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9_6
그날부터 그는 빌고, 울부짖고, 처절하게 매달렸던 붉은 참상 속에서 지냈다.
그 꿈을 꾸고 난 후면 어김없이 머리가 아팠다. 그날, 그때처럼 누군가 제 머리를 지그시 땅에 처박아 짓밟는 그런 두통이었다.
그나마 진통제나 수면제가 있어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만약 약이 없다면?
‘아마 그때랑 똑같이 굴고 있겠지.’
탈영 직후, 오베르에 흘러들어왔던 창고 속 짐승처럼 말이다.
“……가지.”
그는 긴 고민 끝에 말했다.
아직 그림을 보지 못했다. 그 전에 체력이나 정신력이 바닥나는 건 사양이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닉시는 씩 웃으며 앞장섰다.
이미 해는 다 떨어진 저녁.
다른 곳이었으면 그래도 저녁을 먹는 사람이나 산책하는 연인들이 있을 시간인데 그들이 걷는 거리는 사람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참, 참고로 이 근처에 나치 잔당들이 잠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대.”
“하아.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거야.”
이런 곳에서 불시에 검문받게 되면 꼼짝없이 나치 잔당으로 몰려서 감옥에 가기 좋았다.
‘아. 그 녀석의 신분증이 있었지.’
벤자민은 제 안주머니에 넣어놨던 라울의 신분증을 떠올렸다.
그럼 간신히 감옥행은 피하겠다만.
하지만 골치 아픈 사건엔 처음부터 연루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법. 벤자민은 그냥 이걸 쓸 일이 없길 바랐다.
몇몇 골목을 어지럽게 쏘다닌 뒤, 그들은 잿빛의 폐창고 같은 곳들에 도착했다.
방금까지 지나쳐온 골목관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다.
거긴 멀끔한 유령도시 같았다면 이곳은 금방이라도 사람 아닌 것들이 튀어나올 것 같은 시궁창 같았다.
“우와. 여긴 그대로네!”
닉시가 건물의 금 간 구석을 보며 밝게 웃었다. 웅장한 테프레온 건물을 볼 때도 심드렁했던 사람이 지금은 꼭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살았으니 제정신일 리가 없나.’
벤자민은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닉시의 뒤를 쫓았다.
―저벅, 저벅.
“저 녀석들이야?”
“그래. 틀림없어.”
그때, 갑작스레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뜬금없는 소란에 닉시와 벤자민이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아까 닉시에서 손을 걷어차인 남자와 남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패거리들이 있었다.
망했군. 벤자민이 가장 피하고 싶던 ‘골치 아픈 사건’이었다.
“멍청하게 얌전히 보내 줄 때 갈 것이지, 내 뒤를 쫓아오다니.”
심지어 닉시와 저가 자신을 쫓아왔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한 손에 파이프나 각목 같은 것들을 들고 있었다. 딱 봐도 평범한 시민은 아니었다.
“겁도 없이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이제 네 녀석의 시체는 내일 강물에 떠다닐 거다.”
“화가. 아는 사람이야?”
“그럴 리가.”
“거기 여자!”
남자가 닉시를 가리켰다.
“나 아는 사람이었어?”
지명된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저는 전혀 모르겠다는 말간 얼굴. 그게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한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다 죽여 버려!”
남자의 고함과 동시에 그의 패거리들이 흉기를 들고 달려왔다.
‘나는 왜 싸잡는 거야.’
벤자민이 작게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사방에서 죽어라! 죽이겠다! 아우성이었지만 닉시는 태연했다. 그녀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것도 그대로니까, 이곳이 발전이 없는 거지.”
―휘익!
그리고 제 머리를 후려갈기려는 쇠 파이프를 옆으로 피했다. 그녀는 그대로 몸을 빙글 돌려 남자의 턱을 후려 찼다.
―으득! 털썩.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발차기가 정통으로 들어간 건지, 달려든 남자는 기절해 쓰러졌다.
남자가 거품을 물든, 기절하든 닉시는 그저 자신의 말랑한 신발 앞코를 부여잡았다.
