?”
길버트가 목덜미를 잘게 긁적였다.
마을의 어르신들이 한 분, 한 분 영향력은 대단한데 다들 발걸음이 대단히 느린 편이었다. 때문에 화가 노터치령이 아직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엉. 비티네 가게 가 본다고 위풍당당하게 가더니 1m도 못 가서 맞고 돌아왔어. 사람들이 없어질 때까지 이 파라솔 밑에 있으려는 모양이야.”
“시끄러워.”
닉시가 먹고 있던 토마토는 화가가 맞은 토마토였던 모양이었다.
길버트가 파라솔 옆의 상자를 뒤져 물병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그는 바로 그것으로 머리를 닦아냈다.
“근데 이건 뭐야 길?”
“축제용 가면. 너랑 벤자민 씨 주려고. 벤자민 씨, 누가 던졌는진 모르겠지만 이젠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제가 미리 조치했으니까.”
애써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놨는데. 벤자민이 집으로 가버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길버트는 그의 손에 털보 가면을 쥐여 줬다.
“근데 비티의 가게는 왜요?”
“화가가 빨간색 물감을 찾고 있대. 혹시 있냐고 물어보려고.”
“그래요? 비티는 오늘 가판을 안 여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의 중얼거림에 화가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어라. 실수한 건가?’
물감이 꽤 급하게 필요한 모양이었다.
마을 이장은 눈앞의 우울한 남자가 이대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본인이 알고 있는 정보를 긁어모았다.
“아 잠깐만요. 오늘 저녁에 다른 지역 상인들이 오베르를 들렀다 가거든요?”
“우와, 정말?”
“응. 거기 그림을 파는 상인도 올 거예요. 전쟁 전에 꼭 오던 상인 중 한 명인데, 혹시 그 상인이 물감도 팔지 않을까요?”
길버트의 말에 벤자민이 반응했다.
“그림 파는 상인?”
화가의 표정에 고민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네. 좌판 구역을 크게 잡았던 걸로 기억하니, 분명 물감 같은 것도 팔 거예요.”
길버트는 그의 고민에 쐐기를 박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털보 가면을 썼다.
“……그럼 이거 잠깐 빌리도록 하지.”
“얼굴만 가린다고 될까? 누가 봐도 가면 쓴 화가 같은데.”
“얼굴이라도 안 맞게 하려고.”
“아.”
불쌍한 화가에게 유감을 표해야 하는지,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해 줘야 하는 건지.
닉시는 그의 털보 가면 쓴 모습을 바라봤다.
“하긴 남 말할 처지가 아니지. 나도 여기 갇혀 버렸으니까.”
“응? 왜?”
그녀가 남은 토마토를 입에 쏙 넣었다.
“바다가 보여서. 밤이 될 때까지 버틸까 했거든.”
털보 가면 쓴 화가가 역병 의사 가면을 꺼냈다.
가면의 눈 부분이 맛이 간 것 같더니, 땅을 보고 걷게 만드는 착시 안경이었다.
그는 그것을 닉시에게 휙 던졌다.
“써.”
“나도 광대 퍼레이드에 동참하라고?”
“써보면 알아.”
닉시는 알 수 없단 표정으로 가면을 썼다. 그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다가, 바다가 안 보여! 근데 화가, 길 너희도 안 보여!”
한참동안 양팔을 허우적대던 그녀가 바닥에 고갤 처박았다.
그렇게 두어 번 머릴 땅에 처박고 멀미 때문에 헛구역질하던 닉시는 세 번의 시도 끝에 감을 잡았다.
“그럼…….”
길버트가 둘을 번갈아 봤다.
“어쨌든 축제를 즐기게 된 거네요!”
모양새는 이상하지만 드디어 마을의 문제아와 이방인이 축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을 이장으로서 큰 업적이었다.
* * *
오베르는 전쟁 전엔 관광지로 나름 유명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바스티유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면 꼭 마을 바자회에 맞춰 떠돌이 상인들도 마을에 들르곤 했다.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라 특이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도 했고, 평소에 잘 볼 수 없는 다른 지역 혹은 나라의 물건들을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라울은 설거지한 접시의 물기를 닦다 저기 멀리 걸어오고 있는 세 명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털보 가면을 쓴 채 긴장한 듯 뻣뻣한 화가와 역병 의사 가면을 쓴 채 비틀비틀 걷는 노란 머리 농부. 그 사이에서 아주 태연히 가이드를 하고 있는 마을 이장.
인파 사이에서 유유히 걸어오고 있는 해괴망측한 조합.
아무리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축제 기간이라지만 저건 좀 심하지 않나.
마을 사람들이 이를 악물고 모른 척하는 게 느껴졌다.
‘저걸 어떻게 모른 척하라는 건지.’
라울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저녁이 되기 전까진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있었다.
‘시간이 이르긴 하지만 끼니를 때우는 게 좋으려나.’
길버트의 눈에 마침 카페테리아처럼 만들어 놓은 가게가 들어왔다.
“저, 다들 밥은 먹었어요?”
털보가 고갤 저었다. 역병 의사는 어디 갔나 했는데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럼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갈래요?”
만장일치로 셋은 가게에 도착했다.
꾸며 놓은 모습이 남부보다 북부 같다 싶더니, 가판을 연 사람은 외지인이었다.
