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7_3
눈치 없는 제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어? 야, 야! 잠깐 제키!”
“그럼 내일 보자고 달링~!”
제키는 벌써 저만치 멀리 떨어져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남겨진 닉시의 낯빛이 점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저녁에 온다고? 신혼집에?’
저녁까지 남은 시간은 열일곱 시간.
‘그런 거 없는데?!’
그 시간 안에 신혼집을 만들어야 했다.
* * *
분명 집에 가려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벤자민은 닉시의 집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꿈인가 싶어 눈까지 비볐지만 모두 현실이었다.
“화가! 다락방 창고에 베개 하나 더 있으니까, 그것 좀 가져와 봐!”
“……”
“이따 해 뜨면 네 집에서 칫솔이랑 컵이랑, 네가 쓰는 식기도 하나씩 가져 와! 참, 신발이랑 옷가지도!”
“……”
그가 꿈인지 현실인지를 가늠하고 있든지 말든지 닉시는 집 짓는 꿀벌처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제한 시간은 16시간 35분.
그 시간 동안 단란한 신혼의 허니 하우스를 꾸며야 했다.
닉시는 어디서 꺼내 온 건지 모를 분홍색 천으로 하트를 만들어 벽에 붙였다. 천이 묘하게 번들거려서 저질스러운 러브하우스 같았다.
“어때 화가! 이 이불, 신혼부부가 쓸 것 같냐!” 그녀가 기묘한 빨간색 천을 들어 보였다.
꼭 스트립쇼 하는 배우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두르는 천 같았다.
“전혀. 투우장에서나 쓰겠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벤자민이 중얼거렸다.
“그럼 두 명이 쓸 법한 이불이…….”
그렇게 닉시는 집 안 구석구석, 이불로 쓸 법한 모든 천을 긁어모았다.
이건 어때! 죽을 때 덮는 건가? 그럼 이건? 애완용 강아지 애착 이불 같아. 이거 딱이지? 그거 커튼 아닌가?
신혼부부의 이불을 골라라 왕중왕전 중, 겨우겨우 한 이불이 우승을 차지했다.
에스틱한 기하학무늬 천이 침대에 펼쳐졌다.
닉시가 손을 탁탁 털며 뿌듯한 얼굴로 물었다.
“어때. 신혼집 같아?”
벤자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 녀석 집에 온 이유가 신혼집인지 뭐지 때문이라고?
근데 그건 둘째 치고.
“……이제 네 친구들도 없으니 말해 봐. 내가 왜 네 남편이 돼 있는 거지?”
그는 이 말 같잖은 상황의 원흉이 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으게 말이지……!”
닉시는 벤자민을 침대에 앉힌 뒤, 그동안 있었던 일을 토로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재입대하게 됐다. 근데 끌려가기 싫어서 ‘결혼해서 못 간다!’라고 버텼다. 남편은 누구냐고?
“그때 타이밍 좋게 네가 반지를 끼고 나타났거든! 공중제비하면서 봐도 네가 남편이라 할 타이밍이었지!”
그의 약지에 낀 저주의 반지가 반짝였다.
‘그러니까 이 반지 때문에 이 사달이 났다고.’
재입대를 피하고 싶은 건, 한때 군인이었던 그도 이해한다.
백번 양보해서 저를 유부남으로 만든 것도 이해한다.
근데 한 가지 불안한 게 있었다.
“……그럼, 언제까지 이 촌극을 계속해야 하는데.”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혼란스러운 그녀의 집을 둘러보았다.
닉시의 집은 원래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난리였다.
벽면에 붙어 있는 조잡한 아이 러브 유 마킹. 보기만 해도 열받는 색 배치의 하트 갈런드.
사람의 미적 취향을 의심하게 되는 알록달록한 가구들. 수도승의 담요를 빼앗아 온 것 같은 이불은 또 어떻고.
테이블 위엔 인테리어랍시고 실험용 이구아나가 박제돼 있었다.
하나같이 문제가 아닌 게 없었다.
근데 가장 큰 문제는, 이 사태를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 문제인 걸 모른다는 부분이었다.
“그게 말이지……. 아무래도 그 녀석들이 파리로 돌아갈 때까지는 연기를 계속해야 할 것 같은데…….”
“언제 돌아가는데.”
그는 등골이 서늘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닉시는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그가 원하는 대답은 한 시간이었으나.
‘아니, 양심이 있으니 하루. 아냐, 이 불안한 느낌은 일주일? 열흘?’
닉시가 입을 열었다.
“한 달.”
“…….”
“놀라서 굳은 거 아니지?”
“…….”
“저, 화가?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게 더 무섭거든? 차라리 욕이라도 해 줄래?”
“그냥 재입대하지 그래.”
“……차라리 욕을 해 줄래?”