“으아악! 발가락 아파!”
“이 미친년이……!”
쓰러진 남자 옆에 있던 다른 일당이 그녀를 향해 삽을 휘둘렀다. 닉시는 몸을 낮춘 뒤 곧장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미사일처럼 날아간 닉시가 어깨로 남자의 명치를 가격했고, 남자는 삽을 놓친 뒤 멀리 날아갔다.
“으윽…….”
“뭐, 뭐 하는 거야 니들!?”
순식간에 두 명이나 나가떨어졌다.
그녀는 어깨를 털어내며 바닥에 떨어진 삽을 주워들었다.
삽에는 검붉은 얼룩이 눌어붙어 있었다.
닉시는 삽을 어깨에 걸쳐 들었다.
“농부를 우습게 보면 큰일 나. 거긴 맨날 연장 들고, 자연과 대결하는 사람들이라 70대 할아버지도 근육이 빵빵하다구.”
남자는 그녀의 요상한 말을 듣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물론 나도 제법 빵빵해!”
닉시가 제 가슴을 통통 두드렸다. 그녀는 옆에서 꿈틀대며 정신 차리려던 남자의 머리를 삽으로 후려쳤다.
―깡!
경쾌한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라텐 지구의 시궁창 인생들 사이엔 농담처럼 하는 우스갯소리 하나가 있었다.
맑은 눈의 미친놈은 피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그 순간 그들은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이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미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제, 제기랄!”
결국 남자와 패거리들은 몸을 돌려 달아났다.
닉시는 기세 좋게 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뭐야 시시하게. 기합 잔뜩 넣어 놨구만.”
그녀는 삽을 휙 던지고 뒤 돌았다.
벤자민 앞엔 망토를 푹 눌러 쓴 남자가 오들오들 떨며 주저앉아 있었다.
화가도 그 난리 통에 제게 덤빈 한 명을 처리해 놓은 모양이었다.
벤자민이 저릿한 오른손을 털며 몸을 세웠다.
“네 고향은 꽤 과격한 곳이로군.”
“그렇지? 옛날부터 이랬어. 일찌감치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뒹군 몸이란 말씀.”
요컨대 불우한 환경에서 컸다는 말.
그다지 훈장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임에도 그녀는 위풍당당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네가 말한 약물 제조 상인은 어디 있는데.”
“그거? 이제 거의 다 왔어. 저 골목 뒤쪽에 X표시가 있는데……”
그녀가 손가락으로 골목 끝을 가리킬 때, 오들오들 떨던 남자가 고갤 들었다.
“……닉시?”
닉시와 벤자민이 동시에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그 시선에 흠칫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러길 잠시, 남자는 새카만 눈을 들어 닉시의 얼굴을 뜯어봤다.
“니, 닉시 맞구나? 나, 나야 나! 맥스.”
한껏 반갑다는 목소리였다.
“맥스?”
닉시는 쓸데없는 건 바로바로 잊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가 좀처럼 모른다는 얼굴이자 남자가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비굴하게 웃는 얼굴. 새카만 눈. 꼬질꼬질한 머리카락.
남자의 충혈된 눈을 찬찬히 바라보던 닉시가 떠올랐는지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줌싸개 맥스?”
“마, 맞아. 그, 그건 이제 잊어줘…….”
“와 이게 얼마 만이야! 아직도 여기 살았구나?”
닉시는 남자의 손을 잡고 크게 흔들었다. 가냘픈 남자의 몸이 널어놓은 빨래처럼 흔들렸다.
그녀가 남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벤자민에게 소개했다.
“얘 이름은 맥스. 나랑 골동품을 줍던 사이야. 하핫!”
화가는 의례상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의 이름은 맥스. 고아와 갈 곳 없는 자들이 그렇듯 성은 없었다.
닉시와는 오래전, 이 시궁창에서 함께 먹고 놀던 사이였고, 닉시가 여길 떠난 이후로도 쭉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닉시와 벤자민은 맥스가 살고 있다는 거처 방향으로 함께 걸었다.
