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7_2
“무시하지 말고…….”
한결 기분 좋아진 닉시가 활기 넘치게 외쳤다.
“내가 마을 소개해 줄게!”
가이드 닉시를 필두로 제키 일행은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여기가 양 농장을 하는 바이올렛네.”
마을의 가장 가장자리에 있는 그레타의 양 농장을 마지막으로 마을 소개가 끝났다.
누가 작은 시골 마을 아니랄까 봐, 마을 구경은 한 시간 만에 끝났다.
그들은 밀밭을 낀 둘레길을 걸어갔다.
“달링. 마을 소개에서 너희 집이 빠진 것 같은데. 혹시 노숙해?”
“알려 주기 싫은 거겠지.”
제키가 실망했다는 듯 몸을 축 늘였다.
“그런 거야, 달링?”
그녀의 슬픈 기색에도 닉시는 태연히 대답했다.
“어. 너희가 찾아올까 봐.”
“좋아. 시간은 많으니까 한번 알아내 줄게. 기다리고 있으라고.”
제키는 닉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녀는 키가 큰 편이었고 닉시는 그럭저럭인 편이었기에 그녀가 어깨동무했다곤 했지만 멀리서 봤을 땐 흡사 협박을 당하는 몰골처럼 보였다.
“근데 말이야, 허니. 나 어제부터 굶었거든. 음식점이 도통 어딘지 알아야 말이지.”
때마침 제키의 배에서 우렁찬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좋아. 내가 이 오베르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음식점을 소개해 줄게. 한입 먹으면 옆에 있는 사람을 암살하고 혼자 먹고 싶을 만큼 끝내 주는 곳이 있어.”
“왜 멀쩡히 있는 옆 사람을 죽이고 그래.”
닉시는 위풍당당 라울의 바로 앞장섰다.
라울의 바로 가는 길. 시간이 딱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밭에서 일하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거리에 보이기 시작했다.
닉시는 넉살 좋게 주민들에게 제키와 필립을 소개했다.
오베르의 주민들은 제 오랜 직장 동료들이라는 닉시의 말에 그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제키와 필립은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면서도, 마을 사람들이 혹시나 닉시의 현란한 말솜씨에 넘어가 있진 않은지, 혹은 눈이 돌아 있지는 않은지 유심히 관찰했다.
이윽고 그들은 오베르 최고의 음식점인 라울의 바에 도착했다.
“이상하네. 마을 사람들 다 정상같이 보여.”
“정상같이 보이는 게 아니라 다들 정상 맞아.”
“달링, 대체 어떤 시간을 보낸 거야? 설마, 평범하게 보낸 거야?”
“물론!”
“필립, 이 새끼 닉시 아닌 것 같아.”
―딸랑.
경쾌한 종소리가 들리고 닉시가 문을 벌컥 열었다.
“라울! 저 왔어요!”
제정신 아닌 제 옛 전우가 데려온 음식점. 제키가 경계하는 눈치로 바 안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어서 와요, 닉시.”
“오늘은 손님도 두 명 추가!”
둘 다 어마어마한 돼지들이니까 매상이 세 배쯤 오를 거예요. 닉시는 라울에게 빠르게 귓속말했다.
“듣던 중에 좋은 소식이군요.”
라울은 접시를 닦으며 닉시가 데려온 손님을 바라봤다.
마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입가에 큰 흉터가 있는 키 큰 여성과 닉시만큼 아담한 체구를 가지고 있는 단정한 느낌의 남성.
직업 특성상 사람을 많이 보는 바텐더 라울은 그들이 한눈에 보통이 아닌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앉으세요. 닉시가 데려온 손님 분들이니, 제가 솜씨를 발휘해 봐야겠군요.”
먹을 거 주는 사람, 좋은 사람.
방금까지만 해도 바텐더를 닉시의 끄나풀 보듯 했던 제키가 그 말을 듣고 냉큼 닉시 옆에 앉았다.
필립은 가게 안에 장식된 술병들을 바라보며 걸어왔다.
“근데 달링. 여긴 혹시 감자 샐러드만 있는 거 아니지? 아님 마카로니 샐러드라든지……?”
“오베르를 뭘로 보고. 흑맥주에 소시지 모둠도 있어.”
“진짜 최고다…….”
소대 최고의 먹성을 자랑하는 제키가 메뉴판에 있는 굵직한 음식들을 하나씩 시켰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마침 가게가 한산해서 다행이었다. 라울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그걸 본 필립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닉. 너, 군인이라는 걸 비밀로 했구나.”
“정말?”
삼삼한 안주로 나온 땅콩들을 입에 털어 넣은 제키가 반문했다.
“어. 알려져 봐야 좋을 거 없잖아.”
“그건 그렇지. 어쩐지 네가 너무 평범하게 살고 있다 했어.”
