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9_5
“어. 알아?”
“알지. 옛날에 그 근처에서 살았거든.”
“아하. 아무튼, 무슨 일이 있었냐면…….”
파리의 남쪽. 세느강 아래쪽에 있는 라텐 지구에서 요 며칠 크고 작은 소동이 있었다.
대부분 거리의 부랑자들이 행인들의 금품을 갈취하는 사고였는데, 그때 피해자들이 말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 눈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거야.”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은 원래 제정신이 아니지 않아?”
“그런 것보단…….”
피부가 독사에 물린 것처럼 벌겋고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했다. 그리고 유달리 사람들의 눈이 충혈돼 있었다고.
“눈 주위에는 붉게 핏발이 서 있었는데, 눈동자는 새파란 안광을 띄고 있었다나 봐. 꼭 약이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야.”
“흐음…….”
“뭐, 아무튼 단순 강도 사고였으면 군대까지 동원하진 않았을 텐데…….”
제키가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픈 건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름 전에 나치의 핵심 전범들을 교수대로 보내 버렸거든? 근데 그 이후에, 쫓기던 나치 잔당들이 아이슬란드에 숨어 있는 일당과 합류하기 위해 프랑스에 잠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정보가 돌았어.”
“와우. 동네북이네.”
“그래서 요즘 소대 안이 아주 살벌해. 죽을 맛이야.”
‘그래서 제키 마티아스가 이 새벽부터 마중을 자처했던 거구만.’ 어쩐지 자신을 보는 얼굴이 과하게 행복해 보인다 싶었다.
“그러니까 관광 좋은데, 몸조심하라고. 무슨 일 있으면, 여기로 연락하고. 나한테 바로 연락될 거야.”
제키가 메모지를 뜯어 제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닉시가 그것을 팔랑거리며 흔들었다.
“날 뭐로 보고. 날다람쥐 닉시 잊었어?”
“너 말고 저 남자 말이야. 딱 봐도 비실대게 생겼잖아. 툭하면 부러질 것 같고 말야.”
제키가 영 못 미덥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가.”
닉시가 화가가 잠든 방문을 바라봤다.
머릿속에 저절로 화가의 몸이 어땠는지 떠올랐다. 저보다 훌쩍 큰 키에, 손은 좀 떠는 편이지만 포도 상자 세 상자는 가뿐히 들 수 있을 것 같은 팔.
머리, 가슴, 배로 나눠 체크해 봐도 ‘비실’, ‘허약’에 속할 범주는 아니었다.
“……오히려 제법 괜찮지 않아?”
닉시가 벤자민의 해부도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엑. 제키가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 * *
찢어지는 비명과 고함. 밤하늘 높이 솟아오른 불기둥. 밤인데도 붉은 하늘과 척척히 젖은 붉은 대지.
벤자민은 걷어차인 복부를 감싸 쥐고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바닥에 쓰러진 그의 앞에 피가 튄 군홧발이 섰다. 그 뒤로 몇 명의 인원이 걸어왔다.
“한 놈도 남김없이 잡아!”
“네!”
벤자민 앞에 서 있는 어느 남자의 말에, 뒤에 서 있던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콰르릉!
불타던 성당에서 무언가 크게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명이 들렸고, 벤자민이 그 소리에 흠칫 놀라 고갤 들었다.
눈앞은 온통 붉었다.
군인들은 숨어 있던 사람들을 잡아다가 바닥에 내팽개쳤고, 아이들은 벌벌 떨며 불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길 강요받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서 소리 없는 절망이 흘러나왔다.
질척이는 땅바닥을 짚고 있는 손이 곱아들었다.
“제, 제발…….”
벤자민은 제 눈앞의 군화를 부둥켜 잡았다.
“제발, 제발 잘못했습니다.”
잡고 빌었다. 처절하게, 비굴하게.
실핏줄 터진 눈에서 피일지 절박함일지 모르는 붉은 물방울이 후두둑 쏟아졌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제가, 제가 자, 잘못했습니다. 전부 다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제발.