덕분에 부르타뉴 지방의 갈레트를 먹어 볼 일이 생겼으니 탁월한 가게 선택이었다.
셋은 굳이 해변에서 가장 먼 자리에 앉았다. 닉시가 식사하다가 구역질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으어어……. 이젠 바다보다 이 안경 때문에 더 어지러워. 근데 확실히 눈엔 안 보이니까 괜찮은 것 같긴 한데…….”
닉시가 가면을 벗어던졌다. 벗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해변의 아름다운 풍경에 역겹다는 얼굴을 했다.
“바다를 왜 그렇게 싫어해?”
“어린애들이 공동묘지를 무서워하는 거랑 비슷한 이치라고 할까…….”
닉시는 눈을 비비적거렸다. 그 뜻을 알 리 없는 길버트만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확실히 나라의 대대적인 기념일이라 그런지 마을 사람들만큼 놀러 온 외지인들이 많았다.
그들이 앉아 있는 가게도 곧장 손님들로 북적였다.
“벤자민, 안 더워요?”
길버트는 포크 손잡이 부분으로 털보 가면의 볼을 쿡 찔렀다.
벤자민은 가게에 들어왔는데도 가면을 벗지 않았다.
누군지 모르게 하려고 가면을 쓴 건데 이젠 오히려 뭐 하는 사람인가 싶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마침 맞은편 테이블의 사람들이 이쪽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여긴 마을 사람들도 별로 없는데, 이제 그만 벗어도 돼요.”
길버트가 작게 속삭였다. 그도 저를 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머뭇거리던 손가락은 느릿하게 가면을 향해 올라갔고, 벤자민은 천천히 가면을 끌어 내렸다.
동시에 맞은편 테이블에서 작은 탄성이 튀어나왔다.
토마토를 씻어내느라 약간 젖어 있는 앞머리. 작게 찌푸려진 눈가 때문에 설핏 내리깐 시선이 고혹적이었고, 가면 속이 더웠는지 입술이 유난히 붉었다.
그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길버트와 닉시는 실실 웃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뭔데.”
“아니. 너도 참 얼굴을 못 쓴다 싶어서.”
벤자민은 의문을 담아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원래도 사연 있는 것 같이 서늘하게 잘생긴 인상이었지만, 잘생김을 가리고 있다가 저렇게 깜짝 등장하는 것은 약간 반칙에 가까웠다.
야수가 사람으로 변할 때나 개구리 왕자가 왕자로 변할 때처럼, 전혀 설레지 않는 털보였다가 갑자기 가면 속의 잘생긴 얼굴을 내비치면 외모가 더 극대화돼 보이지 않던가.
“벤자민. 인기 많았죠.”
길버트가 물었다.
때마침 그들이 주문한 갈레트가 나왔다.
크레페처럼 얇은 메밀 반죽 안에 양념한 햄, 치즈, 완자를 넣어 바삭하게 익힌 음식.
짭짤한 맛을 좋아하는 길버트의 취향대로 익힌 양파와 달걀을 추가한 것이었다.
“딱히.”
벤자민이 시큰둥하게 노른자를 반으로 갈랐다.
“길, 이 녀석 있잖아, 이런 껍데기를 가지고도 연애를 한 번도 안 해 봤단다?”
“우와.”
“인류의 크나큰 손실이야 그렇지? 이런 얼굴은 널리 이롭게 뿌려 줘야 하는 건데 말이야.”
“뭘 뿌린단 거야?”
화가가 정떨어진단 듯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길.”
“응?”
“넌 연애 안 해?”
닉시의 말이 갑작스러울 법했는데도 길버트는 능청맞게 큭큭 웃었다.
“음, 마을에 연애할 만한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
“뭐야. 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할 의향 있단 거네?”
“물론. 난 준비된 사람이니까. 너는, 닉시?”
길버트는 닉시에게 손가락을 까닥하고 물을 들이켰다.
반대로 그런 질문을 받을 거라 전혀 예상 못 한 닉시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난 뭐.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안 막는 편인데…….”
“누구든 상관없단 말이야?”
“물론 얼굴과 돈은 좀 보지 내가.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이라고 할까…….”
닉시와 길버트가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을 때, 옆 테이블에 있던 두 명의 관광객이 조심스레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저, 저…….”
그중 분홍색 프릴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여인 한 명이 수줍게 붉어진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얼핏 봐도 고급스러운 차림새에 교육을 잘 받은 듯한 귀족 같은 모양새의 여인이었다.
막 관자 한 조각을 입에 넣은 벤자민이 고갤 들었다.
“저, 혹시 여기 노, 놀러 오신 건가요?”
누가 봐도 뭐 모르는 관광객이 화가에게 작업을 거는 분위기.
마을 이장과 농부는 웃음을 참기 위해 테이블 위의 갈레트를 바라봤다.
“…….”
“너무 제 취향이셔서 혹시 다른 일행분들이 괜찮으시다면 저희랑 같이 노시지 않…….”
“관심 없어.”
“네, 네?”
당황한 건 여인뿐만이 아니었다. 달걀을 보며 감정 몰입하고 있던 닉시와 길버트도 마찬가지였다.
“시끄러우니까 다 먹었으면 그만 갈 길 가지.”
보는 사람까지 민망할 정도로 찬바람 쌩 부는 거절이었다.