닉시가 턱을 괴었다.
안 그래도 전쟁 피해가 있던 지역이다. 이방인이 눌러 사는 것도 조심스러운 작은 마을인데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으니까.
그리고 사실. 신물 나는 과거를 전부 버리고 싶었던 것도 있다.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에서 저도 과거는 없는 것인 양 살고 싶었으니까.
“달링. 너 혹시 여기 계속 살 생각인 건 아니지?”
제키가 물었다.
“그런데?”
“이런……. 닉시가 진심이란 말은 안 했잖아 필립.”
그게 무슨 소리지. 닉시가 무슨 말이냐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여전히 뭔 생각하는지 모를 차분한 얼굴의 필립은 조용히 품속에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그녀가 오베르로 도망 오기 전까지 준비하던 논문이었다.
“이게 왜?”
닉시의 의문에 필립이 뒷장을 보라는 듯 턱짓했다. 닉시가 종이를 팔랑 뒤집었다.
“클레망 아서 대령…….”
큰일 났다. 닉시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분명 본인 진급 때문에 저를 놔주지 않을 걸 알아서 사직서를 내고 도망친 건데.
“이 늙은이가 내 사직서를 모른 척해? 이 너구리같은 자식. 내 사직서 보긴 한 거 맞아?”
“그 자리에서 불태우더군. 중세 식 화형 실력 어디 안 가지.”
“아니, 그……!”
딱 맞춰서 음식이 나왔다. 닉시는 답답한 심정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애꿎은 종이만 구겼다.
풍성하게 올라간 치즈가 고소하게 녹아 있는 양파 수프. 레드 와인, 토마토소스, 월계수 잎을 넣고 쇠고기와 예쁘게 썬 야채들을 넣고 끓인 비프 부르기뇽.
음식이 차곡차곡 테이블 위로 세팅됐지만, 그것을 보고 있는 닉시의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잠깐. 너희…… 혹시 나 데리러 왔어?”
“응? 응.”
제키는 생선 스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렇지 않게 긍정했다.
그러니까, 제 동료들이 마을에 출몰했다.
휴가 기간을 맞아 답장이 없는 저를 찾아와 혼쭐을 내 주려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본인은 분명 제대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장기 휴가였다.
게다가 눈앞의 옛 동료들은 그냥 유유자적 관광 온 게 아니라 저를 붙잡아 갈 저승사자들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군대에 도로 끌려갈 판이었다. 재입대? 끔찍하다. 말도 안 됐다.
‘어쩌지. 팔다리라도 부러뜨려? 아니, 아니지. 다리가 안 멀쩡하면 대령이 더 좋아하겠지. 도망도 못 가게 연구소에 감금시켜놓기 좋잖아.’
“필립. 거기 후추 좀 주라.”
인생 최대의 고비였다. 그녀가 고뇌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제키와 필립은 여유로운 점심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럼? 미친 척 머리라도? 아니. 아냐. 잘못하면 세상 하직이라고. 침착하자 침착. 뭐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관둬, 닉. 처음부터 오래 못 있을 거 알았잖아.”
그녀의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린 건지 필립이 조려진 소고기 하나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수습은 다 해 놨어. 탈영 처리될 뻔한 것도, 논문 발표 날짜도.”
“맞아. 필립이 그거 처리한다고 한동안 눈 밑이 얼마나 까맸는데.”
“그건 참 고마운데 말이야…….”
닉시가 말꼬리를 흐리자 그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겨울 강가 같은 푸른 눈. 닉시는 저 눈에 약했다. 하얗고 푸른 것 말이다.
그래서 작게 앓는 소릴 내며 고갤 돌렸다.
“……돌아오기만 하면 돼, 닉. 여기서 계속 네 시간을 썩힐 셈이야?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고 파리로 돌아와. 여기 꼭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필립이 예쁘게 썰어진 당근을 입에 넣었다.
‘꼭 있어야 하는 이유.’
“파리에서 오신 직장 동료 분들이라고요? 입맛에 맞으실진 모르겠네요. 이건 서비스예요.”
그녀가 고뇌하던 차에 사교성 넘치는 바텐더가 샴페인 하나를 들고 테이블을 찾아왔다.
입 안 가득 음식을 흡입하던 제키의 눈이 샴페인이란 말에 반짝였다.
“와! 이거 트루그 그랑 퀴페 아닙니까? 진짜 귀한 술인데.”
“조예가 깊으시군요. 귀한 손님이 왔는데 아무거나 드릴 순 없죠.”
“당신…….”
제키는 감동 어린 눈빛으로 라울과 악수를 청했다. 샴페인 한 병으로 라울에 대한 제키의 신뢰도는 이미 정상 수치를 벗어나 최고치를 찍었다.
“와. 이걸 이런 작은 마을에서 먹어 보게 되다니.”