마침 닉시가 목표한 약물 제조 상인이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혹시 다른 애들도 아직 있어?”
“아, 아니. 재개발되고 다 타지로 떠났어. 남은 건 나뿐이야. 근데 너, 너야말로 여긴 웬일이야? 군인 귀족 나리를 따라가지 않았어?”
“그랬지! 지금은 아니지만.”
닉시는 콧잔등을 긁적였다.
“다른 애들은 그렇다 치고. 제클린은? 아직 여기 남아 있어? 만들어야 하는 게 있는데 원료가 제클린 아니면 구하기 까다로운 거거든.”
“그 여자?”
맥스는 추운 건지 두 손을 꼭 모아 비볐다.
한 발짝 뒤에서 그들을 따라가던 벤자민이 남자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남자의 목 언저리엔 쓰다 남은 물감이라도 펴 바른 것처럼 마냥 벌겋고 시퍼런 게 묻어 있었다.
“어……. 아, 아직 거기 살고 있어. 하수도 서쪽 지하실.”
“다행이다! 없으면 오베르까지 갔다 와야 하나 싶었는데.”
“그, 근데 말야, 닉시.”
갑자기 한 톤 높아진 그의 목소리에 닉시가 고갤 돌렸다. 그는 계속해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벤자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네가 예전에 만들었던 그 약 말이야……. 제, 제클린한테 알려 줬던 거. 아, 아직도 잘 팔리는데 좀 더 만들 생각은 없어?”
손의 간헐적인 떨림.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린 손끝. 저 증상은 벤자민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약물 중독이군.’
“아, 아니면 나한테 조합법이라도 아, 알려 줄 수 있을까?”
“…….”
닉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의 비굴하게 웃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미안 맥스! 난 약쟁이 그만하기로 해서.”
“그, 그래?”
이윽고 닉시가 찾고 있던 X표시가 나타났다.
그곳엔 하수도의 흔적이 남아 있는 후미진 건물이 있었다.
낡은 창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닉시의 기억대로였다.
맥스는 연신 조잘거리며 닉시의 옆에 따라붙었다.
“그래도 말야…… 조금은 알려 줄 수 있지 않아? 네, 네가 그렇게 여길 떠난 이후에 다른 놈들이 제클린을 협박해서 레시피를 알아내려고 했어. 그, 근데 제클린은 알려 주지 않았지. 노, 놈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어……”
“흐음. 그래서?”
―저벅, 저벅.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눅눅한 곰팡내가 났다.
문득 벤자민은 그 습한 냄새 가운데서 뭔가 뒷덜미가 섬칫해지는 냄새를 맡았다.
휘발성 기름 냄새였다.
―저벅.
“사람들이 어떻게든 네 레시피를 흉내 내서 대체품을 만들긴 했는데, 효과가 영 시원찮아. 네, 네가 만든 것만큼 좋은 게 없었는데…….”
“그거 좋은 거 하나 없는데. 뇌가 녹아 버릴 거야, 맥스.”
계단 아래는 철문이 있었다.
그곳이 제클린이라는 사람이 있는 곳의 입구임을 알게 된 닉시가 문을 열었다.
―끼이익.
녹슬어 잘 열리지 않는 문.
귓가를 긁는 소름 끼치는 소리에 닉시가 얼굴을 구겼다.
안은 어두웠다.
“그, 그거야 당연히 아, 알지……”
맥스가 불을 켜기 위한 뭔갈 찾으려는 건지, 품에서 뭔가를 뒤적이며 벤자민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터벅.
벤자민이 벽 쪽으로 물러났다.
―치익.
작은 등불이 켜졌다.
하지만 그 불빛이 켜진 곳은 닉시가 있는 쪽이 아니었다. 방 안쪽의 어두운 공간이었다.
작은 기름 등불 하나뿐인 불빛 너머, 열댓 명의 남짓한 사람의 실루엣들이 보였다.
“그, 그래서 여기 놈들이 죄다 뇌가 녹아 버렸으니까…….”
―철컥.
벤자민은 제 손목 부근의 서늘한 금속의 감촉을 느꼈다.