신은 화가에게 얼굴을 주고 인성은 주지 않은 게 분명했다.
싸한 공기가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고, 주춤거리던 여인 둘은 후다닥 사라졌다.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던 닉시가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왜 연애를 못 했는지 알 것 같아. 이렇게 재수 없는데 누가 옆에 있어 줄 리가 있나.”
“…….”
“넌 우리가 친구인 걸 고마워해야 돼!”
“맞아요.”
닉시의 말에 길버트 또한 깊은 공감을 표했다.
“나한테만 재수 없게 구는 줄 알았는데 모두한테 평등하구나?”
“……시끄러워.”
“고양이도 싫고 강아지도 싫다 했을 때부터 알아봤지. 화가의 삭막한 마음엔 아무래도 뭔가를 ‘귀엽다’ 생각하거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없는 게 분명해.”
꼭 ‘눈의 여왕’에 나오는 카이처럼 말이다.
닉시는 벤자민의 옆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성격 나쁜 화가.
아까 봤던 아가씨는 사람을 얼굴로 평가하지 않는 닉시가 봐도 꽤 예쁘장했다. 시골에선 볼 수 없는 세련됨도 있었고.
대인기피증이 있는 게 아니면 그냥 상냥히 웃어 주고 넘어가도 괜찮았을 텐데.
“너도 나중에 퍽이나 외롭게 살겠다. 내가 너였으면 같이 축제 돌아다니면서 재미 봤을 텐데.”
“오호. 닉시 헌팅 당해 본 적 있어?”
“당연하지.”
닉시는 상의를 끌어내려 어깨의 총알 자국을 보여줬다.
“짜잔.”
그 헌팅이 아닐 텐데. “격하네.” 길버트가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럼. 뜨거웠지.” 닉시는 뿌듯하게 대답했다.
식사는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바자회가 열리고 있는 해변 중앙이 시끄러운 것 보니, 슬슬 떠돌이 상인들이 야시장을 열 때가 된 모양이었다.
닉시는 후식으로 차가운 레모네이드를, 길버트는 차가운 민트 라임 모히또, 화가는 뜨거운 커피를 시켰다.
길버트는 본인이 만든 팸플릿을 펼치며 말했다.
“어디부터 갈 거야? 난 열대 과일 파는 곳에 가 볼까 하는데.”
“난 우선 그 상인한테 가 보려고.”
“그 상인?”
닉시가 제 안주머니에서 핑크색 물약을 꺼냈다. 그걸 알아본 길버트는 기겁했다.
“또? 어제 한 바구니나 샀잖아.”
“이번 축제가 끝나면 언제 올지 모르잖아! 그때까지 물량을 확보해놔야지.”
아직 효과도 모르고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는 걸 다 털어버릴 셈인가.
물론 마을 경제를 위해 돈을 쓰는 거야 좋지만, 친구 된 입장에서 제 친구가 사기꾼에 돈을 갖다 바치는 게 좋을 리 없었다.
“내 위대한 계획을 들어 봐. 이 약은 사랑에 빠지게도 하는데 무려 주름도 개선해 준다고. 이걸 잘만 개발하면 인류에 위대한 유산이 될지도 몰라.”
“그런 중요한 걸 누가 한 병당 계란 하나 값으로 팔겠어.”
“그 상인이 세상 물정 모르는 것 같았어.”
“내 생각엔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본인의 분수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분이었지.”
벤자민은 그들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들으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근데 어떻게 돼 먹은 건지 커피는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썼다.
‘설탕이 어디 있지.’
“길. 내가 아무 근거 없이 움직이는 그런 사람으로 보여?”
“응.” 길버트가 혀에 들어간 민트를 뱉어내며 말했다. “지금부터 과거의 난 잊어 줘.” 닉시가 유감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화가는 테이블 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시야에 설탕 시럽같이 끈적거리는 분홍색 시럽 병이 들어왔다.
‘이건가.’
“내가 어제 잠깐 혀끝으로 찍어 먹어 봤거든. 근데 효과가 있어.”
“어떻게?”
뚜껑을 따 맡아 본 향은 독특했다. 달짝지근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장미향이 나는…….
‘이런 것도 이색적인 걸로 준비해 놓는 건가.’
하기야, 가게 자체도 프랑스답진 않으니…….
벤자민이 커피에 시럽을 쭉 흘려 넣었다.
반쯤 넣곤 티스푼으로 잘 저은 뒤 한 모금 마셨다.
“심장이 뛰어. 그리고 약간 기분이 들뜨고 머리가 상쾌한 느낌이 들었지. 이건 체내에서 아드레날린이 나오게 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성분이 들어 있는 거야.”
“그거 먹어도 되는 게 맞긴 한 거야……?”
아직도 더럽게 썼다. 벤자민은 가늘게 인상 쓰며 나머지를 몽땅 털어 넣었다.
“당연하지! 일단 내가 지금 살아 있잖아! 이 약의 성분을 좀 더 조사하고 어떤 이유로 내가 가슴이 뛰게 된 건지를 알아보면!”
닉시가 테이블 위의 병을 들어 보였다.
“어쩌면 나도 사랑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근데 이거 내용물 어딨어.”
켈록. 벤자민이 갑자기 기침했다.
길버트와 닉시의 시선이 절로 화가에게 향했다.