“그게 그렇게 좋은 술인가.”
“필립, 기억 안 나? 우리 부대 군단장 네 번째 결혼식 연회 때 마셨잖아! 혀만 대봤을 뿐인데 이게 천국의 시냇물인가 싶었던 그거……!”
‘꼭 있어야만 하는…….’
[아 참, 폴은 결혼한대. 그래서 장기 휴가 냈어.] [우리 부대 군단장 네 번째 결혼식 연회 때…….]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고 파리로 돌아와. 여기 꼭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있어.”
닉시는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싱글벙글 샴페인을 따르던 제키가 화들짝 놀라 샴페인 병을 꽉 끌어안았다.
“깜짝이야…….”
“있어. 있다고.”
“뭔데.”
“내가 여기 있어야만 하는 이유.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하는 이유 말이야.”
“엉?”
닉시는 한없이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나, 오베르에 백년가약을 맺은 사람이 있다고.”
유부녀가 되었다는 폭탄 발언에 제키는 입에 물고 있던 포크를 뚝 떨어트렸다.
―쨍그랑!
필립의 포크에 예쁘게 말려 있던 파스타 면도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웬만하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라울도 그 말을 듣고 얼토당토않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 * *
라울의 바에서 결혼 선언이란 폭탄 발언을 한 지 꼬박 2시간 뒤.
닉시는 제키와 필립을 옥수수 밭 한가운데 놔두고 도망쳤다.
“헉헉…… 길. 큰일 났어.”
허겁지겁 달려간 닉시가 도착한 곳은 길버트의 포도 농장.
포도 순을 가지치기하고 있던 길버트가 갑자기 출몰한 닉시를 보고 토끼 눈을 하고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길……. 나 남편을 찾아야 돼.”
남편? 길버트는 잠시 그 단어가 뜻하는 바를 정의하기 위해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 남편이 맞아?”
“허니, 허즈밴드, 인생의 동반자에 속하는 거라면 맞아.”
“어…… 닉시 혹시 결혼했었어?”
“아니.”
닉시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오늘부로 해야 돼.”
닉시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오랜만에 파리의 동료들이 닉시를 보러 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동료들은 자신을 잡아 파리로 함께 가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고, 어지간한 이유 아니면 꼼짝없이 파리로 끌려갈 수밖에 없어서, 어떤 핑계를 대야 하는지 고민하던 찰나.
“결혼밖에 답이 없었다?”
“응.”
길버트가 포도 순을 톡 땄다.
결론적으로 닉시는 지금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남편 역을 할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깡촌 오베르는 도시만큼 젊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
기껏 해봐야 라울, 우체부 대니스, 마을 어머니회 대장님 아들이나 파스칼 씨밖에 없을 텐데.
“참, 라울은 안 돼. 라울은 주례를 섰다고 미리 말해 버렸거든.”
“……하긴 주례하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가 남편이었어요 하고 나타나면 이상하지.”
그럼 어쩐다. 길버트는 잔가지들을 똑, 똑 잘라냈다.
“그럼 길버트.”
“응?”
“너 혹시 나랑 결혼해 줄 생각 없어?”
“결혼을 종교 권유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말아 줄래, 닉시…….”
결혼에 환상이 있는 순수한 청년 길버트가 중얼거렸다.
첫 프러포즈를 포도밭에서 가지치기하고 있을 때 받다니. 길버트는 괜스레 귓불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끙 앓는 소리 냈다.
“나는…… 힘들 거야. 난 방을 안내해 줄 때 네 직장 동료 분들과 이미 대화를 나눴거든.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해 달라 하면서, 마을 회관 옆에 있는 집에 혼자 산다는 것까지 말했어.”
“안 돼…… 네가 내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길버트가 하던 일을 대충 마무리 짓고 손을 털었다.
“일단 마을을 한번 돌아볼래?”
그렇게 북쪽 숲 이웃의 남편감을 찾는 비밀스러운 중매가 시작됐다.
“비티. 닉시 어때?”
“닉시요?”
길버트와 닉시는 가장 먼저 빅토리아의 공방에 쳐들어갔다.
마을 사람 중에서 그나마 가장 닉시의 연령대와 근접하고, 번듯한 직업도 가지고 있고. 게다가 닉시의 관심까지 듬뿍 받고 있다.
마을의 1등 신붓감. 단점이라곤 설치류와 라따뚜이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뿐.
“좋죠. 귀엽고, 사랑스럽고, 농사도 아주 잘 하구요.”
닉시는 눈을 빛내며 열심히 고갤 끄덕였다. 그녀는 자기 어필이라도 하듯 팔뚝을 들어 있는 근육 없는 근육까지 자랑했다.
“근데 결혼은 좀 그래요!”
“왜!?”
