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103)
마음이 이끄는 대로-103화(103/134)
#103.
접견을 마친 이재는 호숫가에 나와 있었다. 곧 국왕의 서재로 가야 했으나, 아직은 시간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또 호수를 바라보며 생
각에 잠겨 있을 때쯤이었다.
평소 허공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던 소년왕은 눈을 깜빡하 니 그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 었다.
화들짝 놀란 이재는 주변을 두 리번거렸다. 그녀는 사람들이 멀 리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속삭 였다.
“그렇게 눈앞에 바로 나타나지 말아 주시겠어요?”
-매번 똑같이 등장하면 네가 나한테 관심을 주지 않잖아.
“어떻게 등장하든 매번 똑같이 재수 없……”
이재는 간신히 말을 삼키며 본 인의 입술을 손으로 탁, 탁 때렸다. 이 입이 또 까부네.
그런데 소년왕은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입 술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너,근데 입술이 좀 부은 것 같다?
이재는 조금 멈칫했으나 이번엔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했다.
“승리의 혼적이에요. 비록 반쪽 짜리 승리였지만,적어도 비겁한 승리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무슨 소린지.
국왕은 결국 본인의 이름을 듣 지 못했다.
침대에서는 결코 져 주는 법이 없던 왕은 이번만큼은 특히 져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재 또한 어느 순간부터 흐느끼며 매달리고 있었다.
문제는 밖에서도 국왕에게 매달리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왕도 상식인이었다. 평소라면 불러서 무슨 일이냐며 물었겠지만,이번엔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었다.
무시로 일관하던 왕은 비슷한 상황이 세 번쯤 반복되자,몹시 짜증스러운 얼굴로 문을 노려보 았다.
그러더니 ‘나머진 밤에 마저 하자? 옹?’ 여운이 남는 말을 하며 사라졌다.
이재는 기적 같은 승리를 거머 쥐었으나, 몸에는 차마 보기도 부끄러운 흔적들이 남고 말았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재는 국왕의 전략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꽁꽁 묶어 놓는다고 해 놓고 꼭 안아 주면,그깟 코피 좀 쏟아 도 되는 거 아닌가? 싶어지는 거 였다.
이름을 부를 때까지 안 놓아준 다고 하면,그녀도 쉽게 불러 주 기는 싫은 거였다.
그러나 그게 남편의 개수작이라 는 걸 모르는 이재는 아직도 이 분야의 하수였다.
-넌 무슨 생각을 하길래 얘길 하다 말고 혼자 얼굴이 빨개지냐?
“네?”
흠칫 놀란 그녀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소년왕은 뭔지 알 만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뒤늦게 쑥스러워진 이재는 작위 적인 헛기침을 했다.
그러다 급하 게 말을 돌려 버렸다.
“저기,근데요.”
-난 네가 말을 그렇게 시작하 면, 이젠 너한테 감탄하게 되더라.
-또 뭐가 물어보고 싶은 건데.
머쓱해진 그녀는 뺨을 긁적이며 잠시 고민했다.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면,소년 왕은 결코 답해 주는 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는 질문 을 포기할 수 없었다.
소년왕이 던지는 말 속에는 가끔 단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서부 국경에 계속 문제가 생기잖아요.”
“근데 왜 예전에는 폐하한테만 살이 날아온 거예요? 그것도 삼 년씩이나.”
말을 해 놓고 이재는 조금 눈 치를 보았다.
내가 또 천기를 물은 건가,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년왕은 의외로 너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모든 전투의 기본이지.
-강이재. 머리가 잘리면 팔다리도 죽는 거다.
-근데 네가 죽어 가던 머리를 치료해 버렸잖아. 환자를 긍홀히 여기는 자애로운 의원의 마음으 로. 그러니까 팔다리도 찔러 보는 거지.
사실 이재는 머리를 치료하다 못해 투구까지 씌워 준 격이었다.
그리고 말을 하던 도중 소년왕 은 비식거렸다.
그녀는 그가 왜 웃는지 잘 알 것 같았다.
그는 사랑이 아니라 의원의 마음이라고 주장하던 이재의 과거를 놀리는 중이었다.