사레가 들린 건지 아님 쓴맛 가운데 뭔가 묘한 맛이 있어서인지 그의 귓가가 약간 붉었다.
벤자민은 왠지 모르게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
그냥 커피를 마시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누가 다가와서 가슴에 어퍼컷을 치고 달아난 듯이.
당황스럽고 난감하고 낯 뜨겁게 가슴이 뛰어대는 그런 기분.
“……아?”
그 기묘한 고양감에 그가 커피 잔을 내려놨다. 그리고 제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어?”
길버트와 닉시가 동시에 대답했다.
“너…… 이거 뭐야.”
벤자민은 쿵쿵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
분명 설탕 시럽인 줄 알고 탄 건데, 눈앞의 사이코 농부와 오지랖 넓은 마을 이장이 경악하는 걸 본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화가 그걸 먹은 거야?”
설마 싶은 직감은 왜 틀리지 않는 건지.
“설탕 시럽이 아닌…… 건가?”
“당연히 아니지?”
“나한테 뭘 먹인 거야.”
“말은 확실히 하자. 나는 약을 그냥 둔 거고 자발적으로 먹은 건 너지. 시인하십니까, 벤자민 리히터 씨?”
닉시가 화가를 취조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거야 닉시……?”
“당연하지 형량이 달라지는데!”
대체가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벤자민은 그저 숨이 가빠져만 왔고, 울렁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렸을 뿐이었다.
“그래서 화가. 어때?”
이 낯설지 않은 감각. 꼭…… 옛날,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
닉시가 덥석, 그의 상기된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왔다.
“사랑에 빠진 것 같아?”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화가는.
헛구역질을 했다.
“……괜찮아요, 벤자민?”
“얘 지금 내 얼굴 보고 구역질한 거 맞지.”
화가는 지끈거리는 머릴 꾹 눌렀다.
“내가 그렇게 구역질 나게 생겼어? 진짜?”
“솔직하게 말하길 원해 닉시?”
“……아니. 왠지 들으면 충격 받을 것 같아.”
“그래서…….”
화가가 찬물을 들이킨 뒤 고갤 들었다.
“내가 먹은 게 뭐라고?”
“그거?”
닉시가 입꼬리만 씩 올렸다. 나쁜 짓하다 들킨 아이 같은 억지 미소였다.
“사랑의 묘약.”
* * *
바자회 구석. 이장 길버트의 미아보호소 파라솔 밑.
닉시와 길버트, 벤자민은 사용설명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책임을 안 진다는 건데.”
벤자민이 사용설명서의 마지막 줄을 손으로 짚었다.
“처벌을 안 당하려고……겠죠?”
“왜 처벌을 안 당하려고 하지?”
“그야. 마시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벤자민, 혹시 막 죽을 것 같고 그러면 말씀하세요.”
화가는 제 삶에 대해 잠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인생을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독살당할 만큼 인생을 개차반처럼 산 건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눈치 없는 심장은 쿵쿵댔다.
게다가, 자꾸 피가 말단에 몰리는 불쾌한 감각이 가장 골치 아팠다.
“화가. 너 가장 처음 뭐 봤어?”
“……에스카르고.”
“혹시…… 달팽이와 사랑에 빠진 것 같아?”
“달팽이는 사람이 아니잖아.” 화가가 지끈거리는 와중에 중얼거렸다.
“그럼 보자! 화가가 약을 마신 지 얼마나 됐지?”
길버트가 테이블 위에 놔둔 시계를 바라봤다.
“음, 한 20분쯤 된 것 같은데. 밥 먹고 커피에 타 먹은 뒤에 바로 이곳으로 피난 온 거니까.”
그럼 남은 시간은 대략 20분 정도.
화가가 큐피드의 화살을 맞기까지 20분.
화가의 ‘상대방 합의 없는 혼자만의 로맨스’가 시작되기까지 딱 20분 남은 것이다.
“어떡하지.”
“약 효과가 멎을 때까지 눈을 가리고 다니는 건 어때……요……?”
“그거 좋은 생각이다, 길.”
닉시는 사용설명서 뒤편에서 약효가 한 시간 정도 간다는 내용을 발견했다.
길버트와 닉시는 동시에 벤자민을 바라봤다. 어느 샌가 그들의 손엔 정체불명의 끈이 들려 있었다.
“……날 어쩔 생각이야.”
“금방 끝날 거야, 화가.”
“잠깐 눈 감고 있으면 돼요, 벤자민.”
그들이 하려는 것은 화가가 누군가를 보고 큐피드의 화살을 맞지 않게, 그의 눈을 가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맹세컨대, 벤자민은 지금 이 상황이 제 인생에서 ‘가장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상황’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확신했다.
닉시는 천으로 벤자민의 눈을 가렸다.
“닉시. 매듭은 머리 뒤쪽으로 해 줘야 하지 않을까?”
“앞쪽으로 묶으면 쥐고 끌기 편하잖아.”
닉시는 그의 눈 앞쪽에 묶어놓은 매듭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천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아니. 그냥 사이코 변태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들처럼 보여.”
벤자민이 조용히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매듭을 풀었다.
결국 화가는 농부와 마을 이장 손에 이끌려 거릴 활보할 수밖에 없었다.
오른손은 닉시가, 왼손은 길버트가.