우리 좋았잖아. 닉시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티는 사포를 들고 호호 웃었다.
“왜냐면 닉시는 저보다 근력이 부족한 걸요!”
비티는 팔뚝을 걷어 보였다.
목수의 근육은 절대. 절대 얕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우람한 이두근 앞에 닉시의 알통은 멜론 앞 대추였다.
“내가…… 강해져서 돌아올 게 비티…….”
“좋아요, 닉시!”
스테로이드를 맞는 한이 있어도…….
그녀는 결국 다른 사람을 찾기로 했다.
다음 사람은 포도밭 농부 에이린의 아들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아들은 교외에서 일하고 있어 사진 하나만 놓고 중매를 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들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닉시는 제 앞에 차려진 산더미 같은 밥상을 보며 고갤 끄덕였다. 길버트는 이미 두 그릇이나 먹임 당하고 쓰러져 있었다.
“급하게 사기 칠 일이 생겼거든요. 진짜 결혼은 아니고 명의만 빌려주시면 돼요. 딱 한 달만 며느리 하게 해 주실 수 있나요?”
“말만 들으면 닉시 네가 나한테 사기 치는 것 같다 얘. 호호.”
닉시는 마치 맞선을 보듯 밥상 앞에 에이린 씨의 아들 사진을 놓았다.
“에이린 씨의…… 아드님! 저와 임시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저기 닉시, 프릭 씨 아직 살아계시거든……? 밥상 앞에 사진 놓는 거 좀 그래…….”
“제가 시어머니 분을 꼭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오호호 얘 좀 봐. 닉시의 포부에 에이린이 껄껄 웃었다. 사진 속 에이린 씨의 아드님은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근데 이를 어쩌지, 닉시?”
에이린이 주섬주섬 일어나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슬픈 예감이 들었다.
“우리 아들은 이미 약혼했어.”
에이린 씨는 닉시만 괜찮다면 아들의 둘째 부인으로 들어가는 건 어떻겠냐 제안했다. 하지만 닉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친구들의 성질머리를.
그 닉시가 결혼했다는 것도 믿기지 않을 텐데, 첩으로 결혼한 거라고? 그것도 1이 최고라는 닉시의 인생 모토에서 둘째 부인? 말도 안 된다. 사기다.
그날로 오베르는 사랑과 전쟁터가 될 것이다. 안 봐도 뻔하지.
닉시는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다음으로 파스칼 씨. 그러나 그는 배달을 나가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에드가 씨의 사촌 동생은 비혼주의자라며 거절당했다.
남은 젊은이라곤 양목장의 그레타 양.
허나 자신이 라울이 아닌 이상, 그레타에겐 무조건 퇴짜 맞을 것이다.
만약 막무가내로 청혼한다면 그녀의 무표정한 포커페이스가 구애하는 자벌레를 본 것처럼 구겨지겠지.
상상만으로도 마음의 상처였다.
닉시는 미인에게 그런 표정을 정통으로 맞을 만큼 정신 건강이 튼튼하지 못했다.
‘이대로 파리로 끌려갈 운명인가.’
그녀는 괜히 상상해버려서 찢어진 가슴을 부여잡은 채, 모기향 맡은 날파리처럼 비틀거렸다.
“오, 저기 온다. 달링!”
어느새 그 넓은 옥수수 밭을 헤치고 나온 제키와 필립이 저 멀리 손을 흔들었다.
“갑자기 사라져서 네가 우릴 버리고 도망친 줄 알았잖아!”
“너희가 내가 버린다고 버려지는 놈들이니……?”
“이장님 또 뵙네요. 안녕하십니까!”
제키가 씩씩하게 경례했다. 길버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제키의 경례를 흉내 냈다.
길버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필립이 입을 열었다.
“……닉. 이분이 네 남편?”
“어, 어?! 아! 그게! 사실 맞…….”
“무슨 헛소리야, 필립. 마을 어르신들이 청년 이장님이라고 소개했던 거 잊었어? 어딜 성실하게 살아오신 분께 닉시를 붙여.”
‘젠장, 제키. 이럴 때만 논리적이지 말라고.’
닉시가 속으로 분노를 삼켰다.
“죄송합니다, 이장님. 불쾌하셨죠?”
“하하. 조금 놀라긴 했네요.”
“자, 너도 사과해, 필립.”
“죄송합니다.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니들 그냥 내 욕하러 온 거지?”
애석한 해는 어느덧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먹고 옥수수 밭에서 세 시간 정도 산책했을 뿐인데, 제키의 배꼽시계가 울렸다.
진짜 답도 없는 돼지 녀석. 닉시가 텅텅 빈 지갑을 바라보며 훌쩍였다.
그들은 다시 라울의 바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남편 분은 대체 언…….”
닉시가 제키의 입에 옥수수를 덥석 밀어 넣었다.
