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117)
마음이 이끄는 대로-117화(117/134)
#117.
함의 정령과 제법 긴 인사를 나눈 이재는 곧장 짐을 챙겨 들고 문을 열었다. 국왕은 새벽이 밝아 오기도 전에 방을 나선 차였다.
영토 안팎에서 병사들이 함께 움직이는 일이다 보니,왕도 지시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후궁을 빠져나가기 전, 국왕은 보초를 서던 기사들에게 다소 이상한 말을 흘렸다.
잊지 말고 누가 왕후 짐 좀 들어 주라고.
너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기사들은 오히려 유난한 지시가 아닌가 생각했다.
국왕은 여 느 때와 같은 얼굴이었으나,시기 가 이렇다 보니 예민해진 게 아 닌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작다란 몸집의 왕후가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기 사들은 모두 국왕의 말뜻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짊어지고 있는 게 과장을 살짝 보태면,보급 부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왕후 폐하,대체 이건 다 뭡니 까.”
이재는 픽,웃었다.
그렇게 이상한가? 이런 질문을 도대체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르겠네,하며.
“내 무기야. 고생스럽겠지만 부탁 좀 할게.”
기사 두엇은 얼떨떨해하며 짐들을 받아 들었고,이재는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왕후궁을 나선 그녀는 국왕과 병사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향하 려 했다.
그러다 중도에 멈춰 서 서 호숫가 쪽을 바라보았다.
소년 왕에게도 인사를 하고 갈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재는 꽤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못 본 척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안 그러면 굳게 다잡은 마음이 순식간에 약해지고, 미련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 이다.
하지만 이재가 모든 번민을 내 려놓았을 때, 소년왕은 도리어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재는 그를 뻔히 바라보다가 고개만 살짝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다시금 국왕과 병사들을 향해 가고자 했다.
하지만 소년왕은 그때부터 말 한 마디 걸지 않고 뒤에서 따라 왔다.
이재는 결국 사람들을 잠시 물리고,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왜 따라오시는 건데요?”
다소 따지는 것 같기도 한 어조였다.
그런데 소년왕은 원래 이재가 가장 공손하면서도,가장 뾰족하게 굴 수 있는 존재였다.
그는 이재가 이렇게 말하든 저렇게 말하든,애원하든 비난하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래 많은 것을 가졌고 경지에 도달한 이들은 남의 말에 일희일비하는 법도,흔들리는 법도 없었다.
그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구경 간다.
“……계속 따라오시려고요?”
-어. 싫어? 근데 내가 내 갈 길을 가는데, 네 의견은 별로 필요하지 않아.
옳은 말이긴 했지만,이재는 그 런 그를 몹시 의심스럽게 바라보 았다.
“이건 정말 아무 기대 없이 여쭤보는 건데요. 왜냐하면 저도 오래전에 마음 정리가 끝났거든요.”
“혹시 도와주실 생각으로 따라 오시는 건……”
“예,그럴 리가 없죠.”
이재는 본인이 말을 꺼내고,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스로 부정 했다.
소년왕의 한쪽 입꼬리가 안 좋은 느낌으로 올라가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짧지 않은 시간 그를 마주했던 소회를 내뱉었다.
“저도 살면서 많은 귀신 군상을 봐 왔지만요. 당신이 좀 이상한 귀신인 건 사실이에요.”
-뭐가.
“이렇게 따라오시면 말이에요. 제가 아무리 마음을 정리했어도 또 쓸데없는 생각이 고개를 드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이건 비단 제 평상심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봐요.”
소년왕은 피식거렸다.
-가재야. 내가 안 해 주는 게 아니라,너한테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계속 말해 왔잖아.
늘 곁에서 지켜보지만 필요할 때 대답을 주지 않는 존재.
때로는 원망스럽지만 의지하게 되는 알궂은 존재.
그는 사실 이재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러니 겨우 스물다섯 해를 산 그녀가 오백 년간 인세를 지켜본 수호귀의 의중을 꿰뚫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재는 언제부턴가 어렴풋이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헤일리의 편지를 발견한 이 후부터였을 것이다.
소년왕은 종종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위험한 방법으로 천기를 알려고 들지 말라고. 그 벌은 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고.
그는 이재가 너무 이른 시점에 천기를 알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헤일리 가 간신히 열어 놓은 실낱같은 가능성이 날아갈 수 있으니까.
국왕은 결국 원귀가 본인을 점령할 수 없을 만큼 강건한 기운을 회복했다. 국왕과 이재는 누구 보다 서로의 존재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재가 천기에 함부로 손을 대서 잘못됐더라면 어땠을까.
결국 왕도 머지않아 급사했을 것이다.
둥고자비.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 모든 일에는 때와 순서란 게 있는 법이었다.
헤일리의 숙원을 고스란히 넘겨 받은 이재는 너무 일찍 죽어서는 안 됐던 거다.