길 가다가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지만 남들이 보기에 그건 그냥 누군가를 연행해 가는 모습이었다.
시야가 차단됐으니 자연스럽게 다른 감각이 예민해져 왔다.
농부와 마을 이장의 떠드는 소리와, 각각 붙잡혀 있는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온기. 바닷바람에 실린 짠 내.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구경하고 가!”
“어머나, 길버트 그 사람은 뭐야? 미아?”
“아뇨.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요! 음…… 아마도요…….”
“곧 사랑에 빠질 가련한 남자예요!”
그저 속절없이 끌려가는 발걸음.
평소 같으면 이런 장난질엔 안 어울려 준다고 진작 날뛰었을 텐데 이상하게 그런 맘이 들지 않았다.
왤까.
인간의 가장 큰 감각을 차단해 놔서? 감긴 눈 밖의 세상이 그 옛날 여느 때처럼 평화롭고 소란스러운 하루의 일부 같아서일까? 아니면 정말 약 때문에?
“화가!”
닉시가 벤자민의 눈을 가린 천을 손가락으로 슬쩍 밀어 올렸다.
갑자기 들이닥친 빛에 벤자민은 눈을 찡그렸다.
“아직 44분 덜 됐지? 그럼 괜찮을 테니까 봐 봐,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야!”
빛이 익숙해진 뒤,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온 건 상기된 농부의 얼굴이었다.
그 뒤로 물감 냄새 물씬 풍기는 것들이 시야에 가득히 들어왔다.
그가 축제에 온 이유. 그림상이었다.
이름 모르는 자들의 그림들. 제각기 사이즈가 다른 캔버스. 화사한 색채를 가진 각각의 그림처럼 분위기도 느낌도 하나같이 달랐다.
이 작은 마을 해변에서 팔기엔 어울리지 않는, 베네치아의 야경을 그린 그림.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조잡하게 따라 그린 모작. 아크릴 물감을 색깔별로 덕지덕지 발라버린 형태 없는 그림 따위들.
묘했다. 묘하고 새삼스러웠다. 그리고, 두근거렸다.
멍하니 그림들을 바라보고 있는 벤자민 앞으로 가게 주인이 다가왔다.
“뭐 찾는 거라도 있으신지, 손님!”
“……혹시 유화 물감도 있습니까?”
“그럼요! 잠시만 기다려 보시죠!”
가게 주인이 부지런히 상자를 뒤졌다.
벤자민은 가장 가까이 있던 수채화 캔버스를 집어 들었다. 그림은 가판대의 노란 불빛을 받아 오묘한 색을 띠고 있었다.
“어때. 오길 잘했지?”
사실 다른 사람의 그림이라 해 봐야 제게 얼마나 영향을 줄까 싶긴 했다. 근데 뭘까. 두근거리고, 아이처럼 묘하게 들뜨는 기분은.
벤자민은 라일락꽃이 그려진 정원 그림을 들여다보며 작게 고갤 끄덕였다. 옅게 상기된 얼굴로 순순히 수긍하는 게 제법 부끄럼 많은 소년 같았다.
“정말?”
그 흡족한 반응에 닉시가 키득키득 웃으며 어깨동무했다.
“……떨어져.”
“아저씨! 이 그림 주세요! 이것도요!”
기분 좋아진 그녀는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농부는 전 재산을 털어 화가가 들고 있는 라일락 정원 그림과 저를 닮은 노란 기린 그림을 샀다.
“자아, 여기 있습니다!”
가게 주인이 손가락만 한 튜브 물감들이 가득한 상자를 들이밀었다.
‘크림슨 레이크…… 크림슨 레이크……. 찾았다.’
화가는 그중 가장 자신이 원하는 붉은색의 물감을 찾아냈다.
그 수많은 수모를 겪었지만, 원하는 것을 찾았다는 안도가 밀려왔다. 벤자민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이거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는 물감 튜브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옆에 있던 닉시가 불쑥 그림을 내밀었다.
“자아, 내가 주는 선물이야!”
화가는 유산지로 포장된 그림을 펼쳤다. 기린 그림이었다.
저가 고른 건 분명 보라색 라일락 그림이었을 텐데?
“잠깐 이거…….”
“헉! 시간 다 돼가잖아! 자, 자 다시 눈 가려!”
뭐라 반박할 새도 없이 그의 눈이 다시 가려졌다. 그게 아니고 그림 바뀌었다고.
“이제 어떡할 거야 닉시?”
“집으로 가려고. 바자회는 오늘 끝나지만 축제가 다 끝난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이 약 성분 파악 좀 하고 해독제를 만들어 놔야 할 것 같아.”
“해독제……?”
“누굴 실험용 쥐로 쓸 작정인가?”
그가 삐딱하게 반문하자, 닉시는 별거 아니란 듯 허허 웃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벤르모트!”
“누가 실험용 쥐라는 거야?”
“알겠어. 그럼 난 슬슬 미아나, 분실물 들어온 게 있나 확인하러 갈게. 즐거운 시간 보내요. 벤자민, 닉시.”
화가의 손에서 마을 이장의 손이 빠져나갔다. 남아 있는 건 이제 가늘고 작은 손 하나뿐이었다.
“후우. 이제야 좀 덜 울렁거리네. 역시 낮에 바다에 오는 건 아직 힘든 것 같아.”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백사장을 빠져나왔다.
