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10)
마음이 이끄는 대로-10화(10/134)
#10.
국왕의 기사들이 어디론가 몰려가는 모습을 이재는 먼발치에서 지켜봤다. 로더릭의 모습은 잘 보 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이동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재는 그들 중심에 로더릭이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출발할 때와는 달리 그들 주변에 꽤 많은 수의 원흔들이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또 저렇게 몰고 온 거야……”
저런 것도 체질인가?
황망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재는 국왕과 일행들이 그의 침실로 향하자 탄식했다.
‘거기는 안 돼. 사람이 그런 곳에서 어떻게 회복을 하냐고.’
초조하게 지켜보던 그녀는 일단 본인의 처소로 뛰어갔다.
이번 한 번만이라는 결심은 또 줏대 없이 무너졌지만,그녀는 합리화하는 것조차 잊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이재가 방 안의 부적들을 뜯기 시작하자,함의 정령은 댕그란 눈을 굴렸다.
결계는 만든 사람 손에 의해 금세 파훼되었다.
-이재! 뭐 하는 거야!
“………”
-악! 제발 그러지 마! 이게 내 가 몇 년 만에 찾은 평화인데!
“금방 고쳐 줄게. 네 집에 들어가서 숨어 있어.”
-내 집은 망가졌단 말이야……. 여긴 이제 안전하지 않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는데 코를 베어 갔어…….
정령이 울먹거리며 요사를 떨었지만,이재는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뜯어낸 부적들을 몸 여기저기에 숨겼다.
사람의 심신이 미약해지면 악귀는 강력한 힘을 얻는다.
로더릭이 후계를 걱정할 만큼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그야말로 중무장을 한 채 국왕의 침실로 향했다.
국왕의 침실 앞 분위기는 무척이나 살벌했다.
사냥터에서 왕의 광증이 또 한 번 도졌다는 소문이 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부상을 입고 돌아오는 와중에도 짐승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당연히 왕후의 출입을 만류했다.
“지금은 안 들어가시는 게 좋습니다.”
근위병의 말에 이재가 우물쭈물 하자 데보라는 왕후의 팔을 잡고 조심스레 이끌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데보라,나는 폐하 침실에 들어갈 수 있다면서. 한 번만 물어 봐 줘.”
시녀장이 송구한 얼굴을 했다. 모시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감히 안 된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한발 늦게 달려온 의원이 안으로 들어가는 사이, 이재는 그냥 그를 따라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욱,우욱……”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곧바로 헛 구역질을 했다.
그게 피 냄새 때문이라고 생각한 근위병은 손수건을 바쳤으나, 이재는 손사래를 치고 기사들을 헤치며 걸어 나갔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있는 로더릭을 본 순간,그녀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로더릭은 부상을 입긴 했다.
이 방에 자리 잡은 원흔들에 그가 새로이 몰고온 원흔들까지 더해져 그 수 또한 많았다.
다만 많이 다쳤다는 말과는 달리 로더릭이 입은 부상의 수준은 매우 경미해 보였다.
이 정도면 방에서 부적을 전부 다 뜯어올 필요가 없는 거였다.
‘아니, 그 망할 놈의 서양귀가 사람을 갖고 놀아?!’
그런데 귀신은 원래 사람을 갖고 논다. 사람의 약한 부분을 끊임없이 자극해서 사람을 홀리는 게 그들의 특성이 아닌가?
그리고 이재는 곧 서양귀의 말에도 수긍했다.
정신에 입는 상처도 부상이라면, 로더릭은 매일같이 치명상을 입고 있었다.
원인을 규명해 줄,치료해 줄 의사도 없이.
이재는 그를 향해 한 발 더 다 가섰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가 한 걸음씩 다가설 때마다 왕 주변의 공기는 서서히 바뀌었다.
왕이 느끼는 중압감이 낮아질수록 이재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폐하,괜찮으신가요?”
작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로더릭은 그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는 냉정해 보이지만,폭주를 앞둔 광인의 것이다.
게다가 그의 팔에는 짐승의 발톱 자국이 있었고,손바닥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아서 의원은 계속 고개만 조아리고 있었다.
국왕의 기사들은 조마조마했다.
그들은 왕이 숲속에서 맹수에게 혼자 달려드는 것을 말리지 못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짐승의 사체를 난도질하는 것도 지켜만 보 아야 했다.
화살로 원거리에서 조 준할 수 있다는 이성적인 판단도 없는 것 같았다.
