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ip to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113
113화. 흑림의 고수(1)
대별산을 내려오는데 당비취가 팔짱을 끼면서 방굿 웃는다.
“오빠, 개봉으로 가기 전에 낙양에 잠깐 들르면 안 될까?”
“낙양에는 왜?”
“학관 친구들이 아직 남아 있잖아. 그동안 별일 없는지 궁금해서.”
낙양이라. 일단 거기 가면 정보를 얻을 곳이 많기는 하지.
그러고 보니 나도 정보가 좀 필요하고. 영환술사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잖아.
‘그런데 내가 계속 지옥혈왕을 추적해야 하나?’
현무비로 태어난 이후에 평범한 개봉의 중소문파 소문주로 적당히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표였다.
지금도 그 목표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자꾸 지옥혈왕하고 엮이는 것 같다.
‘뭐, 나하고 악연이 있는 놈이긴 하지.’
지옥혈왕 때문에 치가 떨리는 경험을 몇 번 했다.
하지만 수라검신 시절에 지옥혈왕하고 직접 부딪친 적은 없다.
지옥혈왕의 수하들하고 부딪치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은 것이고, 지옥혈왕은 얼굴도 본 적이 없으니까.
어쨌든 수하들이 한 짓이라도 나는 개천혈교에게 빚이 있고, 빚지고 못 사는 성격상 개천혈교라면 눈에 보이는 대로 박살 내는 것이 맞기는 하다.
하지만 개천혈교는 거대 조직이고 나는 일개 무인에 불과하다.
그런 내가 개천혈교를 상대하는 것이나 개천혈교를 몰살시키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딱 지옥혈왕 이놈만 죽이면 은원이 싹 해결될 것 같단 말이야.’
수하들이 저지른 짓은 결국 수장이 책임질 일.
그러니 지옥혈왕을 죽인다면 개천혈교에게 당한 빚은 갚는 것이 된다.
그래서인지 지옥혈왕 관련 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개천혈교 관련해서 내가 겪은 일도 결국은 지옥혈왕 관련 일이기도 하다.
마령이혼환을 훔치다 죽은 것 역시 지옥혈왕 때문이기는 하다.
어쨌든 개천혈교 관련 일은 정리가 좀 필요한 것이다.
– 다가각─ 다가닥─
낙양과 멀지 않은 여양을 얼마 안 두고 산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을 때 보이는 풍경.
“저 앞에서 전투 중인데?”
한 사람을 둘러싸고 댓 명 정도의 무리가 덤벼들고 있다.
“저 많은 사람들이 한 명을 포위하고 공격하네.”
검은색 옷을 입은 무인. 멀리서 봐도 여자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몸매에 굴곡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상당한 고수야.”
흑의인이 고수라는 사실은 이미 바닥에 쓰러진 무인의 숫자로 알 수 있다.
이미 댓 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복장으로 볼 때 흑의인 일행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저놈들 산적들 같지?”
전투 중인 무리를 유심히 살펴보던 당비취의 말을 듣고 복식을 살펴보니 산적이 맞는 것 같다.
“그래 보이는데.”
“산적들이 털려다가 오히려 당하는 상황인가?”
“그런 것 같아.”
앞으로 전진하니 상황이 좀 더 명확하게 들어온다.
흑의 여인을 산적들이 털어먹으려고 덤빈 것이다.
그런데 한 명에 오히려 밀리고 있는 중이다. 남은 다섯 역시 오래 버틸 것 같지 않다.
전투 모습을 살피던 당수정의 눈이 점점 커지며 입이 벌어진다.
“우와 엄청난 고수네. 산적들이 강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저 여자 칼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산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공격하는데, 일 검에 한 명이 쓰러지네.”
나도 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저 몸놀림하고 칼놀림. 어디서 본 것 같은… 교적풍? 사중찬?’
갑자기 교적풍이 떠올랐다. 흑의인의 몸놀림과 칼의 움직임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교적풍을 떠올린다.
‘사중찬도 저런 몸놀림이었고.’
교적풍과 사중찬과 비슷한 동작.
그 이후 흑의녀의 초식을 유심히 관찰한다. 확실하다. 일반 문파의 무공이 아니다.
‘살수 출신이야. 그것도 엄청난 고수.’
흑의녀는 경제적으로 산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하고 정교한 초식. 최소한의 동선과 상대 제압에 최적화된 공격.