주홍빛의 축제 전등을 등지고, 발밑에 닿는 촉감이 모래가 아니라 발목을 간질이는 풀밭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밤의 바다는 괜찮아졌나 물어보면…… 그것도 아냐. 화가, 네가 눈이 감겨 있지 않았다면 내가 무릎 꿇고 돌아다니는 걸 봤을걸?”
“나보다 비틀거리는 건 느껴지긴 했지.”
“그랬어? 아무튼 몸은 어때? 일단 손의 온도로 봐선 여전히 몸의 피가 화끈화끈 돌고 있는 것 같은데.”
“똑같아.”
“그럼 아직 약효가 돌고 있다는 거군. 일단, 44분은 지났으니까…… 혹시 사랑에 빠질 것 같으면 말해.”
“넌…….”
그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사랑 같은 걸 알고 싶어서 난리인 거야?”
그녀에게 붙잡힌 제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평소에 고통이 찾아올 때와는 다른 뜨거움 같은 게.
“왜냐고?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잖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낭만이자 특권. 시나 음악이나 노랠 부르는 사랑.
“그걸 알아야 내가 비로소 사람이 됐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닉시는 언젠가 익히 들었던 흔한 사랑 노랠 흥얼거렸다.
“물론 그런 논리적이지 않은 감정이 궁금해서도 있어. 그거 알아? 두려움과 사랑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그녀는 시답잖은 말을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희미하지만 그녀가 제게 발걸음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황과 그로 인한 신체 각성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을 쉽게 착각하는 거지. 엇? 잠시만 그럼 지금 네 조건도 어느 정도 부합하잖아? 나한테 몸을 맡긴 불안한 상황이니까!”
“너한테 그런 걸 느낄 리는 없으니 안심하시지.”
“뭐야. 화가, 넌 사랑 싫어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를 희한한 질문이었다.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튀는 건지 싶으면서도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제 모습이 참 이상했다.
그래서다.
“……몰라, 그런 거.”
저답지 않게 그렇게 애매하게 대답했다. 모른다고. 싫고 좋고도 아니고, 그냥 모른다고.
“좋아하는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그녀는 뭔가를 찾는 건지 부스럭거렸다. 이윽고 닉시는 벤자민의 손에 뭔가를 쥐어줬다.
“그럼 이 꽃점 쳐 볼래?”
손끝에 느껴지는 까슬한 꽃대. 손바닥만큼 큰 꽃.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해바라기였다.
“……비과학적인 미신이잖아.”
대체 이걸 여태 어떻게 품에 가지고 다닌 건지 그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뭐 어때. 재밌잖아. 엇, 돌부리 조심!”
그녀는 마치 춤추듯 팔로 그의 허리를 감고 빙글 돌았다.
무도회장에서 왈츠를 추는 사람들 같은, 스텝이 조잡하기만 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오로지 그녀에게만 의지해서 걷고 있는 화가는 이런 돌발적인 상황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의 균형을 맞추고자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농부가 깜짝 놀랐는지 순간 숨을 훅 들이마시는 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몰랐겠지만 시각이 차단되고 다른 감각이 예민해져 있기에 알 수 있는 찰나였다.
그는 균형을 잡자마자 천천히 손을 떼어놓았다.
“에이. 내가 널 넘어지게 놔둘까 봐? 우리 우정이 그것밖에 안 된다 생각해?”
“……다음부턴 그냥 말로 해.”
귓가를 간질이는 바람이 꼭 숨결 같아 그가 손으로 귓가를 덮었다.
“바자회는 끝나는데 바스티유 축제는 한동안 계속되니까, 한가한 날이면 다른 동네도 가 볼까 싶어. 궁금하지 않아?”
종일 그렇게 조잘거렸는데 아직도 조잘거릴 힘이 남아 있다니. 저보다 한참 작은 체구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걸까.
“같이 가 볼래?”
“아니.”
“그래 놓고 같이 가 줄 거면서.”
아니, 늘 그래 준 적 없다. 늘 끌려 다녔을 뿐. 눈이 어두워져 앞도 분간 못하게 된 지금처럼.
“엇 돌부리.”
닉시가 화가의 팔을 잡아당겼다.
예고도 없는 갑작스러운 이끌림에 그가 휘청거렸다.
잡고 있던 오른손을 꼭 붙잡고, 다른 팔론 저를 끌어당기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왔다.
폭. 가슴팍에 긴 머리칼이 와 닿았다. 뒤이어 잡초 다발을 안은 듯한 뭉근한 풀 향기가 났다.
그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상대방의 허리를 붙잡았던 손을 주춤 떼어냈다.
“우와.”
턱 끝에서 태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지금, 저는 농부를 끌어안고 있는…….
“화가 너 심장 정말 빨리 뛴다! 부정맥 같아!”
그는 그녀를 홱 밀어냈다.
처음부터 괜히 틈 같은 걸 내 줘서.
그는 쓰고 있던 안대를 확 벗었다.
“어? 아직 한 시간 덜 됐는데! 약효 떨어질 때 아냐!”
“필요 없어.”
사랑의 묘약이니 축제 구경이니. 그까짓 사랑이니, 우정이니.
“그딴 게 무슨 상관이…….”
밝아진 그의 시야로 선명한 색채들이 스며들었다.