손목엔 쇠 철사로 만든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그는 손을 확 잡아당겼다. 하지만 수갑의 다른 부분은 이미 벽에 붙은 쇠 파이프에 고정된 상황이었다.
“닉시!”
벤자민이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동시에 맥스가 품 안에서 칼을 꺼내 닉시에게 겨눴다.
그의 새카만 눈은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눈 주위에는 붉게 핏발이 서 있었는데, 눈동자는 새파란 안광을 띄고 있었다나 봐. 꼭 약이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야]“그, 그러니까 제조법을 내놔!”
그의 외침이 시발점이 된 것처럼,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비척거리며 걸어왔다.
“대체 이게 웬 난리야.”
닉시가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어둠 속에서 비틀비틀 걸어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상인의 몰골이 아니었다.
비쩍 마른 해골 같은 얼굴들에, 눈 주위가 퀭했다.
“주, 죽기 전에 제조법을 내놔, 닉시. 난 그게 필요하다고!”
아깐 후드를 푹 눌러 쓰고 있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건만 지금 보니 맥스의 목 언저리부터 귀밑, 어깨까지 벌겋고 검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두드러기를 동반한 청색증이었다.
닉시가 혀를 찼다. 저 지저분하게 얼룩진 청색증은 약 중독의 말기 증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제클린은?”
“아,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그, 그 여자는 죽었어. 끝까지 제조법을 안 알려 주겠다고 버티다가 큭큭…… 저 시궁창 아래로 처박혔지…….”
맥스가 발작하듯 실실 웃었다.
요컨대 닉시가 찾는 사람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고, 그녀는 눈앞의 약쟁이한테 속아 굳이 이곳까지 헛걸음하게 됐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너, 너도 같은 꼴이 되기 싫으면…….”
“짜증 나네.”
—빠악!
닉시는 중얼거림과 동시에 맥스의 턱을 걷어찼다.
그 신호를 시작으로 약쟁이들이 달려들었다.
그녀는 맥스가 떨어트린 나이프를 주워 벤자민에게 던졌다.
“수갑은 알아서 끊어!”
벤자민이 제게 날아오는 나이프를 피했다.
저 녀석, 내가 다트판인 줄 아는 건가. 그가 벽에 맞고 떨어진 나이프를 주워들며 생각했다.
벤자민은 철로 된 수갑 이음새에 나이프 칼날을 끼워 비틀었다.
닉시는 막 제게 달려드는 덩치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덩치를 밀어 뒤에 있는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칼날이 뭉툭해서 작은 이음새에 끼워지지 않고 틱틱 튕겨 나갔다. 벤자민이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오른손을 보며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죽어!”
그때, 누군가 의자를 들어 벤자민의 머리를 내리쳤다.
—콰장창!
낡은 나무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벤자민은 얻어맞은 제 머리에서 뜨끈한 게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오른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었다. 가느다란 핏물이 흘러내렸다.
“야 이 미친! 볼 건 얼굴밖에 없는 녀석을……! 이봐 화가! 괜찮아?”
멀리서 닉시가 외쳤다. 그녀는 막 달려드는 사람의 고간을 가격했다.
화가의 턱으로 후두둑 핏방울이 떨어졌다.
벤자민은 제 머리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다 고갤 들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보랏빛 눈동자가 스산했다.
—빠악!
벤자민은 주먹으로 남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둔탁하고 묵직한 소리가 울려 남자는 뒤로 나자빠졌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각목 파편을 주워들었다.
“안 괜찮으니까 이거 좀 풀어 봐.”
그가 묶여 있는 왼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의 얼굴 가득 짜증스러움이 묻어났다.
“주, 죽어!”
벤자민은 막 제게 달려드는 사람을 옆으로 살짝 피해 벽에 부딪히게 만든 다음, 무릎으로 명치를 가격해 기절시켰다.
손에 아릿한 통각이 전해졌다.
“나도 바쁘거든!” 닉시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려는 손을 피해 외쳤다.
