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9_3
여차여차 심어 놓은 작물을 전부 수확할 때까진 시간을 벌어 놓긴 했다만, 지금 이 가지 상자를 출하하고 나면 앞으로 수확할 작물도 얼마 남지 않았다.
끽해야 밭 구석에 찔끔 심어 놓은 비트. 너무 매워서 수확할 때마저 방독면을 써야 하는 고추. 새들이 쪼아먹어서 상품 가치가 없는 블루베리. 전부 마음먹고 수확하겠다 결심하면 일주일 내 끝낼 수 있는 것들.
‘그나마 다행인 건 화가가 일주일 안에 수확이 끝난다는 걸 모르는 건데…….’
벤자민은 신혼집 철거 이후로 닉시의 집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기웃거렸다면 농부가 고추 하나 따는 데 10분이 넘게 걸린다는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닉시가 새파란 고추를 툭 끊어냈다.
“그래. 화가가 우리 집 근처엔 얼씬도 못 하게 하는 거야.”
“왜지?”
“으아아악!”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닉시가 펄쩍 뛰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들고 있는 고추를 위협용 칼처럼 꽉 쥐었다.
“노, 놀랐잖아! 네가 유령이야? 왜 기척도 없이 와!”
벤자민은 제 눈앞에서 파들거리는 고추를 의아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못 들은 건 네 쪽이면서 말이 많군.”
“그래서 여긴 무슨 일인데.”
닉시가 손을 크게 휘적거리며 휑한 밭이 보이지 않게 애썼다.
벤자민은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닉시에게 건넸다. 그 안엔 비석들이 수북이 들어 있었다.
“내 고구마 비석들이잖아. 이게 왜?”
그것은 닉시가 수확되지 못하고 태풍으로 죽은 가녀린 고구마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던 비석이었다.
문제는 고구마들이 원체 사방팔방 날아가 버려서 비석도 마을의 사방팔방에 아무렇게나 세웠다는 것.
때문에 마을 이장이 흉물스러운 불법 설치물을 일일이 수거하느라 고생을 했다.
“마을 이장이 가져다주라더군.”
계속 밭에서 이야기하다간 화가가 곧 수확이 다 끝난다는 걸 알아챌지도 몰랐다.
닉시는 벤자민의 손을 잡아 집 안으로 끌고 갔다.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벤자민이 익숙하게 소파에 몸을 묻었다.
‘벽에 붙였던 분홍 리본은 드디어 떼어 버렸나.’
귀엽게 꾸며놨던 장식들이 없어져서 약간 휑했다. 벤자민은 그제야 아차, 몸을 일으켰다.
신혼집을 철거한 지 오래였는데, 장소가 장소다 보니 너무 습관처럼 편히 기대 있던 탓이었다.
“근데 웬일로 길이 직접 오지 않고 다른 사람한테 부탁했지? 바쁜가.”
“헌화하러 간다던데.”
“헌화?”
닉시가 흙 묻은 손을 탁탁 털었다.
“아. 오늘이 ‘투생’이구나.”
프랑스의 가을 명절인 ‘모든 성인의 축일’.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을 추모하면서 무덤에 꽃을 바치는 행사였다.
닉시는 났을 때부터 챙긴 적 없고 관심도 없는 행사였다.
군에 있을 땐 억지로 끌려가서 경례했던 것 같은데, 이곳은 그녀를 억지로 끌고 갈 사람도, 경례해야 할 사람이 묻힌 무덤도 없었다.
“어쩐지, 평소랑 다름없는 화요일인데 아침부터 사람들이 부산하다 했어. 그래서 마을에서 뭐 한대? 우리 부대에선 헌화 끝나고 칠면조 잘라먹었는데.”
“몰라.”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마을의 아웃사이더 화가가 마을의 행사를 알 리 없었다.
나름 큰 연례행사긴 하다.
하지만 굳이 행사에 참여하겠다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는 건 머쓱했고. 추모하는 날인데 꽃이다, 축제다, 해맑게 돌아다니는 것도 좀 이상하기도 했다.
“오늘은 꼼짝없이 집에만 있어야겠네.”
“그렇군.”
“넌 헌화하러 갈 거야?”
닉시가 말하자 벤자민이 ‘그걸 말이라고.’ 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내가 갔다간, 맞아 죽어서 공원에 비석이 하나 더 생길 텐데.”