한 달? 한 달씩이나 이 연극에 어울려 줘야 한다고? 생각만 해도 아득했다.
본인의 미래 중 가장 최선의 미래를 가정하던 그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리곤 멈칫했다.
“잠깐. 너 나를 네 집으로 데려온 이유가 뭐였지?”
“어? 그거야 신혼부부를 연기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신혼부부 연기를 하고 있으니까. 이 집을 신혼부부가 사는 집처럼 꾸며야 하니까.
그렇단 말은 이 끔찍하고 혼란스러운 인테리어를 한 달 동안 봐야 한다는 거고.
“설마 내가 여기서 한 달 동안 살아야 한단 말은 아니겠지?”
닉시는 측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 대답 없음에서 진짜 답이 없음을 깨달았다.
벤자민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닉시는 반쯤 생각을 포기한 벤자민을 위로하듯 어깨동무했다.
“화가. 이건 따지고 보면 다 예견된 비극인 거야. 이 비극이 일어난 덴, 네 책임도 2할 있다고.”
그리곤 기세등등하게 엄지로 본인을 가리켰다.
“물론 나머지 8할은 내 책임.”
사고를 쳐 놓은 당사자가 뻔뻔하니, 대체 뭐라 따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내 책임이 대체 왜 있는 건데.”
저는 그냥 조용히 잘살고 있었을 뿐인데.
먼저 들이박아 놓은 건 저면서, 왜 거기 조용히 살고 있었냐! 떵떵거리는 꼴이다.
“내가 너한테 의뢰한 그림, 그걸 주려 했던 사람이 저 둘이거든? 작업이 한 달만 일찍 끝났어도, 쟤네가 오베르까지 쳐들어오진 않았을 거야.”
“누가 보면 내가 네게 작업 의뢰를 해 달라 절한 줄 알겠군.”
“물론 절은 내가 했지! 죄송합니다!”
그녀는 넙죽 고갤 숙였다.
“근데 화가, 너랑 내가 했던 거래 기억나?”
“거래?”
[엠마오의 그리스도를 보여 줘.]“루보스 박물관에 가게 해 달라 했던 거 말이야. 사실 쟤네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거든.”
제키 마티아스와 필립 휴거의 상관인 클레망 아서 대령은 미술을 광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자랑과 아는 척을 좋아하는 그의 상관이 가장 부티 나게 자랑할 수 있는 게 미술이었으니.
대령은 군사 통솔 능력이 뛰어났는데, 유감스럽게 양심이 없었다.
그래서 각국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철수하기 전, 그 나라의 미술과 관련된 것들을 알뜰하게 긁어모아 갔다.
말이 좋아야 전리품이었지, 사실상 도굴꾼이었다.
그런 양심 없는 대령이 총애하는 부하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필립이었다.
즉, 루보스 박물관의 관계자 출입 여부는 필립에게 달렸단 말이다.
“이 연기를 잘만 끝나면 루보스 박물관에 공짜로 들어갈 수 있다고……! 네가 보여 달라 했던 그림 하나만이 아니라, 네가 좋아했던 화가 컬렉션을 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야.”
그의 손이 멈칫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꽤 긴 침묵을 이어가던 벤자민이 한참 뒤에야 고갤 들었다.
“……다른 건 필요 없어. 그 그림만 볼 수 있으면 돼.”
“그렇다는 말은……?”
그는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한 달.
결코 짧다고 말할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도 긴 시간이고, 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지옥의 광대놀음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붉게 물든 과거 속, 코가 시리던 겨울.
그는 나무 탄내 가득한 성당 앞에서 봤던 그 광경을 떠올렸다.
‘그걸……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래.”
“화가?”
그가 결심한 듯 고갤 끄덕였다.
“그래. 어울려 주겠다고.”
* * *
대신 이런 집에선 절대 안 산다. 아니, 정신병 걸려서 못 산다!
미적 감각에 까다로운 화가는 그렇게 선포했다.
그래서 이른 새벽 즈음. 그가 생활용품과 옷가지들을 가지러 간 사이에, 닉시는 길버트와 비티를 집에 불렀다.
이름하야, 미션.
“어서 와 길, 비티. 준비는 됐어?”
“물론이지.”
“그럼요!”
비장한 미션 이름처럼 길버트와 비티는 옆구리에 연장을 하나씩을 끼고 있었다.
길버트는 제 동생이 좋아했던 핑크색, 붉은색 계통의 천들과 스무 살 이상 먹고 쓰기엔 부끄러운 귀여운 장식을 잔뜩 들고 왔고, 비티는 자신의 회심작 ‘침실 가구 세트’를 들고 왔다.
그들이 이 많은 것들을 다 어떻게 짊어지고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단지 닉시는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우정에 눈물을 훔칠 뿐이었다.