―삐이.
벤자민이 숨을 훅 들이켜며 눈을 떴다.
부드러운 천의 감촉과 푹신한 침대. 흰 대리석과 로코코 문양의 사치스러운 금박 장식.
―삐익. 삑.
열어놓은 창문 너머로 아이들의 피리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땀에 젖은 그의 앞머리를 간질였다.
‘여긴…….’
그가 몸을 일으켰다. 꽁꽁 덮어진 이불이 밀려났다.
호텔이었다.
창가로 비스듬히 비쳐오는 햇살이 눈 부셔,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해의 기울기를 봤을 땐 얼추 정오를 지난 시간.
침대에 누워 기절하듯 잔지 꼬박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
‘이래서 푹신한 곳에서 자면 안 되는 건데.’
그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땀으로 눅눅해진 몸을 씻고, 거실로 나온 벤자민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농부의 쪽지를 발견했다.
[샌드위치 먹고 올게! 네 몫도 사 올 테니까 안심해!]해석하기 난해한 악필 편지를 해독하고 나서야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벤자민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불타는 성당. 비명. 매캐했던 공기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그때.
시간에 무뎌져 희미해졌다고 생각했던 악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직도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 기억의 파편들.
그날 이후. 동생이 죽었단 소릴 들은 뒤.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죽을 곳을 찾아 헤맬 때.
아무 계기 같은 게 없어도 늘 꾸던 악몽.
불면증의 이유. 잠든 이후에도 그를 괴롭히던. 그날의 지워지지 않는. 동시에 빛이 바래 흐릿해진 기억.
‘……괜찮아.’
괜찮아, 아직. 벤자민은 가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약통을 열었다.
몇 알 남지 않은 약들이 그의 떨려오는 손을 따라 달그락거렸다.
이제 괜찮아질 것이다. 그 그림을 보면.
전부 괜찮아질 것이다. 그 악몽을 끝내고자 그림을 보러 온 것이니.
그는 지끈거리는 손의 통증을 삼키며 약 한 알을 입에 넣었다.
―달칵.
닉시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종이 가방을 안고 신나게 뛰어왔다.
“나 왔어, 화가! 샌드위치만 사 오려고 했는데, 요 앞에 광장에서 파는 핫도그 냄새가 기가 막히지 뭐야?”
그녀는 냉큼 거실로 달려갔다. 벤자민은 소파 등받이에 고갤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닉시가 불쑥 벤자민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얼굴에 그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래서 핫도그 상인이랑 샌드위치를 교환해 왔어! 핫도그 괜찮지?”
“…….”
그의 눈이 느릿하게 열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검보랏빛인 그의 눈동자는 막 잠에서 깬 것처럼 희미했다.
“아하. 환자의 약 시간이었구만.”
“…….”
“일단 늦은 점심부터 먹자구. 우리, 앞으로 할 게 엄청 많거든! 어라?”
핫도그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닉시는 화가의 약통을 발견했다.
분명 몇 주 전에 약을 새로 채워 줬을 텐데, 지금은 세 알 정도만 덜렁 남아 있었다.
“그 많은 걸 다 먹었어? 이거 영양제 아니라니까?”
닉시가 벤자민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불시에 고통받게 된 그가 짧게 앓는 소릴 냈다.
“알고 있어.”
“근데 왜 지금은 고작 세 알만 남은 건데? 밭에 심었어?”
“아니. 다 먹었어.”
“그러니까 그 많은 걸 왜…… 잠깐. 그럼 그동안 넋을 놓고 있던 게 다 약 먹고 돌아다녀서 그랬던 거야?”
그가 고갤 끄덕였다.
“왜?”
“잠을 못 자서.”
“그 불면증 두 번 도지면 뒤지겠네. 우선 물부터 먹어.”
닉시는 경악했다.
아무리 천재인 그녀가 만든 약이라고 해도 남용은 금물이었다.