“누굴 죽일 일 있냐?”, “입이 비어 보이길래.” 닉시와 제키가 옥수수 하나 가지고 주먹다짐을 시작했다.
그 소란이 얼마나 익숙했던 건지 필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길버트는 제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은발의 조용한 청년을 바라봤다.
키는 저보다 한 뼘은 작은데 뭔지 모를 성숙함이 있었다. 꼭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처럼.
‘닉시의 직장 동료…… 도시에 있을 때 닉시랑 같은 직장을 다닌 사람이겠지?’
생각해 보니 닉시가 도시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듣지 못했다.
그저, 도시에서 시골로 귀농한 사람들이면 으레 어떤 사연 같은 걸 가지고 오기 마련이니 굳이 묻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원랜 뭐하던 사람이었으려나.’
“……저녁 약속이 따로 있으신 게 아니면, 제가 한 끼 대접해도 될까요?”
길버트가 필립에게 말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서로 엇비슷한 나이인 게 보임에도 깍듯한 극존칭. 예의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또 오셨군요?”
라울은 닉시 일행이 저 멀리서 이곳으로 오는 걸 봤을 때부터 오븐을 예열해 놓고 있었다. 굶주려 보이는 그들의 비장한 얼굴이, 이번에도 메뉴판 하나를 박살 낼 것이다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울. 테이블에 먹을 게 떨어지지 않게 부탁드릴게요.”
길버트는 가게 영수증에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다. 닉시에게 배운 유일한 글자였다.
“금액은 제 앞으로 달아 두시고요.”
뒤에 서 있던 닉시와 제키가 꺄악 탄성을 내질렀다.
제키는 먹는 게 행복했고, 닉시는 지갑과 제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아서 행복했다.
그렇게 통 큰 마을 이장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저녁 테이블에 초대될 수 있었다.
“닉시가 여기 와서 좋은 친구를 뒀군요! 저는 이 녀석이 이상한 짓만 해서 사람들이 이 녀석을 피하지 않을까 했거든요.”
제키가 호탕하게 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은근히 손이 매운 사람이었다.
“처음엔 그랬죠. 지금은 재밌는 친구예요.”
“그럼, 그럼. 우린 순수한 우정 그 자체로 맺어진 베스트 프렌드라고.”
“닉.”
필립이 물 한 모금 홀짝 마셨다.
“이제 쓸데없는 잡담은 끝내자.”
필립이 고갤 들었다. 유난히 서늘해 보이는 푸른 눈이 닉시의 간담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그래서 네 남편은 대체 언제 소개해 줄 계획이지?”
올 게 왔다.
제키의 인내심은 돼지 꼬리만큼 짧아서 그녀가 독촉하는 건 대충 어영부영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필립의 인내심은 달랐다. 질질 꼬인 도화선만큼 길고 복잡하고 위험했다.
“설마. 변명은 아니겠지?”
그런 필립의 인내심에 불이 붙었다면,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그……게…… 말이지.”
―쾅!
그때. 닉시가 앉은 테이블 위로 누군가의 손이 큰 소릴 내며 얹어졌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잔들이 유리 소릴 내며 잘게 떨렸다.
닉시는 천천히 뒤돌았다. 익숙한 밀크티색 머리칼이 흔들렸다.
“……드디어 찾았군.”
“화……가……?”
“너…….”
그는 제 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약지엔 닉시가 갈고 닦아 만든 탄피 반지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제 닉시가 제 재주를 보여 준다고 멋대로 끼워 넣곤, 빠지지 않는 골칫덩어리. 손가락에 피가 안 통해서 강제로 쥐었다 폈다 손 운동을 하게 만든.
벤자민은 얼굴을 구겼다.
온종일 어딜 그렇게 돌아다닌 건지, 벤자민은 닉시를 찾기 위해 마을 구석구석을 조용히 살피느라 한 달 치 운동량을 다 써서 피곤한 상태였다.
그는 뺨 아래로 내려가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쳤다.
“……어떻게든 해 봐.”
하지만 진퇴양난. 재입대의 공포 앞에 나타난 반지 낀 화가의 등장은 닉시에겐 천사의 강림이었다.
닉시는 눈을 빛내며 화가의 손을 꼭 붙잡아 왔다.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벤자민이 움찔 뒤로 물러났다.
“당연하죠, 드디어 와 줬군요?”
“뭐? 지금 뭐 하자는…….”
닉시는 벤자민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여보!”
그 광경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의 손에서 쨍그랑, 포크와 나이프가 떨어져 나갔다.
길버트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벤자민 리히터는 이십여 년간 삶을 살아오면서 별별 이상한 사건을 다 겪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만큼 정신 나간 사건은 없었다 자부할 수 있었다.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된 겁니까?”
“언제, 왜 닉을 만나신 거죠.”
