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111)
마음이 이끄는 대로-111화(111/134)
#16장. 마음이 이끄는 대로
#111.
한밤중에 눈을 뜬 국왕과 이재는 창가로 다가섰다.
이재는 뭔가를 보고 있었고,로더릭은 그 뭔가를 느끼고 있었다.
안광을 빛내며 어둠 속을 응시하던 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옵니다.”
국왕은 그대로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었다.
방문을 반쯤 연 국왕은 복도에 늘어선 사람들을 바라 보았다.
“시종장. 지금 바로 성안에 불을 피워라.”
검은 물처럼 밀려오고 있는 귀 기에 최대한 저항하는 것이다.
성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역할 분담을 모두 끝마친 후였다.
시종들은 건물 밖에 검불을 모아 놓고 불을 피웠고,시녀들은 방마다 촛불을 켰다.
어스름한 달빛에 휩싸여 있던 성은 순식간에 빛 한가운데에 놓인 것처럼 환해졌다.
“1기사단은 지금 바로 성 주변과 수도를 수색한다.”
“예,폐하.”
“왕제 일행이 아니더라도 수상해 보이면 일단 다 잡아 와.”
“알겠습니다.”
예닐곱 명씩 무리를 지은 기사 들은 성 밖을 수색하기 위해 흩어졌다.
국왕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이재는 몹시 심각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왼손으로는 염주알을 굴리고 오른손을 반쯤 들어 올리고 있었는데, 왕은 그 손끝에서 뭔가가 맴도는 게 느껴졌다.
로더릭은 조각상들을 창가로 옮겨 놓으며 물었다.
‘왜. 또 뭐 어떻게 해 줘.”
“………”
“응?”
이재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도 나름 최선의 준비를 다했는데,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결계를 두드리고,또 찢으려 들었던 악귀들은 언제부턴가 주변만을 맴돈다. 왕의 기운이 예전과 확연하게 달라져서일 것이다.
악귀는 저쪽에서 왕을 목표로 살을 날리니 성으로 몰려드는 것 인데, 정작 그 왕 때문에 결계 근처에도 못 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왕에게 몇 보만 물러나 있어 달 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재는 저게 한꺼번에 덮쳐 오면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이재. 대답 좀 해라.”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고심하던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역시 쏴 버려야겠어요.”
“……뭐?”
왕은 뭘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지만,이재는 성직자 처럼 경건한 표정으로 답했다.
“하나씩
때려잡아야겠다고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질 않아요.”
이재는 방 한구석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활과 화살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창가에 걸터앉아 가장 약 해 보이는 원귀를 향해 화살 끝을 겨누었다.
연이어 세 발의 화살을 쏜 이재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쪽저쪽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밖으 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공들여 친 결계가 있으니 가장 안전한 곳은 방 안이었지만,시야가 너무 제한적이었다.
그녀의 의도를 이해한 로더릭은 일단 제지했다.
“잠깐 있어 봐. 기다려.”
로더릭은 한 손으로 창틀을 집 더니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고 이재의 허리를 붙잡아 안전하게 내 려 주었다.
땅바닥에 발을 디딘 이재는 곧 바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도 수십의 원귀들이 허공에 떠서 왕과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하 나같이 귀기 어린 눈동자였다.
한동안 말이 없던 이재는 국왕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슬 그머니 왕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폐하.”
“어? 왜.”
“저 두고 어디 가시면 안 돼요? 급한 일 있으면 나중에 하기로 해요.”
“……내가 가긴 어딜 가. 왜 또 말을 그렇게 하는데.”
“그건 아는데요. 제가 지금 간이 좀 쪼그라들 것…… 네,뭐, 저도 그냥 해 본 소리였네요.”
이재는 지금 원귀들을 실컷 자극해 놓고 참호 밖으로 뛰쳐나온 거나 다름없었다.
왕이 없으면 원한을 산 그녀도 위험했다.
인간부적의 역할은 어느새 그렇게 뒤 바뀌어 있었다.
이재는 국왕을 방패 삼아,또 미끼 삼아 열심히 화살을 쏘았다.
화살통에 남은 화살이 줄어감에 따라 원귀의 숫자도 하나둘씩 줄어 간다.
하지만 이재는 점점 한 가지 번뇌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이쯤 되면 상대도 충분히 눈치 챘을 것이다.
왕 주변에 누군가 있다는걸.
혹은 왕가의 힘이 깨어 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살을 날리던 게 누차 실패로 돌아갔으니,이 정도 악귀로는 왕을 해하기 어렵다는 걸 알 텐데.
‘대체 어떻게 할 속셈인 걸까. 계속 끌려가기만 하는 싸움은 이제 그만해야 하는데.’
이재는 수심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쉬지 않고 화살을 활시위에 걸었다.
시종들과 시녀들은 어느새 뒤에 모여들어 이재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그들의 눈에는 이재가 허공을 향해 열심히 화살을 날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원귀를 관 통한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고,그 대로 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오로지 왕만이 스러져 가는 어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지켜보던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재가 날린 화살이 허공에서 뚝, 하고 부러졌던 것이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그녀의 눈도 날카로워졌다.