하다못해 평범한 비타민 같은 거면 몰라, 화가에게 만들어 준 약은 전쟁통에 썼던 수면제와 진통제에 버금가는 독한 것들이었다.
몸과 정신이 버티는 게 용한 정도였다.
‘어쩐지 파리로 가자 했을 때부터 넋을 놓고 다닌다 했더니. 도시를 관광하게 된 촌뜨기의 설렘이 아니라 약의 후유증이었다니.’
그녀는 물컵을 내밀었다.
화가는 순순히 물컵을 받았다. 손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어휴. 네 손이 또 난리 치면, 보름 동안 겨우 세 알 갖고 어떡하려 그래?”
어쩐다.
닉시는 머릴 굴렸다.
장비나 재료 같은 건 전부 오베르에 놓고 왔기에, 약을 만들려면 파리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해야 했다.
‘장비는 제키에게 빌리면 될 것 같고. 약을 제조하기 위한 원료가 문제네. 쉽게 구하기 힘든 것들인데…….’
“로부스 박물관은.”
벤자민이 말했다. 닉시는 양심이 뜨끔하는 것을 느끼며 하하 웃었다.
“그, 그 그림 있잖아. 아직 전시 기간이 아닌가 보더라고. 제키가 일주일쯤 뒤에 전시한다고 말해 줬어.”
입에서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그녀가 샌드위치를 사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연습한 결과였다.
“일주일……. 그렇군.”
다행스럽게도 벤자민은 그녀의 거짓말에 속은 듯했다.
“그래서 말인데.”
닉시가 종이 가방을 뒤져 핫도그를 꺼냈다. 방 안은 금방 맛있는 냄새로 가득 찼다.
그녀가 강매하듯 핫도그를 벤자민에게 안겼고, 벤자민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아직 따뜻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았던 허기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또 이 와중에 배는 고프군. 웃긴 꼴이야.’ 벤자민은 씁쓸한 실소를 지었다.
“우리 데이트하지 않을래?”
“허……?”
쓴웃음 짓던 벤자민의 입에서 얼토당토않은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 * *
닉시는 사흘 내내 화가를 데리고 파리의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그들의 파리 데이트는 데이트라는 이름을 가장한 산책이었다. 닉시라는 코카스파니엘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벤자민의 산책.
그 언젠가 추운 겨울, 산기슭을 행군했던 때보다 더 강행군이었다.
닉시는 파리가 지겹다 지겹다 노래를 부르면서, 그에게 파리의 관광지를 보여 주지 않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굴었다.
덕분에 벤자민은 ‘그녀와 함께 있다는 죄’로 파리의 주요 관광지를 학습했다. 강제 주입식 교육에 가까웠다.
“여기가 테프레온. 엄청나게 크지?”
닉시는 고딕과 그리스풍의 양식으로 지어진 큰 건축물을 가리켰다.
높은 돔과 육중해 보이는 벽. 목이 부러지게 올려다봐야 천장이 보이는 웅장한 곳이었다.
닉시는 여기가 예전에 민간인들의 피난 지역이었다는 둥, 지하를 파 보면 무덤이 나올 거라는 둥 그다지 생산성 없는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벤자민은 그저 ‘독일인한테 프랑스 위인들의 무덤을 보여 줘서 뭐 하자는 거지.’ 생각했다.
로투르단 성당은 죽어도 보기 싫다는 화가 때문에, 그들은 부르크센록 공원으로 향했다.
물론 가는 길이 순조롭진 않았다.
닉시는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이 보이면 꽃에 이끌리는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갔고, 국제 미아 신세가 되고 싶지 않은 화가는 그런 닉시 뒤를 쫓았다.
“어서 오게, 젊은이…….”
닉시가 멈춘 곳은 뒷골목의 점쟁이 앞이었다.
점쟁이가 손님을 현혹하기 위해 수려한 솜씨로 타로 카드를 섞었다.
그러나 닉시는 카드보단 자체 발광하는 수정구슬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얼마예요?”