“맞다. 너 독일인이었지.”
닉시가 머릴 긁적였다.
결론적으로 지금 이 둘은 남들이 떠들썩하게 헌화할 때, 명복을 빌 사람도, 헌화할 무덤도 없어서 뻘쭘하게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란 말이었다.
꼭 남들 다 휴가 갔는데 홀로 쓸쓸한 집무실을 지키게 된, 적적하고 서글픈 상황같이.
“그럼 오늘 뭐 해?”
닉시가 물었다. 마을 행사가 있다고 화가의 하루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그는 ‘별거 없다’는 의미를 담아 어깨만 으쓱였다.
“그럼 나랑 칠면조 요리해 먹을래?”
아쉽게 오베르엔 칠면조가 없었기에 닉시는 칠면조 대신 꿩을 가져왔다.
그녀의 집 앞 블루베리를 노리는 흉악한 도둑 중 한 마리였는데, 닉시에게 정의의 철퇴를 맞은 뒤 말린 고기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여전히 불은 못 쓰겠다 투덜거려서 메인 요리인 꿩 수프 요리는 손님인 벤자민이 하게 됐다.
닉시는 잘 자른 채소를 솥에 넣기만 하면 되는 하찮은 역할을 맡았다.
둘만 심심한 휴일.
이왕 만드는 거 거창하게 만들자고 이것저것 다 넣은 닉시 때문에 둘이 먹기엔 너무 많은 양의 수프가 탄생했다.
닉시는 테이블에 두 명 몫의 식기를 내려놓으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고작 한 달 같이 살았다고, 네가 집을 나가니까 집이 되게 휑했던 거 있지?”
구석에 있던 화가의 그림 공간을 철거할 땐, 왠지 모르게 정든 골동품을 버려야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기분이 가장 크게 느껴질 땐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 불이 꺼져 있으면 되게 쓸쓸하더라고.”
“그럼 불을 켜고 다녀.”
“소파에 옷을 던져둬도 옷이 제자리로 돌아가 있지도 않고.”
“너 또 옷을 아무렇게나…….”
한 달간 닉시의 허물을 정리하면서 쌓였던 그의 울분이 본능적으로 욱 튀어나왔다.
‘아니지.’ 벤자민은 이젠 그럴 일 없다며 분통을 꾹 눌러 참았다.
벤자민은 김이 나는 수프를 테이블에 내려놓곤 자리에 앉았다.
그와 그녀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슬슬 겨울이 오는데 집안에 창문을 손봐야겠다는 말. 수프에 후추를 너무 많이 넣어서 맵다는 이야기. 오늘 같은 날 꽃 장사를 해야 했다는 푸념.
“참, 요즘은 침낭에서 자고 있어.”
갑자기? 닉시의 말에 벤자민이 수프를 뜨다 말고 그녀를 바라봤다.
“왜 네가 나 몽유병 있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침대에 침낭을 꽁꽁 묶어서 사지를 결박하고 자고 있지.”
그렇게 해서 잠은 잘 수 있는 건가. 벤자민이 생각했다.
“구경해 볼래?”
“아니.”
안 봐도 기괴할 것이 뻔했다. 고전 공포영화에 나올법한 구속구. 그것도 아니면 뱀파이어의 관 같겠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식사가 끝나자, 닉시는 디저트랍시고 커피와 눅눅해진 감자튀김을 가져왔다. 커피만 홀짝이던 벤자민이 툭 입을 열었다.
“넌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지? 투생이면 국가적인 행사 아닌가?”
“음……. 명복 빌 사람이 없으니까?”
“네 친구들 있잖아.”
그의 말에 닉시는 킬킬 웃으며 말했다.
“나 하나가 명복을 빌어 줘서 저승에서 행복하게 잘 살 거면, 애초에 잘 살 녀석들일걸. 그럼 넌?”
그가 고갤 들었다.
“명복 빌 사람 없어?”
“남의 나라 행사를 왜 내가 챙기는지 모르겠군.”
“정 없긴, 다 기분인 거지. 다들 신 같은 거 안 믿어도 크리스마스랑 산타클로스가 오는 건 기다리잖아. 아무튼 그래서 없냐구.”
“…….”
명복을 빌 사람이라. 그에게 그런 걸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곤 세상에 한 명뿐이었다.