마을 하늘에 전등처럼 예쁘게 깔려 있는 주홍빛 불빛들.
아득히 들려오는 축제의 시끄러운 소리 가운데 고요하기만 한 이곳. 바람 부는 밀밭과 여름 특유의 쌉쌀한 향기.
“어때? 괜찮아?”
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샛노란 해바라기 밭. 그 가운데 그녀.
“이제 아무렇지 않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눈가에 빨갛게 눌린 안대 자국을 쓸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를 감정에 심장이 쿵쿵쿵 뛰어댔다.
약에서 온 걸지, 수많은 해바라기에서 온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아니면, 사랑에 빠질 것 같아?”
그는 홱 몸을 돌렸다.
“어, 어?! 화가 어디가!”
그녀의 끝이 올라간, 제 속을 살살 긁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그는 마구 달아났다. 그 언젠가 과거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도망치고, 달아나고, 도망치고.
그녀와 그의 집 가운데 있는 밀밭을 마구 헤쳤다.
좀처럼 시끌벅적할 일 없는 마을의 밤이 오늘따라 시끄러운 것처럼, 그의 좀처럼 나아질 리 없던 깊은 심해 속 마음도 태풍이 지나간 듯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고요하기만 한 집 안.
그는 그대로 방문을 따라 주르륵 주저앉았다.
오두막을 닮은 집 주위로 어지럽게 꾸며진 노란 불빛. 노란 해바라기. 노란 그녀.
[어때, 괜찮아?]순간 그의 시야에 그득히 차오른 것은 해바라기와 옛날의 그 끔찍한 기억이 아니었다.
우스운 장난질이 생각난 건지 샐쭉하게 웃던 그녀.
이제 아무렇지 않냐고. 아니면 사랑에 빠질 거 같냐 묻던.
그녀, 그녀.
“뭐야…… 대체…….”
무릎을 그러모은 그는 그대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오베르의 축제가 끝난 늦여름.
녹아내리는 얼음과, 눅진한 바람, 실온에 방치해서 미지근해진 압생트.
여름은 그림의 음영이 가장 대비되는 시기기도 하면서도 그림이 가장 희미해지는 시기기도 했다.
이렇게 밝고 쨍한 햇볕 아래 오래 그림 작업을 하다 보면 뭐가 빛이고 뭐가 사물인지 눈부시기만 해서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으니.
요컨대 많은 화가들이 백내장을 가지게 되는 시기였다. 눈이 멀어버리는 그런 시기.
축제가 끝나자마자 농부는 바빴다. 늦봄에 밭에 심었던 양파들이 풍작이랬다.
봄엔 그렇게 작물을 죽여서 반 백수처럼 지내더니, 이젠 제법 농부 티가 났다.
초봄, 처음 봤을 때 투명하다 못해 창백했던 피부도 흰 물감에 노을 진 황토색 물감을 섞은 듯 그을려 있었다.
그는 마침내 그림을 끝마쳤다.
벤자민은 눈을 비볐다.
땡볕에 너무 오랫동안 있던 모양인지 캔버스에 얹은 색이 잘 구별되지 않았다.
얼마나 햇볕에 오래 있던 건지 눈을 감아도 빛의 잔상이 남았다.
뭐든 강렬하고 찬란한 것은 그와 맞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늘 그의 눈을 멀게 했으니.
‘집으로 돌아가서 그림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벤자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오래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찌뿌둥했다.
다릴 두드리고 드디어 완성된 시끄러운 이웃이 의뢰한 작품을 챙겨 들었다.
어느새 여름도 기울 즈음이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었다. 도시와는 다르게 시골은 변함없을 거란 말.
그건 틀린 말이었다. 시골만큼 눈 깜짝할 새 시시각각 변하는 곳이 없으니까.
아주 잠시만 한눈팔아도 변해버리는 게 빛의 방향이고 자연이다.
갓난 주먹만 한 새끼 양이 한 철 만에 무릎만큼 커서 들판을 뛰놀았고, 언제 심었는지 모르는 풀이 눈 깜짝할 새 담벼락을 넘는다.
아무튼 그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빠른 시간 속, 의뢰인의 그림이 완료됐다.
드디어 끝이었다.
아마 지금쯤은 해바라기 밭에 있을 테지.
그녀는 세 번이나 해바라기 밭을 뒤엎지 않아도 괜찮겠냐 물었다.
그는 다시 한 번만 더 물어보면 해바라기는 물론, 너까지 다신 보지 않을 거다 엄포 놓았다.
그 뒤로 그녀의 해바라기 밭은 저렇게 오색찬란한 노란 절경을 이루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무식한 해바라기 작전이 조금은 먹혀들었는지, 저 노랗고 멀대같은 것을 생각해도 손이 벌벌 떨리는 일은 점점 잦아들었다.
다만 이제 생각나는 건, 절인 해바라기 무침이라든지 해바라기로 장식해 목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무거운 밀짚모자라든지 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던 강렬한, 노란, 빛나는, 우울한 것들이 이제 웃기고, 어이없고, 요상한, 가소로운 것이 됐다니. 진짜 세상은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집에 도착한 뒤 그림을 건조되기 좋은 장소에 뒀다.
씻고 커피를 마시고 간단한 점심 식사를 마치자 그림은 다 말라 있었다.