“어떤 점을 보느냐에 따라 다르지……. 재물운은 지폐 한 장. 애정운은 두 장인데, 손님들은 연인으로 보이니 특별히 깎아……”
“아뇨. 이 구슬 얼마냐구요.”
본인의 가게를 골동품 가게 취급하다니.
“그, 그건 그냥 장식일 뿐이야.”
점쟁이가 더듬더듬 말하자 닉시가 크게 아쉬워했다.
“에이. 그럼 아무거나 봐 주세요. 화가, 뭐 보고 싶은 거 있어?”
“딱히.”
“그, 그럼 미래 운은 어떤가.”
“미래?”
닉시는 삐딱하게 팔짱 꼈다.
눈앞에 보이는 유기물과 과학적으로 증명된 공식을 다루는 화학자들은, 신이나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는다.
그건 자신의,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해 사는 닉시도 마찬가지였다.
“뭐, 좋아요!”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꼭 ‘어디 한번 해 보시지!’하는 태도였다.
꼭 점쟁이랑 기 싸움을 하러 온 어린아이 같았다.
▶ 오늘의 수확
테프레온 모형 병따개, 부르크센록 공원 산 팬지꽃, 수정구슬.
▶ 총평
수정구슬을 산 지 10분 만에 수정구슬을 깨트렸다. 미래를 점치는 도구라면서, 이런 미래는 왜 못 점치는 거야?
* * *
“아무리 생각해도 사기야.”
다시 부르크센록 공원으로 향하는 길.
닉시는 본인이 뽑았던 카드와 해석이 맘에 안 든 건지 연신 투덜거렸다.
“난 여제를 뽑고 싶었는데!”
“그건 조커 뽑기 게임이 아닌 걸로 아는데.”
“나도 알아! 하지만 카드가 안 예뻤다고.”
그녀가 뽑은 카드는 태양. 못생긴 태양에 느끼한 얼굴이 그려져 있던 카드였다.
점쟁이는 카드를 해석하며 오늘 하루 운이 좋을 거라며 은근히 복채를 요구했다. 그러나 닉시는 그저 카드가 못생겼다며 투덜댈 뿐이었다.
그녀의 없는 눈치 때문에 점쟁이는 조용히 눈물을 삼켰었다.
“넌 뭘 뽑았더라?”
“기억 안 나.”
벤자민은 본인이 뽑았던 카드를 떠올렸다. 내용은 귀찮아서 듣지 않았다.
하지만 유독 그림만은 선명히 기억났다.
불타고 있던 탑. 하늘은 새카맸고, 남자와 여자가 탑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카드를 본 점쟁이가 헉하고 숨을 들이켰으니, 재앙 중의 재앙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었다.
늘 우울, 파멸, 후회 같은 것들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던 그였기에,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자. 저쪽으로 가면 바로 공원이 보일 거야.”
닉시가 표지판을 가리켰다. 어느새 저녁이 된 하늘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공원에서 핫도그 먹을래?”
“아니.”
근 며칠간 핫도그에 꽂힌 닉시 때문에 벤자민은 이제 핫도그에 핫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그럼 샌드위치는?”
“그게 그거잖아.”
“내가 또 샌드위치와 핫도그의 다른 점 백 가지를 설명해야겠…….”
―툭.
“아 죄송합니다.”
닉시는 부딪힌 행인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우선 샌드위치는 빵이랑 고기로 이뤄져 있어. 핫도그는 빵이랑 소시지고.”
그리곤 곧바로 손을 들어 행인의 목덜미를 덥석 잡았다.
남자의 손엔 닉시의 작은 가방이 들려 있었다. 소매치기였다.
“소시지는 고기지. 그러니까 결국 핫도그도 빵이랑 고기로 이뤄진 거잖아.”
“가공 고기와 덜 가공 고기는 달라. 너도 군대 들어가기 전, 후가 다르잖아.”
“……일리 있군.”
“이, 이거 놔!”