“굳이 따지면 동생이 있지. 어디 묻혔는지 모르지만.”
“그래? 애틋한 것치곤 너무 중요한 걸 모르는 거 아냐?”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 고향으로 돌아간 적 없으니까.”
그러니 헌화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동생이 죽은 이후에 죽을 곳을 찾아 돌아다니던 그였기에 곧 만나자는 생각이었을 뿐.
“그렇구나. 하긴 나도 그런 사람 하나 있어. 어디 묻혔는지 모르는 사람.”
닉시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네가 동생 이야기하는 건 한 번도 못 들어본 것 같네. 어떤 사람이었어? 너랑 닮았어?”
“아니. 난 아버지를 닮았고 테오는 어머니를 닮았었지.”
“아니. 너희 부모님을 뵌 적이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먹니……. 그럼 부모님이 어떻게 생겼는데.”
“기억 안 나.”
“어쩌라는 거야.”
벤자민이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의 동생 테오 리히터.
저와 같은 밀빛 머리카락에 자줏빛 눈동자. 햇빛을 자주 보지 못해 창백하고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늘 웃고 있어서 병약하단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성격은 붙임성 있고, 밝고, 순했다. 미운 소리 한번 한 적 없는 아이였으니까.
“요컨대 네 동생은 ‘네 얼굴’ 더하기, ‘길의 헤헤 웃는 얼굴’ 더하기, ‘비티의 사랑스러움’ 약간 더하기, ‘라울의 능청스러움’을 합친 친구란 거지? 좋아. 이제야 좀 어떤 사람인지 알겠어.”
그의 기억 속 테오가 약간은 상상하기 싫은 키메라가 되었다. 근데 또 맞는 말이긴 해서 그는 그냥 얼굴만 구겼다.
“그럼 너는.”
“엉?”
“네 가족은 어떤 사람들이었는데. 부모님이 대공황 때 돌아가셨다 했잖아.”
아하 친부모님. 닉시가 생각도 못 한 사람이 나왔다는 것처럼 입만 벙긋했다.
“글쎄. 나도 너무 옛날에 돌아가셔서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럼 그 뒤로는. 쭉 혼자 산 건 아닐 거잖아.”
그의 말에 닉시는 딱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헤집어 봤다.
물론 인생을 계속 고독하게 혼자 지내진 않았다. 많은 사람과 부대끼면서 살기도 했고, 그중 가족이라 부를 만한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부모님 죽고 난 후에 보육원에서 생활하긴 했어. 근데 보육원도 워낙 여러 차례 옮겨서 기억나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보육원 선생들은 닉시라면 학을 뗐다.
말을 더럽게 안 듣는 건 둘째치고, 거대한 사고의 중심에는 늘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날겠다며 지붕에서 뛰어내린 라이투 형제 소동이라든지, 번개로 에너지를 모으겠다며 피뢰침을 꺾다가 감전된 에딘슨 소동. 그 밖에도 식중독 소동, 최면 소동.
소동계의 시한폭탄 닉시는 하루가 멀다고 사고를 치는 바람에 자주 보육원을 옮겼다. 그러다 나중에 가서는 거의 쫓겨나다시피 거리에 나앉게 됐다.
“열두 살이었나. 그때 서류상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긴 했지.”
“서류상?”
“응. 날 후원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있었거든.”
그때 그 사람과의 만남은 닉시 인생의 큰 전환점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 사람이 없었으면 닉시는 보육원에서 쫓겨나 뒷골목을 전전하는 인생을 살았을 테니까. 뒷골목 할렘가의 불법 연금술사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녀는 그때도 천재였고, 여전히 도덕을 모르는 아이였으니.
“그 사람이 누군데.”
“그 사람?”
닉시가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집 밖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그리곤 뒤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다른 사람들은 다 바쁘고 둘만 할 일이 없는 나태한 휴일에 찾아올 손님.
지금 찾아올 만한 사람이 있나, 머릴 긁적이며 문을 열었다.
“헥, 니, 닉시 씨. 편지, 헉…… 왔어요!”
그곳엔 우편배달부 대니스가 서 있었다.
“편지?”
대니스는 품 안에서 붉은 인장 찍힌 편지 한 통을 꺼냈다.
말끔한 필기체로 적힌 서명.
필립이 보낸 편지였다.
“……너 설마 파리까지 갔다 온 거야?”
