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119)
마음이 이끄는 대로-119화(119/134)
#119.
그녀는 어느 때보다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하고자 했다.
저 정도 힘을 쏟았다면,그들은 서부 국경에는 손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 당연하게도 그들 은 이쪽에 모든 걸 건 것이다.
재건군의 상황은 어쩌면 궤멸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재는 수단 방법을 가 리지 않고 저 귀문을 파괴할 작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인세로 뛰 쳐나오는 악귀를 모두 막을 수는 없겠지만,국왕의 기운은 그 정도는 충분히 버텨 낼 수 있었다.
이재가 귀문을 닫는 동안,국왕을 위시한 기사들이 일리아스와 왕제를 찾아내면 이 싸음은 완전히 끝난다.
그녀가 국왕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의논하려 할 때였다.
고택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제 발로 걸어 나왔다.
전부 다 해도 수십에 불과한 인원이었다.
그들의 중심에 서 있는 건 다음번엔 피하지 않겠다던 왕제였다.
그는 여전히 학구적이고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재는 그의 상에서 예 전보다 훨씬 확고한 신념을 느꼈다.
국왕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드거.”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상대가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 자, 국왕과 기사들은 이재를 가리고 섰다.
왕제는 그걸 보며 뭔가 를 알고 있다는 둣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온유한 목소리가 흘러나 왔다.
“왕후 폐하께 멜런의 피가 흐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이미 갖고 있었습니다.”
“………”
“저도 이 모든 정황을 알게 된 거야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형님이 국혼 이후 어딘가 달라지셨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
“물론 처음에는 블레이크 왕가의 힘이 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둣합니다.”
이재는 국왕의 뒤에 서서 왕제 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녀는 빈틈없이 자신을 가리고 선 사람들 속에서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 그리고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믿고 있는 게 언제나 정답은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저는 멜런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헤일리 던컨도 아니고요. 저는 그냥 강이재일 뿐이에요.
한 톨의 먼지처럼 미약한 존재.
당신들의 역사와 계획에는 없었 던 아주 작은 불확실성.
“하지만 형님.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힘의 균형은 이미 무너졌다고 말입니다. 저도 오랜 고민 끝에 확실한 곳에 선겁니다.”
“………….”
“형님이 그만 포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형님도, 왕실 일원 중 어느 누구도 잃고 싶지 않습니다.”
국왕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그 시간이 너무나 길어졌기에 이재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옷자락을 부여잡고 흔들려고.
안 된다고. 그렇게 긴긴밤을 혼 자서 강건히 버텨 왔는데, 수긍하지 말라고.
당신은 고작 저런 말에 멈춰 서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그녀가 손을 내린 건 국왕에게서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 왔기 때문이다.
“에드거.”
“예,형님.”
“네가 차라리 왕좌가 욕심이 나서 이런 일을 벌인 거라면,나는 사실 그 편이 나았을 뻔했다.”
이재는 순간 조금 울컥한 얼굴 로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의 말에서 너무 인간적인 감정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국왕은 소년왕이 이야기했던 바 를 진작에 이해한 것이다.
왕제가 어떤 탐욕 때문이 아니라, 확고한 신념에 따라 선택을 내렸다는 것 을.
그래서 뜻을 꺾지도 않을 거라는 사실을.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이 그리도 어렵습니까?”
“아,협상. 너무나 좋은 말이지. 국왕도 대의만 있다면,양보도 타협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거든”
“………”
“그런데 에드거. 이런 비굴한 것도 정말 협상인가?”
“………”
“넌 협상을 한 게 아니라, 카이엔을 갈취당하고 있는 거다. 그런 걸 용인하는 왕을 위해 검을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새벽빛이 밝아 오는 가운데,형제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도 더 이상 교차점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벌어진 간극을 한순간에 좁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왕제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길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형님께서도 제 말뜻을 곧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그 순간이었다.
이재는 왕제의 뒤편에서 어떠한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 가 잘 아는 기운,살이었다.
저 무리 사이에 지금 일리아스가 있는 것이다.