애초에 그 어렵게 구한 붉은 색이 올라가야 할 장소는 딱 하나. 새끼손톱보다 작은 그녀의 지붕 굴뚝밖에 없었으니까.
[좋아하는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그럼 이 꽃점 쳐 볼래?] [비과학적인 미신이잖아.] [뭐 어때. 재밌잖아.]결국 그날 밤, 손에 쥐여 줬던 해바라기는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었다.
손 아래 쥐여 줬던 해바라기를 느끼곤, 얼마나 어이없었던지.
그땐, 해바라기가 싫어서 그런 표정을 지었다기보다 해바라기 꽃잎 수가 몇 갠지 알고 하는 말인가 싶어서 그랬었다.
홀과 짝, 흑과 백, 이거 아니면 저거, 좋아한다, 싫어한다.
이렇게 간단하게 두 개로 구분된 수일뿐인데, 그거 하나 확실하게 정하고자 수십 장의 꽃잎을 뜯어내야 한다니. 얼마나 무식한 짓인가.
“지금 간다, 안 간다.”
벤자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완성된 그림을 유산지에 포장했다.
귀찮음이 뚝뚝 묻어났지만, 어딘가 모르게 희미한 즐거움이 있었다.
오두막 문을 열었다.
조금 늦게 간다, 안 간다. 중얼거리며 마당을 나섰다.
오늘 아침. 라울의 술집에 들르기 위해 마을을 지나가다, 사람들이 그 해바라기 밭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걸 들었다.
“아주 절경이더군. 언제 그렇게 자란 건지 모르겠어. 아? 그 강낭콩 농부의 밭이라고? 그럼 그럴 만하겠군.”
마을 사람들은 그 해바라기 밭이 아주 절경이라 했다.
그들이 묘사하는 해바라기 밭은 아주 아름다웠다.
누군 여왕의 티아라 같다고 했고 누군 들녘의 아침 들판 같다고 했다.
뭐 요컨대 예쁘단 거겠지.
언젠가의 자신도 그렇게 느끼게 될진 모르겠다. 아직은 멀었지만.
개울가를 따라 건너가자 익숙한 악필로 이정표를 적은 푯말이 보였다.
옆에 꽃 같은 것도 그렸지만 여전히 못생긴 푯말이었다.
피식 웃음과 동시에 바짝 들어있던 어깨의 긴장감도 풀렸다. 참 이상한 여자였다.
‘그림을 건네주면 이제 이 귀찮고 성가신 여자와의 인연도 끝나겠지.’
끝난다, 안 끝난다.
더 이상 저 변덕스러운 여자에게 휘둘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휘둘린다, 안 휘둘린다.
시끄럽던 집도 조용해질 테고 잠도 방해받지 않고 잘 잘 수 있을 거다.
아마도, 그렇겠지.
오래전 동생이 말했다. 그가 우울할 때마다 해바라기를 그리는 것은 해바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누가 그렇게 우악스럽고 자기 주장 강한 꽃을?’
그 꽃은 제게 아주 끔찍한 기억도 주고 갔다. 선명하고, 아프고, 짜증스럽고, 생각만 해도 절벽 끝에 선 것처럼 떨리는. 그러니까. 그럴 리 없다. 좋아할 리.
그가 멍하니 되뇌는 간단한 단어 위로 노란 꽃잎이 하나하나 떨어졌다. 좋아한다, 싫어한다.
저 멀리 노란 밭이 보였다.
멍하니 걸어가느라 도착한 줄도 몰랐던 노란 해바라기 밭이었다.
벤자민은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낮에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그녀의 해바라기 밭은 처음이었다.
그런 넓은 해바라기 밭 가운데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찬란한 금발의 그녀가 고갤 들었다.
“아.”
한차례 들녘의 바람이 불었다.
아주 멀리 있었지만 그녀의 붉은 눈이 일순간 태양처럼 반짝였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직까지 과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의 심장은 아주 빠르게 뛰어댔다.
아주 높은 곳에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수많은 노란 해바라기 속에서 그는 단 하나의 밝게 빛나는 그녀를 찾아냈다.
[좋아한다, 싫어한다, 좋아한다, 싫어한다…….]동생이 말했다. 그가 우울할 때마다 해바라기를 그리는 것은 해바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두려움과 사랑은 종이 한 장 차이라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황과 그로 인한 신체 각성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을 쉽게 착각하는 거라고.
좋아한다, 싫어한다. 좋아한다, 좋아한다…….
머릿속에서 떼어내던 해바라기의 꽃잎들이 그의 머릿속 가득히 노란 물결로 차올랐다.
그래. 그 단순한 흑과 백을 점치기 위해서 수백 장의 꽃잎을 뜯어내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저가 어디까지 생각했던 건지…….
“왔어, 화가?”
샛노랗게 잊어버리지 않았던가.
벤자민은 일순간 멎었던 숨을 천천히 내쉬기 시작했다.
뜨거운 햇살이 그의 얼굴을 붉게 달구고 있었다.
그는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해바라기를 닮은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
그러니까 그건.
절대 사랑 따위가 아니라고.
▶ 오늘의 그림
벤자민 리히터의 작품. 오전 11시 무렵, 오베르의 넓은 밀밭 한가운데 닉시의 집이 그려져 있는 유화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