소매치기가 손을 휘둘렀다.
닉시는 가볍게 피한 뒤, 발로 남자의 손을 뻑 차 냈다. 그 때문에 남자가 들고 있던 가방이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린 뒤, 바닥에 툭 떨어졌다.
놀란 소매치기가 비틀거리면서 멀어졌다.
“쳇!” 남자는 혀를 찬 뒤 어둑한 골목으로 도망쳤다.
닉시가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워 탈탈 털었다.
“저런 놈들을 잡아야 파리 거리가 깨끗해질 텐데.”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골목이라고, 치안이 아주 엉망이었다.
‘여기가 어디쯤이더라.’
닉시는 주윌 두리번거렸다. 곧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왜 저런 놈을 만나나 싶더니, 제키 마티아스가 근래 들어서 분위기가 흉흉해졌다던 라텐 지구 근방이었다. 그녀가 오래전 살았던 곳.
‘여기가 거기였구나. 오랜만에 와 보니 감회가 새롭네.’
닉시는 새삼스러움을 느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평범하고 이상할 것 없는 멀끔한 거리였다.
예전의 라텐은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아직도 이 근처에서 쓰레기를 뒤져 먹던 시절이 생생했다.
세느강과 파리 도심에서 버려진 쓰레기들과 내몰린 거지, 노숙자들이 한데 뭉쳐 살던 곳. 거리엔 쥐와 도둑들이 들끓었고, 수도관엔 깨끗한 물 대신 화학 폐기물들이 흘렀다.
지금은 재개발이 되고 난 후라 거리도 말끔해졌고, 이름도 ‘까르띠에 라텐’이란 제법 고급스러운 이름이 붙은 모양이었다.
이 전엔 ‘카르텔 라텐’이라고 불렸는데.
“이봐. 이제 공원은 됐어.”
벤자민의 말에 닉시가 옛 생각에서 벗어났다.
“돌아가지.”
그는 피곤한 얼굴이었다. 하긴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걸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벤자민은 습관처럼 오른손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을 보던 닉시가 뭔가 생각났는지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있잖아, 화가. 너 지금 약 몇 개 남았어?”
“세 개.”
“너 그걸로 오베르 돌아갈 때까지 버틸 수 있어?”
그는 침묵했다.
못 버티겠지. 최근 화가의 상태를 보면 길어봐야 이틀 버티면 많이 참았네 싶을 정도였으니까.
닉시는 소매치기가 사라진 골목을 바라봤다.
거리는 말끔했고, 건물들은 싸구려 자재로 지었는지 낡은 감은 있었지만, 그 예전 쓰레기촌 같진 않았다.
그래도 낯선 건물들 사이, 눈에 익숙한 것들이 보이긴 했다.
언덕의 높이라든지, 우체통이 있던 흔적, 하수구 뚜껑의 위치 같은 것.
그렇다면, 어쩌면 닉시의 쓰레기 같은 옛 친구들이 아직 이곳에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 근처에 내가 잘 아는 약물 제조 상인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번 가 볼래?”
“……있을지도 모르는데?”
벤자민이 그녀의 애매한 가정을 꼬집었다. 닉시는 머리를 긁적였다.
“엉. 걔들이 지금까지 여기 사는진 모르거든. 내가 열두 살 때까지 여기 살았는데 그 이후론 안 와 봐서.”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사이 전쟁도 터졌고, 시대도 많이 변했으니, 어지간히 이 지역을 사랑하는 일이 아니면 그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만약에 옛친구들이 남아 있다면 구하기 어려운 화가의 약재료들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네 약재료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걸 구하려면 다시 오베르까지 가야 하는데, 네 손이 말을 안 듣는 바람에 그림도 못 보고 오베르로 돌아갈 순 없잖아.”
“…….”
“어때. 한번 가 볼래?”
벤자민은 저릿한 손끝을 매만졌다.
그의 악몽이 심해진 건 파리에 오는 게 확정된 날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