“웃지 마세요. 인간이 모든 미래를 알 수는 없는 거잖아요.”
-누가 뭐랬냐.
“그리고 제가 아니었어도 그렇 게 쉽게 질 사람은 아니었어요. 남의 남편한테 함부로 죽어 가네, 머리가 잘리네,이런 무서운 비유 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부정 탄단 말이에요.
하지만 소년왕은 계속 비식거렸다.
– 야,가재야.
“왜요.”
-갠 네 남편이기도 하지만,내 후손이기도 해.
“물론 그건 그렇지만요.”
이재는 쉽게 인정했지만,계속 심통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데보라가 국왕 쪽에서 기별이 왔음을 알린 건 그때였다.
이재는 바로 자리를 뜨기엔 껍 낍해서 나뭇가지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땅바닥에 무병장수와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부적을 썼다.
그녀가 심혈을 기울이자,보고 있던 소년왕이 너무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발 나한테 그것 좀 안 하면 안 되냐?
“당신의 건강을 기원하는 제 마음이 잘못된 건가요?”
그녀는 마무리를 하며 이 정도 면 됐어, 하며 만족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거잖아요?
저도 받았으니 응당한 복채를 낸 거예요.
이재는 땅바닥을 보며 지워지기 엔 아깝네,생각했다. 이건 역작 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수명을 오백 년은 더 연장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 감상하던 그녀는 뿌듯해하며 소년왕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고는 서재를 향해 발 걸음을 옮겼다.
서재 안 분위기는 다소 어색했다.
기사단은 대표적인 국왕의 날개 였고,기사단장들은 대체로 왕후와 친숙했다. 최근 들어 상당수의 보고가 왕후궁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장들만 따로 모여서 하는 회의에 왕후가 참석한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이 순간,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1기사단장과 시종장,이재를 따라 들어온 시녀장이었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생각했다.
친왕파 단신 좌장,진압조 대장이 이 자리에 참석하는 건 어쩌 면 당연한 게 아닐까?
그리고 왕후의 얼굴을 마주 보 고 있던 제이드는 유난히 고개를 가웃거렸다.
근데 왕후 폐하, 오늘따라 입술이…… 아,아닙니다.
분명 기분 나쁜 일이 있으셔서 부루퉁해지신 걸 겁니다.
서로 다른 감상들을 품에 안은 채 회의는 시작되었다.
이재는 가만히 앉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던 그녀 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 싸움이 단지 원귀와 의 싸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친왕파와 반왕파의 싸음이라고 생각했다.
이후에는 카이엔과 다이몬 재건 군과의 싸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국왕과 왕제의 싸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답은 무엇일까.
그리고 국왕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한 가지 가능성을 시사했다.
“제이드. 왕제의 행방을 하루빨 리 찾아. 더 많은 인원을 투입해도 좋으니까.”
“……폐하.”
제이드가 주위를 살피며,조심 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국왕은 괜찮다는 둣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왕제와 함 께 성과 서부 군영에 동행한 이가 있다. 왕제와는 유학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더군. 그자에 대해서도 조사해 봐. 성 출입 기록 확인하고,인상착의는 서부군 대장한테 협조 구하고.”
국왕은 사람들의 얼굴을 쭉 훌 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2기 사단장직을 대행하고 있는 부단 장이었다.
“그건 2기사단 쪽에서 하지. 서 부군 대장이랑 친분이 있을 테니 까.”
“예,폐하. 그런데 저…… 왕제 께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사람들의 얼굴은 궁금증과 의혹 에 젖어 있었다.
왕제는 계숭 서열이 가장 높은 왕족이었다. 본인이 왕실 생활에 관심이 없어 떠 돌아다녔기에 큰 잡음이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국왕이 왕제의 주변을 캐려 하니 굉장히 불길하게 들렸던 것이다.
이재의 표정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틀릴 수도 있 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영산 할매처럼 유능한 무속인도 모든 것을 내다보지는 못하는 게 이 바닥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수차례 훌고 지나간 이 직감을 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것은 일리아스의 소행일까, 아니면 왕제 본인의 뜻일까.
어느 쪽이든 국왕에게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국왕을 힐끔 바 라보았을 때,그는 그녀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중요 한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살살 쓸었다. 그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괜찮아.