“혹시 이 녀석한테 인질 잡히거나 협박당하고 계신 겁니까?”
“언제까지 닉을 만나실 생각이신 거죠.”
우연히 스쳐 지나가지도 않았을, 남남에 가까운 사람들이 양쪽에 앉아 먹이 찾는 새끼 새마냥 지지배배 대는 상황.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저는 그저 빨리 약지에 피를 통하게 해 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래서 어떻게 결혼하게 된 겁니까?”
내가 갑자기 결혼이라니.
벤자민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닉시를 바라봤다.
‘이봐. 이게 뭔 소리야.’
닉시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찡긋 윙크하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뿌듯해하지 마.’
막힌 건 약지 손의 혈관인데 왜 뒷덜미가 뻐근하게 아파 오는 건지.
무슨 상황인진 여전히 모르겠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허나 정신 나간 이웃의 천방지축 어리둥절한 상황에 휘말려 온 게 어언 반년.
이 정도 위기는 대충 눈치로 때려 맞출 수 있게 된 그였다.
벤자민은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정말 믿기지 않지만, 저가 결혼했다. 정황상 눈앞의 이 제정신 아닌 농부와.
그리고 사람 하나 취조하듯 저를 양옆에 끼고 앉은 이 두 명의 낯선 이들은, 농부와 친분이 있는 사이로 보였다.
이자들은 자신에게 결혼에 관한 정보를 계속 캐묻는다.
이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벤자민은 고갤 들었다.
‘그래. 농부에게 결혼 사기를 당한 전남편과 전전남편이 찾아와 나에게 추궁하는 거로군.’
그는 발전이 전혀 없었다.
“이 마을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벤자민의 태연자약한 첫마디에 콘 샐러드를 먹던 길버트가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떻게 만나게 된 겁니까?”
“우연히 만났습니다.”
“왜 닉을 만나신 거죠.”
“그러게요.”
“어떻게 결혼을 결심하신 거예요?”
“그거야말로…….”
저가 묻고 싶다. 벤자민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동시에 맞은편의 농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빨간 루비 빛 눈은 동정을 호소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마음 같아선 ‘남편이고 뭐고 남남입니다.’ 외치고 집 들어가서 잠이나 자고 싶었다.
치정 싸움에 끼어들어서 좋은 건 하나도 없지 않은가.
허나 그랬다간 이 눈앞의 미친 이웃이 제집 마당을 멸망한 바벨론 제국처럼 만들어 버릴까 두렵기도 했다. 또.
저 눈빛이 부담스러워 미칠 것 같기도 했고.
“…….”
찰나의 귀찮음이냐 영원의 공포냐.
그가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영혼 없이 대답했다.
“반해서요. 제가.”
―쾅!
닉시는 테이블 위에 머리를 처박았다. 바 안에 있던 모두가 화들짝 놀라 닉시의 둥근 뒤통수를 바라봤다.
두개골이 쪼개지는 소리가 들리고도 가만히 있기에 죽었나 싶을 무렵. 그녀는 오뚝이처럼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어, 왜 무슨 일 있어?”
“네 머리에서 피 나는 일.”
제키가 혀를 차며 닉시의 쪼개진 이마에 손수건을 붙였다.
흐응. 길버트는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짓궂은 면이 있는 마을 이장은 이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흔치 않은 상황 아닌가. 불난 집에 부채질할 재밌는 기회.
길버트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와아. 어떻게 반했는데요? 정말 궁금한데요?”
그가 운을 떼어놓자 마을 사람들의 앉은 각도가 그들이 있는 테이블 쪽으로 조금씩 틀어졌다. 라울도 내심 벤자민의 남편 연기가 궁금했던 건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장식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주 작정들 했군.’
그 가지가지한 광경을 알아챈 벤자민이 절로 구겨지는 미간에 힘을 줬다.
살기 바빠서 연인 간의 로맨틱한 상황 같은 건 알지도 못한다. 괜한 거짓말을 한 것 같아 후회가 밀려왔지만 때는 이미 늦은 법.
반할 만한 상황. 반할 만한 상황. 그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집에 데려다주는데.”
시간은 절로 그날, 그 여름밤으로 돌아갔다.
선선히 불어오는 여름밤의 바람. 벗어던진 안대 사이로 들어오던 주홍빛 불빛.
“집 앞에서 잘 가라고 인사하다가 문득…….”
나풀거리며 흩날리는 노란 머리칼과 샐쭉하게 올라가 있는 얄궂은 눈빛. 해바라기 꽃다발 사이에 파묻힌 것 같은 어지러운 광경.
“……집에 보내기 싫었어.”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그러고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주절거린 건가 싶어 퍼뜩 정신 차렸다.