이재는 입술을 깨물고,다시 한 번 화살을 걸었다.
그녀는 아까보 다 더 많은 기를 쏟아부으며 활 시위를 놓았으나 사람들의 눈에 는 더욱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화살이 그대로 수직 낙하하고 있었다.
마치 견고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이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악귀 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러자 악귀의 윤곽이 조금 더 생생하게 영안에 맺혔다.
이재는 순간,몸서리를 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요사하게 웃고 있는 악귀의 형상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예전에 국왕의 목을 조르던 악귀처럼 온몸에 굵고 검은 털이 가득했다.
그걸 멸하느라 피를 한 바가지는 토했었던 이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화살촉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쿡, 찔렀다.
로더릭은 손목을 황급히 아래로 끌어 내리다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너…… 너, 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송골송골 올라오던 핏방울은 이 미 손바닥을 타고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재의 표정은 초 연하기만 했다.
“폐하,이게 효과가 좋아요.”
저런 지독한 악귀는 짐승 피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아니,그럼 내 걸로 하면 되잖아. 나 있잖아.”
이성의 끈을 놓친 로더릭은 한 발 늦게 자신의 손을 그으려고 내밀었으나,이재는 화살을 얼른 뒤로 빼 버렸다.
“본인 피여야 해요. 제가 전에 얘기했잖아요.”
“저주는 저주의 시전자를 찾아야 한다고. 주술은 원래 거는 사 람이 감당하는 거예요. 실패한 책임도 건 사람이 지는 거고.”
반은 맞는 말이었지만,반은 또 거짓말이었다.
꼭 본인의 피여야 한다면,짐승 피를 쓸 수도 없어야 하는 거였다.
하지만 이재는 이것만큼은 솔직 하게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폐하, 저도 당신이 다치는 꼴은 못 보겠어요. 그건 당신만 그런 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진짜 깊게 안 찔렀어요. 수놓다가 바늘에 찔린 것 같네요.”
“……너,좀 있다 보자. 나중에 얘기해.”
로더릭은 이를 악물었다.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이재는 웃음을 설핏 내비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새어 나온 미소였다.
“죄송한데 전 폐하가 그렇게 말 하는 거 이제 하나도 안 무서워요.”
그녀는 화살을 걸고 다시 밤하 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악귀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진언을 옮조렸다.
‘중석몰촉.’
‘사령이여. 인간이 온 힘을 다 하여 쏘는 화살은 바위를 꿰뚫는다’
그러자 조소하는 새카만 얼굴이 보였다.
이재는 저 얼굴이 의미하 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을 아주 쉽게 무너뜨리는 악의. 너 같은 게. 네까짓 게. 평생 엎드리고 무릎이나 꿇으면서 살아온 게.
이재는 흔들리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활시위를 놓기 전 그녀는 국왕 을 을려다보았다.
그리고 둥 뒤를 잠시 바라보았다.
왕이 늘 옆에 있고,다른 사람 들도 함께해 주고 있다.
신기하게 도 지난번만큼 무섭지는 않다. 외롭지도 않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해보자. 이 화살이 너를 꿰뚫을 수 있는지,없는지.’
입술을 꽉 깨문 그녀는 팽팽하 게 당긴 활시위를 손에서 놓았다.
화살은 잠시 허공에 멈춘 듯했다. 하지만 막혀 있던 벽을 뚫듯이 부단히 앞으로 나아갔다.
기를 실은 화살이 결국 악귀의 이마를 꿰뚫자, 이재는 바닥에 활을 툭,내려놓았다.
“됐어. 폐하, 됐어요.”
국왕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미 뒤를 돌아보며 사람들을 재촉 하는 중이었다.
“붕대 빨리 안 가져오고 대체 뭐 하는 건가?!”
“폐,폐하,이미 가지러 갔습니다. 잠시만…… 저,저기 옵니다.”
로더릭은 시종 하나가 가져온 붕대를 뺏어 들어 그녀의 손을 감았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이재는 계속 허공을 보고 있었다.
남은 원귀는 넷이었다.
충분히 해볼 수 있는 숫자였다.
이재는 검불 더미를 태우고 있 는 불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누가 불 좀 붙여서 갖다줄 수 있을까.”
시종들을 제치고 나뭇가지에 불을 붙인 건 데보라였다.
이재는 눈인사를 하고는 데보라 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몇 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남은 원귀들이 다가오지 못하니 이번엔 그녀 쪽에서 가는 것이다.
이재는 품 안에서 꺼낸 부적 뭉치를 태우며,오늘 임했던 전투의 마지막 주문을 옮었다.
그건 헤일리의 소망과 그녀를 기리는 이재의 마음이 담겨 있는 주문이었다.
“인정승천. 인간은 운명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언젠간…… 하늘을 이길 수 있다.”
펼쳐진 밤하늘이 깨끗했다.
지금까지 치러 낸 것 중에는 가장 완벽한 방어전이었고, 꽤 성공적인 격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