“다 해서 칠백 유로예요, 닉시.”
물론 그 눈물은 해맑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비티 앞에서 깡그리 증발해 버렸지만.
몇 시간 뒤. 길버트와 비티의 노력으로 집은 제법 ‘신혼’에 어울리는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
화가가 단출한 본인의 물품 몇 개를 들고 왔을 즈음엔 그도 타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화가는 사람 사는 집처럼 꾸며진 방 안을 둘러보았다.
비티가 어마어마한 근육으로 들고 온, 킹사이즈 오크 침대.
옻칠한 조립식 소파에는 길버트가 들고 온 흰색의 쿠션이.
테이블 위엔 이구아나 박제 대신 꽃병과 들꽃이 올라가 있었고, 바닥엔 푹신한 러그가 깔렸다.
전체적으로 연한 꽃잎 색으로 꾸며진 집이 되었다. 거기에 구석구석 벤자민의 생필품을 채워 넣으니 제법 신혼다워 보였다.
“후우. 아주 감쪽같아.”
닉시는 침대였던 나무 조각들을 벽난로 안에 집어넣었다.
벤자민은 천장에 매달린 귀여운 유니콘 모빌을 툭 건드렸다. 짤랑하고 맑은 소리가 들렸다.
“어때 화가, 이제 앞으로 우리가 같이 살 집이야!”
무릎에 닿는 작은 탁자와 침대 등불.
벽난로 위엔 닉시가 언젠가 샀던 라일락 그림이 걸려 있었다.
구석구석 사소한 것들로 꽉 채워진 집이었다.
‘꽤 집다워졌군.’
넓은 오두막에 테이블과 이젤이 전부였던 그의 집과는 확연히 달랐다.
“……한 달간 말이지.”
그는 문득 이상했다. 먹은 게 없었는데, 속이 차서 더부룩한 느낌.
“화가 이리 와 봐.”
닉시가 멍하니 있는 벤자민의 손을 이끌고 테이블에 앉혔다.
테이블 위엔 종이 한 장과 두 개의 펜이 놓여 있었다.
“우리가 어쨌든 함께 살게 됐잖아. 그러니까 몇 가지 규칙을 정했으면 좋겠단 말이야?”
그녀가 내민 것은 계약서였다.
“난 이미 적어 뒀어. 읽어보고 싫은 건 우리 잘 합의해 보자고! 물론 네가 적고 싶은 게 있으면 여기 밑에 적으면 돼.”
그는 종이를 부스럭거리며 펼쳤다.
“부부의 의무는…… 뭔데.”
벤자민이 꺼림칙한 것을 입에 올리듯 중얼거렸다.
“간단해. 첫째, 서로에게 종속되었음을 이해하는 것. 둘째, 서로에게 간섭할 수 있음을 인지하는 것. 셋째, 세상을 적으로 돌려도 서로만은 서로의 편이 되어 주는 것이야.”
의외로 정상적인 말이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공연히 곱씹었다.
서로만은 서로의 편.
사기극을 위한 조항이라는 걸 알면서도 제법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
연기인 걸 알아도 모른 척 믿어 보고 싶은 그런 상냥한 거짓말.
그 뒤론 별거 없었다.
그녀가 그에게 숙식을 제공한다는 것과 저녁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 이외의 시간은 굳이 집에 함께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 연극에 어울려 준 보상으로 그녀는 그에게 파리로 가는 차편과 루보스 박물관의 입장권을 지급한다.
“더 추가할 거 있어?”
벤자민은 마지막 줄에서 펜을 톡톡 두드렸다.
그는 한 가지 사항을 적어 내려갔다.
“그럼, 그럼. 그렇지 않아도 침구를 따로 준비했지! 이번에 새로 장만한 소파, 푹신해서 자기 좋을 거야.”
“…….”
“…….”
“…….”
“그럼, 그럼. 당연히 내가 소파에서 자야지.”
닉시가 종이를 반듯하게 접었다.
솔향기가 나는 실링 왁스에 닉시의 서명 박힌 도장이 꾹 찍혔다.
예쁘게 포장된 계약서는 귀중품을 보관하는 작은 상자에 들어갔다.
“아, 계약서엔 안 넣었지만,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자물쇠까지 꼼꼼히 챙긴 닉시가 빙긋 웃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우린 다시 친구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알지? 그러니까 나한테 반하면 안 돼! 반하면 지는 거야!”
하. 화가는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내뱉었다.
“세상이 두 쪽 나도 너한테 반할 일은 없어.”
* * *
닉시와 벤자민이 결혼 계약서를 두고 옥신각신하던 때와 비슷한 시각.
길버트 그레이스는 마을에 머물게 된 관광객들에게 마을을 소개하고 있었다.