화들짝 고갤 들자 가장 먼저 놀랍다는 얼굴의 길버트와 라울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조용히 측은한 눈빛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장하다, 장해. 그렇게까지 해 주다니. 메소드 연기를 펼친 남자주인공에게 존경을 담아 보내는 박수갈채였다.
“생각보다…… 제정신이시군요…….”
다음으론 전남편과 전전남편.
누가 전이고 전전인진 모르겠지만, 둘의 표정은 꽤 심란해 보였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반했다는 이유가 정상 범주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제키와 필립은 내심 ‘멀쩡한 사람에게 임상 실험을 했다가 실패해서 책임지고 결혼하게 됐다.’ 같은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정상적인 연애결혼이다? 이거야말로 충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론 이 사건의 원인이자 범인.
닉시는 어떤 부분에 놀란 건지 모를 얼굴이었다.
나중에 더럽게 놀려먹겠다 싶은 웃음을 참는 듯한 모습이든지, 닭살 돋는다, 꺼져라 싶은 소름 돋은 표정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너무 순수하게 놀란 얼굴이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벤자민은 닉시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휙 고갤 돌렸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둘이 데이트하시는 건 자주 봤는데. 이야 벤자민 씨, 생각보다 사랑꾼이셨네요.”
“다시 봤어, 벤자민.”
길버트와 라울의 영혼 없는 감상평을 뒤로 닉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이름이 벤자민 씨?”
“정말 빨리도 물어보는군, 제키.”
“하하. 워낙 놀라야 말이지! 이제야 인사드리네요. 저는 제키 마티아스라고 합니다. 닉시의 직장 친구예요!”
제키가 벤자민에게 악수를 청했다. 벤자민이 반사적으로 흉터 가득한 오른손을 들었다.
“벤자민 리히…….”
“벤자민!”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성큼 다가온 닉시가 벤자민에게 와락 안겼다. 갑자기 안겨든 닉시의 무게에 놀라 벤자민이 잠시 굳었다.
주변 사람들은 뜻밖의 애정행각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
“……너.”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야.’
벤자민은 닉시의 대답 없는 뒤통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녀는 뻔뻔하게 자신의 허벅지에 걸터앉아 제 목을 꼭 감아 안고 있었다.
말을 안 하고 이러고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오해하잖아.
“……닉시.” 그가 속삭였지만, 그녀는 유칼립투스 나무에 매달린 코알라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말을 마라.
그는 손을 들어 제 어깨에 고갤 파묻은 그녀의 머리를 토닥였다.
다른 손으론 제키와 악수했다.
“벤자민 리히터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 이름을 불렀던가. 벤자민.
그는 오늘따라 제 이름이 유독 낯간지럽다 생각했다.
“달링. 결혼 선물은 뭘 줄까?”
“음. 고민해 볼게. 얼마까지 돼?”
“달링이 나를 생각하는 만큼?”
“너…… 돈 좀 있니?”
“엄청 많지.”
“그랬지 참. 재수 없는 녀석.”
어느새 부어라 마셔라 자리가 된 테이블은 평소보다 두 배로 시끄러웠다.
자신을 전남편이 아닌 그녀의 직장 동료라 소개한 제키 마티아스는 닉시만큼이나 시끄럽고 호탕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무서워 보이는 첫인상관 달리 낯가림 없이 살가운 타입이었다. 금세 길버트나 라울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놓았고, 이젠 아주 진작 마을 사람이었던 듯이 편하게 떠들고 있었다.
‘직장 동료라면 군인이겠군.’
벤자민은 포크에 만 파스타 면을 관성적으로 입에 넣었다.
사람들은 제키의 말끝마다 묘하게 붙어 있는 군기 섞인 존대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애초에 마을 사람들은 닉시가 군인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남편…… 확실히 가족이 있으면 파리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겠지. 그것도 네가 직접 선택한 가족이면.”
필립이 닉시에게 말했다.
“그치? 내가 설마 논문 쓰기 싫어서 핑계 댔을까 봐?”
“응.”
“사람을 대체 뭘로 보냐. 아무튼, 대령한테 말 잘 좀 해 줘.”
“미안하지만 그건 내 능력 밖이야.”
마찬가지로 조용히 술을 홀짝이는 필립이란 남자도 전전남편이 아니라 똑같이 직장 동료였다.
함께 온 제키와는 달리 차분한 사람이었지만 벤자민은 알 수 있었다. 그는 고요히 침묵하면서 사람들을 뜯어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저는 아마 열여섯 번쯤 뜯어졌다는 것도.
“받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달링. 안 그래도 그동안 모은 돈을 어디다 쓸까 고민 중이었는데, 너한테 통 크게 쏠게!”
“그래? 그럼 나 밭 좀 사 주라.”
“밭? 말만 해! 얼마큼 사 줄까!”