“네? 그럴 리가요. 제 자전거는 제트기가 아닌걸요…….”
우편배달부는 닉시의 편지를 받아 열심히 근교 우체국까지 페달을 밟았다. 거기 도착해서 파리까지 가장 빠르게 도착하는 차편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교환원이 우편배달부를 알아보고 건넸다는 것이다.
“일주일 전에 우체국에 도착해 있었대요. 투생 때문에 배달부들도 대부분 휴가를 떠나서 계속 대기 중이었는데, 마침 제가 왔다고 가져 가라셨어요.”
‘어쩐지 아침에 편지 배달하라고 찾아갔을 때 얼굴이 썩어 있더라니. 휴가 중인데 배달하래서 그랬던 거구만.’
닉시가 몇 시간 전의 과거를 반성하며 지폐를 뭉치로 꺼냈다.
우편배달부는 이번에도 싱글벙글 웃으며 보수를 챙겨 받았다.
이 편지의 내용에 화가와의 우정과 닉시의 수명이 달려 있었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닉시는 우당탕탕 제 방으로 향했다.
‘또 뭘 숨기고 있나 보군.’
그 수상하기 짝에 없는 모습에도 벤자민은 대수롭지 않게 커피를 홀짝였다.
―쿵!
닉시는 방문을 닫았다.
후하. 몇 번의 심호흡 끝에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열었다.
안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진지하게 다물려 있던 닉시의 입술이 조금씩 호선을 그었다.
―우당탕탕!
혼자 커피를 마시던 벤자민은 복도에서 들리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에 고갤 돌렸다.
“화가아아!”
닉시는 편지로 추정되는 종이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상기된 얼굴을 하고 달려왔다.
그녀는 소파를 훌쩍 뛰어넘어 테이블에 앉았다.
감자튀김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우리, 파리로 가자. 당장 이번 주 일요일에!”
* * *
닉시와 벤자민의 파리행이 정해지자 모든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농부는 지지부진하던 수확을 반나절 만에 끝내고, 본인이 조만간 파리에 다녀올 거라고 동네방네 외치고 다녔다.
“여기 있었구나. 그동안 어디 갔는지 한참 찾았어.”
라울이 바비큐 그릴을 집어 들었다. 며칠 전, 화가의 집 앞에서 바비큐 파티를 한 후 깜빡하고 놓고 갔던 것이었다.
“쇠꼬챙이들도 들고 가.”
벤자민은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고 서서,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바비큐 꼬챙이들을 가리켰다.
“그것도 여기 있었어? 난 또, 마을 아주머니들이 고철인 줄 알고 팔아 버리신 줄 알았네.”
라울이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벤자민의 집은 가구라 할 만한 게 딱히 없는 곳이었다. 구둣발 소리에도 쉽게 메아리가 생기는 텅텅 빈 집.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집이네.”
라울이 짤막한 감상평을 전하곤 테이블 위의 쇠꼬챙이들을 수거했다.
“이렇게 심심한 집에 살면 쓸쓸하지 않아?”
“딱히.”
“닉시 양네 있을 때 좋아 보이던데, 벤자민.”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아하하, 농담. 벤자민의 얼굴이 구겨지자 라울이 항복 의사를 내비쳤다.
“여긴 하루아침에 주인이 없어져도 지금이랑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니까. 저 캔버스들을 다 치워 버리면 다들 빈 집이라고 생각할걸.”
“잔소리할 거면 빨리 가.”
“매몰차긴.”
라울은 서운하다 노랠 부르며 현관으로 향했다.
“참. 닉시 양에게 들었어. 이번 주에 파리로 간다며?”
바텐더는 어젯밤, 닉시가 벤자민과 파리에 갔다 올 거란 소식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 벤자민이?’하는 의문이었다.
라울이 아는 벤자민은 제 영역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베르 마을에 막 눌러앉았을 때도 일 년 넘게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고, 그나마 나아진 지금도 대낮엔 마을 중심가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프랑스의 중심인 파리에 간다라. 필시 엄청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가는 거야?”
그의 예상이 맞았는지, 벤자민은 대답에 뜸을 들였다.
“보고 싶은 그림이 그곳에 있다 해서.”
“얼마나 보고 싶은 거길래 파리까지 간다는 거야? 신기하네.”
눈앞의 남자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예술가적인 면모를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림에 미쳐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다지 미술에 열광하는 것 같지도 않은 그런 사람.