제이드가 이번엔 정말로 목숨을 내놓고 말려야겠다고 생각할 때, 왕후가 왕의 침대 쪽으로 다가섰다.
체구가 작은 왕후는 사람을 경계하는 어린 짐승 같았지만,눈빛만큼은 예리하고 침착했다.
이재는 로더릭에게서 세 뼘 정 도 떨어진 곳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사불범정. 삿된 것이 바른 것을 이길 수 없다.’
‘파사현정. 사악함올 깨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
‘그게 이곳의 법칙. 삿된 것들아. 너희는 이제 그만 너희의 법칙이 다스리는 세상으로 돌아가라.’
몇 번 되뇐 이재는 로더릭의 둥 쪽에 손을 갖다 댔다.
거기 붙어 있는 원귀를 팔찌로 건드리자 그녀는 손목이 화상을 입은 것처 럼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로더릭의 등을 두어 번 어루만졌다.
-자꾸 방해하면 너도 가만히 안 둘 거야.
‘그래,괜찮으니까 해 봐.’
이재는 지지 않기 위해 원귀에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원령귀들이 서서히 창밖으로 나가기 시작 할 때쯤 그녀는 로더릭의 손목을 잡았다.
로더릭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고,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지만 이재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폈다.
그러자 챙, 하고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계속 잡고 있으면 상처가…… 벌어질 것 같아요.”
웃고 있는 이재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의 주변 공기가 여전히 그녀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그렇게 있자,원흔들은 멀어졌고 로더릭의 푸른 눈은 차츰 안정을 찾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이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괜찮은 거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괜찮다는 것을 확신한 이재는 의원에게 눈짓을 했다.
앙상하게 마른 의원은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아마도 험악한 상황을 많이 겪었겠지.
그러나 제이드가 표정으로 윽박을 지르자 쭈햇거리며 다가와 치료를 시작했다.
한숨을 고른 이재는 그의 옆에 조금 더 앉아 있었다.
로더릭의 주변이 어느 정도 정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이제 슬금슬 금 방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왕의 동향을 살피느라 이재의 이상 행동에 딱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입 모양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계속 귀신을 쫓았다.
축, 참,파, 다시 축.
국왕의 방 안에는 오래 묵은 원귀들 외에 축귀들도 있었다.
사냥터에서 새로이 죽은 동물들이었다.
하지만 산골에서 생활한 그녀는 잘 알았다.
자기가 죽은지도 잘 모르는 순진한 축귀들은 그저 왕의 주변을 맴도는 기운을 따라왔을 뿐, 곧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영물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혀를 조금 찬 이재가 다시 로더릭의 곁으로 돌아왔을 때,그의 눈은 이제 완전히 맑아져 있었다.
손바닥을 감은 붕대에는 여전히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그는 그쪽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이재만 보고 있었다.
로더릭은 방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너,여기 왜 왔어?”
“………”
참 할 말이 없어지는 말이었다.
이런 인간적인 감정으로 대하면 안 되는데,생각하면서도 이재는 울컥했다.
나도 좋아서 온 게 아니야. 매는 맞아 본 사람이 아픈 걸 더 잘 알고, 귀신은 보이는 사람이 더 무서운 거라고.
그러니까 나는 사실 누구보다 아프고 무섭단 말이야.
“다쳤으니까 왔겠죠. 괜찮은 거 봤으니까 갈게요.”
조금 마음이 상한 이재는 옷자락을 정돈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말투에서는 냉기가 흘렀지만 부인할 수 없는 서운함이 느껴졌다.
그에 따라 시녀들도 허둥지둥 돌아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로더릭은 갑자기 이재의 손목을 탁,잡았다. 붕대를 감은 손이었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있다가.”
사람들은 헛숨을 들이켰다.
아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왕후가 뭘 했다고 왕이 또 저렇게 온순해진 건지 그들은 의문이었다.
게다가 왕은 이제 아예 가지 말라고 왕후를 꼭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재는 다른 게 거슬려서 인상을 썼다.
“폐하,그 손 아직 쓰면 안 되지 않나요?”
이재는 그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검을 쥐고 있을 때와 달리 지금은 아무리 힘을 주어도 그의 손가락 하나 떼어내기가 힘들었다.
“알았으니까 이것 좀 놔 보세요. 알았다고요.”
“………”
“피가…… 더 나잖아요.”