초식의 화려함보다 살인에 최적화된 검초는 그녀가 살수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저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살수가 존재하다니. 그런데 30대 여자 살수라고? 들어본 적이 없는데.’
흑의녀 정도의 실력이면 살수 중에서도 최고 등급 실력이다.
그런데 30대 여자 살수 중에 저런 고수는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내가 은퇴할 당시에는 십대의 나이였으니 내가 모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저 정도 실력이면 옛날에도 눈에 띄었을 것이다.
여자 살수들이 희귀하거나 드문 것은 아니다.
여자들은 여인 사는 공간이나 일반적인 적에게 접근하기 용이한 성별이라는 이유로 살수 업계에서는 여자 살수도 키우고 있다.
하지만 여자 살수 중에 이름이 알려진 고수는 거의 없다.
그만큼 여자 살수가 정상으로 치고 올라가는 어려운 일이다.
‘만약 눈앞의 여자가 살수가 맞다면 내가 본 살수 중에는 최고의 실력이군.’
전투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채챙챙─
“으악!”
또 한 명. 이제 남은 산적은 두 명.
– 서걱─
“끅!”
목을 관통당하며 짧은 비명을 지르는 산적을 끝으로 전투는 막을 내렸다.
10여 명의 산적이 흑의녀 한 명에게 모두 당한 것이다.
“우화, 대단한 실력이네.”
전투를 마친 흑의녀는 우리 쪽을 보더니 눈꼬리를 살짝 올린다.
“두 사람은 산적이 아닌 것 같은데?”
“우리는 지나가는 행인이오. 당신이 싸우고 있어서 구경했던 것뿐이오.”
“구경이라.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군.”
흑의녀는 칼을 든 상태에서 나를 쳐다보았다.
“응? 무슨 자신감을 말하는 거요?”
“산적이나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니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지.”
그냥 싸움구경 좀 한 것을 이렇게 해석하나?
“그냥 싸움구경 좀 한 것뿐이오만.”
“보통 사람이라면 생사가 걸린 전투를 보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전투 중임을 이용해 얼른 도주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전투 중인 것을 보면서도 뒤로 말을 돌려 도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다가왔다는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전투 중인 우리를 자신의 상대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지.”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우린 당신의 적이 아니에요. 산적도 아니고요. 지나가던 행인일 뿐이죠.”
당비취가 눈을 반짝이며 흑의녀에게 우리가 단순 행인임을 다시 설파하자 검을 검집에 납검하는 흑의녀.
흑의녀는 한 쪽에서 한가롭게 풀을 먹고 있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더니 말 위로 올라탄다.
흑의녀의 말인 모양인데 산적의 습격을 받자 말에서 내렸던 모양이다.
흑의녀는 잠깐 우리 둘을 쳐다보더니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 역시 같은 방향으로 말을 몰기 시작하니 자연스럽게 나란히 길을 가는 모양새가 된다.
“무공이 대단하네요. 여협은 어느 문파 출신인가요?”
“⋯⋯.”
흑의녀는 입을 닫고 대답 없이 말을 몰 뿐이다.
“아, 내 소개도 안 하고 상대에게 묻다니. 나는 당문 출신의 당비취라고 해요. 여협은 어디 출신인가요?”
“⋯⋯.”
여전히 입을 닫고 앞만 보면서 움직이는 흑의녀.
“왜 대답이 없어요? 제 출신하고 제 이름은 밝혔잖아요.”
“모르는 사람에게 내 출신을 밝히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옆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내뱉는 말에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당비취.
“쳇! 무공 수위가 높다고 엄청 도도하네. 말 수 없는 것이 꼭 누구 닮았어.”
당비취가 말하는 그 ‘누구’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교적풍 말하는 거야?”
“응, 교적풍도 말수가 적잖아. 학관에서 가장 말수가 적잖아.”
“저 여자도 같은 문파 출신이니 말수가 적을 수밖에.”
“같은 문파 출신? 어? 오빠는 저 여협의 출신을 알아?”
“응, 알지.”
그 순간 앞만 보고 말을 몰던 흑의녀가 고개를 홱 돌린다.
“내 출신을 오늘 처음 본 네 놈이 어찌 안다고 하는 것이냐?”
역시 내가 던진 미끼를 문다.