오베르의 특산물인 말린 크랜베리가 들어간 떡을 쥐여 주고, 개울물이 흐르는 변두리부터 관광 가이드를 시작했다.
오베르의 자랑인 밀밭.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아주 작은 교회. 흰 돌길. 언덕길을 지나 체리 나무가 있는 쉼터.
한 시간쯤 가이드해 본 소감으로, 관광객은 두 유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상인, 교수, 연구원처럼 어딜 가든 고갤 끄덕이며, 체리 나무 이름 유래까지 메모하는 모범생 유형.
제키와 필립처럼 말 안 듣고 이리저리 튀어 다니는 문제아 유형.
“이 포도나무밭은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큰 부지예요. 곧 가지치기 시즌이라 되게 바쁘시죠. 저기 마티아스 씨, 그런 걸 서리라고 하는 거예요.”
제키가 막 포도 하나를 입에 넣고 있었다. 그녀는 벌금으로 포도나무에 5유로를 매달아 놓았다.
“작은 시골 마을이래서 밭도 작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밀밭도 그렇고 포도나무밭도 무척 넓군요.”
“그렇죠. 다른 마을보다 평야가 넓은 편이라 그래요.”
그래서 폭격이 그렇게 많았던 거고. 길버트가 생각했다.
길버트는 문제아 제키, 필립의 손을 잡고 다음 장소로 향했다.
마을은 대충 다 둘러보았지만 닉시의 집들이를 할 때까진 아직 애매하게 시간이 남아 있었다.
옥수수밭에서 벌레 잡기 체험은 벌써 두 번 우려먹었으니 써먹을 수 없고. 밀밭에서 생밀을 껌처럼 씹어 보기도 한 번 했고. 웬만한 곳은 다 돌아봤다.
그럼 남은 게 뭐 있더라.
‘참. 거기가 있었지.’
“마지막으로 안내해 드릴 곳이 있어요. 재미없을지도 모르지만.”
오베르에서 가장 넓은 들판이 있는 곳. 동시에 5년 전 폭격으로 일대가 날아가 버린 곳. 그날 이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곳.
제비꽃밭이 아름다웠던 그곳으로 길버트는 걸음을 옮겼다.
“흐음. 아무것도 없는데.”
제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산을 응시했다.
마을 이장이 경고했던 것처럼 확실히 재미없었다.
그저 메마른 잔디가 뒹굴고 있고, 군데군데 움푹 팬 흔적만 가득한 별 볼 일 없는 땅뿐.
“이 넓은 땅은 빈 땅이오?”
콧수염을 기른 연구원, 그렉이 물었다.
길버트는 바닥에서 작은 풀 무더기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 여긴 오래전 폭격이 있었던 곳이거든요. 지금은 빈 땅이에요.”
길버트가 마지막으로 본 이곳은 황폐했던 대지였다.
기억 속에 묻어 두고 지낸 사이, 소담하게 푸른 너울을 이루고 있었다.
늦여름이라 제비꽃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쩌면.
“내년에는 꽃이 피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옛날만큼은 아니더라도 보랏빛 꽃을 볼 수도 있겠다. 이장은 손을 탁탁 털며 일어났다.
“그럼 관광은 여기서 마칠게요. 슬슬 돌아갈까요?”
모범생 관광객 로버트 교수가 ‘내년엔 꽃을 볼 수 있음.’ 수첩에 짤막이 메모했다.
* * *
“이건 어디 두라고?”
벤자민이 잡동사니 상자에서 램프를 꺼냈다.
“현관 앞, 못 박힌 곳 있잖아! 거기에 걸어 줘.”
닉시와 벤자민은 남은 잡동사니들을 집 안 구석구석 배치하기 바빴다.
두 사람의 사는 흔적이 있어야 하니, 손에 닿는 곳에 옷걸이나 거울, 덜 챙긴 양말들을 늘어놓았다.
벤자민은 그녀의 말대로 램프를 현관 옆, 나무 기둥에 걸었다.
평소였으면 모양새는 신경도 안 썼을 것을 공연히 수평이 맞게 걸린 건지, 보기에 어색하지 않은지 두 번 세 번 봤다. 이러면 예쁘려나. 꼭 둥지를 꾸미기 위해 깃털을 꽂았다 뽑았다 신경 쓰는 새처럼.
세 번쯤 램프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문득 저가 꼭 소꿉장난에 들뜬 세 살배기 같음을 깨닫고 끙 앓는 소릴 냈다.
“화가, 이거랑 이거. 둘 중에 어느 게 좋아?”
닉시가 하늘거리는 옷을 몇 벌 들고 왔다.
“이건 좀 오래전에 산 거라 유행이 지난 거고, 이건 헬렌이 이제 사이즈가 안 맞는다고 준 거라 내 취향은 아냐.”