어쨌든 소년왕의 존재가 싫지 않았던 이재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걸었다.
그리고 그녀가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국왕은 사람들에게 세세한 부분을 하나하나 지시하고 있었다.
“폐하.”
“응,왔어?”
이재는 국왕 쪽으로 걸어갔고, 그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도 그녀를 다정히 맞았다.
왕은 자연스럽게 이재를 품 안에 넣으며 동그란 뒤통수를 두어 번 쓸었다. 왠지 이 장소에서 이래선 안 될 것 같았던 그녀는 꼼지락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빠져나 왔다.
그리고 그 순간,이재는 조금 생소해 보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늘 자신 주변에 있어야 할 시녀장이 어디론가 사뿐사뿐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녀장의 오랜 동료이자 경쟁자인 시종장이었다.
데보라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야문 손놀림으로 시종장의 말고삐에 묶었다. 시종장은 몹시 당황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이걸 왜 나한테……?”
“절대 그쪽이 예뻐서 주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진 마.”
“………”
“어디 다치진 말라고.”
너 없으면 일하는 게 심심하니 까 멀쩡히 살아 돌아오라는 뜻이야, 그냥 오래 같이 일한 의리라고 덧붙인 데보라는 끝까지 고고한 표정이었다.
굳이 달라고 한 적도 없었던 시종장만 머쓱해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몰래 힐끔거리던 이재는 좀 놀랍다는 눈빛을 했다.
사실은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결국 자신이 본 게 맞는지 확인차 국왕에게 속삭였다.
“폐하,제가 지금 뭘 본 걸까요.”
“부인,저런 건 그냥 못 본 척 해 주는 게 예의야.”
“네,그 정도는 저도 아는데요. 사실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나 봐요.”
“그걸 설마 지금 안 건가? 저 둘은 저러고 노는 재미로 일하는 거야.”
국왕과 이재가 목소리를 낮추며 계속 속삭일 때였다.
데보라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시녀장이 이쪽으로 오네. 너한테 오지 싶은데.”
국왕도 이재도 의아한 기색이었다.
시녀장이 또 품 안을 뒤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보라는 이번에도 고운 색깔의 손수건을 한 장 꺼냈다.
그러고는 고개를 한 번 조아리더니, 이재가 들고 있는 투박한 나무 활을 향 해 손을 뻗었다.
손수건을 매듭짓는 시녀장의 어조는 시종장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몹시 정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왕후 폐하, 꼭 무탈하게 돌아 오십시오.”
“………”
“저는 언제나 왕후 폐하의 안위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답니다. 제 기원도 왕후 폐하를 지키는 데 도옴이 될 수 있는 거지요? 그런 거라면 정말 좋겠습니다.”
이재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언젠가 이재가 사람들 앞에서 국왕에게 건넸던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낼 당시,그녀는 내심 체념하고 있었다.
확신과 믿음은 늘 부족했다.
아마 너 무 오랜 시간 혼자만의 전쟁터에서 외로이 떨어 와서일 것이다.
강이재는 더 이상은 혼자가 아 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 도 가끔은 마음이 아렸다.
받기 힘드리라 단정 지었던 만큼 이 기원이 너무 귀중했고,살면서 해왔던 무수한 오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헤일리의 몸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지레짐작했었다.
이번 생도 어김없이 박복한 인생인 거라고.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랬던 걸까.
자기 자신,그리고 해묵은 과거와 화해하지 못했을 때 생겨나는 무수한 오해들.
이재는 언제나 숙연하고 겸허하 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오해로 내 인생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고.
“응,데보라.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야.”
더는 뭐라고 말하기 어려웠던 그녀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그 표정에 유독 민감한 로더릭은 낮게 혀를 차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시녀장. 우리 왕후를 이런 식으로 울려 버리면,달래야 할 의무가 있는 난 어떡하나.”
“……왜 또 사람을 이상하게 몰아가세요. 저는 웃고 있는데. 그리고 이런 데 무슨 의무가 다 있어.”
이재가 핀잔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로더릭은 그녀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그녀의 입꼬리는 정말로 조금씩 올라가기 시 작했다.
다시 한번 고개를 높이 들고, 모여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본다. 많은 이들의 벼려진 눈빛이 보인다.
이재 또한 시선을 조금 더 또렷이 했다.
사람들 틈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3기사단인 로렌스가 있었고,놀랍지만 던컨 공작의 모습 또한 보였다.
저건 분명 치열한 줄타기의 결과일 테지.
하지만 이재만큼은 다른 사실을 엿볼 수 있었다.
헤일리가 보았던 그림 속 사람들. 그들이 지금 모두 이 자리에 모여 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어떤 식으로 완성될까.
한동안 사람들을 응시하던 그녀는 로더릭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우리 이제 그만 가요.”
내일. 그리고 미래.
누군가에게는 한 치 앞도 보이 지 않아 칠흑 같았지만,어떤 이에게는 그래서 희망적일 수 있었다던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