“어찌 알기는 동작이 교적풍 그놈하고 닮았구만. 설마 교적풍을 모른다고 잡아떼려는 건 아니겠지? 같은 문파 출신인데.”
“그놈이 자신의 출신 문파에 대해 말을 했단 말이냐?”
흑의녀의 시선에 당혹감과 의혹이 일렁거린다.
“어머, 정말인가 봐. 교적풍하고 같은 문파인가 보네. 그런데 교적풍이 무슨 문파 출신이지?”
당비취는 흑의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나를 쳐다본다.
“맞추어 보시지. 교적풍이 자신의 출신 문파를 말을 했을까 안 했을까. 후후!”
말이 없는 여자를 보니 약간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과묵한 살수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 말을 할 수밖에 없도록 질문을 던진 것이다.
“본문 출신이라면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정답. 교적풍 그놈은 백정학관을 다니는 내내 자신의 출신 문파를 밝히지 않았지.”
“그런데 네놈이 어떻게 교적풍 그놈의 출신 문파를 안다는 것이냐?”
“아니, 출신 문파를 꼭 자신의 입으로 밝혀야 아나? 머리 깎고 나한권 사용하는 것만 봐도 소림 출신인 것 아는 것이고, 검 들고 창궁무애검법 펼치면 남궁가 출신인 것을 아는 거지.”
“네놈이 교적풍의 검초를 보고 출신 문파를 알아냈다는 말이냐? 믿기 힘들다. 우리 문파의 검초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검초다.”
“그럼, 지금 내가 당신을 보고 흑림 출신인 것을 맞춘 것은 어떻게 설명하려고?”
“뭣이?”
순간 놀람에 찬 소리를 지르며 나를 쳐다보는 흑의녀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설마 ‘흑림’이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올 줄 몰랐던 것이다.
사실 그동안 교적풍의 출신을 아무에게도 밝힌 적이 없지만 이미 나와 한 몸이나 된 당비취에게까지 감출만한 비밀은 아니라 생각해서 내뱉은 것이다.
흑의녀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고.
“어머, 오빠! 이 여협이 흑림이라는 곳 출신이야? 그럼 교적풍이 흑림이라는 곳 출신이라는 거야?”
말투를 들어보니 당비취는 흑림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양이다.
하긴 드러내 놓고 바깥 활동을 한 적이 없는 조직이니 알 수 없을 것이다.
“여협은 무슨. 여살수지.”
“살수? 흑림이 살수집단이야?”
“살수 중에서는 최고인 곳이긴 해.”
“그래? 그럼 교적풍이 살수 출신이라는 거야?”
“그런 셈이지.”
당비취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흑의녀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떻게 내 동작만 보고 내 출신을 알아맞힐 수가 있는 거지?”
‘그거야 나도 살수 출신이니까’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조금 전에 말했는데. 나한권 보고 소림 출신인 것 모르면 그것이 이상한 것 아닌가?”
“내가 산적들과 싸울 때는 특정 초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특정 초식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내 출신을 맞출 수 있는 거냐?”
“몸에 배인 습관이 그렇게 무서운 법이지. 초식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소림승의 동작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닌 법이니까.”
“⋯⋯.”
흑의녀는 잠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미간을 찡그린다.
“아까의 그 자신감이 단순히 무공만 높아서 가지는 자신감이 아니었군. 산적과 나에 대한 파악이 끝났기에 가지는 자신감이었어. 내 출신을 알고도 자신감을 보일 정도면 나를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도 갖고 있는 거고. 백정학관 출신 중에 이런 자가 있을 줄이야.”
“백정학관에 대해서 잘 아는 모양이군.”
“네놈 말대로 교적풍이 입학했으니 모를 수가 없지.”
“말끝마다 네놈 네놈 하니 좀 그런데. 나도 그럼 네년 네년 하면서 당신을 불러야 하나?”
“뭐라고?”
“이미 출신도 들켰는데, 서로 통성명이나 하고 친하게 지내자 이 말이야.”
내 말에 잠시 나를 쳐다보던 흑의녀.
“초류선이다.”
“초류선. 그럼 초 소저라 불러야겠네. 여협이라 부르기에는 나이가 젊어 보이니.”
“네놈은 누구냐?”
“네놈이 아니라니까. 개봉 현무문의 현무비라고 해. 현 소협이라고 불러달라고.”
넉살 좋은 내 말에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초류선.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해서 흑림 출신의 초류선과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