연한 녹색 긴 치마와 쨍한 다홍빛의 레이스 달린 치마.
그녀는 뭘 입고 집들이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옷들을 제 몸에 대 보았다.
“이건 어때? 너무 농부 같아 보이나?”
물 빠진 청색의 멜빵바지. 집들이 의상으론 그건 좀. 벤자민이 고갤 끄덕였다.
닉시가 간신히 청소해 둔 바닥 위로 옷들을 휙휙 늘어놓았다.
그는 그녀의 뒤를 쫓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주워 담았다. 그 사이로 늦여름의 하늘같이 짙푸른 빛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소매 없이 어깨끈만 있는 하늘하늘한 옷이었다.
그는 그 얇은 옷가지를 주워다 닉시에게 툭 건넸다.
“넌 이런 색이 더 잘 어울려.”
“이거 슬립인데.”
“……젠장.”
아무거나 주워 입어. 그가 꿍얼거렸다.
“그래도 네가 골라 준 거니 이거 입을까? 위에 얇은 겉옷 하나 걸치면 아무도 속옷이란 거 모를 거야.”
“그런 걸 왜 몰라.”
“너도 몰랐으면서.”
어울린다는 말이 꽤 기분 좋았는지 그녀는 푸른 물빛의 슬립을 몸에 대고 빙글빙글 돌았다.
하지만 그의 타박에 못 이겨 그녀는 결국 무난한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닉시는 원피스 리본 끈을 벤자민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 참. 버드나무 껍질 담금주도 꺼내야겠다. 봄 축제 때 사놨던 건데, 너무 써서 못 먹고 있었어! 안주로는 감자 샐러드랑 토마토 샐러드 어때? 쓴맛에 샐러드가 어울리려나.”
“찬 음식보다 따뜻한 게 있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난 샐러드 말고 다른 건 아직 못 만드는데.”
그는 허리끈을 받아 들고 닉시의 허리를 빙 둘러 리본 모양으로 묶었다. 힘 조절에 실패해 닉시가 밥 먹으면 허리띠가 끊어지겠다 잔소리한 건 덤이었다.
“그런 거쯤은 네 맘대로 해.”
“그래도. 같이 해야지.”
이미 답을 정해 놓곤 ‘같이’라니. 그런 일방적인 의견 논쟁이 뭐가 중요하다고.
그가 삐딱하게 서 있자 닉시가 표정 풀라는 듯 그의 팔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이제 넌 내 남편이잖아. 그러니 같이해야지.”
그의 내리깔고 있던 눈이 설핏 가늘어졌다.
새삼 본인이 누군가에게 귀속되었단 사실을 실감했다. 한 달 임시지만.
“……따뜻한 건 하나 있는 게 좋아. 창고에 감자나 토마토가 있으니까 그거로 스튜라도 만들면.”
“나 불로 만드는 요리 못한다니까? 열심히 꾸민 집 다 태워 먹을지도 모른다구.”
“누가 너한테 시킨대?”
“그럼 누가 해?”
귀속. 그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외딴섬 하나밖에 없는 망망대해에서 개 한 마리를 주워 온 느낌.
“네 남편이 하겠지.”
알고 보니 그 개가 본인인 것 같은, 자존심 상하는데, 또 그게 마냥 싫지만은 않은. 그런 기분.
소매를 걷어 감자를 씻는 벤자민을 보고 닉시가 비죽 웃었다.
“그럼 설거지는 내가 해 주지! 더러운 걸 깨끗하게 치워 버리는 건 내 특기니까. 뭐 더 도와줄 거 있어? 응?”
포함된다, 누군가에게 속했다는 말은 꼭 울타리 같아서 괜히 다리를 뻗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평생 다르게 살아왔던 사람과 부대끼고 지내야 한다는 낯선 환경에서도, 왠지 모르게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지 않던가.
“요리는 됐으니까, 감자 껍질 깎아.”
“네, 셰프!”
물론 연극이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귀찮은 부담감은 여전했지만. 아,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기묘한 무게감도. 아무런 불행도 일어나지 않을 행복한 가족을 연기하는 것도.
하지만 그에게는 익숙한 짓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짓.
* * *
드디어 예정된 시간이 돌아왔다. 시간 하나는 칼같이 지키는 군인 제키와 필립은 저녁 7시 정각에 맞춰 닉시의 집 문을 두드렸다.
“어서 와!”
자자, 안으로 들어와! 낭랑한 닉시의 안내에 따라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집이 집보다는 실험실이나 쓰레기장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했던 그들은, 내심 놀람을 금치 못했다.
“사람 사는 집이잖아……?”
“여긴 거실이고 여긴 침실. 부엌은 안쪽에 있어!”