왕제가 둥을 지고 돌아서자, 이재는 국왕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국왕은 1기사단장에게 신호를 보냈고,이재도 부적을 손에 쥐고 넓은 범위의 진언을 옮기 시작했다.
귀문은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았으나,선두에 서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였다.
“사불범정, 사특한 기운은 바른 것을 이길 수 없다. 파사현정,사 악함을 깨부수고 바른 것을……”
그런데 쉴 새 없이 입술을 움 직이는 찰나,이재는 섬뜩한 기운 을 한 가지 더 감지했다.
사방에 얼음벽이 턱, 턱 내리꽂히는 것처럼 싸늘하고도 무거운 공기였다.
깜짝 놀란 그녀는 다급하게 외 쳤다.
“안 돼! 멈춰요! 가지 마세요!”
하지만 너무 순식간이었다.
선두에 섰던 기사들 몇몇은 마치 거대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그사이 왕제의 사람들은 어두운 고택 속으로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바라 보던 이재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방을 온통 둘러싸고 있는 숨 막히는 기운. 이 유리온실 같은 거대한 공간은 일종의 결계였다.
“슈미트도…… 살아 있었어.”
저들의 승부수는 귀문이 아니었다.
카이엔 왕실이 이재를 무기로 갖고 있었던 것처럼,상대는 슈미트의 존재를 계속 숨겨 왔던 것이다.
이재는 왕제의 말을 곱씹었다.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힘의 균형은 이미 무너졌다고 말입니다.’
혹여 던컨 출신의 왕후에게 엘런의 힘이 흐를지라도,아니면 왕 가의 힘이 깨어났을지라도.
자신들은 일리아스와 슈미트를 모두 가지고 있으니 승운은 기울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계의 정중앙에 서 있던 이재는 국왕과 1기사단이 멈춰 있는 지점까지 걸어갔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기도,혹은 큰 충격을 받은 사람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로더릭은 결계의 바로 앞에 서서 무언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바로 눈앞에 이상한 기운이 서려있다는 걸 감지한 것이다.
이재는 아직도 혼란스러웠지만, 우선은 국왕을 뒤로 잡아끌었다.
“폐하,가까이 가지 마세요. 기사들한테도 뒤로 스무 보 정도만 떨어지라고 해 주세요. 저기 중앙 군이 있는 데까지만요.”
“……이게 뭔데?”
이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결계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도 난생처음 보는 형태의 결계였기 때문이다.
그사이 기사들은 바닥에 나뒹굴 고 있는 동료 기사들을 부축했다.
고통스러운 신음성에 그들에게 잠시 눈을 돌린 이재는 괴로운 얼굴을 했다.
육안으로는 외상을 볼 수 없었지만,영안으로는 그들을 덮친 마가 보였기 때문이다.
중간에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아 마도 전부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재는 더욱 깊이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잡귀들이 이 감옥 같은 결계 안팎을 자유로이 오가고 있었다.
이건 그녀가 지금껏 봐 온 결 계의 개념이 아니었다.
이재가 알고 있는 결계란 망자 에게서 인간의 영역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결계는 산 자를 한정된 영역 안에 가두고 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인세에 이런 결계가 존 재하는 거지.
혼란스러워하던 이재는 결계 밖 을 바라보았다.
점점 넓어지고 있는 귀문을 보 니 마음이 초조해진다. 시간은 부족했고,그녀의 머릿속에는 복잡 한 생각의 가지들이 빠른 속도로
뻗어 나갔다.
왕제는 이재가 멜런의 힘을 계 승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다만 진을 해체할 수 있다는 것까 지는 모르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날린 살은 매번 실패했으나,이재는 파 훼 능력을 사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내가 이 결계를 부수기만 하면……’
분명 귀문까지 닫을 수는 없겠지만,폐하와 기사들이 어떻게든 일리아스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페하는 악귀를 떨쳐 낼 수 있으니까.
그럼 우리한테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닐까.