복잡한 얼굴로 로더릭의 손바닥을 보고 있던 이재는 갑자기 피로감과 함께 속상함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살짝 신경질이 묻은 손길로 로더릭의 어깻죽지를 가볍게 때렸다.
“갈 때부터 이럴 줄 알았어요! 앞으로 사냥 같은 거 가지 마세요!”
한편 왕후가 국왕의 어깨를 찰싹 때리자,시종들은 일제히 인상을 쓰며 왕후의 시녀들을 노려보았다.
보통 때 같았으면 왕후의 시녀들은 절대 지지 않았을 테지만,지금은 그녀들도 경악해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아까 무섭다고 하셨는데……?
그런데 로더릭은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피를 많이 홀려서 다소 좋지 않은 안색으로 그는 물었다.
“왜.”
“………”
“해일리 던컨.”
“………”
“왜 가면 안 되는데.”
위험하다든지, 다치지 않았냐든 지 여러 가지 답변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젠 하다하다 축귀들마저 몰고오는 것을 본 이재는 울컥했다.
“제가 동물을 너무 사랑하나 보죠!”
사람들은 이제 국왕에 이어 왕후까지 약간 귀여운 방향으로 미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더릭은 이번에도 픽 웃고 말았다.
피로 얼룩진 자신의 몸을 훌어 본 그는 느린 손짓으로 사람들을 물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소 불안하게 생각하면서도 천천히 방안을 빠져나갔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 이야기도 안 해 줄 수는 없다.
이미 끔찍한 광경에 두 번이나 떨었을 그녀는 던컨이지만 또 아내이니까.
그러니까 이건 최소한 의 예우였다.
“헤일리 던컨. 사실 이건 어쩔 수가 없는 거야.”
“………”
“무책임하고 무능하게 들리겠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하루하루 망가지고 있어.
의미가 불분명한 말이었고 제대로 설명해 줄 의사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재는 그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만큼은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또 어떤 말을 하지 못 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더릭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이미 본인 의지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렵게 고개를 들었지만,이재는 다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
피로해 보였지만 그의 표정이 덤덤했고,그의 눈빛은 너무나 명정했기 때문이다.
너무 맑다.
저게 정말 악업을 쌓은 사람의 눈이란 말입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그 맑은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표정은 혼탁해 보였다.
하지만 이재는 여전히 괴롭고 울컥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뭐가 괜찮아,당신은 인간이야. 괜찮은 척하지 마.
보통 사람들은 당신 같으면 다 무섭고 괴로워서 벌벌 떨어. 죽기도 전에 이미 죽고 싶어 해.
그리고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건 바로 원귀의 목표야.
한편 로더릭은 의아한 얼굴로 이재를 빤히 보고 있었다.
딱히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도,그녀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일리 던컨.”
이재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 은 채 대답했다.
“네.”
“화났나?”
허탈해서 이재는 헛웃음을 홀렸다.
“아니에요.”
“그런 것 같은데.”
“………”
“내 말이 많이 한심했나 보네.”
“아니라니까요. 제가 그럴…주제나 되나요.”
“생각보다 자존감이 없군. 넌 그래도 화날 때 화낼 정도의 주제는 돼.”
“………”
“왕후고,또 던컨 아닌가.”
이재는 이번에도 헛웃음을 홀렸다. 그 던컨을 싫어하는 건 왕이었다. 그리고 이재는 실제로 헤일리 던컨도 아니었다.
“칭찬이라면 너무 감사하네요. 아무튼 화난 건 아니에요.”
“화난 게 아니라면 조금만 더 떠들어 볼래.”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듣고 있으니까 이상하게 정신 이 드는 것 같아서.”
통상적으로 쓰는 비유였지만, 이재는 그가 무척이나 허심탄회 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건 저랑 대화해서가 아니에요.
단지 당신 주변의 삿된 기운들이 점점 물러나고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재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그 뒤로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더릭은 노곤한 기색을 내비쳤고,이재는 그가 잠들 때까지 그냥 앉아 있었다.
고른 숨을 쉬는 로더릭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이재는 망설이다가 손을 뻗었다. 그의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을 헤치고 그녀는 머리 어딘가를 꾹꾹 눌러 주 었다.
숨소리가 한결 편안해지는 것을 듣고 있던 이재는 이번에는 품 안을 뒤적거렸다. 여러 장의 부적 뭉치 중에 몇 장을 골라 쥔 그녀는 촛대 앞으로 갔다.
이재는 그것을 불태우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읊조렸다.
평화와 안정을 기원하는 언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