넓은 거실엔 도톰한 카펫이 깔려 있었고 적당한 높이의 테이블과 흔들의자가.
침실이라 말한 방 안엔 두 명 눕고 자기 편한 침대와 기름 등불이.
부엌은 크기 다른 식기들이 짝꿍이랍시고 나란히 진열돼 있었다.
“필립. 봐 봐. 왜 사람 사는 집 같지?”
“이상하군.”
“칫솔 그만 보고 빨리 와.”
그래도 집들이라고 테이블엔 향긋한 술과 자잘한 핑거푸드들이 차려져 있었다.
사람이 먹는 음식이었다.
“닉. 이거 먹어도 되는 거지?”
“응 내가 만들었어. 이 스튜는 화…… 벤자민이 만들었고.”
“이 부르스케타도? 이 술도?”
“아니, 그것도 벤자민이. 술은 라울한테 받았어.”
“……그럼 네가 만든 건 뭐야.”
“눈치 빠른 녀석……. 그래. 내가 만든 건 샐러드뿐이다.”
필립과 닉시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으며 제키가 의자에 몸을 묻었다.
평생 ‘쟤는 어떻게 세상사려나’에 ‘쟤’를 맡고 있던 닉시였다.
친구니까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살아도 ‘어휴 미친놈 가지가지 한다.’ 하고 말았지.
결혼하면 철든다, 사람이 바뀐다 말만 들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사람이 바뀔 수 있는 거였구나. 제키는 새삼 놀라웠다.
제키는 옆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는 벤자민을 콕 찔렀다.
“이렇게까지 정상으로 살 줄은……. 혹시 이 녀석을 개조시키셨나요? 그게 아니곤 말이 안 되는데.”
“내가 기계냐?”
“아니 달링, 들어 봐. 난 네가 이렇게까지 철들 줄은 몰랐어. 이건 사람이 돌아버린 수준이잖아. 저 벤자민 씨. 혹시 자다가 암살당할 뻔한 적은 없고요? 달링 잠버릇 고약한데.”
행복하길 바랐지만 본인들 없이 이렇게까지 행복한 걸 바라진 않았다!
“혼자만 행복해지다니, 비겁한 달링.”
제키와 닉시가 투닥이기 시작했다.
느슨하게 풀린 분위기 속에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그중 대부분은 가짜 결혼에 대한 질의응답들이었다.
“달링이랑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벤자민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 침묵에 제 발 저린 닉시의 입이 바싹 말라왔다.
모른다. 이제 귀찮다. 못 해 먹겠다. 이런 말만 아니면 된다. 저가 하늘에서 떨어졌든 바다에서 밀려왔든 무슨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해도 되니 제발!
“닉시가 처음 이사 온 날, 마을 회관 근처에서 만났습니다.”
마을 회관 옆옆, 길버트네 집 앞.
길버트에게서 이불을 받으려고 기다리다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는 길을 가던 사람과 부딪혔다.
[비켜.]그게 화가였다.
‘뭐야. 기억하고 있었네?’
그 직후 말 한마디 안 섞고 바로 스쳐 지나갔기에 잊고 있을 줄 알았다.
“캔버스를 들고 있어서 못 보고 부딪혔었죠.”
‘……먼저 부딪혀놓고 나보고 비키라 성낸 거야?’
“캔버스? 아, 그러고 보니 그림을 그리신다고 하셨죠.”
“……그냥 취미입니다.”
그 뒤로 이어진 제키와 필립의 깐깐한 질문 세례에도 벤자민은 꽤 인내심 있게 대답했다.
농부는 아니고 번역 일을 하고 있다. 부모님은 오래전 행방불명되셨고,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병으로 세상을 떴다.
취미는 그림 외에 딱히 없고, 좋아하는 건 의외로 당근 요리. 그중에 생크림을 듬뿍 넣은 당근 수프를 좋아한단다.
요즘 자주 먹는 건 버섯과 채소를 넣은 오믈렛. 싫어하는 건 닉시가 뜬금없이 저지르는 모든 사건. 이 부분에서 제키와 필립이 이해한다며 크게 고갤 끄덕였다.
단맛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체리 병조림 같은 과일 설탕 절임은 또 좋아한단다.
“그럼 왜 커피는 맨날 설탕도 안 탄 것만 먹어?”
“커피엔 뭐 타는 거 싫어해.”
여태껏 닉시가 그와 지내면서 알게 된 정보보다 지금 알게 된 것들이 훨씬 많았다. 제가 친해지려고 물어봤을 땐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으면서!
“참나. 까탈스럽긴.”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들한테 이렇게 평범하게 알려 줄 거였으면 저한텐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굴었던 건지.
그건 이상하게도 닉시의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이거 그런 기분인데. 뭐였더라.’