그 뒤로 열댓 명쯤이 바닥에 뒹굴기 시작하자 무리가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시궁창 사람들은 점점 둘에게 물러났다.
작은 체구로 저보다 덩치가 세배는 큰 남자를 기절시키는 금발의 여자와 한 손이 묶여 있는데도 바득바득 다른 한 손과 발로 사람들을 후려치는 남자.
제 몸을 지킬 변변찮은 무기 같은 것도 없으면서 무슨 독기인지, 그들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저들 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살벌했다.
닉시가 바닥에 넘어진 사람 위로 올라타 주먹을 내리꽂았다.
빠악, 빠악! 한 번 타격할 때마다 울려 퍼지는 소리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바닥에 누운 사람의 몸이 축 처졌다. 그 사람이 기절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닉시가 주먹을 멈췄다.
그리곤 확인 사살하듯 급소를 가격했다. 퍽.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정말 사람이 죽을 수 있는 급소만 집요하게 노려서 때리는 솜씨.
찢어지는 비명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던 몸짓. 눈동자에 비치는 흉흉한 살기.
분명 사람을 죽여 본 솜씨였다.
맥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총을 겨눴다.
“이, 이, 이 괴물……!”
그녀는 손에 묻은 핏자국을 쓰러진 사람 옷자락에 대충 닦으며 일어섰다.
닉시가 제게 겨눠진 총구를 바라봤다. 피식. 같잖다는 미소가 튀어나왔다.
그리곤 천천히 걸어왔다.
“방향이 잘못됐어.”
“오, 오지 마!”
“그래서야 쏠 수 있겠—”
—타앙!
방아쇠를 잡은 손이 곱아듦과 동시에 그녀가 몸을 숙였다. 그 때문에 총알은 저 멀리 애꿎은 등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와악 저 또라이 새끼! 폼 좀 잡아 보려 했더니 누구 죽이려고 환장했나!”
닉시가 놀라 심장이 콩콩 뛰는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외쳤다.
등불이 흔들리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와장창!
유리가 깨지고 등불 안의 손톱만큼 작았던 심지가 바닥에 닿았다.
동시에 폐건물 안, 바닥 아무렇게나 흩뿌려져 있던 기름에 불이 붙었다.
―화악!
“뭐, 뭐야!”
“불이야! 피해!”
갑작스러운 불에 놀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혼란을 틈타 닉시는 돌멩이를 집어 들어 맥스에게 던졌다.
그것은 정확히 그의 손을 맞췄고, 손에 들려 있던 작은 권총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 젠장……!”
그제야 그는 자신의 힘으론 그녀에게 덤벼들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맥스는 입술을 짓씹으며 아픈 손을 움켜쥐고 달아났다.
건물 자체도 워낙 낡은 건물이었고, 창고엔 자잘한 소파, 침대 등의 가구가 놓여 있었다. 전부 불에 타기 쉬운 것들이었다.
그 때문에 금방 발로 끌 수 있었던 불이 삽시간에 크게 번져 올랐다.
시궁창의 약쟁이들은 쥐 떼처럼 밖을 향해 허둥지둥 달아났다.
“콜록, 이봐 화가!”
닉시가 코피를 아무렇게나 닦아 내곤 화가가 묶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새카만 연기를 헤쳤다.
이윽고 벤자민의 밝은 베이지색 머리칼이 보였다.
“우와 살아 있네? 조용하길래 두들겨 맞은 줄 알았어!”
벤자민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었다. 손목이 묶인 파이프가 그의 머리보다 높았기 때문에 꼭 죄수가 감옥 창살에 묶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좋아. 천재 맥가이버 닉시 님이 왔으니 금방 풀어줄게!”
닉시가 그의 손목에 걸린 수갑을 만지작거렸다. 짧은 시간에 얼마나 버둥댔으면 손목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죄……니다…….”
“뭐?”
“제가…….”
그는 어딜 보는지 모를 시선으로 뭔갈 중얼거렸다.
툭, 툭. 바닥으로 그의 땀이 섞인 핏방울이 떨어졌다.
“뭐라고? 안 들려!”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