이재가 고개를 끄덕이자,그의 시선은 다시 사람들을 향했다.
“그건 아직 확언해 줄 수 없다. 그러니까 확인해 보려는 것뿐이야.”
“………….”
“쓸데없는 말 안 돌게 입단속들 잘하도록 해.”
회의는 그 뒤로도 세 시간가량 더 이어졌다.
데보라는 계속 시간을 확인하며 이재를 염려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명상으로 다져진 그녀는 말 한 마디 안 하고 하루종일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것도 허 리를 곳곳이 편 채로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이재가 괜찮다고 데보라를 향해 웃어 주었을 때였다.
국왕은 회의 종료를 알렸다.
그리고 사건은 그 순간 벌어지고 말았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던 로더릭은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그리고.”
막 문밖으로 나가려던 단장들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선왕께서 추진하신 남진 정책은 당분간 보류할 예정이다.”
국왕의 최측근인 제이드조차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조만간 정무 회의에서 보도르 국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겠다고 할 거야. 3기사단장이 군부 쪽에 내 생각 전하고,힘 좀 실으라고 전해.”
“예,폐하. 그런데 왜 갑자기……”
“서부 국경에 주력해야 할 때라는 게 내 판단이다.”
국왕은 남부군 병력 일부를 차 출해서 다이몬 재건군의 본거지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남부 국경에는 평화가 보장되어야 했다. 단지 그 의도가 다였다.
그때 였다.
“그런데 폐하. 일전에 보도르국 에서는 그 조건으로 혼인……”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를 말하 던 3기사단장은 뒤늦게 상기했다.
국왕의 커다란 체격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도 않지만,저 옆에 자 그마한 왕후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을 꺼낸 3기사단장도 멈칫했 지만,그건 로더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짐승 같은 반사 신경으로 이재의 양쪽 귀를 꽉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계속 얌전하게 있던 그녀가 허공 에 발을 구르면서까지 버둥거렸 기 때문이다.
“너,지금 왕후 앞에서 무슨 얘기를 지껄이는 건가? 정말 죽고 싶어?”
찔끔한 3기사단장은 쩔쩔매며 고개를 조아렸다.
“다 빨리 꺼져.”
제이드는 3기사단장을 질질 끌 고 나갔고,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서재를 빠져나갔다.
버둥거리던 이재는 커다란 손을 야무지게 떼어 내며 국왕을 흘겨 보았다.
그는 조금 난처한 둣 이마를 매만지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였나요? 저한테 비밀 같은 거 안 만든다고 하셨잖아요.”
“아니, 나는 너 공연히 안 좋았던 일 생각날까 봐 그런 거다.”
“………….”
“협상 조건이야 내걸기 나름 아닌가. 생각도 해 본 적 없어. 이재, 절대 그런 거 아니야.”
“………….”
“너도 알잖아.”
국왕은 이재의 손을 잡았다.
그 는 그녀가 저번처럼 눈물을 글썽 이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그러면 진짜 가슴이 너덜너덜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었을까. 이재의 얼굴은 다소 뾰로통했지만, 주눅 든 기색은 없었다.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녀가 입을 열자 그는 즉각적 으로 반응했다.
“내가 무조건 잘못했으니까 집 나간다는 소리 하지 마라.”
“그 얘기 하려던 거 아닌데.”
“다른 건 다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나중에라도 사십구 일이 지나 기전에는… 그게 저한테는 진짜 중요한…”
그러자 이번에는 국왕이 욱,하고 말았다.
“너,내가 다신 그 얘기 하지 말라고 했어,안 했어!”
“………”
“지금 나한테 복수하는 건가?”
“아닌데.”
“이런 식으로 화내는 법이 어딨어?”
“화 안 났는데.”
“났잖아! 내가! ……아무튼 미안하다고 했잖아.”
시종장과 데보라는 시선을 교환 했다.
왕후가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국왕은 몹시 울컥한 얼굴이었고, 두 사람은 또 엄청나게 티격태격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손을 잡은 채 싸우고 있었다.
결국 이번에는 시종장과 기 센 데보라마저 슬그머니 서재를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