그래. 밥 주던 길고양이가 저 말고 다른 사람 발에 머리를 콩 하고 박는 모습을 본 기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질투 나는데 달링.”
“배신가…… 질투?”
닉시가 눈을 깜빡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의 이름이었다.
“이렇게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한 하루하루를 즐기고 있다니. 너만 행복한 것 같아서 아주 질투나.”
제키가 닉시의 코를 꼬집었다. 질투라고, 이게?
‘배신감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면 원망과 절규. 닉시는 빨개진 코를 문질렀다.
밤이 적당히 깊어지고, 시시콜콜한 대화들로 서로에 대한 공백들이 채워졌을 무렵 제키와 필립이 자리를 일어났다.
“밤도 늦었는데. 그럼 이제 들어가 볼게.”
“벌써 가게?”
“남의 집에 늦게 있는 것도 실례야.”
“네가 실례도 다 알아?”
“진짜 실례가 뭔지 보여 줘?”
제키가 닉시의 머리통에 헤드록을 걸었다. 벤자민은 인고의 시간이 드디어 끝났음에 반가움을 꾹 눌러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결혼식을 못 본 건 너무 아쉽네. 혹시 결혼 파티 같은 거 할 생각 없어?”
“그런 걸 왜 해. 결혼이 무슨 올림픽 금메달이야? 맨날 자랑하고 다니게?”
“그래도.”
“응, 나중에 하자~”
닉시가 아쉬워하는 제키를 현관 밖으로 밀어냈다. 제키는 여전히 섭섭하단 표정이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구.”
현관 앞까지 쪼르르 나온 닉시가 손을 흔들었다.
필립은 현관 카펫의 불룩 튀어나온 부분을 툭툭 건드리다 고갤 들었다.
“닉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 걱정이 많았는데, 당신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다행입니다.”
좋은 사람이라. 벤자민은 그냥 고갤 끄덕였다.
“맞아. 달링, 이 녀석. 손버릇이나 잠버릇도 요상하고 말이야. 뭐, 벤자민 씨가 더 잘 아실 테지만. 이젠 저희가 유난일 필요가 없겠네요.”
제키와 필립은 말은 제법 후련하다는 듯 내뱉으면서, 마치 자식이 출가한 뒤 쓸쓸한 노부부의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그 아련한 표정을 보다 못한 벤자민이 “걱정은 계속하셔도 됩니다.”라며 말을 얹었다.
“벤자민 씨.”
필립이 그를 불러세웠다. 그리곤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누나를 잘 부탁합니다.”
누나? 벤자민은 묘하게 무게감 실려 있는 그 단어에 의아해하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누군가를 마중할 때 하는 상투적인 ‘조심해서 가’, ‘안녕’ 같은 대화를 몇 번 더 건넨 뒤, 그들은 드디어 현관문을 닫을 수 있었다.
“으아아.”
그녀는 물러터진 젤리처럼 흐물거리는 몸을 이끌고 소파에 엎어졌다.
혹시라도 연기했다는 게 들킬까 봐 바짝 긴장하고 있어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던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끽해봐야 제키가 가져온 선물이 고구마말랭이였다는 것?
“씻고 누워.”
벤자민은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접시를 주워들으며 말했다.
집 안에 뭔가 늘어놓는 꼴을 못 보는 건지, 그는 손님이 나가자마자 어질러진 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꽤 괜찮은데? 청소 로봇 같고.’
이미 닉시는 소파와 한 몸이 된 지 오래였다.
주둥이 나불댈 힘은 있어도 발가락 까딱할 힘은 없었다.
“……이봐, 눈 감지 말고.”
급기야 그녀는 고갤 파묻었다.
“어어. 알았어.”
전혀 알지 않은 것 같지만.
그녀의 맥없는 목소리가 소파 쿠션 아래로 스며들었다.
벤자민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는 오늘 하루치 대화 허용량을 넘어서 한 달 치를 끌어다 썼다. 그건 일주일을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간신히 회복할 수 있는 에너지였다.
고로 그는 괜한 말다툼으로 에너지를 낭비하기 싫었다.
그는 그대로 닉시를 안아 들었다.
몸이 붕 뜨는 느낌에 그녀가 반짝 눈을 떴다.
깜빡. 그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에너지 절약 모드에 들어간 그나, 졸음기를 몰아내고 싶지 않은 그녀. 그들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거실을 지나 어둑한 복도. 안쪽 문을 열자 침실이었다.
“이거 되게 그거 같다.”
“뭐.”
“첫날밤에 남자 주인공이랑 여자 주인공이 눈 맞아서 침실로…… 왁!”
―덜컹!
벤자민은 그대로 닉시를 침대에 던져놓고 문을 닫았다.