제키가 가슴을 통통 두드렸다. 마을 사람들은 그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허풍이라 여긴 건지 농담이 과하다며 껄껄 웃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거기 닉시 친구! 그렇게 부자라면 우리 집 멜론 좀 사 가게!”
사관학교 시절부터 유례 깊은 명문 귀족 가문이었던 제키 마티아스는 전쟁 후엔 전시에서 활약한 공적으로 벌써 소령을 달고 있는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멜론요? 저 멜론 좋아하는데, 좋아요! 사 가겠습니다!”
제키는 하하 웃으며 품에서 금괴 하나를 턱 꺼냈다.
그녀는 정말 마을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을 만큼 부자였다.
길버트는 주정뱅이 매튜의 작은 눈이 저렇게까지 커질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여름이 거의 다 갔다고 바람에 차가운 습기 냄새가 붙어 있었다.
벤자민은 라울의 바 테라스 기둥에 기대어 서서 술 냄새 섞인 숨을 내쉬었다.
중간에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끝까지 붙잡혀 있었다.
닉시와 닉시의 고향 친구들, 오베르 친구들로 이뤄진 술 파티는 라울이 가게 문을 닫는다고 할 때까지 이뤄졌다. 덕분에 평소 마시던 주량을 넘겨서 어지러웠다.
은근하게 몰려오는 술기운에 벤자민은 뻑뻑한 눈을 비비적거렸다.
“집에 보내기 싫어서 결혼을 결심하셨다니.”
지불을 지폐 대신 금괴로 해치워 버리고 나온 제키가 벤자민이 서 있는 테라스 옆에 섰다.
―칙.
그녀는 윗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럼 나중에 집에 보내고 싶을 때는 이혼하실 겁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죠.”
벤자민은 건성건성 대답했다. 몇 시간 부대꼈다고 어느덧 제키의 짓궂은 농담이 익숙해져 버렸다.
“별이 엄청 많이 보이네요. 시골은 이렇구나.”
뿌연 담배 연기가 새벽 별 맑은 하늘에 흩뿌려졌다.
때마침 닉시가 바닥에서 자고 있던 필립을 짊어지고 나타났다.
“여기 있었네. 제키, 너도 빨리 돌아가. 필립은 이미 잠들었어.”
닉시도 술을 어지간히 많이 마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그래야지. 우리 도련님, 내가 아니면 누가 챙기나.”
제키가 다 피운 꽁초를 재떨이 함에 비벼 껐다.
으쌰. 제키가 필립을 어깨에 둘러멨다.
가게 정리를 돕던 길버트와 라울이 제키와 필립을 배웅하기 위해 가게 밖으로 나왔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라울.”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내일도 오실 거죠?”
“당분간은 계속 올 겁니다. 여기 버터크림 맛이 딱 제 취향이라서요.”
흡족한 식사와 흡족한 대가. 서로 윈윈 하는 사이가 된 제키와 라울이 뜨거운 우정의 악수를 나눴다.
닉시가 크게 하품하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낼 또 보든지 말든지.”
“아. 닉시.”
“왜.”
“나 내일 너희 신혼집 가 봐도 돼?”
뭐? 제키와 필립을 배웅하던 네 명의 오베르 사람들이 속으로 외쳤다.
그때, 짐짝처럼 들려있던 필립이 고갤 들었다. 초점 맞지 않는 푸른 눈동자가 희번뜩 빛나고 있었다.
“집에 보내기 싫어서 결혼했다니, 당연히 같이 살고 있단 거잖아.”
“안 그런가? 닉.” 필립의 동공 풀린 서늘한 대답에 닉시가 반사적으로 고갤 끄덕였다.
“그럼 정해졌네! 내일은 너희 집에 집들이나 가야겠다. 일어나자마자 찾아갈게, 달링!”
“그, 그게 과연 좋은 선택일까? 응? 오베르엔 우리 집 말고도 좋은 관광지가 얼마나 많은데? 집구석에서 지겨운 내 얼굴이나 또 보는 것보다 차라리 저기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보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심신의 안정도 찾고?”
“맞아요, 여러분. 저희 오베르에 관광지가 여러 곳 있는데, 내일 괜찮으시다면 제가 가이드해 드릴게요.”
마을의 안녕을 책임진 길버트와 마음의 안정이 필요한 닉시.
그들이 최선을 다해 없는 신혼집을 사수했다.
“우리 집 청소도 안 해서 더러워! 너 기억나지? 내 연구실?”
닉시의 말에 제키가 곰팡이 핀 양말 냄새 맡은 얼굴을 했다.
“어…….”
“그러니까 청소도 해야 하고! 우리 집은 누구한테 보여 줄 게 못 돼!”
“뭐, 알았어.”
휴우, 닉시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
“그럼 관광지부터 본 다음에 저녁에 찾아가면 되겠다! 그 정도면 청소할 시간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