하지만 너무 미약한 가능성이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다섯 가지 힘. 그중 어느 하나도 저들 개 개인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는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귀문이 완전히 열리고,악귀들이 이 안으로 들어 오면 우리는 갇힌 채로 싸우게 된다.
이재는 마음을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페하,뒤로 가세요. 그리고 그 때부터는 제가 신호를 드리기 전엔 움직이시면 안 돼요. 아셨죠?”
“………”
“대답해 주세요.”
“이재. 이게 뭔지부터 설명해라.”
그녀는 속으로는 조금 멈칫했지만, 아무렇지 않은것처럼 가장하며 말했다.
“폐하,슈미트가 살아 있어요.”
“………”
“그리고 이건…… 제가 선물로 드렸던 조각상 같은 거예요. 화살처럼 음직이는 게 아니라, 이 자리에 고정되어 있어요. 폐하가 여기 있다고 해서 멀어지거나 흩어지는 게 아니에요.”
말장난 같지만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재는 작심을 한 사람처럼 거짓말을 줄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치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적당한 진실을 섞어서.
“제가 지금부터 이걸 해체할 거 예요. 사실 제가 제일 잘하는 분야예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재는 부적 이외의 진을 해체해 본 경험이 드물었고, 파훼는 그녀가 가장 소질 없는 분야였다.
이건 특수한 기운으로 형성된 결계였다.
하지만 부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여기서 그녀뿐이었다.
“폐하처럼 강한 기운을 가진 사 람이 옆에 있으면,결계가 꼬여요. 그럼 저도 그땐 풀 수 없을 거예요.”
이재는 국왕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며 침착하게 덧붙였다.
“폐하,제 말 잘 들어주세요.”
“………”
“저기 저택 문 바로 앞에 있는 게 귀문이에요. 일종의 통로 같은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근처에도 가면 안 되지만,폐하는 가까이 가시면 분명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응. 지금도 느껴진다.”
“제가 이 결계를 찢고 나면,그 다음엔 바로 귀문을 닫을 건데요. 솔직히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폐하가 되도록 그 전에 일리아스를 잡아 주세요.”
“………”
“저주는 시전자가 죽거나 포기 해도 끝나니까요.”
말은 마친 그녀는 곧바로 결계 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나 국왕은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심 초조해하던 이재가 옆을 힐 끔 바라보았을 때,그의 푸른 눈동자는 그녀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이재는 남편의 저 눈빛이 의미 하는 바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종종 보았던 표정이기 때문이다.
저건 그가 거짓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고 싶을 때 나오는 예리한 눈이었다.
“빨리요. 통로가 커지고 있어 요. 그럼 제가 할 일이 더 많아지 잖아요.”
이재가 재촉하자, 국왕은 고개 를 짧게 끄덕였다.
여전히 석연치 않다는 기색이었으나 제이드는 금세 왕의 뒤에 따라붙었다.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재는 다시 결계에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일단 두어 걸음 물러나서 화살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화 살은 결계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맥없이 뚝,부러지고 말았다.
손 바닥을 찔러 피를 내보았으나,결과는 같았다.
여기인가? 아닌가. 저기인가?
대체 어디에 기를 쏟아야 하지.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결계는 난해하기만 했다.
확신은 부족했지만,계속 시도는 해 보아야 했다. 이 지점을 끊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그녀는 손끝에 기를 모았다.
그리고 그때,그녀의 옆에는 익숙한 기운이 찾아들었다.
이 결계를 누구보다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망자 중 하나,소년귀였다.
이재는 신경 쓰지 않고,결계에 손을 대려고 했다.
이번만큼은 그가 하려는 말을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이재.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으나,소년왕의 입에서는 무서운 경고가 흘러나왔다.
-너,그 결계 건드리면 이번엔 진짜 죽는다.
이재는 반쯤 뻗었던 손을 슬그 머니 내렸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절대자를 닮은 존재에게 물었다.
“당신은…… 제가 이렇게 죽을 거라는 걸 정말로 몰랐다고 생각 하세요?”