쾅 닫아버린 문 뒤로 잠기운이 달아난 그녀가 왁왁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비척비척 복도를 걸어갔다.
마저 테이블을 치우고 술의 쌉싸래한 향기가 빠져나가도록 창문을 열었다.
[누나를 잘 부탁합니다.]‘누나라. 형제인가.’
제집 창가에서 들리는 어슴푸레한 파도 소리와 달리 풀들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아니지. 형제가 있단 소리는 들은 적 없으니까.’
유화 물감 냄새가 아닌, 농장 특유의 흙냄새.
텅텅 비어서 작은 움직임에도 메아리가 생기는 집이 아닌, 구석구석까지 자질구레한 것들로 가득 채워진 낯선 집.
‘그냥 직장 동료끼리 누이 동생 할 정도로 친해서 한 말?’
낯선 공간. 낯선 이.
탁, 탁. 그는 들고 있는 약병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이윽고 그는 생각을 관두기로 했다.
‘내가 이런 걸 왜 생각하는 거지.’
진짜 사랑하는 사이도 아닌데.
생각을 관두고 소파에 앉아 몸을 뉘었다. 낯선 곳에 있으면 절로 긴장하는 몸이 이상하게 나른히 풀려 있었다. 오늘 꽤 피곤했음을 느끼며 눈을 살포시 감았다.
―끼익.
그때, 문 열리는 소리에 그는 다시 눈을 떴다.
“화가. 네가 침실에서 잔다며.”
닉시는 제 몫의 침구를 한가득 껴안은 채 서 있었다.
“……됐어. 푹신하면 잠이 안 와.”
“아하. 그래서 그동안 땅바닥에서 잤던 거구만.”
그녀는 들고 있던 침구를 소파 위에 와르르 쏟아 냈다.
“나야 좋지. 실은 소파에서 자면 자다가 떨어질 것 같아서 걱정했거든.”
이제 보니 그녀가 입고 있는 잠옷은 소매 없이 어깨끈만 있는 하늘하늘한 슬립이었다. 그가 어울린다고 했던.
“내가 잠버릇이 좀 나빠서.”
그는 괜스레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 계속 보고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계속 보고 있으면 뭔가…… 더 이상해질 것 같아서.
“오. 벌써 다 치웠어? 성능 괜찮네! 벤자민 로봇.”
그녀가 호쾌하게 웃으며 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욕실은 어딘지 알지? 수건은 바구니 안에 있어.”
언제 씻고 나온 건지 젖어 있는 노란 앞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저가 자주 쓰는 나무 향과는 거리가 먼 시트러스 향이 났다. 온갖 상큼한 것들을 모아 놓은 듯 달콤한 향.
멀미가 났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단 건 둘째치고, 저한테 그런 향이 나게 될 걸 생각만 해도.
그녀와 그가 같은 향을 가지게 될 것도. 나아가 며칠 뒤면 그게 익숙해져 버릴 것도.
“……들어가서 자.”
“네, 네. 오늘 고생했어, 친구.”
남의 속도 모르고 닉시는 태연히 주먹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의 주먹에 가볍게 쥔 손을 부딪쳤다. 이런 걸 해 달라 어필하면 해 주기 전까진 꼼짝도 안 할 고집쟁이니까.
잘 자라는 어색한 인사 뒤로 그는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코끝에 달콤한 향기가 없어질 때쯤, 그는 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내일은 꼭 집에서 쓰는 비누를 가져와야겠다고.
밤이 깊어가도록 익숙잖은 잠자리에 뒤척이던 그는 느지막한 새벽 즈음에야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삐걱.
나무 바닥에서 울리는 작은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원체 불면증이 있어 잠을 얕게 잘 수밖에 없는데 귀까지 밝은 편이었다.
벤자민은 얇은 이불을 들추고 제 단잠을 깨운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
“…….”
닉시였다.
“뭐 하는 거야?”
그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들리지 않았던 건지, 그녀는 멍하니 어디론가 걸어갈 뿐이었다.
비척거리는 걸음의 종착지는 창문 앞이었다.
단순히 바람을 쐬러 나온 모습이라기엔 위화감이 있었다. 그의 잠을 깨우러 온 것 같지도, 혼자 자기 무섭다는 둥 애 같은 장난을 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누가 오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기다리는 모양새.
그는 가만히 얼굴을 찌푸렸다.
“자는…… 건가……?”
몽유병이었다.
그녀는 창문 앞에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이 유난히 희었다.
‘뭐 하는 거야 대체…….’
새벽 단잠을 깨운 것도 열받는데 저 녀석은 정신 사납게 왜 저러고 있는 건지.
벤자민이 조용히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봐.”
그는 손바닥을 들어 닉시의 눈앞에 흔들었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