“무슨 그림인데?”
그런 사람의 걸음을 떼게 만든 그림이면 다벤치의 그림이라도 되는 거려나. 라울이 물었다.
“……있어.”
‘말하기 싫은가 보군.’ 라울은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그럼 그 그림을 다 본 다음엔 뭘 할 건데?”
“그림을 다 본 다음엔?”
벤자민이 반문했다. “응. 다 본 뒤에.” 라울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벽에 세워져 있는 그림 하나를 바라봤다.
하나같이 완성되지 않은 그림들.
그것 중에선 하나의 그림을 따라 그린 건지, 비슷한 구도와 색감을 가진 것들도 있었다.
‘보러 간다는 게 저 그림인가. 어지간히 저 그림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많이 따라 그리지도 않았을 테니.’
어두컴컴한 그림이었다. 그 가운데, 사람이 있는 곳만 불을 피워 놓은 듯 밝았다.
“다음이…… 있을까.”
벤자민이 중얼거렸다.
“응?”
다른 생각을 하느라 듣지 못했던 라울이 반문했다. 벤자민은 고갤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시시하긴. 혹시 그림만 보고 올 건 아니지? 이왕 파리까지 간 거니까 실컷 놀다 와. 볼 거 많을 거 아냐. 개선문이나, 에펠탑이나.”
아. 그런 다음. 화가는 입만 벙긋했다.
“나름 예술가의 동네니까 멋지고 예쁜 것들도 많겠지? 아 참. 우리 가게 카운터에 놔둘 수저꽂이가 필요한데, 혹시 괜찮은 거 있으면 사다 줘.”
“보고.”
“그렇게 말해도 사다 줄 거 알아, 벤자민. 습기에 강한 재질이면 다 좋아.”
네 안목이 맘에 들면 사례로 저녁 풀 코스로 대접할 테니까. 바텐더가 인심 썼다는 듯 웃었다.
“뭐, 우리 가게 수저꽂이보단 너희 집 인테리어가 더 문제긴 하지만. 이렇게 된 거, 거기서 테이블보나, 커튼이라도 사는 게 어때? 그럼 제법 사람이 사는 집 같을 텐데.”
라울은 그의 집 구석구석을 가리켰다.
바닥에 작은 러그라도 깔면 괜찮을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벽에 그림을 걸어두거나. 창문가에 화분을 두는 것도 괜찮겠다.
벤자민은 그저 그가 가리키는 곳만 바라볼 뿐이었다.
“곧 겨울이 되는데, 이 얇은 담요 말고 두꺼운 이불도 하나 장만해야겠네. 벤자민, 너 작년에도 이 담요 하나로 겨울났었지?”
그는 고갤 끄덕였다.
“하여간. 너도 참 이상한 데 고집 있어. 얼어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물론 작은 벽난로가 있긴 하다만, 그 추운 겨울을 이런 찬 바닥이랑 담요 하나로 견디다니. 이걸 독하다 해야 할지, 미련하다 해야 할지. 라울이 실소했다.
“여기 계속 살아야 하는데, 집을 쭉 이렇게 텅텅 비워 둘 순 없잖아.”
“…….”
“아니면 뭐. 설마 여기 계속 살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 하하.”
“…….”
라울이 익숙한 침묵에 그를 바라봤다.
‘……진심인가?’
바텐더는 감이 좋았다. 그랬기에 늘상 있는 그의 묵묵부답에서도 기묘한 위화감이 든다는 것을 느꼈다.
‘……설마. 그냥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거겠지.’
그는 침묵이 어색해지기 전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이거 보관해 줘서 고마워. 오늘 저녁 먹으러 올 거야?”
“조금 나중에.”
“알겠어. 그럼 네 몫의 그라탱은 남겨 놓을게.”
라울이 걸음을 돌렸다. 뚜벅뚜벅. 역시나 그다지 요란하게 걷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방이 메아리쳤다.
“가게 닫기 전엔 오는 거지?”
화가의 집을 완전히 나가기 전, 라울은 그는 굳이 되물었다.
벤자민은 짤막하게 그렇다고 긍정했다.
* * *
눈 깜짝할 새 파리행을 약속한 일요일이 왔다.
“잘 다녀와!”
길버트가 기차 안에서 먹을 간식거리를 들려 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